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하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가이하투는 일 칸국의 제7대 칸으로, 본명은 이린친도르지이며, 몽골 제국의 유력 부족인 콩기라트 출신이다. 그는 아르군 칸 사후 왕위 계승 경쟁에서 승리하여 1291년 일 칸으로 즉위했다. 아나톨리아 통치 기간 동안 룸 셀주크 왕조를 다스렸으며,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지폐를 발행했으나 경제 혼란을 초래했다. 만년에 바이두와의 갈등으로 인해 배신당하여 1295년에 살해당했다. 그는 방탕한 생활로 알려져 있지만, 종교적 관용을 보이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295년 사망 - 바이두 칸
바이두 칸은 13세기 일 칸국의 제6대 칸으로, 짧은 재위 기간 동안 기독교에 호감을 가졌으나 가잔 칸의 반란으로 폐위되고 처형당했다. - 1295년 사망 - 바린 바얀
바린 바얀은 칭기즈 칸을 섬긴 가문의 후손으로, 원나라의 장군으로서 남송을 멸망시키고 카이두와의 전쟁에서 활약했으며, 테무르 칸 옹립에 기여했다. - 일 칸국의 칸 - 훌라구
훌라구는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툴루이의 아들로, 몽케 칸의 명을 받아 서방 원정을 이끌고 일 칸국을 건국하여 압바스 왕조를 멸망시키고 시리아를 정복했으며, 쿠빌라이 칸을 지지하고 문화와 과학 발전에 기여하다가 1265년에 사망했다. - 일 칸국의 칸 - 가잔 칸
가잔 칸은 1295년부터 1304년까지 일 칸국을 통치한 몽골 제국의 칸으로,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재위 기간 동안 종교적 관용과 개혁을 추진하다가 3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쿠빌라이 칸 - 충선왕
충선왕은 고려 제26대 왕으로 즉위 후 원나라 간섭 속에서 심양왕에 봉해졌으며, 고려와 심양을 동시에 통치하는 동군연합을 이루었으나 개혁 정치는 실패하고 티베트로 유배되었다. - 쿠빌라이 칸 - 원나라의 일본 원정
원나라의 일본 원정은 13세기 후반 쿠빌라이 칸이 일본을 정복하려 두 차례 시도한 원정으로, 몽골, 고려, 중국 군대가 참여했으나 두 번 모두 태풍으로 인해 실패하고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쇠퇴를 가속화했다.
| 가이하투 | |
|---|---|
| 기본 정보 | |
![]() | |
| 칭호 | 일 칸 |
| 재위 | 1291년–1295년 |
| 선임자 | 아르군 |
| 후임자 | 바이두 |
| 출생일 | 기원후 1259년경 |
| 사망일 | 1295년 3월 21일 |
| 사망 장소 | 탕그리 언덕 |
| 왕가 | 보르지긴 |
| 왕조 | 왕조 |
| 아버지 | 아바카 칸 |
| 어머니 | 마르타이 하툰 |
| 종교 | 불교 |
| 정치 경력 | |
| 아나톨리아 총독 | 재위: 1284년 - 1291년 섭정: 훌라추 (1284년-1286년) 공동 통치자 |
| 후임 | 사마가르 |
| 선임 | 콘쿠르타이 |
| 대관식 | 1291년 7월 23일, 아흘라트 |
| 배우자 | |
| 배우자 | 파디샤 하툰 |
| 몽골어 이름 | |
| 음역 | 가이할트 (Gaikhalt) |
| 의미 | 놀라운, 놀라운 일 |
| 티베트어 이름 | |
| 의미 | 보석 다이아몬드 |
2. 이름
가이하투의 본명은 이린친도르지(Irinčin-Dorǰimn)이다. 페르시아어 사료에서는 주로 '키하투(Kyḫatw)'로 표기되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가이하투(Gayḫātū)'로 읽혀왔다. 가이하투는 「신적인 위엄/경이롭고 기이함」을 의미하는 몽골어 'qayiqa'가 변형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키하투(Kiqatu)'라는 새로운 독법이 제시되고 있다. 마쓰이 다이(松井太) 등의 연구자들은 다음 근거들을 제시한다.
