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사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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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결사팔대는 일본 고대사에서 실존 여부가 논란이 되는 2대부터 9대까지의 8명의 천황을 지칭한다. 이들은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등장하지만, 기록의 부족으로 인해 역사적 사실 여부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쓰다 소키치는 이들의 실존에 의문을 제기하며 "결사십삼대"를 주장하기도 했다. 결사팔대에 대한 비실존설의 주요 근거는 천황들의 비정상적인 수명, 계보의 모순, 능묘의 불일치 등이다. 반면, 이들의 계보가 고대 일본 사회의 씨족 관계와 왕권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도 강조되며, 계보가 단순한 조작이 아닌, 고대 일본 사회의 복잡한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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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사팔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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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시대 | |
시기 | 일본 서기 및 고사기에 기술되지 않은 일본의 고훈 시대의 시대 |
정의 | |
정의 | 일본 서기 및 고사기에 기술되지 않은 일본 천황의 8대. 또는 그 8대의 시기. |
결사팔대 | |
결사팔대 | 결사팔대 (일본 천황) 제2대 천황 스이제이 천황 제3대 천황 안네이 천황 제4대 천황 이토쿠 천황 제5대 천황 고쇼 천황 제6대 천황 고안 천황 제7대 천황 고레이 천황 제8대 천황 고겐 천황 제9대 천황 가이카 천황 **결사팔대의 천황은 실재하지 않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
2. 배경
결사팔대를 처음 주장한 사람은 역사학자인 쓰다 소키치(1873~1961)이다. 쓰다는 결사팔대 뿐만 아니라 가이카 천황 이후의 스진 천황, 스이닌 천황, 게이코 천황, 세이무 천황, 주아이 천황과 진구 황후의 실존 여부에도 의문을 제기하며 "'''결사십삼대'''(欠史十三代)"를 주장했다.
쓰다 소키치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천황에 대한 불경죄에 해당되었으며, 1942년 불경죄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3]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결사팔대는 고대사에 주류가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결사팔대에 반대하여 천황의 실존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적지 않다.
고대 천황의 계보는 『고사기』, 『일본서기』(『기기』)에 의해 전해지고 있지만, 초기 천황의 계보 중에는 후세에 창작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 다수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로 꼽히는 것이 결사 8대라고 불리는 8명의 천황이다.
대 | 한풍 시호 | 왜풍 시호[4] | 몰년 (기: 고사기, 기: 일본서기) | 후비의 씨성 (고사기[5]) | 후비의 씨성 (일본서기 본문) | 후비의 씨성 (일본서기 일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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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진무 | 카미야마토이와레히코호호데미 | 기: 127세, 기: 137세 | ||||
2 | 스이제이 | 카미누나카하미미 | 기: 45세, 기: 84세 | 시키 현령 | (사고토시누시노카미) | 이소노 현령, 카스가 현령 | |
3 | 안네이 | 시키쓰히코타마테미 | 기: 49세, 기: 57세 | 시키 현령 | (사고토시누시노카미) | 이소노 현령, 오오마 숙녜 | |
4 | 이토쿠 | 오호야마토히코스키토모 | 기: 45세, 기: 77세 | 시키 현령 | (이소시미노미코토) | 이소노 현령, 이소노 현령 | |
5 | 고쇼 | 미마쓰히코카에시네 | 기: 93세, 기: 114세 | 오와리 연 | 오와리 연 | 이소노 현령, (야마토노토요아키사타케오) | |
6 | 고안 | 오호야마토타라시히코쿠니오시히토 | 기: 123세, 기: 137세 | (조카) | (조카) | 이소노 현령, 도오치 현령 | |
7 | 고레이 | 오호야마토네코히코후토니 | 기: 106세, 기: 128세 | 도오치 현령, 카스가, (오호야마토), (오호야마토[6]) | 이소노 현령 | 카스가, 도오치 현령 | |
8 | 고겐 | 오호야마토네코히코쿠니쿠루 | 기: 57세, 기: 116세 | 호즈미 신, 호즈미 신, (카와치) | 호즈미 신 | - | |
9 | 고카 | 와카야마토네코히코오호히히 | 기: 63세, 기: 115세 | 단바노오오아타 현령, 호즈미 신, 마루니 신, 가쓰라기 | 모노노베 | - | |
10 | 스진 | 미마키이리히코이니에 | 기: 168세, 기: 120세 |
다음은 결사팔대에 속하는 천황들의 목록이다.
결사팔대(欠史八代)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초기 천황 8명(2대 스이제이 천황부터 9대 가이카 천황까지)의 실존 여부에 대한 논쟁이다.
『기기』의 원사료로서 중요한 것으로 『제기』와 『구사』가 있다. 이러한 내용은 옛날에 멸실되어 전해지지 않지만, 전자는 천황의 이름, 계보, 후비와 아이의 이름, 궁궐의 장소, 치세 중의 중요한 사건, 치세 연수, 왕릉의 장소[7], 후자는 신대의 이야기, 신들의 제사 이야기, 천황과 영웅의 역사 이야기, 가요, 지명·사물의 기원 설화 등으로 이루어졌다고 추정된다. 결사 8대가 "결사"라고 불리는 것은, 『기기』에 전해지는 각 천황의 기사가 거의 『제기』적인 계보 정보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구사』의 부분, 즉 이야기나 가요 등 구체적인 역사 정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10] 이 때문에 이 8대의 천황이 황실의 기원을 더 오래된 것으로 하기 위해 후세에 추가된 것이 의심받고, 그 실재성이 문제가 되었다.
