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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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원은 660년 이전에 대구에서 유학서로 사용된 것으로 여겨지는 고문헌이다. 흉노, 오환, 선비, 부여, 삼한, 고구려, 신라, 백제, 숙신, 왜국, 남만, 서남이, 양월, 서강, 서역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부분 유실되어 권수에 대한 여러 설이 존재한다. 일본에서는 1917년 다자이후 텐만구 보물 조사 때 재발견되었으며, 현존하는 사본은 1954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1974년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본을 출간했고, 2019년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에서 역주본을 출간했다.
《한원》은 당나라 때 장초금(張楚金)이 지은 책으로,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 창작 연습을 위한 교재로 추정된다. 일본 학자 유아사 유키히코(湯淺幸孫)는 장초금이 자신의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보았다.[3] 장초금은 660년 꿈에 공자를 만나고 영감을 받아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4]
2. 성립 배경 및 저자
《한원》은 4자씩 8자가 대구를 이루는 정문(正文)과 그 출전을 밝힌 협주(夾注)로 구성되어 있다. 책에는 장초금이 짓고 옹공예(雍公叡)가 주석을 달았다고 되어 있으나, 주석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3][5][6]
《한원》의 전체 권수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엇갈린다. 나이토 고난(内藤湖南)은 《일본국현재서목록》(日本国見在書目録)의 기록을 근거로 30권이 정확하다고 주장한다.[6]
2. 1. 성립 배경
일본의 사학자 유아사 유키히코(湯淺幸孫)는 《한원》이 아동 대상의 대구(對句) 연습용 교재이며, 저자 장초금이 자신의 일족 아이들을 위한 홈스쿨링용으로 이 책을 작성하였다고 보았다.[3] 장초금의 자서에 따르면 당 고종 현경 5년(660년) 무렵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해 3월 12일 계축에 꿈에서 공자를 만나 춘추를 지은 대의와 그의 생사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깨어난 뒤 그 감흥으로 《한원》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한다.[4]
《한원》의 문장은 4자씩 8자가 대구를 이루어 16자가 1운으로 구성되는 정문(正文)과, 대구 뒤에 전거를 제시하는 협주(주기)로 구성되어 있다. 《한원》에는 장초금이 찬하고 옹공예가 주석한다고 되어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윤용구는 유아사의 설을 반대하고 장초금에 의해 정문이 편찬된 시기와 거의 비슷하게 주기가 작성되었을 것으로 보면서도, 전해종처럼 특정 인물을 옹공예로 비정하려는 설에는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6]
《한원》의 전체 권수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있다.
문헌 | 권수 |
---|---|
《구당서》(舊唐書) 장도원(張道源) 열전[7] | 30권 |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芸文志) | 7권, 20권 (두 설 병기) |
《숭문총목》(崇文總目) 유서부 | 7권 |
《송사》(宋史) 예문지 | 11권 |
일본의 동양사학자 나이토 고난(内藤湖南)은 30권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한다. 875년~891년에 작성된 《일본국현재서목록》(日本国見在書目録)에는 《한원》이 30권으로 되어 있는데, 이 기록은 《한원》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며, 《신당서》가 편찬되던 시점에서는 이미 《한원》 전질이 흩어져 일부만 남은 상태였음을 보여준다.[6]
2. 2. 저자 및 주석자
일본의 사학자 유아사 유키히코(湯淺幸孫)는 《한원》이 아동 대상의 대구(對句) 연습용 교재로, 저자 장초금이 자신의 일족 아이들을 위한 홈스쿨링용으로 작성하였다고 보았다.[3] 장초금의 자서에 따르면 당 고종 현경 5년(660년) 무렵에 작성되었는데, 그 해 3월 12일 계축에 꿈에서 공자를 만나 춘추를 지은 대의와 그의 생사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깨어난 뒤 그 감흥으로 《한원》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한다.[4]《한원》은 4자씩 8자가 대구를 이루어 16자가 1운으로 구성되는 정문(正文)과, 대구 뒤에 전거를 제시하는 협주(주기)로 구성되어 있다. 주(注)에는 그 출전이 작게 적혀 있다. 《한원》에는 장초금이 짓고(撰) 옹공예가 주석했다(注)고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정문과 주기 모두 장초금이 작성했고 송대에 옹공예가 일부 내용에 간단하고 평이한 내용만을 짧게 보주(補注)하였다는 견해와[3], 장초금보다 한 세대 뒤의 인물인 고예를 옹공예로 보고 주기는 전적으로 그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견해이다.[5] 윤용구는 유아사의 설에는 반대하지만, 장초금이 정문을 편찬한 시기와 거의 비슷하게 주기가 작성되었을 것으로 보면서도, 전해종처럼 특정 인물을 옹공예로 비정하려는 설에는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6]
3. 내용 및 구성
《한원》은 크게 번이부(蕃夷部)와 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번이부는 흉노, 오환, 선비, 부여, 삼한, 고구려, 신라, 백제, 숙신, 왜국, 남만, 서남이, 양월, 서강, 서역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1] 다만, 양월은 말미가 빠져있고, 서강은 전문이 빠져있으며, 서역은 앞부분이 빠져있다.[1]
번이부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 표와 같다.
