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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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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세동은 1936년 전라남도 고흥군 출생으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에 참여하여 전두환의 집권을 도왔으며, 대통령 경호실장과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역임했다. 5공화국 시절 각종 공작에 관여했으며,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안기부장에서 사퇴했다. 이후 12·12 군사 반란 및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 관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사면되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사퇴했고, 2004년 총선에서 낙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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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동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장세동
출생일1936년 9월 27일
출생지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면
거주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래미안 퍼스티지
본관인동
종교개신교
별명호 남촌(南村)
배우자지경자
자녀4녀
군 경력
복무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1960년~1984년
지휘특수전사령부 제3공수특전여단장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
참전베트남 전쟁
12.12 군사 반란
학력
학력육군사관학교 16기
공직
직책국가안전기획부장
내각노신영 내각
임기1985년 2월 19일~1987년 5월 25일
대통령전두환
총리노신영
차관제1차장
김근수(1985년 1월 19일 ~ 1986년 1월 8일)
이해구(1986년 1월 8일 ~ 1987년 5월 29일)

제2차장
손장래(1985년 5월 20일 ~ 1986년 1월 8일)
이학봉(1986년 1월 8일 ~ 1988년 5월 16일)

제3차장
육완식(1986년 4월 13일 ~ 1990년)
전임노신영
후임안무혁
직책2대통령경호실장
임기21981년 7월 11일~1985년 2월 19일
대통령2전두환
전임2정동호
후임2안현태

2. 생애

인동 장씨로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태어났다. 육군사관학교 16기로 졸업 후 육군 소위로 임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중대장과 감찰관으로 복무했다. 12.12 사태 및 5·17 비상계엄에 가담하였고, 제5공화국 출범 이후 대통령 경호실장과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역임하였다.

5공 청문회에서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으며, 용팔이 사건이 밝혀지자 스스로 책임을 지고 복역했다. 1995년 석방되었으나, 12.12 군사 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수사로 다시 투옥되었다가 1997년 12월 사면되었다. 허삼수, 허문도, 허화평, 박희도, 정호용, 노신영 등과 함께 전두환의 최측근 중 한 명이었다. 2002년 대선에 출마했으나 대선 하루 전 사퇴하였다.

2. 1. 초기 활동

전라남도 고흥군 출신으로, 본관은 인동 장씨이다.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유년 시절에는 가족과 함께 서울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성동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16기로 입학했다. 1960년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되었고, 육사 졸업생 동문회 조직인 북극성회와 하나회에 가입했다.

이후 제1공수특전단 중대장으로 복무하고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대위 시절인 1965년부터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1966년 4월 19일부터 20일까지 뀌년 북부 24km의 탄광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었으나, 고통을 참고 전투를 계속하여 부대 사기를 높였고, 베트콩 43명을 사살하고 1개 중대를 전멸시키는 전공을 세워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10] 이때 위문을 위해 병원에 온 전두환으로부터 "자네야말로 진정한 군인이다"라는 말을 듣고 "그때 그 말을 듣고 평생 충성을 다할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1]

이듬해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대대 참모로 배치되었는데, 마침 그 부대장은 전두환이었다. 이후 장세동은 전두환의 오른팔로서의 삶을 걷게 된다.

베트남 전쟁 후에는 육군본부 및 경호실에서 근무했다.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대령) 시절인 1979년, 전두환 등 하나회 구성원들이 주도한 12·12 사태에 참여했다. 전두환 등 쿠데타 가담자들은 경복궁에 주둔하고 있던 제30경비단에 집결하여 쿠데타를 지휘했다.

2. 2. 군 복무

1960년 육군사관학교 16기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60년대 중반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중대장과 감찰관으로 복무하였으며, 뀌년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다.[10] 이때 전두환과 만나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귀국 후 대통령 경호실 경호관,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12·12 군사 반란 당시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으로서 전두환에게 협력하였으며, 5·17 비상계엄에도 관여하였다. 이후 제3공수특전여단장을 거쳐 제5공화국 출범 이후에는 대통령 경호실장,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역임하였다.

2. 3. 12.12 군사반란과 5.17 비상계엄

1979년 12·12 군사 반란 당시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으로 전두환에게 협력하였다. 이때 그는 장태완 등과의 일전도 불사했다 한다. 훗날 1996년의 재판에서 그는 육군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장군이 경복궁을 공격하려 했을 때 "탱크 한 대 당 72발 씩의 포탄을 적재케 하고, 이미 한 발은 탑재한 상태였다. 일촉즉발의 불바다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1980년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특전사령부 작전참모로 부임해서는 그해 5월의 5·17 비상계엄에도 관여하였다.[10]

2. 4. 정치 활동

12·12 군사 반란 당시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으로 전두환에게 협력하였다. 1996년 재판에서 그는 육군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장군이 경복궁을 공격하려 했을 때 "탱크 한 대 당 72발 씩의 포탄을 적재케 하고, 이미 한 발은 탑재한 상태였다. 일촉즉발의 불바다가 되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10] 1980년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특수전사령부 작전참모로 부임해서는 그해 5월 5·17 비상계엄에도 관여하였다.

