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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신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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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신의 난은 덴지 천황 사후 황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본의 내전이다. 덴지 천황은 동생인 오아마 황자를 제쳐두고 아들인 오토모 황자에게 황위를 물려주려 했고, 이는 오아마 황자를 지지하는 세력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덴지 천황 사후 오토모 황자가 즉위했으나, 오아마 황자가 반란을 일으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오아마 황자가 승리하여 덴무 천황으로 즉위하고, 오토모 황자는 자결했다. 이 난을 통해 중앙집권 체제가 강화되었으며, 율령 국가 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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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신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壬申의 난
난 때에 오오아마 황자가 투구를 걸었다고 전해지는 투구 걸이 돌 (기후현 후와군 세키가하라정 마츠오)
전투 정보
분쟁壬申의 난
날짜(원가력) 덴무 천황 원년 6월 24일 - 7월 23일
날짜 (양력)672년 7월 24일 - 8월 21일
장소미노국, 오미국, 이세국, 이가국, 야마토국
결과오오아마 황자 군의 승리, 오미 조정의 멸망
교전 세력
교전국 1오오아마 황자
교전국 2오미 조정 군
지휘관 1오오아마 황자
지휘관 2오오토모 황자
병력 12~3만 명
병력 22~3만 명
사상자 1?
사상자 2대패

2. 난의 원인

덴지 천황은 황위 계승 문제, 백강 전투 패배의 후유증, 누카타노오키미를 둘러싼 갈등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덴지 천황은 즉위 전 나카토미노 가마타리(후지와라노 가마타리)와 함께 을사의 변(쿠데타)을 일으켜 고토쿠 천황을 몰아내고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전통적인 동모형제 상속 대신 당나라의 적자 상속제를 도입하려 하면서 동생 오아마 황자의 불만을 샀다.[5]

663년 백강 전투에서 신라· 연합군에 패배한 후, 덴지 천황은 국방 시설을 확충하고 수도를 오미궁(오미노미야)으로 옮겼다. 이는 호족과 민중에게 큰 부담을 주었고, 잦은 화재는 이들의 불만을 반영했다. 덴지 천황의 당나라 풍 급진적 개혁 추진은 수구파의 반발을 샀다.

만요슈(万葉集)에 실린 누카타노오키미의 와카(和歌)는 덴지 천황과 오아마 황자가 누카타노오키미(額田王)를 두고 갈등했음을 시사하며, 이는 난의 또 다른 원인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2. 1. 황위 계승 분쟁

덴지 천황은 동생인 오아마 황자를 황태자로 삼았으나, 아들 오토모 황자에게 황위를 물려주려 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덴지 천황은 야마토 씨족에 의한 정치적 통일 과정에서 우지 제도 내 지역 유력 씨족들의 강력한 세력을 와해시키려 했다.[2][3]

당시 일본의 황위 계승 방식은 동모형제 상속이었으나, 덴지 천황은 당나라의 적자 상속제를 도입하려 했다. 문제는 오토모 황자의 어머니가 시골 지주 집안 출신으로 황족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는 당시 황위 계승에서 모계 혈통과 후비(后妃)의 지위도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오토모 황자의 약점이 되었다.[5]

반면, 덴지 천황의 동생인 오아마 황자는 오토모 황자 못지않게 뛰어난 인물이었고, 출신도 더 높았기에 평판이 좋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오아마 황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형성되었고, 덴지 천황의 죽음으로 억눌려 있던 반발이 터져나와 진신의 난으로 이어졌다.

2. 2. 백강 전투 패배의 영향

663년 백강 전투에서 나·당 연합군에 패배한 후, 덴지 천황은 국방 강화를 위해 한국식 산성을 비롯한 각종 방어 시설을 겐카이나다(玄界灘)나 세토나이카이(瀬戸內海) 연안에 짓고, 백제로부터 망명해 온 유민들을 도고쿠로 이주시키는 한편, 수도를 나라 분지(奈良盆地)의 아스카에서 비와호(琵琶湖) 남단의 오미노미야로 옮겼다.[1] 이러한 움직임은 호족이나 민중들에게 새로운 부담으로 다가왔으며, 오미노미야 천도 때 빈발했던 화재는 천도에 불만을 품은 호족이나 민중들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1]

백강 전투 패배 이후, 덴지 천황은 신라와 당나라의 위협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었다는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당나라 풍으로 제도를 바꾸려는 급진적인 국내 정치 개혁을 추진했다.[1] 그러나 이는 덴지 천황과 그에 맞선 수구파의 대립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1] 덴지 천황이 백강 전투 이후 여러 차례 견당사(遣唐使)를 보냈던 것과는 달리, 오아마 황자가 덴무 천황으로 즉위하고 다이호 율령(大寶律令)이 제정된 몬무 천황(文武天皇)의 치세인 702년까지 견당사를 보내지 않았던 점이 이러한 대립을 보여주는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1]

2. 3. 누카타노오키미를 둘러싼 불화 (설)

