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토 다이사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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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모토 다이사쿠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1883년 효고현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러일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관동군 참모를 거쳐, 1928년 장쭤린 폭살 사건에 연루되어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만주국에서 활동하며 만철 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중국에서 포로로 사망했다. 장쭤린 폭살 사건에 대한 그의 관여는 논란이 되었으며, 사건 이후에도 만주 지역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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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토 다이사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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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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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고모토 다이사쿠 |
원어 이름 | 河本 大作 |
출생 | 1883년 1월 24일 |
출생지 | 일본 효고현 사요군 |
사망 | 1955년 8월 25일 |
사망 장소 | 중화인민공화국 타이위안 |
별칭 | 만주의 음모자 |
묘소 | 도쿄도 후추시의 도고지 |
군사 정보 | |
소속 | 대일본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914년 ~ 1932년 |
최종 계급 | 육군 대좌 |
주요 참전 | 러일 전쟁 |
근무 | 관동군 |
지휘 | 관동군 참모 |
훈장 | 만주국 훈일위 주국장 훈이위 경운장 |
경력 | |
이후 활동 | 남만주철도 이사 만주탄광 이사장 산서산업 (주) 사장 |
2. 생애
고모토 다이사쿠는 1883년 효고현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15기)와 육군대학교(26기)를 졸업한 일본의 군인이다. 러일 전쟁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으며, 이후 중국 파견군 참모, 육군대학 교관 등을 거쳐 1926년 관동군 참모로 부임했다.[2] 1928년 만주 군벌 장쭤린을 열차 폭파로 살해한 장쭤린 폭살 사건을 주도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1929년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3] 이후 만주국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중국에서 전범으로 수감되었고, 1955년 타이위안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2. 1. 출신 및 초기 군 경력
1883년 1월 24일, 효고현 사요군 미카즈키 마을(현 사요정)에서 지주 고모토 산지(河本参二)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등 소학교, 오사카 육군 지방 유년 학교, 중앙 유년 학교를 거쳐 1903년 11월 육군사관학교 제15기를 보병과로 졸업했다. 이듬해 러일 전쟁에 보병 소위로 참전하여 중상을 입었다.고국으로 돌아와 치료 후, 1914년 일본 육군대학교 제26기를 졸업했다. 이후 중국 파견군 참모, 참모 본부 부속, 지나 공사관 부속 무관 보좌관, 육군대학 병학 교관 등을 역임했다. 1926년 3월에는 대좌로 진급하여 만주로 건너가 관동군 고급 참모로 부임하였다[2].
관동군 참모 시절인 1928년 6월 장쭤린 폭살 사건을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하였으나, 이 사건에 연루되어 정직 처분을 받고 대기하다가 결국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3]. 그의 육군사관학교 제15기 동기로는 노기 마레스케의 차남 야스노리(保典)가 있으며, 야스노리는 러일 전쟁에서 전사했다.
2. 2. 장쭤린 폭살 사건