- 같은 시대 몽골어 사료에서 동사 'γayiqa-'형태는 있지만, 명사 'qayiqatu' 또는 'qayiqa' 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 위구르 문자 Q (ᠬ)는 아라비아 문자에서 대부분 K/G (گ/ک)가 아닌 Q/Ġ/Ḫ (خ/غ/ق)로 표기된다.
- 몽골 왕족 이름의 아라비아 문자와 위구르 문자 표기를 함께 기록한 오족보에서 '키하투'를 위구르 문자로 'Kyq’dw'로 표기하여, 'Kiqatu/Giqat'라는 독법을 제시한다.
- '키하투'를 Kiqatu로 읽으면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Chiato' 등의 표기와 일치한다.
이러한 이유로 가이하투(Gayḫātū)가 아니라 '''키하투(Kiqatu)'''라는 표기를 사용한다.[24]
3. 생애
가이하투는 아바카 칸과 콩기라트부 출신 마르타이 카툰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이린텐 도르지(Irinčin-Dorǰi)였으나, 페르시아어 사료에서는 가이하투(Gayḫātū)로 표기되었다. 이는 '신적인 위엄/경이롭고 기이함'을 의미하는 몽골어 'qayiqa'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가이하투는 '키하트(Kiqatu)'로 읽어야 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2]
1283년 초봄, 숙부 테구데르가 즉위하자 형 아르군이 바그다드에서 봉기했고, 가이하투는 사촌 바이드 등과 함께 아르군을 지지했다. 1284년 1월 18일, 아르군을 옹호하던 숙부 콘쿠르타이가 테브리즈에서 살해되자, 가이하투는 호라산으로 피신했다.
1284년 8월 11일, 아르군이 즉위하면서 가이하투는 룸 셀주크 왕조의 아나톨리아 방면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1291년 1월 19일 아르군이 사망하자, 가이하투는 왕위 계승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는 타가차르와 아르군 칸의 정실 부인 우루크 카툰의 지지를 받아, 1291년 7월 23일 반호 서부 아흘라트 근교에서 일 칸으로 즉위했다.
가이하투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294년 원나라의 교초를 본떠 서아시아 최초로 지폐(차우)를 발행했으나, 백성들과 상인들의 반발로 실패했다.
만년에 가이하투는 술에 취해 부하 장군 바이두를 때리는 실수를 저질렀고, 이로 인해 바이두는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가이하투는 1295년 3월 24일 바이두파 장군들에게 붙잡혀 종자 세 명과 함께 활줄에 목이 졸려 살해당했다.
3. 1. 즉위 이전
가이하투는 1259년경 아바카 칸과 콩기라트부 출신 마르타이 카툰 사이에서 태어났다.[2] 그는 테쿠데르의 통치 기간 동안 자지라에 거주했으며, 1284년 아나톨리아의 몽골 왕자이자 총독이었던 콘쿠르타이가 처형된 후 호라산의 아르군에게 도망가야 했다.[3]1283년 초봄, 가이하투의 숙부 테구데르가 즉위한 후, 가이하투의 형 아르군이 바그다드에서 봉기하였다. 가이하투는 사촌 바이드 등과 함께 아르군을 지지하였다. 아르군은 아버지 아바카가 영유했던 호라산 지방으로 간다는 구실로 이란 고원으로 출발했다. 라이 등 여러 도시에서 독자적으로 재무 관료를 임명하고 군자금을 징발하기 시작하면서, 테브리즈에 있던 테구데르와의 대립은 불가피해졌다.