만요슈(万葉集)에 실린 누카타노오키미의 와카(和歌) 내용을 근거로, 덴지 천황과 오아마 황자가 누카타노오키미(額田王)라는 여성을 두고 불화하게 된 것이 진신의 난의 원인이라는 설이 있다. 이 설은 에도 시대(江戶時代)의 반 노부토모(伴信友)가 주장한 것이다.[1]

3. 난의 경과

660년대 후반, 오미로 수도를 옮긴 덴지 천황은 동생 오아마 황자를 황태자로 삼았으나, 671년 아들 오토모 황자를 태정대신으로 임명하고 정권을 승계할 의사를 보였다. 덴지 천황이 병상에 눕자, 오아마는 출가하여 요시노로 내려갔다.[10]

672년 12월 3일 덴지 천황이 사망하고 오토모 황자가 뒤를 이었으나, 정치적 경험이 부족했다. 오아마 황자는 6월 24일 요시노를 출발, 이가, 이세를 거쳐 미노로 이동하여 군사를 모았다.[11]

오아마 황자는 7월 2일 군세를 둘로 나누어 야마토와 오미로 진격하게 했다. 야마토 방면에서는 오토모노 후케이가 분전하며 오미 조정군과 격전을 벌였고, 기노 아베마로가 이끄는 원군과 합류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오미 조정군은 미노에도 군사를 보냈지만, 지휘 체계 혼란으로 전진이 늦어졌다.

무라쿠니노 오요리 등이 이끄는 오아마 황자군은 7월 7일 오키나가의 요코가와에서 오미 조정군과의 첫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연승을 거듭했다. 7월 22일 세타 다리 전투에서 오미 조정군이 대패하고, 다음 날 오토모 황자가 자결하면서 난은 오아마 황자의 승리로 끝났다.[19]

673년 2월, 오아마 황자는 아스카기요미하라노미야飛鳥浄御原宮일본어에서 덴무 천황으로 즉위했다. 수도는 오미에서 다시 아스카로 옮겨졌고, 난의 전공자에 대한 논공행상과 새로운 제도 구축이 이루어졌다.

3. 1. 주요 전투

오아마 황자는 군사를 둘로 나누어 진격했고,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수도를 장악했다.[11]

  • 구라부 전투: 오토모 황자 측 장수 다나베 고즈미(田辺小隅)가 7월 5일(8월 6일) 야습을 감행했으나, 다나카노 다리마로(田中足麻呂)가 패주했다.[18] 다음날 다라노(莿萩野)에서 오오노 호무지(多品治)가 고즈미를 격퇴했다.[17]
  • 요코가와 전투: 7월 7일(8월 8일), 무라쿠니노 오요리(村國男依) 등이 지휘하는 오오아마 측 군사들이 오키나가(息長)의 요코가와(橫河)에서 오미 조정군과 벌인 첫 전투에서 승리했다.
  • 세타 다리 전투: 7월 22일(8월 23일), 오아마 군이 세타(瀨田) 다리(지금의 일본 시가현 오쓰시 가라하시 정)에서 오미 조정군에 대승을 거두었다.[19] 다음 날인 7월 23일(8월 24일)에 오토모 황자가 자결하며 난이 종결되었다.

4. 난의 결과

672년 오토모 천황에 맞서 오오아마 황자가 일으킨 진신의 난은 일본 고대 최대의 내란이었다. 이 난은 덴무 천황의 승리로 끝나면서 일본 고대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4. 1. 덴무 천황의 즉위와 중앙집권 강화

672년 진신의 난에서 승리한 오오아마 황자는 673년 아스카기요미하라노미야에서 덴무 천황으로 즉위하고, 수도를 다시 아스카로 옮겼다.[6]

덴무 천황은 난에서 공을 세운 이들에게 포상을 하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중앙집권화를 강화했다. 주요 정책으로는 복제 개정, 팔색의 성(八色の姓) 제정, 관위 제도 개정 등이 있다.[6]

4. 2. 율령국가 체제로의 전환

덴무 천황은 진신의 난에서 승리한 후, 덴지 천황의 정책을 이어받아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강화했다. 난이 끝난 후, 공을 세운 이들에게 상을 주고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다. 복색 제도를 바꾸고, 팔색의 성을 제정했으며, 관리들의 등급 제도도 개정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일본이 고대 율령국가 체제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5. 임신난 관련 전설

일본 간토 지방에는 오토모 황자가 672년 임신의 난에서 패배한 후, 가족과 신하들을 데리고 보소(房総) 지역으로 피신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이와 관련된 유적들이 남아있다.

규슈 왕조설에서는 진신의 난이 규슈를 주요 전장으로 했다는 설도 있다.[8] 이에 따르면, 와쿄(倭京)는 다자이후(太宰府), 오쓰쿄(大津京)는 히고 오쓰(肥後大津)이며, 난바(難波)는 지쿠고 평야(筑後平野)에 있었다고 한다.

