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신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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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견신라사는 신라에 일본에서 파견된 사신을 의미하며, 4세기부터 9세기까지 양국 간의 외교 및 문화 교류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라와 일본은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해 일찍부터 교류가 있었으며, 전쟁과 우호 관계를 반복했다. 특히 백제 멸망 이후 당나라의 위협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견신라사 파견이 빈번해졌다. 견신라사는 신라의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달하고, 일본은 신라에 대한 조공 관계를 통해 자국의 위상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양국 간의 인식 차이와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교류는 종종 어려움을 겪었다. 견신라사를 통해 양국은 문화적, 경제적 교류를 활발히 하였으며, 이는 고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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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신라사 | |
---|---|
견신라사 | |
개요 | |
유형 | 외교 |
파견 시기 | 나라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 초기 |
목적 | 신라와의 외교 관계 유지 및 문화 교류 |
역사적 배경 | |
파견 배경 | 일본이 신라의 선진 문화와 기술을 받아들이고, 정치적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함 |
주요 활동 | 신라 왕과의 회담 공물 교환 문화 및 기술 교류 |
주요 인물 | |
대표적인 견신라사 | 고마노 오비토 시모쓰 (高麗史主飡下津) 등 |
영향 | |
정치적 영향 | 일본과 신라 간의 우호 관계 유지 |
문화적 영향 | 일본에 불교, 유교 등 신라 문화 전파 |
같이 보기 | |
관련 항목 | 견당사 견발해사 신라 사신 일본과 한국의 관계 |
관련 정보 | |
참고 문헌 | 독일 국립 도서관 Ambassadors from the Islands of Immortals: China-Japan Relations in the Han-Tang Period, p. 231. Japan Encyclopedia, pp. 379-380 Ambassadors from the Islands of Immortals: China-Japan Relations in the Han-Tang Period, p. 74. Ambassadors from the Islands of Immortals: China-Japan Relations in the Han-Tang Period, p. 75. 과학과 기술 한국사, 성래박, 2005, p.39 |
2. 역사적 배경
신라와 일본(왜/왜국)은 지리적으로 가까워 교류도 많았지만, 전쟁도 자주 일어났다. 태종 무열왕 7년/사이메이 천황 6년(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고, 문무왕 3년/덴지 천황 2년(663년) 백강구 전투로 당나라와의 관계마저 긴장 상태가 되자 일본에서 견신라사 파견이 빈번해졌다.
일본은 견당사를 통해 당과 관계 개선을 시도했지만, 당의 침공 소문이 돌았고, 문무왕 8년/덴지 천황 7년(668년) 고구려 멸망으로 당의 압력이 커지자 신라와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공동 대응을 위한 교류가 활발해졌다. 백강구 전투에서 일본과 신라의 직접적인 전투가 거의 없었던 점도 일본이 신라와의 관계를 받아들이기 쉬웠던 이유 중 하나였다. 일본은 선진 기술 수입과 해외 정세 조사를 위해 견신라사를 파견했다.
('초기 교류'와 '삼국 통일 전후'의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이미 상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중복을 피하기 위해 생략한다.)
2. 1. 초기 교류
신라와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까워 일찍부터 교류가 많았다. 한국의 《삼국사기》에는 탈해 이사금 3년(59년)과 지마 이사금 12년(123년)에 신라와 왜국 사이에 우호 관계가 성립되었고, 아달라 이사금 20년(173년)에 야마타이 국의 여왕 히미코가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17] 첨해 이사금 7년(253년)에는 왜국 사신 갈라고(葛那古)가 신라에 왔고, 기림 이사금 3년(300년)에도 사신 교환이 있었다. 흘해 이사금 3년(312년) 왜가 신라에 혼인을 요청했을 때 신라는 아찬 급리(急利)의 딸을 왜국 왕자에게 시집보냈다. 35년(344년) 왜국이 다시 혼인을 요청했지만 흘해 이사금은 왕녀가 이미 출가했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이듬해 왜국은 신라와의 국교를 단절했다.[18]4세기 후반 고구려의 팽창에 맞선 백제와의 전쟁에서 신라는 내물 마립간 36년(391년)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 고구려와 가까워졌고, 백제는 왜를 끌어들여 신라를 공격하게 했다. 신라는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고, 《광개토대왕비》 영락 9년(399년)과 10년(400년)조에는 왜병이 신라 국경에 가득 찼고, 5만 고구려군이 신라를 도와 왜병을 임나가라까지 쫓아가 섬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는 실성 마립간 즉위 원년(402년)에 미사흔을 왜국에 인질로 보내 우호를 맺었지만, 이후에도 왜는 신라를 공격했다. 소지 마립간 22년(500년)까지 왜의 신라 공격이 이어지다가 이후 《삼국사기》 기록에서 사라졌다.
이후에도 신라와 왜의 교류는 진흥왕에 의한 가야 제국(諸國) 병합 등 긴장 관계 속에서도 계속되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라는 임나(任那)의 조(調)를 바치기 위한 '조공 사절' 또는 고구려(보덕국) 사신의 송사(送使) 등을 이유로 사신을 파견했고, 왜국에서도 고교쿠 천황 원년(642년)과 2년(643년)에 구사카베노기시 이와카네(草壁吉士磐金)와 구사카베노기시 마아토(草壁吉士眞跡)를 신라에 파견했다. 신라의 외교 담당 관청인 영객전(領客典)은 진평왕 43년(621년)에 이름이 바뀌기 전까지 왜전(倭典)이었는데, 이는 신라의 주요 외교 대상이 왜국이었음을 보여준다. 신라는 조메이 천황을 조문하기 위한 조상사(弔喪使)와 고교쿠 천황 즉위 축하 사절인 하등극사(賀騰極使)를 보내기도 했다.[19] 고토쿠 천황 다이카 2년(646년)에 다카무코노하카샤 구로마로(高向博士黑麻呂)가 사신으로 왔고, 3년(647년)에는 신라의 김춘추가 왜국에 건너가 교섭했는데, 《일본서기》는 김춘추를 신라의 '인질'이라 부르면서 "용모가 아름답고 쾌활하게 담소하였다"고 기록했다. 김춘추의 왜국 방문은 백제의 오랜 동맹국인 왜를 백제로부터 떼어놓기 위한 외교적 술책이었다.
일본에서 견신라사 파견이 빈번해진 것은 태종 무열왕 7년/사이메이 천황 6년(660년) 백제 멸망, 문무왕 3년/덴지 천황 2년(663년) 백강구 전투로 당과의 관계가 긴장된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은 견당사를 통해 당과 관계 개선을 시도했지만, 당의 일본 침공 소문이 돌았고, 문무왕 8년/덴지 천황 7년(668년) 고구려 멸망으로 당의 압력이 커지자 신라와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공동 대응 움직임이 나타났다. 백강구 전투에서 일본과 신라 간 직접 전투가 거의 없었던 점도 일본이 신라와의 교류를 쉽게 받아들인 이유 중 하나였다. 일본은 선진 기술 수입 외에도 해외 정세 조사 목적도 있었다.
670년부터 779년까지 신라가 일본에 파견한 사행(使行)은 39회(또는 47회), 일본이 신라에 파견한 사행은 25회였다. 이는 일본이 당에 견당사를 보낸 횟수(10회)보다 훨씬 많으며, 신라와 일본이 서로의 교류에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다음 표는 고구려 멸망(668년) 이후 신라로 보내진 사신들만 정리한 것이다.
회차 | 파견된 해 | 신라의 국왕 | 사신의 이름 | 사신의 관위 | 일본의 천황 | 일본 연호 | 비고 | 출처 |
---|---|---|---|---|---|---|---|---|
1 | 668년 | 문무왕 8년 | 미치모리노아손 마로(道守臣麻呂) | 소산하(小山下) | 덴지 천황 | 덴지 천황 7년 | 부사는 기시 오시비(吉士小鮪). 신라 사신 김동엄(金東厳)의 귀국에 동행. | 《일본서기》 |
2 | 670년 | 문무왕 10년 | 아즈미노무라지 쓰라타리(阿曇連頬垂) | 소화하(小花下) | 덴지 천황 | 덴지 천황 9년 | 《일본서기》 | |
3 | 675년 | 문무왕 15년 | 오토모노무라지 구니마로(大伴連國麻呂) | 소금상(小錦上) | 덴무 천황 | 덴무 천황 4년 | 부사(副使)는 미야케노기시 이리시(三宅吉士入石). | 《일본서기》 |
4 | 676년 | 문무왕 16년 | 모노노베노무라지 이시카와마로(物部連石上麻呂) | 대을상(大乙上) | 덴무 천황 | 덴무 천황 5년 | 부사는 야마시로노 모모타리(山背百足). | 《일본서기》 |
5 | 681년 | 신문왕 즉위 원년 | 우네메노오미 지쿠라(采女臣竹羅) | 소금하(小錦下) | 덴무 천황 | 덴무 천황 10년 | 소사(小使)는 다이마노 기미타테(當摩公楯). | 《일본서기》 |
6 | 684년 | 신문왕 4년 | 다카무코노오미 마로(高向臣麻呂) | 소금하 | 덴무 천황 | 덴무 천황 13년 | 부사는 소산하(小山下) 쓰노노오미 우시카이(都努臣牛甘). 신라에서 승려 심상(観常)을 데리고 귀국. | 《일본서기》 |
7 | 687년 | 신문왕 7년 | 다나카노아손 노리마로(田中朝臣法麻呂) | 직광사(直廣肆) | 지토 천황 | 지토 천황 원년 | 부사는 추대이(追大貳) 모리노기미 갓타(守君苅田). 지토 천황의 명으로 덴무 천황의 상을 신라에 전함. | 《일본서기》 |
8 | 692년 | 효소왕 즉위 원년 | 오키나가노마히토 오유(息長眞人老) | 직광사 | 지토 천황 | 지토 천황 6년 | 무대이(務大貳) 가와치노 이미키노 무라치(川內忌寸連), 권대이(勤大貳) 오토모노스쿠네 고키미(大伴宿禰子君) 및 학문승(學問僧) 변통(辨通) · 신예(神叡) 동행. | 《일본서기》 |
9 | 695년 | 효소왕 4년 | 오노노아손 게누(小野朝臣毛野) | 직광사 | 지토 천황 | 지토 천황 9년 | 부사는 무대이 이키노 하카토코(伊吉博德). | 《일본서기》 |
10 | 700년 | 효소왕 9년 | 사에키노스쿠네 마로(佐伯宿禰麻呂) | 직광사 | 몬무 천황 | 몬무 천황 4년 | 소사는 근대사(勤大肆) 사미노오미 가사마로(佐味朝臣賀佐麻呂). | 《속일본기》 |
11 | 703년 | 성덕왕 2년 | 하타노아손 히로타리(波多朝臣廣足) | 종5위하 | 몬무 천황 | 다이호 3년 | 효소왕의 죽음을 조문하기 위한 사절로 총 204명.[18] | 《삼국사기》, 《속일본기》 |