1284년 1월 18일, 아르군을 옹호하던 숙부이자 테구데르의 동생이었던 콘쿠르타이가 테구데르의 필두 부장 아리나크에게 체포되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르군 휘하의 여러 장수와 관료들도 테브리즈로 연행되었다. 가이하투는 이때 간신히 호라산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3] 1284년 6월, 아르군은 휴전 조건으로 가이하투를 테쿠데르에게 인질로 넘겼고, 가이하투는 그의 계모인 토다이 카툰의 오르다에 갇혔다.[4]
1284년 8월 11일, 아르군이 즉위한 후 왕족들에게 각자의 소유지를 통치할 권한을 임명했는데, 이때 가이하투는 룸 셀주크 왕조가 있던 아나톨리아 방면을 통치하게 되었다.
3. 2. 아나톨리아 통치 (1284년 ~ 1291년)
1284년 8월 11일 아르군이 즉위한 후 가이하투는 룸 셀주크 왕조의 아나톨리아 방면 통치자로 임명되었다.[5] 그는 에르진잔에 주둔하며 아나톨리아에 머무는 동안 페르시아어와 튀르키예어를 배웠다. 1286년 훌라구가 이란으로 소환된 후 가이하투는 아나톨리아를 단독으로 통치하게 되었다.[5]가이하투는 튀르크멘 공국, 특히 게르미야니드에 대항하는 메스우드 2세의 원정을 도왔다. 이 기회를 틈타 카라만 왕조는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몽골 동맹을 침략했다. 1286년 가이하투는 아르군에 의해 레오 2세를 도와 귀네리 오브 카라만에 대항하도록 파견되었는데, 귀네리는 킬리키아 왕국에서 타르수스를 점령했었다. 1287년 1월 16일 가이하투는 카라만의 수도를 침략하여 불태웠고,[5] 귀네리는 산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6]
1289년부터 1290년까지 사마가르가 임명되면서 가이하투의 부왕 통치는 잠시 중단되었다. 1290년 10월 15일 사마가르가 부패 혐의로 토카트에서 체포되어 이란으로 송환되면서 가이하투는 활동을 재개했다. 1291년 1월 3일 가이하투는 코니아를 방문하여 새로운 세무 관리인 호자 나시르 앗-딘의 임명을 확인하고 새로운 일반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1291년 1월 19일 아르군이 사망하자, 가이하투는 왕위 계승 경쟁에 뛰어들었다.

1291년 8월 31일, 가이하투는 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코니아를 포위하고 있던 카라만 왕조를 추격하기 위해 아나톨리아로 떠났다.[10] 코니아는 마수드 2세와 사히프 아타이드의 형제에 의해 강화되었지만, 카라만 왕조는 가이하투가 카이세리에 도착할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가이하투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일부는 멘테셰로 보냈고, 자신은 카라만 왕조의 수도 에레일리를 습격했다. 그의 다음 목표는 서쪽에 위치한 에쉬레프 왕조였으며, 그곳에서 7,000명의 여성과 아이들을 사로잡아 코니아로 보냈다.
카이세리로 돌아온 후, 그는 킬리치 아르슬란 4세의 이전 지지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셀주크 군대를 동반하여 괴크타이와 기라이 노얀을 북부 아나톨리아로 보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카라만 왕조와 에쉬레프 왕조는 다시 코니아를 포위했지만, 키프로스의 헨리 2세가 15척의 배로 알라야를 포위하자 군대를 철수했다. 가이하투는 계속해서 데니즐리를 점령하고 3일 동안 도시를 약탈했다.[10] 마수드는 초바니 왕조뿐만 아니라 마수드의 형제 파라무르즈와 카유마르의 지원을 받은 킬리치 아르슬란과 싸우기 위해 나섰다. 가이하투는 지휘관 괴크타이, 기라이, 아닛과 함께 3,000명의 병력을 추가로 파견했다. 튀르크멘족의 포로가 된 마수드 2세를 구출한 사람은 기라이와 테무르 야만 잔다르였다. 테무르 야만 잔다르는 이 공로로 가이하투로부터 초바니 왕조의 옛 도시인 카스타모누를 이카(토지)로 하사받았다.
