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파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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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리 파크스는 19세기 영국의 외교관으로, 특히 중국과 일본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제1차 아편 전쟁 당시 통역관으로 시작하여, 1854년 샤먼 주재 영사, 1865년부터 1883년까지 주일 영국 공사를 역임하며 일본의 근대화에 영향을 미쳤다. 1883년에는 주청 영국 공사 겸 주한 영국 공사로 임명되어, 1884년 영국-조선 우호 통상 조약 체결에 기여했다. 1885년 베이징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했으며, 그의 일본 체류 18년은 주일 영국 공사 중 최장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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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파크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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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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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이름 | 해리 스미스 파크스 |
작위 | GCMG, KCB |
출생 | 1828년 2월 24일 |
출생지 | 잉글랜드 스태퍼드셔 주블록스위치 버칠 홀 |
사망 | 1885년 3월 22일 |
사망지 | 청나라 직례성 베이징 |
경력 | |
직책 | 주일본 영국 특명전권공사 겸 총영사 |
임기 시작 | 1865년 |
임기 종료 | 1883년 |
이전 | 러더퍼드 올콕 경 |
이후 | 프랜시스 플런켓 경 |
군주 | 빅토리아 여왕 |
직책 2 | 주청 영국 특명전권공사 겸 총영사 |
임기 시작 2 | 1883년 9월 28일 |
임기 종료 2 | 1885년 3월 22일 |
이전 2 | 토마스 조지 그로스베너 경 |
이후 2 | 니콜라스 로데릭 오코너 경 |
군주 2 | 빅토리아 여왕 |
직책 3 | 주한 영국 공사 |
임기 시작 3 | 1884년 |
임기 종료 3 | 1885년 |
이전 3 | 없음 |
이후 3 | 존 월셤 경 |
군주 3 | 빅토리아 여왕 |
개인 정보 | |
배우자 | 패니 플루머 |
자녀 | 매리언 (장녀) 메이블 (차녀) |
2. 생애
해리 파크스는 1828년 잉글랜드 스태퍼드셔의 블록스위치 교구에 있는 버치힐 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해리 파크스는 제철업자인 Parkes, Otway & Co.의 설립자였다.[1] 그의 어머니는 그가 4세 때, 아버지는 5세 때 사망하여, 그는 버밍엄에서 해군 퇴역 장교인 삼촌과 함께 살았다.[1] 1838년 5월 킹 에드워드 학교, 버밍엄에 입학하기 전 볼설 히스에 있는 기숙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1]
1841년 6월, 파크스는 중국에 사는 사촌 메리 원스톨을 찾아갔다. 그녀는 독일인 선교사 칼 귀츨라프와 결혼하여 마카오에 살고 있었다. 파크스는 사촌 누나 집에서 숙식하며 같은 해 10월, 영국 외교관이자 대중 무역 전권대사인 헨리 포틴저 경의 통역관 존 R. 모리슨에게 견습생 수업을 받았다. 이 시기에 제1차 아편 전쟁이 일어났다.[46]
1842년 파크스는 심부름을 하면서 틈틈이 중국어 문법과 기초 어휘를 배웠고, 스승 모리슨을 따라 홍콩에 가기도 했다. 6월 13일에는 스승의 상관인 포틴저 경을 수행해 장강 너머 난징에 갔다. 그는 1차 아편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전장 전투를 직접 목격했고, 8월 29일 HMS 콘월리스 호에 탑승해 난징 조약 조인식을 지켜보았다.[46]
1843년 초, 파크스는 칼 귀츨라프의 복사 (기독교)로 교회에서 일했다. 당시 누나 집은 저우산 군도를 점령한 영국군을 따라 이사한 상태였다. 파크스는 매형의 영국군 문관 업무를 도우며 숙식했고, 이듬해 홍콩에서 있을 영국 정부 주관 영사 시험을 준비했다. 시험이 임박하자 푸젠성으로 가 시험을 준비했으나, 푸저우 항 가동이 늦어져 광둥성에서 시험에 응시, 합격 후 홍콩 식민청에서 수습했다.[46]
1844년 6월, 샤먼시에서 초등 통역관으로 근무했다. 이듬해 러더퍼드 올콕이 중국 민병대의 공격을 받았던 푸저우로 전근가면서 함께 이동했다.[46] 1846년 5월, 푸젠성 민란 진압에 대한 배상금 협상 과정에 통역을 맡았다.[46] 같은 해 8월, 올콕과 상하이로 전근되어 그의 통역 보좌관으로 근무했다. 이듬해부터 일본어를 익혔고, 1848년 3월 상하이 주재 영국 부영사관으로 승진했다. 칭푸 구 (상하이시)에서 영국 선교사 3명이 공격당하자, 중국인 혐의자 색출 및 검거를 위해 난징으로 가 지방관리들과 협상했다. 1850년 유럽 전근 전까지 상하이에서 통역관을 겸임했다. 1851년까지 유럽에 있다가 광둥 성으로 돌아와 주변 민정을 살폈다. 존 보울링 경 부재 시 영사 대리로 일했고, 1853년 8월 광둥 주재 영국 부영사관을 잠시 맡았다.[46]
1854년, 샤먼 주재 영국 영사관 영사에 올랐다. 이듬해 시암에서 보우링 조약 체결 실무를 담당했다. 조약 승인을 위해 영국에서 빅토리아 여왕에게 조약문을 상주, 승인받고 중국, 태국 관련 업무에 치중했다. 1856년 보우링 조약 조인 후, 광둥 성으로 돌아와 영사 대리를 맡았다.[46]
난징 조약 이후에도 영국과 청나라 간 무역 불균형은 해소되지 않았고, 중국 내륙 개방은 요원했다. 광저우 주재 영국 영사 대리 파크스는 양광총독[47] 예밍천에 맞서 조약을 영국에 유리하게 재개정하려 했다. 1856년 10월 8일, 애로호 사건을 개전 계기로 삼아 예밍천에게 선원 석방 및 사과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존 보우링은 애로호 사건을 무역 및 외교 걸림돌 제거 기회로 판단, 개전 방침을 결정했다.
영국 함대는 10월 29일 난구포대 앞에 진을 쳤고, 파크스는 마이클 세이무어 경과 예밍천의 관사로 갔다. 12월 16일 청나라 군의 공격으로 영국 함대는 큰 피해를 보았고, 파크스는 홍콩으로 피신했다. 영국 내 전쟁 반대론자들은 파크스를 비판했다.
1857년 11월, 엘긴 백작[50]의 영국 본대가 홍콩에 집결, 프랑스도 참전하며 연합 함대를 꾸렸다. 파크스는 세이무어 제독 참모 겸 영프 대표단의 일원으로 최후통첩을 전달, 12월 28일 광저우 점령 후 도주 중인 예밍천을 사로잡았다.
1858년 1월 9일 보구이[52]가 후임 양광총독으로 지명됐으나, 파크스는 연합군 법정 설치 및 경찰력 배치를 총괄, 2월 10일 광저우 항구를 재개항했다. 톈진 조약이 문서만 교환된 상태에서 현지 분위기는 유럽에 적대적이었고, 파크스에게 현상금이 걸렸다.
1859년 12월 6일, 빅토리아 여왕에게서 기사 작위 삼등(CB)[53]을 받았다.
1860년 6월 25일, 영국군은 톈진 다구포대를 포격했다. 6월 6일 엘긴 경은 파크스를 발해 만으로 호출, 톈진 조약을 준비했다. 8월 1일 제임스 그랜트 경 수행원으로 베이탕에 파견, 8월 21일 요새 북쪽 진지 돌격 후 다른 진지 항복 협상에 나섰다. 3일 후 톈진에서 영불 연합군과 청나라 황제 사신 간 회담을 주선했으나 결렬, 영불 연합군은 베이징으로 진군했다.
9월 14-17일, 파크스 등 대표단은 퉁저우에서 청 관리들과 협상했다. 9월 18일, 청 군 재집결에 항의하다 승격림심에게 체포, 베이징 형조 감옥에 투옥, 고문당했다. 9월 29일 공친왕 명으로 사원으로 이송, 10월 8일 석방됐다. 10월 18일, 대표단 감금 및 고문 보복 명분으로 영불 연합군은 진공했다.
1860년 10월 18일 베이징 조약 조인 후, 파크스는 광저우로 돌아가 주룽반도 안정화 임무를 맡았다. 톈진 조약 비준으로 청은 내륙 3개 항구 개항,[56] 열강은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협력했다.
1861년 4월, 파크스는 베이징을 거쳐 6월 난징에서 태평천국군 고위층과 만났다. 10월 21일, 영불 연합군이 광둥 성 점령지를 반환하며 광저우 임무가 종료, 11월 상하이, 12월 닝보시에서 태평천국군 협상단과 만났다.
1862년 영국으로 귀환, 제2차 아편전쟁 감금 경험을 기고해 인기를 얻고, 5월 19일 바스 훈장 기사단장(KCB)에 서임됐다. 1864년 1월 영국을 떠나 3월 상하이에서 주중영국영사 업무를 시작했다(임명은 1858년 12월 21일).
