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고대사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기원후 1000년까지 인류 문명의 주요 발전 과정을 다룬다. 이 시기에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중국, 그리스, 로마 등 다양한 문명이 흥망성쇠를 겪었다. 선사 시대는 문자가 발명되기 전 시기로, 석기 시대로 구분되며, 인류의 이동, 농업 혁명, 금속 사용, 문자 발명 등이 이루어졌다. 주요 지역별 역사로는 서아시아, 이란, 히타이트, 이스라엘, 페니키아, 아라비아, 아프리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동아시아, 아메리카, 유럽 등이 있으며, 각 지역은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고대 시대에는 종교와 철학,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중요한 발전이 있었으며, 발전 단계 사관에서는 고대 사회를 노예제가 생산의 주체를 담당하는 사회로 정의하지만, 오늘날에는 이러한 단선적인 발전 단계설은 의문시되고 있다.
발전 단계 사관에서는 무계급 사회였던 원시 시대에서 계급 사회인 고대로 발전했다고 보며, 고대를 계급 사회의 첫 단계로 파악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고대를 노예가 생산의 주체가 된 시기로 정의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단선적인 발전 단계설은 의문시되고 있다. 고대 사회에서 노예는 보편적으로 나타났지만,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처럼 노예가 생산의 주체가 된 사회는 많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동양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대 시대를 구분한다.
2. 주요 문명 연표
시대 지역 주요 문명 및 사건 기원전 3000년 ~ 기원전 2000년 메소포타미아 메소포타미아 문명 엘람 원 엘람 이집트 고대 이집트 문명 인도 인더스 문명 중국 삼황오제 아메리카 북아메리카,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모두 고대기 유럽 고대기 기원전 2000년 ~ 기원전 1000년 엘람 고 엘람 중국 고대 중국 기원전 1000년 ~ 기원전 1년 메소포타미아 신 엘람 (~기원전 539년) 엘람 신 엘람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 (기원전 550년 ~ 기원전 330년) 이집트 고대 이집트 (~기원전 30년) 쿠시 나파타 (기원전 1070년 ~ 기원전 591년) 카르타고 고대 카르타고 (기원전 650년 ~ 기원전 146년) 인도 인도의 철기 시대 (기원전 1200년 ~ 기원전 180년), 인도-그리스 왕국 (기원전 180년 ~) 기원전 1000년 ~ 기원전 1년 중국 고대 중국 (~기원전 200년) 유럽 페니키아 (기원전 1200년 ~ 기원전 650년), 고대 그리스 (기원전 650년 ~ 기원전 146년) 기원후 1년 ~ 기원후 1000년 쿠시 메로에 (~350년) 악숨 악숨 왕국 (~940년) 인도 인도 중왕국 중국 제국 시대 중국 아메리카 북아메리카는 콜럼버스 이전 시대, 중앙아메리카는 고전기와 후고전기, 남아메리카는 고전기 유럽 고대 로마
3. 선사 시대
3. 1. 초기 인류의 이동
메소포타미아는 세계에서 가장 초기에 알려진 문명 발상지 중 하나이다.[1] 기원전 8000년경 할라프 문화와 함께 농업 공동체가 등장했고, 기원전 6000년경 우바이드 시대를 거쳐 계속 확장되었다.[2] 우르크 시대(기원전 4000–3100년)에 도시가 시작되었고, 젬데트 나스르 시대(기원전 3100–2900년)와 초기 왕조 시대(기원전 2900–2350년)에 걸쳐 확장되었다.[3] 저장 가능한 식량 잉여는 사람들이 작물과 가축을 따라 이동하는 대신 한 곳에 정착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인구 밀도가 훨씬 높아져 대규모 노동력과 분업이 필요했다.[4] 이러한 조직은 기록 보존의 필요성을 낳았고, 문자의 발달을 가져왔다.[5]
3. 2. 농업 혁명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기원전 8000년경 할라프 문화와 함께 농업 공동체가 등장하여 기원전 6000년경 우바이드 시대를 거쳐 계속 확장되었다.[1] 저장 가능한 식량의 잉여는 사람들이 작물과 가축을 따라 이동하는 대신 한 곳에 정착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인구 밀도가 훨씬 높아져 대규모 노동력과 분업이 필요하게 되었다.[2] 이러한 조직은 기록 보존의 필요성을 낳았고, 이는 문자의 발달로 이어졌다.[3]
3. 3. 금속 사용
히타이트는 기원전 1900년경 아나톨리아에 처음 등장했으며, 기원전 1600년에서 1500년 사이에는 메소포타미아로 진출하여 쐐기 문자를 인도유럽어에 맞게 채택했다. 기원전 1200년경 히타이트 제국은 페니키아와 아나톨리아 동부까지 뻗어 있었다. 히타이트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래된 두 가지 기술, 즉 철기 기술과 바퀴살이 달린 가벼운 전차를 이용한 전쟁을 개선하여 널리 보급했다. 히타이트는 틀을 사용한 철 주조 기술을 도입한 다음 망치질을 하여 무기와 도구를 더 강하고 저렴하게 만들 수 있게 했다. 이전에도 전차가 사용되었지만, 바퀴살을 사용함으로써 전차는 훨씬 더 가볍고 기동성이 뛰어나게 되었다. 기원전 1274년 히타이트는 카데시 전투에서 이집트와 충돌했고, 양측 모두 승리를 주장했다. 기원전 1207년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사가 약탈당하면서 히타이트 제국은 멸망했다.[1]
3. 4. 문자 발명
יִשְׂרָאֵל|이스라엘he과 יהודה|유다he는 고대 레반트 지역의 철기 시대 왕국으로, 철기 시대와 신바빌로니아 제국, 페르시아 제국, 헬레니즘 시기에 존재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1209년경 이집트 파라오 메르넵타의 석비에 처음 나타난다.[1] 이 "이스라엘"은 중앙 고지대의 문화적, 아마도 정치적 실체였으며, 조직적인 국가라기보다는 민족 집단이었다.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패권에 도전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할 정도로 잘 정립되어 있었다.[2]
이스라엘은 기원전 9세기 중반에 등장했는데, 아시리아 왕 살만에세르 3세가 카르카르 전투 (기원전 853년)에서 그의 적들 중 "이스라엘의 아합"을 언급했다. 유다는 이스라엘보다 약간 늦게, 아마도 기원전 9세기 동안에 등장했지만, 이 주제는 상당한 논쟁의 대상이다.[3]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와 충돌했고, 아시리아는 기원전 722년에 이스라엘을 정복했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은 기원전 586년에 유다에도 같은 짓을 했다. 두 정복 이후, 정복 세력은 많은 주민들을 각 제국의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켰다.[4]
바빌론이 페르시아 제국에 멸망한 후, 키루스 대왕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허락했고,[5] 유다에서 온 일부 유배민들은 유대로 돌아왔으며,[6] 그들은 마카비 혁명이 헬레니즘 시대에 독립으로 이어지고 로마 정복이 이루어질 때까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7]
4. 지역별 역사
서양사에서는 고대 그리스 에게 문명 성립(기원전 3000년경)부터 서로마 제국 멸망(476년)까지[53]를 고대 시대로 본다. 로마 제국의 3세기의 위기부터 7세기까지를 "고대 말"로 구분하기도 한다.
4. 1. 서아시아
고대 근동은 문명의 발상지로 여겨진다.[1] 이곳은 연중 집중적인 농업을 처음으로 시행했으며, 최초의 체계적인 문자 체계 중 하나를 만들었고, 물레와 탈것용 바퀴를 발명했으며, 최초의 중앙 집권 정부와, 법전 및 제국을 세웠으며, 사회 계층화, 노예 제도, 그리고 조직적인 전쟁을 보여주었다. 또한 별과 천문학, 수학의 연구를 시작했다.[2]
오리엔트에서는 이집트 세력의 후퇴가 두드러졌고, 히타이트는 기원전 12세기에 멸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 중소 세력이 주변 지역에 성립되었다. 그리스인의 미케네 세계, 지중해 연안의 페르시아, 이스라엘 등의 소국가, 페니키아 도시들,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아슐 등이 대표적이다.
기원전 8세기 후반, 아시리아가 전 오리엔트를 정복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집트가 메소포타미아 세력에 지배된 것은 이때부터이다(기원전 670년). 그러나 아시리아는 효과적인 통치 체제를 갖추지 못했고, 폭력적인 지배는 각 지방의 반란을 초래하여 멸망했다(기원전 612년).
이러한 변화 속에서 서쪽의 그리스와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각자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미케네 문명이 붕괴하고 암흑 시대를 거쳐 폴리스가 성립되었고, 유럽은 철기 시대로 접어들었다.
시리아·팔레스티나 지방은 발전된 문명들의 교차 지역이었으며, 에게 문명과 소아시아 문명의 영향도 받았다. 레바논산맥과 안티레바논산맥으로 인해 시리아 사막과 분리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주로 동지중해 연안에 거주했다. 역사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 지역의 도시들은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고, 레바논 삼목(杉木)은 메소포타미아 왕조들의 약탈 대상이 되기도 했다.
