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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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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숙신은 고대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민족으로, 연나라 동북방에 위치했으며 여러 명칭으로 불렸다. 주나라 시대에는 숙신, 전한 시대에는 주신, 후한 시대에는 읍루 등으로 불렸으며, 퉁구스어에서 '예'를 뜻하는 단어와 언어학적 관련이 있다. 숙신은 험준한 산악 지대에 거주하며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였고, 돌로 만든 살촉과 가죽 갑옷, 단궁과 고시를 사용했다. 주 무왕 때 고시와 석노를 바쳤으며, 위나라, 서진, 동진 시대에도 중국에 조공했다. 숙신은 고조선 및 고구려, 발해와 관련된 민족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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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신
개요
다른 이름주신 (肅愼, Sùshèn)
직신 (稷愼, Jìshèn)
숙신 (Translit|ko-Latn|Suksin)
위치만주
관련 민족읍루
말갈
여진
만주족
아이누족
한국인
역사
기원기원전 2000년경
관련 역사주나라
진나라
한나라
위진남북조
수나라
당나라
문화
언어퉁구스어족
고대 한국어
특징활을 잘 쏘고, 담비 가죽을 공물로 바침.
무기돌화살촉
기타돼지를 기르고 동굴에서 삶.

2. 명칭

숙신(肅愼)이라는 명칭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공자가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춘추(春秋)』에서 찾을 수 있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소공(昭公) 9년 조에는 숙신이 연나라(燕)·호(毫)와 함께 춘추 전국 시대 동북방에 위치한 세력으로 언급된다. 또한 『사기(史記)』「오제본기(五帝本紀)」에는 식신(息愼)이라는 명칭이 등장하는데, 후한의 학자 정현(鄭玄)은 이를 두고 식신과 숙신이 같은 동북방의 이민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석하였다.

이러한 초기 기록들을 통해 숙신 또는 식신은 특정 단일 부족의 명칭이라기보다는, 연나라의 동북쪽 경계 너머 척박하고 추운 환경에 거주하던 여러 부족을 통칭하는 용어였을 가능성이 있다. 명칭 자체도 그들이 살던 지역의 방위인 '동(東)' 또는 '동북(東北)'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주대(周代)에는 이처럼 동북방의 이민족을 포괄하는 다소 막연한 개념으로 숙신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흐르면서 숙신 계통의 민족은 읍루(挹婁), 여진(女眞)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시대별 명칭 참고)

중국 문헌에서 숙신은 전통적으로 활과 화살 제작에 능한 민족으로 묘사된다. 특히 중국 최고(最古)의 문헌 중 하나인 『서경(書經)』을 비롯하여 여러 기록에서, 중국에 성스러운 군주가 나타나면 그 덕에 이끌려 멀리서 찾아와 공물(楛矢石砮 등)을 바치는 상징적인 존재로 그려지기도 한다.[10]국어(國語)』 등에는 공자가 숙신의 화살에 대해 설명하는 일화도 전해진다.

전한대(前漢代) 이후에는 부여의 성장 등으로 인해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류 기록이 줄어들면서 '숙신'이라는 명칭의 사용 빈도도 낮아진다. 대신 읍루(挹婁)라는 명칭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숙신의 후예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숙신'이라는 명칭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며, 고전적이고 유서 깊은 표현으로 여겨져 후대의 문헌(예: 사마상여의 「자허부(子虛賦)」, 당대(唐代) 편찬 『진서(晉書)』 등)에서도 사용되었다. 『진서』의 숙신씨(肅慎氏) 조는 실질적으로 읍루에 대한 기록이지만, 고전적인 명칭인 '숙신'을 표제로 사용한 경우이다.

2. 1. 시대별 명칭

숙신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공자가 편찬한 『춘추(春秋)』에서 찾을 수 있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소공(昭公) 9년 조에는 肅愼·燕·毫 吾北土也중국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숙신이 연나라(燕)·호(毫)와 함께 춘추 전국 시대의 동북방에 위치했음을 의미한다. 『사기(史記)』「오제본기(五帝本紀)」의 제순조(帝舜條)에도 ‘南撫交阯·北發·西戎·析枝·渠廋·氐·羌·北山戎·發·息肅·東長·鳥夷’라고 언급되며, 후한 정현(鄭玄)은 주(註)에서 息愼 或謂之肅愼 東北夷중국어라 하여 식신(息愼) 또는 숙신(肅愼)은 같은 동북방 민족으로 보았다. 따라서 숙신(肅愼)·식신(息愼)은 연나라(燕)의 동북방 경계에 위치한, 농경이 어려운 척박하고 추운 환경에 사는 부족들을 가리키는 명칭이었으며, 그들이 살던 지역의 방향인 ‘동(東)’ 또는 ‘동북(東北)’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주대(周代)에는 이러한 개념으로 숙신이라 통칭하였다.

