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지그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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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감지그라드는 세르비아에 위치한 로마 시대 유적지로, '펠릭스 로물리아나'라고 불리는 거대한 로마 단지의 유적이다. 이 유적은 사두정치 황제인 갈레리우스 황제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그의 어머니 로물라를 기리기 위한 사원과 궁전, 기념물로 사용되었다. 1953년 이후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황제의 궁전이었음이 밝혀졌으며, 1984년에는 '펠릭스 로물리아나'라는 비문이 새겨진 아치형 입구가 발견되었다. 로물리아나는 훈족의 약탈, 슬라브족의 정착 등으로 쇠퇴했지만, 2007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어 관광 명소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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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지그라드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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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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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이름 | Гамзиград (감지그라드) |
현지 언어 | 세르비아어 |
위치 | 자예차르, 세르비아 |
고도 | 197m |
건축 시기 | 298년 |
좌표 | 43° 53′ 57″ N, 22° 11′ 06″ E |
등재 정보 | |
지정 종류 | 세계 문화 유산 |
공식 명칭 | 감지그라드-로물리아나, 갈레리우스 궁전 |
지정 연도 | 2007년 (제31회 세계 유산 위원회) |
지정 번호 | 1253 |
지정 기준 | (iii), (iv) |
종류 | 문화 |
지역 | 유럽 및 북미 |
문화 유산 지정 | 세르비아 문화 유산 |
유형 | 탁월한 중요성을 지닌 고고학 유적지 |
지정 연도 | 1983년 |
지정 번호 | AN 40 |
상세 정보 | |
면적 | 10 에이커 (약 40,000 제곱미터) |
2. 역사
감지그라드 인근에는 ''펠릭스 로물리아나''라고 불리는 거대한 로마 단지의 유적이 있는데, 이는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후기 로마 유적 중 하나이다. 초기 탐험가들은 그 크기와 수많은 탑 때문에 고대 유적이 로마 군사 기지였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1953년부터 체계적으로 실시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이 장소가 실제로 황제의 궁전이었음이 밝혀졌다. 이 궁전은 사두정치 황제 중 한 명인 갈레리우스 황제에 의해 구상되고 건설되었는데, 그는 다키아인 출신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양자이자 사위였다. 갈레리우스는 298년 사산 제국과의 승리 이후 자신의 출생지를 기념하기 위해 건설을 시작했다. 펠릭스 로물리아나라는 이름은 그의 어머니 로물라를 기리기 위해 붙여졌는데, 그녀는 이교도 다키아인 숭배의 여사제였다.
19세기 말 감지그라드에 대한 관심은 사라졌으나, 1950년대 "세르비아 고고학의 신낭만주의" 시대에 다시 관심이 되살아났다. 1953년 자예차르 시립 박물관 관장인 베코슬라브 포포비치가 체계적인 고고학적 연구를 시작했고, 1970년 드라골라브 스레요비치 박사가 연구를 담당하여 이 기념물을 세계 고고학계에 알렸다.[3] 1984년 남서쪽에서 펠릭스 로물리아나라는 비문이 새겨진 아치형 입구가 발견되면서 이 단지의 정체가 밝혀졌다.[6]
2. 1. 로마 제국 시기
로마 제국 시기 감지그라드 인근에는 ''펠릭스 로물리아나''라고 불리는 거대한 로마 단지의 유적이 있었다. 이곳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후기 로마 유적 중 하나로 손꼽힌다. 초기에는 그 크기와 수많은 탑 때문에 로마 군사 기지로 여겨졌으나, 1953년부터 시작된 체계적인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황제의 궁전이었음이 밝혀졌다.이 궁전은 사두정치 황제 중 한 명인 갈레리우스가 건설했다. 그는 다키아인 출신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양자이자 사위였다. 갈레리우스는 298년 사산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자신의 출생지를 기념하기 위해 이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펠릭스 로물리아나라는 이름은 그의 어머니이자 이교도 다키아인 숭배의 여사제였던 로물라를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
이 단지는 크게 세 가지 목적을 수행했다.