결사 8대 논의가 본격화되는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이다. 전쟁 전, 『기기』의 연구에는 황통이나 국체와 같은 개념에 대한 배려가 필요했고, 특히 1930년대 이후에 그 경향이 강해졌다.[10][11] 초기 천황의 이름이 미칭 존칭이 겹쳐져 실제 이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논한 역사학자 쓰다 소키치는, 『기기』의 연구를 둘러싸고 원리일본사로부터 공격을 받아 출판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쓰다 사건).[11] 이러한 시대 상황 때문에 『기기』의 사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 성과를 문장으로 공표하는 것에는 연구자 측에 자율 규제가 작용했다.[10][12] 일본의 패전에 의해, 천황의 역사에 관련된 연구에 대한 터부나 정치적 제한이 완화되어[12], 결사 8대에 대한 논의도 본격화되었다. 이것이 후세에 창작된 가공의 천황이라는 견해는 20세기 말 무렵까지 대개 정설이 되었으며, 그 계보가 형성된 연대는, 복수의 논점에 기초하여 대개 덴무조, 즉 7세기 말 무렵의 일로 생각되고 있다.[3][13] 또한 결사 8대 계보에 보이는 다양한 특징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논의 대상이 되고 있다.
모두가 새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어떤 단계에서 시조 진무 천황으로부터 스진 천황에 이르는 지위 계승이 이름만 전해졌던 것을 후세에 황통보에 더했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3. 결사팔대의 천황 목록
대 한풍 시호 왜풍 시호[4] 몰년 (기: 고사기, 기: 일본서기) 2 스이제이 카미누나카하미미 기: 45세, 기: 84세 3 안네이 시키쓰히코타마테미 기: 49세, 기: 57세 4 이토쿠 오호야마토히코스키토모 기: 45세, 기: 77세 5 고쇼 미마쓰히코카에시네 기: 93세, 기: 114세 6 고안 오호야마토타라시히코쿠니오시히토 기: 123세, 기: 137세 7 고레이 오호야마토네코히코후토니 기: 106세, 기: 128세 8 고겐 오호야마토네코히코쿠니쿠루 기: 57세, 기: 116세 9 가이카 와카야마토네코히코오호히히 기: 63세, 기: 115세
고대 천황의 계보는 『고사기』와 『일본서기』(『기기』)에 의해 전해지고 있지만, 초기 천황의 계보 중에는 후세에 창작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 다수 있다.[3] 그중에서도 첫 번째로 꼽히는 것이 결사 8대라고 불리는 위에 적색으로 표시된 8명의 천황이다.[3]
결사 8대가 "결사"라고 불리는 이유는 『기기』에 전해지는 각 천황의 기사가 『제기』적인 계보 정보만으로 이루어져 있고, 『구사』의 부분, 즉 이야기나 가요 등 구체적인 역사 정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10]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8대의 천황이 황실의 기원을 더 오래된 것으로 하기 위해 후세에 추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아 그 실재성이 문제가 되었다.[10]
결사 8대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이다. 일본의 패전으로 천황의 역사에 관련된 연구에 대한 터부나 정치적 제한이 완화되어,[12] 결사 8대에 대한 논의도 본격화되었다. 이들이 후세에 창작된 가공의 천황이라는 견해는 20세기 말 무렵까지 대개 정설이 되었으며, 그 계보가 형성된 연대는 복수의 논점에 기초하여 대개 덴무조, 즉 7세기 말 무렵으로 생각되고 있다.[3][13]
4. 실존 여부 논쟁
결사팔대라는 용어를 처음 주장한 사람은 역사학자 쓰다 소키치이다. 그는 결사팔대뿐만 아니라 가이카 천황 이후의 여러 천황과 진구 황후의 실존 여부에도 의문을 제기하며 "결사십삼대(欠史十三代)"를 주장했다. 쓰다 소키치의 주장은 당시 천황에 대한 불경죄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결사팔대는 고대사 연구의 주류가 되었다.
메이지 시대 학자인 나카 미치요는 진무 천황의 즉위 연도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중국의 혁명 사상을 바탕으로 스이코 천황 9년(601년)에서 1260년을 거슬러 올라간 기원전 660년을 진무 천황 즉위년으로 추정했고, 이 주장은 현재 일본 역사 학계의 정설로 굳어졌다.
기기(고사기, 일본서기)의 원사료인 『제기』와 『구사』 중 결사 8대에 대한 내용은 주로 계보 정보만 담고 있으며, 구체적인 역사 정보는 거의 없어 '결사(缺史)'라고 불린다. 이러한 이유로 결사 8대의 천황들은 황실의 기원을 오래되어 보이게 하기 위해 후대에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그 실재성이 의심받고 있다.
결사 8대 논의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본격화되었다. 일본의 패전으로 천황 역사 연구에 대한 제약이 완화되면서 결사 8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고, 20세기 말에는 가공의 천황이라는 견해가 정설로 자리 잡았다.