1928년 6월 4일, 베이징에서 만주로 귀환하던 만주 군벌 장쭤린이 탑승한 열차가 펑톈(현 선양시) 인근 황고둔 역 부근에서 폭파되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장쭤린 폭살 사건, 황고둔 사건).[6][7] 초기 일본 언론은 이를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 군대의 소행으로 보도했으나,[6][7] 이후 관동군 고급 참모였던 고모토 다이사쿠가 계획하고 실행한 사실이 드러났다.[6][7] 이는 고모토가 관동군 사령관의 승인 없이 독단적으로 추진한 작전이었다.[4]고모토는 사건 발생 전 도쿄의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장쭤린 한두 명 정도는 객사해도 괜찮지 않은가"라며 살해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8] 이 사건은 일본 정부에 보고되지 않은 채 진행되었으며,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쇼와 천황은 크게 분노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처리를 둘러싸고 당시 총리였던 다나카 기이치는 처음에는 엄정 대처를 약속했으나, 이후 진상 규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천황의 신임을 잃고 결국 내각 총사퇴로 이어졌다.[9]
사건의 주모자인 고모토는 군법 회의에 회부되지 않았고, 1929년 4월 예비역으로 편입되는 가벼운 처벌을 받는 데 그쳤다.[9] 이러한 미흡한 처벌은 일본 육군 내부에서도 비판을 받았으며, 특히 육군 대장 마쓰이 이와네는 고모토에 대한 엄벌을 강력히 요구하며 반발했다. 일본 정부와 군부는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려 했으나, 전후 도쿄 재판 등에서 관련자들의 증언이 나오면서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13][14]
2. 2. 1. 배경
1928년 3월, 만주에서는 봉천 지역 군벌과 일본 측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4] 이는 장쭤린이 일방적으로 "만철 병행선"의 경영 강화를 추진한 것이 원인이었으며, 만철(남만주철도주식회사)과 일본 총영사관, 관동군은 이를 "망은반일(忘恩反日) 행동"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4] 이러한 갈등의 중심에는 관동군 고급 참모였던 고모토 다이사쿠와 봉천 독군 고문 도이하라 겐지가 있었다.[4] 고모토는 구체적인 계획 내용은 불분명하지만, 군 사령관의 허가 없이 독자적으로 일종의 쿠데타를 구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4]한편, 고모토는 과거 규슈에서 부대장으로 근무할 당시 방종한 생활로 인해 고리대금업자에게 2천엔~3천엔의 빚을 졌고, 이로 인해 소송을 당해 곤경에 처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쭤린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고, 장쭤린으로부터 3000JPY을 받아 위기를 넘겼다. 고모토는 장쭤린에게 보낸 답장에서 만약 이 일로 육군에서 면직될 경우 자신을 부하로 써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5]

이러한 배경 속에서 고모토는 만주의 실질적인 권력자였던 장쭤린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1928년 6월 4일, 베이징에서 만주로 돌아오던 장쭤린이 탑승한 열차가 황고둔 역 근처에서 폭파되어 장쭤린이 사망하는 황고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언론들은 초기에는 이를 중국 국민당의 소행으로 보도했지만, 이후 조사를 통해 이것이 고모토 다이사쿠의 계획을 관동군이 실행한 사건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고모토의 관여 사실은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채 소문으로만 퍼졌고, 일본 제국 정부는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고모토의 개입을 부정하면서 관동군의 개입 사실 또한 부인되었다. 그러던 중 고모토가 도쿄의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장쭤린의 죽음에 대해 "장쭤린 한 명이나 두 사람이 죽어도 좋지 아니한가"라고 언급한 내용이 알려지면서 그에 대한 의혹은 더욱 커졌다. 당시 장쭤린은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사이의 대립 구도에서 완충 역할을 하고 있었고, 일본 제국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고둔 사건으로 인해 일본과 장쭤린 군벌 간의 관계는 파탄에 이르렀다.
고모토의 이러한 독단적인 행동은 일본 제국 중앙 정부에 보고되지 않은 채 이루어졌으며, 이 사실을 알게 된 쇼와 천황은 크게 분노했다. 이 사건은 일본 내에서도 큰 파장을 일으켜 내각이 총사퇴하는 등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다.
일본 제국 육군 내부에서는 사건의 파장을 축소하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고모토를 군법회의에 회부하는 대신, 1929년 4월 그를 예비역으로 편입시키는 매우 가벼운 처벌을 내리는 선에서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 이러한 미온적인 조치에 대해 당시 육군대장이었던 마쓰이 이와네 등 일부 군 고위 인사들은 끝까지 강하게 반발했다.
