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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쿠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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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쿠데르는 1246년경 몽골에서 태어난 일 칸국의 제3대 칸으로, 본래 기독교 신자였으나 이슬람교로 개종한 후 '아흐메드'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282년 아바카 칸의 사망 이후 칸으로 즉위하여 이슬람교를 공표하고 맘루크 왕조와의 관계를 모색했으나, 아르군과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1284년 처형되었다. 그는 이복 형제인 콩구르타이를 처형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며, 가족 관계로는 여러 부인과 많은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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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쿠데르
기본 정보
이름아흐마드 테구데르
본명아흐마드 테구데르 빈 훌라구 칸
몽골어 이름Төгөлдөр (Tögöldör, "완벽한")
통치
칭호일한국의 술탄
재위 기간1282년 5월 6일 – 1284년 8월 10일
이전 통치자아바카
다음 통치자아르군
생애
출생1246년경
사망1284년 8월 10일 (37세)
종교
종교수니 이슬람
가문
가문보르지긴 가문
아버지훌라구
어머니쿠투이 하툰
배우자도쿠즈 하툰
알마니 하툰
외 다수
자녀정보 없음
이미지
테구데르가 대사를 접견하는 모습
테구데르가 대사를 접견하는 모습, 타리흐-이 자한구샤이-이 주바이니, 1438년
아흐마드 테구데르와 재상 샴스 앗딘 주바이니
아흐마드 테구데르와 재상 샴스 앗딘 주바이니 (집사 파리본)

2. 생애

테쿠데르는 몽골 제국의 칸 훌라구의 아들이자 일칸국의 제3대 칸이다. 그는 몽골에서 태어나 초기에는 네스토리우스 기독교 신자였으나, 이후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아흐마드'''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282년아바카 칸이 사망하자, 쿠릴타이에서 조카 아르군 등과의 경쟁 끝에 칸으로 선출되어 '''술탄 아흐마드'''로 즉위했다. 그는 이슬람교를 장려하고 맘루크 왕조와 평화를 추구하는 등 이전과는 다른 정책을 펼쳤으나, 이는 몽골 전통 세력과 비무슬림들의 반발을 샀다. 특히 조카 아르군과의 대립이 격화되어 내전으로 번졌고, 결국 1284년 아르군에게 패배하여 처형당했다. 그의 짧은 통치는 일칸국 내부의 종교적, 정치적 갈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2. 1. 초기 생애

테쿠데르는 몽골 제국훌라구콩기라트 부족 출신인 쿠투이 카툰 사이에서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연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37세에 사망했다는 기록을 토대로 1246년 또는 1247년경 몽골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1] 어린 시절 그는 네스토리우스 기독교 신자로 세례를 받았으며, 세례명은 '니콜라스'였다.

테쿠데르는 1260년대 어느 시점에 어머니 쿠투이 카툰, 형제 테크신과 함께 일칸국으로 이주했다. 이후 형인 아바카는 어머니 쿠투이 카툰을 존경하여 테쿠데르에게 나하반드와 디나바르 지역의 통치권을 맡겼다. 쿠투이 카툰 역시 아바카로부터 마야파리킨 인근 영토를 하사받았는데, 그 수입이 금화 10만 개에 달했다고 전해진다.[2] 1265년 훌라구 칸이 사망하고, 아바카의 생모 이순진 카툰이 이란으로 이동했을 때, 테쿠데르는 어머니 쿠투이 카툰, 형제 테크신 등 다른 친족들과 함께 아바카의 궁정에 영접되었다.