4. 1. 비실존설
쓰다 소키치는 결사팔대 뿐만 아니라 가이카 천황 이후의 스진 천황, 스이닌 천황, 게이코 천황, 세이무 천황, 주아이 천황과 진구 황후의 실존 여부에도 의문을 제기하며 "'''결사십삼대'''(欠史十三代)"를 주장했다.[84] 쓰다 소키치의 주장은 당시 천황에 대한 불경죄에 해당되었으며, 1942년 불경죄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결사팔대는 고대사에 주류가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결사팔대에 반대하여 천황의 실존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적지 않다.[84]
메이지 시대 학자인 나카 미치요는 《혁명감문(革命勘文)》에 있는 중국 한나라의 학자 정현의 주석의 문구 내용을 근거로, "1260년을 주기로 한 번 돌아오는 신유년에 대혁명이 있는데, 그 해가 스이코 천황 9년(601년)이며, 601년에 맞춰 이 해에서 1260년을 역산한 기원전 660년을 진무 천황이 즉위한 해로 설정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84]
나카 미치요가 산출한 진무 천황의 즉위 연도 설정에 관한 주장은 1897년 『상세년기고(上世年紀考)』에 실렸으며, 현재 일본 역사 학계에서는 나카 미치요의 주장이 정설로 굳어져있다. 따라서 초대 천황의 즉위년도부터가 조작되었으므로 뒤를 이은 여덟명의 천황은 실존여부도 불분명하고 재위년도는 허구라는 것이 비실존설의 주된 근거이다.[84]
비실존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고대 천황의 계보는 『고사기』, 『일본서기』(『기기』)에 의해 전해지고 있지만, 초기 천황의 계보 중에는 후세에 창작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 다수 존재한다.[3] 그중에서도 첫 번째로 꼽히는 것이 결사 8대라고 불리는 8명의 천황이다.[3]
대 | 한풍 시호 | 왜풍 시호[4] | 몰년 (기: 고사기, 기: 일본서기) | 후비의 씨성 (고사기[5]) | 후비의 씨성 (일본서기 본문) | 후비의 씨성 (일본서기 일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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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진무 | 카미야마토이와레히코호호데미 | 기: 127세, 기: 137세 | ||||
2 | 스이제이 | 카미누나카하미미 | 기: 45세, 기: 84세 | 시키 현령 | (사고토시누시노카미) | 이소노 현령, 카스가 현령 | |
3 | 안네이 | 시키쓰히코타마테미 | 기: 49세, 기: 57세 | 시키 현령 | (사고토시누시노카미) | 이소노 현령, 오오마 숙녜 | |
4 | 이토쿠 | 오호야마토히코스키토모 | 기: 45세, 기: 77세 | 시키 현령 | (이소시미노미코토) | 이소노 현령, 이소노 현령 | |
5 | 고쇼 | 미마쓰히코카에시네 | 기: 93세, 기: 114세 | 오와리 연 | 오와리 연 | 이소노 현령, (야마토노토요아키사타케오) | |
6 | 고안 | 오호야마토타라시히코쿠니오시히토 | 기: 123세, 기: 137세 | (조카) | (조카) | 이소노 현령, 도오치 현령 | |
7 | 고레이 | 오호야마토네코히코후토니 | 기: 106세, 기: 128세 | 도오치 현령, 카스가, (오호야마토), (오호야마토[6]) | 이소노 현령 | 카스가, 도오치 현령 | |
8 | 고겐 | 오호야마토네코히코쿠니쿠루 | 기: 57세, 기: 116세 | 호즈미 신, 호즈미 신, (카와치) | 호즈미 신 | - | |
9 | 가이카 | 와카야마토네코히코오호히히 | 기: 63세, 기: 115세 | 단바노오오아타 현령, 호즈미 신, 마루니 신, 가쓰라기 | 모노노베 | - | |
10 | 스진 | 미마키이리히코이니에 | 기: 168세, 기: 120세 |
『기기』의 원사료는 『제기』와 『구사』가 있다. 결사 8대가 "결사"라고 불리는 것은, 『기기』에 전해지는 각 천황의 기사가 거의 『제기』적인 계보 정보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구사』의 부분, 즉 이야기나 가요 등 구체적인 역사 정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10] 이 때문에 이 8대의 천황이 황실의 기원을 더 오래된 것으로 하기 위해 후세에 추가된 것이 의심받고, 그 실재성이 문제가 되었다.[10]
결사 8대 논의가 본격화되는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이다. 전쟁 전, 『기기』의 연구에는 황통이나 국체와 같은 개념에 대한 일정한 배려가 필요했고, 특히 1930년대 이후에 그 경향이 강해졌다.[10][11] 초기 천황의 이름이 미칭 존칭이 겹쳐져 실제 이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논한 역사학자 쓰다 소키치는, 『기기』의 연구를 둘러싸고 원리일본사로부터 공격을 받아 출판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쓰다 사건).[11] 이러한 상황 때문에 『기기』의 사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 성과를 문장으로 공표하는 것에는 연구자 측에 자율 규제가 작용했다.[10][12] 일본의 패전에 의해, 천황의 역사에 관련된 연구에 대한 터부나 정치적 제한이 완화되어[12], 결사 8대에 대한 논의도 본격화되었다. 이것이 후세에 창작된 가공의 천황이라는 견해는 20세기 말 무렵까지 대개 정설이 되었으며, 그 계보가 형성된 연대는, 복수의 논점에 기초하여 대개 덴무조, 즉 7세기 말 무렵의 일로 생각되고 있다.[3][13]
4. 2. 실존설
초대 진무 천황부터 스진 천황에 이르는 계승은 이름만 전해졌던 것을 후세에 황통보에 더했다는 견해도 있다.[3] 그중에서도 첫 번째로 꼽히는 것이 결사 8대라고 불리는, 이하에 적색으로 표시된 8명의 천황이다.[3]대 | 한풍 시호 | 왜풍 시호[4] | 몰년 (기: 고사기, 기: 일본서기) | 후비의 씨성 (고사기[5]) | 후비의 씨성 (일본서기 본문) | 후비의 씨성 (일본서기 일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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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진무 | 카미야마토이와레히코호호데미 | 기: 127세, 기: 137세 | ||||