2. 2. 2. 실행
1928년 3월, 만주 봉천에서는 장쭤린이 이끄는 봉천 군벌과 일본 측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4] 장쭤린이 일방적으로 만철 병행선의 경영 강화를 추진하자, 만철, 일본 총영사관, 관동군 등은 이를 "반일 행동"으로 간주하며 강하게 반발했다.[4] 이러한 갈등의 중심에는 관동군 고급 참모였던 고모토 다이사쿠와 봉천 독군 고문 도이하라 겐지가 있었다.[4] 고모토는 군 사령관의 허가 없이 독단적으로 장쭤린 제거를 포함한 일종의 쿠데타를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4]
마치노 타케마의 정치 담화 녹음에 따르면, 고모토는 과거 규슈에서 부대장으로 근무할 당시 방탕한 생활로 고리대금업자에게 빚을 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장쭤린에게 편지를 보내 3000JPY을 빌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답장에서 만약 이 일로 군에서 면직될 경우 자신을 부하로 써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5] 이러한 개인적인 일화가 사건의 배경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결정적으로 1928년 6월 4일,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 군대의 북벌 압박을 받아 베이징에서 만주로 돌아가던 장쭤린이 탑승한 열차가 황고둔 역 근처(봉천 부근)에서 폭파되는 사건이 발생했다(장쭤린 폭살 사건). 장쭤린은 이 폭발로 중상을 입고 이틀 뒤 사망했다.[6][7]
사건 초기 일본 언론들은 이를 국민당 군의 스파이(변의대) 소행일 가능성이 있다며 '만주 모 중대 사건'으로 보도했지만, 이후 조사 결과 관동군 고급 참모인 고모토 다이사쿠가 계획을 세우고, 현장 경비를 담당하던 독립 수비대의 히가시구 테츠오 대위와 조선군에서 파견된 키리하라 사다히사 공병 중위 등이 실행한 것으로 밝혀졌다.[6][7] 히가시구 대위는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중국인 노동자 2명을 살해하고, 폭파를 북벌군의 소행으로 위장하려 한 정황도 드러났다.[6]
사건 직후부터 관동군의 개입설이 파다했으며, 봉천 총영사는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현지 일본 기자들 사이에서도 관동군의 소행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고 보고했다. 고모토 자신도 사건 발생 몇 달 전 도쿄의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장쭤린 한두 명쯤 죽어도 괜찮지 않은가. 이번에는 반드시 해내겠다. ... 나는 단지 만몽에 피의 비를 내리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적어 노골적인 살해 의도를 드러냈다.[8] 관동군 사령관 무라오카 쵸타로는 다케시타 요시하루 중좌에게 장쭤린 암살 공작을 지시했으나, 고모토는 이를 제지하고 자신의 계획을 강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일본 제국에 보고되지 않은 고모토의 독단적인 행동이었기에 쇼와 천황은 크게 분노했다. 사건 처리를 둘러싸고 당시 총리였던 다나카 기이치는 처음에는 일본군의 관여 가능성을 인정하고 엄정 대처를 약속했으나, 이후 진상 규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천황의 신임을 잃고 결국 내각 총사퇴로 이어졌다.[9]
일본 육군 내부에서는 고모토를 군법 회의에 회부하는 대신, 1929년 4월 예비역으로 편입시키는 가벼운 처벌로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9] 『사이온지 공과 정국』이나 『쇼와 천황 독백록』 등의 기록에 따르면, 군법 회의가 열릴 경우 고모토가 일본의 모든 모략을 폭로할 것을 우려하여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이러한 솜방망이 처벌에 대해, 장쭤린을 반공의 방패로 여겼던 육군 대장 마쓰이 이와네는 끝까지 반발하며 고모토에 대한 엄벌을 강력히 요구했다.
2. 2. 3. 사건 이후
1928년 6월 4일 발생한 장쭤린 폭살 사건(황고둔 사건)은 초기에 일본 언론에서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 군의 소행일 가능성을 보도하며 '만주 모 중대 사건'으로 불렸다.[6][7] 그러나 이후 조사 과정에서 관동군 고급 참모였던 고모토 다이사쿠가 계획하고, 독립 수비대의 히가시구 테츠오 대위와 조선군 파견 공병 키리하라 사다히사 중위 등이 실행한 사실이 밝혀졌다.[6][7] 심지어 히가시 대위는 사건을 북벌군의 소행으로 위장하기 위해 중국인 쿨리 2명을 살해한 것으로 드러났다.[6]
사건 초기부터 관동군의 개입설이 돌았으며, 펑톈 총영사가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도 현지 일본 기자들 사이에서 관동군 소행이라는 의견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모토 자신도 사건 몇 달 전 도쿄의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장쭤린 한두 명 정도는 객사해도 괜찮지 않은가. 이번에는 꼭 해낼 거야. ... 나는 단지 만몽에 피의 비를 내리는 것만을 희망한다"라고 써 보낸 사실이 드러나면서 의혹은 더욱 커졌다.[8]
이 사건은 일본 제국에 보고되지 않은 고모토의 독단적인 행동이었기에 쇼와 천황은 크게 분노했다. 당시 총리였던 다나카 기이치는 처음에는 사건에 일본군이 관여했을 가능성을 인정하고 사실이라면 엄정히 대처하겠다고 천황에게 보고했으나, 이후 불분명한 태도를 보여 천황의 신뢰를 잃고 결국 내각 총사퇴로 이어졌다.[9]
일본 육군 내부에서는 고모토를 군법 회의에 회부하는 대신, 1929년 4월 예비역으로 편입시키는 가벼운 처벌로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9] 『사이온지 공과 정국』이나 『쇼와 천황 독백록』에 따르면, 군법 회의를 열 경우 고모토가 일본의 모든 모략을 폭로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에 이러한 결정이 내려졌다고 한다. 이러한 가벼운 처분에 대해, 장쭤린을 반공의 방파제로 여겼던 육군 대장 마쓰이 이와네는 끝까지 반발하며 고모토의 엄벌을 주장했다.
