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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잇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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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바야시 잇사는 1763년 일본 나가노현에서 태어난 하이쿠 시인으로, 2만 편이 넘는 하이쿠를 남겼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재혼, 유산 상속 분쟁 등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하이쿠를 통해 삶의 희로애락을 표현했으며, 특히 자연과 인간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잇사는 "잇사조"라는 독자적인 하이쿠 스타일을 확립했으며, 그의 작품은 생생한 언어와 풍자적인 유머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생전에는 하이쿠계에서 널리 알려졌고, 사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아 일본을 대표하는 하이쿠 시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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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잇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고바야시 잇사 초상화
잇사의 초상 (무라마쓰 슌포 그림, 잇사 기념관, 신아노, 나가노, 일본)
본명고바야시 노부유키 (小林 信之)
가명잇사 (一茶)
출생일1763년 6월 15일
출생지시나노국 가시와바라 근처
사망일1828년 1월 5일
사망지시나노마치, 시나노 국
국적일본
직업시인
작품
주요 작품아버지의 종언 일기
칠번 일기
오라가 봄
활동
장르하이쿠

2. 생애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는 호레키 13년 5월 5일(1763년 6월 15일), 현재의 나가노현시나노마치 카시와바라에서 고바야시 노부유키(小林信之)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등록되었으며, 어린 시절 이름은 고바야시 야타로(小林弥太郎)였다.[2] 그는 시나노국 시나노마치의 농가 출신이었다.[5]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는 불행을 겪었다.[5]

그는 그를 끔찍이 아낀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지만, 5년 후 그의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그의 삶은 다시 한번 바뀌었다. 잇사의 이복 동생은 2년 후에 태어났다. 그가 14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잇사는 자기 집에서 소외감을 느끼며, 들판을 배회하는 것을 좋아하는 외롭고 우울한 아이가 되었다. 그의 태도는 그의 계모를 불쾌하게 했다.[6]

그는 1년 후 생계를 위해 아버지에 의해 에도(현재의 도쿄)로 보내졌다. 그 후 10년 동안의 그의 삶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이름은 니로쿠안(二六庵) 하이쿠 학교의 고바야시 치쿠아(小林竹阿)와 관련이 있었지만, 그들의 관계는 불분명하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일본 전역을 떠돌아다니며, (1801년에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 계모와 유산 상속 문제로 다퉜다. 그는 현재 잇사의 아버지의 마지막 날이라고 불리는 일기를 썼다.

수년간의 법적 다툼 끝에 잇사는 아버지의 재산의 절반에 대한 권리를 확보했다. 그는 49세[7]에 고향으로 돌아와 곧 기쿠(菊)라는 아내를 맞이했다. 짧은 행복의 시기 이후, 비극이 다시 찾아왔다. 부부의 첫 아이는 태어난 직후 사망했다. 딸 사토요(里世)는 2년 반이 채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잇사는 다음과 같은 하이쿠를 썼다 (루이스 매켄지의 번역):

:露の世は露の世ながらさりながら

:''Tsuyu no yo wa tsuyu no yo nagara sari nagara''

:이슬 세상 --

:이슬 세상,

:그렇지만, 그렇지만...[8]

잇사는 말년에 두 번 더 결혼했고, 그 모든 과정에서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세 번째 아이가 1820년에 사망했다. 그 후 기쿠는 병에 걸려 1823년에 사망했다. "Ikinokori ikinokoritaru samusa kana" (生き残り生き残りたる寒さかな) [살아남아, 모두 살아남아, 아, 추워!]는 잇사가 61세에 아내가 죽었을 때 쓰여졌다.[8]

그는 1828년 1월 5일에 고향에서 사망했다. 옛 일본 달력에 따르면 그는 분세이 시대 10년의 11월 19일에 사망했다. 분세이 10년은 대략 1827년에 해당하므로, 많은 자료에서 그의 사망 연도를 이 해로 표기한다.