1981년부터 1985년까지 대통령 경호실장을 거쳐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재직하며 제5공화국의 실세로 떠올랐고, 노태우-노신영과 함께 전두환의 후계자로 지목될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다. 1983년 8월 5일 전두환 대통령의 동남아시아 5개국 순방길에 사절단 80여 명과 함께 대통령 수행원으로 버마를 방문했으나, 대통령 전두환과 함께 뒤늦게 출발하여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에서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귀국 후 그해 10월 15일 아웅산 참사를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으나 전두환이 반려시켰다.

1984년 12월 7일 육군 소장에서 육군 중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예편하였다. 예비역 신분으로 대통령 경호실장을 계속하다가 1985년 2월 18일 사퇴했고, 다음 날 노신영의 뒤를 이어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전격 발탁되었다. 안기부장으로 재직하면서 금강산 댐과 평화의 댐 공작,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용팔이 사건 등 각종 국가 안보 문제와 간첩사건 등을 공작 및 조작했다.

1986년부터는 전두환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대표최고위원 노태우와 공공연히 신경전을 벌이며 갈등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 6.10 항쟁 과정에서 박종철이 사망하자 학생들의 데모는 격화되었고, 장세동은 스스로 책임을 지고 안기부장에서 사퇴했다.

1988년 5공청문회에 참여하였으나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의 추궁에 모르쇠로 일관하였다. 1988년 11월 4일부터 5차례에 걸쳐 진행된 <일해(日海)재단청문회>에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과 함께 증인으로 소환되었으나 모르쇠로 일관하였다. 한편 그는 자신을 처벌하려는 여론이 높아지자 노태우 대통령을 향해 "가만히 있어라. 내가 입을 열면 여러 사람이 다친다"고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93년 2월, 1987년 4월의 신한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인 용팔이 사건에 안기부 직원들이 개입한 사실이 밝혀지고, 이택돈 등이 검거되자 장세동은 그해 3월 "내 선에서 처리된 사건"이라며 윗선은 없다고 밝히고 스스로 경찰에 출석, 기소중지로 풀려났다. 이후 민주당에서는 그를 경찰에 고소했고, 원심은 1년 6월형이 내려졌으며 거듭된 항소심 재판 끝에 1994년 4월 12일 대법원 형사 2부에서 최종형 확정을 받고 1년 6개월간 복역하였다.

그는 수감 기간 동안 운동 전까지 책만 읽었고 교도관들에게 절대 반말을 쓰지 않았다. 그는 거의 흐트러짐 없이 행동하여[11] 화제가 되었다. 다른 고위층들과 달리 사식을 반입하지 않았고 교도관이나 사무원에게 욕설 한마디 하지 않았다.

석방 직후 1995년부터 서석재, 박계동 등의 폭로로 전직 대통령 비자금을 수사하는 가운데 다시 12.12 군사 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수사를 받았으며, 1996년 12.12 군사 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어 1997년 4월 대법원 재판에서 징역 3년 6월형을 확정 선고받았으나, 그 해 12월 정권교체 후 사면, 복권되었다. 사면 직후 전두환의 집을 방문하여 "신고합니다. 각하! 휴가 잘 다녀 왔습니다!"라고 거수경례하여 화제가 되었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가자 으뜸의 나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대선을 하루 앞두고 후보직을 공식 사퇴하였고, 이후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서초구 을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그해 4월의 선거에서 3위로 낙선하였다.

2. 5. 6공 이후

1993년 2월, 1987년 4월 신한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인 용팔이 사건에 안기부 직원들이 개입한 사실이 밝혀지고, 이택돈 등이 검거되자 장세동은 그해 3월 "내 선에서 처리된 사건"이라며 윗선은 없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경찰에 출석, 기소중지로 풀려났다.[11] 이후 민주당에서는 그를 경찰에 고소했고, 원심은 1년 6월형이 내려졌으며 거듭된 항소심 재판 끝에 1994년 4월 12일 대법원 형사 2부에서 최종형 확정을 받고 1년 6개월간 복역하였다.[11]

수감 기간 동안 장세동은 운동 전까지 책만 읽었고 교도관들에게 절대 반말을 쓰지 않았으며, 다른 고위층들과 달리 사식을 반입하지 않고 교도관이나 사무원에게 욕설 한마디 하지 않는 등 거의 흐트러짐 없이 행동하여[11] 화제가 되었다.

석방 직후 1995년부터 서석재, 박계동 등의 폭로로 전직 대통령 비자금을 수사하는 가운데 다시 12.12 군사 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수사를 받았으며, 1996년 12.12 군사 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어 1997년 4월 대법원 재판에서 징역 3년 6월형을 확정 선고받았으나, 그 해 12월 정권교체 후 사면, 복권되었다. 사면 직후 전두환의 집을 방문하여 "신고합니다. 각하! 휴가 잘 다녀 왔습니다!"라고 거수경례하여 화제가 되었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가자 으뜸의 나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대선을 하루 앞두고 후보직을 공식 사퇴하였고, 이후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서울 서초구 을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그해 4월의 선거에서 3위로 낙선하였다.