2 | 스이제이 | 카미누나카하미미 | 기: 45세, 기: 84세 | 시키 현령 | (사고토시누시노카미) | 이소노 현령, 카스가 현령 | |
3 | 안네이 | 시키쓰히코타마테미 | 기: 49세, 기: 57세 | 시키 현령 | (사고토시누시노카미) | 이소노 현령, 오오마 숙녜 | |
4 | 이토쿠 | 오호야마토히코스키토모 | 기: 45세, 기: 77세 | 시키 현령 | (이소시미노미코토) | 이소노 현령, 이소노 현령 | |
5 | 고쇼 | 미마쓰히코카에시네 | 기: 93세, 기: 114세 | 오와리 연 | 오와리 연 | 이소노 현령, (야마토노토요아키사타케오) | |
6 | 고안 | 오호야마토타라시히코쿠니오시히토 | 기: 123세, 기: 137세 | (조카) | (조카) | 이소노 현령, 도오치 현령 | |
7 | 고레이 | 오호야마토네코히코후토니 | 기: 106세, 기: 128세 | 도오치 현령, 카스가, (오호야마토), (오호야마토[6]) | 이소노 현령 | 카스가, 도오치 현령 | |
8 | 고겐 | 오호야마토네코히코쿠니쿠루 | 기: 57세, 기: 116세 | 호즈미 신, 호즈미 신, (카와치) | 호즈미 신 | - | |
9 | 고카 | 와카야마토네코히코오호히히 | 기: 63세, 기: 115세 | 단바노오오아타 현령, 호즈미 신, 마루니 신, 가쓰라기 | 모노노베 | - | |
10 | 스진 | 미마키이리히코이니에 | 기: 168세, 기: 120세 |
결사 8대가 "결사"라고 불리는 것은, 『고사기』에 전해지는 각 천황의 기사가 거의 『제기』적인 계보 정보만으로 이루어져 있고, 구체적인 역사 정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10] 이 때문에 이 8대의 천황이 황실의 기원을 더 오래된 것으로 하기 위해 후세에 추가된 것이 의심받고, 그 실재성이 문제가 되었다.[10]
결사 8대 논의가 본격화되는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이다. 일본의 패전에 의해, 천황의 역사에 관련된 연구에 대한 터부나 정치적 제한이 완화되어[12], 결사 8대에 대한 논의도 본격화되었다. 이것이 후세에 창작된 가공의 천황이라는 견해는 20세기 말 무렵까지 대개 정설이 되었으며, 그 계보가 형성된 연대는, 복수의 논점에 기초하여 대개 덴무조, 즉 7세기 말 무렵의 일로 생각되고 있다.[3][13]
5. 계보 및 관련 쟁점
『고사기』와 『일본서기』(『기기』)에 따르면 고대 천황의 계보는 전해지고 있지만, 초기 천황의 계보 중에는 후세에 창작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 많다.[3]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결사 8대라고 불리는 8명의 천황이다.[3]
대 | 한풍 시호 | 왜풍 시호[4] | 몰년 (기: 고사기, 기: 일본서기) | 후비의 씨성 (고사기[5]) | 후비의 씨성 (일본서기 본문) | 후비의 씨성 (일본서기 일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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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진무 | 가무야마토이와레비코호호데미 | 기: 127세, 기: 137세 | ||||
2 | 스이제이 | 가무누나카와미미 | 기: 45세, 기: 84세 | 시키 현령 | (사고토시누시노카미) | 이소노 현령, 가스가 현령 | |
3 | 안네이 | 시키쓰히코타마테미 | 기: 49세, 기: 57세 | 시키 현령 | (사고토시누시노카미) | 이소노 현령, 오마 숙녜 | |
4 | 이토쿠 | 오야마토히코스키토모 | 기: 45세, 기: 77세 | 시키 현령 | (이소시미노미코토) | 이소노 현령, 이소노 현령 | |
5 | 고쇼 | 미마쓰히코카에시네 | 기: 93세, 기: 114세 | 오와리 연 | 오와리 연 | 이소노 현령, (야마토노토요아키사타케오) | |
6 | 고안 | 오야마토타라시히코쿠니오시히토 | 기: 123세, 기: 137세 | (조카) | (조카) | 이소노 현령, 도치 현령 | |
7 | 고레이 | 오야마토네코히코후토니 | 기: 106세, 기: 128세 | 도치 현령, 가스가, (오야마토), (오야마토[6]) | 이소노 현령 | 가스가, 도치 현령 | |
8 | 고겐 | 오야마토네코히코쿠니쿠루 | 기: 57세, 기: 116세 | 호즈미 신, 호즈미 신, (가와치) | 호즈미 신 | - | |
9 | 고카 | 와카야마토네코히코오히히 | 기: 63세, 기: 115세 | 단바노오아타 현령, 호즈미 신, 마루니 신, 가쓰라기 | 모노노베 | - | |
10 | 스진 | 미마키이리히코이니에 | 기: 168세, 기: 120세 |
『기기』의 중요한 사료인 『제기』와 『구사』는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지만, 전자는 천황의 이름, 계보, 후비와 아이의 이름, 궁궐, 치세, 왕릉[7], 후자는 신화, 제사, 역사, 가요, 지명 및 사물 기원 설화 등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8] 결사 8대가 "결사"라고 불리는 이유는 『기기』에 전해지는 각 천황의 기사가 『제기』적인 계보 정보뿐이고, 『구사』의 이야기, 가요 등 역사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10] 이 때문에 8대 천황이 황실 기원을 오래되게 하기 위해 추가된 것으로 의심받아 실재성이 문제시되었다.[10]
결사 8대 논의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본격화되었다. 전쟁 전에는 황통이나 국체 개념에 대한 배려가 필요했고, 1930년대 이후 그 경향이 강해졌다.[10][11] 역사학자 쓰다 소키치는 『기기』 연구로 출판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쓰다 사건).[11] 이러한 시대적 상황 때문에 연구자들은 『기기』 사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 결과를 공표하는 데 자율 규제를 했다.[10][12] 나오키 고지로는 교토 대학 재학 중(1941-1943) 기타 사다키치 교수가 결사 8대의 의심스러운 점을 언급했다고 회고했지만, 공표된 것은 적었다.[10] 일본의 패전으로 천황의 역사 연구에 대한 터부나 정치적 제한이 완화되어[12] 결사 8대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20세기 말에는 가공의 천황이라는 견해가 정설이 되었고, 계보 형성 연대는 덴무조, 즉 7세기 말 무렵으로 추정된다.[3][13]
