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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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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개는 중국 후한 말, 삼국 시대 오나라의 무장이다. 영릉군 출신으로 손견, 손책, 손권 삼부자를 섬기며 활약했다. 적벽 대전에서 주유의 화공 계획에 따라 고육지계를 사용하여 조조군을 크게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무릉군 태수를 겸임하며 반란을 진압하고, 편장군까지 승진했으나 병으로 사망했다. 엄격하면서도 부하들을 아끼는 리더십으로 존경받았으며,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철편을 사용하는 맹장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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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개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황개
로마자 표기Hwang Gae
공복
출생 및 사망
출생지영릉구(후난성 융저우) 천릉현
사망지후난성 창더시
사망 년도215년 (추정)
가족 관계
자녀황병
관직 및 직위
최종 계급편장군
주요 직책무릉태수
편장군
무봉중랑장
단양도위
심양령
춘곡장
소속
주군손견손책손권
주요 참전 전투
전투적벽대전
기타 정보
직업장군

2. 생애

황개는 처음 영릉군의 군리로 있다가 손견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를 따라나섰다. 손견 사후에는 손책손권을 섬겼다. 당시 산월 부족이 복종하지 않고 도적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현들이 많았는데, 황개는 여러 현의 수장을 맡아 이들을 안정시켰다. 그는 석성현, 춘곡현, 심양현 등 아홉 현을 다스리며 강하고 부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하고 청렴한 자를 도왔으며, 이에 산월 사람들까지 그에게 귀부했다.

208년 적벽 전투에서는 주유에게 화공을 제안하여 채택되었고, 고육지계를 써서 조조를 속였다. 거짓으로 투항하는 척하며 조조의 군대에 접근해 불을 질러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이는 손권·유비 연합군이 승리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후 무릉만이 반란을 일으켜 성을 점령하자 태수로 부임하여 적은 병력으로 이를 격파하고 평정했으며, 장사군 익양현을 공격한 산월도 진압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편장군의 지위가 더해졌다. 황개는 재임 중 병으로 사망했으며, 손권은 그의 아들 황병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내려 공을 기렸다.[17]

2. 1. 초기 생애

황개는 현재의 후난성 융저우시 링링구에 해당하는 영릉군(零陵郡) 천릉현(泉陵縣) 출신이다.[1] 그의 조상은 과거 남양군태수를 지낸 황자렴(黃子廉)이며, 황개의 할아버지 대에 남양에서 영릉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2] 황개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했지만, 굳은 의지를 가지고 가난 속에서도 학문과 병법을 스스로 익혔다.[2]

처음에는 영릉군의 군리로 일하다가 효렴으로 추천받았다. 이후 삼공으로부터 초빙을 받기도 했으나, 손견동탁 토벌을 위해 의병을 일으키자 이를 따라 나섰다.[17]

2. 2. 손견, 손책 휘하에서의 활약

황개는 젊은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게 자랐지만, 큰 뜻을 품고 학문과 병법 공부에 힘썼다. 처음에는 영릉군의 군리로 일했으며, 이후 효렴으로 추천되기도 했다.[3] 180년대 무렵, 손견황건적의 난 진압을 위해 의병을 일으키자[3], 황개는 삼공의 부름을 마다하고 손견을 따라 나섰다.

황개는 손견 휘하에서 형주 남부의 반란을 진압하고 동탁 토벌전에도 참여하는 등[3]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그 공으로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되었다.[3]

191년 손견이 전사하자[3], 황개는 그의 장남인 손책을 섬겼다. 그는 손책의 강동 정벌에 참여하여 강동 지역을 평정하는 데 기여했으며[3], 손책 휘하의 주요 장수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2. 3. 손권 휘하에서의 활약

손책 사후에는 손권을 섬기며 젊은 주군을 보좌했다.[17] 당시 오 지역에서는 산월 부족들이 자주 현을 약탈하여 지역 사회가 불안정했다.[4] 황개는 스스로 갑옷을 입고 칼을 휘두르며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고 성을 함락시키는 데 앞장섰으며, 특히 통치가 어려운 지역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17] 그는 석성현, 춘곡현, 심양현 등 아홉 현의 수장을 역임하며 가는 곳마다 안정을 되찾게 했다.[17][4]