12 | 704년 | 성덕왕 3년 | 하타노아야노 도오루(幡文通) | 정6위상 | 몬무 천황 | 게이운 원년 | 《속일본기》 | |
13 | 706년 | 성덕왕 5년 | 미노노무라지 기요마로(美努連浄麻呂) | 종5위하 | 몬무 천황 | 게이운 3년 | 의법(義法)을 데리고 귀국. | 《속일본기》 |
14 | 712년 | 성덕왕 11년 | 미치노기미 오비토나(道君首名) | 종5위하 | 겐메이 천황 | 와도 5년 | 《속일본기》 | |
15 | 718년 | 성덕왕 17년 | 오노노아손 우마카이(小野朝臣馬養) | 정5위하 쇼나곤 | 겐쇼 천황 | 요로 2년 | 《속일본기》 | |
16 | 719년 | 성덕왕 18년 | 시라이노후비토 히로나리(白猪史広成) | 정6위하 대외기(大外記) | 겐쇼 천황 | 요로 3년 | 신라 사신 김장언(金長言)을 돌려보낼 송사(送使). | 《속일본기》 |
17 | 722년 | 성덕왕 21년 | 쓰노후비토 스지마로(津史主治麻呂) | 정7위하 식부대록(式部大錄) | 겐쇼 천황 | 요로 6년 | 《속일본기》 | |
18 | 724년 | 성덕왕 23년 | 하제노스쿠네 도요마로(土師宿禰豊麻呂) | 종5위상 | 쇼무 천황 | 진키 원년 | 《속일본기》 | |
19 | 732년 | 성덕왕 31년 | 쓰노오미 야카누시(角朝臣家主) | 종5위하 | 쇼무 천황 | 덴표 4년 | 《속일본기》 | |
20 | 736년 | 성덕왕 35년 | 아베노아손 쓰구마로(阿倍朝臣繼麻呂) | 종5위하 | 쇼무 천황 | 덴표 8년 | 신라의 무례함을 일본 조정에 보고. | 《속일본기》 및 《만요슈》 권15 |
21 | 740년 | 효성왕 4년 | 기노아손 히토(紀朝臣必登) | 외(外)종5위하 | 쇼무 천황 | 덴표 12년 | 《속일본기》 | |
742년 | 경덕왕 즉위 원년 | 미상 | 미상 | 쇼무 천황 | 덴표 14년 | 신라측이 사신 입국 거부.[21] | 《삼국사기》 | |
22 | 752년 | 경덕왕 11년 | 야마구치노이미키 히토마로(山口忌寸人麻呂) | 정7위하 | 고켄 천황 | 덴표쇼호 4년 | 《속일본기》 | |
23 | 753년 | 경덕왕 12년 | 오노노아손 다모리(小野朝臣田守) | 종5위하 | 고켄 천황 | 덴표쇼호 5년 | 경덕왕은 접견도 하지 않음. | 《삼국사기》, 《속일본기》 |
24 | 779년 | 혜공왕 15년 | 시모스미치노아손 나가히토(下道朝臣長人) | 정6위상 다자이쇼칸(大宰少監) | 고닌 천황 | 호키 10년 | 견당사 판관(遣唐使判官) 우나카미노 미카리(海上三狩) 등을 맞아들여 일본으로 데려옴. | 《속일본기》 |
25 | 799년 | 소성왕 2년 | 오토모노스쿠네 다케마로(大伴宿禰峰麻呂) | 정6위상 | 간무 천황 | 엔랴쿠 18년 | 견신라사 파견 중지. | 《일본후기》 |
26 | 803년 | 애장왕 4년 | 인베노스쿠네 하마나리(斎部宿禰浜成) | 미상 | 간무 천황 | 엔랴쿠 22년 | 당나라 사정에 대한 정보 조사 | 《일본후기》 일문(逸文) (《고어습유》 직어識語에서) |
27 | 804년 | 애장왕 5년 | 오토모노스쿠네 다케마로(大伴宿禰岑萬里) | 정6위상 병부성소승(兵部省少丞) | 간무 천황 | 엔랴쿠 23년 | 견당사선(遣唐使船)에 대한 소식 조사 | 《일본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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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2년 | 헌강왕 8년 | 미상 | 미상 | 요제이 천황 | 간교 6년 | 황금 3백 냥과 명주 1백 개를 신라왕에게 바침. | 《삼국사기》 | |
2. 2. 삼국 통일 전후
신라와 일본(왜/왜국)은 지리적으로 가까워 교류도 많았지만, 전쟁도 자주 일어났다. 한국의 《삼국사기》에는 탈해 이사금 3년(59년)과 지마 이사금 12년(123년)에 신라와 왜국 사이에 우호 관계가 성립되었고, 아달라 이사금 20년(173년)에는 야마타이 국의 여왕 히미코가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17] 첨해 이사금 7년(253년)에는 왜국 사신 갈라고가 신라에 왔고, 기림 이사금 3년(300년)에도 사신 교환이 이루어졌다. 흘해 이사금 3년(312년) 왜가 신라에 혼인을 요청했을 때, 신라는 왕족 대신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냈고, 35년(344년) 왜국이 다시 혼인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듬해 왜국은 신라와의 국교를 단절했다.[18]4세기 후반, 고구려의 팽창과 백제와의 전쟁에서 신라는 내물 마립간 36년(391년)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 고구려와 가까워졌다. 백제는 왜를 끌어들여 신라를 공격했고, 신라는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다. 《광개토대왕비》 영락 9년(399년)과 10년(400년)조에는 왜병이 신라 국경에 가득 찼고, 고구려군 5만이 신라를 도와 왜병을 임나가라까지 쫓아가 물리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는 실성 마립간 즉위 원년(402년)에 미사흔을 왜국에 인질로 보내 우호를 맺었지만, 이후에도 왜는 신라를 계속 공격했다. 소지 마립간 22년(500년)을 마지막으로 《삼국사기》에서 왜의 신라 공격 기록은 사라진다.
이후에도 신라와 왜의 교류는 6세기 진흥왕의 가야 병합 등 긴장 관계 속에서도 계속되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라는 임나의 조를 바치기 위한 '조공 사절' 등을 이유로 사신을 파견했고, 왜국에서도 고교쿠 천황 원년(642년)과 2년(643년)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외교 관계가 유지되었다. 신라의 외교 담당 기관인 영객전은 진평왕 43년(621년)까지 왜전으로 불렸는데, 이는 신라의 주요 외교 대상이 왜국이었음을 보여준다. 신라는 조메이 천황을 조문하기 위한 조상사를 보내기도 했다.[19] 고토쿠 천황 다이카 2년(646년)에 일본에 사신이 온 데 이어, 3년(647년)에는 신라의 김춘추가 직접 왜국에 건너가 교섭했는데, 《일본서기》는 김춘추를 '인질'이라 부르면서도 우호적으로 평가했다. 김춘추의 왜국 방문은 백제에 대한 공세를 준비하면서 왜를 백제로부터 떼어놓기 위한 외교적 목적이었다.
태종 무열왕 7년/사이메이 천황 6년(660년) 백제 멸망, 문무왕 3년/덴지 천황 2년(663년) 백강구 전투로 당과의 관계가 긴장되자, 일본에서 견신라사 파견이 빈번해졌다. 일본은 견당사를 통해 당과 관계 개선을 시도했지만, 당의 침공 소문이 돌았고, 문무왕 8년/덴지 천황 7년(668년) 고구려 멸망으로 당의 압력이 커지자 신라와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공동 대응을 위한 교류가 활발해졌다. 백강구 전투에서 일본과 신라의 직접적인 전투가 거의 없었던 점도 일본이 신라와의 관계를 받아들이기 쉬웠던 이유 중 하나였다. 일본은 선진 기술 수입과 해외 정세 조사를 위해 견신라사를 파견했다.
3. 전개 과정
신라 사신의 귀국에 즈음해 일본 조정은 신라왕에게 배 1척과 비단 50필, 면 500둔, 위(韋) 100매를 선물로 보냈다. 이 무렵부터 신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승려들이 중용되었는데, 고대 일본의 율령관제의 특징인 사등관에서는 신라 관제의 영향을 받은 흔적들이 나타나고 있다. 신라 조정에서는 문무왕 18년(678년)에 병부에서 선박을 맡아보는 선부라는 관청을 독립시켜 개설했고,[18] 효소왕 7년(698년)에 일본의 사신을 효소왕이 친히 왕궁의 숭례전(崇禮殿)에서 접견했다. 성덕왕 2년(703년)에 신라를 방문한 일본 사절단의 총인원은 204명이었다.[18]
그러나 양국 관계는 한반도를 통일하고 국가 의식을 높여 일본과의 대등한 관계를 요구한 신라에 대해 일본이 속국 취급한 것에 의해 악화되었다. 성덕왕 26년(727년) 발해의 사신이 처음으로 일본에 온 뒤, 성덕왕 30년(731년) 일본의 배 3백 척이 신라의 동해안을 습격해 주민들을 약탈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18] 성덕왕 34년(735년)에 헤이조쿄에 들어온 신라 사신은 일본 조정에 자국의 국호가 왕성국(王城國)으로 개칭되었음을 알렸는데, 일본 조정은 신라 사신의 무례함을 트집잡아 돌려보냈다. 이 해에 신라는 당나라로부터 대동강 이남에 대한 신라 영유권을 공식 인정받았으며, 발해에서도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고 있었다.
성덕왕 35년(736년) 일본은 아베노 쓰구마로를 대사(大使)로서 신라에 보냈지만 신라에서 외교 사절로서의 예우를 받지 못했고, 일본은 이세 신궁 등 전국의 여러 신사에 '신라의 무례상'을 보고하며 신라 조복(調伏)을 비는 봉폐를 올렸다(《속일본기》). 이후 일본에서는 한동안 신라의 사절들을 다자이후에서 돌려보내는 등 수도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베노 쓰구마로는 귀국 도중에 병사하고 나머지 견신라사들이 귀국한 뒤, 일본에서는 헤이조쿄를 비롯한 지역에서 천연두로 보이는 역병이 돌았다. 이 역병은 오랫동안 신라에서 반입된 것으로 여겨져 왔지만,[20], 《삼국사기》에도 견신라사가 신라에 온 시점(736년)을 전후해 성덕왕을 비롯한 신라측 요인의 급사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점을 볼 때 견신라사가 일본을 출발한 단계에서 이미 감염자가 있었고 그가 양국을 오가면서 신라와 일본 두 나라에 감염이 확대되었을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
경덕왕 11년(752년), 신라 왕자 한아찬 김태렴 등 7백여 명의 신라 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하여 조공하였다. 이들은 나라의 대불 도금용으로 대량의 금을 일본에 반입해 왔다고 추정되는데, '조공' 형식을 취한 의도는 분명하지 않지만 당시 당나라나 발해와의 관계를 포함한 국제 정세를 고려해 극도로 긴장되어 있던 양국 관계의 긴장 완화를 도모했다고 하는 측면과 교역에 의한 실리 중시라는 측면이 있다고 보여진다. 김태렴은 실제 왕자는 아니었다는 연구가 있어 '왕자'로서의 조공보다 적극적인 통상 활동에 목적이 있었다고도 여겨진다. 경덕왕 12년(753년) 일본의 고켄 천황은 오노노 다모리를 대사로 하는 '회답' 사절단을 신라에 파견했지만, 신라는 "거만하고 예의가 없으므로 왕이 접견도 하지 않았고"(慢而無禮王不見之),[18] 사신들은 경덕왕을 알현도 하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속일본기》에는 이 해에 당나라의 조정에서 열린 신년 의식에서 견당사 오토모노 고마로가 신라 사신과 석차를 다투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신라와 일본 양국의 교류에 장애가 되었던 가장 큰 요인은 일본의 신라에 대한 '번국 사상'이었다. 일본은 당나라와의 현실적인 격차, 옛 백제 · 고구려계 망명인들로부터 비롯된 신라에 대한 적대감으로 '신라 번국관(觀)'을 형성했다. 일본 조정은 '관념'의 세계에서 신라 등 당나라의 형식적인 '번국'들을 자국의 '번국'으로 표기했다. 당시 일본의 지배계층으로 많이 흡수되어 있던 옛 백제 · 고구려 출신들의 신라에 대한 적대관이 그대로 신라와의 외교에도 투영되었다.