1865년 5월, 파크스는 양쯔 강 항구를 방문하던 중 러더포드 올콕 경의 뒤를 이어 "특명전권공사 겸 총영사"로 일본 주재 직책을 맡으라는 통보를 받았다.[8] 그의 임무 중 하나는 1854년 영일 화친 조약과 1858년 영일 통상 조약에 대한 교토 일본 제국 조정의 승인을 얻는 것이었다.[9]
막부 말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파크스는 도쿠가와 막부와 존왕양이 세력 사이에서 중립 정책을 추구하며 평화로운 해결을 희망했다. 개혁 지원으로 반동 세력에게 미움을 사 암살 시도를 세 번이나 받았다. 막부 전복과 보신 전쟁 발발에 놀랐지만, 영국의 중립 정책을 고수했다. 1868년 5월 22일, 메이지 천황에게 신임장을 제출하여 영국을 최초로 메이지 정부를 공식 인정한 국가로 만들었다.[9]
파크스는 18년 재임 동안 일본 제국 해군 훈련, 등대, 전신 시스템, 도쿄와 요코하마 사이 철도 등 현대적 인프라 건설을 위해 많은 영국인 외국인 고문을 데려왔다.[9]
어니스트 사토와 윌리엄 조지 아스톤은 파크스의 지원으로 일본학의 학자가 되었다.
일본에 있는 동안 파크스의 아내는 1867년 후지 산에 오른 최초의 비일본인 여성으로 알려졌다.[10]
1866년 영, 불, 네 3국 연합은 막부와 관세율 개정에 조인했다. 파크스는 토머스 글러버의 소개로 사쓰마번을 방문, 번주 시마즈 다다요시 및 시마즈 히사미쓰, 사이고 다카모리, 데라지마 무네노리 등과 만났다. 제2차 조슈 정벌 직후 레옹 로슈와 함께 시모노세키에서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를, 오쿠라 방면 막부 진지에서는 로주 오가사와라 나가유키와 연이어 회담하는 등 양자 충돌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우와지마 번을 방문해 다테 무네나리와도 만났다. 연말에는 영국공사관을 요코하마에서 에도로 이전했다.[60]
1867년 쌀값 폭등으로 인한 에도의 소요 사태에 대해 막부에 쌀 수입을 제안, 막부는 칙령을 반포해 쌀 수입과 판매를 허용했다. 파크스는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알현하기 위해 하코네를 경유해 오사카로 갔다. 요시노부는 효고 개항을 약속했다. 파크스는 요시노부를 '지금까지 만난 일본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 극찬했다. 쓰루가 만을 시찰[61]했다가 교토 조정의 적대적 여론을 알고 오사카 귀환 후 해로로 에도에 귀환했다.
고베 해군 조련소 소장 가쓰 가이슈와 영국 해군 교관 채용 문제로 만났고, 영국 군함으로 하코다테를 돌아 동해 방면으로 남하 후, 니가타현, 사도가섬, 노토반도 등을 돌아보고 나가사키를 경유해 오사카로 일본을 일주했다. 이카루스 호 사건과 일본의 기독교 탄압에 대해 막부 측에 이카루스 호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고, 도사번 참정 고토 쇼지로와 회담했다. 막부와 교토 조정의 방해에도 효고 항 개항 및 오사카 자유시장 설치를 밀어붙였다. 1867년 말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정권을 일황에게 반환하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파크스는 퇴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다시 배알했다.
1868년(게이오 4년, 메이지 원년)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 막부측이 패배했다. 요시노부는 오사카성을 탈출했고 막부에서 각국 외교단에 보호 불능을 선언해 파크스는 효고 항으로 피신했다. 고베 사건이 발생했다. 메이지 신정부에서 파견한 히가시구제 미치토미(東久世通禧)가 파크스 측에 회담을 요청했다. 히가시구제는 파크스에게 신정부 방침이 쇄국이나 양이가 아니며, 막부가 외국 정부와 맺은 조약들을 승계할 것이라 약속해 고베 사건도 마무리됐다. 파크스는 영국 공사관을 설득해 보신 전쟁에 중립을 선언하게 하고 메이지 천황 알현을 허락받았으며, 사카이 사건이 일어났으나 산조 사네토미, 이와쿠라 도모미 등을 만나 해결을 보고 입궐하려다 2명의 괴한에게 습격당했다. 곧 격퇴되어 파크스는 무사했으나 알현은 연기됐다. 메이지 신정부의 막부 토벌군(東征軍)이 에도를 접수할 즈음 파크스도 요코하마로 돌아가 치안 유지를 도왔고, 요시노부 처분안에 대한 논쟁에 의견을 내 토벌군의 에도 무혈입성에 공헌했다. 오사카에서 일황을 알현하고 신정부에 대한 신임장을 교환하면서 열강 중 최초로 메이지 신정부를 승인했다.
1869년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의 회담에서 프랑스·네덜란드와 함께 하코다테를 거점으로 한 에노모토 다케아키의 군세를 교전 단체로 인정하지 않고, 미국·이탈리아·프로이센과 대립했다. 이와쿠라와 요코하마 주둔의 영불 군대 철수 문제 등 외교·내정에 대해 논의했다.
1871년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 회견하여, 사쓰마 번 등 여러 번의 정부에 대한 불만의 증대와 그에 대처하기 위한 어친병 설치·폐번치현에 대해 논의했다. 요코하마 주둔 영국군의 대폭 감축을 본국에 제안하여 채택되었다. 휴가를 위해 미국 경유로 귀국, 아담스가 대리 공사가 되었다. 휴가 중에 영국 본국에서 대일 외교에 대해 정부에 의견을 진술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이와쿠라 사절단 방영에 즈음하여 일본에 귀임하려고 했던 아스턴을 통역으로 확보할 것.
- 일본의 황실용 마차를 기증해야 할 것.
- 요코하마 주둔의 영국 군대의 철수 시기에 대해.
- 폐번치현에 대한 의견.
- 도쿄 고지마치에 항구적인 영국 공사관을 설치해야 할 것.
- 공사관원·영사관원의 대우 개선에 대해.
- 일청 수호 조약에 대해.
1872년 방영 중인 대사 이와쿠라 도모미, 주영 공사 데라지마 무네노리와 회견하여 조약 개정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32] 일본인 유학생의 교육과 일본 해군의 육성에 헌신했다. 외무 대신 그랜빌 백과 이와쿠라·데라지마의 조약 개정 예비 교섭에 동석, 일본에서의 기독교 자유화·외국인의 내지 여행 자유화·치외법권 철폐·요코하마 주둔 영국군 철수·시모노세키 전쟁 배상금 등에 대해 협의했다.
1873년 일본에 귀임했다.
메이지 유신 후, 일본에 대해 서양 문명의 도입을 추진하는 등, 일본의 근대화와 일영 교류에 기여했으며, 일본아시아협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다만, 조약 개정 문제에서는 외무 경 데라지마 무네노리와 대립했다.
1883년 11월 26일 경복궁에서 영국-조선 우호 통상 조약이 체결될 때, 해리 파크스는 영국 측 협상 대표였다. 1884년 그는 주한 영국 공사로 임명되었다. 새 조약은 1884년 4월에 발효되었으며, 파크스는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해 서울로 돌아왔다.[13]
2. 1. 유년기
해리 파크스는 잉글랜드 웨스트미들랜즈 스태포드셔 블록스위치의 버칠 홀(Birchill Hall)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해리 파크스(Harry Parkes)는 'Parkes, Otway & Co.'라는 지역 철공소의 설립자였고, 해리는 아버지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파크스는 4세에 어머니를 병으로, 5세에 아버지를 마차 사고로 잃었다. 버밍엄에 사는 퇴역 해군 장교인 삼촌에게 두 누나와 함께 맡겨져 기숙 학교에 다녔지만 9세에 그 삼촌마저 잃었다.[19] 이후 버밍엄 버설 헤스(Balsall Heath) 초등학교에 다니다가 1838년(만10세) 에섹스 쳄스포드의 킹 에드워드 4세 외국어학교로 진학했다.[1] 그의 부계 조부는 목사, 모계 조부는 우체국장 겸 문구상이었다.[19]2. 2. 중국에서의 활동 (1841-1864)
1843년 초, 파크스는 칼 귀츨라프의 복사 (기독교)로 교회에서 일했다. 당시 누나 집은 저우산 군도를 점령한 영국군을 따라 이사한 상태였다. 파크스는 매형의 영국군 문관 업무를 도우며 숙식했고, 이듬해 홍콩에서 있을 영국 정부 주관 영사 시험을 준비했다. 시험이 임박하자 푸젠성으로 가 시험을 준비했으나, 푸저우 항 가동이 늦어져 광둥성에서 시험에 응시, 합격 후 홍콩 식민청(Colonial Secretary of Hong Kong)에서 수습했다.[46]1844년 6월, 샤먼시에서 초등 통역관으로 근무했다. 이듬해 러더퍼드 올콕이 중국 민병대의 공격을 받았던 푸저우로 전근가면서 함께 이동했다.[46] 1846년 5월, 푸젠성 민란 진압에 대한 배상금 협상 과정에 통역을 맡았다.[46] 같은 해 8월, 올콕과 상하이로 전근되어 그의 통역 보좌관으로 근무했다. 이듬해부터 일본어를 익혔고, 1848년 3월 상하이 주재 영국 부영사관으로 승진했다. 칭푸 구 (상하이시)에서 영국 선교사 3명이 공격당하자, 중국인 혐의자 색출 및 검거를 위해 난징으로 가 지방관리들과 협상했다. 1850년 유럽 전근 전까지 상하이에서 통역관을 겸임했다. 1851년까지 유럽에 있다가 광둥 성으로 돌아와 주변 민정을 살폈다. 존 보울링 경 부재 시 영사 대리로 일했고, 1853년 8월 광둥 주재 영국 부영사관을 잠시 맡았다.[46]
1854년, 샤먼 주재 영국 영사관 영사에 올랐다. 이듬해 시암에서 보우링 조약 체결 실무를 담당했다. 조약 승인을 위해 영국에서 빅토리아 여왕에게 조약문을 상주, 승인받고 중국, 태국 관련 업무에 치중했다. 1856년 보우링 조약 조인 후, 광둥 성으로 돌아와 영사 대리를 맡았다.[46]
난징 조약 이후에도 영국과 청나라 간 무역 불균형은 해소되지 않았고, 중국 내륙 개방은 요원했다. 광저우 주재 영국 영사 대리 파크스는 양광총독[47] 예밍천에 맞서 조약을 영국에 유리하게 재개정하려 했다. 1856년 10월 8일, 애로호 사건을 개전 계기로 삼아 예밍천에게 선원 석방 및 사과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존 보우링은 애로호 사건을 무역 및 외교 걸림돌 제거 기회로 판단, 개전 방침을 결정했다.