2. 1. 출생과 가계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는 호레키 13년 5월 5일(1763년 6월 15일), 현재의 나가노현시나노마치 카시와바라에서 고바야시 노부유키(小林信之)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등록되었으며, 어린 시절 이름은 고바야시 야타로(小林弥太郎)였다.[2] 그는 시나노국 시나노마치의 농가 출신이었다.[5]

잇사의 선조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또는 에도 시대 초기에 카시와바라 땅으로 이주해 온 농민이었다고 생각된다.[42] 분로쿠 원년(1592년)에 이모카와(현 나가노현 이즈나정)에서 왔다는 설과[42] 겐나 2년(1616년)에 에치고의 나가모리 마을(현 니가타현 미나미우오누마시)에서 이주해 왔다는 두 가지 전승이 있다.[42] 확실한 기록은 메이와 8년(1771년)에 잇사의 큰아버지 야고에몬이 세운 묘비에 새겨진 엔포 9년(1681년)에 사망한 젠자에몬(잇사의 고조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45] 잇사의 증조부 야헤에는 분가였고,[46] 조부 야고베도 교호 18년(1733년)에 형 야고에몬으로부터 분가했다.[47] 당시 북 시나노 산간부는 형제간 유산을 균등 상속하는 관습이 있어, 야고베는 형과 경지를 거의 균등하게 분할했다.[48]

잇사가 살았던 시대의 가시와바라는 호수 약 150호, 인구 약 700명 정도였다.[32] 잇사 가족은 정토진종 신자였으며,[33] 가시와바라는 기타고쿠 가도의 숙소로, 덴마야시키 내의 집을 구입하여 농업 외에 물자 수송업도 경영했다.[34][35] 잇사의 아버지 야고베는 호레키 10년(1760년)에 덴마야시키 내 단독 주택을 구입하고, 니노쿠라 촌역인 미야자와 씨의 딸 쿠니와 결혼했다.[49]

잇사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 야고베는 31세였고, 어머니 쿠니는 생년 미상으로 당시 나이는 알 수 없다.[40] 잇사는 부모의 첫 아이이자 장남이었고, 가족으로는 할머니 카나가 있었다.[40] 잇사 가족의 생활 형편은 당시 가시와바라에서 중상위 정도였다.[41]

메이와 2년 8월 17일(1765년 10월 1일), 잇사가 3세 때 어머니 쿠니가 사망했다.[52] 어머니 사후 잇사의 양육은 주로 할머니 카나가 담당했다. 후년, 어머니를 잃은 잇사가 고독했던 소년 시절을 추억하며 지은 하이쿠가 "나와 함께 와서 놀자, 어미 없는 참새"이다.[52]

메이와 7년(1770년), 잇사 8세에 계모 하츠가 시집왔다.[53] 하츠는 기가 세고 일 잘하는 여성이었다.[53] 메이와 9년(1772년)에는 이복동생 센로쿠가 태어났다.[53] 할머니에게 귀여움을 받던 잇사였지만, 계모와의 관계는 험악했다.[54] 안에이 5년 8월 14일(1776년 9월 26일), 잇사가 14세 때 할머니 카나가 사망하자, 잇사와 계모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55] 결국 아버지 야고베는 잇사를 에도로 봉공 보내기로 했다.[55]

잇사는 에도 봉공을 나가기 전, 가시와바라에서 어느 정도의 교양을 익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56] 그러나 북 시나노의 동계에는 데라코야가 개설되어 읽고 쓰는 것을 배웠고, 잇사의 아버지와 이복 동생도 문장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잇사도 기본적인 읽고 쓰는 능력은 익혔을 것으로 추측된다.[56]

2. 2. 에도 봉공과 하이카이 입문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는 시나노국 시나노마치의 농가에서 고바야시 노부유키(小林信之)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이름은 고바야시 야타로(小林弥太郎)였다.[2] 3세 때 어머니를 여읜 후,[5]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으나, 아버지의 재혼으로 14세에 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계모와의 불화가 심해졌다.[6] 결국 1년 뒤인 1777년 봄, 15세의 잇사는 생계를 위해 아버지에 의해 에도(현재의 도쿄)로 보내졌다.[57][58] 아버지 야고베(弥五兵衛)는 잇사를 옆 마을 무레슈쿠(牟礼宿)까지 배웅하며 "독한 것은 먹지 마라, 남에게 나쁘게 보이지 마라, 빨리 돌아와 건강한 얼굴을 보여다오."라는 말을 남겼다.[59]