주대(周代)의 숙신 이래 역사 기록에 나타난 명칭 변화는 다음과 같다.

시대명칭로마자 표기
주(周)숙신(肅愼)Suk-chin
전한(前漢)주신(朱申)Su-shin
후한(後漢)·삼국시대(三國時代)읍루(挹婁)Dyūr
당(唐)철아적(徹兒赤)Dzur-chi
송(宋)·원(元)주리진(朱里眞)Jur-chin
명(明)여진(女眞)Jur-chin
명(明)여직(女直)Jur-chi
청(淸)노아진(奴兒眞)Nyur-chin



오늘날 퉁구스어의 Sokze(n), Sokcen이나 몽골어의 Juksen은 ‘예(禮)’를 의미하는데, 언어학적으로 이 단어들이 숙신에 대응될 수 있다.[14]진서(晉書)』 열전에도 숙신에 대한 기록이 있으나, 이는 기록한 한족(漢族) 중심의 시각이며 실제 방문 기록이 아니므로 비판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중국 문헌에서 숙신(肅慎)은 활과 화살 제작에 능한 동북방 민족으로 묘사된다. 최초 등장은 순(舜) 임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10], 이후 중국에 성스러운 천자가 나타나면 그 덕에 이끌려 공물을 바치러 오는 존재로 그려진다. 중국의 오래된 기록인 『서경(書經)』에도 숙신에 대한 기술이 있으며, 『국어(國語)』 등 여러 문헌에는 춘추 시대 진(晉)나라에서 공자가 숙신의 활과 화살에 대해 설명하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전한대(前漢代) 이후에는 중간에 부여가 강성해지면서 숙신에 대한 기록이 줄어들고, 대신 부여인들이 부르던 명칭인 읍루(挹婁)가 문헌에 자주 등장하게 된다. 읍루는 숙신의 후예로 여겨졌다. 그러나 숙신이라는 명칭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전한사마상여(司馬相如)가 지은 「자허부(子虛賦)」에는 주(周)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하기에 숙신이 등장하며, 당대(唐代)에 편찬된 『진서(晉書)』에는 사이전(四夷傳) 안에 왜인(倭人) 관련 기록과 함께 숙신씨(肅慎氏) 조가 실려 있다. 『진서』의 경우, 실제로는 읍루를 다루면서도 고전적이고 유서 깊은 '숙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더 격조 높다고 여겨 표제로 삼은 것이다.

2. 2. 어원

숙신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공자가 편찬한 『춘추』에서 찾을 수 있다. 『춘추좌전』 소공 9년 조에는 ‘肅愼·燕·毫 吾北土也’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숙신이 연나라(燕)·호(毫)와 함께 춘추 전국 시대의 동북방에 위치했음을 나타낸다. 『사기』「오제본기(五帝本紀)」의 제순조(帝舜條)에도 ‘北山戎·發·息肅·東長·鳥夷’라는 기록이 있으며, 후한의 학자 정현(鄭玄)은 이에 대해 ‘息愼 或謂之肅愼 東北夷’라고 주석을 달아 식신(息愼)이 곧 숙신(肅愼)이며 동북쪽의 이민족임을 밝혔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숙신(肅愼) 또는 식신(息愼)은 연나라의 동북쪽 경계 너머, 농사짓기 어렵고 척박하며 추운 환경에 살던 부족들을 가리키는 명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명칭 자체도 그들이 살던 지역의 방향인 ‘동(東)’ 또는 ‘동북(東北)’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주대(周代)에는 이처럼 특정 부족을 명확히 지칭하기보다는 동북방의 이민족을 막연하게 숙신이라고 통칭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대의 숙신 이후 역사 기록에 나타나는 관련 명칭들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시대명칭 (한자)발음 추정
주대(周代)숙신(肅愼)Suk-chin
전한대(前漢代)주신(朱申)Su-shin
후한(後漢)·삼국시대(三國時代)읍루(挹婁)Dyūr
당대(唐代)철아적(徹兒赤)Dzur-chi
송대(宋代)·원대(元代)주리진(朱里眞)Jur-chin
명대(明代)여진(女眞)Jur-chin
명대(明代)여직(女直)Jur-chi
청대(淸代)노아진(奴兒眞)Nyur-chin



언어학적으로는 오늘날 퉁구스어의 'Sokze(n)' 또는 'Sokcen', 몽골어의 'Juksen' 등이 '예(禮)'를 의미하는데, 이 단어들이 숙신의 어원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4] 한편, 『진서』 열전에도 숙신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만, 이는 기록자인 한족(漢族) 중심의 시각에서 쓰였고 실제 방문 조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므로 내용을 받아들일 때는 비판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3. 역사