3. 3. 일 칸국 통치 (1291년 ~ 1295년)
1291년 아르군 칸이 사망한 후, 가이하투는 가잔, 바이두와의 왕위 계승 경쟁에서 승리하여 일 칸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가이하투는 유력한 몽골 장군 타가차르와 아르군 칸의 정실 부인 우루크 카툰의 지지를 받았다.[8] 1291년 7월 23일, 반호 서부 아흘라트 근교에서 즉위식을 가졌다.[8]가이하투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294년 원나라의 교초를 본떠 서아시아 최초로 지폐(차우)를 발행했다.[2] 지폐에는 이슬람교 신앙 고백문과 가이하투의 불교식 이름인 린친도르지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백성들과 상인들의 반발로 실패했고, 가이하투는 지폐 사용을 철회해야 했다.[15]
가이하투는 만년에 술에 취해 부하 장군 바이두를 때리는 실수를 저질렀고, 이로 인해 바이두는 앙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16] 결국 가이하투는 1295년 3월 24일 바이두파 장군들에게 붙잡혀 종자 세 명과 함께 활줄에 목이 졸려 살해당했다.[17][5] 일설에는 바이두가 지폐 도입 때문에 가이하투와 전쟁을 벌여 그를 죽였다고도 한다.[18]
3. 3. 1. 즉위 과정
1291년 1월 19일 아르군 칸이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경쟁이 벌어졌다. 주요 경쟁자는 가이하투, 가잔, 바이두였다. 유력한 몽골 장군 타가차르는 가이하투를 지지했으나, 다른 장군들은 바이두를 지지했다.[5] 바이두는 자신이 연장자가 아니고 가이하투에게 보복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왕위 계승을 고사하였다.[7]아르군 칸의 정실 부인이자 울제이투의 생모인 우루크 카툰이 가이하투를 지지하면서, 1291년 7월 23일 반호 서부의 아흘라트 근교에서 가이하투가 일 칸으로 즉위했다.[8]
3. 3. 2. 지폐(차우) 발행과 경제 혼란
1294년 가이하투는 재정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원나라의 교초를 모방하여 서아시아 최초로 지폐(차우)를 발행했다.[2] 이는 몽골 제국의 선진적인 화폐 제도를 도입하려는 시도였다. 지폐는 반 디르함에서 10 디나르에 이르는 단위로 발행되었다.당시 지폐는 챠우(چاو chāw, 챠브chāv, 초鈔의 음역)라고 불렸는데, 가이하투는 자신의 방탕한 생활로 인한 낭비로 국고가 악화된 상황에서 긴급 경제 대책으로 지폐를 발행했다. 지폐에는 이슬람교 신앙 고백문과 가이하투의 불교 이름 린친도르지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바자르 폭동이 발생하고 경제 활동이 중단되는 등, 백성과 상인들의 거부로 인해 완전히 실패했다. 결국 가이하투는 지폐 사용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그의 권위 실추로 이어졌다.[15]
3. 3. 3. 바이두와의 갈등과 최후
만년에 가이하투는 술에 취해 부하 장군 바이두를 때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가이하투는 후회하고 사과했지만, 바이두는 이 일로 앙심을 품고 가이하투에게서 등을 돌렸다.[16] 바이두는 모술 주재 사령관을 살해하고 바그다드 등 이라크 남부 여러 도시의 지배권을 빼앗아 가이하투에게 본격적으로 반기를 들었다.가이하투의 필두 부장 아크부카 등은 바이두에게 대항하려 했으나, 아르군의 필두 부장이었던 타가차르가 바그다드 등지의 자신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바이두 측을 지지하고, 아크부카 휘하 군사들마저 타가차르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서는 상황에 빠졌다.
가이하투는 아크부카의 권고를 따라 오르두가 있던 아스란 지방에서 재기를 도모하려 했으나, 오르두에 도착하기도 전에 쿤차크발, 도라다이 등 바이두파 장군들에게 오르두를 습격당해 결국 구금되었다. 바이두파 장군들은 목숨을 구걸하는 가이하투를 욕하며 활줄로 그의 종자 세 명과 함께 목을 졸라 죽였다.[17] 1295년 3월 24일의 일이었다.[5] 가이하투의 죽음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는 바이두가 그의 지폐 도입 때문에 그와 전쟁을 벌였고, 그 후 전투에서 그를 죽였다고 주장한다.[18]
이후 이란 북서부의 몽골 무장들은 쿠가라 강과 차가투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결집, 바이두 추대를 위한 사자를 보냈고, 4월에는 하마단에서 바이두가 즉위하게 된다.