에도로 간 후 10년간 잇사의 행적은 묘연하다.[61] 다만, 1806년 우라가(浦賀)의 센푸쿠지(専福寺)에서 1782년에 사망한 향예하월수신녀(香誉夏月寿信女)의 묘소를 참배한 기록으로 보아, 20세 무렵 우라가 지역과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63]

에도에서 잇사는 바쇼의 친구 야마구치 소도(山口素堂)를 시조로 하는 하이카이 그룹 갓쇼(葛飾)파에 소속되어 하이카이를 접했다.[64] 가장 오래된 잇사의 하이쿠는 1787년 봄에 편찬된 시나노(信濃) 사쿠군(佐久郡) 우와카이세(上海瀬)(현・나가노현미나미사쿠군(南佐久郡)사쿠호 정(佐久穂町))에 거주하는 신카이 베이오(新海米翁)의 미수 기념 하집(賀集)인 마사고코(真砂古)에 실린 "이제부터 얼마나 더 많은 꽃이 피어날까"라는 구절이다.[65][66]

잇사는 갓쇼파의 종사(宗匠)였던 미조구치 소마루(溝口素丸)의 이빈안(渭浜庵)에서 집필(執筆)을 맡으며 하이카이를 배웠다.[67] 또한 갓쇼파 중진인 니로쿠안 치쿠아(二六庵竹阿)의 내제자로 들어가 그를 보살폈으며, 1790년 치쿠아가 사망할 때까지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68] 이 외에도 모리타 겐무(森田元夢), 하쿠오(白雄), 료타(蓼太) 등에게 사사했다.[69][70] 잇사는 만엽집(万葉集), 고금화가집(古今和歌集) 등 고전 와카를 공부하며 혼카도리(本歌取) 기법을 익혔다.[71] 28세 때 작품인 "3문이 아지랑이를 보았네, 망원경"은 잇사의 초기작 중 비교적 잘 알려진 작품이다.[72]

잇사(一茶)라는 하이호는 "한 잔의 차나 물거품과 같은 인생"을 나타내는 무상관에 기반한 명명으로 추정된다.[73][74]

2. 3. 하이카이 수행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는 시나노국 시나노마치(현재의 나가노현)의 농가에서 고바야시 노부유키(小林信之)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이름은 고바야시 야타로(小林弥太郎)였다.[2]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읜[5] 그는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으나, 아버지의 재혼과 할머니의 죽음으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6] 15세에 생계를 위해 에도(현재의 도쿄)로 보내진 후, 10년간의 행적은 불분명하나 니로쿠안(二六庵) 하이쿠 학교의 고바야시 치쿠아(小林竹阿)와 관련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6]

그 후 몇 년 동안 일본 전역을 떠돌아다니며 하이카이(俳諧) 수행을 하였고, 아버지의 사망(1801년) 후에는 계모와 유산 상속 문제로 다투기도 했다.[6] 그는 이 시기에 잇사의 아버지의 마지막 날이라는 일기를 썼다. 수년간의 법적 다툼 끝에 아버지 재산의 절반을 상속받은 잇사는 49세에[7]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했으나, 자식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비극을 겪었다.[7][8] 그는 "이슬 세상 -- 이슬 세상, 그렇지만, 그렇지만..."과 같은 슬픔을 표현한 하이쿠를 남겼다.[8]

7년간의 서국(西国) 하이카이 수행을 통해 실력을 쌓은 잇사는 간세이 12년(1800년)경 오사카, 교토의 하이진(俳人)들이 출판한 전국 하이진 반즈케(俳人番付)에 갓쇼(葛飾)파 중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비록 낮은 위치였지만, 간사이(関西) 발행원에 의해 에도(江戸) 하이진 중 유력자이자 갓쇼파의 대표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간세이 11년(1799년)에는 니로쿠안(二六庵)을 정식으로 계승했으나, 갓쇼파 내의 시기와 반발로 쿄와 원년(1801년)을 마지막으로 니로쿠안의 명칭은 사라진다. 쿄와 2년(1802년) 갓쇼파의 소조(宗匠)가 된 하쿠세키(白芹)가 잇사를 꺼려 칭호를 금지했다는 설이 있다.