중국 문헌에서 숙신(肅慎)은 활과 화살 만들기에 능한 동북 방면의 이민족으로 묘사된다. 중국 역사 기록상 최초 등장은 순 임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10], 이후 중국에 성스러운 군주가 나타나면 그 덕에 이끌려 조공하러 온다는 상징적인 모습으로 종종 언급되었다. 중국 최고(最古)의 문헌 중 하나인 『서경』에도 숙신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국어』 등 여러 문헌에는 춘추 시대 진나라에서 공자가 숙신의 화살에 대해 설명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전한 시대 이후에는 부여의 성장 등으로 인해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류 기록이 줄어들면서, 숙신이라는 명칭 대신 부여인들이 부르던 읍루(挹婁)라는 이름이 문헌에 더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읍루는 숙신의 후예로 여겨졌다.[15] 그러나 숙신이라는 명칭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며, 후대의 기록, 예를 들어 당나라 때 편찬된 『진서』 사의전(四夷傳)에는 왜인과 함께 숙신씨(肅慎氏) 조가 실려 있기도 하다. 다만 이는 고대의 유서 깊은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실제 내용은 당시의 읍루에 관한 것이다.[15] 숙신의 구체적인 생활상이나 중국 왕조와의 교류 역사는 아래 하위 문단에서 상세히 다룬다.

3. 1. 고대

숙신씨(肅慎氏)는 일명 읍루(挹婁)라고도 불렸다.[15] 중국 기록에 따르면 백두산으로 비정되는 불함산(不咸山) 북쪽에 위치했으며, 부여에서 약 60일 거리에 있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동해)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구만한국(寇漫汗國), 북쪽으로는 약수(아무르강)에 이르렀으며, 영토는 사방 수천 리에 달했다고 한다.[15]

== 생활과 풍습 ==

숙신인들은 깊은 산골짜기에 살았으며 길이 험해 수레나 말이 다니지 못했다. 여름에는 나무 위에 거처를 마련하고, 겨울에는 땅을 파서 만든 움집에서 살았다. 이러한 기록은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수혈 건물 유적과 일치한다.[15] 문자가 없어 말로 약속을 정했고, 부자(父子)가 대대로 군장을 세습했다. 말은 가지고 있었으나 타지 않고 재산으로만 여겼다. 소와 양은 없었지만 돼지를 많이 길러 고기를 먹고 가죽으로 옷을, 털로는 베(布)를 만들었다. 우물이나 부엌 없이 와격(瓦鬲)이라는 토기를 사용해 밥을 지어 먹었다. 식사 시에는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발로 고기를 집어 먹거나, 얼어붙은 고기는 몸으로 녹여 먹었다고 전해진다. 그들의 땅에서는 소금과 철이 나지 않아 나무를 태운 재를 물에 타서 간을 맞추었다.[15]

남녀 모두 머리를 땋았고(편발), 베로 만든 가리개로 몸 앞뒤를 가렸다. 혼인을 할 때는 남자가 여자의 머리에 깃털을 꽂아주고, 여자가 이를 받아들이면 깃털을 집으로 가져간 뒤 예를 갖추어 맞이했다. 부인은 정숙하다는 기록과 함께 여자는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상반된 기록도 존재한다. 사람들은 건강하고 씩씩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병약하거나 늙은 사람은 천하게 여겼다. 장례는 사람이 죽은 당일 들에 매장하는 방식으로 치렀다. 나무로 작은 곽(椁)을 만들고, 돼지를 잡아 그 위에 쌓아 죽은 사람의 양식으로 삼았다. 성격은 거칠고 사나우며, 슬픔이나 애도를 드러내지 않는 것을 숭상하여 부모가 죽어도 남자는 곡하지 않았다. 우는 사람은 용감하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도둑질은 물건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사형에 처했으므로, 물건을 밖에 두어도 훔쳐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15]

== 무기와 기술 ==

숙신은 뛰어난 활과 화살 제작 기술로 유명했다. 주요 무기로는 돌로 만든 화살촉(石砮), 가죽과 뼈로 만든 갑옷, 길이 3척 5촌(약 106cm)의 박달나무 활(檀弓), 길이 1척 수 지(약 30cm 이상)의 싸리나무 화살(楛矢)을 사용했다. 특히 그들 영토의 동북쪽 산에서 나는 돌은 쇠를 자를 만큼 날카로웠는데, 이 돌을 채취하기 전에는 반드시 신에게 기도했다고 한다. 발굴된 석촉과 철촉 역시 매우 날카롭고 피를 빼기 위한 홈이 파여 있는 등, 사서의 기록과 일치하는 모습을 보인다.[15]