1282년 4월, 아바카 칸이 사망하자 일칸국 내부에서는 후계자 자리를 두고 쿠릴타이에서 의견 대립이 발생했다. 테쿠데르의 이복동생인 아자이, 콘쿨타이, 훌라추 등은 테쿠데르를 지지했고, 아리크부카 등은 아바카의 장남인 아르군을 지지했으며, 훌라구의 정비였던 올제이 카툰은 자신의 아들이자 훌라구의 11남인 몽케 테무르를 지지하는 등 세 그룹으로 나뉘어 후계자 선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몽케 테무르가 아바카 사망 후 한 달도 되지 않아 급사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몽케 테무르의 어머니 올제이 카툰은 아르군 지지로 돌아섰지만, 몽골의 전통법인 자사에 따라 연장자가 칸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이는 선대 칸인 아바카의 즉위 사례를 따른 것이었다. 당시 훌라구의 아들들 중 테쿠데르보다 나이가 많은 형제들(조므쿠르, 요시무트, 테크신, 타라가이, 토부신 등)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결국 아르군 진영에서 양보하면서, 몽케 테무르가 사망한 지 10일 뒤인 1282년 5월 6일, 쿠릴타이에서 만장일치로 테쿠데르가 새로운 칸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2. 2. 이슬람교로의 개종

테쿠데르가 이슬람교로 개종하게 된 정확한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븐 알-푸와티에 따르면, 그의 종교적 스승이자 개종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이는 카말 알-딘 압드 울-라흐만이라는 인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본래 알-무스타심 빌라의 그리스 출신 노예였으나, 연금술 실력 덕분에 지위가 상승했고, 아이바크의 소개로 아바카를 만났다.[3] 압드 울-라흐만은 이후 테쿠데르의 어머니 쿠투이 카툰에 의해 테쿠데르에게 소개되었다.[4] 테쿠데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이름을 '''아흐메드'''로 바꾸었다.[5] 압드 울-라흐만은 이후 궁정에서 지위가 높아져 맘루크 왕조의 대사가 되기도 했다.

아르군과 테쿠데르.


6월 21일, 테쿠데르는 왕족, 제후, 장군들의 충성을 다시 맹세받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자신이 이슬람교를 믿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며 '''술탄 아흐마드'''라고 칭할 것을 선언했다.

즉위 후, 테쿠데르는 자신의 이슬람 신앙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그는 맘루크 왕조의 술탄 칼라운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했으며, 바그다드모스크나 무스탄시리야 학원과 같은 여러 마드라사(이슬람 학교)에 와크프(종교 기부금) 등 막대한 기부를 했다. 또한,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던 바그다드의 장관 알라웃딘 아타말리크 주바이니를 풀어주고 다시 바그다드 관리를 맡겼다. 반면, 아르메니아네스토리우스파 등 국내 기독교 세력 및 불교 세력에 대해서는 기존에 지급되던 보호 연금을 중단하고, 사원을 모스크로 바꾸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2. 3. 일 칸 즉위와 통치

1282년 4월 아바카 칸이 사망하자, 새로운 일 칸을 선출하기 위한 쿠릴타이마라게 인근 자가투 계곡에서 열렸다.[1] 테쿠데르는 1265년 훌라구 칸 사망 후 몽골 제국 본토에서 아바카 칸의 생모 이순진 카툰이 일 칸국으로 올 때, 자신의 어머니 쿠투이 카툰 및 형제, 친족들과 함께 따라와 아바카의 궁정에 합류한 상태였다.

쿠릴타이에서는 후계 자리를 두고 경쟁이 벌어졌다. 주요 경쟁자는 아바카 칸의 동생인 테쿠데르, 아바카 칸의 아들인 아르군, 그리고 아바카 칸의 또 다른 동생인 몽케 테무르였다. 테쿠데르는 이복동생 아자이, 콘쿨타이, 훌라추 등과 조카 주슈케브, 킨슈우 등 여러 왕족, 그리고 시크투르 노얀[6], 수쿤자크 노얀[4] 등 잘라이르 부족을 포함한 대부분의 귀족과 아미르들의 지지를 받았다.[2] 반면 아르군은 아르크나 부카 등 일부 군사령관들의 지지를 받았고, 아바카 칸의 계모이자 훌라구 칸의 제4 정비였던 올제이 카툰은 자신의 아들 몽케 테무르를 지지하여 세력은 셋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몽케 테무르가 아바카 칸 사망 후 한 달도 되지 않아 급사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올제이 카툰은 아르군 지지로 돌아섰지만, 야사(몽골의 법령)에 따라 종족의 연장자가 계승해야 한다는 주장이 매우 강했다. 이는 선대 아바카 칸의 즉위 사례를 의식한 것이었다. 훌라구 칸의 다른 아들들인 조므쿠르, 요시무트, 테크신, 타라가이, 토부신 등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기에, 생존한 아들 중 가장 연장자인 테쿠데르가 유력해졌다. 결국 아르군 진영이 양보하면서 몽케 테무르 사망 10일 뒤인 1282년 5월 6일, 쿠릴타이는 만장일치로 테쿠데르를 새로운 일 칸으로 선출했다.[7]