고모토는 예비역 편입 후에도 군사 활동에 관여했다. 전후 타이위안 수용소에서의 진술서에 따르면, 그는 1931년 만주 사변 당시 군에 협력하여 자금 공작과 군-민간 연결 역할을 했으며, 만주 지배를 침략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한다.[19] 1931년 만주 출장 중 펑톈에서 급성 맹장염으로 인한 복막염으로 만철 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마취 중 비밀을 누설할 것을 두려워하여 마취 없이 수술을 받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20]
한편, 고모토는 일본 정부와 군이 공식적으로 관여를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는 장쭤린 폭살 사건에 대해 자랑하듯이 이야기하고 다녔다고 한다.[17] 그는 사건 이후 중국 측의 항일 움직임이 일시적으로 멈췄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했지만[21], 실제로는 사건 이후 중국인들의 반일 감정이 극도로 격화되었다. 만철 부속지 주변에는 경계선이 설치되어 일본인만 신체 검사를 받아야 했고[22], 일본인 학생이 펑톈 군 병사에게 총검으로 찔리거나[23] 펑톈 성 내에서 일본인들이 쫓겨나는 일이 속출했다.[23] 또한, 만철 부속지의 일본인 거류민에게 퇴거 명령이 내려지고[24], 이전까지는 위기 시 만철 부속지로 피난했던 중국인 부자들이 오히려 일본 측 지역을 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25]
2. 2. 4. 소련 특무 기관 범행설
러시아인 역사 소설가 드미트리 프로호로프는 장쭤린 폭살 사건이 고모토 다이사쿠가 아닌 소련의 GRU(군사 정보기관)가 주도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10]하지만 사건 발생 당시부터 일본의 정치 중심부나 현지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고모토 다이사쿠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일본 육군이나 관동군과의 연관성을 문제 삼고 있었다.[11][12] 사건의 진상이 일본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도쿄 재판에서 다나카 류키치가 폭로하면서부터였다.[13][14] 또한, 전쟁 후 중국 타이위안의 수용소에서 고모토 본인이 직접 장쭤린 폭살 사실을 진술하기도 했다.[15]
이전에도 고모토의 의제(義弟)인 히라노 레이지가 『고모토 다이사쿠 전』 집필을 위해 고모토의 구술을 받아 적었고, 그 기록이 전후 『내가 장쭤린을 죽였다』라는 제목으로 문예춘추에 소개된 바 있다.[16] 이 내용은 최근 중국 측이 공개한 고모토의 진술 내용과 거의 일치하며, 이는 히라노가 기억에 의존해 복원한 고모토의 구술을 중국 측이 고모토 진술의 근거로 활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군 관계 협력자들의 고모토 범행설을 뒷받침하는 증언도 다수 존재한다.[17]
이에 대해 일본 내에서는 다나카의 진술이 GHQ의 의도에 맞춘 위증이라는 주장이나, 고모토의 자백 및 히라노의 주장이 중국공산당 관리 하의 수용소에서 세뇌된 결과이거나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라는 반론도 종종 제기된다.[18]
2. 3. 만주국에서의 활동
1932년 군에서 물러난 후, 관동군 시절의 인맥을 이용하여 남만주 철도 이사직을 맡았다.[26] 1934년에는 만주 지역의 탄광들을 통합한 만주 탄광의 이사장이 되었다. 그가 중국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만주국 황제 푸이나 산시성의 군벌 옌시산 등과의 관계가 있었으며, 이로 인해 일본에게 유리하게 활용될 수 있는 인물로 여겨졌다.[20] 1935년 2월에는 남만주 철도 경제 조사회 위원장으로서 펑톈 성, 지린 성, 헤이룽장 성의 인구 증가 등을 통계 조사하기도 했다.1942년, 중일 전쟁 중 일본의 경제적 이익 확보를 목적으로 설립된 북지나 개발 주식회사 산하의 산시 산업 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했다. 이 회사는 철광 및 경공업 제품을 취급했으며, 이 취임은 당시 일본 제국 육군 제1군 참모장이었던 하나야 다다시( 花谷正|하나야 다다시일본어 )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소비에트 연방의 만주 침공 이후에도 화북 지역에 남아 있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전쟁 포로가 되었다. 결국 1955년 8월 25일 중국 타이위안 수용소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2. 