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철황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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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헌철황귀비는 청나라 말기의 후궁으로, 함풍제의 치세에 태어나 동치제, 광서제, 선통제 시대를 거치며 유비, 유귀인, 유황귀비, 경의황귀비, 경의황귀태비 등의 작위를 받았다. 8개국 연합군의 베이징 침공 당시 궁중의 사무를 총괄했으며, 선통제 즉위 후 유황귀비로 진봉되었고, 융유황태후 사후 어린 푸이를 양육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1932년 사망 후 헌철황귀비의 시호를 받았으며, 베이징에서 마지막으로 거행된 황가 장례의 주인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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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철황귀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휘호 | 헌철황귀비 (獻哲皇貴妃) |
| 출생일 | 함풍(咸豐) 6년 6월 1일 (1856년 7월 2일) |
| 사망일 | 신미년(辛未年) 섣달 27일 (1932년 2월 3일) |
| 향년 | 75세 |
| 매장지 | 청동릉(清東陵) 혜릉 비원침 (惠陵妃園寢) |
| 가문 | 헤셰리(赫舍裡) 씨 (출생 시) |
| 가문 (결혼 후) | 아이신 교로(愛新覺羅) 씨 |
| 궁중 경력 | |
| 입궁 | 1872년 |
| 동치제(同治帝) 사망 | 1875년 |
| 초기 작위 | 유빈(瑜嫔) |
| 후기 작위 | 유비(瑜妃) → 유귀비(瑜貴妃) → 유황귀비(瑜皇貴妃) → 경의황귀비(敬懿皇貴妃) → 경의황귀태비(敬懿皇貴太妃) |
| 가족 관계 | |
| 배우자 | 동치제(同治帝) |
| 양자 |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 |
| 아버지 | 숭령 (崇齡) |
| 기타 | |
| 별호 | 라몽산인 (懒梦山人, Lǎnmèng shānrén) |
2. 생애
헌철황귀비 허서리씨는 함풍 6년(1856년) 6월 1일에 신흥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1] 동치 12년(1872년) 수녀 선발을 통해 입궁하여 유빈(裕嬪)으로 봉해졌고, 재능으로 서태후의 총애를 받았다.[1][2] 동치 13년(1874년)에는 병석에 누운 동치제의 쾌유를 기원하며 유비(裕妃)로 진봉되었다.[1]
광서 20년(1894년)에는 자희황태후의 환갑을 맞아 유귀비(裕貴妃)로 진봉되었고,[1] 광서 26년(1900년) 8개국 연합군의 베이징 침공 당시 피난을 떠난 황실을 대신하여 황궁에 남아 궁중 사무를 처리하며 혼란을 수습하는 역할을 맡았다.[1]
광서 34년(1908년) 선통제가 즉위하자 유황귀비(愉皇貴妃)로 진봉되었으며,[1] 신해혁명 이후인 1913년에는 푸이에 의해 경의황귀비(敬懿皇貴妃)로 다시 봉해졌다.[1] 융유태후 사후에는 동치제의 생존 후궁 중 최연장자로서 어린 푸이를 양육하며 황실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1]
1924년 베이징 정변으로 푸이와 함께 자금성에서 축출된 후,[1] 1932년 2월 5일 77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1] 베이핑(현재의 베이징)에서 마지막 황실 장례식으로 기록될 만큼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으며,[1] 사후 만주국 조정으로부터 헌철황귀비(獻哲皇貴妃)라는 시호를 받았다.[1] 1935년 허베이성 쭌화의 청동릉 내 혜릉 비원침에 돈혜황귀비와 함께 안장되었다.[1]
2. 1. 어린 시절과 입궁
헌철황귀비 허서리씨는 함풍 6년(1856년) 음력 6월 1일(양력 7월 2일)에 태어났다.[1] 그녀의 집안은 안정문판창 골목에 살았으며, 공친왕 혁흔의 서자 패륵 재형의 부인과 관련이 있었다. 가문은 청나라 초기에 서안의 주방팔기로 파견되었으나, 조부 서흥아가 도광제 시기에 진사가 된 후 경성으로 이주하여 경기가 되었다. 서흥아는 이후 이리장군, 산감총독까지 지냈다.[1] 이처럼 그녀의 가문은 새로이 부상한 신흥 귀족 집안이었으며, 고위 종실과의 혼인 관계도 맺고 있었다.[1] 허서리씨는 아름다운 외모와 문학적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2]동치 12년(1872년) 2월 3일, 외팔기 수녀 선발에서 뽑혀 유빈(裕嬪)으로 봉해졌다.[1][2] '유(瑜)'라는 봉호는 만주어로 "맑음" 또는 "빛남"을 의미했다.[1] 그녀는 뛰어난 재주 덕분에 황제의 어머니인 서태후의 깊은 총애를 받았다.[1][2] 같은 해 9월 13일, 유빈은 신무문을 통해 자금성에 들어가 경인궁에 거처하게 되었다.[1][2] 10월 19일에는 순빈과 함께 책보를 받았고, 종수궁과 장춘궁에 가서 각각 동태후와 서태후에게 절을 올렸다. 이후 양심전으로 가 동치제에게 절하고, 저수궁과 영화궁에서 황후 아로특씨와 혜비 부찰씨에게도 인사를 드렸다.[1]
동치 13년(1874년) 11월 15일, 동치제의 병이 위중해지자 황제를 위해 복을 비는 의미로 유비(裕妃)로 진봉되었다.[1] 다만, 12월 23일에 진봉되었다는 기록도 있다.[2]
2. 2. 광서제 시대와 팔국연합군
동치제가 1875년 1월 12일에 사망하자 그의 사촌인 재천이 광서제로 즉위했다. 1895년 5월 29일, 허서리(훗날의 헌철황귀비)는 "유 귀인"으로 봉해졌다.광서 26년(1900년) 7월 20일,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침공했다. 다음 날인 7월 21일, 자희황태후는 광서제, 황후, 근비만을 데리고 서둘러 베이징을 탈출했다. 이때 수강궁 1구역에는 함풍제의 후궁인 기귀비 동가씨, 길비 왕씨와 동치제의 후궁들인 돈의영경황귀비 부찰씨, 유귀비 혁사리씨(헌철황귀비), 순귀비 아로특씨, 진비 서림각라씨가 함께 살고 있었으나, 자희황태후는 이들을 모두 남겨두고 피난길에 올랐다.