잇사는 갓쇼파의 틀을 벗어나 나쓰메 나루미(夏目成美) 등과 교류하며 독자적인 하이쿠 세계를 구축했다. 간세이 11년(1799년) 11월,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오오카와 릿샤(大川立砂)가 급사하자, 잇사는 깊은 슬픔을 담은 구를 읊었다.

에도에 살던 잇사는 하이카이 시인으로서 행각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주로 보소반도 방면(가즈사, 시모사, 아와)을 순회했으며, 미토 가이도, 도네강 주변과 기사라즈시를 근거지로 한 두 개의 코스를 다녔다. 에도 후기 보소반도는 상품 경제와 지방 산업 발전으로 부농, 호상이 성장하고 문화가 발달하여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잇사는 하이카이를 즐기는 보소 방면 부유층을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순회하며 갓쇼파의 틀을 넘어선 교류를 했다.[143][144]

잇사에게 보소는 제2의 고향과 같았지만, '뿌리 없는 풀'과 같은 하이카이 행각에 의존하는 생활은 본의가 아니었다.[145] "저녁 제비, 나에게는 내일의 가망이 없네"라는 구절은 당시 잇사의 불안한 처지를 보여준다.[146]

당시 전문 하이카이 시인은 지방 순회와 츠키나미 쿠카이(月並句会) 운영으로 수입을 얻었다. 잇사는 분카(文化) 원년(1804년)부터 1년여간 '잇사엔 츠키나미(一茶園月並)'를 운영했으나, 사무 부담과 투고자 부족으로 실패하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보소 방면 순회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보소 방면에서 잇사가 자주 방문했던 하이진으로는 미토 가이도, 톤네가와 주변의 오오카와 토유, 아키모토 소쥬, 후루타 겟센, 모리야의 쓰루로 등이 있었다. 특히 아키모토 소쥬는 잇사의 이사를 돕고, 서로의 집을 자주 방문하는 등 각별한 사이였다.[150] 미토 가이도, 톤네가와 주변 하이카이 행각 시의 대표작으로 분카 원년(1804년) 작 "저녁달아, 흘러 남은 귀뚜라미"가 있다. 이는 약한 생물이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잇사의 주요 테마 중 하나가 되었다.[151][152]

기사라즈를 거점으로 한 카즈사, 아와 방면에서는 이시카와 우쥬, 후쓰의 토쿠아, 오리모토 카쿄, 코모리, 카나야의 스아키, 카츠야마의 다이고 요시아키 등이 있었다.[153] 여류 하이진 오리모토 카쿄는 잇사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사사했으며, 잇사엔 츠키나미의 단골 투고자이기도 했다.[154] 잇사와 카쿄 사이에 연애 관계가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카쿄가 훨씬 연상이었고 출가한 점[155][156] 등을 고려할 때 신빙성이 낮다. 분카 7년(1810년) 카쿄 사망 후, 잇사는 그녀를 어머니처럼 그리워하는 구를 읊었다.[157]

교와 시대부터 분카 시대에 걸쳐 잇사는 카츠시카 파보다 나츠메 세이비, 스즈키 미치히코, 타케베 소초, 칸사이 등 유명 하이쿠 시인들과 교류가 깊어졌다. 특히 나츠메 세이비 그룹에 소속되어 경제적, 하이단적 지원을 받았다.[158] 잇사는 세이비 집에 자주 체류하며 집안일을 돕고, 구회에 참석하며 다양한 정보를 교환하고 연예 감상과 벚꽃놀이를 즐겼다.[159] 잇표와는 작풍이 비슷하여 오래 교제했고, 잇사의 사후 그의 목상을 새겨 공양할 정도였다.[160]

키스이로 마츠이는 카츠시카 파 하이쿠 시인이자 잇사의 형님 격으로, 잇사는 그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으나 분카 10년 (1813년) 마츠이가 사망한 후에도 유족과의 교류는 이어졌다.[161] 잇사는 카츠시카 파의 작풍과 폐쇄성에 싫증을 느껴 점차 소원해졌고, 분카 연간에 파문당했다는 설도 있지만, 현존 자료로는 확인되지 않는다.[162] 잇사는 카츠시카 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하이쿠 풍을 확립해 갔다.