== 중국과의 관계 ==

중국 문헌에서 숙신은 순 임금 시대에 처음 등장하는 동북방의 민족으로[10], 활과 화살 제작에 능한 것으로 묘사된다. 중국에 성스러운 군주가 나타나면 그 덕에 이끌려 조공하러 온다는 인식이 있었다. 『서경』, 『국어』 등 여러 고대 문헌에 숙신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정복한 후, 숙신은 고시(楛矢)와 석노(石砮)를 바쳤다.[15] 훗날 공자춘추 시대 진나라에 보관되어 있던 이 화살을 보고 그 유래를 설명하기도 했다. 주나라 성왕 때에는 다시 사신을 보내 조하(朝賀)했으며, 성왕은 영백(榮伯)에게 명하여 숙신과의 관계를 기록한 「회숙신지명(賄肅慎之命)」을 짓게 했다.[15] 강왕 때에도 숙신이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전한 시대 이후 부여가 강성해지면서 숙신과 중국의 직접적인 교류는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문헌에는 숙신 대신 부여인들이 그들을 부르던 명칭인 읍루(挹婁)가 주로 등장하며, 읍루는 숙신의 후예로 여겨졌다. 그러나 숙신이라는 이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사마상여의 「자허부」나 당나라 때 편찬된 『진서』 사의전(四夷傳)에는 왜인과 함께 숙신씨(肅慎氏) 조가 실려 있다. 다만 『진서』의 내용은 실질적으로 읍루에 대한 것이지만, 고전적인 명칭인 숙신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15]

삼국시대 위나라 말기, 실권자였던 사마소(당시 승상, 사후 문왕 추존) 집권기인 경원(景元) 연간(260년~263년) 말에 숙신 사신이 다시 나타나 고시, 석노, 활과 갑옷, 담비 가죽 등을 바쳤다. 이에 위나라 황제 조환은 조서를 내려 하사품을 주었다.[15] 이후 서진 무제 태강(太康) 연간(280년~289년) 초와 동진 원제(재위 317년~322년) 때에도 사신을 보내 석노 등을 바쳤다.[15] 동진 성제(재위 325년~342년) 때는 후조석계룡에게 조공했는데, 길이 멀어 4년 만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때 숙신 사신은 소와 말이 3년간 서남쪽을 향해 잠드는 것을 보고 후조의 위치를 짐작하여 찾아왔다고 답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15]

== 기타 기록 ==

산해경』에는 숙신의 나라가 백민(白民)의 북쪽에 있으며, 웅상(雄常)이라는 나무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晋)나라 곽박(郭璞)의 주석에 따르면, 숙신인들은 평소 옷을 입지 않다가 중국에 성스러운 군주가 즉위하면 이 나무껍질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고 한다. 또한 『산해경』 대황북경(大荒北經)에는 불함산(不咸山)에 숙신씨의 나라가 있다고 언급된다.[15]

3. 2. 고려 ~ 조선 시대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고려 ~ 조선 시대'에 해당하는 숙신 관련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해당 섹션에 작성할 내용이 없습니다.

4. 생활 모습

숙신은 일명 읍루라고도 불렸으며, 불함산 북쪽의 험준한 산악 지대에 거주했다.[15] 이들은 부여에서 약 60일이 걸리는 먼 거리에 위치했으며, 동쪽으로는 큰 바다(동해), 서쪽으로는 구만한국(寇漫汗國), 북쪽으로는 약수에 이르는 넓은 영역에 걸쳐 살았다.[15]

숙신 사회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지위를 물려주는 세습 군장 체제였고, 문자가 없어 말로써 약속을 정했다.[15] 주요 생업은 돼지 사육과 수렵이었으며, 돼지는 고기, 가죽, 털 등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반면 은 기르지 않았고, 은 보유하고 있었으나 타지 않고 재산으로만 여겼다.[15]

이들의 생활 방식은 주변 환경에 적응한 독특한 모습을 보였다. 여름에는 나무 위에 거처를 마련하고 겨울에는 땅속 수혈 건물에서 생활했으며, 지역에서 나지 않는 소금 대신 나무를 태운 재를 활용하기도 했다.[15] 머리를 땋아 내리고 베 조각으로 몸의 앞뒤를 가리는 복식, 남자가 여자 머리에 깃털을 꽂아주는 것으로 시작되는 혼인 풍습, 죽은 이를 당일 들판에 묻고 슬픔을 드러내지 않는 장례 문화, 도둑질을 매우 엄격하게 처벌하는 사회 규범 등이 특징으로 기록되어 있다.[15]

숙신은 석노(石砮)라 불리는 돌 화살촉과 박달나무 활(단궁, 檀弓), 고시(楛矢)라는 싸리나무 화살 등 뛰어난 무기로도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무기들은 중국주나라, 위나라, 진나라 등 여러 왕조에 조공품으로 바쳐지기도 했다.[15]