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2년 일본 제국 육군 제1군 참모장이던 하나야 다다시花谷 正|하나야 다다시일본어의 추천으로 국영회사인 산시 산업 주식회사의 사장이 되었다.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도 중국에 남아 활동했다. 산시성 타이위안의 산시 산업은 중화민국에 접수되어 서북실업건설공사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나, 고모토는 중화민국의 지시에 따라 최고 고문으로 취임하여 계속 회사를 운영했다. 그는 종전 전과 같은 대우를 보장하며 일본인 직원들의 잔류를 권유했고, 가족을 포함해 1,200명 이상이 그의 권유로 남았다. 이는 중국 산시성 일본군 잔류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이후 고모토는 일교구락부 위원장을 맡아 타이위안의 일본인들과 함께 옌시산의 중국 국민당 산시군에 협력하여 중국 공산당 군대와 싸웠다. 그러나 1949년 중국 공산당 군이 타이위안을 점령하면서 고모토는 포로가 되었고, 같은 해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의 전범으로 타이위안 전범 관리소에 수감되었다.
수용소에서 고모토는 장쭤린 폭살 사건의 진상에 대해 자백했다. 그는 장쭤린의 세력이 만철 발전을 방해한다고 판단하여 사건을 계획했으며, 책임은 관동군에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위장 공작이 실패하고 일본 육군성이 책임자 규명을 요구하자, 사령관의 고민을 덜기 위해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기로 했다고 진술했다.[20]
고모토는 종전 후 GHQ가 주도한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이나 장제스 정부의 난징 군사 재판에서는 심문을 받지 않았다. 당시 그가 국공 내전이 치열했던 중국 북부에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수용소 내에서는 다른 일본인 수용자들로부터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8]
1955년 8월 25일, 고모토는 타이위안 수용소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72세였다. 그의 유골은 같은 해 12월 18일 마이즈루항에 도착한 제12차 중공 귀국선(흥안환) 편으로 다른 일본인 억류자 및 유골과 함께 일본으로 송환되었다.[27]
이듬해인 1956년 1월 31일, 아오야마 사이죠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며, 구 일본 육군 및 만주국 관계자들이 다수 참석했다. 친구 대표로 조사를 낭독한 오카와 슈메이는 고모토를 "심신이 유연하고 강인하며, 굴신자재하면서도 꺾이지 않는다. 지극히 소심하면서도 매우 대담하고, 세밀하게 사려하며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평연히 단행한다"고 평가했다.[28]
고향인 미카즈키정(현 사요정)에서는 그를 "보국의 지성과 그 과단 결행은 오랫동안 기록될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29] 1965년에는 지역 유지들에 의해 그의 생가 옆 명광사 경내에 현창비가 세워졌는데, 비문에는 "전범이 되어 수용소에서 병사"라고 새겨져 있다.[30]
3. 논란 및 평가
장쭤린 폭살 사건의 실행 책임자로 지목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GHQ가 주도한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이나 장제스가 진행한 난징 군사 재판에는 증인으로 소환되거나 심문을 받지 않았다.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으로 불안정했던 중국 북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용소에서는 다른 일본인 수용자들로부터 "너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고생한다"는 비난을 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8]
1955년 8월 25일, 고모토는 수용소에서 병사했으며, 향년 72세였다. 그의 유골은 같은 해 12월 18일 마이즈루항에 도착한 제12차 중공 귀국선(흥안환)을 통해 다른 일본인 억류자 및 유골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왔다.[27]
이듬해인 1956년 1월 31일, 도쿄의 아오야마 사이죠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는 구 일본 육군 관계자나 만주국 관계자 등이 대거 참석하여 성대하게 치러졌다. 친구 대표로 조사를 낭독한 오카와 슈메이는 고모토를 "심신 모두 이상할 정도로 유연하고 강인하며, 굽힐 줄 알면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다. 지극히 소심하면서도 매우 대담하고, 세밀하게 사려하고,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태연하게 단행한다"고 평가했다.[28]