- 그의 어머니의 신성한 인격을 숭배하는 장소
- 황제로서의 그의 업적을 기념하는 기념물
- 갈레리우스를 위한 호화로운 별장
로물리아나는 5세기 중반 훈족에게 약탈당하기 전까지 번성했다. 이후 이곳은 농부와 장인들의 초라한 정착지가 되었다가, 7세기 초 슬라브족이 도착하면서 버려졌다.
19세기에 들어 작센 광산 기업가 폰 헤르더 남작, 독일 광물학자 아우구스트 브라이트하우프트, 오스트리아-헝가리 자연주의자이자 지리학자인 펠릭스 필리프 카니츠 등이 이 유적을 조사하고 기록했다.[3] 1950년대에는 "세르비아 고고학의 신낭만주의" 시대와 함께 유적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고, 베코슬라브 포포비치가 체계적인 고고학적 연구를 시작했다. 1970년에는 드라골라브 스레요비치 박사가 연구를 담당하여 이 기념물을 세계 고고학계에 알렸다.[3]
1984년에는 펠릭스 로물리아나라는 비문이 새겨진 아치형 입구가 발견되면서 이 단지의 비밀이 풀렸다.[6]
107년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키아를 정복하고 로마 속주로 만들었지만, 268년 갈리에누스 황제 때 상실되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레기온을 도나우강 유역으로 이동시키고, 주도 아칼을 둔 "다키아 리펜시스" 속주를 창설하여 이 지역을 재편했다.
로물리아나 요새는 이 새로운 속주에 포함되었다. 요새 이름은 갈레리우스 황제의 어머니 로물라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여러 로마 가도의 교차점에 위치하여 속주의 행정부가 되었고, 이 지역에서 산출된 금을 관리했다.
로물리아나는 갈레리우스 황제가 이곳을 주거지로 사용하면서 번영했다. 그는 성벽과 궁전을 지었고, 사망 후 그곳에 매장되었다.
로물리아나는 비잔틴 제국 아래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지만, 6세기에 아바르인에게 파괴되었다.
2. 2. 로물리아나의 번영과 몰락
로마 제국 말기, 감지그라드 인근의 ''펠릭스 로물리아나''는 유럽에서 매우 중요한 유적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그 크기와 탑 때문에 로마 군사 기지로 여겨졌으나, 1953년부터의 고고학 발굴을 통해 황제 갈레리우스가 건설한 궁전임이 밝혀졌다. 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양자이자 사위였다.[3] 그는 298년 사산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자신의 출생지를 기념하고 어머니 로물라를 기리기 위해 이 궁전을 건설했다. 로물라는 이교도 다키아인 숭배의 여사제였다.[3]이 궁전과 사원 단지는 어머니의 신성성을 숭배하고, 황제의 업적을 기념하며, 갈레리우스의 호화로운 별장 역할을 했다. 로물리아나는 5세기 중반 훈족에게 약탈당하고, 7세기 초 슬라브족이 오면서 버려질 때까지 유지되었다.[3]
19세기, 작센 광산 기업가 폰 헤르더 남작과 독일 광물학자 아우구스트 브라이트하우프트가 이 구조물에 대해 기록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자연주의자이자 고고학자인 펠릭스 필리프 카니츠는 감지그라드 유적을 두 차례 방문하여 그림을 남겼다.[3]
19세기 말, 감지그라드에 대한 관심은 줄었으나 1950년대 "세르비아 고고학의 신낭만주의" 시대에 다시 부활했다. 베코슬라브 포포비치는 1953년 체계적인 고고학 연구를 시작했고, 1970년 드라고슬라브 스레요비치 박사가 연구를 이끌며 이 유적을 세계에 알렸다.[3] 1984년에는 펠릭스 로물리아나라는 비문이 발견되어 이 단지의 정체가 확실해졌다.[6]
107년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키아를 정복한 후 로마 속주가 되었으나, 268년 갈리에누스 황제 때 상실되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군단을 도나우강 유역으로 옮기고 "다키아 리펜시스" 속주를 만들어 이 지역을 재편했다.
로물리아나 요새는 이 새로운 속주에 속했으며, 여러 로마 가도의 교차점에 위치하여 속주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고, 금 생산을 관리했다.