4. 1. 거주

숙신(肅慎)은 일명 읍루(挹婁)라고도 불리며, 불함산 북쪽에 위치했다. 부여에서는 약 60일이 걸리는 먼 거리였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동해)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구만한국(寇漫汗國)과 접했으며, 북쪽으로는 약수에 이르렀다. 그 영역은 사방 수천 리에 달했다.[15]산해경』 대황북경(大荒北經)에도 불함산에 숙신씨의 나라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람들은 주로 깊은 산골짜기에 살았으며, 길이 험준하여 수레나 말이 다니기 어려웠다. 여름에는 나무 위에 거처를 마련해 살고, 겨울에는 땅을 파서 만든 수혈 건물에서 생활했다. 이는 추위를 피하고 온기를 보존하기 위한 방식으로, 실제 발굴 조사를 통해서도 이러한 형태의 주거지가 확인되었다.[15]

숙신 사회는 아들과 아버지가 대대로 군장 자리를 이어받는 세습제였다. 문자가 없어 말로 약속을 정했다. 말은 보유하고 있었지만 타지 않고 재산으로만 여겼다. 소나 양은 없었으나 돼지를 많이 길러 고기를 먹고, 가죽으로는 옷을 만들었으며, 털을 엮어 베(布)를 만들었다. 낙상(雒常)이라는 나무가 있어, 중국에 새로운 성군(聖君)이 즉위하면 그 나무껍질이 옷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자란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15] 『산해경』 해외서경(海外西經)에는 숙신이 백민(白民)의 북쪽에 있으며 웅상(雄常)이라는 나무가 있다고 언급되는데, 진(晋)나라 곽박(郭璞)은 이 나무가 낙상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우물이나 부엌 시설은 따로 없었으며, '와격(瓦鬲)'이라는 토기에 4~5되 정도의 음식을 담아 먹었다. 앉을 때는 두 다리를 앞으로 뻗고 앉았으며, 발로 고기를 집어 먹거나 얼어붙은 고기는 몸으로 녹여 먹었다. 소금과 철이 생산되지 않아 나무를 태운 재에 물을 부어 만든 즙을 조미료로 사용했다. 사람들은 모두 머리를 땋아 내리는 편발(編髮)을 했고, 베로 지름 한 자 남짓한 가리개를 만들어 몸 앞뒤를 가렸다.[15]

혼인할 때는 남자가 여자의 머리에 깃털을 꽂아주었고, 여자가 이를 받아들이면 깃털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간 뒤 예를 갖추어 정식으로 맞이했다. 부인은 정숙한 편이었다. 사회적으로는 건강하고 씩씩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늙거나 병약한 사람은 천하게 여겼다. 사람이 죽으면 당일 바로 들판에 매장했는데, 나무로 작은 곽(椁)을 만들고 그 위에 잡은 돼지를 쌓아 죽은 자의 양식으로 삼았다. 성격은 거칠고 사나우며, 슬픔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숭상하여 부모가 죽어도 남자는 곡을 하지 않았다. 곡하는 것은 씩씩하지 못한 행동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도둑질은 물건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사형에 처했으므로, 물건을 들에 놓아두어도 훔쳐가는 일이 없었다.[15]

주요 무기로는 돌로 만든 화살촉인 석노(石砮), 가죽과 뼈로 만든 갑옷, 박달나무로 만든 3척 5촌 길이의 단궁(檀弓), 그리고 고시(楛矢)라는 한 자 남짓한 싸리나무 화살을 사용했다. 특히 나라 동북쪽 산에서 나는 돌은 쇠를 자를 만큼 날카로워 무기 제작에 쓰였는데, 이를 채취하기 전에는 반드시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15] 발굴된 석촉과 철촉 역시 날카롭게 가공되고 피를 빼는 홈까지 새겨져 있어, 문헌 기록과 일치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숙신의 생활 모습은 주로 『진서』 사의전(四夷傳)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읍루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4. 2. 의복

숙신 사람들은 주로 돼지를 길러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돼지 털을 엮어 베(布)를 만들기도 했다.[15] 또한 베로 지름 한 자(약 30cm) 정도 크기의 가리개(선, 襜)를 만들어 몸의 앞뒤를 가렸다.[15]

중국에 성스러운 황제(聖帝)가 새로 즉위하면 낙상(雒常)이라는 나무(혹은 웅상(雄常) 나무)에 껍질이 생겨나 그것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는 기록도 있다.[15] 진(晋)의 학자 곽박(郭璞)은 숙신 사람들이 평소에는 옷을 입지 않다가, 중국에 성제가 즉위할 때만 웅상 나무껍질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고 주석하기도 했다.