경덕왕 18년(759년)에는 에미노 오시카쓰의 주도로 군선 394척, 병사 4만 700명을 동원한 본격적인 '신라 원정 계획'을 세웠으나 국내 정세 변화나 발해 측의 비협조로 중지되었다.
정규 견신라사는 신라 혜공왕 16년(780년)에 정지되고, 견당사의 안부를 묻기 위한 사자가 몇 차례 보내졌을 뿐이다(《일본후기》). 흥덕왕 11년(836년), 일본 태정관에서는 견당사의 배가 바람을 잘못 만나 신라에 표착할 경우를 대비하여 신라측에서 견당사들을 무사히 당나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첩문(牒文)을 무사시노곤노다이죠 기노 미쓰를 시켜 신라의 집사성에 전달하게 했다. 하지만 기노 미쓰는 신라 집사성에 이러한 취지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횡설수설했고, 신라의 집사성에서는 기노 미쓰의 말과 태정관의 첩문 내용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을 의심하여 기노 미쓰를 제대로 사신으로 대접하지 않고 돌려보냈다고 한다(《속일본후기》). 《삼국사기》에는 애장왕 7년(806년)과 헌강왕 4년(878년)에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왔고 국왕이 그들을 조원전(朝元殿)에서 만나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3. 1. 잦은 사절 파견
신라와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까워 교류가 많았다. 《삼국사기》에는 탈해 이사금 3년(59년)과 지마 이사금 12년(123년)에 신라와 왜국 사이에 우호 관계가 있었고, 아달라 이사금 20년(173년)에 야마타이 국의 여왕 히미코가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17] 첨해 이사금 7년(253년)에는 왜국 사신 갈라고(葛那古)가 신라에 왔었고, 기림 이사금 3년(300년)에도 사신 교환이 있었다. 흘해 이사금 3년(312년) 왜가 신라에 혼인을 요청했을 때 신라는 아찬(阿湌) 급리(急利)의 딸을 보냈고, 35년(344년) 왜국이 다시 혼인을 요청했지만 흘해 이사금이 거절하여 이듬해 왜국이 신라와의 국교를 단절하면서 양국 관계는 긴장되었다.[18]고구려의 팽창에 맞선 백제와의 전쟁에서 신라는 내물 마립간 36년(391년) 실성(實聖)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 고구려에 접근했고, 백제는 왜를 끌어들여 신라를 공격했다. 신라는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여 399년과 400년에 고구려군이 신라를 도와 왜병을 격퇴했다. 신라는 402년에 미사흔(未斯欣)을 왜국에 인질로 보내 우호를 맺었지만, 이후에도 왜의 신라 공격은 500년까지 이어지다가 《삼국사기》 기록에서 사라졌다.
이후에도 신라와 왜의 교류는 계속되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라는 '조공 사절' 등을 이유로 사신을 파견했고, 왜국에서도 고교쿠 천황(皇極天皇) 원년(642년)과 2년(643년)에 사신을 신라에 파견했다. 신라의 외교 담당 기관인 영객전(領客典)은 진평왕(眞平王) 43년(621년)까지 왜전(倭典)으로 불렸는데, 이는 신라의 주요 외교 대상이 왜국이었음을 보여준다. 신라는 조메이 천황(舒明天皇)을 조문하기 위한 조상사(弔喪使)를 보내기도 했다.[19] 고토쿠 천황(孝德天皇) 다이카(大化) 2년(646년)에 다카무코노하카샤 구로마로(高向博士黑麻呂)가 사신으로 왔고, 3년(647년)에는 김춘추(金春秋)가 직접 왜국으로 건너가 교섭했는데, 《일본서기》는 김춘추를 '인질'이라 부르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일본에서 견신라사 파견이 빈번해진 것은 660년 백제 멸망과 663년 백강구 전투(白江口戰鬪)로 당나라와의 관계가 긴장된 상황에서, 668년 고구려 멸망으로 당나라의 압력이 커진 신라와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신라와 일본은 공동으로 당나라에 대항하고자 했고, 일본은 선진 기술 수입과 해외 정세 조사 목적도 있었다.
신라 사신 귀국 시 일본 조정은 신라왕에게 배와 비단 등을 선물했다. 이 무렵 신라 유학 승려들이 중용되었고, 일본 율령관제에 신라 관제의 영향이 나타났다. 신라 조정에서는 문무왕(文武王) 18년(678년)에 선부(船府)라는 관청을 설치하고,[18] 효소왕(孝昭王) 7년(698년)에 일본 사신을 효소왕이 직접 접견했다. 성덕왕 2년(703년)에 신라를 방문한 일본 사절단은 204명이었다.[18]
그러나 양국 관계는 신라가 일본과의 대등한 관계를 요구하고 일본이 신라를 속국 취급하면서 악화되었다. 성덕왕(聖德王) 34년(735년) 신라 사신이 국호 개칭을 알리자 일본 조정은 무례함을 이유로 돌려보냈다. 신라는 당나라로부터 패강 이남 영유권을 인정받았고, 발해도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다. 736년 일본은 신라에 사신을 보냈지만 예우를 받지 못했고, 일본은 신사에 '신라의 무례'를 보고하며 신라 조복(調伏)을 빌었다. 이후 일본은 신라 사절을 수도로 들이지 않았다. 경덕왕(景德王) 11년(752년) 신라 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하여 조공했고, 753년 일본 사신을 신라는 접견하지 않았다. 《속일본기》에는 당나라에서 신라 사신과 일본 사신이 석차를 다툰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의 '신라 번국 사상'은 양국 교류의 장애 요인이었다. 일본은 당나라와의 격차, 백제·고구려계 망명인들의 영향으로 신라를 적대시했다. 일본은 신라를 '관념' 속 '번국'으로 취급했고, 백제·고구려 출신들의 적대감이 신라 외교에 반영되었다. 759년 에미노 오시카쓰(惠美押勝)는 '신라 원정 계획'을 세웠으나 중지되었다.
정규 견신라사는 780년에 중지되고, 견당사의 안부를 묻는 사자가 보내졌다. 836년 일본 태정관은 견당사가 신라에 표착할 경우를 대비해 신라에 협조를 요청하는 첩문을 보냈지만, 신라는 의심하여 사신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았다. 《삼국사기》에는 806년과 878년 일본 사신 방문 기록이 있다.
670년부터 779년까지 신라에서 일본에 파견된 사행은 39회(또는 47회), 일본에서 신라로 파견된 사행은 25회였다. 이는 신라와 일본이 서로 교류에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멸망(668년) 이후 신라로 보내진 사신들은 다음과 같다.
회차 | 파견된 해 | 신라의 국왕 | 사신의 이름 | 사신의 관위 | 일본의 천황 | 일본 연호 | 비고 | 출처 | |
---|---|---|---|---|---|---|---|---|---|
1 | 668년 | 문무왕 8년 | 미치모리노아손 마로(道守臣麻呂) | 소산하(小山下) | 덴지 천황 | 덴지 천황 7년 | 부사는 기시 오시비(吉士小鮪). 신라의 사신 김동엄(金東厳)의 귀국에 동행하였다. | 《일본서기》 | |
2 | 670년 | 문무왕 10년 | 아즈미노무라지 쓰라타리(阿曇連頬垂) | 소화하(小花下) | 덴지 천황 | 덴지 천황 9년 | 《일본서기》 | ||
3 | 675년 | 문무왕 15년 | 오토모노무라지 구니마로(大伴連國麻呂) | 소금상(小錦上) | 덴무 천황 | 덴무 천황 4년 | 부사는 미야케노기시 이리시(三宅吉士入石). | 《일본서기》 | |
4 | 676년 | 문무왕 16년 | 모노노베노무라지 이시카와마로(物部連石上麻呂) | 대을상(大乙上) | 덴무 천황 | 덴무 천황 5년 | 부사는 야마시로노 모모타리(山背百足). | 《일본서기》 | |
5 | 681년 | 신문왕 즉위 원년 | 우네메노오미 지쿠라(采女臣竹羅) | 소금하(小錦下) | 덴무 천황 | 덴무 천황 10년 | 소사는 다이마노 기미타테(當摩公楯). | 《일본서기》 | |
6 | 684년 | 신문왕 4년 | 다카무코노오미 마로(高向臣麻呂) | 소금하 | 덴무 천황 | 덴무 천황 13년 | 부사는 소산하(小山下) 쓰노노오미 우시카이(都努臣牛甘). 신라에서 승려 심상(観常)을 데리고 귀국하다. | 《일본서기》 | |
7 | 687년 | 신문왕 7년 | 다나카노아손 노리마로(田中朝臣法麻呂) | 직광사(直廣肆) | 지토 천황(持統天皇) | 지토 천황 원년 | 부사는 추대이(追大貳) 모리노기미 갓타(守君苅田)였다. 지토 천황의 명으로 덴무 천황의 상을 신라에 전하였다. | 《일본서기》 | |
8 | 692년 | 효소왕 즉위 원년 | 오키나가노마히토 오유(息長眞人老) | 직광사 | 지토 천황 | 지토 천황 6년 | 무대이(務大貳) 가와치노 이미키노 무라치(川內忌寸連), 권대이(勤大貳) 오토모노스쿠네 고키미(大伴宿禰子君) 및 학문승(學問僧) 변통(辨通) · 신예(神叡)가 동행하였다. | 《일본서기》 | |
9 | 695년 | 효소왕 4년 | 오노노아손 게누(小野朝臣毛野) | 직광사 | 지토 천황 | 지토 천황 9년 | 부사는 무대이 이키노 하카토코(伊吉博德)였다. | 《일본서기》 | |
10 | 700년 | 효소왕 9년 | 사에키노스쿠네 마로(佐伯宿禰麻呂) | 직광사 | 몬무 천황(文武天皇) | 몬무 천황 4년 | 소사는 근대사(勤大肆) 사미노오미 가사마로(佐味朝臣賀佐麻呂)였다. | 《속일본기》 | |
11 | 703년 | 성덕왕 2년 | 하타노아손 히로타리(波多朝臣廣足) | 종5위하 | 몬무 천황 | 다이호 3년 | 효소왕의 죽음을 조문하기 위한 사절로써 사신단 총인원은 모두 204명이었다.[18] | 《삼국사기》, 《속일본기》 | |
12 | 704년 | 성덕왕 3년 | 하타노아야노 도오루(幡文通) | 정6위상 | 몬무 천황 | 게이운(慶雲) 원년 | 《속일본기》 | ||
13 | 706년 | 성덕왕 5년 | 미노노무라지 기요마로(美努連浄麻呂) | 종5위하 | 몬무 천황 | 게이운 3년 | 의법(義法)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 《속일본기》 | |
14 | 712년 | 성덕왕 11년 | 미치노기미 오비토나(道君首名) | 종5위하 | 겐메이 천황(元明天皇) | 와도(和銅) 5년 | 《속일본기》 | ||
15 | 718년 | 성덕왕 17년 | 오노노아손 우마카이(小野朝臣馬養) | 정5위하 쇼나곤(少納言) | 겐쇼 천황(元正天皇) | 요로(養老) 2년 | 《속일본기》 | ||
16 | 719년 | 성덕왕 18년 | 시라이노후비토 히로나리(白猪史広成) | 정6위하 대외기(大外記) | 겐쇼 천황 | 요로 3년 | 신라의 사신 김장언(金長言)을 돌려보낼 송사(送使)였다. | 《속일본기》 | |
17 | 722년 | 성덕왕 21년 | 쓰노후비토 스지마로(津史主治麻呂) | 정7위하 식부대록(式部大錄) | 겐쇼 천황 | 요로 6년 | 《속일본기》 | ||