5. 1. 보소 반도 전설

일본 간토 지방에는 오토모 황자(大友皇子)가 672년 임신의 난(壬申の乱)에서 패배한 후, 가족과 신하들을 데리고 보소(房総) 지역으로 피신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이와 관련된 유적들이 남아있다.

이 전설의 중심지는 지바현 기미쓰시 타와라다(俵田)에 있는 백산신사(白山神社)이다. 오토모 황자는 이곳에 '소가와 고쇼(小川御所)'를 짓고 은신했으나, 오아마 황자(大海人皇子)가 보낸 토벌군에게 기습당해 사망했다고 한다. 기미쓰시 토자키(戸崎)에는 황자를 따르던 무사 7명의 무덤인 칠인사의 무덤(七人士の墓)이 있고, 황자와 함께 보소로 왔다고 전해지는 소가 아카에(蘇我赤兄)를 모시는 이즈나 신사(飯綱神社)가 기미쓰시 스에요시(末吉)에 있다.[7]

한편, 남겨진 황후 토이치 황녀(十市皇女)는 산속으로 피신하여 다이타키정(大多喜町) 츠츠모리(筒森)의 '하가쿠리노야마(限りの山)'에 이르렀으나, 그곳에서 유산하고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현지 주민들은 이를 애도하여 오토모 황자와 토이치 황녀의 영혼을 위로하는 사당을 지었는데, 이것이 츠츠모리신사(筒森神社)라고 한다.

5. 2. 규슈 주전장설 (규슈 왕조설)

규슈 왕조설에서는 진신의 난이 규슈를 주요 전장으로 하는 설도 있다.[8] 이에 따르면, 와쿄(倭京)는 다자이후(太宰府), 오쓰쿄(大津京)는 히고 오쓰(肥後大津)이며, 난바(難波)는 치쿠고 평야(筑後平野)에 있었다고 생각된다는 것이다.

6. 임신난과 관련된 신사

임신난 당시 고시현주 허매는 갑자기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가 사흘 후 신령이 되어 "나는 고시사에 있는 사대주신이다. 또한 미사사(무사사)에 있는 생령신이다"라고 말하며, 신무 천황의 능에 말과 여러 무기를 봉납하라는 신탁을 내렸다.[6] 고시사는 가와마타 신사이며, 미사사는 무사자 신사로서 효원 천황이 즉위한 궁터라고 전해진다. 무라야 신의 신관도 신탁을 받아 신사 안의 길을 방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6] 무라야 신은 무라야자 미토히메 신사이다.

6. 1. 가와마타 신사

야마토국 고시군에 있는 고시미케자 가모사대주 신사는 고토시로누시 신이 신탁을 내려 오오아마 왕자를 지원했다고 전해진다.[6]

6. 2. 무사자 신사

야마토국 고시군에 있는 신사로, 생령신이 신탁을 내려 오오아마 황자를 지원하였다.[6] 효원 천황이 즉위한 궁터라고 전해진다.

6. 3. 무라야자 미토히메 신사

미호쓰히메노미코토(별명 미토히메신)를 주신으로 모시고, 오오모누누노미코토를 함께 모시는 무라야자 미토히메 신사는 야마토국 시모쓰군에 있으며, 야마토 삼도 중 하나인 “나카쓰미치(타치바나 가도)”에 자리 잡고 있다. 무라야 신의 신관은 신탁을 받아 "지금, 우리 신사 안의 길에서 군세가 온다. 그러니 신사 안의 길을 방어하라"고 말했다.[6]

참조

[1] 서적 Encyclopedia of Asian History Scribner 1988
[2] 서적 CLANS AND RELIGION IN ANCIENT JAPAN: the mythology of mt. miwa. https://www.worldcat[...] TAYLOR & FRANCIS 2018
[3] 서적 JAPAN EMERGING: premodern history to 1850. https://www.worldcat[...] ROUTLEDGE 2019
[4] 문서 국내 일부 해설서 등에 대한 설명
[5] 서적 蘇我氏 古代豪族の興亡 中央公論新社 2015
[6] 서적 日本書紀
[7] 서적 天皇陵と近代―地域の中の大友皇子伝説― 平凡社 2018
[8] 서적 壬申の乱の舞台を歩く 梓書院 2012-12
[9] 문서 '壬申'의 일본어 발음
[10] 문서 《니혼쇼키》에 대한 설명
[11] 문서 《니혼쇼키》에 대한 설명
[12] 문서 오아마의 생계 유지 관련 직책 설명
[13] 문서 이세가 아닌 미노의 카미라는 설
[14] 문서 미야케 씨의 기원에 대한 설명
[15] 문서 타리마로가 관리하던 탕목읍 위치에 대한 논의
[16] 문서 다리마로와 니이노미의 관계에 대한 설명
[17] 문서 다라노의 위치에 대한 설명
[18] 문서 고즈미의 전투 전략에 대한 설명
[19] 문서 후케이의 전략에 대한 설명
[20] 문서 덴무 천황 2년에 대한 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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