기원전 2000년대 초, 민족 이동의 여파로 후르리·미탄니 왕국 건설, 힉소스 침입, 히타이트의 북시리아 지배, 이집트 신왕국의 시리아 진출 등 여러 사건이 발생했다. 우가리트는 지진으로 멸망했고, 비블로스 등은 무역항으로 번영했다.
기원전 1200년경, 해상민족의 습격으로 히타이트가 멸망하고 이집트는 지중해 제해권을 잃었다. 페니키아 도시들은 번영을 누렸고, 시돈, 티루스 등은 키프로스섬, 크레타섬, 아프리카 연안, 에스파냐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아람인은 북시리아에 소국가를 세웠고, 이스라엘인은 가나안 지역에 침입하여 왕국을 형성했다.
아마루나 시대의 외교 관계 성립으로 오리엔트는 평화 시대를 맞이했지만, 아람인과 해상민족의 침입, 히타이트와 미탄니의 멸망 등으로 정치적 공백 시대가 도래했다. 이집트는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아시리아가 대두하여 주변 지역을 위협했다.
기원전 8세기 중엽부터 아시리아는 제국 시대로 들어가 여러 지역을 정복하고 이집트까지 점령했다(기원전 670년). 그러나 아시리아의 패권은 신바빌로니아의 독립(기원전 626년) 이후 흔들렸고,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 동맹군에 의해 멸망했다(기원전 612년).
오리엔트는 메디아, 신바빌로니아, 리디아, 이집트로 분할되었다. 신바빌로니아는 유대 왕국을 멸망시키고 세력을 확장했다. 기원전 550년,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가의 키루스 2세가 메디아, 리디아,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그의 아들 캄비세스가 이집트를 병합하여 전 오리엔트를 통일했다.
각 지역별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4. 1. 1. 메소포타미아
메소포타미아는 세계에서 가장 초기의 문명 발상지 중 하나이다.[1] 기원전 8000년경 할라프 문화와 함께 농업 공동체가 등장하여 기원전 6000년경 우바이드 시대를 거쳐 확장되었다.[2] 우르크 시대(기원전 4000–3100년)에 도시가 시작되어 젬데트 나스르 시대(기원전 3100–2900년)와 초기 왕조 시대(기원전 2900–2350년)에 걸쳐 확장되었다.[3] 저장 가능한 식량 잉여는 사람들이 작물과 가축을 따라 이동하는 대신 한 곳에 정착하도록 했다. 인구 밀도가 높아지면서 대규모 노동력과 분업이 필요했고,[4] 이는 기록 보존과 문자의 발달을 가져왔다.[5]
바빌로니아는 메소포타미아 남부(현대 이라크)에 위치한 아모리인 국가로,[6] 바빌론을 수도로 삼았다. 함무라비가 이전 수메르와 아카드 왕국의 영토를 통합하여 제국을 건설하면서 등장했다.[6]
신바빌로니아 제국(칼데아)은 기원전 7세기와 6세기의 바빌로니아를 가리킨다.[7] 네부카드네자르 2세 통치 하에 예루살렘을 정복했고, 바빌론의 공중 정원과 이슈타르 문을 건설했다.[8]
아카드는 바빌론 근처 도시이자 그 주변 지역으로, 아카드 제국의 수도였다.[9] 정확한 위치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사르곤 왕의 정복 이후 기원전 2330년에서 2150년 사이에 권력의 절정에 달했다.[9] 사르곤의 제국 확장을 통해 아카드어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수메르어를 대체했고, 기원전 1450년경에는 근동의 주요 외교 언어가 되었다.[10]
아시리아는 원래 티그리스강 상류 지역으로, 기원전 19세기에 아수르를 수도로 하는 작은 국가가 세워졌다.[7][11] 이후 비옥한 초승달 지대, 이집트, 아나톨리아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는 제국이 되었고,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북부(니네베를 수도)를 가리킨다(남부는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왕들은 ''구'' (기원전 20세기에서 18세기), ''중'' (기원전 14세기에서 11세기), ''신아시리아'' (기원전 9세기에서 7세기) 시대에 대규모 왕국을 지배했다.[12]
미탄니는 기원전 1500년경 북부 메소포타미아에 세워진 후르리 제국이었다. 기원전 14세기까지 아시리아를 정복하여 지배했으며, 현대 시리아 지역 일부를 지배하기 위해 이집트와 경쟁했다. 수도 와슈칸니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13]
4. 1. 2. 이란
메디아는 키루스 2세에 의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에 정복되기 전 이란 지역을 통치한 고대 국가이다. 키루스 2세는 메디아를 멸망시킨 후 리디아와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켰다.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병합하여 전 오리엔트를 통일하였다.[6]
4. 1. 3. 히타이트
히타이트는 기원전 1900년경 아나톨리아에 처음 등장했으며, 기원전 1600년에서 1500년 사이에는 메소포타미아로 진출하여 쐐기 문자를 인도유럽어에 맞게 고쳐 썼다. 기원전 1200년경 히타이트 제국은 페니키아와 아나톨리아 동부까지 뻗어 있었다. 히타이트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비롯된 두 가지 기술, 즉 철기 기술과 바퀴살이 달린 가벼운 전차를 이용한 전쟁 기술을 발전시켜 널리 보급했다. 히타이트는 틀을 사용한 철 주조 기술을 도입한 다음 망치질을 하여 무기와 도구를 더 강하고 저렴하게 만들 수 있게 했다. 이전에도 전차가 사용되었지만, 바퀴살을 사용함으로써 전차는 훨씬 더 가볍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 1274년 히타이트는 카데시 전투에서 이집트와 충돌했고, 양측 모두 승리를 주장했다. 기원전 1207년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사가 약탈당하면서 히타이트 제국은 멸망했다.
4. 1. 4. 이스라엘
이스라엘과 유다는 고대 레반트 지역에 있던 철기 시대 왕국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1209년경 이집트 파라오 메르넵타의 석비에 처음 등장한다.[1] 이 "이스라엘"은 중앙 고지대의 문화적, 정치적 실체였으며, 조직적인 국가라기보다는 민족 집단이었다.[2]
이스라엘은 기원전 9세기 중반, 아시리아 왕 살마나세르 3세가 카르카르 전투(기원전 853년)에서 "이스라엘의 아합"을 언급하면서 등장했다. 유다는 이스라엘보다 약간 늦은 기원전 9세기에 등장했지만, 이 주제는 논쟁의 대상이다.[3]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와 충돌하여 기원전 722년에 정복당했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은 기원전 586년에 유다를 정복했다. 두 정복 이후, 정복 세력은 많은 주민들을 각 제국의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켰다.[4]
바빌론이 페르시아 제국에 멸망한 후, 키루스 대왕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허락했고,[5] 유다에서 온 일부 유배민들은 유대로 돌아왔다.[6] 이들은 마카비 혁명으로 헬레니즘 시대에 독립할 때까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7]
4. 1. 5. 페니키아
페니키아는 고대 가나안 북부에 위치한 고대 문명으로, 현재 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의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했다. 페니키아 문명은 기원전 1550년에서 300년 사이에 지중해 전역으로 확산된 기업가 정신이 투철한 해상 무역 문화였다.[48] 이들은 시돈, 티루스 등의 도시를 중심으로 키프로스섬, 크레타섬, 아프리카 연안, 에스파냐에까지 식민지를 건설하며 해상 무역을 주도했다.
페니키아의 식민지 중 하나인 카르타고는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서부 지중해에서 제국을 통치했다.[58] 페니키아인들은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현대 알파벳의 전신인 페니키아 문자를 발명했다.[49]
4. 1. 6. 아라비아
630년대에 이슬람교가 등장하기 전의 아라비아 반도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1] 아라비아 반도에 대한 고고학적 탐사는 많지 않았고, 기록 자료는 남부 아라비아의 비문과 동전에 한정되어 있었다. 기존 자료는 주로 이집트, 그리스, 페르시아, 로마 등 다른 전통에서 온 기록과 이슬람 학자들이 나중에 기록한 구전으로 구성되어 있다.[1] 서기 100년경부터 아마도 400년경까지 아라비아에는 여러 작은 왕국이 존재했다.[1]
4. 2. 아프리카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아프리카' 섹션에 대한 내용이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따라서 '아프리카' 섹션에 포함될 내용은 없다.
4. 2. 1. 나일강 유역 문명
오리엔트 지역에서는 이집트의 세력이 후퇴하고, 기원전 12세기에는 히타이트가 멸망하였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여러 중소 세력들이 성장하였다. 미케네 세계, 페리 시테, 이스라엘 등의 소국가, 페니키아 도시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아슐이 대표적이었다. 기원전 8세기 후반, 아시리아가 전 오리엔트를 정복하면서 이집트는 메소포타미아 세력에 지배, 규합되었다(기원전 670년). 그러나 아시리아는 효과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하지 못하고, 폭력적인 통치 방식은 결국 각 지방의 반란을 야기하여 멸망하였다(기원전 612년).