테쿠데르는 1282년 6월 21일, 반 호수 동쪽의 Aladağ|알라다으tr에서 공식적으로 즉위식을 올리고 왕족과 제후들의 충성 맹세를 받았다. 그는 이슬람교로 개종한 상태였기에, 자신의 통치명으로 무슬림 이름인 '''아흐마드'''를 채택하고 스스로를 '''술탄 아흐마드'''라 칭할 것을 선언했다.[7]

즉위 후 술탄 아흐마드는 이슬람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맘루크 왕조의 술탄 칼라운에게 친서를 보내 우호 관계를 맺으려 했으며,[7] 바그다드모스크와 무스탄시리야 학원을 비롯한 여러 마드라사(이슬람 학교)에 와크프(종교 기부금)를 막대하게 기부했다. 또한, 모함으로 투옥되었던 바그다드의 총독 알라웃딘 아타말리크 주바이니를 석방하고 복권시켜 다시 바그다드 관리를 맡겼다.[8] 이 과정에서 주바이니를 고발했던 재상 마지 알 물크 야즈디는 마녀 혐의로 처형되었다.[8] 아흐마드는 다음 달에 자신의 이복동생 콘쿠르타이를 아나톨리아 총독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내부 갈등을 유발했다. 특히 아르군은 주바이니 형제가 자신의 아버지 아바카 칸을 독살했다고 믿고 있었기에, 주바이니의 복권에 강하게 반발했다. 아르군은 1282년 겨울 바그다드로 와서 주바이니의 횡령 혐의에 대한 조사를 재개했으며, 이는 1283년 3월 5일 아타 말리크 주바이니가 뇌졸중으로 사망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7][8]

한편, 아흐마드의 이슬람 강화 정책은 일 칸국 내 비무슬림 세력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르메니아인이나 네스토리우스파기독교 세력 및 불교 세력에 대한 보호 연금 지급이 중단되고, 그들의 사원을 모스크로 개축하라는 명령 등이 내려졌다고 전해진다.

2. 4. 아르군과의 대립

"두 일 칸국 통치자 아르군 칸과 술탄 아흐마드의 전쟁"(테쿠데르). 1582년 9월 이란 쉬라즈에서 제작된 개정된 사파비 시대의 ''Safvat al-safa''(순수의 정수) 판에서 발췌.


아바카 칸의 아들이자 테쿠데르의 조카인 아르군은 호라산뿐만 아니라 이라크 아자미, 파르스 지방의 왕령지까지 요구했으나, 테쿠데르가 이를 거절하면서 둘 사이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아르군은 1283년 봄, 호라산으로 가서 귀족과 아미르들의 지지를 확보하려 했다.

테쿠데르는 자신의 이복형제이자 즉위 공신인 콩구르타이가 아르군과 내통하여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사위이자 조지아 총독인 알리나크를 시켜 1284년 1월 17일 콩구르타이를 체포하게 했고, 다음 날 처형했다. 이 소식에 가이하투바이두 등은 자지라에서 아르군의 진영으로 도망쳤으며, 타가차르와 돌라다이 같은 일부 아미르들은 체포되었다.[4]

테쿠데르는 알리나크에게 15,000명의 병력을 주어 아르군을 공격하게 했고, 자신은 4월 26일 아르메니아인조지아인, 그리고 무간 평원 근처 빌라수바르에 주둔한 몽골인으로 구성된 주력군(일부 기록에는 8만 명)을 이끌고 뒤따랐다. 아르군은 5월 4일 카즈빈 남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알리나크 군대를 격파했지만, 수적 열세 때문에 호라산의 영토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쿠브라위야 교단의 수피 성자인 알라 웃-다울라 심나니도 이 전투에서 아르군 군대에 속해 싸웠다.[9]