18 | 724년 | 성덕왕 23년 | 하제노스쿠네 도요마로(土師宿禰豊麻呂) | 종5위상 | 쇼무 천황 | 진키(神龜) 원년 | 《속일본기》 | ||
19 | 732년 | 성덕왕 31년 | 쓰노오미 야카누시(角朝臣家主) | 종5위하 | 쇼무 천황 | 덴표 4년 | 《속일본기》 | ||
20 | 736년 | 성덕왕 35년 | 아베노아손 쓰구마로(阿倍朝臣繼麻呂) | 종5위하 | 쇼무 천황 | 덴표 8년 | 신라의 무례함을 일본 조정에 보고하였다. | 《속일본기》 및 《만요슈》(万葉集) 권15 | |
21 | 740년 | 효성왕 4년 | 기노아손 히토(紀朝臣必登) | 외(外)종5위하 | 쇼무 천황 | 덴표 12년 | 《속일본기》 | ||
742년 | 경덕왕 즉위 원년 | 미상 | 미상 | 쇼무 천황 | 덴표 14년 | 신라측이 사신의 입국을 거부하였다.[21] | 《삼국사기》 | ||
22 | 752년 | 경덕왕 11년 | 야마구치노이미키 히토마로(山口忌寸人麻呂) | 정7위하 | 고켄 천황 | 덴표쇼호 4년 | 《속일본기》 | ||
23 | 753년 | 경덕왕 12년 | 오노노아손 다모리(小野朝臣田守) | 종5위하 | 고켄 천황 | 덴표쇼호 5년 | 경덕왕은 접견도 하지 않았다. | 《삼국사기》, 《속일본기》 | |
24 | 779년 | 혜공왕 15년 | 시모스미치노아손 나가히토(下道朝臣長人) | 정6위상 다자이쇼칸(大宰少監) | 고닌 천황 | 호키(寶龜) 10년 | 견당사 판관(遣唐使判官) 우나카미노 미카리(海上三狩) 등을 맞아들여 일본으로 데려온다. | 《속일본기》 | |
25 | 799년 | 소성왕 2년 | 오토모노스쿠네 다케마로(大伴宿禰峰麻呂) | 정6위상 | 간무 천황(桓武天皇) | 엔랴쿠(延曆) 18년 | 견신라사 파견이 중지되었다. | 《일본후기》 | |
26 | 803년 | 애장왕 4년 | 인베노스쿠네 하마나리(斎部宿禰浜成) | 미상 | 간무 천황 | 엔랴쿠 22년 | 당나라의 사정에 대한 정보 조사 | 《일본후기》 일문(逸文) (《고어습유古語拾遺》 직어識語에서) | |
27 | 804년 | 애장왕 5년 | 오토모노스쿠네 다케마로(大伴宿禰岑萬里) | 정6위상 병부성소승(兵部省少丞) | 간무 천황 | 엔랴쿠 23년 | 견당사선(遣唐使船)에 대한 소식 조사 | 《일본후기》 | |
806년 | 애장왕 7년 | 미상 | 미상 | 간무 천황 | 엔랴쿠 25년 | 왕이 조원전(朝元殿)으로 불러 접견하였다. | 《삼국사기》 | ||
808년 | 애장왕 9년 | 미상 | 미상 | 헤이제이 천황(平城天皇) | 다이도(大同) 3년 | 신라 국왕은 후한 예의로 대접하였다(王厚禮待之). | 《삼국사기》 | ||
28 | 836년 | 흥덕왕 11년 | 기노 미쓰(紀三津) | 무사시노곤노다이죠 (武藏權大掾) | 닌묘 천황 | 조와 3년 | 견당사의 배가 무사히 당나라로 갈 수 있도록 신라 집사성(執事省)에 요청하는 첩문(牒文)을 가지고 가는 임무였다. |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 | |
864년 | 경문왕 4년 | 미상 | 미상 | 세이와 천황(淸和天皇) | 조간(貞寬) 6년 | 《삼국사기》 | |||
878년 | 헌강왕 4년 | 미상 | 미상 | 요제이 천황(陽成天皇) | 간교(元慶) 2년 | 조원전에서 접견하였다. | 《삼국사기》 | ||
882년 | 헌강왕 8년 | 미상 | 미상 | 요제이 천황 | 간교 6년 | 황금 3백 냥과 명주 1백 개를 신라왕에게 바쳤다. | 《삼국사기》 | ||
통일 신라의 첫 사신 귀국 시 일본 조정은 신라왕에게 배 1척, 비단 50필, 면 500둔, 가죽 100매를 하사했다. 이 무렵 일본 율령 관제에 신라 관제의 영향이 나타나는 등 양국 관계는 양호했다.
그러나 735년 신라 사신이 국호 개칭을 알리자 일본 조정은 책망하고 사신을 돌려보냈다.[10] 통일 신라 이후 '견신라사' 명칭은 일본에 대한 조공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발해 성립 후 신라와 당나라 관계가 회복되었고, 발해도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다. 736년 견신라대사 아베노 쓰구마로가 신라에서 예우를 받지 못하자 일본은 신사에 신라 조복을 빌었고, 이후 신라 사절의 입경을 허락하지 않았다.[10] 아베노 쓰구마로는 귀국 중 병사했고, 이후 일본에서 역병이 유행했다. 이 역병은 신라에서 유입된 것으로 여겨졌다.[11]
752년 신라 왕자 김태렴 등 700여 명이 일본에 조공했다.[10] 이들은 대불 도금용 금을 가져왔고, 양국 관계 완화와 교역 목적이 있었다.[10] 김태렴은 실제 왕자가 아니었고, 통상 활동 목적이 있었다.[13]
753년 당나라에서 일본 사신이 신라 사신과 서열을 다투었다.[10] 이 해 견신라대사는 신라 왕을 알현하지 못했다.[10]
이 사건은 당나라가 일본의 조공 사실을 인정하는지 의문시하는 연구자도 있다. 신라가 일본의 조공 요구를 당나라에 알리면 일당 관계 단절이나 일본 정벌 요구도 가능했다.[14]
759년 에미노 오시카쓰의 신라 정벌 계획은 중지되었다.[15]
《일본후기》에 따르면 780년 정규 견신라사는 중지되었고, 이후 견당사 안부 묻는 사신만 보내졌다.
3. 2. 갈등의 심화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고 국가 의식을 높여 일본과의 대등한 관계를 요구하면서, 양국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일본은 신라를 여전히 속국으로 취급하려 했기 때문이다. 735년 신라 사신이 일본 조정에 국호를 왕성국(王城國)으로 바꾸었다고 알리자, 일본 조정은 신라 사신의 무례함을 트집 잡아 돌려보냈다.[10] 같은 해, 신라는 당나라로부터 대동강 이남의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고, 이는 발해의 성립과 팽창으로 인해 당나라가 발해 후방의 신라와의 관계를 회복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736년 일본은 아베노 쓰구마로를 신라에 보냈지만, 신라는 외교 사절로 예우하지 않았다. 일본은 이세 신궁 등 전국의 신사에 '신라의 무례함'을 보고하고 신라 조복(調伏)을 빌었다. 이후 일본은 한동안 신라 사절들을 다자이후에서 돌려보내는 등 수도 입경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베노 쓰구마로는 귀국 도중 병사했고, 나머지 견신라사들이 귀국한 뒤 일본에서는 천연두로 추정되는 역병이 돌았다. 이 역병은 오랫동안 신라에서 유입된 것으로 여겨졌지만,[20], 견신라사 일행이 신라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병사한 점, 삼국사기에도 견신라사가 신라에 온 시점(736년)을 전후해 신라 측 요인이 급사한 사실이 기록된 점을 볼 때, 견신라사가 일본을 출발할 때 이미 감염자가 있었고 그가 양국을 오가면서 감염이 확대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752년 신라 왕자 김태렴 등 700여 명의 신라 사절단이 일본에 조공했다.[10] 이들은 도다이지 대불 도금용으로 대량의 금을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10] 조공 형식을 취한 의도는 불분명하지만, 당시 당나라나 발해와의 관계 등 국제 정세를 고려해 긴장된 양국 관계를 완화하려는 목적과 교역을 통한 실리 추구라는 측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0] 김태렴은 실제 왕자가 아니었다는 연구도 있어,[12] 왕자로서의 조공보다는 적극적인 통상 활동에 목적이 있었다고도 여겨진다.[13]
753년 일본은 '회답' 사절단을 신라에 파견했지만, 신라는 이들이 "거만하고 예의가 없다"며 왕이 접견하지 않았고,[18] 사신들은 경덕왕을 알현하지도 못한 채 돌아가야 했다. 같은 해 당나라 조정에서 열린 신년 의식에서 견당사 오토모노 고마로가 신라 사신과 석차를 다투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신라와 일본의 교류에 장애가 되었던 가장 큰 요인은 일본의 '번국(蕃國) 사상'이었다. 일본은 자국의 제도 개혁 과정에서 당나라를 모델로 삼았지만, 현실적인 격차에서 오는 한계와 옛 백제, 고구려계 망명인들로부터 비롯된 신라에 대한 적대감이 '신라 번국관(觀)'을 형성한 요인이었다. 당시 일본의 영향 아래 있던 '외국'은 에미시, 구마소, 하야토 등 열도 오지 주민들 정도였고, 그나마 이들도 일본을 '종주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현실에서, 일본 조정은 '관념' 속에서 신라 등을 자국의 '번국'으로 여겼다. 옛 백제, 고구려 출신들의 신라에 대한 적대감은 일본의 외교에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이러한 긴장 관계 속에서 759년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군선 394척, 병사 4만 700명을 동원한 '신라 원정 계획'을 세웠으나, 국내 정세 변화와 발해 측의 비협조(혹은 암묵적 거부)로 중지되었다.
정규 견신라사는 780년에 중지되었고, 이후에는 견당사의 안부를 묻는 사신이 몇 차례 보내졌을 뿐이다(《일본후기》).
3. 3. 외교적 노력과 한계
신라 사신의 귀국에 즈음해 일본 조정은 신라왕에게 배 1척과 비단 50필, 면 500둔, 위(韋) 100매를 선물로 보냈다.[18] 이 무렵부터 신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승려들이 중용되었는데, 고대 일본의 율령관제의 특징인 사등관에서는 신라 관제의 영향을 받은 흔적들이 나타나고 있다.문무왕 18년/덴무 천황 7년(678년)에 병부에서 선박을 맡아보는 선부라는 관청을 독립시켜 개설하기도 하고,[18] 효소왕 7년/몬무 천황 2년(698년)에 일본의 사신을 효소왕이 친히 왕궁의 숭례전(崇禮殿)에서 접견하기도 했다. 성덕왕 2년/다이호 3년(703년)에 신라를 방문한 일본 사절단의 총인원은 204명이나 되었다.[18]
그러나 양국 관계는 한반도를 통일하고 국가 의식을 높여 일본과의 대등한 관계를 요구한 신라에 대해 일본이 속국 취급한 것에 의해 악화되었다. 성덕왕 26년/쇼무 천황 진키 4년(727년) 발해의 사신이 처음으로 일본에 온 뒤, 성덕왕 30년/쇼무 천황 덴표 4년(731년) 일본의 배 3백 척이 신라의 동해안을 습격해 주민들을 약탈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18] 성덕왕 34년/쇼무 천황 덴표 7년(735년)에 헤이조쿄에 들어온 신라 사신은 일본 조정에 자국의 국호가 왕성국(王城國)으로 개칭되었음을 알렸는데, 일본 조정은 신라 사신의 무례함을 트집잡아 돌려보냈다.