항목 | 내용 |
---|---|
흉노 | 흉노에 대한 내용 |
오환 | 오환에 대한 내용 |
선비 | 선비에 대한 내용 |
부여 | 부여에 대한 내용 |
삼한 | 삼한에 대한 내용 |
고구려 | 고구려에 대한 내용 |
신라 | 신라에 대한 내용 |
백제 | 백제에 대한 내용 |
숙신 | 숙신에 대한 내용 |
왜국 | 왜국에 대한 내용 |
남만 | 남만에 대한 내용 |
서남이 | 서남이에 대한 내용 |
양월 | 양월에 대한 내용 (말미가 빠짐) |
서강 | 서강에 대한 내용 (전문 빠짐) |
서역 | 서역에 대한 내용 (앞부분 빠짐) |
3. 1. 번이부(蕃夷部) 구성
4. 권수 및 유실, 재발견
《한원》은 당 고종 현경 5년(660년) 무렵 장초금이 저술한 책으로, 아동들의 사륙병려문 창작 연습을 위한 대구(對句) 교재였다. 장초금은 꿈에서 공자를 만나 춘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 감흥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4] 문장은 4자씩 8자가 대구를 이루는 정문(正文)과 전거를 제시하는 협주(주기)로 구성되어 있다. 주(注)에는 출전이 작게 적혀 있으며, 장초금이 정문을 쓰고 옹공예가 주석을 달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문과 주기 모두 장초금이 썼으며 송대에 옹공예가 간단한 주석을 덧붙였다는 견해와,[3] 장초금보다 한 세대 뒤의 인물인 고예를 옹공예로 보고 주기는 전적으로 그가 작성했다는 견해가[5] 대립한다.
4. 1. 권수 논란
《구당서》(舊唐書) 장도원(張道源)[7] 열전에는 30권,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芸文志)에는 7권과 20권이라는 두 가지 설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숭문총목》(崇文總目) 유서부에는 7권, 《송사》(宋史) 예문지에는 11권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의 동양사학자 나이토 고난(内藤湖南)은 30권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주장했다. 875년~891년에 작성된 《일본국현재서목록》(日本国見在書目録)에 《한원》이 30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한원》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나이토 고난은 이를 근거로 《신당서》가 편찬될 당시에는 이미 《한원》 전질이 흩어져 일부만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6]4. 2. 일본에서의 유실과 재발견
일본의 사학자 유아사 유키히코(湯淺幸孫)는 《한원》이 아동 대상의 대구(對句) 연습용 교재로, 저자 장초금이 자신의 일족 아이들을 위한 홈스쿨링용으로 작성하였다고 보았다.[3] 《한원》은 875년~891년에 작성된 《일본국현재서목록》(日本国見在書目録)에 30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한원》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6]9세기 시게노 사다누시(滋野貞主)가 쓴 《비부략》(秘府略)과 헤이안 말기의 《향약초》(香薬抄) 등에서도 《한원》을 인용하고 있다.[6] 그 뒤에는 기록에서 사라졌으나, 1917년 후쿠오카의 다자이후덴만구 소장 보물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구로이타 가쓰미(黒板勝美)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1922년 다자이후 덴만구 소장 사본 《한원》은 나이토 고난의 해설과 함께 일본 교토대학(京都大学)에서 영인 역주본이 출간되었으며,[8] 1954년에는 해당 사본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1977년에는 다자이후덴만구의 제신(祭神)이기도 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 1075주기를 기념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다케우치 리조(竹内理三)에 의해 해석문 ・ 훈독문이 붙은 번역본이 간행되었다.
오자와 탈문이 상당히 많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이제는 실전되어 이름만 남은 사서들인 어환(魚豢)의 《위략》(魏略), 《고려기》(高麗記) 등의 문헌을 다수 인용하고 있는 데다 현존하는 문헌과 대조해 보아도 본문과는 다른 부분이 다수 발견되고 있어 귀중한 사료로 취급된다. 특히 어환의 《위략》은 한국이나 일본 관련 기사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9]
5. 사료적 가치
《한원》은 이제는 실전되어 이름만 남은 어환(魚豢)의 《위략(魏略)》, 《고려기》(高麗記) 등의 문헌을 다수 인용하고 있으며, 현존하는 문헌과 대조해 보아도 본문과는 다른 부분이 다수 발견되고 있어 귀중한 사료로 취급된다.[9] 특히 어환의 《위략》은 한국이나 일본 관련 기사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9]
660년 이전에 대구 연습용 유학서로 쓰였다고 여겨지며, 주석에는 그 출처가 자세하게 실려 있다. 현존하는 제30권은 번이부이며, 흉노, 오환, 선비, 왜국, 서역 등 15개의 소 항목으로 나뉘어 있다. 대부분이 유실되었기 때문에 권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구당서』 장도원(저자의 조상) 전에는 30권, 『신당서』 예문지에는 7권과 20권의 두 가지 설이 함께 실려 있고, 『송사』 예문지에는 11권으로 되어 있으나, 나이토 고난에 의해 30권임이 밝혀졌다.