영국 함대는 10월 29일 난구포대 앞에 진을 쳤고, 파크스는 마이클 세이무어 경과 예밍천의 관사로 갔다. 12월 16일 청나라 군의 공격으로 영국 함대는 큰 피해를 보았고, 파크스는 홍콩으로 피신했다. 영국 내 전쟁 반대론자들은 파크스를 비판했다.
1857년 11월, 엘긴 백작[50]의 영국 본대가 홍콩에 집결, 프랑스도 참전하며 연합 함대를 꾸렸다. 파크스는 세이무어 제독 참모 겸 영프 대표단의 일원으로 최후통첩을 전달, 12월 28일 광저우 점령 후 도주 중인 예밍천을 사로잡았다.
1858년 1월 9일 보구이[52]가 후임 양광총독으로 지명됐으나, 파크스는 연합군 법정 설치 및 경찰력 배치를 총괄, 2월 10일 광저우 항구를 재개항했다. 톈진 조약이 문서만 교환된 상태에서 현지 분위기는 유럽에 적대적이었고, 파크스에게 현상금이 걸렸다.
1859년 12월 6일, 빅토리아 여왕에게서 기사 작위 삼등(CB)[53]을 받았다.
1860년 6월 25일, 영국군은 톈진 다구포대를 포격했다. 6월 6일 엘긴 경은 파크스를 발해 만으로 호출, 톈진 조약을 준비했다. 8월 1일 제임스 그랜트 경 수행원으로 베이탕에 파견, 8월 21일 요새 북쪽 진지 돌격 후 다른 진지 항복 협상에 나섰다. 3일 후 톈진에서 영불 연합군과 청나라 황제 사신 간 회담을 주선했으나 결렬, 영불 연합군은 베이징으로 진군했다.
9월 14-17일, 파크스 등 대표단은 퉁저우에서 청 관리들과 협상했다. 9월 18일, 청 군 재집결에 항의하다 승격림심에게 체포, 베이징 형조 감옥에 투옥, 고문당했다. 9월 29일 공친왕 명으로 사원으로 이송, 10월 8일 석방됐다. 10월 18일, 대표단 감금 및 고문 보복 명분으로 영불 연합군은 진공했다.
1860년 10월 18일 베이징 조약 조인 후, 파크스는 광저우로 돌아가 주룽반도 안정화 임무를 맡았다. 톈진 조약 비준으로 청은 내륙 3개 항구 개항,[56] 열강은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협력했다.
1861년 4월, 파크스는 베이징을 거쳐 6월 난징에서 태평천국군 고위층과 만났다. 10월 21일, 영불 연합군이 광둥 성 점령지를 반환하며 광저우 임무가 종료, 11월 상하이, 12월 닝보시에서 태평천국군 협상단과 만났다.
1862년 영국으로 귀환, 제2차 아편전쟁 감금 경험을 기고해 인기를 얻고, 5월 19일 바스 훈장 기사단장(KCB)에 서임됐다. 1864년 1월 영국을 떠나 3월 상하이에서 주중영국영사 업무를 시작했다(임명은 1858년 12월 21일).
2. 2. 1. 제1차 아편 전쟁
1841년 6월 통역사의 꿈을 갖게 된 파크스는 중국에 사는 그의 사촌 메리 원스톨(Mary Wanstall)을 찾아갔다. 그녀는 독일인 선교사 칼 귀츨라프(Karl Gützlaff)와 결혼해 마카오에 살고 있었는데, 사촌누나 집에 숙식하며 동년 10월에 영국 외교관이자 대중 무역 전권대사 헨리 포틴저(Sir Henry Pottinger) 경의 통역관 존 R. 모리슨에게 견습생 수업을 받았다. 이즈음 제1차 아편 전쟁(1839–42)이 일어났다.[46]1842년 파크스는 심부름을 하는 틈틈이 중국어 문법과 기초 어휘를 배우는 한편 스승인 모리슨을 따라 홍콩에 가기도 했다. 6월 13일에는 스승의 상관인 포틴저 경을 수행해 장강 너머 난징에 갔다. 그는 1차 아편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전장 전투(현 장쑤성 전장시)를 직접 목격했다. 그리고 8월 29일 콘월리스 호에 탑승해 눈 앞에서 난징 조약 조인식을 지켜보는 행운을 누렸다.[46]
2. 2. 2. 통역관 및 영사 시절
1841년 6월, 통역사의 꿈을 가진 파크스는 중국에 사는 사촌 메리 원스톨을 찾아갔다. 그녀는 독일인 선교사 칼 귀츨라프(Karl Gützlaff)와 결혼하여 마카오에 살고 있었다. 파크스는 사촌누나 집에 머물며 같은 해 10월, 영국 외교관이자 대중 무역 전권대사인 헨리 포틴저(Sir Henry Pottinger) 경의 통역관 존 R. 모리슨에게 견습생 수업을 받았다. 이 시기에 제1차 아편 전쟁(1839–42)이 일어났다.[46]1842년 파크스는 심부름을 하면서 틈틈이 중국어 문법과 기초 어휘를 배웠고, 스승 모리슨을 따라 홍콩에 가기도 했다. 6월 13일에는 스승의 상관인 포틴저 경을 수행해 장강 너머 난징에 갔다. 그는 1차 아편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전장 전투(현 장쑤성 전장시)를 직접 목격했다. 그리고 8월 29일 HMS 콘월리스(HMS Cornwallis)에 탑승해 눈 앞에서 난징 조약 조인식을 지켜보는 행운을 누렸다.[46]
1843년 초, 파크스는 누나 집으로 돌아와 매형 칼 귀츨라프의 복사 (기독교)로 교회에서 일했다. 누나 집은 저우산 군도를 점령한 영국군을 따라 이사한 상태였다. 매형은 영국군의 문관 일까지 겸하고 있었는데, 파크스는 누나 집에서 숙식하며 이듬해 홍콩에서 있을 영국 정부 주관 영사 시험을 준비했다. 시험이 임박하자 푸젠 성까지 내려가 시험을 준비했으나, 푸저우 항 가동이 늦어져 광둥 성에서 다음 번 시험에 응시했다. 합격 후에는 홍콩 식민청(Colonial Secretary of Hong Kong)에서 수습일을 시작했다.[46]
1844년 6월, 파크스는 샤먼시에서 초등 통역관으로 근무했다. 이듬해에는 영국 샤먼 영사관 영사인 러더퍼드 올콕(Rutherford Alcock)이 중국 민병대의 공격을 받았던 푸저우로 전근가면서 함께 이동했다.[46]
1846년 5월, 푸젠성의 민란을 진압한 영국 군은 중국으로부터 46000USD에 달하는 배상금을 받아냈는데, 파크스는 이 협상 과정에 통역을 맡았다.[46] 같은 해 8월에는 얼콕과 함께 상하이로 전근되어 얼콕의 통역 보좌관으로 계속 근무했다. 이듬해부터 일본어를 익히기 시작했고, 1848년 3월에는 상하이 주재 영국 부영사관으로 승진했다. 칭푸 구 (상하이시)에서 세 명의 영국 선교사가 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파크스는 중국인 혐의자 색출 및 검거를 위해 당시 장쑤 성의 성도인 난징으로 가 지방관리들과 협상에 나섰다. 그는 상하이에서 통역관을 계속 겸임하면서 1850년 유럽 전근까지 일했다. 1851년까지 유럽에 있다가 11월 21일 광둥 성으로 돌아왔는데, 이듬해 2월까지 주변을 여행하며 민정을 살폈다. 광둥 주재 영국 영사관 영사 존 보우링 경의 부재시에는 영사 대리로 일하기도 했다. 1853년 8월, 그는 광둥 주재 영국 부영사관을 잠시 맡았다.[46]
1854년, 파크스는 샤먼 주재 영국 영사관 영사에 올랐다. 이듬해까지 선임 존 보우링 경을 보좌해 시암에 다녀오기도 했다. 거기서 영국과 시암 왕국 간의 조약 체결 실무를 담당했는데, 이는 보우링 조약(Bowring Treaty)으로 알려진 영국 태국 간 통상 조약이었다. 조약 승인을 받기 위해 영국에 간 그는 6월 1일 빅토리아 여왕에게 조약문을 상주하고 7월 9일 승인을 받았다. 그는 남은 하반기 내내 중국, 태국 관련 업무에만 치중했다. 1856년 보우링 조약이 조인되었고, 그는 원래 임지인 광둥 성으로 돌아와 영사 대리를 맡았다.[46]
2. 2. 3. 제2차 아편 전쟁
난징 조약의 불평등 조약으로도 영국과 청나라 간 무역 불균형은 해소되지 않았고, 중국 내륙 개방은 여전히 요원했다. 광저우 주재 영국 영사 대리였던 파크스는 당시 청나라 양광총독[47] 예밍천에 맞서 조약을 영국에 더 유리하게 재개정하는 임무를 맡았다. 예밍천은 계속 거부했고, 파크스는 결국 극단적인 방법을 생각하게 됐다. 이 두 사람의 갈등에서 제2차 아편전쟁(1856-60)이 시작됐다.