아르군은 휴전을 제안했으나 테쿠데르는 이를 거부했다. 아르군은 다시 아들 가잔을 사절로 보냈고, 5월 31일 셈난 근처의 테쿠데르 진영에 도착한 사절단은 협상에 성공했다. 테쿠데르는 아르군이 동생 가이하투를 인질로 보낸다는 조건으로 휴전을 받아들였다. 아르군은 6월 13일[10] 또는 28일에[7] 부카의 감시 하에 가이하투를 나우루즈 등 두 아미르와 함께 보냈다. 가이하투는 테쿠데르에게 넘겨져 토다이 하툰의 진영에 배치되었다. 한편, 일부 기록에 따르면 6월에 아르군이 우호의 표시로 백마를 바치기 위해 궁정에 들어왔을 때 테쿠데르는 그를 환대하면서도 알리나크의 감시 하에 두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테쿠데르는 휴전 약속을 어기고 아르군을 계속 공격했다. 이로 인해 아르군의 인질을 호송했던 부카는 테쿠데르에게 불만을 품고 아르군에게 동정적으로 변했다. 또한 테쿠데르가 또 다른 잘라이르 장군인 악 부카를 신임하기 시작하면서 부카는 테쿠데르의 신임을 잃었다.[6]

궁지에 몰린 아르군은 7월 7일, 100명의 병력과 함께 칼라트-에-나데리 요새로 피신했지만, 4일 후인 7월 11일 알리나크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테쿠데르는 아르군을 알리나크의 감시하에 두고 자신은 주력군이 있는 칼푸쉬로 떠났다. 이를 기회로 삼은 부카는 알리나크의 진영을 습격하여 그를 죽이고 아르군을 구출했다. 다른 기록에서는 부카가 왕자 주슈케브와 플라추 등을 설득하여 "테쿠데르가 이슬람 신앙에 물들어 칭기즈 칸 가문을 멸망시키려 한다"고 주장하며 아르군 구출 계획에 가담시켰다고도 한다.

아르군이 탈출했다는 소식을 들은 테쿠데르는 군대를 다시 모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어머니 쿠투이 하툰의 오르도(군영)가 있는 아르다빌 방면의 사라브로 도주했다. 그는 타흐트-이 술레이만 근처의 목초지로 가서(7월 17일) 데르벤트를 통해 킵차크 칸국으로 망명하려 했다. 그러나 쿠투이 하툰의 오르도에서는 이미 아르군을 지지하는 왕족과 장군들이 테쿠데르 체포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결국 테쿠데르는 부카가 보낸 카라우나스에게 따라잡혀 체포되었고, 7월 26일 마라가 근처 아비 슈르 목초지에서 아르군에게 넘겨졌다.[7]

아르군은 테쿠데르를 심문하며 자신이 호라산 영유에 만족했기에 반역할 뜻이 없었다고 꾸짖었고, 테쿠데르도 이를 사과했다. 아르군과 여러 장군들은 존경받는 쿠투이 하툰을 고려하여 테쿠데르를 사면하려 했다. 하지만 처형된 콩쿠르타이의 어머니 아주자 에게치와 그의 아들들이 강력하게 복수를 요구했고, 플라추와 주슈케브 등이 하마단에서 병력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에 사태를 빨리 마무리하기 위해 결국 처형이 결정되었다. 테쿠데르는 1284년 8월 10일, 콩쿠르타이가 처형된 방식과 같이 등뼈가 부러지는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2. 5. 최후

1284년, 호라산 지역을 다스리던 아르군은 테쿠데르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아르군이 호라산 외에 이라크 아자미, 파르스 지방의 왕령지까지 요구했으나 테쿠데르가 거절한 것이 발단이었다. 테쿠데르는 자신의 즉위를 도왔던 동생 콩쿠르타이가 아르군과 내통하여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정보를 듣고 그를 처형했다.