2. 6. 정계 활동

1993년 2월 1987년 4월의 신한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인 용팔이 사건에 안기부 직원들이 개입한 사실이 밝혀지고, 이택돈 등이 검거되자 장세동은 그해 3월 내 선에서 처리된 사건이라고 밝히고 윗선은 없다며 스스로 경찰에 출석, 기소중지로 풀려났다.[11] 이후 민주당에서는 그를 경찰에 고소했고, 원심은 1년 6월형이 내려졌으며 거듭된 항소심 재판 끝에 1994년 4월 12일 대법원 형사 2부에서 최종형 확정을 받고 1년 6개월간 복역하였다.[11]

장세동은 운동 전까지 책만 읽었고 교도관들에게 절대 반말을 쓰지 않았다.[11] 그는 거의 흐트러짐 없이 행동하여[11] 화제가 되었다. 다른 고위층들과 달리 사식을 반입하지 않았고 교도관이나 사무원에게 욕설 한마디 하지 않았다.[11]

석방 직후 1995년부터 서석재, 박계동 등의 폭로로 전직 대통령 비자금을 수사하는 가운데 다시 12.12 군사 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수사를 받았으며 1996년 12.12 군사 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어 1997년 4월 대법원 재판에서 징역 3년 6월형을 확정 선고받았으나 그 해 12월 정권교체 후 사면, 복권되었다. 사면 직후 전두환의 집을 방문하여 "신고합니다. 각하! 휴가 잘 다녀 왔습니다!"고 거수 경례하여 화제가 되었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가자 으뜸의 나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대선을 하루 앞두고 후보직을 공식 사퇴하였고, 이후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서울특별시 서초구 을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그해 4월의 선거에서 3위로 낙선하였다.

3. 평가

12·12 군사 반란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전두환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던 장세동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5공 청문회에서 "사나이는 자신을 알아준 사람을 위해 죽는 법이다", "차라리 내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는 한이 있어도 각하가 구속되는 것은 막겠다"고 발언하여 신군부 최고의 충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8] 전두환에 대한 확고한 충성심을 보였으며,[2] 침묵적이고 의리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8]

베트남 전쟁 참전 중 부상당했을 때 군의관에게 "제 부하부터 치료해 주십시오. 저는 마지막으로 돌봐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한 일화나,[2] 옥중에서도 규율을 지키며 교도관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한 점은[9]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반면, 5공 청문회에서 노무현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기억이 안 난다'고 모르쇠로 일관하여, 냉혈한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4. 학력

5. 경력

연도경력
1960년 2월 23일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졸업 (16기)
1967년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대대 작전장교
1977년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
1980년특수전사령부 제3공수특전여단장
1981년 7월 ~ 1985년대통령 경호실장
1984년 12월 7일중장으로 진급과 함께 예비역 편입
1985년 2월 19일 ~ 1987년국가안전기획부장
1986년 1월 ~ 1986년 12월민주정의당 중앙상임고문 겸 당무위원
2002년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 후 사퇴


6. 연기한 배우들

7.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락비고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대통령16대무소속사퇴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국회의원17대무소속3,693표3.74%3위낙선


참조

[1] 뉴스 중대장 부상하자 치열한 육박전 동아일보 1966-05-03
[2] 블로그 張世東が全斗煥を裏切っていない理由 http://blog.joins.co[...]
[3] 뉴스 1987년 4월 육박전 사건 1987-04-20
[4] 뉴스 김옥분 피살 사건 1987-01
[5] 웹사이트 「그럴 듯한 부인」을 안한 김 대통령 「자주 전략가」 임동원 특보의 눈물 http://www.ohmynews.[...] 2003-02-17
[6] 웹사이트 [오늘의 인물]9월 27일 장세동-일해재단 기금 모금 주도한 전두환의 충복 http://www.etoday.co[...] 2016-09-27
[7] 웹사이트 전두환처럼…6억3천만원 뭉개는 장세동 http://www.hani.co.k[...] 2013-05-19
[8] 웹사이트 전직 원장들의 얼굴 역대정권 ‘전리품’의 기구한 팔자 꼴 정권교체 후 월권, 남용 정치적 심판 http://www.econotalk[...] 2013-08
[9] 웹사이트 현진영이 감옥서 만난 장세동은? “감옥내 인지도 대통령 수준” http://www.newsen.co[...]
[10] 뉴스 중대장 부상하자 치열한 육박전 동아일보 1966-05-03
[11] 웹사이트 현진영이 감옥서 만난 장세동은? “감옥내 인지도 대통령 수준” http://www.newsen.co[...]
[12] 기타
[1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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