결사 8대가 모두 새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시조 진무 천황에서 스진 천황에 이르는 지위 계승이 이름만 전해졌던 것을 후세에 황통보에 더했다는 견해도 있다. 결사팔대를 포함한 초대 진무부터 제13대 세이무까지는 부자 직계 계승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후대의 천황 계보에서는 형제 간이나 조카 등으로의 계승이 빈번하게 나타나, 이처럼 정연한 직계 계승은 현실적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17][18][19] 결사팔대에 관해서는 『고기』적인 계보 정보 외의 기록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후세에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의심되었다.[14]
고대 일본의 계보에는 여러 유형이 있었다.[20][21] 요시이에 아키코에 따르면, 고대 일본어 "코(子・児)"에는 "오야노코(부모의 자식)"와 "우미노코(낳은 자식)" 구별이 존재했다.[22] "낳은 자식"은 남녀 사이에 태어난 문자 그대로 직접적인 혈통을 이은 "아이"였다. 그리고 이러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계보로 나타낼 때에는 "'''A가 B와 맺어져 자식 C를 낳다'''"라는 형태로 기록되었다(요시이에는 이를 "취생" 계보라고 부른다). 이러한 계보의 실례에는 『고사기』에서의 천황 계보나 『덴쥬코쿠 슈초』의 쇼토쿠 태자 계보, 군마현다카사키시의 야마노우에비 (681년) 기재의 계보 등이 있다.[28]
또 다른 계보 형식은 지위 계승 순서 계보이다. 이는 "조상의 자식"을 표현하는 계보이며 "조상의 자식"이란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직접적인 부자 관계가 아니라, 일족 간의 어떤 공적 지위의 계승에서의 후계자를 가리키는 것이었다.[21][29] 지위 계승 순서 계보의 대표적인 것이 아마베 씨 계도이다. 이는 아마베 씨의 계보를 그 시조부터 "자식 A-자식 B-자식 C.."라는 형식으로 한 줄로 이어가는 형식을 취하고, "국조 봉사", "축 봉사" 등 천황(대왕)에 대한 직무 봉사의 기재를 덧붙인다는 특징을 가진다.[29] 이 형식으로 쓰여진 계보에서는, "A자식(아들) B"라고 쓰여진 인물 간의 관계가 부자 관계라고는 할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는 지위의 계승을 기록한 것(지위 계승 순서)임을 이해할 수 있다.[21][31]
일본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계보는 이나리야마 고분 출토 철검명이다. 1978년 사이타마현교다시의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명문이 새겨진 철검에는, "와카타케루 대왕(일반적으로 유랴쿠 천황으로 간주되는)"에게 봉사했다는 오와케 신이라는 인물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으며, 작성 시기의 "신해년(471년)"도 기록되어 있었다.[36] 이 계보는 "상조, 이름은 오호히코, 그 아들, 이름은..."이라는 형식으로 8대에 걸쳐 거슬러 올라간다. 언뜻 보면 전원을 부자 관계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 점과, 상조로 여겨지는 오호히코가 고겐 천황의 제1황자 오호히코노미코토에 해당한다고 생각된 점에서, 결사 8대의 실재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크게 주목받았다. 나오키 고지로는 철검 명문의 "신해년" 471년 당시 유랴쿠조에 기기적인 계보가 만들어졌다면, "오호히코"에서 멈추지 않고, "고겐 천황에서 시작되는 계보를 썼을 것이 틀림없다"라고 하여, "'기기'에 채용된 '제기'와 '구사'는 성립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말했다.[36] 최근에는 "아들" 자를 사용하여 인물을 한 줄로 연결하여 "지팡이칼 사람의 우두머리"라는 지위에 대한 언급을 나타내는 이 계보는 실제 부자 관계가 아니라, "조상의 아들"을 나타내는 지위 계승 순서의 원초적인 형태라고 이해된다.[21][37]
게이타이 천황부터 긴메이 천황 시대(6세기) 이후 하나의 혈통에 의한 세습 왕권이 성립되었다.[38][39] 부계 원리가 정착되면서 "취생" 계보는 만들어지지 않게 되었고, 부계 출자를 이은 부계 출자 계보가 기본이 되었다.[40] 『일본서기』의 천황 계보는 오래된 "취생" 계보 형식을 그대로 남기는 『고사기』와 달리 "취"자를 사용하지 않지만, 황자녀를 동모 단위로 열거하는 "취생" 계보 양식을 부분적으로 남기고 있다.[41] 『쇼쿠니혼기』 시대에는 천황 계보는 완전히 부계 형식으로 기록되게 된다.[41] 요시이에 아키코는 일계적인 부계 계보를 요구하는 정세 속에서 "취생" 계보 정보가 부계 계보로 재구성되거나, "코(자식・아들)"를 연속시켜 나가는 지위 계승 순서 계보가 부자 직계로 재해석되는 등의 편집을 거쳐 일본 왕통이 확립되어 갔다고 한다.[42]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결사팔대 후비 출자에 관해서도 기록을 남기고 있다. 후비 출자의 특징 중 하나는 이소키 (師木, 사키) 현주, 카스가 (春日, 춘일) 현주, 도치 (十市, 십시) 현주와 같은 야마토 지방을 본거지로 하는 현주 가문에서 배출된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주 가계는 천황가와 비견될 만한 유력한 씨족 가계가 아니며, 야마토 지방이라는 제한된 한 지방의 소규모 씨족에서 후비가 선택된 것은 결사팔대의 실존을 논할 때 유력한 논거가 되었다.[14] 사카모토 타로는 결사팔대 계보가 후대 창작이라면 유력 대호족과 황실이 연결되었을 것이며, 역대 후비가 야마토 지방 소규모 호족 출신인 것은 당시 천황(대왕)가가 아직 한 지방 정권이었음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여, 결사팔대 계보는 신뢰할 수 있다고 논했다.[14] 또한, 결사팔대의 구체적인 사적이 전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이를 이유로 계보 정보까지 의문시하는 것은 비약이라고 주장하며 "팔대 계보를 옛날 이야기로 존중해야 한다"라고도 말했다.[44] 이노우에 미츠사다도 지지했다.