황개는 법령을 엄격히 집행하면서도 강한 자와 부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와 청렴한 자를 돕는 통치를 펼쳤다. 시청현을 감독할 때는 기강이 해이해진 현지 관리 두 명을 모든 관리 앞에서 처형하여 기강을 바로 세우기도 했다.[4] 이러한 통치 방식으로 산월 사람들까지 그에게 귀순하여 백성들은 평온하게 생활할 수 있었으며, 이후 단양군도위(군사령관)로 승진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산월 부족의 존경을 받았다.[4][17]

208년 적벽 전투에서는 주유의 지휘 아래 참전하여 조조군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황개는 조조군의 함선이 서로 묶여 있는 것을 보고 화공을 제안했으며, 스스로 고육지계를 실행하여 조조를 속였다. 거짓으로 항복하는 척하며 군량선으로 위장한 배에 인화물질을 싣고 조조군 진영에 접근하여 불을 질렀다. 이 화공은 대성공을 거두어 조조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손권·유비 연합군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17] 이 전투 중 황개는 유탄에 맞아 장강에 빠졌으나, 동료 한당에게 발견되어 구조됨으로써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17] 이 공적으로 무봉중랑장에 임명되었다.[17]

적벽대전 이후에도 황개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무릉만이 반란을 일으켜 성을 점령하자, 황개가 무릉군 태수로 임명되었다. 당시 군의 병력이 500명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황개는 성문을 열어 적을 유인한 뒤 기습 공격하여 격퇴하고 성을 되찾았다. 이때 반란의 주모자만 처벌하고 가담자들은 사면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반란을 완전히 평정했다. 황개의 이러한 조치에 감화되어, 이전까지 익주에 복종하던 파(巴), 예(醴), 유(酉), 탄(彈)의 읍장과 군후들도 오나라에 귀순했다.[17] 이후 장사군 익양현이 산월의 공격을 받자 이를 성공적으로 평정하였고, 그 공으로 편장군의 지위가 더해졌다.[17]

황개는 풍모에 위엄이 있었고 병사들을 아꼈기에, 그가 군대를 이끌 때는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 전해진다. 그는 결단력이 뛰어나고 사무 처리가 신속했으며, 재임 중 병으로 사망했다. 손권 영내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추모했으며, 손권은 그의 아들 황병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수여하여 공을 기렸다.[17]

2. 4. 적벽대전

208년 겨울, 적벽 전투가 발발하자 황개는 손권 군대의 최전선 지휘관이었던 주유의 부하로 참전했다.[5] 당시 조조의 군대는 수적으로 우세했기에, 황개는 주유에게 화공(火攻)을 제안했다. 그는 "적의 수가 우리보다 우세합니다. 오래 버티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지만, 조조의 배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불로 그들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고, 주유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6]

화공을 성공시키기 위해 황개는 스스로를 해하며 적을 속이는 고육지계(苦肉之計)를 사용하기로 했다. 며칠 뒤, 그는 주유, 감택과 미리 짜둔 각본에 따라 일부러 소동을 일으켜 주유에게 매를 맞는 벌을 받는 척하며 조조를 속였다. 이후 황개는 조조에게 거짓으로 항복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조조는 황개의 사자에게 "이것이 계략일까 두렵다. 그러나 황개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에게 후한 보상을 내릴 것이다."라고 말하며 의심하면서도 투항을 받아들일 기색을 보였다.[6][7]