전쟁 시에는 가죽를 이용해 만든 갑옷을 착용했다.[15]

4. 3. 음식

숙신 사람들은 주로 돼지를 많이 길러 그 고기를 먹었으며, 은 기르지 않았다.[15] 집에는 우물이나 부엌과 같은 시설이 없었고, '와격(瓦鬲)'이라는 질그릇으로 만든 솥을 사용하여 한 번에 4~5되 정도의 밥을 지어 먹었다.[15] 식사를 할 때는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발로 고기를 고정하고 씹어 먹는 독특한 방식을 사용했으며, 얼어붙은 고기는 몸 위에 올려 체온으로 녹여서 먹기도 했다.[15]

그들이 살던 지역에서는 소금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무를 태워 만든 재에 물을 부어 얻은 잿물을 소금 대용으로 사용했다.[15] 음식은 장례 풍습에도 관련이 있었는데, 사람이 죽으면 돼지를 잡아 시신을 안치한 나무 곽 위에 쌓아두고 이를 죽은 사람의 양식으로 삼았다.[15]

4. 4. 풍습

숙신씨는 일명 읍루라고도 불렸으며, 불함산(백두산) 북쪽에 살았다.[15] 그들은 주로 깊은 산골짜기(深山窮谷)에 거주했으며, 길이 험준하여 수레나 말이 다니기 어려웠다.[15] 생활 방식은 계절에 따라 달라져, 여름에는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살았으며 겨울에는 땅을 파서 만든 움집에서 지냈다.[15] 실제 발굴 조사를 통해서도 이러한 수혈 건물 유적이 확인되어 사서의 기록을 뒷받침한다. 집안에는 우물이나 부엌이 따로 없었고, 토기의 일종인 와격(瓦鬲)이라는 그릇을 만들어 한 번에 4~5되 정도의 밥을 지어 먹었다.[15]

사회적으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세습 군장 체제였으며, 문자가 없어 말로써 약속을 정했다.[15] 말(馬)을 기르기는 했으나 타지 않고 재산으로만 여겼으며, 소나 양 대신 돼지를 많이 길러 고기는 먹고 가죽으로는 옷을, 털로는 베(布)를 만들어 사용했다.[15] 특이한 풍습으로, 중국에 새로운 성군(聖君)이 즉위하면 '낙상(雒常)' 또는 '웅상(雄常)'이라는 나무의 껍질이 저절로 생겨나 그것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는 전승이 있다.[15] 평소에는 삼베 등으로 지름 한 자 남짓한 크기의 가리개(선, 襜)를 만들어 몸의 앞뒤만 가리고 다녔으며, 머리카락은 땋아서 늘어뜨렸다(편발, 編髮).[15] 음식 문화로는, 앉을 때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발로 고기를 끼워 먹거나, 얼어붙은 고기를 몸으로 녹여 먹는 방식이 있었다.[15] 또한 소금과 철이 생산되지 않아 나무를 태운 재를 물에 타서 간을 맞추어 먹었다.[15]

혼인할 때는 남자가 여자에게 마음에 든다는 표시로 머리에 깃털을 꽂아주었고, 여자가 이를 받아들이면 깃털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간 뒤 예를 갖추어 정식으로 맞이했다.[15] 결혼한 부인은 정숙했다고 전해지며, 건강하고 씩씩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병약하거나 나이든 사람은 천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15]

장례는 사람이 죽은 당일 바로 들판에 매장하는 방식이었다. 나무를 엮어 간단한 곽(椁)을 만들고, 그 위에 잡은 돼지를 쌓아 죽은 사람의 양식으로 삼았다.[15] 성격은 거칠고 사나우며, 슬픔이나 근심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숭상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가 죽어도 남자는 곡을 하지 않았는데, 우는 것은 씩씩하지 못한 행동으로 여겼기 때문이다.[15] 한편, 도둑질에 대해서는 훔친 물건의 많고 적음을 떠나 무조건 사형에 처했기 때문에, 들에 물건을 놓아두어도 아무도 훔쳐가지 않았다고 한다.[15]

숙신은 활과 화살 제작 기술이 뛰어났다. 길이 3척 5촌(약 106cm) 정도 되는 박달나무 활(단궁, 檀弓)과 1척(약 30cm) 남짓 되는 길이의 싸리나무 화살(고시, 楛矢)을 사용했으며, 특히 날카로운 돌로 만든 화살촉(석노, 石砮)이 유명했다.[15] 그들의 땅 동북쪽 산에서는 쇠보다 더 단단하고 날카로운 돌이 생산되었는데, 이 돌을 캐기 전에는 반드시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15] 갑옷은 가죽이나 뼈를 엮어 만들었다.[15] 발굴된 석촉과 철촉 유물에서도 피를 빼기 위한 홈이 파여 있는 등, 사서에 기록된 숙신의 무기에 대한 묘사와 일치하는 점들이 발견된다.