시리아·팔레스티나 지방은 에게 문명과 소아시아 문명의 영향을 받아 발전된 두 문명이 교차하는 지역이었다. 레바논산맥과 안티레바논산맥으로 인해 시리아 사막과 분리되어, 사람들은 주로 동지중해 연안에 거주했다. 역사 시대에 들어서면서 시리아·팔레스티나 연안의 여러 도시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고, 레바논 삼목(杉木)은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 왕조, 우르 제3왕조, 바빌론 제1왕조의 약탈 대상이 되기도 했다.
기원전 2000년대 초, 민족 이동의 여파는 이 지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후르리·미탄니 왕국 건설, 힉소스 침입, 히타이트의 북시리아 지배, 이집트 신왕국의 시리아 진출 등은 이 지역을 침략 대상으로 만들었다. 우가리트는 기원전 1370년에서 1360년경 대지진으로 멸망했다. 아마르나 시대에 이 지역은 이집트나 히타이트의 보호 아래 비블로스 등의 무역항으로 번영했다.
기원전 1200년경, 해상민족의 습격으로 히타이트가 멸망하고 이집트는 지중해 제해권을 상실했다. 이로 인해 페니키아라고 불리던 시리아 연안의 서(西)셈계 도시들은 번영을 누렸다. 시돈, 티루스 등은 키프로스섬, 크레타섬, 아프리카 연안, 에스파냐에까지 식민지를 건설했다. 기원전 2000년 말부터 셈계 아람인이 북시리아에 소국가를 세워 시리아 전역을 아람화시켰다. 셈계 유목민의 종교적 집단이었던 이스라엘인은 가나안 지역에 침입하여 필리스티네인과 싸워 다윗 왕국을 형성했다.
아마루나 시대의 외교 관계 성립으로 오리엔트는 이집트를 중심으로 평화 시대를 맞이했다. 그러나 아람인의 시리아 침입, 필리스티네인의 팔레스티나 침입, 해상민족의 침입으로 히타이트가 멸망하고, 미탄니와 카시트가 멸망하면서 오리엔트는 정치적 공백 시대를 맞았다. 이집트는 해상민족을 격퇴했으나 제20왕조 멸망 후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제21왕조는 하이집트만을 영유했고, 제22-24왕조는 리비아인이, 제25왕조는 누비아 출신 에티오피아인이 파라오가 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군사 국가 아시리아가 대두하여 바빌로니아를 세력하에 두고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우라르투를 치고, 시리아 북부 아람인의 소국가를 병합했으며, 소아시아의 프리기아 영토에 접근하여 레니키아인의 도시국가, 이스라엘 왕국, 유대 왕국에 위협을 가했다. 기원전 8세기 중엽부터 아시리아는 제국 시대에 들어가 우라르투를 복종시키고 다마스쿠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켰다.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여러 도시는 아시리아에 조공했고, 이집트는 기원전 670년 아시리아에 점령되었다. 이로써 이란, 소아시아를 제외한 오리엔트 지방은 아시리아에 통일되었다.
아시리아의 패권은 기원전 626년 신바빌로니아 독립 이후 흔들려,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 동맹군에 의해 수도를 빼앗겼다(기원전 612년). 오리엔트는 메디아, 신바빌로니아, 리디아, 이집트(사이스 왕조)로 분할되었다. 메디아와 리디아,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는 동맹을 맺어 강대국 간 전쟁은 중지되었다. 신바빌로니아는 유대왕국을 멸망시키고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여러 나라를 압박했다. 기원전 550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가의 키루스 2세가 메디아를 넘어뜨리고 리디아를 정복,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켰으며(기원전 538년), 그의 아들 캄비세스가 이집트를 병합하여 전 오리엔트가 통일되었다.
4. 2. 2. 기타 아프리카 지역
(주어진 문맥에는 '기타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내용이 없으므로, 이 섹션에 해당하는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4. 3. 남아시아
인도에서는 20만 년 전의 구석기 도구가 발견되었으며, 인더스 계곡 인근 신석기 시대 유적은 기원전 8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7000년경 인더스 계곡에서 농업이 시작되었고, 기원전 3000년경에는 갠지스 계곡까지 전파되었다. 보리, 목화, 밀이 재배되었으며, 소, 염소, 양을 가축화했다.
인더스 문명, 베다 시대, 마우리아 왕조, 굽타 왕조 등 인도 지역의 주요 고대 문명과 국가들이 이 지역에서 발전했다. 각 문명과 왕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서를 참고하라.
4. 3. 1. 인더스 문명
सिन्धु-सरस्वतीभ्यस्भ्यता|신두-사라스와티 문명sa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3000년경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서부 인도의 동부에 있는 인더스 강과 가그라-하크라 강 계곡에서 발전했다.[3] 하라파 (현재 파키스탄 펀자브주에 위치)의 이름을 따서 하라파 문명이라고도 불린다.[3]
하라파 문명은 초기 농업 공동체에서 도시로 발전하면서 성장했다. 이 공동체는 메소포타미아, 아프가니스탄, 이란 전역에 널리 흩어져 있는 보석, 조각상, 인장을 만들고 교역했다. 닭도 가축화되었다. 이들은 인더스 문자를 개발했지만, 아직 대부분 해독되지 않았다.
기원전 1600년경에 인더스 계곡 문화는 모헨조다로를 포함한 많은 도시를 버렸다. 이 쇠퇴의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4. 3. 2. 베다 시대
산스크리트어로 된 ऋग्वेद|리그베다|sa는 이 시기에 해당하며, 종종 베다 시대로 알려진 시대를 시작한다.[3] 기원전 1500년에서 500년 사이에 이 민족은 인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작은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3] 베다 사회는 사회를 네 개의 카스트로 나누는 바르나 시스템으로 특징지어졌으며, 이는 나중에 더 상세하게 설명되었다. 베다 시대 말까지 이러한 사회 조직 방식은 인도 사회의 중심이 되었다.[3] 후기 베다 시대의 종교는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간 힌두교로 발전하고 있었다.[3] 기원전 560년경 북인도에서 태어난 싯다르타 고타마는 그의 고행적인 삶을 바탕으로 새로운 종교인 불교를 창시했다. 이 종교는 그의 사후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3] 이 시기에는 서사시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가 쓰여졌다.[3]
4. 3. 3. 마우리아 왕조
마가다 왕국은 인도에서 가장 전설적이고 유명한 황제 중 한 명인 아소카 마우리아 통치하에 권력이 절정에 달했다. 아소카 시대에 촐라 왕조, 체라 왕조, 판디아의 네 왕조가 남부를 통치했고, 데바남피야 티사 (기원전 250–210년)는 아누라다푸라 (현재 스리랑카)를 통제했다. 이 왕국들은 아소카 제국의 일부는 아니었지만 마우리아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데바남피야 티사와 인도의 아소카 사이에는 동맹이 존재했으며,[3] 그들은 불교 선교사를 스리랑카로 보냈다.[4]
4. 3. 4. 굽타 왕조
굽타 왕조는 찬드라굽타 1세가 320년경 건국하였으며, 북인도 대부분을 재통일했다.[3] 그의 후계자들은 데칸 고원과 반도 최남단을 제외한 인도의 대부분을 포함하도록 제국을 확장했다.[3] 이 시기는 비교적 평화로웠으며, 굽타 통치자들은 일반적으로 행정을 지역 통치자에게 맡겼다. 굽타 제국은 훈족 (중앙 아시아에서 유래한 에프탈족의 한 분파)의 침략으로 약화되었고 결국 멸망했으며, 5세기 말에는 제국이 작은 지역 왕국으로 분열되었다.[3] 이후 인도는 1500년대 무굴 제국이 등장할 때까지 작은 국가들로 분열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3]
4. 4.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신석기 시대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지역은 남부 중국에서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오스트로아시아어족, 카다이어족, 흐몽-미엔어족 화자들이 이주하면서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4]
기원전 3000년에서 1500년 사이, 대만에서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의 대규모 이주(오스트로네시아 확산)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인구 성장으로 인해 필리핀 제도 북부 루손에 정착하여 기존의 오스트랄로멜라네시아인과 혼합되었고, 이후 필리핀의 나머지 지역과 술라웨시 해, 보르네오 섬으로 남동쪽으로 이주했다.[15][16] 보르네오 남서부에서는 수마트라와 베트남 남부 해안 지역으로 서쪽으로 이동하여 말레이어 및 참어 계열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조상이 되었다.[17]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해상 옥로를 포함한 선사 시대 오스트로네시아 해상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해상 옥로는 기원전 2000년부터 서기 1000년까지 대만과 필리핀에서 존재했으며, 링링오 유물이 대표적인 고고학적 발견이다.[24][25][26][27] 기원전 1000년에서 600년경에는 섬 동남아시아인들이 스리랑카 및 남인도와 향신료 교역 네트워크를 설립했다.[28][29][32]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아프리카와도 초기 장거리 접촉을 가졌으며, 기원전 500년 이전 유물들이 발견되었다.[33][34] 칼리만탄과 술라웨시 주변 마카사르 해협 지역 출신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마다가스카르에 정착하기도 했다.[30][31] 기원전 2세기경, 오스트로네시아의 옥 및 향신료 무역 네트워크는 남아시아, 중동, 동부 아프리카, 지중해와 연결되어 해상 실크로드로 발전했다.
