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영운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현영운은 한성부 출신의 개화파, 친일파 인물로, 일본 유학 후 대한제국 시기에 외아문 주사, 궁내부 번역관, 군수 등을 역임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인 배정자의 두 번째 남편이었으며,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1883년 일본 유학 후 1886년 한성주보 주사에 임명되었고, 1904년 특명전권공사로 일본에 파견되기도 했다. 배정자와의 이혼 후 봉상사 제조와 태복사장을 지냈으며, 부유한 생활을 했다. 그의 딸 현송자는 윤치오와 결혼했으나 이혼 후 이철과 재혼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대한제국의 참장 - 윤영렬
윤영렬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무관이자 관료로, 흥선대원군에 의해 발탁되어 무관으로 출사, 동학 농민 운동 토벌과 도적 소탕에 공을 세웠으며, 대한제국 육군 참장과 자헌대부를 지냈고, 일제강점기에는 작위를 거절한 인물이다. - 대한제국의 참장 - 이희두
이희두는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에 일본 육군 소장으로 복무하며 일진회에 가담, 친일 행적을 보여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과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된 인물이다. - 20세기 사망 - 유기환
유기환은 대한제국 시기 관료로, 신사유람단 수행, 궁내부 대신 서리, 법부대신 등을 역임했으며, 고종의 황제 즉위 상소를 올렸으나 거절당하고 김홍륙 독살 모의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헌의 6조에 반대하여 유배형을 받기도 했다. - 20세기 사망 - 홍양명
홍양명은 일제강점기 언론인으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나 친일 행적으로 비판받았으며, 조선일보, 만선일보, 매일신보 등에서 활동하며 일본의 침략 전쟁을 옹호했고, 해방 후 과도정부에서 활동하다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 급진개화파 - 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은 1868년부터 1880년대 후반 일본에서 일어난 정치, 경제, 사회의 급격한 개혁으로, 도쿠가와 막부 붕괴 후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를 건설하고 폐번치현, 징병제, 학제 개혁, 서구 문물 수용 등을 통해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이끌었으나 사회적 혼란과 불평등을 야기하여 다양한 평가가 존재하는 시기이다. - 급진개화파 - 권동진
권동진은 조선 말기 개화파 관료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을미사변 가담 후 천도교에 입교, 3·1 운동 민족대표, 신간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광복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현영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군인 정보 | |
이름 | 현영운 |
생애 | 1868년 음력 6월 11일 ~ ? |
복무 | 대한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905년 ~ 1910년 |
최종 계급 | 대한제국 육군 참장 |
기타 이력 | 태복사장 |
2. 생애
한성부에서 태어나 잠시 경상도 부산에서 유아기를 보내고 대구에서 성장했다. 아버지 현학표(玄學杓)는 왜학훈도(倭學訓導)라는 관직을 지낸 역관으로 알려져 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현영운을 서울의 중인 출신으로 기록하며, 그의 출생 배경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내용을 남기기도 했다.
1883년 김옥균에 의해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서 공부하고 1885년 귀국했다. 개화 문물을 일찍 접한 그는 귀국 후 《한성주보》를 발행하던 박문국 주사로 임명되어 활동했으며, 1894년에는 《시사총보》를 발행하기도 했다.
개화파이자 친일파였던 그는 뛰어난 일본어 실력을 바탕으로 외아문 주사, 법부 법률기초위원, 궁내부 참여관, 시종원 시종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1904년에는 특명전권공사로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이후 대한제국 육군 보병 정령을 거쳐 육군 참장까지 오르며 군 경력도 쌓았다.
현영운의 빠른 출세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로 알려진 여성 밀정 배정자와의 결혼이 큰 영향을 미쳤다.[1] 그는 배정자의 두 번째 남편이었으며, 고종의 총애를 받던 순헌황귀비 엄씨의 후원과 이토 히로부미의 권력을 등에 업은 배정자의 영향력 덕분에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1908년 한 언론은 현영운을 배정자의 위세로 "혁혁하던 세력가"라고 평가하기도 했다.[2] 배정자와의 사이에서 두 딸을 두었으며, 그중 현송자는 훗날 윤치오, 이철 등과 결혼했다. 그러나 이후 배정자와는 이혼했으며, 정확한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다.[3]
1905년 한규설 등의 탄핵으로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곧 복귀하여 봉상사 제조, 태복사장 등을 지냈다. 동대문 밖에 큰 별장을 소유하는 등 부유한 생활을 누렸던 것으로 전해진다.[4]
2. 1. 일본 유학과 초기 관직
1883년 김옥균이 선발한 관비유학생의 일원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같은 해 8월 16일 후쿠자와 유기치가 도쿄에 세운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 입학하여 2년 만인 1885년 8월 15일에 졸업하였다. 일찍이 개화 문물을 접한 그는 그해 9월에 귀국했다.귀국 1년 전인 1884년 12월에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한성순보》가 폐간된 후, 박문국에서는 신문 복간을 추진했다. 1886년 1월 25일 《한성순보》의 후신 격인 《한성주보》가 창간되었고, 현영운은 같은 해 11월 22일 박문국 주사로 임명되어 1889년까지 근무했다. 1886년 12월 20일부터는 주사들이 교대로 입직하여 국왕 옆에서 전교를 기록해 신문에 게재할 수 있게 되면서, 현영운도 고종에게 가까이 다가갈 기회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1894년에는 《시사총보》를 발행하기도 했다.