1856년 10월 8일, 중국 국적 범선 애로우 호가 영국 상선기(the Red Ensign)를 달고 주강을 항행 중이었다. 선원 중 해적들이 위장 잠입해 있다는 이유로 청나라 관리들이 선장과 선원 전원을 체포하려 했다. 선장은 배에 없었고 12명의 선원을 체포한 그들은 영국 상선기를 강에 던져 버렸다.(애로호 사건) 파크스는 이를 개전의 훌륭한 계기로 여겼다. 이에 영국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며 엄중한 항의를 광저우 총독 예밍천에게 전달했다. 예밍천은 상선기일 뿐 영국 국기도 아니고, 더구나 중국 영토에서 단지 해적선을 나포한 당연한 권리를 행사한 것일 뿐이라며 일축했다. 파크스는 개전의 충분한 명분으로 간주하고 초대 홍콩 총독이 된 존 보우링 경에게 즉시 보고했다.
파크스는 예밍천에게 즉시 선원 전원을 석방할 것과 영국 국기에 대한 모욕을 사과하라고 무리하게 요구했다. 1842년 난징 조약에 의거한 광동성에서의 영국 권리에 따라 힐문장을 작성했으나 예밍천은 계속 무시하고 힐문장 수리를 거절했다. 보우링 총독은 애로호 사건이 광동성에서의 무역과 외교의 걸림돌을 제거할 새로운 전기로 판단하고 개전 방침을 결정해 본국에 여부를 물었다.
예밍천이 굴복을 거부하자 영국 함대는 10월 29일 난구포대 앞에 진을 쳤다. 파크스는 제독 마이클 세이무어 경과 함께 양광총독 예밍천의 관사로 갔다. 영국은 사실 남중국해에 병력이 충분치 않아 광동 광서 전부를 점령하기는 무리였다. 일단 주강 하구를 막고 함포를 겨냥한 상태에서 협상이 계속 결렬되던 끝에 12월 16일 청나라 군이 전 화력을 영국 함대와 시 외곽의 외국인 주거 지역을 향해 집중했다. 영국 함대도 심대한 피해를 입고 프랑스 함대의 엄호를 받아 겨우 사지를 벗어났다. 파크스도 본국에서 정식 지원군이 올 때까지 근 1년 간 홍콩으로 피신했다. 청나라는 자신감을 얻고 강경론이 득세하게 됐다.
영국 내 전쟁 반대론자들은 명분이 없다며 연일 파크스를 공격했다. 특히 1857년 2월 26일, 맘스베리 공작[48]은 영국 상원(the House of Lords)에서 연설 중 "만약 이번 일로 인해 심각한 결과가 생기지만 않는다면 좋겠는데, 내 평생 이번 파크스의 일처리보다 그로테스크한 건 생각해본 적조차 없다."라고 말했다.[49]
1857년 의회의 전쟁 승인이 의결된 후 11월 대중국 전권대사 엘긴 백작[50]의 영국 본대가 증원돼 홍콩으로 집결했다. 때마침 광시에서 프랑스 선교사 오귀스트 샤프들랭(Auguste Chapdelaine)의 처형을 문제 삼은 프랑스도 참전 선언했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연합 함대를 꾸렸으며, 파크스는 마이클 세이무어 제독의 참모 겸 영프 대표단의 일원으로서 12월 12일에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최후 통첩 기한인 12월 28일이 지나자 연합군은 광저우에 포격을 시작해 해를 넘기기도 전에 점령했다. 파크스는 도주 중인 예밍천 양광총독을 사로잡았다. 영국의 변호사이자 역사학자이며 당시 더 타임즈 종군기자로 현장에 있었던 조지 윙그로브 쿡은 이 때를 묘사하길, 파크스가 "예는 내가 사냥했어(Ye was my game)"라며 그를 때리고 모욕을 가하는 등 특이한 쾌감을 느끼는 듯했다고 했다. 기사는 "매우 비대한 남자가 관사 벽 제일 끝에 쭈그려 충격을 이겨내려 애쓰고 있었다"라고 끝맺고 있다.[51] 예밍천은 48일 뒤 인도 캘커타에 유폐된 후 스스로 곡기를 끊고 아사했다.
1858년 1월 9일 몽골 출신 보구이[52]가 청나라 조정에서 후임 양광총독으로 지명됐으나 총독관저가 있는 광저우는 영불 연합군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다. 파크스는 중국어에 능통한 현지 최고위직으로서 연합군의 법정 설치 및 경찰력 배치를 총괄했으며, 연합군 측은 2월 10일에 광저우 항구를 재개항했다. 톈진 조약이 조인은 아직 되지 않고 1월 26일 문서만 교환된 상태에서 현지 분위기는 유럽에 적대적이었으며, 영불 연합군이 통치력을 구석구석 미칠 수 없는 상태였다. 광시 광동 양 주에서 의병들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파크스의 머리에 현상금이 걸려있었다.
1859년 12월 6일 파크스는 광동 전투 승리의 공으로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 삼등(CB)[53]에 서훈됐다.
1860년 6월 25일 영국군은 광동 방면 전투 때의 8배에 달하는 대함대로 톈진 다구포대를 포격했다.(제3차 다구포대 포격) 6월 6일 엘진 경은 미리 파크스를 발해 만으로 호출했었다. 파크스는 당시 엘진 경의 대중국 수석비서 토머스 웨이드의 옆에서 톈진 조약을 준비했다.
1860년 8월 1일 제임스 그랜트 경의 수행원(attaché)으로 톈진의 베이탕(北塘)에 파견됐다. 그곳에서 그는 자국민을 비롯한 유럽인들을 안전 지대로 소개시키고 청의 요새인 다구포대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8월 21일 영국군은 요새 북쪽 진지 돌격을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파크스도 다른 진지의 항복을 받아내려 협상에 나섰다. 3일 후, 그는 톈진 시내로 들어가 영불 연합군과 청나라 황제의 사신 간의 회담 자리를 주선했다. 회담이 시작되자 청의 사신이 황제에게 전권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 회담은 결렬됐으며, 영불 연합군은 청의 수도인 베이징으로 진군했다.
파크스와 헨리 로크 남작(엘진 백작의 수석 비서관)을 비롯한 대표단이 영불 연합군에 앞서 청나라의 관리들과 퉁저우(通州,톈진과의 경계지역)에서 만난 것은 9월 14일부터 17일까지였다. 더 타임즈 기자인 토머스 보울비(Thomas Bowlby)가 현장 취재했는데, 일단 영불 연합군을 베이징 시 바깥 5마일(약 8km)에 대기시킨 채 새 조약문을 작성하도록 양국 대표단이 우선 합의했다. 그런데 9월 18일 파크스를 비롯한 대표단이 영국군영으로 돌아가는 도중 청나라 군의 재집결을 멀리서 보고 뭔가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 급히 회담장에 돌아간 그들은 왜 합의를 어기느냐며 항의했다. 그러자 청군 사령관 승격림심은 그 자리에서 그들을 체포했으며, 그들을 북경으로 압송해 형조 감옥에 가두고 고문했다.
1860년 9월 29일 공충친왕의 명으로 파크스와 로슈는 감옥에서 베이징 어느 사원으로 이송됐다. 그는 파크스와 로슈를 회유하려 했으나 그들은 엘진 사령관에 대한 청의 어떤 요구도 듣지 않았다. 10월 8일 파크스와 로슈를 비롯한 다른 6명의 인질들은 감금에서 벗어났다. 10월 18일 대표단 감금 및 고문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영불 연합군의 진공이 시작됐다. 목표는 함풍제가 몽진 가있는 허베이성 북서부 끝 여름궁, 즉 열하였다.
2. 2. 4. 제2차 아편 전쟁 이후
난징 조약으로도 영국과 청나라 간의 무역 불균형은 해소되지 않았고, 중국 내륙 개방은 여전히 요원했다. 당시 광동 주재 영국 공사관에서 파크스가 맡은 임무는 청나라 양광총독이었던 예밍천에 맞서 조약을 영국에 더 유리하게 재개정하는 것이었다.[47] 예밍천은 계속 거부했고, 파크스는 결국 극단적인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의 갈등에서 제2차 아편전쟁(1856~1860)이 시작되었다.1856년 10월 8일, 중국 국적 범선 애로우 호가 영국 상선기를 달고 주강을 항행하던 중, 청나라 관리들이 선원 중 해적들이 위장 잠입해 있다고 의심하여 선장과 선원 전원을 체포하려 했다. 선장은 배에 없었고, 12명의 선원을 체포한 그들은 영국 상선기를 강에 던져 버렸다.(애로호 사건) 파크스는 이를 개전의 훌륭한 계기로 여겼다. 그는 예밍천에게 엄중히 항의했으나, 예밍천은 이를 일축했다. 파크스는 개전의 충분한 명분으로 간주하고 초대 홍콩 총독이 된 존 보우링 경에게 즉시 보고했다.
파크스는 예밍천에게 즉시 선원 전원을 석방하고 영국 국기에 대한 모욕을 사과하라고 무리하게 요구했다. 1842년 난징 조약에 의거한 광동성에서의 영국 권리에 따라 힐문장을 작성했으나, 예밍천은 계속 무시하고 힐문장 수리를 거절했다. 보우링 총독은 애로호 사건이 광동성에서의 무역과 외교의 걸림돌을 제거할 새로운 전기로 판단하고 개전 방침을 결정해 본국에 여부를 물었다.