4. 가이하투의 성격과 평가
미르콘드에 따르면 가이하투는 술, 여자, 소돔에 빠진 것으로 알려진 방탕한 사람이었다.[18] 그러나 그는 여러 종교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공동체 화합에도 힘썼다. 다른 불교 군주들처럼 그는 모든 종교에 아낌없이 후원했는데, 마르 야발라하 3세의 역사에서 나타난 것처럼 교회에 대한 그의 선물에 대해 그를 칭찬하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들도 있었다.[19] 타리크-이 알-이 살주크에서는 가이하투를 공정하고 자비로운 통치자로 묘사하기도 했다.[20]
5. 가족 관계
가이하투는 여러 부족 출신의 8명의 부인을 두었다.
| 부인 | 출신 부족 및 가계 | 자녀 |
|---|---|---|
| 아이샤 카툰 | 잘라이르 출신 토구의 딸, 엘가이 노얀의 아들 | |
| 돈디 카툰 (1298년 2월 9일 사망) | 아크 부카 잘라이르의 딸, 엘가이 노얀의 아들 | |
| 엘투즈미쉬 카툰 | 콘기라트 출신 쿠틀루그 티무르 궤레겐의 딸, 아바카의 미망인 | |
| 파디샤 카툰 (1295년 처형) | 케르만 통치자 쿠트브 앗딘과 쿠틀루그 투르칸의 딸, 아바카의 미망인 | |
| 우루크 카툰 | 케레이트 출신 사리차의 딸, 아르군 칸의 미망인 | |
| 불루간 카툰 (1292년 결혼, 1310년 1월 5일 사망) | 콘기라트 출신 아바타이 노얀의 조카 오트만의 딸, 아르군의 미망인 | |
| 나니 아가치 | 친 풀라드 | |
| 에산 카툰 | 아르울라트 출신 우잔의 형제 베글라미쉬의 딸 |
『집사』「가이하투기」에 따르면, 아르군에게는 아들이 3명, 딸이 4명 있었다고 한다.
참조
[1]
웹사이트
Gaykhatu
https://www.nouahsar[...]
Nouah's Ark General Trading
2013-07-01
[2]
논문
PAPER CURRENCY IN IRAN: A contribution to the cultural and economic history of Iran in the Mongol Period
1970
[3]
서적
Power, politics, and tradition in the Mongol Empire and the Ilkhanate of Iran
2016-09-22
[4]
서적
The Mongols in Iran: Qutb Al-Din Shirazi's Akhbar-i Moghulan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8-05-03
[5]
학위논문
Ilkhanid ruler Gaykhatu and his era
SDÜ Sosyal Bilimler Enstitüsü
2012
[6]
논문
XIII-XIV. Yüzyıllarda Karamanoğulları-Çukurova Ermenileri İlişkileri
https://www.academia[...]
2019-01
[7]
문서
Atwood, p. 234
[8]
서적
Women and the Making of the Mongol Empire
https://www.cambrid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8-07-18
[9]
서적
Mirror for the Muslim Prince: Islam and the Theory of Statecraft
https://books.google[...]
Syracuse University Press
2013-05-01
[10]
논문
A Principality In Southwest Anatolia In The Post-Selçuk Era: Esrefogullari
https://dergipark.or[...]
2009-04-01
[11]
서적
Art of the Persian courts : selections from the Art and History Trust Collection
Rizzoli
1992
[12]
웹사이트
GAYḴĀTŪ KHAN – Encyclopaedia Iranica
http://www.iranicaon[...]
2020-03-29
[13]
서적
Daily life in the Mongol empire
Hackett Pub. Co
2009
[14]
문서
Al-Maqrizi, p. 242, vol. 2.
[15]
문서
Ashtor 1976, p. 257.