성덕왕 35년/덴표 8년(736년) 일본은 아베노 쓰구마로를 대사(大使)로서 신라에 보냈지만 그는 신라에서 외교 사절로서의 예우를 받지 못했고, 일본은 이세 신궁 등 전국의 여러 신사에 '신라의 무례상'을 보고하며 신라 조복(調伏)을 비는 봉폐를 올렸다(《속일본기》). 이후 일본에서는 한동안 신라의 사절들을 다자이후에서 돌려보내는 등 수도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경덕왕 11년/고켄 천황 덴표쇼호 4년(752년), 신라 왕자 한아찬 김태렴 등 7백여 명의 신라 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하여 조공하였다. 이들 신라 사절단은 나라의 대불 도금용으로 대량의 금을 일본에 반입해 왔다고 추정된다. 경덕왕 12년/덴표쇼호 5년(753년) 2월에 일본의 고켄 천황은 오노노 다모리를 대사로 하는 '회답' 사절단을 신라에 파견했지만, 이들 일본 사신들을 신라는 "거만하고 예의가 없으므로 왕이 접견도 하지 않았고"(慢而無禮王不見之),[18] 사신들은 경덕왕을 알현도 하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신라와 일본 양국의 교류에 장애가 되었던 가장 큰 요인은 일본의 신라에 대한 '번국 사상'에 있었다. 당시 일본의 지배계층으로 많이 흡수되어 있던 옛 백제 · 고구려 출신들의 신라에 대한 적대관이 그대로 신라와의 외교에도 투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긴장관계 속에서, 경덕왕 18년/덴표호지 3년(759년)에는 에미노 오시카쓰의 주도로 군선 394척, 병사 4만 700명을 동원한 본격적인 '신라 원정 계획'을 세웠으나 국내 정세 변화나 발해 측의 비협조(내지는 암묵적인 거부)로 중지되었다.
정규 견신라사는 신라 혜공왕 16년/고닌 천황 호키 11년(780년)에 정지되고, 견당사의 안부를 묻기 위한 사자가 몇 차례 보내졌을 뿐이다(《일본후기》). 흥덕왕 11년/닌묘 천황 조와 3년(836년), 일본 태정관에서는 혹시라도 견당사의 배가 바람을 잘못 만나 신라에 표착할 경우를 대비하여, 그 경우 신라측에서 나서서 견당사들을 무사히 당나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첩문(牒文)을, 무사시노곤노다이죠 기노 미쓰를 시켜 신라의 집사성에 전달하게 했다. 하지만 기노 미쓰는 신라 집사성에 이러한 취지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횡설수설했고, 신라의 집사성에서는 기노 미쓰의 말과 태정관의 첩문 내용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을 의심하여 기노 미쓰를 제대로 사신으로 대접하지 않고 돌려보냈다고 한다(《속일본후기》). 한편 《삼국사기》에는 애장왕 7년(806년) 봄 3월과 헌강왕 4년(878년) 8월에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왔고 국왕이 그들을 조원전(朝元殿)에서 만나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4. 주요 사건
신라와 일본은 서로 사신을 주고받으며 교류했다. 신라는 일본에 배, 비단, 면 등을 선물로 보냈고, 일본의 율령관제는 신라 관제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18] 신라는 문무왕 18년(678년)에 선박을 관리하는 관청인 선부(船府)를 설치했고, 효소왕 7년(698년)에는 일본 사신을 왕궁에서 접견했다. 703년에는 204명의 일본 사절단이 신라를 방문하기도 했다.[18]
그러나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고 일본에 대등한 관계를 요구하면서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 일본은 신라를 속국으로 취급하려 했기 때문이다. 731년에는 일본 배 300척이 신라 동해안을 약탈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18] 735년에는 신라가 국호를 왕성국으로 바꿨다고 알리자 일본은 무례하다며 사신을 돌려보냈다. 같은 해 신라는 당나라로부터 패강 (대동강) 이남 영유권을 인정받았고, 발해도 신라와 가까운 일본에 사신을 보내고 있었다.
736년 일본은 아베노 쓰구마로를 신라에 보냈지만, 신라는 외교 사절로 대우하지 않았다.( → 아베노 쓰구마로 사건) 이후 일본은 신라 사절의 수도 출입을 금지하기도 했다.
752년 신라 아찬 김태렴 등 700여 명의 신라 사절단이 일본에 조공했는데, 이는 양국 관계 완화와 교역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태렴 사절단 파견) 그러나 753년 신라는 일본 사신을 거만하다며 만나주지 않았고, 당나라에서는 신라와 일본 사신 사이에 자리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본이 신라를 '번국'으로 생각했던 것이 양국 교류의 가장 큰 문제였다. 일본은 당나라를 모델로 삼았지만 현실적인 격차가 있었고, 백제·고구려 출신 망명인들의 영향으로 신라에 대한 적대감이 있었다.
759년에는 후지와라 나카마로 주도로 대규모 신라 원정 계획이 세워졌지만 국내외 정세 변화로 중지되었다.(→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신라 정벌 계획) 정규 견신라사는 780년에 중단되었고, 이후 몇 차례 사신이 오갔을 뿐이다. 836년 일본은 견당사가 신라에 표착할 경우를 대비해 당나라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지만, 신라는 의심하며 제대로 대접하지 않았다. 《삼국사기》에는 806년과 878년에 일본 사신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4. 1. 백강구 전투 (663년)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고, 663년 백강구 전투로 당나라와의 관계마저 긴장상태가 되어버린 것은 일본에서 견신라사 파견이 빈번해진 배경이 되었다.[17]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과 당은 견당사를 실시하는 등으로 관계 개선하고 있었지만, 일본 국내에는 장차 당나라가 일본으로 쳐들어 올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았다.[18] 668년 고구려 멸망으로 당나라의 압력이 가중되자, 신라와 일본은 공동으로 당나라에 대항하고자 하는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빈번한 교류가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19] 백강구 전투에서 일본과 신라는 직접적인 전투가 거의 없었던 점도 일본 측이 신라와의 관계를 받아들이기 쉬웠던 이유 중 하나로 여겨지며, 일본은 선진 기술 수입 외에도 해외 정세를 조사할 목적도 있었다고 여겨진다.4. 2. 아베노 쓰구마로 사건 (736년)
735년 (덴표 7년) 헤이조쿄(平城京)에 들어온 신라 사신은 일본 조정에 자국의 국호가 왕성국(王城國)으로 개칭되었음을 알렸는데, 일본 조정은 신라 사신의 무례함을 트집잡아 돌려보냈다.[18]736년 (덴표 8년) 일본은 아베노 쓰구마로(阿倍繼麻呂)를 대사(大使)로서 신라에 보냈지만, 그는 신라에서 외교 사절로서의 예우를 받지 못했다.[20] 이에 일본은 이세 신궁(伊勢神宮) 등 전국의 여러 신사에 '신라의 무례'를 보고하며 신라 조복(調伏)을 비는 봉폐를 올렸다(《속일본기》). 이후 일본에서는 한동안 신라 사절들을 다자이후(大宰府)에서 돌려보내는 등 수도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베노 쓰구마로는 귀국 도중에 병사하고 나머지 견신라사들이 귀국한 뒤, 일본에서는 헤이조쿄를 비롯한 지역에서 천연두로 보이는 역병이 돌았다. 이 역병은 오랫동안 신라에서 유입된 것으로 여겨져 왔지만,[20] 수행원이었던 유키노무라지 야카마로(雪連宅満)가 신라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병사한 점이나, 《삼국사기》에도 견신라사가 신라에 온 시점(736년)을 전후해 성덕왕(聖德王)을 비롯한 신라측 요인의 급사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점을 볼 때, 견신라사가 일본을 출발한 단계에서 이미 감염자가 있었고 그가 양국을 오가면서 신라와 일본 두 나라에 감염이 확대되었을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
4. 3. 김태렴 사절단 파견 (752년)
경덕왕 11년/고켄 천황 덴표쇼호 4년, 신라 한아찬 김태렴 등 700여 명의 신라 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하여 조공하였다.[18] 이들은 나라의 대불 도금용으로 대량의 금을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조공' 형식을 취한 의도는 분명하지 않지만 당시 당나라나 발해와의 관계를 포함한 국제 정세를 고려해 극도로 긴장되어 있던 양국 관계의 긴장 완화를 도모했다는 측면과 교역에 의한 실리 중시라는 측면이 있다고 보여진다.[18] 김태렴은 실제 왕자가 아니었다는 연구가 있어, '왕자'로서의 조공보다 적극적인 통상 활동에 목적이 있었다고도 여겨진다.[18]4. 4.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신라 정벌 계획 (759년)
759년(천평보자 3년), 에미노 오시카쓰는 발해와 연계하여 군선 394척, 병사 4만 700명을 동원하는 본격적인 신라 원정 계획(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신라 정벌 계획)을 세웠으나, 국내 정치 정세 변화와 발해 측의 사정 변경 등으로 인해 중지되었다.[15]5. 문화 교류
신라와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까워 잦은 전쟁이 있었지만, 교류도 활발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탈해 이사금 3년(59년)과 지마 이사금 12년(123년)에 이미 양국 간 우호 관계가 성립되었고, 아달라 이사금 20년(173년)에는 야마타이 국의 여왕 히미코가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17] 첨해 이사금 7년(253년)에는 왜국 사신 갈라고(葛那古)가 신라 객관에 머물렀으며, 기림 이사금 3년(300년)에도 사신 교환이 이루어졌다. 흘해 이사금 3년(312년) 왜국이 신라에 혼인을 요청하여 신라 아찬 급리(急利)의 딸을 왜국 왕자에게 시집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344년 왜국이 다시 혼인을 요청하자 흘해 이사금은 이를 거절했고, 이듬해 왜국은 신라와의 국교를 단절하며 양국 관계는 긴장 상태로 접어들었다.[18]
4세기 후반, 고구려가 팽창하고 백제와 전쟁을 벌이자, 신라는 내물 마립간 36년(391년)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 고구려와 가까워지려 했다. 백제는 왜를 끌어들여 신라를 공격했고, 신라는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다. 『광개토대왕비』 영락 9년(399년)과 10년(400년)조에는 왜병이 신라 국경에 가득 찼으며, 5만 명의 고구려군이 신라를 도와 왜병을 임나가라까지 몰아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는 실성 마립간 즉위 원년(402년)에 내물 마립간의 아들 미사흔을 왜국에 인질로 보내 우호를 맺었지만, 왜는 다시 신라를 공격했다. 소지 마립간 22년(500년)까지 왜의 신라 공격이 이어지다가 《삼국사기》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이후에도 신라와 왜의 교류는 진흥왕의 가야 병합 등 긴장 관계 속에서도 지속되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라는 임나(任那)의 조(調)를 바치기 위한 '조공 사절' 등을 파견했고, 왜국에서도 고교쿠 천황 원년(642년)과 2년(643년)에 사신을 보내는 등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신라의 외교 담당 관청이었던 영객전(領客典)은 진평왕 43년(621년)에 이름이 바뀌기 전까지 왜전(倭典)으로 불렸는데, 이는 신라의 주요 외교 대상이 왜국이었음을 보여준다. 신라는 고교쿠 천황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절과 조메이 천황을 조문하는 사절을 보내기도 했다.[19] 고토쿠 천황 다이카 2년(646년)에는 일본에서 사신이 왔고, 3년(647년)에는 신라의 김춘추가 직접 왜국으로 건너가 왜국 조정과 교섭했다. 《일본서기》는 김춘추를 '인질'이라고 표현하면서도 "용모가 아름답고 쾌활하게 담소하였다"라고 기록하는 등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김춘추의 왜국 방문은 백제에 대한 공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백제의 오랜 동맹국이었던 왜를 백제로부터 떼어놓기 위한 외교적 전략의 일환이었다.