황개는 기름과 마른 풀 등 불붙기 쉬운 재료를 가득 실은 맹충(蒙衝)과 두함(鬬艦, 전투용 함선) 10여 척을 준비하고, 그 뒤를 따를 작은 배인 주가(走舸)도 마련했다. 마침 동남풍이 강하게 불던 날, 황개는 함대를 이끌고 조조의 진영으로 향했다. 강 한가운데에 이르자 모든 배의 돛을 올리고, 부하들에게 "항복한다!"라고 큰 소리로 외치게 하여 조조군을 안심시켰다. 조조의 군사들은 진영에서 나와 황개가 정말로 투항하러 오는 것으로 믿고 지켜보았다. 황개의 함대가 조조 진영에서 약 20리 떨어진 지점에 도달했을 때, 황개는 부하들에게 배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병사들은 즉시 불타는 배들을 조조군 함대를 향해 흘려보내고, 자신들은 뒤따르던 작은 배로 옮겨 탔다. 강한 바람을 타고 불붙은 배들은 빠른 속도로 조조의 함선들에 부딪혔고, 배들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조조의 배들은 서로 가까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모든 함선을 태웠고, 나아가 육지에 있던 조조의 진영까지 불태워버렸다. 이 기회를 틈타 주유는 총공격을 명령하여 손권·유비 연합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막대한 피해를 입은 조조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8][9] 황개의 화공과 고육지계는 연합군이 적벽대전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치열한 전투 중에 황개는 적이 쏜 화살에 맞아 장강에 빠졌다. 그는 아군 병사들에게 구조되었으나,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부상자들을 모아두는 변소 근처에 방치되었다. 그때 마침 동료 장수 한당이 그곳을 지나갔고, 황개가 힘겹게 한당을 부르자 한당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달려왔다. 한당은 눈물을 흘리며 황개의 옷을 벗겨 상처를 치료해주었고, 덕분에 황개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10] 적벽대전에서의 큰 공로를 인정받아 황개는 무봉중랑장(武鋒中郎將)으로 임명되었다.[17]

2. 5. 만년

적벽 전투에서의 공적으로 무봉중랑장(武鋒中郎將)으로 승진했다.[17][11] 이후 무릉군(武陵郡)의 이민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손권은 황개를 무릉 태수로 임명하여 반란 진압을 맡겼다. 당시 황개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500명에 불과하여 수적으로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11][17] 그러나 황개는 성문을 열어두어 적의 절반 가량이 들어왔을 때 기습 공격을 감행하는 지략을 발휘했다. 이 공격으로 적 수백 명을 참수하고 나머지는 도주하게 하여 점령당했던 성읍을 되찾았다. 황개는 반란의 주모자들만 처형하고 가담했던 이들은 사면하였으며, 이후 3개월 동안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봄부터 여름까지 이어진 반란이 평정되자, 파(巴), 예(醴), 유(酉), 탄(誕) 등 인접 지역의 부족장들도 복종의 예를 표하며 찾아와 무릉군 일대는 안정을 되찾았다.[11][17]

이후 산월(山越)의 공격을 받은 장사군 익양현을 평정하였다.[17][12] 이 공으로 편장군(偏將軍)의 직위가 더해졌다.[17][12] 황개는 무릉 태수로 재임하던 중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17][12] 그는 결단력이 있고 업무 처리가 신속하여 손권 휘하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모했다고 전해진다. 손권은 황개의 공적을 기려 그의 아들 황병(黃柄)에게 관내후 작위를 수여했다.[17]

황개의 정확한 몰년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그의 사후 휘하 군대가 손유(孫瑜)의 군대와 함께 손교(孫皎)에게 통합되었다는 기록("종실전")으로 미루어 보아, 손유가 사망한 215년 이전에는 이미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동명이인

여대가 교주에서 소환되었을 때 후임이 정해지지 않은 것을 걱정한 설종이 올린 상소에 일남 태수를 지낸 황개가 언급된다. 이 황개는 남해(南海) 출신으로, 본 문서의 황개와는 다른 인물이다.[18]

4. 평가

황개는 엄격하고 진지한 외모를 가졌으며, 뛰어난 규율가로 알려졌다. 그가 전투에 나설 때마다 휘하 병사들은 최고의 공을 세우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또한 법정에서 사건을 처리할 때는 공정하고 단호했으며, 어떠한 실수도 하지 않았다. 황개가 죽은 후, 오나라 백성들은 그를 몹시 그리워했고[14] 그의 초상화를 만들어 숭배하기도 했다.[15]

5. 삼국지연의에서의 황개

14세기 역사 소설인 《삼국지연의》에서 황개는 삼국 시대 전후의 역사적 사건을 낭만적으로 각색한 이야기 속 조연으로 등장한다. 주로 적벽 전투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다룬 부분에서 활약한다. 소설 속에서 황개는 "철편"을 즐겨 사용하는 용맹한 장수로 그려지며, 정보, 한당, 조무와 함께 손견 휘하의 핵심 맹장 중 한 명으로 묘사된다.