이에 아르군은 호라산, 마잔다란의 군대를 이끌고 테쿠데르가 있는 아제르바이잔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카즈빈 외곽에서 테쿠데르의 사위인 아리나크가 이끄는 1만 5천 기병에게 패배했다. 테쿠데르도 몽골군, 아르메니아군, 그루지야군 등 8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타브리즈에서 출정했지만, 아르군은 아리나크가 자신의 영지를 약탈했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켰을 뿐 테쿠데르와 싸울 뜻은 없다고 해명했다. 또한 카라우나스 군단이 아르군을 지지했고, 테쿠데르 진영 내에서도 아르군 지지 세력이 많아 화의 주장이 제기되면서 결국 둘은 평화를 맺었다.

1284년 6월, 테쿠데르는 아르군이 우호의 표시로 백마를 바치러 오자 환대했지만, 충성 맹세를 받아들이면서도 아리나크의 감시 하에 두었다.

1284년 7월, 아르군의 측근인 부카는 왕자 주슈케브와 훌라추에게 "테쿠데르가 이슬람 신앙에 빠져 칭기즈 칸 가문을 망치려 한다"고 거짓말하며 아르군 구출 계획에 가담시켰다. 결국 아르군은 밤중에 부카의 부하들에게 구출되었고, 그 과정에서 감시자 아리나크는 살해당했다. 왕자 알크, 훌라추 등도 아르군 편에 섰다.

테쿠데르와 샴스 앗딘 주바이니


아르군이 구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테쿠데르는 다시 군대를 모아 토벌하려 했으나, 측근 요직들이 이미 살해된 것을 알고 어머니 쿠투이 하툰의 오르도(군영)가 있는 아르다빌 방면의 사라브까지 도주했다. 그러나 쿠투이 하툰의 오르도에는 이미 아르군이 왕족 10명과 고위 장군 60명의 지지를 확보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고, 왕족들에 의해 체포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테쿠데르는 결국 그곳에서 구금되었다.

이후 카라우나스 군단이 쿠투이 하툰의 오르도에 도착하여 테쿠데르를 체포했고, 이 과정에서 오르도는 약탈당했다. 뒤늦게 도착한 아르군은 혼란을 수습하고 테쿠데르를 심문했다. 아르군은 호라산 영유에 만족하며 반역할 뜻이 없었다고 테쿠데르를 꾸짖었고, 테쿠데르도 사과했다. 테쿠데르의 어머니 쿠투이 하툰이 존경받는 인물이었기에 아르군과 여러 장군들은 그를 사면하려 했다.

하지만 처형된 콩쿠르타이의 어머니 아주자 에게치와 그의 아들들이 강력하게 복수를 원했다. 또한 훌라추, 주슈케브 등이 하마단에서 병력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태를 조기에 마무리하기 위해 콩쿠르타이 처형에 대한 보복으로 테쿠데르를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1284년 8월 10일, 테쿠데르는 등을 부러뜨리는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3. 맘루크 왕조와의 관계

샴스 알딘 주바이니는 테쿠데르가 무슬림 술탄이라는 점을 들어 맘루크 왕조와 평화를 맺을 것을 조언했다.[7] 이에 따라 1282년 8월 25일, 쿠트브 알딘 시라지가 이끄는 첫 사절단이 알라다그를 떠나 이집트로 향했다.[11] 테쿠데르는 자신의 측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칼라운 술탄에게 동맹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냈다. 칼라운은 1282년 12월 3일 답신을 보내, 테쿠데르가 같은 무슬림으로서 룸 술탄국을 속국 상태에서 해방시켜 줄 것을 촉구했다. 테쿠데르는 1283년 6월, 그의 종교적 스승인 카말 알딘 압드 울 라흐만을 단장으로 한 두 번째 사절단을 타브리즈에서 이집트로 파견했다.[11]

그러나 이 두 번째 사절단은 1284년 3월 2일에야 이집트에 도착했고, 테쿠데르가 사망한 지 16일 후인 1284년 8월 26일에야 칼라운 술탄을 만날 수 있었다. 결국 이 사절단은 체포되어 처형당하는 비극을 맞았다.[3]