서기 682년 팔렘방에서 설립된 스리비자야는 오스트로네시아 해상 제국으로, 말라카 해협과 순다 해협, 남중국해의 무역을 지배하며 상업 중심지로 번성했다.[36]
4. 4. 1. 동남아시아 본토
신석기 시대의 동남아시아는 남부 중국에서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오스트로아시아어족, 카다이어족, 흐몽-미엔어족 화자들이 본토와 섬 동남아시아로 이주하면서 특징지어졌다.[4]
섬과 본토 동남아시아 모두에서 "농업 왕국"으로 특징지어지는 영토적 군주국[5]은 기원전 500년경에 잉여 작물 재배와 국내 천연 제품의 적절한 해안 무역을 기반으로 경제를 발전시켰다. 이라와디강 계곡의 퓨 도시 국가, 홍방 왕조의 반랑 왕국, 하부 메콩강 주변의 푸난은 말레이-인도네시아의 "해양 지배" 구역[9]의 여러 국가들과 이러한 특징을 공유했다.[6] 기원전 7세기에 건국된 반랑은 조밀하고 조직적인 인구를 유지하며 정교한 청동기 시대 산업을 생산하는 동선 문화의 일부로 홍방 왕조 치하에서 기원전 258년까지 존속했다.[7][8]
이상적인 기후 조건에서 집약적인 벼농사는 농업 공동체가 정기적인 작물 잉여를 생산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이는 지배 엘리트가 운하 및 요새와 같은 공공 건설 및 유지보수 프로젝트를 위한 작업 부대를 모집, 지휘하고 임금을 지불하는 데 사용되었다.[7][9]
동남아시아에서 구리와 청동 생산의 가장 초기의 증거는 기원전 2000년경 태국 북동부의 반 치앙과 베트남 북부의 풍 응우옌 문화에서 발견되었다.[10]
동선 문화는 청동 생산의 전통을 확립하고 쟁기, 도끼, 낫과 같은 더욱 정교한 청동 및 철기 제품, 소켓형 화살 및 창촉, 작은 장식품을 제조했다.[11] 기원전 500년경에는 70kg이 넘는 무게의 크고 정교하게 장식된 놀라운 품질의 청동 북이 노동 집약적인 로스트 왁스 주조 공정으로 생산되었다. 이 고도로 정교한 금속 가공 산업은 중국이나 인도의 영향과는 무관하게 발전했다. 역사가들은 이러한 업적을 조직적이고 중앙 집권적이며 위계적인 공동체와 많은 인구의 존재와 관련짓는다.[12]
기원전 1000년에서 서기 100년 사이, 사후인 문화는 베트남 남중부 해안을 따라 번성했다.[13] 부장품이 포함된 도자기 항아리 매장지가 전체 영토를 따라 다양한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크고 얇은 벽의 테라코타 항아리, 장식되고 채색된 조리 냄비, 유리 제품, 연옥 귀걸이 및 금속 물체가 강과 해안 근처에 매장되었다.[14]
4. 4. 2. 오스트로네시아
기원전 3000년에서 1500년 사이,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의 대규모 이주(오스트로네시아 확산)가 대만에서 시작되었다. 인구 성장이 이주를 주도했으며, 이 첫 번째 정착민들은 필리핀 제도 북부 루손에 정착하여 약 23,000년 전부터 섬에 거주해온 초기 오스트랄로멜라네시아인과 혼합되었다.[15][16] 이후 천 년 동안,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필리핀의 나머지 지역과 술라웨시 해, 보르네오 섬으로 남동쪽으로 이주했다.[15][16] 보르네오 남서부에서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수마트라와 베트남 남부 해안 지역으로 더 서쪽으로 이동하여 말레이어 및 참어 계열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조상이 되었다.[17]
기원전 1500년 또는 그 이전에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필리핀을 거쳐 북마리아나 제도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원격 오세아니아에 도달한 최초의 인류가 되었다. 차모로의 이주는 쌀 재배를 성공적으로 유지한 태평양 섬으로의 유일한 오스트로네시아 이주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팔라우와 야프는 기원전 1000년까지 별도의 항해로 정착되었다.[17][15][16]
라피타 문화는 북부 뉴기니 해안의 섬들과 솔로몬 제도, 뉴기니 해안 및 섬 멜라네시아의 다른 지역으로 기원전 1200년까지 빠르게 확산되었다. 기원전 900년에서 800년경에는 피지, 사모아, 통가 섬에 도달했다. 서기 700년경까지 폴리네시아로의 오스트로네시아 확산은 이 범위가 가장 멀리까지 미쳤으며, 이후 또 다른 섬 식민지화가 급증했다. 서기 700년경에는 쿡 제도, 타히티, 마르키즈 제도에 도달했고, 서기 900년에는 하와이, 서기 1000년에는 라파누이, 서기 1200년에는 뉴질랜드에 도달했다.[18][19][20] 몇 세기 동안, 폴리네시아 섬들은 라파누이를 제외하고 쌍방향 장거리 항해로 연결되었으며, 라파누이는 고립된 지리적 위치로 인해 추가적인 접촉이 제한적이었다.[17] 피트케언 제도, 커마덱 제도, 노퍽 섬과 같은 섬 그룹도 이전에 오스트로네시아인에 의해 정착되었지만 나중에 버려졌다.[20] 고구마의 확산을 바탕으로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 폴리네시아에서 남아메리카에 도달하여 아메리카 원주민과 교역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증거도 있다.[21][22]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해상 옥로를 포함하여 동남아시아에 선사 시대의 오스트로네시아 해상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했으며, 이 옥로 무역 네트워크는 기원전 2000년부터 서기 1000년까지 3,000년 동안 대만과 필리핀에서 존재했다. 무역은 대만과 필리핀의 원주민 간의 연결을 통해 확립되었으며, 나중에는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및 동남아시아의 다른 지역(사후인-칼라네이 상호 작용 영역)을 포함했다. 링링오 유물은 해상 옥로에서 유래된 주목할 만한 고고학적 발견 중 하나이다.[24][25][26][27] 해상 옥로가 운영되는 동안, 오스트로네시아의 향신료 교역 네트워크도 기원전 1000년에서 600년경에 섬 동남아시아인에 의해 스리랑카 및 남인도와 함께 설립되었다.[28][29][32]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아프리카와 초기 장거리 접촉을 확립했으며, 카메룬과 우간다에서 바나나 식물체가 발견된 것과 잔지바르에서 신석기 시대 닭뼈 유적이 발견된 것은 기원전 5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33][34] 칼리만탄과 술라웨시 주변의 마카사르 해협 지역에서 기원한 오스트로네시아 집단[30][31]은 마다가스카르에 정착했는데, 동남아시아에서 직접 오거나 반투 인구와 오스트로네시아가 혼합된 동아프리카에서 왔다. 이 사건이 발생한 시점에 대한 추정치는 서기 1세기[32]에서 서기 6~7세기[33][34]까지 다양하다. 마다가스카르에 정착한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인도양을 가로질러 직접 이동하기보다는 남아시아와 동아프리카를 거쳐 해안 경로를 따라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다.[17] 유전적 증거는 오스트로네시아 계통의 일부 개인이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에 도달했음을 시사한다.[35]
기원전 2세기경, 동남아시아의 신석기 시대 오스트로네시아 옥 및 향신료 무역 네트워크는 남아시아, 중동, 동부 아프리카, 지중해의 해상 무역로와 연결되어 현재 해상 실크로드로 알려지게 되었다. 10세기 이전에는 주로 동남아시아 오스트로네시아 상인들이 독특한 묶음 끈 선박을 사용했지만, 타밀 및 페르시아 상인들도 이 경로의 서부 지역을 항해했다.[36][37]
스리비자야는 서기 682년 팔렘방에서 설립된 오스트로네시아 정치체로, 말라카 해협과 순다 해협, 남중국해의 무역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서아시아에서 번성하는 당나라 시장으로의 사치스러운 방향제와 불교 유물을 거래함으로써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36] 이 국가는 인근 해양 국가들을 정복하고 굴복시키면서 부상했다. 여기에는 멜라유 왕국, 케다, 타루마네가라, 마타람 왕국 등이 포함된다. 이 정치체는 동남아시아의 해상 통로를 통제하고 향료 제도의 향신료 교역과 인도와 중국 간의 해상 무역로를 이용했다.[38]
4. 5. 동아시아
황허 유역에서 시작된 중국 문명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중 하나로 손꼽힌다. 동아시아 지역은 중국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기원전 238년 진왕은 즉위 10년 만에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직접 정치에 참여했다. 효공 이래 부국강병책으로 진나라는 전국 7개국 중 가장 강한 나라로 성장했다. 진나라는 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동방으로 군대를 진군시켜 기원전 230년 한을 멸망시키고 동방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북쪽의 조, 연을 정복하고, 동쪽의 위, 남쪽의 초를 무너뜨렸다. 기원전 221년에는 마지막으로 남은 강국 제를 멸망시켜 천하통일을 이루었다.