한편, 이소키, 도치, 가스가 현주는, 덴무 천황 시대에 무라지 (連, 렌) 성을 받은 이소키현주를 시작으로 7세기 후반부터 8세기에 걸쳐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한 것이 확인되는 씨족이다.[45] 또한, 현주 가계와는 별개로 결사팔대의 후비를 배출한 것으로 전해지는 오와리노 무라지 (尾張連, 미) 및 코토시로누시노 카미 (事代主神, 사대주신)는 진신의 난 (672년)에서 오아마 황자(덴무 천황) 측에 서서 공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43] 7세기 야마토 지방 현과 황실의 밀접한 관계는 덴무 천황 시대 전후기 황족 자녀 이름에도 나타난다. 고대 황자·황녀 이름은 종종 양육을 담당한 유모 등 하급 씨족 여성에서 유래했고, 7세기 황족에게는 야마토 지방 현 이름이 보인다. 나오키 코지로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결사팔대 후비 출신 씨족 가계에는 덴무 천황 시대 전후 시기 정치 정세가 반영되었고, 공적 일족이나 신이 계보에 편입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논했다.[46][47]
5. 1. 이름
결사팔대 각 천황의 일본식 시호는 특징적이다. 제3대 안녕, 의덕, 효소의 일본식 시호에 있는 '''히코'''는 카미야마토이와레히코와 공통된다. 응신천황 이전의 황자, 여러 씨족의 시조로 여겨지는 인물에게서 자주 보이지만, 이 이름을 가진 인물 중 실존이 확실한 것은 매우 적다. 반면에 『엔기시키』의 신명장(神名帳)에 실려 있는 신사의 제신 중에는 "히코"를 이름 어미로 가진 것이 여럿 보인다.[13][14]제7대 효령, 효원, 개화 천황 3명의 일본식 시호에 있는 '''야마토네코'''는 제10대 숭신천황 이후의 천황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7세기 말~8세기 초의 천황인 지토(오호야마토네코아메노히로노히메), 문무(야마토네코토요오호치), 원명(야마토네코아마츠미시로토요쿠니나리히메), 원정(야마토네코타카미즈키요타라시히메)와 공통된다.[10] 제6대 효안천황의 시호에 포함된 "'''타라시'''"는 결사팔대와 마찬가지로 실존이 의문시되는 경행(오호타라시히코오시로와케), 성무(와카타라시히코)와 공통된다.[15]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보아, 결사팔대의 일본식 시호는 훨씬 후대의 사서 편찬 시에 부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3][16]
결사 8대 계보가 모두 부자 간의 직계 상속이라는 것은 이 계보의 작위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사서 편찬자가 존재하지 않는 천황의 전승을 자유자재로 덧붙일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더 오래된 시대에는 천황(대왕)의 이름만 전승되고, 각 천황 간의 혈통 관계가 전해지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흔적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55] 그 전형적인 예는 결사 8대의 각 천황이 맞이한 후비의 세대이다.
와카이 토시아키가 정리한 결사 8대의 현주(県主) 가문 출신 후비 세대를 나타내는 계보는 다음과 같다.[56] 《고기》와 《일본서기》의 계보에서는 각 천황은 모두 부자 관계이지만, 여러 대에 걸쳐 동세대 후비와 혼인을 맺고 있다.
'''현주 가문 출신 후비의 세대'''[57]
하루히노 아가타누시 오오히모로 | |||||||||
이토리히메 | 제2대 스이제이 천황 | 카와하노히메 | 이소키현노 아가타누시 하에 | 토치노 아가타누시 이소카히코 | 이노테 | 타마마치히코 | |||
이이히메 | 제4대 이토쿠 천황 | 이즈미히메 | 이소카히메 | 제6대 효안천황 | 나가히메 | 제5대 효소천황 | 누나키노사키즈히메 | 제3대 안네이 천황 | 카와즈히메 |
《일본서기》에 따르면, 제3대 안네이 천황의 후비인 카와즈히메와 제5대 효소천황의 후비인 누나키노사키즈히메, 제6대 효안천황의 후비인 나가히메는 모두 이소키현노 아가타누시 하에의 딸이다. 이는 부자 상속하는 3~4세대 떨어진 천황이 거의 같은 세대의 여성을 후비로 맞이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러한 혼인은 현실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어렵다.[55] 즉, 안네이 천황, 효소 천황, 효안천황 세대도 실제로는 그렇게 격차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 천황에 대해서는 먼저 천황명이나 후비의 출자만 전해진 시기가 존재하고, 후에 이를 한 계통으로 연결함으로써 현재 보이는 것과 같은 《고기》와 《일본서기》의 계보 정보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17][55]
5. 2. 계보
『고사기』와 『일본서기』(『기기』)에 따르면 고대 천황의 계보는 전해지고 있지만, 초기 천황의 계보 중에는 후세에 창작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 많다.[3]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결사 8대라고 불리는 다음 8명의 천황이다.[3]대 | 한풍 시호 | 왜풍 시호[4] | 몰년 (기: 고사기, 기: 일본서기) | 후비의 씨성 (고사기[5]) | 후비의 씨성 (일본서기 본문) | 후비의 씨성 (일본서기 일서) | |
---|---|---|---|---|---|---|---|
1 | 진무 | 가무야마토이와레비코호호데미 | 기: 127세, 기: 137세 | ||||
2 | 스이제이 | 가무누나카와미미 | 기: 45세, 기: 84세 | 시키 현령 | (사고토시누시노카미) | 이소노 현령, 가스가 현령 | |
3 | 안네이 | 시키쓰히코타마테미 | 기: 49세, 기: 57세 | 시키 현령 | (사고토시누시노카미) | 이소노 현령, 오마 숙녜 | |
4 | 이토쿠 | 오야마토히코스키토모 | 기: 45세, 기: 77세 | 시키 현령 | (이소시미노미코토) | 이소노 현령, 이소노 현령 | |
5 | 고쇼 | 미마쓰히코카에시네 | 기: 93세, 기: 114세 | 오와리 연 | 오와리 연 | 이소노 현령, (야마토노토요아키사타케오) | |
6 | 고안 | 오야마토타라시히코쿠니오시히토 | 기: 123세, 기: 137세 | (조카) | (조카) | 이소노 현령, 도치 현령 | |