일본 관계에서는 특히 어환의 『위략』을 많이 인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간행 및 번역
《한원》은 4자씩 8자가 대구를 이루어 16자가 1운으로 구성되는 정문(正文)과, 대구 뒤에는 전거를 제시하는 협주(주기)로 구성되어 있다. 주(注)에는 그 출전이 작게 적혀 있다. 《한원》에는 장초금이 찬하고 옹공예가 주석한다(張楚金撰雍公叡注)고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정문과 주기 모두 장초금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송대에 옹공예가 일부 내용에 간단하고 평이한 내용만을 짧게 보주하였다고 보는 견해와[3], 장초금보다 한 세대 뒤의 인물인 고예를 옹공예로 보고 주기는 전적으로 그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견해가[5] 있다. 다만 윤용구는 유아사의 설을 반대하고 장초금에 의해 정문이 편찬된 시기와 거의 비슷하게 주기가 작성되었을 것으로 보면서도, 전해종처럼 특정 인물을 옹공예로 비정하려는 설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을 비쳤다.[6]
장초금의 자서에 따르면 당 고종 현경 5년(660년) 무렵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해 3월 12일 계축에 꿈에서 공자를 만나 그에게 춘추를 지은 대의와 그의 생사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깨어난 뒤 그 감흥으로 《한원》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적었다.[4] 주석에는 그 출처가 자세하게 실려 있다. 현존하는 제30권은 번이부이며, 흉노, 오환, 선비, 왜국, 서역 등 15개의 소 항목으로 나뉘어 있다.
오자와 탈문이 상당히 많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이제는 실전되어 이름만 남은 사서들인 어환의 《위략》(魏略), 《고려기》(高麗記) 등의 문헌을 다수 인용하고 있는 데다 현존하는 문헌과 대조해 보아도 본문과는 다른 부분이 다수 발견되고 있어 귀중한 사료로 취급된다. 특히 어환의 《위략》은 한국이나 일본 관련 기사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9]
6. 1. 일본
일본의 사학자 유아사 유키히코(湯淺幸孫)는 《한원》이 아동 대상의 대구(對句) 연습용 교재로, 저자 장초금이 자신의 일족 아이들을 위한 홈스쿨링용으로 작성하였다고 지적한다.[3]《구당서》(舊唐書) 장도원(張道源)[7] 열전에는 30권,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芸文志)에는 7권과 20권이라는 두 설이 병기되어 있고, 《숭문총목》(崇文總目) 유서부에는 7권, 《송사》(宋史) 예문지에는 11권으로 되어 있으나, 일본의 동양사학자 나이토 고난(内藤湖南)은 30권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한다. 875년~891년에 작성된 《일본국현재서목록》(日本国見在書目録)에는 《한원》이 30권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한원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며, 《신당서》 편찬 시점에는 이미 《한원》 전질이 흩어져 일부만 남은 상태였음을 보여준다.[6]
《일본국현재서목록》 외에도 9세기 시게노 사다누시(滋野貞主)가 쓴 《비부략》(秘府略)과 헤이안 말기의 《향약초》(香薬抄) 등에서 《한원》을 인용하고 있다.[6] 그 뒤에는 기록에서 사라졌으나, 1917년에 후쿠오카의 다자이후덴만구 소장 보물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구로이타 가쓰미(黒板勝美)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다자이후 덴만구 소장 사본 《한원》은 나이토 고난의 해설로 1922년에 일본 교토대학(京都大学)에서 영인 역주본이 출간되었으며[8](중국에서도 1934년 역주본이 나왔다), 1954년에는 해당 사본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1977년에는 다자이후덴만구의 제신(祭神)이기도 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 1075주기를 기념하는 사업의 일환으로써 다케우치 리조(竹内理三)에 의해 해석문 ・ 훈독문이 붙은 번역본이 간행되었다.
현존하는 사본은 오자와 탈자가 매우 많아 읽기 어렵지만, 현존하지 않는 문헌을 다수 인용하고, 또한 현존하는 문헌이라도 본문이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귀중하다. 일본 관계에서는 특히 어환의 《위략》을 많이 인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2. 한국
1974년 아세아문화사에서 일본 다자이후 덴만구 소장 《한원》 사본에 대한 영인본을 출간하였으며, 2019년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에서 역주본을 출간하였다.[9]참조
[1]
문서
竹内理三による解説
[2]
서적
京都帝国大学文学部景印旧鈔本 第1集
[3]
서적
翰苑校釋
國書刊行會
[4]
논문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5]
서적
魏略에 대한 豫備的 考察
一潮閣
[6]
문서
[7]
문서
[8]
웹사이트
한원권제3
http://dl.ndl.go.jp/[...]
[9]
논문
《한원》 찬자의 삼한전에 대한 서술과 이해
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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