아르군은 답신을 받지 못하자 테쿠데르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테쿠데르는 맘루크 술탄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맘루크는 그에게 전적으로 협력하지 않았다. 소규모 열세의 군대를 가진 테쿠데르는 아르군의 대규모 군대에 패배했고, 결국 1284년 8월 10일에 처형되었다. 샴스 알딘 주바이니 또한 1284년 10월 16일에 부카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4. 가족 관계

테쿠데르는 여러 부족 출신의 부인들과 다수의 자녀를 두었다. 『집사』「테구데르・아흐마드기」에 따르면, 테쿠데르는 남자 3명, 여자 6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한다.[12]

4. 1. 부모

테쿠데르의 아버지는 훌라구 칸이며, 어머니는 몽골 콩기라트 부족 출신의 쿠투이 카툰이다. 그는 훌라구와 쿠투이 카툰 사이에서 태어난 일곱 번째 아들로, 1246년경 몽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37세에 사망했다는 기록에 따라 1246년 또는 1247년경으로 추정된다.[1]

어린 시절 테쿠데르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로 세례를 받았으며, 이때 '니콜라스'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1260년대 어느 시점에 그는 어머니 쿠투이 카툰, 동복 형인 테크신과 함께 일 칸국으로 이주했다. 이후 형인 아바카 칸은 어머니 쿠투이 카툰을 존경하여 테쿠데르에게 나하반드와 디나바르 지역의 통치권을 부여했다. 쿠투이 카툰 역시 아바카 칸으로부터 마야파리킨 인근의 영토를 하사받았는데, 이 영토의 수입은 금화 10만 개에 달했다고 전해진다.[2]

  • 아버지: 훌라구 칸
  • 어머니: 쿠투이 카툰
  • 동복 형: 테크신 (훌라구 칸의 넷째 아들)

4. 2. 형제

동복 형은 테쿠신으로, 아버지 프레그 한의 넷째 아들이었다.

4. 3. 부인

테쿠데르는 서로 다른 부족 출신의 여덟 명의 부인과 여러 자녀를 두었다.

  • 맏부인 - 튀쾨즈 카툰, 콩기라트 부족 출신
  • * 쿠추크 카툰 - 케레이트 부족의 알리나크와 결혼
  • 둘째 부인 - 아르미니 카툰, 콩기라트 부족 출신
  • * 카플란치
  • * 아르슬란치
  • * 쾨체크 카툰 (1319년 아부 사이드에 의해 처형) - 케레이트 부족의 이린진과 결혼 (도쿠즈 카툰의 조카)
  • * 체체크 카툰 - 디야르바크르 총독 두라바이의 아들 보라추와 결혼
  • * 마이누 카툰 - 타타르 부족의 가라이 바우르치의 아들 잔단과 결혼
  • 바이트게인 카툰, 잘라이르 부족의 후세인 아가의 딸;
  • 퇴데귀 카툰, 콩기라트 부족 출신 무사 귈겐의 딸 (공주 튀멜룬의 아들)
  • * 사이룬 카툰 - 케레이트 부족의 카라차와 결혼
  • 엘 쿠틀루그 카툰, 킹슈 또는 오르구타크의 딸 (두 경우 모두 훌라구의 아들 줌구르의 손녀)[12]
  • 퇴다이 카툰 (1284년 4월 6일 결혼), 아바카 칸의 미망인;
  • 쿠르쿠친 아가치
  • * 노가치
  • 콩쿠르친 아가치
  • * 칼투르미쉬 카툰 - 첫 번째는 부구(아마도 부카)의 아들 샤다이와 결혼, 두 번째는 잘라이르 부족의 샤다이의 아들 토간과 레비라트 결혼
  • 도쿠즈 하툰[13], 대 하툰
  • 알마니 하툰[13], 쿠빌란지와 아르슬란지의 어머니
  • 메이-테긴[14]
  • 토데그 하툰[15]
  • 토데이 하툰[16]
  • 일-쿠르투르그 하툰[17]
  • 쿠르그진(측실)