4. 5. 무기

숙신의 대표적인 무기로는 돌로 만든 화살촉인 석노(石砮), 가죽과 뼈로 만든 갑옷, 길이가 석 자 다섯 치(3.5척)인 단궁(檀弓), 그리고 길이가 한 자 남짓 되는 고시(楛矢)가 있었다.[15]후한서』 「동이열전」에서는 고시의 길이를 한 자 여덟 치(약 41cm)라고 기록하고 있으며,[15] 공자는 숙신의 화살 길이가 1척 1자(약 36cm)라고 언급했다.

특히 석노는 숙신 동북쪽 산에서 나는 특수한 돌로 만들었는데, 이 돌은 쇠를 자를 만큼 날카로웠다고 전해진다. 이 돌을 채취하기 전에는 반드시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15] 고시는 고(楛)라는 나무로 만들었다.

이러한 무기들은 중국 역사 기록에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주나라 무왕 때 숙신은 고시와 석노를 조공으로 바쳤으며,[15] 주공성왕을 보좌할 때도 다시 사신을 보내 조하(朝賀)했다.[15] 공자(仲尼)는 진나라에 떨어진 매에 박힌 화살을 보고 숙신씨의 것이라고 언급하며, 무왕상나라를 정복한 후 주변 이민족들에게 각 지역의 특산물을 바치게 했을 때 숙신이 고시와 석노를 바쳤다고 설명했다. 무왕은 이 사실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화살에 '숙신씨가 바친 화살'이라고 새겼고, 딸 대희를 우호공에게 시집보내 진(陳)나라에 봉할 때 이 화살을 하사했다고 한다. 이는 먼 이민족까지 복속시켰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이후 삼국시대 위나라 경원(景元) 연간(260년~263년) 말, 사마소(문제)가 승상으로 있을 때 숙신은 다시 고시, 석노, 궁갑(弓甲), 담비 가죽 등을 바쳤다.[15] 서진 무제 태강(太康) 연간(280년~289년) 초와 동진 원제(元帝) 때에도 석노 등을 조공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15]

현대의 고고학 발굴 조사에서도 사서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유물이 확인되었다. 특히 날카롭게 가공되고 피를 빼기 위한 홈까지 파인 석촉과 철촉이 출토되어, 숙신 무기에 대한 기록과 잘 일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5. 중국과의 관계

중국 문헌에서 숙신(肅慎)은 활과 화살 제작에 능한 동북방의 민족으로 묘사된다. 중국 기록상 가장 오래된 등장은 순 임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10], 이후 중국에 성스러운 통치자가 나타나면 그의 덕에 이끌려 조공하러 온다는 식으로 기록되었다. 중국의 오래된 문헌 중 하나인 『서경』에도 숙신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 『국어』 등 여러 서적에는 춘추 시대 진나라에서 공자가 숙신의 화살에 대해 설명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공자는 진나라에 나타난 화살을 보고 이것이 숙신씨(肅慎氏)의 화살임을 설명하며, 과거 무왕상나라를 정복한 후 여러 민족에게 공물을 바치게 했을 때 숙신이 고시(楛矢, 싸리나무 화살)와 석노(石砮, 돌 화살촉)를 바쳤고, 무왕이 이를 기념하여 화살에 '숙신씨 공시(肅慎氏貢矢)'라는 글자를 새겨 진나라에 하사했다고 언급했다.