진왕은 이사를 등용하여 통일 국가의 기반을 다졌다. 법가사상을 신봉한 이사는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정치를 펼쳤다. 진왕은 왕의 칭호를 폐지하고 황제라 칭하며, 황제 전용어를 만들어 군주의 권위를 높였다. '황(皇)'은 '빛나다, 훌륭하다'는 뜻으로, 진왕이 황제 칭호를 사용한 것은 전 우주를 지배하는 절대자라는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또한, 군주의 사후 업적에 따라 호를 추증하는 시(諡) 제도를 폐지하고, 시황제부터 시작하여 2세, 3세 황제로 이어지는 영원한 통치를 선언했다.
진나라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채택하여 전국을 36군으로 나누고, 군 밑에 현을 두어 지방 행정 단위로 삼았다. 중앙에는 승상, 태위, 어사대부 등 최고 책임자를 두고, 그 밑에 9관을 배치하여 행정을 총괄했다. 지방에도 중앙을 본떠 장관을 파견하여 황제의 명령이 지방 말단까지 전달되는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했다. 이 행정조직은 한나라에 계승되어 중국 통치의 기본 조직으로서 근대까지 영향을 미쳤다.
문자는 이사가 고안한 소전으로, 도량형 단위와 화폐는 진나라의 반량전으로 통일되었다. 도로망을 정비하고 마차 수레바퀴 폭까지 통일했다. 분서갱유를 통해 사상 통제도 엄격히 시행했다. 대외적으로는 북쪽의 흉노를 공격하고 만리장성을 보수했으며, 남쪽으로는 베트남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잦은 원정과 대규모 토목사업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높아졌고, 기원전 210년 황제의 급사 후 진승·오광의 난을 계기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진나라는 통일 15년 만에 멸망했다.
진나라 멸망 후, 항우와 유방의 5년간의 싸움이 벌어졌다. 항우는 중앙집권체제를 부정하고 전국시대의 질서를 부활시키려 했으나, 유방은 진나라의 지배 제도를 계승하면서도 군국제 등 교묘한 정책으로 한 제국의 기초를 다졌다. 무제는 중앙집권 체제를 정비하고 영토를 확장했으나, 잦은 정벌로 재정이 궁핍해졌다. 원제 이후 외척 왕씨가 권력을 휘두르면서 기원후 8년 왕망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기원 1세기 초, 왕망이 신을 세워 한나라가 잠시 와해되었으나, 후한이 건국되어 다시 서역에 진출하는 등 동서 교통로 확보에 성공했다. 그러나 2세기 이후 환관과 외척의 세력 다툼, 호족의 토지 겸병, 북방 민족의 침입 등으로 혼란이 가중되었다. 황건적의 난 이후 제국은 분열되었고, 3세기에 완전히 멸망했다. 후한 멸망 후 위, 촉, 오 삼국시대가 이어졌고, 진에 의한 통일도 오래가지 못했다. 화베이 지방에서는 5호 16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108년, 한나라는 한국의 많은 부분을 정복했지만, 한나라가 쇠퇴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 등 한국의 삼국이 등장하여 중국 세력을 몰아냈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지만, 676년 당나라를 몰아내고 한반도 대부분을 통일했다.
일본에서는 기원전 500년 이전에 조몬 시대가 형성되었고, 서기 200년경 중국의 영향을 받은 야요이 시대로 변화했다. 300년대에는 야마토 왕권이 형성되었는데, 이는 한국 난민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4. 5. 1. 중국
중국 문명은 황허 유역에서 등장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중 하나이다.[1] 문명이 형성되기 이전인 기원전 5000년 경에는 룽산 및 양사오와 같은 신석기 문화가 발달했다. 이들은 정교한 도자기를 만들고, 조를 재배했으며, 삼과 실크로 옷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2] 쌀도 재배되었고 돼지와 물소는 식용으로 사육되었다. 룽산의 도공들은 도자기를 만들 때 물레를 사용했을 수도 있다.[3]
고대 중국의 전통은 진과 한 왕조로 통일되기 이전의 세 개의 고대 왕조인 하, 상, 주에 대해 설명했다. 20세기 후반까지 많은 역사가들은 상나라나 하나라를 전설적인 존재 이상으로 간주했다.[4] 기원전 2200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하나라는 창장 강 유역의 일부를 통제했을 수도 있지만, 아직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5]
상나라는 전통적으로 기원전 1766년부터 1122년까지로 추정된다. 청동은 상나라 문화와 기술의 중심이었으며, 전차와 청동 무기는 상나라가 중국 북부를 통제하는 데 기여했다. 안양 근처의 아오와 인쉬의 도시들이 발굴되었으며, 도시 성벽, 왕궁, 기록 보관소뿐만 아니라 무덤과 작업장도 발견되었다.[6] 10만 개가 넘는 갑골을 시작으로 하는 문자 체계가 개발되었다.[7]
기원전 2천 년대 말 무렵, 상나라는 서쪽의 웨이 강 유역에서 온 주나라에 의해 무너졌다. 당시 주나라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천명의 개념을 언급했는데, 이 개념은 거의 모든 후대 왕조에 영향을 미쳤다. 주나라는 처음에는 황허 강 근처, 현대 시안 근처 서쪽에 수도를 세웠지만, 창장 강 유역으로 일련의 확장을 주도했다. 주나라 행정은 분권화되어 지방 엘리트들이 조세를 징수하고 주나라 통치자들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8]
기원전 8세기, 권력은 춘추 시대 동안 분산되었으며,[9] 이는 영향력 있는 ''춘추''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0] 이 시기에 주나라가 사용하던 지방 군사 지도자들이 권력을 주장하고 패권을 다투기 시작했다.[11] 상황은 다른 민족들의 침략으로 악화되었으며,[12] 주나라가 수도를 동쪽 뤄양으로 옮기도록 강요했다.[13] 결국 일어난 수백 개의 국가에서 지방의 강자들이 대부분의 정치 권력을 쥐고 있었고 명목상으로만 주나라 왕에게 복종했다. 제자백가는 이 시대에 번성했으며, 유교, 도교, 법가, 묵가와 같은 영향력 있는 지적 운동이 부분적으로 변화하는 정치 세계에 대한 대응으로 창시되었다.[14][15]
더욱 정치적 통합을 거친 후, 기원전 5세기 말까지 7개의 주요 국가가 남았고, 이 몇몇 국가들이 서로 싸웠던 해를 전국 시대라고 한다.[16] 기원전 256년까지 명목상 주나라 왕이 있었지만, 그는 대부분 허수아비였고 권력이 거의 없었다.[17] 쓰촨과 랴오닝을 포함한 이들 전국 시대의 인접 영토가 진나라 통치자들의 성장하는 권력에 의해 합병되면서,[18] 그들은 새로운 지방 행정 시스템인 군으로 통치되었다.[19] 이 시대의 최종 확장은 진나라 왕 영정의 통치 기간에 시작되었다. 그가 다른 여섯 개의 세력을 통일하고 기원전 213년까지 남쪽과 동남쪽으로 더 합병하면서 그는 스스로를 시황제라고 선포할 수 있었다.[20]
진 시황제는 통일된 중국을 절대적인 권력으로 직접 통치했다. 이전 왕조의 분권적이고 봉건적인 통치와 대조적으로 진나라는 직접 통치했다. 전국적으로 법가 철학이 시행되었고 유교와 같은 경쟁적인 사상을 홍보하는 출판물은 금지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에 통일된 중국은 강제 노동을 사용하여 최초의 연속적인 만리장성을 건설했다. 침략은 베트남을 합병하기 위해 남쪽으로 시작되었다. 진나라 시대에는 또한 중국 문자 체계의 표준화가 이루어졌고 정부는 법률 시스템을 통일하고 제국 전체에 걸쳐 표준화된 측정 단위를 설정했다.[21] 황제가 죽은 후 반란이 시작되었고 한나라가 권력을 잡았으며 서기 9년부터 23년까지의 짧은 중단을 제외하고 4세기 이상 중국을 통치했다.[22] 한나라는 철제 농기구의 보급을 장려했으며, 이는 한나라 시대에 인구의 급증을 가져온 식량 잉여를 창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비단 생산이 증가했고 종이 제조가 발명되었다.[23] 한나라는 막대한 군사적, 경제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중앙 정부를 거역하는 귀족들의 부상으로 인해 부담을 받았다. 대중의 불만은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고, 비록 실패했지만 제국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서기 208년 이후, 한나라는 경쟁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중국은 거의 400년 동안 분열된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24]
4. 5. 2. 한국
신라의 성립(기원전 57년)부터 후삼국 시대의 종말(936년)까지의 기간을 다룬다.