개화파이자 친일파로 평가받는 그는 뛰어난 일본어 실력을 바탕으로 여러 관직을 거쳤다. 외아문 주사, 법부 법률기초위원, 궁내부 참여관, 시종원 시종, 궁내부 번역관 및 지방 군수 등을 역임했다. 1904년에는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일본에 파견되었다. 이후 대한제국 육군 보병 정령을 거쳐 육군 참장까지 지내며 군인으로도 활동했다.
2. 2. 친일 행적과 대한제국 시기
한성부에서 태어나 잠시 경상도 부산에서 유아기를 보낸 후 대구에서 성장했다. 아버지 현학표(玄學杓)는 왜학훈도(倭學訓導)라는 일본어 교육 관련 관직을 지낸 역관이었다고 전해진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현영운을 서울의 중인 출신으로 기록하며, 그의 할아버지가 일본어 통역관으로 동래에 머물 때 기생에게서 아버지를 얻었고, 아버지 또한 아들이 없어 첩을 들여 현영운을 낳았다는 다소 비판적인 내용을 남겼다.1883년 김옥균이 선발한 관비 유학생의 일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그해 8월 16일 후쿠자와 유기치가 도쿄에 세운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 입학했다. 2년 뒤인 1885년 8월 15일에 졸업하고, 일찍이 개화 문물을 접한 뒤 같은 해 9월 귀국했다.
귀국 1년 전인 1884년 갑신정변으로 폐간되었던 《한성순보》의 후신으로 1886년 1월 25일 《한성주보》가 창간되자, 현영운은 그해 11월 22일 박문국 주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12월 20일부터 주사들이 교대로 입직하여 고종의 지시 사항을 기록해 신문에 실을 수 있게 되면서, 현영운 또한 고종에게 가까이 다가갈 기회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1894년에는 《시사총보》를 발행하기도 했다.
개화파이자 친일파였던 그는 뛰어난 일본어 실력을 바탕으로 외아문 주사, 법부 법률기초위원, 궁내부 참여관, 시종원 시종, 궁내부 번역관, 지방 군수 등을 차례로 지냈다. 1904년에는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이후 대한제국 육군 보병 정령을 거쳐 육군 참장까지 오르는 등 군 경력도 쌓았다.
현영운의 빠른 출세 배경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로 알려진 여성 밀정 배정자와의 결혼이 있었다.[1] 그는 배정자의 두 번째 남편이었으며, 대한제국 고종의 총애를 받던 순헌황귀비 엄씨의 후원과 이토 히로부미의 권력을 등에 업은 배정자의 영향력 덕분에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1908년의 한 언론 보도에서는 현영운을 가리켜 배정자의 위세로 "혁혁하던 세력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2] 배정자와의 사이에서 두 딸을 두었는데, 그중 한 명인 현송자는 훗날 윤치오, 이철 등과 결혼했다. 그러나 현영운은 이후 배정자와 이혼했으며, 그 사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3]
1905년에는 한규설 등의 탄핵으로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했으나, 곧 복귀하여 봉상사 제조와 태복사장을 지냈다. 동대문 밖에 대형 별장을 소유하는 등 부유한 생활을 누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4]
3. 가족 관계
wiki
관계 | 이름 | 비고 |
---|---|---|
부인 | 이씨 | |
아들 | 현택건 | 요절 |
부인 | 배정자 | |
딸 | 현덕자 | 요절 |
딸 | 현송자 | |
사위 | 윤치오 | 현송자의 첫 번째 남편 (1869년 8월 5일 ~ 1950년 12월 22일) |
사위 | 이철 | 현송자의 두 번째 남편 (1903년 6월 9일 ~ 1944년) |
한편, 형인 경운(炅運)의 아들인 독립운동가 '''현정건'''과 소설가 '''현진건'''은 그의 조카이다.
3. 1. 딸 현송자와 윤치오, 이철
현영운의 둘째 딸 현송자는 대한제국 시절 학부 학무국장을 지낸 윤치오의 후처로 시집갔으나, 이후 이철과의 관계로 인해 이혼했다.[5]이철은 연희전문학교 입학 전에 같은 교회 신도였던 현송자를 처음 만났다. 당시 현송자는 대한제국 고위 관료의 딸이자 마지막 황제 순종의 황후를 배출한 윤씨 집안의 부인이었으며, 빼어난 미모와 일본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사교계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5] 네 살 연상인데다 기혼이었던 현송자와 이철의 관계는 1930년 무렵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두 사람 모두 교회와 학교에서 쫓겨나는 어려움을 겪었다.[5]
이혼 후 현송자는 “트로이카”라는 이름의 술집을 운영하다가[6] 이철과 재혼했다. 재혼 후에는 남편이 된 이철의 음악 사업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현송자는 이철의 음악 경력을 살리고 일본 유학 시절의 인맥을 동원하여 음반 회사 지점을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했고, 그 결과 1933년 이철의 오케레코드가 설립될 수 있었다.[5]
참조
[1]
서적
친일파 99인 2
돌베개
1993-03-01
[2]
뉴스
돌까지 팔아먹어
공립신보
1908-04-08
[3]
뉴스
이토 히로부미가 키운 '조선의 마타하리'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8-10-12
[4]
뉴스
용두사미
신한민보
1911-09-13
[5]
간행물
조선 가요계를 풍미한 마이더스의 손, 이철
[6]
웹사이트
야화(夜話), 한숨지는 공작(孔雀)들
http://moderncafe.cu[...]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