4. 4. 자녀

테쿠데르는 여러 부인과 자녀를 두었으며,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부인 및 자녀 목록 (주요 기록 기반)
부인부족자녀비고
튀쾨즈 카툰콩기라트쿠추크 카툰케레이트 부족의 알리나크와 결혼
아르미니 카툰콩기라트카플란치
아르슬란치
쾨체크 카툰케레이트 부족의 이린진 (도쿠즈 카툰의 조카)과 결혼했으나, 1319년 아부 사이드에 의해 처형됨
체체크 카툰디야르 바크르 총독 두라바이의 아들 보라추와 결혼
마이누 카툰타타르 부족의 가라이 바우르치의 아들 잔단과 결혼
바이트게인 카툰잘라이르(자녀 기록 없음)후세인 아가의 딸
퇴데귀 카툰콩기라트사이룬 카툰케레이트 부족의 카라차와 결혼. 무사 귈겐(공주 튀멜룬의 아들)의 딸.
엘 쿠틀루그 카툰(킹슈 또는 오르구타크)[12](자녀 기록 없음)훌라구의 아들 줌구르의 손녀[12]
퇴다이 카툰(불명)(자녀 기록 없음)아바카 칸의 미망인. 1284년 4월 6일 테쿠데르와 결혼.
쿠르쿠친 아가치(불명)노가치
콩쿠르친 아가치(불명)칼투르미쉬 카툰첫 번째는 부구(아마도 부카)의 아들 샤다이와 결혼, 두 번째는 잘라이르 부족 샤다이의 아들 토간과 레비라트 결혼.



집사』「테구데르・아흐마드기」에 따르면, 테쿠데르는 남자 3명, 여자 6명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아들들의 정보는 다음과 같다.

『집사』 기록에 따른 아들 목록
순서이름어머니비고
장남쿠빌란지알마니 하툰
차남아르슬란치알마니 하툰
삼남나우한지쿠르구진측실 소생


참조

[1] 웹사이트 AḤMAD TAKŪDĀR – Encyclopaedia Iranica http://www.iranicaon[...] 2020-03-28
[2] 서적 Women and the Making of the Mongol Empire https://www.cambrid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8-07-18
[3] 논문 Tegüder's Ultimatum to Qalawun https://www.cambridg[...] 1990-11
[4] 서적 Power, politics, and tradition in the Mongol Empire and the Ilkhanate of Iran 2016-09-22
[5]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6] 서적 Jalayirids: Dynastic State Formation in the Mongol Middle East https://books.google[...]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6-01-18
[7]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Iran. https://archive.org/[...] University Press 1968–1991
[8] 웹사이트 JOVAYNI, ʿALĀʾ-AL-DIN – Encyclopaedia Iranica http://www.iranicaon[...] 2020-03-28
[9] 서적 The Throne Carrier of God: The Life and Thought of 'Ala' ad-dawla as-Simnani https://books.google[...] SUNY Press 1995-01-01
[10] 서적 The Mongols in Iran: Qutb Al-Din Shirazi's Akhbar-i Moghulan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8-05-03
[11] 서적 Beyond the Legacy of Genghis Khan https://books.google[...] BRILL 2006-10-05
[12] 논문 Marriage, Family and Politics: The Ilkhanid-Oirat Connection https://www.cambridg[...] 2016-01
[13] 문서 コンギラト部族出身。
[14] 문서 フサイン・アカの娘。
[15] 문서 ムーサー・キュレゲンの娘。
[16] 문서 コンギラト部族の某の娘。父アバカの側室のひとり。アバカに嫁ぎその正妃ミリタイ・ハトゥン亡き後にその地位を継承、王女ユル・クトルグ、ノカイの母となる。後にテグデルが受け継ぎ、テグデルの大ハトゥン位を最後に継いで、その死後はアルグンの妃となった。
[17] 문서 トガチャクの母であるキンシュウの娘。
[18] 문서 アミール・アリナクへ降嫁。
[19] 문서 大アミール・イリンジンへ降嫁。
[20] 문서 ディヤール・バクルのアミール・ブラジュへ降嫁。
[21] 문서 ギレイ・バウルチの息子ジャンダンへ降嫁。
[22] 문서 ウルク・ハトゥンのオルドの家人(エヴ・オグラン)であったカラチャへ降嫁。
[23] 문서 母コンコルジン。万戸長シャディヘ降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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