태종 무열왕 7년/사이메이 천황 6년(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문무왕 3년/덴지 천황 2년(663년) 백강구 전투로 당나라와의 관계마저 긴장 상태가 되자, 일본은 견신라사 파견을 빈번하게 실시했다. 일본은 당나라와 관계를 개선하면서도 당나라의 침공을 우려했고, 문무왕 8년/덴지 천황 7년(668년) 고구려 멸망으로 당나라의 압력이 가중된 것에 위기감을 느낀 신라와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양국 간 교류가 활발해졌다. 백강구 전투에서 일본과 신라 사이에 직접적인 전투가 거의 없었던 점도 일본이 교류를 수용하기 쉬웠던 이유 중 하나였다. 일본은 선진 기술 수입 외에도 해외 정세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신라 사신이 귀국할 때 일본 조정은 신라 왕에게 배 1척, 비단 50필, 면 500둔, 가죽 100매를 선물로 보냈다. 이 무렵부터 신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승려들이 일본에서 중용되었으며, 고대 일본의 율령관제에서는 신라 관제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나타난다.
그러나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후 일본에 대등한 관계를 요구하면서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 성덕왕 26년/쇼무 천황 진키 4년(727년) 발해의 사신이 처음으로 일본에 온 뒤, 성덕왕 30년/쇼무 천황 덴표 4년(731년)에는 일본의 배 3백 척이 신라의 동해안을 습격하여 주민들을 약탈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18] 성덕왕 34년/쇼무 천황 덴표 7년(735년)에는 신라 사신이 일본 조정에 자국의 국호가 왕성국(王城國)으로 바뀌었음을 알렸는데, 일본 조정은 신라 사신의 무례함을 트집 잡아 돌려보냈다. 이 해에 신라는 당나라로부터 패강(대동강) 이남에 대한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으며, 발해도 신라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고 있었다.
성덕왕 35년/덴표 8년(736년) 일본은 아베노 쓰구마로(阿倍繼麻呂)를 대사(大使)로 하여 신라에 보냈지만, 신라에서 외교 사절로서의 예우를 받지 못했다. 이에 일본은 이세 신궁 등 전국의 여러 신사에 '신라의 무례'를 보고하며 신라를 굴복시키기 위한 제사를 지냈다(《속일본기》). 이후 일본에서는 한동안 신라 사절들이 다자이후에서 돌아가는 등 수도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편, 아베노 쓰구마로가 귀국하던 도중 병사하고 나머지 견신라사들이 귀국한 뒤, 일본에서는 헤이조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천연두로 보이는 전염병이 크게 유행했다. 이 전염병은 오랫동안 신라에서 유입된 것으로 여겨졌지만,[20] 수행원이었던 유키노무라지 야카마로(雪連宅満)가 신라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병사한 점, 《삼국사기》에도 견신라사가 신라에 온 시점(736년)을 전후하여 성덕왕을 비롯한 신라 측 주요 인사들이 갑자기 사망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견신라사가 일본을 출발한 시점에서 이미 감염자가 있었고 그가 양국을 오가면서 신라와 일본 두 나라에 감염이 확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경덕왕 11년/고켄 천황 덴표쇼호 4년(752년)에는 신라 왕자 김태렴 등 7백여 명의 신라 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하여 조공했다. 이들은 나라 대불 도금에 필요한 대량의 금을 일본에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조공' 형식을 취한 의도는 명확하지 않지만, 당시 당나라나 발해와의 관계를 포함한 국제 정세를 고려하여 극도로 긴장되어 있던 양국 관계의 긴장을 완화하려는 측면과 교역을 통한 실리 추구라는 측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김태렴은 실제 왕자가 아니었다는 연구가 있어, '왕자'로서의 조공보다는 적극적인 통상 활동에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경덕왕 12년/덴표쇼호 5년(753년) 2월에 일본의 고켄 천황은 오노노 다모리(小野田守)를 대사로 하는 '답례' 사절단을 신라에 파견했지만, 이들 일본 사신들을 신라는 "거만하고 예의가 없으므로 왕이 접견도 하지 않았고"(慢而無禮王不見之),[18] 사신들은 경덕왕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속일본기》에는 이 해에 당나라 조정에서 열린 신년 의식에서 견당사 오오토모노 고마로(大伴古麻呂)가 신라 사신과 자리다툼을 벌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 사건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신라와 일본 양국의 교류에 가장 큰 걸림돌은 일본의 '신라 번국(蕃國) 사상'이었다. 일본은 제도 개혁 과정에서 당나라를 궁극적인 모델로 삼았지만, 현실적으로 당나라와의 격차가 컸고, 당시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 조정의 지배 계층으로 흡수된 옛 백제·고구려계 망명인들로부터 비롯된 신라에 대한 적대감이 이러한 '신라 번국관'을 형성하는 요인이었다. 당시 세계 최강의 제국으로서 수많은 '번국'을 거느리고 있었던 당나라(신라는 당나라와 조공·책봉 형식의 외교 관계를 맺었으므로 형식상 당나라의 '번국' 중 하나였다)와는 달리,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외국'은 아이누의 조상 등이 섞여 있는 혼슈 북부 지방의 선주민인 에미시나 규슈 지역 선주민인 구마소, 하야토 등 열도의 오지 주민들 정도에 불과했고, 그나마 이들마저도 빈번하게 전쟁을 일으키는 등 일본을 무조건적으로 '종주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현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조정은 현실이 아닌 '관념'의 세계에서 신라 등 당나라의 형식적인 '번국'들을 자국의 '번국'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당나라와 거리가 멀어 신라와 달리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은 적이 없었던 점은 일본의 이와 같은 '제국적 몽상'에 더욱 불을 붙였다). 게다가 당시 일본의 지배 계층으로 많이 흡수되어 있던 옛 백제·고구려 출신들의 신라에 대한 적대감이 그대로 신라와의 외교에도 반영되었다.
이러한 긴장 관계 속에서 경덕왕 18년/덴표호지 3년(759년)에는 에미노 오시카쓰의 주도로 군선 394척, 병사 4만 700명을 동원한 본격적인 '신라 원정 계획'을 세웠으나, 국내 정세 변화와 발해 측의 비협조(또는 암묵적인 거부)로 중지되었다.
정규 견신라사는 신라 혜공왕 16년/고닌 천황 호키 11년(780년)에 중단되었고, 이후에는 견당사의 안부를 묻기 위한 사신이 몇 차례 보내졌을 뿐이다(《일본후기》). 흥덕왕 11년/닌묘 천황 조와 3년(836년) 일본 태정관(太政官)에서는 견당사의 배가 바람을 잘못 만나 신라에 표착할 경우를 대비하여 신라 측에서 견당사들을 무사히 당나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첩문(牒文)을 무사시노곤노다이죠(武藏權大掾) 기노 미쓰(紀三津)를 시켜 신라의 집사성(執事省)에 전달하게 했다. 그러나 기노 미쓰는 신라 집사성에 이러한 취지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횡설수설했고, 신라 집사성에서는 기노 미쓰의 말과 태정관 첩문의 내용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을 의심하여 기노 미쓰를 제대로 사신으로 대접하지 않고 돌려보냈다고 한다(《속일본후기》). 한편, 《삼국사기》에는 애장왕 7년(806년) 봄 3월과 헌강왕 4년(878년) 8월에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왔고 국왕이 그들을 조원전(朝元殿)에서 만나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670년부터 779년까지 신라에서 일본에 파견된 사행(使行)은 39회, 일본에서 신라로 파견된 사행은 25회였으며, 이는 같은 기간 동안 일본이 당나라로 보낸 견당사(10회) 사행보다 많은 수치이다.
신라는 668년 고구려 멸망부터 678년 나당전쟁이 종결되고 698년 발해가 건국되면서 당나라와의 국교가 정상화되기까지, 외교 관계가 한동안 단절되어 있던 시기에는 일본 외에 신라 사신들이 왕래할 수 있는 나라가 없었다. 당나라와의 국교가 정상화된 뒤에도 신라와 일본 간 사신 왕래는 계속되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당나라와 달리 철저한 세습 귀족 지배 사회라는 점에서 신라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보다 신라를 '참고'하기가 더 수월했고,[22] 신라의 가야금, 숟가락, 가위, 칼, 유리잔, 사리기, 그리고 양털로 짠 꽃무늬 방석자리(花氈) 등 신라 물품에 대한 일본 귀족층의 선호 경향 때문에 신라와의 외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속일본기》권36 고닌키(光仁紀) 호키 11년(779년) 정월에 기록된 신라 사신단의 기록과 관련하여, 《삼국사기》 설총열전 및 『서당화상비』(8세기경)에는 신라 사신단의 수행원이었던 설 판관(薛判官), 즉 대판관(大判官) 한나마(韓奈麻) 설중업(薛仲業)이 일본국 진인(眞人), 즉 오우미노 미후네(淡海三船)로부터 그가 지어준 한시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설중업의 할아버지이기도 한 원효(元曉)의 저서 《금강삼매경론》을 읽고 감탄했던 오우미노 미후네가 신라에서 사신으로 온 설중업이 원효의 손자라는 것을 알고 반가워하며 시를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 김유신열전과 《속일본기》 권35 고닌키 호키 10년(778년)조 및 같은 책 권36 호키 11년조에는 김유신의 현손(玄孫)으로서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김암(金巖)을 본 일본왕(고닌 천황?)이 그의 현명함을 보고 일본에 잡아두려 했는데, 마침 당나라에서 와 있던 사신 고학림(高鶴林)이 김암을 알아보고 반기는 것을 보자, 김암이 당나라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인물임을 알고 억류하지 못했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다.