손견이 전국옥새 문제로 원소와 대립할 때, 황개는 정보, 한당과 함께 원소군의 안량, 문추 같은 명장들과 맞섰다. 손견이 유표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황개는 손책을 보호하며 싸웠고, 황조를 사로잡아 손견의 시신과 교환하려 하기도 했다. 이후 손책이 독립하여 군사를 일으키자, 정보 등 다른 노장들과 함께 손책의 휘하로 들어가 활약을 이어갔다.

적벽 대전을 앞두고 장소 등 항복을 주장하는 문관들이 제갈량을 비난하며 곤경에 빠뜨리려 하자, 황개는 그들 앞에 나서 문관들을 꾸짖고 제갈량을 손권에게 데려가는 역할을 했다. 이후 주유가 손권에게 달려와 싸움을 주장할 때, 황개 역시 정보 등과 함께 강력하게 주전론을 펼쳤다.

개전 후, 압도적인 조조의 대군 앞에서 수적 열세를 절감한 황개는 주유에게 화공을 제안하고, 이를 성공시키기 위한 계책, 즉 "苦肉計|고육계중국어"를 실행에 옮긴다.[16] 먼저 조조에게 거짓 항복을 믿게 만들기 위해, 투항해 온 장수 채화, 채중을 포함한 여러 장수들이 보는 앞에서 일부러 주유와 심하게 다투는 연기를 펼쳤고, 격분한 척한 주유에게 심한 매질을 당했다. 이는 조조 진영에 심어둔 첩자였던 채중과 채화가 황개가 매를 맞았다는 사실을 조조에게 보고하게 하여 의심을 피하기 위함이었다.[16]

그 후, 황개는 자신의 계획을 간파하고 협력하기로 한 감택을 사자로 보내 조조에게 거짓 항복 편지를 전달했다. 편지에는 주유에게 불만을 품고 있으며, 선봉에 서서 전투 중 배신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손권 군대에 잠입해 있던 조조의 간자들 역시 황개가 매를 맞은 사건을 보고했고, 비록 조조가 처음에는 계략을 의심했지만 감택의 설득과 이러한 정황 증거들로 인해 결국 황개의 항복이 진심이라고 믿게 되었다.[16] 자신을 희생하여 적을 속이고 결정적인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 황개의 이러한 행위는 훗날 고육지책(苦肉之策)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되었다.

황개는 감택, 감녕과 함께 화공 준비를 마쳤다. 약속한 날 밤, 황개는 항복하는 척하며 조조군 진영으로 접근하여, 미리 준비해 둔 땔감과 기름을 실은 배에 불을 질러 조조 함대로 돌진시켰다. 마침 방통연환계에 따라 배들이 쇠사슬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조조의 대군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여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16] 이때 황개는 불타는 배들 사이로 도망치는 조조를 발견하고 추격했지만, 조조군의 장수 장료가 쏜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고 물에 빠졌다. 다행히 한당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10]

6. 대중문화 속의 황개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시리즈인 ''진 삼국무쌍''과 ''무쌍 오로치''에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2010년 중국 텔레비전 드라마 ''삼국''에서는 류쿠이가 황개 역을 연기했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55
[2] 서적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5
[3] 서적 Sanguozhi vol. 55
[4] 서적 Sanguozhi vol. 55
[5] 서적 Sanguozhi vol. 55
[6] 서적 Sanguozhi vol. 54
[7] 서적 Jiang Biao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4
[8] 서적 Sanguozhi vol. 54
[9] 서적 Jiang Biao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4
[10] 서적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5
[11] 서적 Sanguozhi vol. 55
[12] 서적 Sanguozhi vol. 55
[13] 서적 Sanguozhi vol. 55
[14] 서적 Sanguozhi vol. 55
[15] 서적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5
[16] 서적 Sanguo Yanyi ch. 43-50
[17] 문서 정황한장주진동감능서반정전(程黄韓蔣周陳董甘凌徐潘丁傳)
[18] 서적 《삼국지》53권 오서 제8 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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