7 | 고레이 | 오야마토네코히코후토니 | 기: 106세, 기: 128세 | 도치 현령, 가스가, (오야마토), (오야마토[6]) | 이소노 현령 | 가스가, 도치 현령 | |
8 | 고겐 | 오야마토네코히코쿠니쿠루 | 기: 57세, 기: 116세 | 호즈미 신, 호즈미 신, (가와치) | 호즈미 신 | - | |
9 | 고카 | 와카야마토네코히코오히히 | 기: 63세, 기: 115세 | 단바노오아타 현령, 호즈미 신, 마루니 신, 가쓰라기 | 모노노베 | - | |
10 | 스진 | 미마키이리히코이니에 | 기: 168세, 기: 120세 |
『기기』의 사료로는 『제기』와 『구사』가 중요하지만,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전자는 천황의 이름, 계보, 후비와 아이의 이름, 궁궐, 치세, 왕릉[7], 후자는 신화, 제사, 역사, 가요, 지명·사물 기원 설화 등으로 추정된다.[8] 결사 8대가 "결사"인 이유는 『기기』에 전해지는 각 천황의 기사가 『제기』적인 계보 정보뿐이고, 『구사』의 이야기, 가요 등 역사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10] 이 때문에 8대 천황이 황실 기원을 오래되게 하기 위해 추가된 것으로 의심받아 실재성이 문제시되었다.[10]
결사 8대 논의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본격화되었다. 전쟁 전에는 황통이나 국체 개념에 대한 배려가 필요했고, 1930년대 이후 그 경향이 강해졌다.[10][11] 쓰다 소키치는 『기기』 연구로 출판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쓰다 사건).[11] 연구자들은 『기기』 사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 결과를 공표하는 데 자율 규제를 했다.[10][12] 나오키 고지로는 교토 대학 재학 중(1941-1943) 기타 사다키치 교수가 결사 8대의 의심스러운 점을 언급했다고 회고했지만, 공표된 것은 적었다.[10] 일본의 패전으로 터부나 정치적 제한이 완화되어[12] 결사 8대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20세기 말에는 가공의 천황이라는 견해가 정설이 되었고, 계보 형성 연대는 덴무조, 즉 7세기 말 무렵으로 추정된다.[3][13]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시조 진무 천황에서 스진 천황에 이르는 지위 계승이 이름만 전해져 후세에 황통보에 더해졌다는 견해도 있다. 결사팔대를 포함한 초대 진무부터 제13대 세이무까지는 부자 직계 계승 형태이다. 그러나 후대에는 형제, 조카 등으로 계승되어 정연한 직계 계승은 비현실적이다.[17][18][19] 결사팔대는 『고기』적인 계보 정보 외 기록이 없어 창작 가능성이 의심된다.[14]
고대 일본의 계보에는 여러 유형이 있었다.[20][21] 요시이에 아키코에 따르면, 고대 일본어 "코(子・児)"에는 "오야노코(부모의 자식)"와 "우미노코(낳은 자식)" 구별이 있었다.[22] "낳은 자식"은 직접적인 혈통을 이은 "아이"였다. 부모와 자식 관계는 "'''A가 B와 맺어져 자식 C를 낳다'''" 형태로 기록되었다(요시이에는 "취생" 계보라 부른다). 실례로 『고사기』 천황 계보, 덴쥬코쿠 슈초 쇼토쿠 태자 계보, 야마노우에비 (681년) 기재 계보 등이 있다.[28] 지위 계승 순서 계보는 "조상의 자식"을 표현하며, 일족 간 공적 지위 계승의 후계자를 가리킨다.[21][29] 아마베 씨 계도가 대표적이며, 시조부터 "자식 A-자식 B-자식 C.." 형식으로 잇고, "국조 봉사""축 봉사" 등 천황(대왕)에 대한 직무 봉사를 덧붙인다.[29] "자식・아들"로 연결된 인물 중 실제 혈연 관계가 파악되기도 하지만, 형제, 방계, 5세대 격차도 "자식・아들"로 표현된다.[31] 즉, "A자식(아들) B"는 부자 관계가 아닐 수 있으며, 지위 계승을 기록한 것이다.[21][31]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계보는 이나리야마 고분 출토 철검명이다. 1978년 사이타마현교다시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철검에는 "와카타케루 대왕(일반적으로 유랴쿠 천황)"에게 봉사한 오와케 신의 계보가 "신해년(471년)"에 작성되었다.[36] "상조, 이름은 오호히코, 그 아들, 이름은..." 형식으로 8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겐 천황 제1황자 오호히코노미코토로 추정되어 결사 8대 실재 논쟁에서 주목받았다. 나오키 고지로는 471년 유랴쿠조에 기기적 계보가 있었다면 "고겐 천황에서 시작되는 계보를 썼을 것"이라며, "'기기'에 채용된 '제기'와 '구사'는 성립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말했다.[36] 최근에는 "지팡이칼 사람의 우두머리" 지위 언급을 나타내는 지위 계승 순서의 원초적 형태라고 이해된다.[21][37]
게이타이 천황부터 긴메이 천황 시대(6세기) 이후 세습 왕권이 성립되었다.[38][39] 부계 원리가 정착되면서 "취생" 계보는 만들어지지 않고, 부계 출자 계보가 기본이 되었다.[40] 『일본서기』 천황 계보는 "취"자를 쓰지 않지만, 황자녀를 동모 단위로 열거하는 "취생" 계보 양식을 남긴다.[41] 『쇼쿠니혼기』 시대에는 천황 계보는 완전히 부계 형식으로 기록된다.[41] 요시이에 아키코는 일계적 부계 계보 요구 속에서 "취생" 계보 정보가 부계 계보로 재구성되거나, 지위 계승 순서 계보가 부자 직계로 재해석되어 왕통이 확립되었다고 한다.[42]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결사팔대 후비 출자에 관해서도 기록했다. 후비 출자의 특징은 이소키 (師木, 사키) 현주, 카스가 (春日, 춘일) 현주, 도치 (十市, 십시) 현주 등 야마토 지방 가문에서 배출된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주 가계는 천황가에 비견될 유력 씨족이 아니며, 야마토 지방 소규모 씨족에서 후비가 선택된 것은 결사팔대 실존 논거가 되었다.[14] 사카모토 타로는 결사팔대 계보가 창작이라면 유력 대호족과 황실이 연결되었을 것이며, 후비가 야마토 지방 소규모 호족 출신인 것은 당시 천황(대왕)가가 지방 정권이었음을 반영해 신뢰할 수 있다고 했다.[14] 사적이 전해지지 않는 것도 계보 정보까지 의문시하는 것은 비약이라며 "팔대 계보를 옛날 이야기로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44] 이노우에 미츠사다도 지지했다.