[16]
문서
L. J. Ward, “The Ẓafar-nāmah of Ḥamd Allāh Mustaufi and the Il-Khān dynasty of Iran,” Ph.D. diss, 3 vols., University of Manchester, 1983, pp. 354-355
[17]
문서
Steppes, p. 377.
[18]
웹사이트
The history of Persia. Containing, the lives and memorable action of its kings from the first erecting of that monarchy to this time; an exact description of all its dominions; a curious account of India, China, Tartary, Kermou, Arabia, Nixabur, and the islands of Ceylon and Timor; as also of all cities occasionally mention'd, as Schiras, Samarkand, Bokara, &c. Manners and customs of those people, Persian worshippers of fire; plants, beasts, product, and trade .. To which is added, an abridgment of the lives of the kings of Harmuz, or Ormuz. The Persian history written in Arabick, by Mirkoud, a famous Eastern author; that of Ormuz, by Torunxa, king of that island, both of them tr. into Spanish, by Antony Teixeira, who liv'd several years in Persia and India; and now render'd into English.
https://www.loc.gov/[...]
2020-03-29
[19]
문서
Luisetto, p. 146.
[20]
서적
History and Historiography of Post-Mongol Central Asia and the Middle East: Studies in Honor of John E. Woods
https://books.google[...]
Otto Harrassowitz Verlag
2006
[21]
서적
Ta'rīkh-i Shaikh Uwais : (History of Shaikh Uais) : Am important source for the history of Adharbaijān in the fourteenth century
https://archive.org/[...]
[22]
웹사이트
Kuruluş Osman'ın Geyhatu Han kimdir? Maruf Otajonov, Türk dünyasını Kuruluş Osman hayranı yaptı!
https://www.mynet.co[...]
2020-11-19
[23]
문서
アバカの大ハトゥン(正妃)であったドルジ・ハトゥンの死後にその地位を継いだ人物で、[[チンギス・カン|チンギス・ハン]]の第3皇后[[イェスイ|イェスルン]]、第4皇后[[イェスゲン]]姉妹らの姪にあたる。
[24]
문서
松井2019,66-67頁
[25]
문서
[[ジャライル]]部族出身で[[フレグ]]の臨終に立ち会った側近のひとりイルゲイ・ノヤンの一子トゥグの娘。
[26]
문서
同じくジャライル部族出身のイルゲイ・ノヤンの子でゲイハトゥの筆頭部将アク・ブカの娘。
[27]
문서
コンギラト部族出身のクトルグ・テムルの娘。
[28]
문서
[[ケルマーン・カラヒタイ朝]]の第3代当主クトゥブッディーン・ムハンマドの娘。本名はサフヴァトゥッディーン صفوة الدين Safwat al-Din 。ゲイハトゥが即位した後、1292年に故郷のケルマーン州に帰還し、叔母で第4代当主クトルグ・テルケン・ハトゥンを追放した弟のジャラールッディーン・ソユルガトミシュを捕らえて処刑し、勅許を得てケルマーン・カラヒタイ朝の第7代当主となった。
[29]
문서
[[ケレイト]]部族出身。フレグの筆頭正妃(大ハトゥン)[[フレグ#后妃|ドクズ・ハトゥン]]の兄弟サリジャの娘で、[[オン・ハン]]の曾孫にあたる。アルグンの寡婦として受け継ぐ。
[30]
문서
コンギラト首長家当主デイ・セチェンの遠縁アバタイ・ノヤン(ヒンドゥスターン・カシュミール鎮守府軍中軍千戸長)の息子ウトマンの娘。[[アバカ]]の正妃ブルガン・ハトゥンと同名異人。アルグンの死後はゲイハトゥが受継ぎ、ゲイハトゥの三男チン・プーラードを産む。
[31]
문서
『集史』では四女としてドンデイ・ハトゥンにも娘が居たらしい記述があるが、名前は出ていない。『五族譜』のゲイハトゥの系図では上記の三人の娘の他にクトルグ・マリクという娘の名前が載っている。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