5. 1. 신라의 선진 문물 수용
신라 조정에서는 문무왕 18년/덴무 천황 7년(678년)에 병부(兵部)에서 선박을 맡아보는 선부(船府)라는 관청을 독립시켜 개설했다.[18] 효소왕 7년/몬무 천황 2년(698년)에 일본의 사신을 효소왕이 친히 왕궁의 숭례전(崇禮殿)에서 접견하기도 했다. 성덕왕 2년/다이호 3년(703년)에 신라를 방문한 일본 사절단의 총인원은 204명이나 되었다.[18]신라로부터 일본에 유입된 문물은 황금(도다이지 대불의 도금을 위한 것) 외에도 은 등의 금속, 고급 직물, 낙타, 앵무새, 공작 등 일본에서는 서식하지 않고 자주 보기도 드문 동물도 있었다. 또한 도다이지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된 보물 가운데 하나인 조모립녀병풍(鳥毛立女屏風)의 하단에 쓰인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신라 물품에 대한 구매 신청서)를 근거로, 향료, 약물, 안료, 염료, 기물 등도 일본에 유입되어 그 가운데 필요한 것은 일본 조정이 확보하고 나머지는 잉여품은 원하는 사람에게 불하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일본에서 하쿠호 문화(白鳳文化)가 융성했던 시기에는 신라에 대한 일본 유학승 파견이 14회에 달했는데, 665년에서 718년까지 일본에서 신라로 유학을 가는 일본 유학승(총 13명)이 당나라로 가는 유학승(같은 기간에 총 9명)보다 많았다. (8세기 후반 이후로는 일본과 당나라 사이의 불교 교류가 점차 적극화되어 신라로 가는 유학승의 수는 줄어든다.) 736년 일본에 도래해 화엄종을 개창한 심상(審祥)은 신라인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에서 유입된 물품으로는 앞서 언급한 금 외에도 은 등의 금속, 고급 직물, 낙타, 앵무새, 공작 등 진귀한 동물들도 있었다. 또한, 쇼소인 보물인 조모립녀병풍의 하장에 사용된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를 근거로, 향료, 약물, 안료, 염료, 기물, 조도 등도 유입되었으며, 그중 필수품을 조정에서 확보한 후, 남은 물품은 희망자에게 불하되었다.[13]
5. 2. 일본 유학승의 신라 유학
하쿠호 문화(白鳳文化)가 융성했던 665년에서 718년까지 일본에서 신라로 유학을 가는 일본 유학승은 총 13명으로, 같은 기간에 당나라로 가는 유학승(총 9명)보다 많았다. 8세기 후반 이후로는 일본과 당나라 사이의 불교 교류가 점차 활발해지면서 신라로 가는 유학승의 수는 줄어들었지만, 736년 귀국하는 일본 사신을 따라 일본에 와서 화엄종을 개창한 심상(審祥)은 신라인으로 알려져 있다.[22]5. 3. 인적 교류
신라와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까워 전쟁도 많았지만 교류도 활발했다. 《삼국사기》에는 탈해 이사금 3년(59년)과 지마 이사금 12년(123년)에 양국 간 우호 관계가 있었고, 아달라 이사금 20년(173년)에는 야마타이 국의 여왕 히미코가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17] 첨해 이사금 7년(253년)에는 왜국 사신 갈라고(葛那古)가 신라 객관에 머물렀고, 기림 이사금 3년(300년)에도 사신 교환이 있었다. 흘해 이사금 3년(312년) 왜가 신라에 혼인을 요청했을 때, 신라는 아찬 급리(急利)의 딸을 왜국 왕자에게 시집보냈다. 35년(344년) 왜국이 다시 혼인을 요청했지만 흘해 이사금은 거절했고, 이듬해 왜국은 신라와의 국교를 단절했다.[18]4세기 후반, 고구려의 팽창에 맞선 백제와의 전쟁에서 신라는 내물 마립간 36년(391년)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다. 백제는 왜를 끌어들여 신라를 공격했고, 신라는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다. 『광개토대왕비』 영락 9년(399년)과 10년(400년)조에는 왜병이 신라 국경에 가득 찼고, 5만 고구려군이 신라를 도와 왜병을 임나가라까지 격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신라는 실성 마립간 즉위 원년(402년)에 내물 마립간의 왕자 미사흔을 왜국에 인질로 보내 우호를 맺었지만, 왜는 다시 신라를 공격했다. 소지 마립간 22년(500년)까지 왜의 신라 공격은 이어지다 《삼국사기》 기록에서 사라졌다.
이후에도 신라와 왜의 교류는 진흥왕의 가야 병합 등 긴장 속에서도 계속되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라는 임나(任那)의 조(調)를 바치기 위한 '조공 사절' 등을 파견했고, 왜국에서도 고교쿠 천황 원년(642년)과 2년(643년)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신라의 외교 담당 관청인 영객전(領客典)은 진평왕 43년(621년) 이전까지 왜전(倭典)으로 불렸는데, 이는 신라의 주요 외교 대상이 왜국이었음을 보여준다. 신라는 고교쿠 천황 즉위 축하 사절과 조메이 천황 조문 사절을 보내기도 했다.[19] 고토쿠 천황 다이카 2년(646년)에 일본 사신이 왔고, 3년(647년)에는 신라 김춘추가 직접 왜국에 건너가 교섭했다. 《일본서기》는 김춘추를 '인질'이라 부르면서도 우호적으로 평가했다. 김춘추의 방문은 백제에 대한 공세를 준비하며 왜를 백제로부터 떼어놓기 위한 외교적 술책이었다.
태종 무열왕 7년/사이메이 천황 6년(660년) 백제 멸망, 문무왕 3년/덴지 천황 2년(663년) 백강구 전투 이후 일본과 당의 관계가 긴장되면서 일본의 견신라사 파견이 빈번해졌다. 일본은 당과의 관계를 개선하면서도 당의 침공을 우려했고, 문무왕 8년/덴지 천황 7년(668년) 고구려 멸망으로 당의 압력이 커진 신라와의 이해가 일치하여 양국 교류가 활발해졌다. 백강구 전투에서 양국의 직접 전투가 거의 없었던 점도 일본이 교류를 받아들이기 쉬웠던 이유 중 하나였다. 일본은 선진 기술 수입과 해외 정세 조사 목적도 있었다. 신라 사신 귀국 시 일본 조정은 신라왕에게 배, 비단, 면 등을 선물했다. 이 시기 신라 유학 후 귀국한 승려들이 중용되었고, 일본 율령관제에는 신라 관제의 영향이 나타난다.
신라 조정은 문무왕 18년/덴무 천황 7년(678년)에 선부(船府)를 설치하고,[18] 효소왕 7년/몬무 천황 2년(698년)에 일본 사신을 효소왕이 직접 접견했다. 성덕왕 2년/다이호 3년(703년)에 신라를 방문한 일본 사절단은 204명이었다.[18]
그러나 신라가 한반도 통일 후 일본에 대등한 관계를 요구하면서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 성덕왕 26년/쇼무 천황 진키 4년(727년) 발해 사신이 일본에 온 후, 성덕왕 30년/쇼무 천황 덴표 4년(731년) 일본 배 3백 척이 신라 동해안을 약탈했다.[18] 성덕왕 34년/쇼무 천황 덴표 7년(735년) 신라 사신이 국호 개칭을 알렸으나, 일본 조정은 무례함을 이유로 돌려보냈다. 이 해 신라는 당으로부터 패강(대동강) 이남 영유권을 인정받았고, 발해도 신라와 가까운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다.
성덕왕 35년/덴표 8년(736년) 일본은 사신을 보냈지만 신라에서 외교 사절 대우를 받지 못했고, 일본은 신사에 '신라의 무례'를 보고하며 신라 조복(調伏)을 빌었다(《속일본기》). 이후 일본은 신라 사절을 다자이후에서 돌려보냈다. 일본에서 천연두로 추정되는 역병이 돌았는데, 신라에서 유입된 것으로 여겨졌지만,[20] 견신라사 출발 전부터 감염자가 있었고 양국에 감염이 확대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경덕왕 11년/고켄 천황 덴표쇼호 4년(752년), 신라 왕자 김태렴 등 7백여 명의 신라 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하여 조공했다. 이들은 나라 대불 도금용 금을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며, '조공' 형식은 양국 관계 완화와 교역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태렴은 실제 왕자가 아니었다는 연구도 있다. 경덕왕 12년/덴표쇼호 5년(753년) 일본 사절단이 신라에 파견됐지만, 신라는 "거만하고 예의가 없다"며 왕이 접견하지 않았다.[18] 《속일본기》에는 당 조정에서 일본 사신이 신라 사신과 석차를 다툰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의 '신라 번국 사상'은 양국 교류의 장애물이었다. 이는 일본이 당을 모델로 삼았지만 현실적 격차가 있었고, 백제·고구려계 망명인들의 신라 적대감이 반영된 결과였다. 일본은 신라를 '번국'으로 여겼지만, 실제 영향력은 에미시, 구마소, 하야토 등 열도 오지 주민에게만 미쳤고, 이들마저 일본을 종주국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 지배층에 흡수된 백제·고구려 출신들의 적대감이 신라 외교에 투영되었다.
경덕왕 18년/덴표호지 3년(759년) 에미노 오시카쓰 주도로 '신라 원정 계획'이 세워졌으나 중지되었다.
정규 견신라사는 혜공왕 16년/고닌 천황 호키 11년(780년)에 정지되고, 견당사 안부 확인 사자만 파견되었다(《일본후기》). 흥덕왕 11년/닌묘 천황 조와 3년(836년) 일본은 견당사가 신라에 표착할 경우 당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첩문을 보냈지만, 신라는 의심하여 사신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았다(《속일본후기》). 《삼국사기》에는 애장왕 7년(806년)과 헌강왕 4년(878년) 일본 사신 방문 기록이 있다.
670년부터 779년까지 신라에서 일본에 파견된 사행은 39회, 일본에서 신라로 파견된 사행은 25회였으며, 이는 같은 기간 일본의 견당사(10회)보다 많다.
신라에서 일본에 유입된 문물은 금, 은, 고급 직물, 낙타, 앵무새, 공작 등이었다. 쇼소인 보물 조모립녀병풍 하단의 「매신라물해」를 통해 향료, 약물, 안료, 염료, 기물 등도 유입되었고, 일본 조정이 필요한 것을 확보하고 나머지는 불하했다는 견해가 있다.
신라는 668년 고구려 멸망부터 678년 나당전쟁 종결, 698년 발해 건국까지 외교 단절 시기에 일본 외에 왕래할 나라가 없었고, 당과 국교 정상화 후에도 사신 왕래는 계속되었다. 일본은 신라를 '벤치마킹'하기 쉬웠고,[22] 신라 물품에 대한 일본 귀족층의 애호 경향도 있었다.
《속일본기》 호키 11년(779년) 기록과 《삼국사기》, 『서당화상비』에는 신라 사신 수행원 한나마 설중업(薛仲業)이 오우미노 미후네에게 한시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원효의 손자인 설중업을 오우미노 미후네가 반기며 시를 지어준 것이다. 《삼국사기》와 《속일본기》에는 김유신 현손 김암을 일본왕이 잡아두려 했으나, 당 사신 고학림(高鶴林)이 알아보자 억류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다.
일본 하쿠호 문화 융성기에는 신라에 일본 유학승 파견이 14회에 달했고, 665년-718년 일본 유학승(13명)이 당 유학승(9명)보다 많았다. 736년 일본에 온 화엄종 개창자 심상(審祥)은 신라인으로 알려져 있다.
6. 견신라사 일람
670년부터 779년까지 신라에서 일본에 파견된 사행(使行)은 39회(47회라고도 함)이며, 같은 기간에 신라로 파견된 일본 사행은 25회였다. 이 기간 동안 일본에서 당나라로 견당사를 보낸 것은 불과 10차례에 불과했다. 일본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사신을 잘 파견하지도 않았던 당나라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신라와 일본 두 나라가 서로의 교류에 적극적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18]
다음의 표는 고구려 멸망(668년) 이후에 신라로 보내진 사신들만을 다루었다.