예밍천이 굴복을 거부하자 영국 함대는 10월 29일 난구포대 앞에 진을 쳤다. 파크스는 제독 마이클 세이무어 경과 함께 예밍천의 관사로 갔다. 영국은 남중국해에 병력이 충분치 않아 광동, 광서 전부를 점령하기는 무리였다. 일단 주강 하구를 막고 함포를 겨냥한 상태에서 협상이 계속 결렬되던 끝에, 12월 16일 청나라 군이 영국 함대와 시 외곽의 외국인 주거 지역을 향해 전 화력을 집중했다. 영국 함대도 심대한 피해를 보고 프랑스 함대의 엄호를 받아 겨우 사지를 벗어났다. 파크스도 본국에서 정식 지원군이 올 때까지 근 1년 간 홍콩으로 피신했다.
영국 내 전쟁 반대론자들은 명분이 없다며 연일 파크스를 공격했다. 특히 1857년 2월 26일, 맘스베리 공작[48]은 영국 상원에서 "만약 이번 일로 인해 심각한 결과가 생기지만 않는다면 좋겠는데, 내 평생 이번 파크스의 일처리보다 그로테스크한 건 생각해본 적조차 없다."[49]라고 연설했다.
1860년 10월 18일 청나라가 마침내 굴복하고 베이징 조약이 조인됨에 따라 파크스는 광저우 원 부임지로 돌아갔다. 그의 새 임무는 홍콩을 영연방에 가입시키고 새로 할양받은 주룽반도를 안정화하는 것이었다. 2년 전 조약문만 교환하고 아직 비준되지 않았던 톈진 조약이 비준됨에 따라 청나라는 내륙 세 개의 항구를 새로 개항했으며,[56] 새로 삼구통상대신 직책을 만들어 열강과 통상했다. 대신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난징에서 벌어진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데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했다.
1861년 4월 파크스는 베이징으로 갔다가 6월엔 난징 진압과 관련해 태평천국군 고위층과 만나기 위해 난징으로 갔다. 10월 21일에는 영불 연합군이 광둥 성 점령지를 청나라에 반환했고, 이에 따라 광저우에서의 파크스의 임무도 일단락되었다. 파크스는 11월에 상하이로 여행을 떠나 12월에는 닝보시에서 태평천국군 협상단과 다시 만났다.
1862년 영국으로 귀환한 그는 제2차 아편전쟁 때 감금 당했던 일에 관해 신문에 글을 기고해 인기를 얻었다. 1862년 5월 19일 빅토리아 여왕은 그를 바스 훈장 기사단장(KCB)으로 서임했다. 파크스 경은 1864년 1월 영국을 떠나 3월 상하이에 도착해 주중영국영사로서 업무를 시작했다.(임명은 1858년 12월 21일)
2. 3. 주일 영국 공사 시절 (1865-1883)
1865년(게이오 원년) 시모노세키 포격 사건의 강경 대응에 대한 책임을 물어 주일 영국공사 러더포드 올콕이 해임되자, 파크스는 후임 주일공사로 임명되어 주일영군이 주둔한 요코하마에 도착했다.[57] 당시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 등 막부 고위 관료 대부분이 1차 조슈 정벌 지휘 문제로 에도를 비웠기 때문에, 파크스는 프랑스, 네덜란드 연합함대를 효고 앞바다로 보내 막부와 교토 조정 양측에 압력을 가했다. 그 결과 고메이 천황은 관세율 개정을 허가했지만, 효고 개항은 거부했다.[58] 파크스는 상해로 가족을 데리러 가는 길에 시모노세키에 들러 다카스기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등 조슈 번 인사들과 밀담을 나누었다.[59]1866년(게이오 2년) 영, 불, 네 3국 연합은 막부와 관세율 개정에 조인했다. 파크스는 토머스 글러버의 소개로 사쓰마번을 방문, 번주 시마즈 다다요시 및 시마즈 히사미쓰, 사이고 다카모리, 데라지마 무네노리 등과 만났다. 2차 조슈 정벌 직후 레옹 로슈와 함께 시모노세키에서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를, 오쿠라 방면 막부 진지에서는 로주 오가사와라 나가유키와 연이어 회담하는 등 양자 충돌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우와지마 번을 방문해 다테 무네나리와도 만났다. 연말에는 영국공사관을 요코하마에서 에도로 이전했다.[60]
1867년 쌀값 폭등으로 인한 에도의 소요 사태에 대해 막부에 쌀 수입을 제안했다. 이를 수긍한 막부는 곧 칙령을 반포해 쌀 수입과 판매를 허용했다. 파크스는 새 쇼군이 될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알현하기 위해 당시에도 유명 휴양지였던 하코네를 경유해 오사카로 갔다. 전대 쇼군이 죽고 후임에 거론된 요시노부는 아직 일황의 칙허를 받지 못한 상태였지만 효고 개항을 약속했다. 파크스는 이때의 요시노부의 인상을 '지금까지 만난 일본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 극찬했다. 교토부 북쪽 쓰루가 만을 시찰하러 북상했다가[61] 교토 조정의 적대적 여론을 알게 돼 오사카 귀환 후 해로로 에도에 귀환했다.
고베 해군 조련소 소장 가쓰 가이슈와 영국 해군 교관 채용 문제로 만났고, 영국 군함 스납프 호(후일의 바실리스크 호)로 하코다테를 돌아 일본해 방면으로 남하 후, 니가타현, 사도가섬, 노토반도 등을 돌아보고 나가사키를 경유해 오사카로 일본을 일주했다. 이카루스 호 사건으로 영국 수병이 살해된 것과 일본의 기독교 탄압에 대해 알게 된 그는, 막부 측에 이카루스 호 사건의 책임을 강하게 추궁하는 한편, 사건 용의자들이 도사번 출신 탈번 낭인들로 의심돼, 도쿠시마번을 경유해 도사번에 가 도사 번 참정 고토 쇼지로와 주로 회담했다. 그는 막부와 교토 조정 양측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효고 항 개항 및 오사카 자유시장 설치를 밀어붙였다. 1867년 말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평화적으로 정권을 일황에게 반환하고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내려졌다. 파크스 영사는 이 때 퇴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다시 배알했다.
1868년(게이오 4년, 메이지 원년) 도바 후시미 전투를 막부측에서 걸었다가 졌다. 요시노부는 오사카성을 탈출했고 막부에서 각국 외교단에 보호불능을 선언해 와 파크스는 효고 항으로 피신했다. 흔히 고베 사건으로 알려진 미국 해병대, 프랑스 수병 연합 대 영국 군사고문이 지휘하는 비젠 번 병력의 전투가 일어났다. 이미 막부 군은 쫓겨가고 메이지 신정부에서 파견한 히가시구제 미치토미(東久世通禧)가 파크스 측에 회담을 요청했다. 히가시구제는 파크스에게 신정부 방침이 결코 쇄국이나 양이가 아니며, 현재까지 에도 막부가 외국 정부와 맺은 조약들을 그대로 승계할 것이라 약속해 고베 사건도 마무리됐다. 파크스는 영국 공사관을 설득해 보신 전쟁에 중립을 선언하게 하고 메이지 천황 알현을 허락받았으며, 그 과정에 사카이 사건이 일어났으나 이것도 교토에서 산조 사네토미, 이와쿠라 도모미 등을 만나 해결을 보고 마침내 입궐할 참이었다. 그런데 궁으로 가는 도중 2명의 괴한이 습격해 왔다. 그들은 곧 격퇴돼 파크스는 무사했으나 알현은 3일 연기됐다. 메이지 신정부의 막부 토벌군(東征軍)이 에도를 접수할 즈음 파크스도 요코하마로 돌아가 치안유지를 도우는 한편, 요시노부 처분안에 대한 논쟁에 의견을 내 토벌군의 에도 무혈입성에 공헌했다. 오사카에서 일황을 알현하고 신정부에 대한 신임장을 교환하면서 열강 중 최초로 메이지 신정부를 승인했다.
1869년(메이지 2년)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3국 공사는 이와쿠라 도모미와 회담하고 홋카이도로 도망간 막부 잔존 세력을 인정치 않겠다 약속했다. 이에 반해 미국, 이탈리아, 프로이센은 그들을 승인할 기세였다. 파크스는 이와쿠라와 같이 요코하마 주재 영불군 철수 문제 등 산적한 외교, 내정 문제에 의견을 나눴다.
1871년(메이지 4년) 다시 이와쿠라 도모미와 회견하고 사쓰마번 등 여러 번과 사무라이들이 메이지 신정부에 관해 갖는 불만이 높아지고 있으며 이에 대해 사병 혁파 및 일본군 창설, 폐번치현 등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파크스는 주일영군의 대폭 감군을 약속하고 마침 휴식년에 귀국해 애덤스가 공사대리를 맡았다. 그는 휴식년 임시 귀국 후에도 본국에서 대일외교에 대해 영국 정부에 진언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이와쿠라 사절단의 영국 방문을 기해 일본에 귀환하는 윌리엄 애스턴[62]을 통역으로 채용할 것.
- 일본 황실 전용 마차를 기증할 것.
- 요코하마 주둔 주일영군 철수 기한에 대해.
- 폐번치현에 관한 의견
- 도쿄에 항구적으로 영국 공사관을 설치할 것.
- 공사관원, 영사관원의 처우개선.
- 청일수호조약에 대해.