4. 5. 3. 일본
조몬 시대는 기원전 500년 이전에 일본에서 형성되었고, 서기 200년경 중국의 영향으로 대형 무덤을 건설한 야요이 시대로 변화하였다.[54] 야마토 평원에는 300년대에 왕국이 형성되었는데, 이는 한국 난민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54]
일본의 고대 시대는 일반적으로 조몬 시대, 야요이 시대, 고훈 시대, 아스카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 중기 또는 후기까지를 포함한다.[54] 고대 국가(야마토 왕권)의 형성 시기를 두고는 3세기설, 5세기설, 7세기설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54]
4. 6. 아메리카
콜럼버스 이전 시대에 서반구에서는 메소아메리카와 안데스 지역에서 여러 개의 크고 중앙 집권적인 고대 문명이 발전했다. 이 지역 외에도 농업은 남아메리카의 마라조아라 문화를 중심으로 안데스 산맥 동쪽과 미국 본토로 확장되었다.
고대 안데스 문명은 기원전 3500년경부터 조직화된 어촌 공동체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정교한 해양 사회와 함께 대형 기념물 건설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지역 사회의 중심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40] 이 지역 사람들은 콩, 면화, 땅콩, 고구마를 재배하고 바다에서 어업을 했으며, 기원전 2000년경에는 감자를 작물에 추가했다. 메소아메리카에서는 기원전 8000년경 농업 경작이 시작되었으며, 아보카도, 콩, 고추, 박, 호박 등이 기원전 7000년경부터 재배되었다. 기원전 4000년경에는 옥수수 재배가 시작되었고, 그 직후 토마토도 재배되었다. 기원전 3000년경에 정착지가 나타났고 기원전 2000년경에는 메소아메리카 대부분 지역에서 농업이 시행되었다. 칠면조와 개와 같은 일부 동물들이 가축화되었지만, 운송이나 노동에 사용되는 대형 동물의 부재는 메소아메리카 지역의 한계였다.
메소아메리카와 안데스 지역의 주요 문명은 다음과 같다.
문명 | 지역 | 주요 특징 |
---|---|---|
올멕 | 메소아메리카 | 거대 석조 두상, 상형 문자, 달력 |
마야 | 메소아메리카 | 문자 체계, 천문학, 수학 (0의 개념 사용) |
사포텍 | 메소아메리카 | 몬테 알반 중심, 문자 체계, 달력 |
테오티우아칸 | 메소아메리카 | 거대 도시, 20만 명 인구 |
차빈 | 안데스 | 대규모 사찰, 예술 작품, 정교한 직물 |
모체 | 안데스 | 도자기, 사회와 문화를 묘사한 그림 |
나스카 | 안데스 | 나스카 라인, 카우아치 의례 중심지 |
와리 | 안데스 | 1만 명 이상 인구 |
푸카라 | 안데스 | 1만 명 이상 인구 |
티와나쿠 | 안데스 | 1만 명 이상 인구 |
4. 6. 1. 안데스 문명
기원전 1000년경 차빈교를 중심으로 차빈 문화가 등장하여 대규모 사찰, 예술 작품, 정교한 직물을 남겼다. 금, 은, 구리는 장신구와 드물게 작은 구리 도구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40]차빈 문화가 쇠퇴한 후, 기원전 200년경부터 여러 도시가 형성되었다. 와리, 푸카라, 티와나쿠는 모두 10,000명 이상의 주민을 거느렸을 것으로 보인다. 서기 300년경 모체 강을 따라 모체 문화가 등장했다. 이들은 다양한 주제를 묘사한 그림이 그려진 도자기를 남겼는데, 이는 그들의 사회와 문화를 보여준다. 서기 100년경 이후 안데스 지역에는 모체 외에도 여러 대규모 국가들이 존재했다. 나스카 문화는 주로 마을에 거주했지만 카우아치에 대규모 의례 중심지를 남기고, 사막 바닥에 거대한 디자인을 새긴 나스카 라인을 남겼다.[40]
4. 6. 2. 메소아메리카
농업 경작은 기원전 8000년경 메소아메리카에서 시작되었으며, 아보카도, 콩, 고추, 박 및 호박이 기원전 7000년경부터 재배되었다.[3] 기원전 4000년경에는 옥수수 재배가 시작되었고, 그 직후 토마토도 재배되었다.[3] 기원전 3000년경에 정착지가 나타났고 기원전 2000년경에는 메소아메리카 대부분 지역에서 농업이 시행되었다.[3] 칠면조와 개와 같은 일부 동물들이 가축화되었지만, 운송이나 노동에 사용되는 대형 동물의 부재는 메소아메리카 지역의 한계였다.[3]
기원전 1200년경, 최초의 올멕 중심지인 산 로렌소 테노치티틀란이 건설되었으며, 기원전 800년경 라 벤타가 그 자리를 이어받기 전까지 올멕 문명의 중심지로 남아 있었다.[4] 기원전 400년경에는 트레스 사포테스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었다.[4] 이들과 다른 올멕 중심지는 석재로 건설된 무덤, 사원 및 기타 의식 장소의 집단이었다.[4] 이러한 건설은 올멕 사회의 복잡성을 증명하지만, 통치 방식에 대한 정확한 특성은 알려져 있지 않다.[4] 올멕인들은 인간의 머리 및 기타 주제의 대형 석조 조각품을 세웠으며,[4] 옥 보석 및 기타 올멕 유물은 메소아메리카 전역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무역 네트워크를 통해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다.[4] 올멕 문자 체계는 주로 달력을 기록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이 두 가지 모두 후기 메소아메리카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4]
올멕의 쇠퇴 이후, 마야 문명, 사포텍 문명, 테오티우아칸 등 메소아메리카의 다른 문명들이 부상하거나 나타났다.[5] 사포텍 문명은 기원전 500년경 오아하카 계곡의 몬테 알반 지역에서 시작되었다.[5] 몬테 알반은 서기 200년경에 약 25,000명의 주민으로 성장했으며, 도시에는 대형 석조 사원과 광대한 석조 광장이 있었다.[5] 올멕처럼 그들은 문자 체계와 달력을 가지고 있었다.[5] 그러나 서기 900년경 몬테 알반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버려졌다.[5] 테오티우아칸은 서기 200년경에 발전했으며, 테오티우아칸 도시를 중심으로 했고, 절정기에는 200,000명에 달하는 주민으로 성장했다.[5] 테오티우아칸은 서기 700년경까지 지속되었으며, 이때 불에 타 파괴되었다.[5]
마야 문명은 서기 300년경 유카탄 반도와 오늘날의 과테말라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6] 고전 마야 시대 600년 동안,[6] 80개 이상의 마야 유적이 건설되었으며, 각 중심지의 초점은 사원, 피라미드 및 궁전이었다.[6] 가장 영향력 있는 곳은 티칼이었지만, 마야 문명은 도시 국가를 기반으로 했으며, 종종 서로 전쟁을 벌였다.[6] 그러나, 이것이 도시 간의 무역을 제한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6] 마야의 사제 엘리트들은 천문학 및 달력 지식을 유지했으며, 이를 올멕 상형 문자를 기반으로 한 문자 체계로 기록했다.[6] 역사, 시, 기타 기록은 책에 기록되었으나, 대부분 메소아메리카의 스페인 정복에서 살아남지 못했다.[6] 마야인들은 수학도 연구했으며, 계산에 0의 개념을 사용했다.[6] 마야 문명은 서기 800년경에 쇠퇴하기 시작했고, 그 직후 대부분의 도시가 버려졌다.[6]
4. 7. 유럽
기원전 4세기 후반,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를 대신하여 동지중해에서 서아시아까지 지배하였다. 그러나 대왕 사후 제국은 분열되어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 등 헬레니즘 국가들이 성립하였다.헬레니즘 시대는 그리스인들의 식민 활동과 도시 건설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도시 간 교역이 성행하면서 노예제 경제가 더욱 발전하였다. 노예제 경제의 발전은 폴리스의 자립성을 약화시키고 더 큰 정치 조직의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헬레니즘 국가들은 오리엔트의 전제정치를 받아들여 도시를 광역 국가 체제하에 흡수하였고, 이러한 국가들은 기원전 1세기에 지중해 전체를 통합하는 로마 제국으로 이어졌다.
헬레니즘 국가들이 분립하던 시기, 로마는 서지중해에서 카르타고와 1세기 이상 격전을 벌였다. 이 포에니 전쟁 중에 로마는 동지중해로 진출하여 기원전 146년에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를 병합했다. 이후 로마 군대는 동방 정복을 계속하여 기원전 1세기 전반에는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를, 후반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를 멸망시켜 지중해 세계의 통일을 완성하였다.