동치제의 생존 후궁 중 가장 서열이 높았던 숙신황귀비는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고 성정이 나약했기 때문에, 당시 유귀비였던 허서리가 그녀를 대신하여 광서제의 부재 기간 동안 황궁의 관리를 책임지게 되었다. 허서리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궁중 사무를 총괄하며 인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재정을 담당하는 대신들과 대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연합군 통수권자가 그녀를 만나 경의를 표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당시 내무부 대신이었던 세속과 평문렴이 궁궐에 들어와 상황을 살폈는데, 수강궁에 남겨진 숙신황귀비를 비롯한 후궁들은 일상적으로 필요한 음식물 등을 각자에게 지급되는 은자인 분례은(分例銀)으로 태감을 시켜 궁 밖에 나가 사 와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후 광서제는 숙신황귀비 등에게 지급되던 연례를 절반으로 줄이라고 명했으나, 궁녀들에게 지급되는 예은은 이전과 같이 지급하도록 했다.
2. 3. 선통제 시대와 황실의 몰락
광서제가 1908년 11월 14일에 사망하고 그의 조카 푸이가 선통제로 즉위한 후, 1908년 11월 18일 허서리 씨는 유황귀비(愉皇貴妃)로 격상되었다. 1913년 3월 12일(음력 2월 5일), 푸이는 그녀를 경의황귀비(敬懿皇貴妃)로 다시 진봉했다.융유태후가 사망한 후, 당시 생존해 있던 동치제의 세 비(유황귀비, 순황귀비, 진황귀비) 중 최연장자이자 성격이 강했던 유황귀비가 어린 푸이를 양육하게 되면서 황실 내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를 통해 황태후의 지위를 얻으려 했다.
1922년 푸이가 대혼례를 올리자 경의황귀태비(敬懿皇貴太妃)로 불렸다. 그러나 신해혁명 이후 변화된 시대 속에서 황실의 지위는 위태로웠고, 1924년 11월 21일 푸이가 자금성에서 축출될 때, 경의황귀비 역시 진황귀비와 함께 황궁을 떠나야 했다.
1932년 2월 5일(음력 신미년 섣달 그믐), 경의황귀비는 베이징의 옛 영수고륜공주부에서 77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녀의 장례식은 2월 23일에 거행되었는데, 이는 베이징 시민들 앞에서 치러진 마지막 황실 장례식으로 전례 없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거리가 마비될 정도였으며, 경찰, 보안대, 헌병, 위수부대까지 동원되어 질서를 유지했다. 장례 후 그녀의 관은 잠시 베를린사에 보존되었다가, 만주국 조정으로부터 헌철황귀비(獻哲皇貴妃)라는 시호를 받았다.
1935년 3월 14일, 헌철황귀비의 관은 돈혜황귀비와 함께 허베이성 준화시의 쌍산욕혜릉 비원침에 안장되었다.

2. 4. 죽음과 사후
광서 34년(1908년) 10월 25일, 새로 즉위한 선통제는 그녀를 유황귀비(愉皇貴妃)로 봉했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푸이와 황족들은 귀족 작위를 유지하며 자금성에서 계속 거주할 수 있었다. 1913년 3월 12일(음력 2월 5일), 푸이는 그녀에게 경의황귀비(敬懿皇貴妃)라는 칭호를 수여했다.융유황태후가 사망한 후, 당시 생존해 있던 동치제의 비들 중 최연장자였던 경의황귀비는 강한 성격을 바탕으로 주도권을 잡았다. 그녀는 어린 푸이를 양육하게 되면서, 자신이 푸이의 법적 어머니라는 명분으로 황태후의 지위를 얻으려 했으나, 당시 실권자였던 위안스카이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1922년 푸이가 대혼례를 올린 후에는 경의황귀태비(敬懿皇貴太妃)로 불렸다.