회차 | 파견된 해 | 신라의 국왕 | 사신의 이름 | 사신의 관위 | 일본의 천황 | 일본 연호 | 비고 | 출처 | |
---|---|---|---|---|---|---|---|---|---|
1 | 668년 | 문무왕 8년 | 미치모리노아손 마로(道守臣麻呂) | 소산하(小山下) | 덴지 천황 | 덴지 천황 7년 | 부사는 기시 오시비(吉士小鮪). 신라의 사신 김동엄(金東厳)의 귀국에 동행하였다. | 《일본서기》 | |
2 | 670년 | 문무왕 10년 | 아즈미노무라지 쓰라타리(阿曇連頬垂) | 소화하(小花下) | 덴지 천황 | 덴지 천황 9년 | 《일본서기》 | ||
3 | 675년 | 문무왕 15년 | 오토모노무라지 구니마로(大伴連國麻呂) | 소금상(小錦上) | 덴무 천황 | 덴무 천황 4년 | 부사(副使)는 미야케노기시 이리시(三宅吉士入石). | 《일본서기》 | |
4 | 676년 | 문무왕 16년 | 모노노베노무라지 이시카와마로(物部連石上麻呂) | 대을상(大乙上) | 덴무 천황 | 덴무 천황 5년 | 부사는 야마시로노 모모타리(山背百足). | 《일본서기》 | |
5 | 681년 | 신문왕 즉위 원년 | 우네메노오미 지쿠라(采女臣竹羅) | 소금하(小錦下) | 덴무 천황 | 덴무 천황 10년 | 소사(小使)는 다이마노 기미타테(當摩公楯). | 《일본서기》 | |
6 | 684년 | 신문왕 4년 | 다카무코노오미 마로(高向臣麻呂) | 소금하(小錦下) | 덴무 천황 | 덴무 천황 13년 | 부사는 소산하(小山下) 쓰노노오미 우시카이(都努臣牛甘). 신라에서 승려 심상(観常)을 데리고 귀국. | 《일본서기》 | |
7 | 687년 | 신문왕 7년 | 다나카노아손 노리마로(田中朝臣法麻呂) | 직광사(直廣肆) | 지토 천황 | 지토 천황 원년 | 부사는 추대이(追大貳) 모리노기미 갓타(守君苅田). 지토 천황의 명으로 덴무 천황의 상을 신라에 전함. | 《일본서기》 | |
8 | 692년 | 효소왕 즉위 원년 | 오키나가노마히토 오유(息長眞人老) | 직광사(直廣肆) | 지토 천황 | 지토 천황 6년 | 무대이(務大貳) 가와치노 이미키노 무라치(川內忌寸連), 권대이(勤大貳) 오토모노스쿠네 고키미(大伴宿禰子君) 및 학문승(學問僧) 변통(辨通) · 신예(神叡)가 동행. | 《일본서기》 | |
9 | 695년 | 효소왕 4년 | 오노노아손 게누(小野朝臣毛野) | 직광사(直廣肆) | 지토 천황 | 지토 천황 9년 | 부사는 무대이 이키노 하카토코(伊吉博德). | 《일본서기》 | |
10 | 700년 | 효소왕 9년 | 사에키노스쿠네 마로(佐伯宿禰麻呂) | 직광사(直廣肆) | 몬무 천황 | 몬무 천황 4년 | 소사는 근대사(勤大肆) 사미노오미 가사마로(佐味朝臣賀佐麻呂). | 《속일본기》 | |
11 | 703년 | 성덕왕 2년 | 하타노아손 히로타리(波多朝臣廣足) | 종5위하 | 몬무 천황 | 다이호 3년 | 효소왕의 죽음을 조문하기 위한 사절로써 사신단 총인원은 모두 204명.[18] | 《삼국사기》, 《속일본기》 | |
12 | 704년 | 성덕왕 3년 | 하타노아야노 도오루(幡文通) | 정6위상 | 몬무 천황 | 게이운 원년 | 《속일본기》 | ||
13 | 706년 | 성덕왕 5년 | 미노노무라지 기요마로(美努連浄麻呂) | 종5위하 | 몬무 천황 | 게이운 3년 | 의법(義法)을 데리고 귀국. | 《속일본기》 | |
14 | 712년 | 성덕왕 11년 | 미치노기미 오비토나(道君首名) | 종5위하 | 겐메이 천황 | 와도 5년 | 《속일본기》 | ||
15 | 718년 | 성덕왕 17년 | 오노노아손 우마카이(小野朝臣馬養) | 정5위하 쇼나곤 | 겐쇼 천황 | 요로 2년 | 《속일본기》 | ||
16 | 719년 | 성덕왕 18년 | 시라이노후비토 히로나리(白猪史広成) | 정6위하 대외기(大外記) | 겐쇼 천황 | 요로 3년 | 신라의 사신 김장언(金長言)을 돌려보낼 송사(送使). | 《속일본기》 | |
17 | 722년 | 성덕왕 21년 | 쓰노후비토 스지마로(津史主治麻呂) | 정7위하 식부대록(式部大錄) | 겐쇼 천황 | 요로 6년 | 《속일본기》 | ||
18 | 724년 | 성덕왕 23년 | 하제노스쿠네 도요마로(土師宿禰豊麻呂) | 종5위상 | 쇼무 천황 | 진키 원년 | 《속일본기》 | ||
19 | 732년 | 성덕왕 31년 | 쓰노오미 야카누시(角朝臣家主) | 종5위하 | 쇼무 천황 | 덴표 4년 | 《속일본기》 | ||
20 | 736년 | 성덕왕 35년 | 아베노아손 쓰구마로(阿倍朝臣繼麻呂) | 종5위하 | 쇼무 천황 | 덴표 8년 | 신라의 무례함을 일본 조정에 보고. | 《속일본기》 및 《만요슈》 권15 | |
21 | 740년 | 효성왕 4년 | 기노아손 히토(紀朝臣必登) | 외(外)종5위하 | 쇼무 천황 | 덴표 12년 | 《속일본기》 | ||
742년 | 경덕왕 즉위 원년 | 미상 | 미상 | 쇼무 천황 | 덴표 14년 | 신라측이 사신의 입국을 거부.[21] | 《삼국사기》 | ||
22 | 752년 | 경덕왕 11년 | 야마구치노이미키 히토마로(山口忌寸人麻呂) | 정7위하 | 고켄 천황 | 덴표쇼호 4년 | 《속일본기》 | ||
23 | 753년 | 경덕왕 12년 | 오노노아손 다모리(小野朝臣田守) | 종5위하 | 고켄 천황 | 덴표쇼호 5년 | 경덕왕은 접견도 하지 않음. | 《삼국사기》, 《속일본기》 | |
24 | 779년 | 혜공왕 15년 | 시모스미치노아손 나가히토(下道朝臣長人) | 정6위상 다자이쇼칸(大宰少監) | 고닌 천황 | 호키 10년 | 견당사 판관(遣唐使判官) 우나카미노 미카리(海上三狩) 등을 맞아들여 일본으로 데려옴. | 《속일본기》 | |
25 | 799년 | 소성왕 2년 | 오토모노스쿠네 다케마로(大伴宿禰峰麻呂) | 정6위상 | 간무 천황 | 엔랴쿠 18년 | 견신라사 파견 중지. | 《일본후기》 | |
26 | 803년 | 애장왕 4년 | 인베노스쿠네 하마나리(斎部宿禰浜成) | 미상 | 간무 천황 | 엔랴쿠 22년 | 당나라의 사정에 대한 정보 조사. | 《일본후기》 일문(逸文) (《고어습유》 직어識語에서) | |
27 | 804년 | 애장왕 5년 | 오토모노스쿠네 다케마로(大伴宿禰岑萬里) | 정6위상 병부성소승(兵部省少丞) | 간무 천황 | 엔랴쿠 23년 | 견당사선(遣唐使船)에 대한 소식 조사. | 《일본후기》 | |
806년 | 애장왕 7년 | 미상 | 미상 | 간무 천황 | 엔랴쿠 25년 | 왕이 조원전으로 불러 접견. | 《삼국사기》 | ||
808년 | 애장왕 9년 | 미상 | 미상 | 헤이제이 천황 | 다이도 3년 | 신라 국왕은 후한 예의로 대접. | 《삼국사기》 | ||
28 | 836년 | 흥덕왕 11년 | 기노 미쓰(紀三津) | 무사시노곤노다이죠 (武藏權大掾) | 닌묘 천황 | 조와 3년 | 견당사의 배가 무사히 당나라로 갈 수 있도록 신라 집사성에 요청하는 첩문(牒文)을 가지고 가는 임무. | 《속일본후기》 | |
864년 | 경문왕 4년 | 미상 | 미상 | 세이와 천황 | 조간 6년 | 《삼국사기》 | |||
878년 | 헌강왕 4년 | 미상 | 미상 | 요제이 천황 | 간교 2년 | 조원전에서 접견. | 《삼국사기》 | ||
882년 | 헌강왕 8년 | 미상 | 미상 | 요제이 천황 | 간교 6년 | 황금 3백 냥과 명주 1백 개를 신라왕에게 바침. | 《삼국사기》 | ||
통일 신라 시대의 것. 이 목록은 가장 일반적인 28회 설을 채택하고 있다.
7. 항로
일본의 견신라사가 신라로 오기 위해 택했던 항로에 대해 정사 기록에는 거의 기재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덴표 8년(736년) 견신라사 대사였던 아베 계마로 일행이 읊었던 노래가 《만요슈(萬葉集)》 제15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것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16]
일행은 나니와의 항구를 출발한 후, 세토나이카이(瀬戸內海)를 지났다. 도중 히가시히로시마시 가자야우라, 구라하시 섬, 나카쓰시 분칸우라 등을 경유하여 쓰쿠시 관에 도착했다. 그 후, 한정(가라토마리, 노코테이, 현 노코 섬), 히키쓰정(현 이토시마시)에서 코마시마정(현 가미섬)으로 건너가 이키 섬, 아사지우라, 쓰시마시 다케시키우라를 거쳐 신라로 향했다.[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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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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青木和夫 1965ほか
[17]
문서
신라의 이러한 대왜(對倭) 사신 파견은 당시 왜의 침공에 맞서기 위한 군사적 대책과 함께 왜국에 대해 병행되었던 외교적 대책이기도 했다.
[18]
문서
《삼국사기》
[19]
문서
《일본서기》
[20]
문서
《속고사담》권5 · 《진첨낭초》권5 제23
[21]
문서
같은 해에 해당하는 《속일본기》 덴표 14년 2월 3일조 기사에, 신라의 사신인 [[사찬]](沙湌) 김흠영(金欽英) 등 187인이 일본의 [[다자이후]](太宰府)에 도착하였으나 일본 조정에서는 새로운 수도를 짓는데 아직 궁실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자이후에서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어주고 그냥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삼국사기》에서 말한 경덕왕 즉위 원년 10월에 신라에 온 일본 사신들이란 김흠영 등이 일본에서 돌아올 때에 함께 온 송사(送使)로서 신라 조정에서는 일본 조정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데에 대한 대응으로 일본 사신들의 입국을 거부하고 돌려보낸 것으로 보인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년, p.229.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년,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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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덴무 천황 13년([[684년]]) 일체 귀족층을 '야쿠사노 가바네(八色の姓)'라는, 마히토(眞人) 등 여덟 가지 세습적 집단으로 일률적으로 나눈 개혁은 분명히 신라의 성골 · 진골 · 6두품 · 5두품 등 신분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여덟 가지의 세습적 집단 중에서 세 개의 최상위 집단인 마히토와 아손(朝臣), 스쿠네(宿禰)는 주로 황족과 황족의 외척 등으로 구성됐는데, 이런 의미에서 신라의 진골에 해당됐다고 보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치품의 사용을 가바네(姓)에 따라 제한하는 율령국가의 ‘소비 규범화’ 시스템도 신라를 통해 받아들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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