이소키, 도치, 가스가 현주는 덴무 천황 시대 무라지 (連, 렌) 성을 받은 이소키현주를 시작으로 7세기 후반~8세기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다.[45] 오와리노 무라지 (尾張連, 미) 및 코토시로누시노 카미 (事代主神, 사대주신)는 진신의 난 (672년)에서 덴무 천황 측 공적이 있었다.[43] 7세기 야마토 지방 현과 황실 관계는 덴무 천황 시대 전후기 황족 자녀 이름에도 나타난다. 고대 황자·황녀 이름은 유모 등 하급 씨족 여성에서 유래했고, 7세기 황족에게는 야마토 지방 현 이름이 보인다. 나오키 코지로는 결사팔대 후비 출신 씨족 가계에 덴무 천황 시대 전후 정치 정세가 반영되었고, 공적 일족이나 신이 계보에 편입되었다고 했다.[46][47]
5. 3. 진무 천황과 스진 천황
초대 신무 천황의 칭호인 "처음 천하를 다스린 천황(始馭天下之天皇)"과 10대 스진 천황의 별칭인 "나라를 처음 다스린 천황(御肇國天皇)"[69]은 모두 "하츠쿠니시라스스메라미코토"라고 읽을 수 있다. 이를 "처음 나라를 다스린 천황"으로 해석하면 처음 나라를 다스린 천황이 두 명 존재하게 된다. 이 사실은 스진 천황을 초대 천황으로 하는 전승이 과거에 존재했음을 짐작하게 한다.[70][71][72]6. 『기기(記紀)』의 역사 의식과 '결사(欠史)'
『고사기』와 『일본서기』(『기기』)는 고대 천황의 계보를 전하고 있지만, 초기 천황 중에는 후대에 창작된 것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3] 특히 '결사 8대'라고 불리는 8명의 천황(표에서 붉은색 표시)은 그 실존 여부가 의심받고 있다.[3]
대 | 한풍 시호 | 왜풍 시호[4] | 몰년 (기: 고사기, 기: 일본서기) | 후비의 씨성 (고사기[5]) | 후비의 씨성 (일본서기 본문) | 후비의 씨성 (일본서기 일서) | |
---|---|---|---|---|---|---|---|
1 | 진무 | 카미야마토이와레히코호호데미 | 기: 127세, 기: 137세 | ||||
2 | 스이제이 | 카미누나카하미미 | 기: 45세, 기: 84세 | 시키 현령 | (사고토시누시노카미) | 이소노 현령, 카스가 현령 | |
3 | 안네이 | 시키쓰히코타마테미 | 기: 49세, 기: 57세 | 시키 현령 | (사고토시누시노카미) | 이소노 현령, 오오마 숙녜 | |
4 | 이토쿠 | 오호야마토히코스키토모 | 기: 45세, 기: 77세 | 시키 현령 | (이소시미노미코토) | 이소노 현령, 이소노 현령 | |
5 | 고쇼 | 미마쓰히코카에시네 | 기: 93세, 기: 114세 | 오와리 연 | 오와리 연 | 이소노 현령, (야마토노토요아키사타케오) | |
6 | 고안 | 오호야마토타라시히코쿠니오시히토 | 기: 123세, 기: 137세 | (조카) | (조카) | 이소노 현령, 도오치 현령 | |
7 | 고레이 | 오호야마토네코히코후토니 | 기: 106세, 기: 128세 | 도오치 현령, 카스가, (오호야마토), (오호야마토[6]) | 이소노 현령 | 카스가, 도오치 현령 | |
8 | 고겐 | 오호야마토네코히코쿠니쿠루 | 기: 57세, 기: 116세 | 호즈미 신, 호즈미 신, (카와치) | 호즈미 신 | - | |
9 | 고카 | 와카야마토네코히코오호히히 | 기: 63세, 기: 115세 | 단바노오오아타 현령, 호즈미 신, 마루니 신, 가쓰라기 | 모노노베 | - | |
10 | 스진 | 미마키이리히코이니에 | 기: 168세, 기: 120세 |
『기기』의 주요 원사료는 『제기』와 『구사』이다. 『제기』는 천황의 이름, 계보, 후비와 자녀, 궁궐, 치세, 왕릉 등을, 『구사』는 신화, 제사, 역사 이야기, 가요, 지명 유래 등을 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7][8] 결사 8대가 '결사(欠史)'라고 불리는 이유는, 『기기』에 기록된 각 천황에 대한 내용이 『제기』적인 계보 정보에 그치고, 『구사』적인 이야기나 역사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10]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황통과 국체 개념 때문에 『기기』 연구에 제약이 있었고, 쓰다 소키치와 같이 『기기』의 사실성에 의문을 제기한 학자는 탄압받기도 했다.[10][11] 패전 이후 이러한 제약이 완화되면서 결사 8대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고,[12] 20세기 말에는 이들이 후대에 창작된 가공의 천황이라는 견해가 정설로 자리 잡았다.[3][13]
그러나 최근에는 '결사'라는 표현 자체가 이야기 요소를 '역사'로 간주해 온 근현대 역사학의 관점을 반영한다는 지적이 있다.[74] 『기기』 편찬자들은 천황 계보 정보를 갖추면 이야기 요소가 없어도 '역사'라고 인식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74][75] 고대에는 천황의 교체가 시간 인식의 기준이었고, 계보는 그 자체로 역사였다.[78] 『기기』의 결사 8대 기록은 황통 계보를 완비하고 있으므로, 편찬자들은 이를 역사로 인식했을 것이다.[79][80][81]
결사 8대를 포함한 고대 일본의 왕통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천황가와 각 씨족 간의 관계, 정치적 상황에 따라 변동하며 『일본서기』와 『고사기』 편찬을 통해 확정되었다.[61][82][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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