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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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개벽은 1920년 천도교의 지원을 받아 창간된 종합 잡지이다. 천도교의 기관지 역할을 했지만, 종교적 색채를 넘어 사회적 공공 매체로서 문학, 정치, 사회 등 다양한 분야의 기사를 게재했다. 특히, 1920년대 조선 문단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육성하는 데 기여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검열과 발행 금지 처분을 받았으며, 여러 차례 폐간과 속간, 복간을 거쳐 한국 현대 언론, 출판, 사상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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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벽 (잡지) | |
|---|---|
| 개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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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정보 | |
| 잡지명 | 개벽 |
| 창간 | 1920년 6월 |
| 폐간 | 1926년 8월 |
| 발행 횟수 | 통권 72호 |
| 발행 정보 | |
| 발행인 | 김기전 |
| 편집인 | 백기환 이돈화 이상정 |
| 발행 기관 | 개벽사 |
| 출판사 | 개벽사 |
| 판형 | 국판 |
| 특징 | |
| 성격 | 종합 잡지 |
| 언어 | 한국어 |
| 주제 | 민족주의 사회주의 신종교 |
| 관련 정보 | |
| 관련 단체 | 천도교 |
| 주요 필진 | 최남선 김억 나도향 염상섭 현진건 이상화 홍명희 박종화 |
| 기타 | |
| 관련 서적 | 개벽 1920년대 지식인들의 이상과 현실 |
2. 창간 배경 및 과정
3·1 운동 이후, 천도교는 근대 종교로서의 위상을 확립하고자 1919년 9월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를 창립하고, 1920년 4월 천도교청년회로 개칭하여 지방조직 건설, 순회강연, 출판사업 등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이돈화, 이두성, 방정환, 박달성을 중심으로 잡지 『개벽』이 창간되었다.[3]
『개벽』은 천도교 기관지 역할을 하며 1920년 6월에 창간되었고, '후천개벽' 사상에서 잡지 이름을 따왔다. 창간 당시, 표지 그림과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일본 검열 당국의 방해를 받기도 했다.[3] 『개벽』은 동인이 없는 종합 잡지로, 시, 소설, 평론 등 다양한 기고를 받아 1920년대 조선 문단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마르크스주의를 따른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신경향파 문학을 육성했지만, 다양한 경향의 문인들이 참여했다.
1925년 8월까지 통권 72호를 발행했지만, 34회나 발행 금지 처분을 받았다. 72호 이후 폐간되었다가 1934년에 속간, 1935년에 3호로 다시 폐간되었다. 해방 이후 1946년에 복간되어 1949년까지 81호가 발행되었다.
2. 1. 천도교청년회의 역할
3·1 운동 이후 천도교는 근대 종교로서 구체적 위상을 구축하고자 하였고, 1919년 9월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가 창립되었다. 대종사장 정광조는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 중이던 교주 손병희와 의논하여 교리의 연구 선전과 조선 신문화의 향상 발전을 위해 노력하기로 하였다.[3] 1920년 4월, 교리연구부는 천도교청년회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사업 내용은 지방 조직 건설, 순회강연회를 통한 교세 확장, 출판 사업 등 세 가지였다. 이 과정에서 개벽이 창간되었는데, 이돈화, 이두성, 방정환, 박달성은 개벽 간행의 중심 인물이었다. 천도교에서는 개벽을 종교적 선전 도구로 활용하지 않고, 사회적 공공 매체로 성장시키고 여론의 구심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3]2. 2. 개벽사 설립과 창간