주나라 시대에는 숙신과의 교류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다.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키자 숙신은 고시와 석노를 바치며 조공했다. 성왕이 동쪽의 이민족들을 정벌하자 숙신이 다시 찾아와 축하했으며, 성왕은 영백(榮伯)에게 명하여 이를 기념하는 '회숙신지명(賄肅慎之命)'을 짓게 했다. 주공이 성왕을 보좌할 때에도 숙신 사신이 조하(朝賀)했으며, 강왕 때에도 숙신이 다시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전한 이후 부여가 성장하면서 숙신과 중국의 직접적인 교류는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중국 문헌에는 숙신 대신 부여인들이 부르던 명칭인 읍루(挹婁)가 주로 등장하며, 읍루는 숙신의 후예로 여겨졌다. 하지만 숙신이라는 명칭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사마상여의 「자허부」나 당나라 때 편찬된 『진서』 등에는 숙신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진서』의 경우, 실제로는 읍루 시대의 상황을 다루면서도 고전적이고 유서 깊은 '숙신'이라는 명칭을 표제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진서』 사의전(四夷傳) 등에 기록된 숙신(혹은 읍루)은 불함산(백두산) 북쪽에 위치하며, 부여에서 60일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다고 묘사된다. 동쪽은 대해(동해), 서쪽은 구만한국(寇漫汗國), 북쪽은 약수(아무르강)에 닿아 있으며, 영토는 사방 수천 리에 이른다고 한다. 사람들은 깊은 산골짜기에 살며, 길이 험해 수레나 말이 다니지 못했다. 여름에는 나무 위에, 겨울에는 땅굴(수혈)에 살았다. 문자가 없어 말로 약속을 정했으며, 부자가 대대로 군장을 세습했다. 말은 재산으로만 여기고 타지 않았으며, 소와 양은 없는 대신 돼지를 많이 길러 고기는 먹고 가죽으로는 옷을 만들었다. 나무를 태운 재를 물에 타서 소금 대용으로 사용했으며, 돌로 만든 화살촉(石砮)과 가죽/뼈 갑옷, 단궁(檀弓), 고시(楛矢) 등을 무기로 사용했다. 특히 동북쪽 산에서 나는 돌은 쇠를 자를 만큼 날카로웠다고 한다. 장례는 사람이 죽은 당일 들에 매장하며, 나무로 작은 곽을 만들고 돼지를 잡아 그 위에 쌓아 죽은 자의 양식으로 삼았다. 고고학적 발굴 조사에서도 이러한 기록을 뒷받침하는 수혈 건물 유적이나 날카롭게 가공된 석촉 등이 발견되어 사서의 기록과 일치하는 면을 보여준다.

한나라의 강성했던 시기에는 천여 년간 교류 기록이 거의 없다가, 삼국 시대 위나라 때 다시 교류가 재개되었다. 문제(사마소)가 승상으로 있던 경원(景元) 연간(260년~263년) 말, 숙신은 고시, 석노, 궁갑(弓甲), 초피(貂皮, 담비 가죽) 등을 바쳤다. 위나라 황제 조환은 이 물품들을 승상부에 보내도록 하고, 숙신의 왕 녹(傉)에게는 닭, 비단, 모직물, 솜 등을 하사했다. 서진 무제 때인 태강(太康) 연간(280년~289년) 초에도 다시 와서 공물을 바쳤다.[15]

동진 시대에도 교류는 이어졌다. 원제가 강남에서 진나라를 다시 일으키자 숙신은 강좌(江左, 건강)로 사신을 보내 석노를 바쳤다. 성제 때에는 후조석계룡(석호)에게 조공했는데, 길이 멀어 4년 만에 도착했다고 한다. 석계룡이 그 이유를 묻자 숙신 사신은 "소와 말의 모습을 지켜보니 3년 동안 계속 서남쪽을 향해 잠을 잤습니다. 이를 통해 대국(후조)의 위치를 알게 되어 찾아왔습니다"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15]

6. 한국사와의 관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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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웹사이트 Chinese History – Non-Chinese peoples and neighboring states: Sushen http://www.chinaknow[...] Chinaknowledge 2009-04-05
[2] 서적 The Archaeology of Northeast China - Beyond the Great Wall Routledge 1995
[3] 서적 The Origins of Language Revisited Differentiation from Music and the Emergence of Neurodiversity and Autism Springer Singapore 2020
[4] 웹사이트 Who is the tribe of Malgal[Mohe]? http://www.kyungsung[...] Kyungsung University 2009-04-05
[5] 간행물 New Light on The Origins of The Manchus Harvard-Yenching Institute 1990-06
[6] 웹사이트 Chinese History – The Non-Chinese peoples and states of the northeast http://www.a3guo.com[...] a3guo.com 2009-04-05
[7] citation A history of the Japanese people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end of the Meiji era The Encyclopædia Britannica Co.
[8] 서적 Japanese Demon Lore: Oni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https://archive.org/[...]
[9] 웹사이트 ウェブマガジン カムイミンタラ ~北海道の風土・文化誌 :オホーツク文化人とモヨロ貝塚 網走 流氷とともにやってきた古代民族の謎とロマンに魅せられた父子三代と研究者たち http://kamuimintara.[...] 2019-09-12
[10] 문서 史記』五帝本紀には「舜北発息慎」とあり、『竹書紀年』には舜の25年に息慎が舜に弓矢を献上したとある。
[11] 문서 にんじん木に似て赤い木の楛で作った矢。
[12] 문서 丞相の役所、ここでは司馬昭を指す。
[13] 문서 原文では元康であるが、元康は恵帝 (西晋)|恵帝の年号なので、誤りだと思われる。なお、武帝本紀には咸寧 (晋)|咸寧五年(279年)に粛慎が楛矢・石砮を献じたことがみえている。
[14] 문서 S. M. Shirokogoroff, 『Social Organization of the Northern Tungus』pp.147~169)
[15] 웹인용 동북아역사넷 http://contents.nah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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