1872년(메이지 5년) 파크스는 영국을 순방 중이던 이와쿠라 도모미와 주영일본공사 데라지마 무네노리를 만나 영일 조약 개정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일본인 유학생의 교육과 일본 해군의 육성에 대해 최선의 협력을 다하겠다 약속했으며, 영국 외무장관 그랜빌 백작과 영일 조약 개정에 관한 예비교섭을 준비했다. 일본은 조약 개정에 대한 보답으로 기독교 자유화, 외국인 내국 여행 자유화를 제시하고 대신 치외법권 철폐, 주일영군 철수, 시모노세키 전쟁 배상금 탕감 등을 제시했다.
1873년(메이지 6년) 파크스는 휴식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귀임했다. 메이지 유신 후 그는 일본에 서양문명을 뿌리내리게 하도록 노력했고, 교류 확대를 꾀했으며 일본 아시아 협회장을 맡기도 했다. 다만 조약 개정이 영국 내부 사정으로 지지부진해 일본 외무경 데라지마 무네노리와 대립하기도 했다.
1883년(메이지 16년) 일본 체류 18년만에 주청영국공사 겸 주한영국공사가 돼 중국으로 갔다.
2. 3. 1. 일본 부임
1865년(게이오 원년) 시모노세키 포격 사건의 강경 대응에 대한 책임을 물어 주일 영국공사 러더포드 올콕이 해임되자, 파크스는 후임 주일공사로 임명되어 주일영군이 주둔한 요코하마에 도착했다.[57] 당시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 등 막부 고위 관료 대부분이 1차 조슈 정벌 지휘 문제로 에도를 비웠기 때문에, 파크스는 프랑스, 네덜란드 연합함대를 효고 앞바다로 보내 막부와 교토 조정 양측에 압력을 가했다. 그 결과 고메이 천황은 관세율 개정을 허가했지만, 효고 개항은 거부했다.[58] 파크스는 상해로 가족을 데리러 가는 길에 시모노세키에 들러 다카스기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등 조슈 번 인사들과 밀담을 나누었다.[59]1865년 5월, 파크스는 양쯔 강 항구를 방문하던 중 러더포드 올콕 경의 뒤를 이어 "특명전권공사 겸 총영사"로 일본 주재 직책을 맡으라는 통보를 받았다.[8] 그의 임무 중 하나는 1854년 영일 화친 조약과 1858년 영일 통상 조약에 대한 교토 일본 제국 조정의 승인을 얻는 것이었다.[9]
막부 말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파크스는 도쿠가와 막부와 존왕양이 세력 사이에서 중립 정책을 추구하며 평화로운 해결을 희망했다. 개혁 지원으로 반동 세력에게 미움을 사 암살 시도를 세 번이나 받았다. 막부 전복과 보신 전쟁 발발에 놀랐지만, 영국의 중립 정책을 고수했다. 1868년 5월 22일, 메이지 천황에게 신임장을 제출하여 영국을 최초로 메이지 정부를 공식 인정한 국가로 만들었다.[9]
파크스는 18년 재임 동안 일본 제국 해군 훈련, 등대, 전신 시스템, 도쿄와 요코하마 사이 철도 등 현대적 인프라 건설을 위해 많은 영국인 외국인 고문을 데려왔다.[9]
어니스트 사토와 윌리엄 조지 아스톤은 파크스의 지원으로 일본학의 학자가 되었다.
일본에 있는 동안 파크스의 아내는 1867년 후지 산에 오른 최초의 비일본인 여성으로 알려졌다.[10]
1866년 (게이오 2년), 파크스는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와 함께 막부와 개세약서에 조인했다. 글러버의 중재로 영국 해군 제독 조지 킹, 빈센트 아플린 대위, 윌리엄 윌리스, 존 F. 라우더, 알렉산더 지볼트 등이 글러버와 함께 군함 프린세스 로열, 서펀트, 살라미스를 이끌고 1866년 7월 25일 (게이오 2년 6월 14일) 나가사키를 출발, 1866년 7월 27일 (게이오 2년 6월 16일) 가고시마를 방문했다. 1866년 8월 1일 (게이오 2년 6월 21일) 가고시마를 떠나기 전 사쓰마 번주 시마즈 시게히사(시마즈 타다요시), 시마즈 히사미쓰, 사이고 다카모리, 가로 니이 나히사오와 회담했다. 1866년 7월 29일(게이오 2년 6월 18일) 군함 프린세스 로열 함상에서 사이고, 니이와 회담(데라시마 무네노리 통역)에서 사이고는 효고 개항 문제에 대한 막부의 기만책을 열강이 추궁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파크스는 내정 불간섭을 이유로 거부했다. 그러나 사이고의 일본 정세와 영국의 이해득실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파크스는 사쓰마 번의 생각에 납득, 사영 관계를 긴밀하게 만들었다.[25]
1868년 (게이오 4년·메이지 원년), 도바·후시미 전투 발발, 막부군 패배, 요시노부의 오사카 성 탈출 소식에 막부로부터 각국 외교단 보호 불가 통지를 받고 효고로 이동했다. 고베 사건 발발, 미국, 프랑스 해병과 영국 경비대가 비젠 번 병사와 교전했다. 신정부 사절 히가시쿠제 미치토미와 회담, 신정부의 개국 화친·조약 준수 방침을 확인하고 고베 사건 해결에 거의 도달했다. 보신 전쟁에 대한 국외 중립을 선언했다.[29]
1869년 (메이지 2년),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 회담에서 프랑스·네덜란드와 함께 하코다테를 거점으로 한 에노모토 다케아키 군세를 교전 단체로 인정하지 않고, 미국, 이탈리아, 프로이센과 대립했다.
1871년 (메이지 4년),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 회견, 사쓰마 번 등 여러 번의 정부 불만 증대와 어친병 설치·폐번치현에 대해 논의했다. 요코하마 주둔 영국군 대폭 감축을 본국에 제안, 채택되었다.
1872년, 방영 중인 대사 이와쿠라 도모미, 주영 공사 데라지마 무네노리와 회견, 조약 개정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32]
2. 3. 2. 메이지 유신
1865년(게이오 원년) 시모노세키 포격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러드퍼드 올콕 경이 해임되고, 파크스는 후임 주일공사로 임명되어 요코하마에 도착했다.[57] 당시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 등 막부 고위 관료 대부분이 1차 조슈 정벌 지휘 문제로 에도를 비워, 파크스는 프랑스, 네덜란드 연합함대를 효고 앞바다로 보내 막부와 교토 조정 양측에 압력을 가했다. 고메이 천황은 관세율 개정을 허가했지만, 효고 개항은 거부했다.[58] 파크스는 다카스기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등 조슈 측 인사들과도 밀담을 나눴다.[59]1866년(게이오 2년) 영불네 3국 연합은 막부와 관세율 개정에 조인했다. 파크스는 토머스 글러버의 소개로 사쓰마번을 방문해 시마즈 다다요시, 시마즈 히사미쓰, 사이고 다카모리, 데라지마 무네노리 등과 만났다. 2차 조슈 정벌 직후 레옹 로슈와 함께 시모노세키에서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를, 오쿠라에서 로주 오가사와라 나가유키와 회담했으나 양자 충돌을 막지 못했다. 이후 우와지마 번을 방문하여 다테 무네나리와도 만났다. 연말에 영국공사관을 요코하마에서 에도로 이전했다.[60]
1867년 쌀값 폭등으로 인한 에도 소요 사태에 대해 막부에 쌀 수입을 제안, 막부는 칙령을 반포해 쌀 수입과 판매를 허용했다. 파크스는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알현하기 위해 하코네를 경유해 오사카로 갔다. 요시노부는 효고 개항을 약속했다. 파크스는 요시노부를 '지금까지 만난 일본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 극찬했다. 쓰루가 만을 시찰[61]했다가 교토 조정의 적대적 여론을 알고 오사카 귀환 후 해로로 에도에 귀환했다.
고베 해군 조련소 소장 가쓰 가이슈와 영국 해군 교관 채용 문제로 만났고, 영국 군함으로 하코다테를 돌아 동해 방면으로 남하 후, 니가타현, 사도가섬, 노토반도 등을 돌아보고 나가사키를 경유해 오사카로 일본을 일주했다. 이카루스 호 사건과 일본의 기독교 탄압에 대해 막부 측에 이카루스 호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고, 도사번 참정 고토 쇼지로와 회담했다. 막부와 교토 조정의 방해에도 효고 항 개항 및 오사카 자유시장 설치를 밀어붙였다.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정권을 일황에게 반환하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파크스는 퇴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다시 배알했다.
1868년(게이오 4년, 메이지 원년)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 막부측이 패배했다. 요시노부는 오사카성을 탈출했고 막부에서 각국 외교단에 보호 불능을 선언해 파크스는 효고 항으로 피신했다. 고베 사건이 발생했다. 메이지 신정부에서 파견한 히가시구제 미치토미(東久世通禧)가 파크스 측에 회담을 요청했다. 히가시구제는 파크스에게 신정부 방침이 쇄국이나 양이가 아니며, 막부가 외국 정부와 맺은 조약들을 승계할 것이라 약속해 고베 사건도 마무리됐다. 파크스는 영국 공사관을 설득해 보신 전쟁에 중립을 선언하게 하고 메이지 천황 알현을 허락받았으며, 사카이 사건이 일어났으나 산조 사네토미, 이와쿠라 도모미 등을 만나 해결을 보고 입궐하려다 2명의 괴한에게 습격당했다. 곧 격퇴되어 파크스는 무사했으나 알현은 연기됐다. 메이지 신정부의 막부 토벌군(東征軍)이 에도를 접수할 즈음 파크스도 요코하마로 돌아가 치안 유지를 도왔고, 요시노부 처분안에 대한 논쟁에 의견을 내 토벌군의 에도 무혈입성에 공헌했다. 오사카에서 일황을 알현하고 신정부에 대한 신임장을 교환하면서 열강 중 최초로 메이지 신정부를 승인했다.