로물리아나는 갈레리우스 황제 때 번성하여 주거지로 사용되었고, 성벽과 궁전이 건설되었다. 갈레리우스는 이곳에서 사망하고 매장되었다.
비잔틴 제국 시대에도 로물리아나는 중요한 위치를 유지했지만, 6세기 아바르인에게 파괴되었다.
2. 3. 재발견과 연구
초기 탐험가들은 그 크기와 수많은 탑 때문에 감지그라드 인근의 거대한 로마 단지 유적 ''펠릭스 로물리아나''를 로마 군사 기지였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1953년부터 체계적으로 실시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이 장소가 실제로 황제의 궁전이었음이 밝혀졌다.[3] 이 궁전은 사두정치 황제 중 한 명인 갈레리우스 황제가 자신의 출생지를 기념하기 위해 건설을 시작했다. 펠릭스 로물리아나라는 이름은 그의 어머니 로물라를 기리기 위해 붙여졌는데, 그녀는 이교도 다키아인 숭배의 여사제였다. 이 단지는 5세기 중반 훈족에게 약탈당할 때까지 숭배 장소, 기념물, 호화로운 별장으로 기능하다가, 이후 농부와 장인의 정착지가 되었고, 7세기 초 슬라브족의 도착과 함께 버려졌다.이 구조물은 1835년 작센 광산 기업가인 폰 헤르더 남작이 처음 평가했으며, 이후 독일의 광물학자 아우구스트 브라이트하우프트도 관련 기사를 썼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자연주의자, 지리학자, 민족학자, 고고학자인 펠릭스 필리프 카니츠는 감지그라드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유적을 방문하여 그림을 남겼다.[3]
19세기 말 감지그라드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다가 1950년대 "세르비아 고고학의 신낭만주의" 시대에 다시 관심이 살아났다. 자예차르 시립 박물관 관장인 베코슬라브 포포비치는 1953년에 체계적인 고고학적 연구를 시작했다.[3] 1970년에는 드라골라브 스레요비치 박사가 연구를 담당하여 이 기념물을 세계 고고학계에 알렸다.[3] 1984년 남서쪽에서 펠릭스 로물리아나라는 비문이 새겨진 아치형 입구가 발견되면서 이 단지의 정체가 밝혀졌다.[6]
3. 유적
로물리아나 유적에서는 고고학 발굴을 통해 다양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특히, 반암으로 만든 로마 황제의 초상화와 동전은 유적의 연대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6] 2010년 7월에는 독일과 세르비아 고고학 팀이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 조각상을 발굴하기도 했다.[7] 이 조각상에는 야만족에 대한 승리를 상징하는 말과 기수가 있었으나, 현재는 사라진 상태이다.
유적지 전체에서는 라틴어 비문과 함께 여러 개의 그리스어 비문이 발견되었다.[8] 또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통치 기간 동안 북서쪽 부분이 개조되어 바실리카가 건설되었다.[3]
3. 1. 구조와 배치
로물리아나는 오늘날 서문과 주요 성벽이 남아있다. 이곳에서 보석, 무기, 화폐 등 고대 로마 시대의 많은 유물을 발견하고 있다.갈레리우스가 지은 궁전은 기둥과 모자이크 그림이 남아있다. 그 모자이크 중 하나는 아도니스를 그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냥 장면을 그린 것이다. 재질은 대리석과 반암이 이용되고 있다.