1924년 11월 21일, 베이징 정변으로 푸이가 자금성에서 쫓겨나자, 경의황귀비와 진황귀비도 함께 궁을 떠나야 했다. 그녀는 이후 옛 영수고륜공주의 저택에서 거주했다.
1932년 2월 5일(음력 신미년 섣달 그믐), 경의황귀비는 77세의 나이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2월 23일에 거행된 장례식은 전례 없이 성대했으며, 베이핑(현재의 베이징)에서 열린 마지막 황실 장례식으로 기록되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거리가 마비될 정도였고, 베이양 정부는 질서 유지를 위해 경찰, 보안대, 헌병, 위수부대까지 동원해야 했다. 장례 후 시신은 잠시 베를린사에 안치되었다. 이후 만주국 조정에서 헌철황귀비(獻哲皇貴妃)라는 시호를 올렸다.
1935년 3월 14일 새벽, 헌철황귀비의 관은 돈혜황귀비와 함께 허베이성 쭌화에 있는 청나라 동릉의 혜릉(惠陵) 비원침(妃園寢)에 안장되었다.
3. 성격 및 평가
《청패류초》(清稗類鈔)에 따르면, 한번은 후궁들이 서태후의 능을 참배하러 갔을 때, 예를 마친 유귀비(훗날의 헌철황귀비)는 환궁하지 않고 서태후를 따라 지하로 가겠다고 주장했다. 이에 섭정왕 재풍이 직접 마중을 나갔으나, 유귀비는 "황상(푸이)과 덕종(광서제)의 통치를 받들었고, 목종(동치제)의 비였던 내가 어찌 성모(聖母)라 칭할 수 있으며, 융유의 아래에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당시 옆에는 순비와 진비도 함께 있었다. 결국 섭정왕 재풍은 경왕과 협의하여 유귀비를 황귀비로 봉하고, 그녀가 융유태후 앞에서 스스로를 노비라 칭하지 않아도 되도록 허락했으며, 유비, 순비, 진비 세 사람의 월례 은자를 증액했다.
푸제 등 옛 궁정 사람들의 회고에 따르면, 헌철황귀비는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으며 규율과 예법을 매우 중시했다. 이러한 면모 때문에 어떤 이들은 그녀가 서태후를 닮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1900년,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침공했을 당시, 서태후와 광서제는 베이징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고 헌철황귀비를 비롯한 후궁들은 궁에 남겨졌다. 당시 동치제의 후궁 중 가장 연장자였던 돈이 용경 황귀비가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헌철황귀비가 그녀를 대신하여 황제의 부재 시 황궁의 관리 책임을 맡았다.
헌철황귀비는 강하고 불같은 성격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이로 인해 광서제의 황후였던 융유황태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융유황태후가 사망한 후에는 어린 푸이를 양육했으며, 자신이 푸이의 법적 어머니라는 점을 내세워 황태후의 지위에 오르려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실권자였던 위안스카이의 허락을 받지 못해 무산되었다.
4.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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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타
《清稗類鈔》|청패류초중국어에 따르면, 한번은 후궁들이 서태후의 능을 참배하러 갔을 때, 의례를 마친 유귀비(헌철황귀비)가 환궁하지 않고 서태후를 따라 지하로 가겠다며 버텼다고 한다. 이에 섭정왕 재풍이 직접 마중 나왔으나, 유귀비는 "皇上|황상중국어(푸이)과 덕종(광서제)의 통치를 받들었고, 목종(동치제)의 비였던 내가 어찌하여 성모라고 칭할 수 있었으며, 나는 융유의 아래에 있는가?"라고 말하며 맞섰다. 당시 순비와 진비도 유귀비의 곁을 지켰다. 결국 섭정왕 재풍은 경왕(慶王)과 상의하여 유귀비를 황귀비로 봉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융유태후 앞에서 스스로를 노비라 칭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고, 유비, 순비, 진비 세 사람의 월례 은자를 증액해주었다.
푸제(溥傑) 등 옛 궁정 사람들의 회고에 따르면, 헌철황귀비는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규율과 예법을 중시했으며, 어떤 면에서는 효흠현황후(서태후)를 닮았다고 여겨졌다.
'''영상 매체'''
| 년도 | 제목 | 배우 | 배역 |
|---|---|---|---|
| 미상 | 말대어의 | 번혁민 | 유귀비 |
| 2006 | 덕령공주 | 싱준 | 유비 |
| 2016 | 자금성의 마지막 치유사 | 판빙 | 유귀비 |
참조
[1]
문서
同治十一年 十月
[2]
문서
同治十三年 十一月 十五日
[3]
문서
光緒二十一年 五月 六日
[4]
문서
光緒三十四年 十月 二十五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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