헬레니즘 국가 중 동방을 지배한 셀레우코스 왕조에서 기원전 3세기 중엽 중앙아시아의 박트리아 왕국이 분리 독립하였다. 같은 시기 동이란 지역에는 이란계 유목민이 건국한 파르티아 왕국이 등장하였다. 파르티아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서방 세력에 대한 이란인의 민족적 반격을 대표했다. 기원전 2세기에는 이란 고원에서 메소포타미아를 재통일하고, '실크로드' 무역 발전에 힘써 고대 세계의 동서 교통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박트리아 왕국은 그리스계 식민자들이 세운 국가로, 중앙아시아에서 서북 인도에 침입하여 한때 위세를 떨쳤다. 기원전 2세기 후반 스키타이계 민족에 의해 멸망했지만, 서북 인도에 그리스풍 문화를 전하여 간다라 미술 성립의 기반을 마련했다.
기원전 1세기 후반부터 잠시 평온했던 파르티아와 로마는 1세기 후반에 다시 격렬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파르티아는 로마의 공격으로 수도 크테시폰을 여러 번 침범당했고, 동쪽 국경에서는 쿠샨 왕국의 위협에 시달렸다. 아르사케스 왕조 최후의 황제 아르타비누스 5세는 로마군을 격파했지만, 사산 왕조의 아르다시르 1세에게 패배하여 전사했다. 아르다시르는 기원전 226년 크테시폰을 함락시켜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부흥을 목표로 한 민족국가였다.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아 강력한 중앙 권력으로 귀족을 억누르고, 잘 훈련된 군대로 대외 진출을 꾀하여 로마와 함께 문화 세계를 양분하는 강국으로 발전했다. 사산 왕조 초기의 대외 발전은 아르다시르 1세의 아들 샤푸르 1세가 이끌었다. 그는 동쪽의 쿠샨 왕조와 서쪽의 로마를 격파하여 중앙아시아에서 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통합하여 페르시아의 위세를 떨쳤다.
신석기 유럽 | 청동기 유럽 | 철기 시대 유럽
고대 시대의 종말에 관해서는 정치사적 관점과 사회사적 관점에서 다양한 설이 있다. 서양사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에게 문명 성립(기원전 3000년경)부터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년)까지[53]를 고대 시대로 본다. 이 외에도 로마 제국의 3세기의 위기부터 7세기까지를 "고대 말"로 하는 시대 구분도 있다.
4. 7. 1. 그리스
키클라데스 문화[41]와 미노아 문명(기원전 2700년–1500년)을 시작으로,[42][43] 유럽 최초의 선진 문명이 에게 해의 섬들에서 발생하였다. 미노아인들은 프레스코로 장식된 대규모 궁전을 건설했고 미해독 문자인 선문자 A로 글을 썼다. 최초의 분명한 그리스 문명인 미케네 문명은 나중에 본토(기원전 1600–1100년)에서 등장했으며, 궁전을 중심으로 한 국가 네트워크로 구성되었고 그리스어의 가장 초기의 증명된 언어 형태를 선문자 B로 기록했다. 미케네인들은 점차 미노아인들을 흡수했지만, 청동기 시대 말 붕괴로 알려진 지역적 사건 동안 동지중해의 여러 다른 문명들과 함께 기원전 1200년경에 붕괴되었다.[44]그리스의 고졸기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8세기경부터 크세르크세스의 침략(기원전 480년)까지 지속된 것으로 간주된다. 이 기간은 서쪽의 시칠리아와 동쪽의 흑해까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건설되면서 지중해 주변의 그리스 세계가 확장되었다. 정치적으로 고졸기의 그리스는 옛 귀족들의 권력이 붕괴되었으며, 아테네의 민주적 개혁과 스파르타 헌법의 발전을 보였다. 고졸기의 끝은 또한 솔론의 개혁과 피시스트라토스의 참주 정치 이후 고전기에 지배적인 세력이 될 아테네의 부상을 보였다.

고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주요 강대국에 의해 지배된 고전 그리스 세계는 기원전 5세기 동안 번성하였다. 델로스 동맹을 통해 아테네는 범헬레니즘적 정서와 페르시아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을 강력한 제국으로 전환할 수 있었고, 이것은 스파르타와 아테네 간의 갈등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절정에 달하면서 고전기의 첫 번째 부분의 주요 정치적 발전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부터 로마 제국의 부상과 기원전 30년 이집트 정복까지의 그리스 역사 시기는 헬레니즘 시대로 알려져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 이후, 그의 후계자들 간의 일련의 전쟁으로 결국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지 일부에서 세 개의 대규모 국가가 형성되었으며, 각 국가는 후계자 중 한 명이 세운 왕조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들은 안티고노스 왕조, 셀레우코스 제국,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였다. 이 세 왕국은 더 작은 왕국들과 함께 그리스 문화와 생활 방식을 아시아와 이집트로 퍼뜨렸다. 이 다양한 국가들은 결국 로마 또는 파르티아 제국에 의해 정복되었다.
4. 7. 2. 로마
고대 로마는 기원전 8세기에 이탈리아 반도에 세워진 작은 농업 공동체인 로마 시에서 시작된 문명으로, 그리스와 에트루리아인과 같은 다른 이탈리아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 전통적으로 로마는 로마 왕정으로 시작하여 로마 공화국이 되었다.[48] 로마는 기원전 5세기에서 3세기까지 일련의 전쟁을 통해 이탈리아 반도로 확장되었다.[49] 이러한 확장은 로마 공화국을 카르타고와 충돌하게 하였고, 포에니 전쟁으로 이어져 기원전 146년에 카르타고가 멸망했다.[49] 그 후 로마는 그리스와 동지중해로 확장되었으며,[50] 일련의 내부 갈등으로 인해 공화국은 서기 1세기에 로마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이 되었다.[49] 서기 1세기와 2세기 동안 제국은 약간 확장되었으며 로마 문화를 그 경계 내로 퍼뜨렸다.[50]
여러 요인이 결국 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히스파니아, 갈리아, 이탈리아를 포함한 제국의 서쪽 절반은 결국 서기 5세기에 독립 왕국으로 분열되었으며,[49]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통치된 동로마 제국은 서기 476년 이후 비잔틴 제국으로 불린다.[50] 이는 "로마의 멸망"과 그 이후의 중세 시대 시작의 전통적인 날짜이다.[50]
4. 7. 3. 켈트와 게르만
켈트족은 철기 시대 유럽의 다양한 부족 사회 집단이었다. 원시 켈트어 문화는 초기 철기 시대 중앙 유럽(현재 오스트리아의 지역 이름을 딴 할슈타트 문화 시대)에서 형성되었다. 후기 철기 시대(라텐 문화 시대)에 켈트족은 아일랜드와 이베리아 반도를 포함한 서쪽, 갈라티아(중앙 아나톨리아)를 포함한 동쪽, 스코틀랜드를 포함한 북쪽까지 광범위한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서기 초, 로마 제국의 확장과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이후 켈트 문화는 영국 제도로 제한되었다.[51]5세기부터 현재 독일 북부와 스칸디나비아 남부 지역에서 게르만 민족의 영국으로의 이주가 증명된다.[51] 고트족 집단은 서유럽으로 이주했으며, 동고트족은 결국 롬바르드족에게 정복되기 전 이탈리아에 정착했다.[51] 관련 민족인 서고트족은 스페인에 정착하여 서기 700년대에 이슬람 통치자에게 정복될 때까지 지속된 왕국을 세웠다.[51]
5. 고대의 발전
발전 단계 사관에서는 무계급 사회인 원시 시대에 대해 계급 사회의 첫 단계로 고대를 이해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대는 노예가 생산의 주체를 담당하는 발전 단계로 정의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단선적인 발전 단계설은 비판을 받고 있다. 실제로 고대 사회에서 노예는 보편적으로 존재했지만,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와 같이 노예가 생산의 주체가 된 사회는 많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오히려 여러 지역에서 원시 무계급 사회에서 계급 사회로의 복잡한 발전 양상이 나타났다.