한편, 그의 고향인 효고현 사요정 (구 미카즈키정)에서는 "나라를 위한 지혜와 과감한 결단력은 오랫동안 기록될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29] 또한, 지역 유지들에 의해 1965년 고모토의 생가 옆 명광사 경내에 현창비가 세워졌는데, 비문에는 "전범이 되어 수용소에서 병사"라고 새겨져 있다고 전해진다.[30]
참조
[1]
서적
[2]
논문
満鉄新理事三人男
[3]
백과사전
日本陸海軍総合事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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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5]
서적
町野武馬政治談話録音速記録
国立国会図書館
[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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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적
昭和・平成日本のテロ事件史
宝島社
[9]
서적
[10]
웹사이트
APAグループ特別対談 1928年の張作霖の爆殺事件はソ連の特務機関の犯行だ
https://megalodon.jp[...]
[11]
웹사이트
「満州某重大事件 張作霖を爆殺した関東軍のどす黒い目的」(関口 宏,保阪 正康) +αオンライン 講談社(2/3)
https://gendai.media[...]
講談社
2023-11-27
[12]
뉴스
牧野日記「張作霖爆殺事件」
1990-07-08
[13]
뉴스
張作霖爆死事件の下手人は関東軍
1946-07-03
[14]
뉴스
張作霖爆殺計画は河本参謀指揮
1946-07-06
[15]
뉴스
「関東軍司令官の意思くんだ」張作霖爆殺事件 「This is 読売」に掲載
1997-10-08
[16]
웹사이트
河本大作『私が張作霖を殺した』
http://yu77799.g1.xr[...]
ゆう
2024-09-20
[17]
웹사이트
張作霖爆殺事件
http://yu77799.g1.xr[...]
ゆう
2024-09-20
[18]
웹사이트
張作霖爆殺事件2
http://yu77799.g1.xr[...]
ゆう
2024-09-20
[19]
웹사이트
目撃!にっぽん 2020/08/14(金)14:05 の放送内容 ページ1
https://web.archive.[...]
株式会社ワイヤーアクション
2023-11-26
[20]
뉴스
[20世紀どんな時代だったのか]番外編 張作霖爆殺の首謀者
1998-08-24
[21]
웹사이트
河本大作 私が張作霖を殺した
https://www.aozora.g[...]
本の未来基金
2024-09-25
[22]
뉴스
邦人のみを身体検査
1928-06-08
[23]
뉴스
事件を日本の陰謀となし、奉天の日支間雲行険悪
1928-06-05
[24]
뉴스
現地保護を捨てて京奉線は出兵せず
1928-06-07
[25]
뉴스
日支にらみ合って険悪な奉天の空気
1928-06-06
[26]
논문
満鉄新理事三人男
[27]
뉴스
1955-12-18
[28]
서적
[29]
서적
歴史群像シリーズ 満州帝国
学習研究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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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張作霖事件・河本大佐の生地で孫が平和の絵本展 佐用町
http://www.asahi.com[...]
2010-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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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1904-05-24
[32]
간행물
官報
1905-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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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1910-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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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1915-11-01
[35]
간행물
官報
1920-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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