1869년 (메이지 2년)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의 회담에서 프랑스·네덜란드와 함께 하코다테를 거점으로 한 에노모토 다케아키의 군세를 교전 단체로 인정하지 않고, 미국·이탈리아·프로이센과 대립했다. 이와쿠라와 요코하마 주둔의 영불 군대 철수 문제 등 외교·내정에 대해 논의했다.
1871년 (메이지 4년)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 회견하여, 사쓰마 번 등 여러 번의 정부에 대한 불만의 증대와 그에 대처하기 위한 어친병 설치·폐번치현에 대해 논의했다. 요코하마 주둔 영국군의 대폭 감축을 본국에 제안하여 채택되었다. 휴가를 위해 미국 경유로 귀국, 아담스가 대리 공사가 되었다. 휴가 중에 영국 본국에서 대일 외교에 대해 정부에 의견을 진술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이와쿠라 사절단 방영에 즈음하여 일본에 귀임하려고 했던 아스턴을 통역으로 확보할 것.
- 일본의 황실용 마차를 기증해야 할 것.
- 요코하마 주둔의 영국 군대의 철수 시기에 대해.
- 폐번치현에 대한 의견.
- 도쿄 고지마치에 항구적인 영국 공사관을 설치해야 할 것.
- 공사관원·영사관원의 대우 개선에 대해.
- 일청 수호 조약에 대해.
1872년 방영 중인 대사 이와쿠라 도모미, 주영 공사 데라지마 무네노리와 회견하여 조약 개정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32] 일본인 유학생의 교육과 일본 해군의 육성에 헌신했다. 외무 대신 그랜빌 백과 이와쿠라·데라지마의 조약 개정 예비 교섭에 동석, 일본에서의 기독교 자유화·외국인의 내지 여행 자유화·치외법권 철폐·요코하마 주둔 영국군 철수·시모노세키 전쟁 배상금 등에 대해 협의했다.
1873년 (메이지 6년) 일본에 귀임했다.
메이지 유신 후, 일본에 대해 서양 문명의 도입을 추진하는 등, 일본의 근대화와 일영 교류에 기여했으며, 일본아시아협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다만, 조약 개정 문제에서는 외무 경 데라지마 무네노리와 대립했다.
2. 3. 3. 메이지 유신 이후
1866년 영, 불, 네 3국 연합은 막부와 관세율 개정에 조인했다. 파크스는 토머스 글러버의 소개로 사쓰마번을 방문해 번주 시마즈 다다요시 및 시마즈 히사미쓰, 사이고 다카모리, 데라지마 무네노리 등과 만났다. 제2차 조슈 정벌 발발 직후 프랑스 공사 레옹 로슈(Michel Jules Marie Léon Roches,1809년-1900년)와 함께 시모노세키에서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를, 오쿠라 방면 막부 진지에서는 로주(老中) 오가사와라 나가유키와 연이어 회담하는 등 양자 충돌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우와지마번을 방문해 다테 무네나리와도 만났다.[60]1867년 쌀값 폭등으로 인한 에도의 소요 사태에 대해 막부에 쌀 수입을 제안했다. 이를 수긍한 막부는 곧 칙령을 반포해 쌀 수입과 판매를 허용했다. 파크스는 새 쇼군이 될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알현하기 위해 당시에도 유명 휴양지였던 하코네를 경유해 오사카로 갔다. 전대 쇼군이 죽고 후임에 거론된 요시노부는 아직 일황의 칙허를 받지 못한 상태였지만 효고 개항을 약속했다. 파크스는 이때의 요시노부의 인상을 '지금까지 만난 일본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 극찬했다. 교토부 북쪽 쓰루가 만을 시찰하러 북상했다가[61] 교토 조정의 적대적 여론을 알게 돼 오사카 귀환 후 해로로 에도에 귀환했다.
고베 해군 조련소 소장 가쓰 가이슈와 영국 해군 교관 채용 문제로 만났고, 영국 군함 스납프 호(후일의 바실리스크 호)로 하코다테를 돌아 동해 방면으로 남하 후, 니가타현, 사도가섬, 노토반도 등을 돌아보고 나가사키를 경유해 오사카로 일본을 일주했다. 이카루스 호 사건으로 영국 수병이 살해된 것과 일본의 기독교 탄압에 대해 알게 된 그는, 막부 측에 이카루스 호 사건의 책임을 강하게 추궁하는 한편, 사건 용의자들이 도사번 출신 탈번 낭인들로 의심돼, 도쿠시마번을 경유해 도사번에 가 도사 번 참정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와 주로 회담했다. 그는 막부와 교토 조정 양측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효고 항 개항 및 오사카 자유시장 설치를 밀어붙였다. 1867년 말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평화적으로 정권을 일황에게 반환하고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내려졌다. 파크스 영사는 이 때 퇴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다시 배알했다.
1868년(게이오 4년, 메이지 원년) 도바·후시미 전투를 막부측에서 걸었다가 졌다. 요시노부는 오사카성을 탈출했고 막부에서 각국 외교단에 보호불능을 선언해 와 파크스는 효고 항으로 피신했다. 흔히 고베 사건으로 알려진 미국 해병대, 프랑스 수병 연합 대 영국 군사고문이 지휘하는 비젠번 병력의 전투가 일어났다. 이미 막부 군은 쫓겨가고 메이지 신정부에서 파견한 히가시구제 미치토미(東久世通禧)가 파크스 측에 회담을 요청했다. 히가시구제는 파크스에게 신정부 방침이 결코 쇄국이나 양이가 아니며, 현재까지 에도 막부가 외국 정부와 맺은 조약들을 그대로 승계할 것이라 약속해 고베 사건도 마무리됐다. 파크스는 영국 공사관을 설득해 보신 전쟁에 중립을 선언하게 하고 메이지 천황 알현을 허락받았으며, 그 과정에 사카이 사건이 일어났으나 이것도 교토에서 산조 사네토미, 이와쿠라 도모미 등을 만나 해결을 보고 마침내 입궐할 참이었다. 그런데 궁으로 가는 도중 2명의 괴한이 습격해 왔다. 그들은 곧 격퇴돼 파크스는 무사했으나 알현은 3일 연기됐다. 메이지 신정부의 막부 토벌군(東征軍)이 에도를 접수할 즈음 파크스도 요코하마로 돌아가 치안유지를 도우는 한편, 요시노부 처분안에 대한 논쟁에 의견을 내 토벌군의 에도 무혈입성에 공헌했다. 오사카에서 일황을 알현하고 신정부에 대한 신임장을 교환하면서 열강 중 최초로 메이지 신정부를 승인했다.
1869년(메이지 2년)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3국 공사는 이와쿠라 도모미와 회담하고 홋카이도로 도망간 막부 잔존 세력을 인정치 않겠다 약속했다. 이에 반해 미국, 이탈리아, 프로이센은 그들을 승인할 기세였다. 파크스는 이와쿠라와 같이 요코하마 주재 영불군 철수 문제 등 산적한 외교, 내정 문제에 의견을 나눴다.
1871년(메이지 4년) 다시 이와쿠라 도모미와 회견하고 사쓰마번 등 여러 번과 사무라이들이 메이지 신정부에 관해 갖는 불만이 높아지고 있으며 이에 대해 사병 혁파 및 일본군 창설, 폐번치현 등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파크스는 주일영군의 대폭 감군을 약속하고 마침 휴식년에 귀국해 애덤스가 공사대리를 맡았다. 그는 휴식년 임시 귀국 후에도 본국에서 대일외교에 대해 영국 정부에 진언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이와쿠라 사절단의 영국 방문을 기해 일본에 귀환하는 윌리엄 애스턴[62]을 통역으로 채용할 것.
- 일본 황실 전용 마차를 기증할 것.
- 요코하마 주둔 주일영군 철수 기한에 대해.
- 폐번치현에 관한 의견
- 도쿄에 항구적으로 영국 공사관을 설치할 것.
- 공사관원, 영사관원의 처우개선.
- 청일수호조약에 대해.
1872년(메이지 5년) 파크스는 영국을 순방 중이던 이와쿠라 도모미와 주영일본공사 데라지마 무네노리를 만나 영일 조약 개정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일본인 유학생의 교육과 일본 해군의 육성에 대해 최선의 협력을 다하겠다 약속했으며, 영국 외무장관 그랜빌 백작과 영일 조약 개정에 관한 예비교섭을 준비했다. 일본은 조약 개정에 대한 보답으로 기독교 자유화, 외국인 내국 여행 자유화를 제시하고 대신 치외법권 철폐, 주일영군 철수, 시모노세키 전쟁 배상금 탕감 등을 제시했다.
1873년(메이지 6년) 파크스는 휴식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귀임했다. 메이지 유신 후 그는 일본에 서양문명을 뿌리내리게 하도록 노력했고, 교류 확대를 꾀했으며 일본 아시아 협회장을 맡기도 했다. 다만 조약 개정이 영국 내부 사정으로 지지부진해 일본 외무경 데라지마 무네노리와 대립하기도 했다.