5. 1. 종교와 철학
문명의 발흥은 신, 초자연적인 힘, 내세에 대한 믿음을 제도적으로 후원하는 것과 일치했다.[1] 청동기 시대 동안 많은 문명들은 자체적인 형태의 다신교를 채택했다. 일반적으로 다신교의 신들은 인간의 성격, 강점, 약점을 드러냈다. 초기 종교는 종종 지역에 기반을 두었으며, 도시나 국가 전체가 경쟁자보다 선호와 이점을 제공하는 신을 선택했다. 숭배는 신의 표현을 건설하고 희생을 바치는 것을 포함했다. 희생은 물질적인 재화, 음식, 또는 극단적인 경우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한 인신 제사일 수 있었다.[2]기원전 6세기경을 전후하여 동서양에서 새로운 철학과 종교가 등장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 세계에서 매우 다양한 종교가 발전했으며, 가장 초기의 주요 종교 중 일부는 인도에서 힌두교(기원전 2000년경), 불교(기원전 5세기), 자이나교(기원전 6세기), 그리고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였다. 아브라함 계통 종교는 기원전 1700년경의 유대교에서 기원한다.[3]
동쪽에서는 세 개의 사상(도교, 법가, 유교)이 현대까지 중국의 사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지배적인 위치에 오른 유교는 정치적 도덕을 법의 힘이 아닌 전통의 힘과 모범에서 찾았다.[4] 유교는 후에 한반도[5] 와 일본으로 퍼져나갔다.[6]
서쪽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그리스 철학 전통이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을 통해 유럽과 중동 전역으로 확산되었다.[7] 청동기 및 철기 시대 종교가 형성된 후, 기독교는 로마 세계로 퍼져나갔다.[8]
5. 2. 과학과 기술
고대 기술 발전은 역사 기록 이전, 도구, 불의 사용,[1] 동물의 가축화, 농업이 모두 기록된 역사보다 앞서 시작되었다.[2] 금속의 사용과 금속 합금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은 이후 기술 발전에 기초가 되었다.[3] 질병과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약초 사용과 일부 외과 수술 기법을 포함한 의학 지식은 고대 시대에 발전했다.[4] 문자의 발명은 이후 발전을 가능하게 한 매우 중요한 초기 발전으로, 인간은 이를 통해 나중에 사용할 정보를 기록할 수 있었다.[5]고대 이집트 기술은 수천 년 동안 지속된 일련의 유물과 관습으로 나타난다. 이집트인들은 건설 과정을 돕기 위해 경사로와 지렛대와 같은 많은 기본 기계를 발명하고 사용했다. 또한 선박을 포함하여 지중해 해양 기술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6] 바빌로니아인과 이집트인들은 밤하늘 관측을 기록한 초기 천문학자들이었다.[7]
Qanat 물 관리 기술은 기원전 1천년기 초 이란 고원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아마도 아라비아 반도에서도 발생하여 서쪽과 동쪽으로 서서히 퍼져나갔다.[8]
영(0)의 개념을 가진 인도-아라비아 숫자는 인도에서 개발되었으며,[9] 현대 형태의 종이는 서기 1세기에 중국에서 발명되었다.[10]
참조
[1]
서적
21st-Century Narratives of World History: Global and Multidisciplinary Perspectives
Palgrave
[2]
웹사이트
Data
http://journals.sage[...]
2019-12-10
[3]
간행물
(Review of) A Short History of Pakistan: Book One: Pre-Muslim Period.
1968-01-01
[4]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Southeast Asia, Volume One, Part One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5]
서적
Perfect Order: Recognizing Complexity in Bali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6]
간행물
Trade and Exchange Networks in Iron Age Cambodia: Preliminary Results from a Compositional Analysis of Glass Beads
https://journals.lib[...]
2017-02-12
[7]
웹사이트
Pre-Angkorian Settlement Trends in Cambodia's Mekong Delta and the Lower Mekong
http://www.anthropol[...]
Anthropology.hawaii.edu
2017-02-11
[8]
웹사이트
Early Mainland Southeast Asian Landscapes in the First Millennium
http://anthropology.[...]
Anthropology.hawaii.edu
2017-02-12
[9]
서적
The Social Evolution of Indonesia: The Asiatic Mode of Production and Its Legacy
https://books.google[...]
Springer Science & Business Media
[10]
간행물
The Origins of the Bronze Age of Southeast Asia
https://www.research[...]
2017-02-11
[11]
웹사이트
How and When the Bronze Age Reached South East Asia
http://www.newhistor[...]
New Historian
2018-03-09
[12]
백과사전
history of Southeast Asia
https://www.britanni[...]
2017-02-11
[13]
문서
"[[John N. Miksic]], Geok Yian Goh, Sue O Connor – ''Rethinking Cultural Resource Management in Southeast Asia'' 2011 Page 251 This site dates from the fifth to first century BCE and it is one of the earliest sites of the [[Sa Huỳnh]] culture in Thu Bồn Valley (Reinecke et al. 2002, 153–216); 2) Lai Nghi is a prehistoric cemetery richly equipped with iron tools and weapons, ..."
[14]
서적
Excavations at Gò Cầm, Quảng Nam, 2000–3: Linyi and the Emergence of the Cham Kingdoms
https://www.academia[...]
Academia.edu
2017-02-12
[15]
간행물
Language phylogenies reveal expansion pulses and pauses in Pacific settlement
2009-01-01
[16]
서적
Examining the farming/language dispersal hypothesis
McDonald Institute for Archaeological Research, University of Cambridge
[17]
간행물
The Austronesian Homeland and Dispersal
2019-01-14
[18]
간행물
The Austronesian Dispersal and the Origin of Languages
1991-01-01
[19]
웹사이트
"'Game-changing' study suggests first Polynesians voyaged all the way from East Asia"
https://www.science.[...]
2019-03-23
[20]
서적
The Pacific
Taylor & Francis
2013
[21]
문서
Van Tilburg, Jo Anne. 1994. ''Easter Island: Archaeology, Ecology and Culture.'' Washington D.C.: Smithsonian Institution Press
[22]
문서
Langdon, Robert. The Bamboo Raft as a Key to the Introduction of the Sweet Potato in Prehistoric Polynesia, ''The Journal of Pacific History'', Vol. 36, No. 1, 2001
[23]
서적
Early Exchange between Africa and the Wider Indian Ocean World
Palgrave Macmillan
[24]
간행물
Recent advances in the Iron Age archaeology of Taiwan
2000-01-01
[25]
뉴스
Notes from central Taiwan: Our brother to the south
https://www.taipeiti[...]
2021-12-24
[26]
뉴스
Birthplace of Austronesians is Taiwan, capital was Taitung: Scholar
https://www.taiwanne[...]
2021-12-24
[27]
서적
Paths of Origins: The Austronesian Heritage in the Collections of the National Museum of the Philippines, the Museum Nasional Indonesia, and the Netherlands Rijksmuseum voor Volkenkunde
ArtPostAsia
[28]
서적
Lost Kingdoms of Early Southeast Asia: Hindu-Buddhist Sculpture 5th to 8th century
https://www.research[...]
Yale University Press
[29]
서적
Archaeology and Language III: Artefacts languages, and texts
Routledge
[30]
간행물
Genome-wide evidence of Austronesian–Bantu admixture and cultural reversion in a hunter-gatherer group of Madagascar
2014-01-21
[31]
간행물
Genetic evidence and historical theories of the Asian and African origins of the present Malagasy population
2021-04-26
[32]
간행물
East African origins for Madagascan chickens as indicated by mitochondrial DNA
https://pmc.ncbi.nlm[...]
2017-03-01
[33]
간행물
On the Origins and Admixture of Malagasy: New Evidence from High-Resolution Analyses of Paternal and Maternal Lineages
https://academic.oup[...]
2009-09-01
[34]
간행물
Malagasy Phonological History and Bantu Influence
https://rest.neptune[...]
2012-06-01
[35]
간행물
Evidence of Austronesian Genetic Lineages in East Africa and South Arabia: Complex Dispersal from Madagascar and Southeast Asia
https://academic.oup[...]
Oxford Academic
2024-05-23
[36]
논문
The Maritime Silk Road: History of an Idea
https://www.iseas.ed[...]
ISEAS
2016
[37]
서적
The Maritime Silk Road
https://library.oape[...]
Amsterdam University Press
[38]
논문
Contest For Seascape: Local Thalassocracies and Sino-Indian Trade Expansion in the Maritime Southeast Asia During the Early Premodern Period
http://jmic.online/i[...]
2018
[39]
웹사이트
Shaanxi History Museum notice
http://e.sxhm.com/en[...]
2020-10-18
[40]
웹사이트
Proyecto Arqueológico Norte Chico
https://www.fieldmus[...]
2011-02-02
[41]
서적
Ancient Greek civilization
https://books.google[...]
Wiley
[42]
서적
Eastern Europe: An Introduction to the People, Lands, and Culture
https://books.google[...]
ABC-CLIO
2012-12-05
[43]
서적
World and Its Peoples
https://books.google[...]
Marshall Cavendish
2012-12-05
[44]
서적
The End of the Bronze Age: Changes in Warfare and the Catastrophe Ca. 1200 BC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45]
웹사이트
"Δαρδάνιοι, Δάρδανοι, Δαρδανίωνες"
https://www.perseus.[...]
[46]
웹사이트
dardani
http://www.archives.[...]
University of Notre Dame Archives
[47]
서적
The Illyrians
[48]
서적
Hannibal: A History of the Art of War Among the Carthaginians and Romans Down to the Battle of Pydna, 168 B.C.
[49]
서적
Battles of the Greek and Roman Worlds: A Chronological Compendium of 667 Battles to 31Bc, from the Historians of the Ancient World (Greenhill Historic Series)
[50]
간행물
[51]
논문
Late Antiquity and World History
http://dx.doi.org/10[...]
2017
[52]
문서
古代生物
[53]
서적
西洋世界の歴史
山川出版社
[54]
서적
古代国家はいつ成立したか
岩波新書
[55]
서적
岩波講座日本歴史 6 中世1
岩波書店
[56]
서적
日本に古代はあったのか
角川選書
[57]
웹사이트
井上章一
http://publications.[...]
[58]
간행물
時代 -時代を分けることと捉えること-
有斐閣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