궁전 옆 마구라 언덕에는 갈레리우스 황제와 그의 어머니 로물라의 무덤과 기념비가 있다. 유적지에서 진행된 고고학 발굴을 통해 두 개의 신전, 두 개의 궁전, 복도식 건물과 함께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인 디오니소스와 메두사를 묘사한 매우 훌륭한 모자이크, 헤라클레스의 형상 기둥 머리, 목욕탕, 인상적인 문을 갖춘 로마 시대 건물 잔해가 발견되었다. 이 유적지에서는 여러 개의 귀중한 로마 금화 묶음이 발굴되었으며, 중요한 로마 유물이 계속해서 출토되고 있다.[6]
디오클레티아누스, 막시미아누스, 갈레리우스, 리키니우스, 막시미누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둥이 놀라운 발견 중 하나이다. 마구라 언덕의 두 영묘에는 로물라와 창립자 갈레리우스가 묻히고 신격화되었다.[6]
이 유적지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 중에는 반암으로 만든 로마 황제의 초상화와 단지의 정확한 연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동전이 있다. 사냥의 여신인 다이아나 조각상은 2010년 7월 독일과 세르비아 고고학 팀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전문가들은 야만족에 대한 승리를 상징하는 말과 기수가 사라졌다고 말했다.[7]
단지 전체에 걸쳐 라틴어 비문과 함께, 여러 개의 그리스어 비문도 발견되었다.[8]
북서쪽 부분은 개조되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통치 기간 동안 바실리카가 건설되었다.[3]
3. 2. 주요 건축물
로물리아나 유적에서는 서문과 주요 성벽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이곳에서는 보석, 무기, 화폐 등 고대 로마 시대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특히 화폐는 유적의 연대를 판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6]갈레리우스 황제가 건설한 궁전에는 기둥과 모자이크 그림이 남아있다. 모자이크 중에는 아도니스를 묘사한 것과 사냥 장면을 그린 것이 있으며, 재료로는 대리석과 반암이 사용되었다. 궁전 옆 마구라 언덕에는 갈레리우스 황제와 그의 어머니 로물라의 무덤과 기념비가 있다.[6]
유적지 발굴을 통해 두 개의 신전, 두 개의 궁전, 복도식 건물, 디오니소스와 메두사를 묘사한 모자이크, 헤라클레스 형상의 기둥 머리, 목욕탕, 인상적인 문을 갖춘 로마 시대 건물 잔해가 발견되었다. 또한, 여러 개의 귀중한 로마 금화 묶음과 로마 황제의 초상화, 다이아나 조각상 등 중요한 유물들이 계속해서 출토되고 있다.[7]
디오클레티아누스, 막시미아누스, 갈레리우스, 리키니우스, 막시미누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둥도 주목할 만한 발견 중 하나이다. 마구라 언덕의 두 영묘에는 로물라와 갈레리우스가 묻혀 신격화되었다.[6]
유적지에서는 라틴어 비문과 함께 여러 개의 그리스어 비문도 발견되었다.[8]
북서쪽 부분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통치 기간 동안 개조되어 바실리카가 건설되었다.[3] 이 사원은 스플리트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에 있는 유피테르 신전과 유사한 '''4주식 전주식''' 유형으로, 리베라 여신에게 헌정되었다. 유적에는 높은 기단, 십자형 지하 묘실, 계단 및 제단이 남아있으며, 아치형 장식대, 문설주, 기단 및 기둥은 녹색 사암, 프리즈는 백색 석회암, 형상화된 주두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3]
궁전은 팔각형 중심 건물, 세 개의 주랑과 작은 욕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베스티불룸은 녹색 사문암 석판과 붉은 화강암 기둥으로 보존되어 있다. 베스티불룸 바닥은 중앙에 미로와 기하학적 모티프가 있는 모자이크로 덮여 있다. 중앙 홀은 기하학적 무늬와 사냥 장면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트리클리니움은 다채로운 석재 타일로 장식되어 있고 입구에는 디오니소스 이미지가 있는 모자이크가 있다. 판토크라토르로 묘사된 갈레리우스 조각상의 일부도 발견되었다. 궁전 벽은 대리석, 녹색 반암, 프레스코화로 덮여 있으며, 그리스 신들을 묘사한 대리석 조각상도 발견되었다. 두 번째 궁전과 복도가 있는 건물은 부분적으로만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중앙에 직사각형 주랑을 두고 다양한 크기와 기능을 가진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다.[3]
3. 3. 마구라 언덕
궁전 근처 마구라 언덕 위에는 갈레리우스 황제와 그의 어머니 로물라의 무덤과 묘총을 포함하는 기념비가 있다.[1]3. 4. 주요 발견