천도교는 당초 신문 창간을 계획했으나 여의치 않자 종합 잡지 『개벽』을 창간하기로 결정했다. 1920년 6월, 천도교의 지원을 받아 그 기관지 역할을 맡으며 창간되었다. 잡지 제목은 천도교의 "후천개벽" 사상에서 따온 것이며, 발행소로 개벽사를 설립하고, 사장에 최종정(崔宗禎), 발행인에 이두성(李斗星), 편집인에 이돈화|이돈화한국어, 인쇄인에 민영순(閔泳純)이 취임하여, 인쇄소를 신문관(新文館)에 두었다. 창간호에서는 "표지의 호랑이 그림이 독립 정신을 연상시킨다", "시, 소설, 기사 내용이 불온하다" 등의 이유로 일본 정부의 검열 당국(일본 내무성)으로부터 발행 방해를 받아 여러 차례 삭제 과정을 거친 후에야 간신히 발행할 수 있었다.2. 3. 창간호 발행과 검열
천도교의 지원을 받아 그 기관지 역할을 맡고 1920년 6월 창간되었다. 잡지 제목은 천도교의 "후천개벽" 사상에서 따온 것이며, 발행소로 개벽사를 설립하고, 사장에 최종정(崔宗禎), 발행인에 이두성(李斗星), 편집인에 이돈화|이돈화한국어, 인쇄인에 민영순(閔泳純)이 취임하여, 인쇄소를 신문관(新文館)에 두었다. 창간호에서는 "표지의 호랑이 그림이 독립 정신을 연상시킨다", "시, 소설, 기사 내용이 불온하다" 등의 이유로 일본 정부의 검열 당국(일본 내무성)으로부터 발행 방해를 받아 여러 차례 삭제 과정을 거친 후에야 간신히 발행할 수 있었다.3. 내용 및 특징
『개벽』은 동인지와 달리, 동인을 가지지 않은 본격적인 종합 잡지였다. 천도교 기관지 역할을 했지만, 종교적 색채를 넘어선 사회적 공공 매체로서 다양한 분야의 글을 게재했다.[3] 창간호 권두시는 다음과 같다.
『개벽』은 일관된 정치 지향과 현실 참여 태도를 보였다. 총 72회가 간행되는 동안 개벽에 대한 탄압은 수없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개벽이 1920년대 사회 모순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천도교 청년회는 원래 신문을 창간하려다 여의치 않자 종합잡지를 창간하게 되었다. 개벽의 강력한 정치성은 식민 체제의 탄압을 야기했고, 역으로 개벽의 사회적 비중을 극단적으로 확대했다. 창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개벽은 식민지 사회 비판적 공론장의 구심체가 되었으며, 전성기 때는 판매량이 1만 부에 달했다.[3]
1920년대 조선 문단에서 가장 큰 기여를 한 잡지 중 하나로 평가받는 『개벽』은 시, 소설, 평론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실었다. 현진건, 김동인, 염상섭, 나혜석, 이상화, 김소월 등 여러 문인이 『개벽』을 통해 활동했다.
3. 1. 다양한 분야의 기사
문학(37.9%), 정치 기사(14.9%)[3]3. 2. 사상적 경향
開闢중국어은 마르크스주의를 따른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거의 매호 게재되었고, 신경향파 문학과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육성하는 온상적 역할을 담당했다.[1] 하지만, 그것들과 거리를 두고 있던 문인들도 많이 참여했기 때문에, 하나의 경향으로만 파악할 수는 없다.[1]4. 참여 작가
폐허와 백조 동인 등 사회주의적 작가들이 주로 참여했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른 프롤레타리아 문학 작품이 거의 매 호마다 실렸으며, 신경향파 문학과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키워내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들과 거리를 둔 문인들도 많이 참여했기 때문에, 한 가지 경향으로만 볼 수는 없다. 『개벽』에서 활동한 주요 문인으로는 박영희, 김기진, 조보석, 최서해, 현진건, 김동인, 염상섭, 나혜석, 이상화, 김억, 김소월, 변영로, 박종화, 김동환 등이 있다.