2. 4. 주(駐)조선 영국 공사 시절 (1883-1884)
1883년 11월 26일 경복궁에서 영국-조선 우호 통상 조약이 체결될 때, 해리 파크스는 영국 측 협상 대표였다. 1884년 그는 주한 영국 공사로 임명되었다. 새 조약은 1884년 4월에 발효되었으며, 파크스는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해 서울로 돌아왔다.[13]3. 사망
파크스는 1885년 3월 21일 베이징에서 말라리아 열병으로 사망했다.[1] 1883년 7월, 일본 체류 18년 만에 청나라 공사로 임명되어 일본을 떠났으며,[2] 1884년부터는 주한 공사를 겸임했다.[2] 1890년 4월 8일, 코넛 공작 아서 왕자는 상하이 외탄에서 파크스의 동상 제막식을 거행했고, 이 동상은 중일 전쟁 중 상하이 전투에서 일본군에 점령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1] 세인트 폴 대성당에는 그의 기념비가 있다.[1]
4. 가족
해리 파크스는 1856년 1월 1일 세인트 로렌스 교회에서 초대 법원 부총장인 토마스 플루머 경의 손녀 패니 플루머와 결혼했다.[15] 패니 플루머는 1867년 10월 7일과 8일에 후지산을 등반한 최초의 비일본인 여성이었다.[16] 그녀는 1879년 10월에 병으로 사망했다.[17]
파크스 부부는 슬하에 6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메리언 파크스(Marion Parkes) | 1860년 | 1949년[37] | 자딘 매티슨 홀딩스의 운영자인 케즈윅 가문 출신인 제임스 존스톤 케즈윅과 1884년 결혼.[38] |
메이블 데스버러 파크스(Mabel Desborough Parkes) | 1864년 | 1890년[39] | 영국 해군의 부관인 에거턴 레벳 대위와 결혼. 1890년 낙마 사고로 사망. |
프랜시스(Frances) | 1866년 | 1966년[40][41] | 저딘 매티슨 초대 일본 지점장 윌리엄 케즈윅의 손자 찰스 딕슨과 결혼. 남편 사망 후 쿠알라룸푸르의 스테이션 호텔에서 여생을 보냄.[41] |
더글러스 고든(Douglas Gordon) | 1868년 | 1894년[42] | 말레이시아에서 공직에 있었으나 26세에 페낭에서 병사.[42] |
릴리언(Lillian) | 1872년 | 1946년[43] |
5. 평가 및 영향
파크스는 여러 언어로 된 30개 이상의 출판물과 400개 이상의 도서관 자료를 남겼다.[18] 주요 저작물로는 1852년의 ''미스터 P.P. 톰스의 중국어 단어 ... 남자에 대한 해석에 대한 관찰.'', 1856년의 "1856년 방콕에 대한 해리 파크스의 임무에 관한 파일, 런던 외무부 기록", 그리고 ''문서, 1853–1872'' 등이 있다.
파크스는 18년 동안 주일 영국 공사·대사로 재직하여 역대 최장 기록을 세웠다. 이는 클로드 맥도널드의 12년을 능가하는 기록이다. 다만, 통산 일본 체류 기간은 어니스트 새토의 25년이 더 길다.
프랑스 제2 제정의 주일 공사 로슈가 본국의 의향을 무시하고 장군 권력의 절대주의 노선을 지원한 것과 달리, 파크스는 표면상 중립을 유지하면서도 어니스트 새토의 조언을 받아 사쓰마 번, 조슈 번과 교류했다. 다카스기 신사쿠와 회담하거나, 가고시마나 도사를 방문하는 등 막부 이외의 세력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하여 도막·메이지 신정부 수립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영국의 외교 정책 변화는 사쓰에이 전쟁과 사국 함대 시모노세키 포격 사건 이후 막부에 대한 불신이 커진 결과였다. 다만, 도쿠가와 요시노부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했다.
영국 공사관 서기관이었던 알저넌 미트퍼드는 파크스와 로슈가 서로를 미워하고 질투했다고 기록했다.
파크스는 공사관 직원들에게 일본 연구를 장려하여, 윌리엄 조지 애스턴과 같은 일본학자가 나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또한 미트퍼드는 아코 낭사들을 유럽에 소개하기도 했다. 파크스는 개항지 조사에서 지방 시찰 시 유녀 놀이를 즐겼으며, 미트퍼드와 사토 등을 데리고 유곽에서 총털이(기생을 전부 한자리에 불러 유흥을 즐기는 것)를 하기도 했다.[33]
1869년에는 『일본 종이 조사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에 보고했다. 파크스와 공사관 직원들이 조사한 412종류의 일본 종이 컬렉션은 현재 빅토리아 & 앨버트 박물관과 큐 가든에 보관되어 있으며, 생산지, 가격, 제조 방법 및 용도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이 컬렉션은 1994년 "바다를 건넌 에도의 일본 종이" 전시회를 통해 일본에 소개되었다.[34]
파크스는 유능한 외교관이었지만, 걸핏하면 화를 내는 성격 때문에 교섭 상대에게 호감을 얻지 못했다. 부하였던 사토나 미트퍼드도 그의 성격에 문제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어니스트 새토는 바질 홀 체임벌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파크스와의 관계가 즐겁지 않았으며, 그의 거친 언행을 통역하는 것이 괴로웠다고 회고했다.[35]
1866년 12월 31일(게이오 2년 11월 25일), 파크스가 에도 교외 시나가와를 기마로 통행하던 중, 히토요시 번사 이와오카 하치에몬의 습격을 받았으나, 영국인 경호원과 함께 그를 체포하여 영국 공사관으로 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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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英学史学会
[34]
서적
和紙 : 多彩な用と美
https://iss.ndl.go.j[...]
玉川大学出版部
[35]
웹사이트
日欧交渉史エッセイ アーネスト・サトウの手紙
http://www.yushodo.c[...]
[36]
웹사이트
Fanny Hannah Parkes
https://www.geni.com[...]
[37]
웹사이트
Marion "Minnie" Plumer Keswick
https://www.geni.com[...]
[38]
웹사이트
Sir Harry Smith Parkes
http://family-tree.c[...]
[39]
웹사이트
Mabel Desborough Levett-Scrivener
https://www.geni.com[...]
[40]
웹사이트
Frances "Fanny" Emmeline Dickson
https://www.geni.com[...]
[41]
웹사이트
Frances (Fanny) Emmeline PARKES
http://family-tree.c[...]
[42]
웹사이트
Douglas Gordon PARKES
http://family-tree.c[...]
[43]
웹사이트
Lillian Hope PARKES
http://family-tree.c[...]
[44]
문서
Knight Grand Cross, The Most Order of St Michael and St George, 기사작위일등
[45]
문서
Knight Commander, The Most Honourable Order of the Bath, 기사작위이등
[46]
문서
옥스퍼드 인명대사전 2004년 판 해리 파크스 편
[47]
문서
양광(兩廣): 광서(광시)와 광동(광둥) 두 주를 함께 일컬음.
[48]
문서
James Harris, 3rd Earl of Malmesbury
[49]
인용구
"If it were not for the serious consequences involved in this matter, I do not know that I have ever met anything which I should consider more grotesque than the conduct of Consul Parkes throughout these transactions."
Hansard(영국 의회 회의록)
1857
[50]
문서
James Bruce, 8th Earl of Elgin
[51]
인용구
"a very fat man contemplating the achievement of getting over the wall at the extreme rear of the administrative office."
Picador
2011
[52]
문서
Bogui or Po-quei
[53]
문서
a Companion of the Order of the Bath (CB): 조지 1세 가 만든 기사 작위 중 삼등(companion). 이등이 Knight Commander 일등이 Knight Grand Cross.
[54]
문서
Whitchurch, Shropshire, UK
[55]
서적
Life of Sir Harry Parkes
London
1894
[56]
문서
"[주강 (강)|주강]](Pearl River)하류 [[전장시]](Chinkiang), [[장강]] 중류 [[주장시]](Kiukiang), 그리고 [[한커우]](Hankow)"
[57]
문서
부임 도중에 기항한 [[나가사키]]에서 곧 [[막부]]를 쓰러뜨리는 내란이 일어난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58]
문서
[[고메이 천황]]의 칙서는 '효고 개항은 아직 이르다'는 정도의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아예 [[런던 각서]]에서 막부가 약속했던 [[1868년]] [[1월 1일]] 기한마저 인정치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열강들이 알지 못했다.
[59]
문서
파크스는 [[조슈번]]과 영국 상인 [[토머스 블레이크 글러버]]가 거래해 무기 거래가 이뤄지고 있음을 감지했다.
[60]
웹사이트
도쿄 최초의 영국공사관 유적
http://4travel.jp/do[...]
2016-03-05
[61]
문서
오사카에서 스루가 만을 가려면 교토 황궁 부근의 후시미, 오츠 군을 지나야 한다. 파크스의 이동 경로를 입수한 사쓰마 번은 와시오 다카츠무(鷲尾隆聚) 등 [[존왕양이]] 파 귀족들을 움직여 '오랑캐가 신성한 후시미, 오츠를 맘대로 다니게 만들었다'(英人が伏見・大津を通行することに反対しなかった)고 조정에 탄핵 상소를 올리게 해, 히로바시 다카야스 등 [[공무합체]] 파 귀족 네 명을 실각시켰다. 또한 사쓰마, 돗토리, 오카야마 3개 번에게 교토 경비 윤허가 내려졌다.
[62]
문서
윌리엄 애스턴(William George Aston,1841 – 1911):영국의 외교관이자 작가이며, 일본어와 한국어 전문가로 한일 역사에도 정통했다. 1884년에 잠깐 조선에 왔다가 정정 불안으로 일본에 전임돼 1885년부터 1887년까지 도쿄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김채국이란 이름의 조선인이 그에게 가르쳐준 전래 동화 몇가지가 그를 통해 영어로 번역됐고 변역 초본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시아 박물관에 기증했다. 2004년 러시아어로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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