로물리아나에서는 서문과 주요 성벽이 남아있으며, 보석, 무기, 화폐 등 고대 로마 시대의 많은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갈레리우스가 지은 궁전에는 기둥과 모자이크 그림이 남아있다. 모자이크 중 하나는 아도니스를, 다른 하나는 사냥 장면을 묘사하고 있으며, 재질은 대리석과 반암이 사용되었다. 궁전 옆 마구라 언덕에는 갈레리우스 황제와 그의 어머니의 무덤과 기념비가 있다. 유적지 발굴을 통해 두 개의 신전, 두 개의 궁전, 복도식 건물과 함께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인 디오니소스와 메두사를 묘사한 모자이크, 헤라클레스 형상 기둥 머리, 목욕탕, 인상적인 문을 갖춘 로마 시대 건물 잔해가 발견되었다. 여러 개의 귀중한 로마 금화 묶음과 중요한 로마 유물이 계속 출토되고 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막시미아누스, 갈레리우스, 리키니우스, 막시미누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둥이 놀라운 발견 중 하나이다. 마구라 언덕의 두 영묘에는 로물라와 창립자 갈레리우스가 묻히고 신격화되었다.[6]
반암으로 만든 로마 황제의 초상화와 단지의 정확한 연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동전은 이 유적지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이다. 2010년 7월에는 독일과 세르비아 고고학 팀이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 조각상을 발굴했으며, 전문가들은 야만족에 대한 승리를 상징하는 말과 기수가 사라졌다고 말했다.[7]
단지 전체에 걸쳐 라틴어 비문과 함께 여러 개의 그리스어 비문도 발견되었다.[8]
북서쪽 부분은 개조되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통치 기간 동안 바실리카가 건설되었다.[3]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보석, 무기, 화폐와 같은 고대 로마 시대 유물을 발견했으며, 특히 화폐는 연대를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된다. 폐허에는 바실리카 터, 사원 터, 공동 목욕탕 터 등이 있다.
4. 보존 및 관광
감지그라드-로물리아나는 로마 황제 길의 인기 있는 관광 명소이며, 인근에는 스파 리조트인 감지그라드스카 바냐(Гамзиградска Бањаsr)가 있다. 2007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 위원회는 감지그라드-로물리아나를 세계 유산 목록에 등재했다.
4. 1. 세계유산 등재
2007년 6월 23일부터 7월 2일까지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 유산 위원회 제31차 회의에서 갈레리우스 궁전인 감지그라드-로물리아나가 세계 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1]펠릭스 로물리아나는 현대 세르비아 영토에서 태어난 17명 이상의 로마 황제의 출생지를 연결하는 로마 황제 길의 인기 있는 관광 명소이다.
4. 2. 관광
2007년 6월 23일부터 7월 2일까지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 유산 위원회 제31차 회의에서 세계 유산 위원회는 갈레리우스 궁전인 감지그라드-로물리아나를 세계 유산 목록에 등재하기로 결정했다.[1]펠릭스 로물리아나는 현대 세르비아 영토에서 태어난 17명 이상의 로마 황제의 출생지를 연결하는 로마 황제 길의 인기 있는 관광 명소이다.
4. 3. 스파 리조트
오늘날의 스파 리조트인 감지그라드스카 바냐(Гамзиградска Бањаsr)는 "특수 재활 병원"과 함께 인근에 위치해 있다.[9]참조
[1]
간행물
[2]
웹사이트
Gamzigrad-Romuliana, Palace of Galerius
https://whc.unesco.o[...]
2017-11-07
[3]
웹사이트
Museum of Zaječar
https://web.archive.[...]
2017-11-07
[4]
웹사이트
Archaeological Site of Gamzigrad (Felix Romuliana)
https://www.seecorri[...]
2004-03-05
[5]
링크
http://www.isprs.org[...]
[6]
서적
Theory and Practice in Late Antique Archaeology
[7]
웹사이트
Blic Online | Archeologists found sculpture of Diana, Goddess of hunt
https://web.archive.[...]
2010-07-29
[8]
웹사이트
Epigraphy of Upper Danube
https://web.archive.[...]
2017-11-07
[9]
웹사이트
Gamzigrad Spa
http://www.visitserb[...]
2017-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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