4. 1. 주요 작가
5. 발행과 탄압
『개벽』은 일제강점기 동안 끊임없는 탄압을 받았다. 천도교 청년회가 신문을 창간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창간한 종합 잡지인 『개벽』은 일관된 정치 지향과 현실 참여 태도를 보였다. 총 72회가 간행되는 동안 수없이 탄압을 받았는데, 이는 『개벽』이 1920년대 사회 모순의 중심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강력한 정치성으로 인해 식민 체제의 탄압을 받았지만, 역으로 사회적 비중은 크게 확대되어 창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식민지 사회 비판적 공론장의 구심체가 되었으며, 전성기 때는 판매량이 1만 부에 달했다.[3]
『개벽』은 1920년 6월, 천도교의 지원을 받아 그 기관지 역할을 맡으며 창간되었다. 잡지 제목은 천도교의 "후천개벽" 사상에서 따왔다. 개벽사를 발행소로 설립하고, 사장에 최종정(崔宗禎), 발행인에 이두성(李斗星), 편집인에 이돈화(李敦化), 인쇄인에 민영순(閔泳純)이 취임하여, 신문관(新文館)에 인쇄소를 두었다. 창간호는 "표지의 호랑이 그림이 독립 정신을 연상시킨다", "시, 소설, 기사 내용이 불온하다" 등의 이유로 일본 정부 검열 당국(일본 내무성)으로부터 발행 방해를 받아 여러 차례 삭제 과정을 거친 후에야 간신히 발행될 수 있었다.
『개벽』은 『창조』나 『폐허』와 같은 문예 동인지와는 달리, 동인을 가지지 않은 본격적인 종합 잡지였다. 천도교 기관지 역할도 했지만, 천도교와 관계없이 시, 소설, 평론 등의 기고를 받아들여 1920년대 조선 문단에서 가장 큰 기여를 한 잡지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를 따른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거의 매호 게재되었고, 신경향파 문학과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육성하는 온상적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그것들과 거리를 두고 있던 문인들도 많이 참여했기 때문에, 하나의 경향으로만 파악할 수는 없다.
『개벽』에서 활동한 주요 문인으로는 조보석(趙抱石), 최서해(崔曙海), 현진건(玄鎭健), 김동인(金東仁), 염상섭(廉想涉), 나혜석(羅稻香), 이상화(李相和), 김억(金億), 김소월(金素月), 변영로(卞榮魯), 박종화(朴鍾和) 등이 있다.
5. 1. 발행 금지 및 폐간
1926년 8월 《개벽》의 폐간은 6.10 만세운동에서 천도교와 사회주의가 연합하여 활동했다는 점과 표면적으로는 《개벽》 72호에 실린 사회주의 관계 논설인 박춘우의 “모스코에 신설된 국제농학원” 때문이었다.[3] 《개벽》의 폐간 이후 사회주의 문학의 거점은 조선지광으로 이전되었다.[3]6. 의의와 영향
『개벽』은 일제강점기라는 억압적인 현실 속에서도 민족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사회 개혁을 위한 공론의 장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창간 직후부터 식민지 사회의 비판적 담론을 주도하며, 전성기에는 1만 부에 달하는 판매 부수를 기록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3]
특히, 천도교의 "후천개벽" 사상을 바탕으로 창간된 『개벽』은 단순한 문예 동인지가 아니라, 시, 소설, 평론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실어 1920년대 조선 문단에 큰 기여를 했다. 마르크스주의를 따른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적극적으로 게재하여 신경향파 문학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문학 육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서해, 현진건, 김동인, 염상섭, 나혜석, 이상화, 김소월 등 당대 주요 문인들이 『개벽』을 통해 작품을 발표했다.
창간호 권두시에서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을 "개벽"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며, 격동하는 현실과 희망찬 미래를 동시에 보여주었다.
『개벽』은 1925년 8월까지 통권 72호를 발행하면서 34회나 발행 금지 처분을 받을 정도로 일제의 탄압을 받았지만, 이는 오히려 『개벽』이 1920년대 사회 모순의 중심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6. 1. 사회적 영향
1926년 8월 개벽의 폐간은 6.10 만세운동에서 천도교와 사회주의가 연합하여 활동했다는 점과 표면적으로는 개벽 72호에 실린 사회주의 관계 논설인 박춘우의 “모스코에 신설된 국제농학원” 때문이었다.[3] 개벽의 폐간 이후 사회주의 문학의 거점은 조선지광으로 이전되었다.[3]참조
[1]
뉴스
開闢雜誌許可
동아일보
1920-06-02
[2]
뉴스
文壇 半世紀 (19) 綜合誌「開闢」과 文藝誌「朝鮮文壇」
동아일보
1973-05-09
[3]
저널
개벽의 종교적 이상주의와 근대문학의 사상화
2012-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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