잇사는 하이쿠 시인 외에도 야나기사와 코슌과 친밀하게 지냈으나, 코슌은 분카 4년 (1807년) 4월에 사망했고, 잇사는 친구의 죽음에 크게 낙담하여 만가를 지어 애도했다.[163]

2. 4. 아버지의 죽음과 유산 상속 분쟁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는 시나노국 시나노마치의 농가에서 고바야시 노부유키(小林信之)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이름은 고바야시 야타로(小林弥太郎)였다.[2]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읜 후,[5]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으나, 아버지의 재혼과 14살 때 할머니의 죽음으로 힘든 유년 시절을 보냈다.[6] 15세에 생계를 위해 에도(현재의 도쿄)로 보내진 후,[6] 10년간의 행적은 불분명하나, 니로쿠안(二六庵) 하이쿠 학교의 고바야시 치쿠아(小林竹阿)와 관련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6]

그 후 일본 전역을 떠돌던 잇사는 1801년 아버지의 사망 후 계모 및 이복동생 센로쿠(仙六)와 유산 상속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6] 잇사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재산의 절반을 상속받을 권리가 있었으나,[106] 계모와 이복동생은 잇사가 집을 떠나 있는 동안 가문의 재산을 늘렸다는 이유로 유산 분할에 반대했다.[101][102][106]

잇사는 아버지의 죽음과 유산 상속 분쟁을 기록한 아버지의 종언 일기를 남겼는데,[107] 이는 친족 간의 갈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로 평가받는다.[108][109] 아버지 미고요헤이(弥五兵衛)는 잇사에게 재산을 균등하게 분배하라는 유언을 남겼는데,[111] 이는 기타시나노 지역의 균분 상속 관습과 잇사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111]

1801년 5월 21일(1801년 7월 1일) 아버지의 장례 후, 잇사는 계모와 동생에게 유산 분할을 요구했으나,[116] 구체적인 분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117] 1807년부터 잇사는 본격적으로 유산 상속 문제에 매달렸는데,[169] 이는 자신의 노쇠함,[169] 경제적 어려움,[169] 스승 치쿠아(竹阿)의 가르침[169] 등 복합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1808년 11월, 잇사와 동생은 "취극일찰지사(取極一札之事)"라는 문서를 통해 유산 분할에 합의했다.[184][185] 잇사는 약 3.64석의 논밭, 산림 3곳, 가옥 반 채 등을 상속받았다.[186] 그러나 이는 아버지 사망 시점의 재산 절반과 잇사 이향 시의 재산을 고려한 결과로, 잇사 4, 센로쿠 6의 비율로 분할되었다.[188]

1813년 1월, 잇사와 동생은 "숙담서부지사(熟談書附之事)"를 통해 최종 합의에 이르렀다.[190] 잇사는 잃어버린 이익에 대한 보상으로 11냥 2푼을 받았고,[214] 1814년에는 가옥 분할도 이루어졌다.[217] 이 과정에서 잇사는 가시와바라주쿠의 숙장 소송에 관여하며 지역 유력자들과 관계를 맺었고,[201] 사촌 도쿠자에몬(徳左衛門)의 지원을 받았다.[203]

잇사는 분세이 10년(1827년)에 고향에서 사망하였다.[8]

2. 5. 에도 생활과 갓카쓰파 이탈

고바야시 잇사(小林 一茶)는 시나노국 시나노마치 (현재의 나가노현)의 농가에서 고바야시 노부유키(小林 信之)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이름은 고바야시 야타로(小林 弥太郎)였다.[2]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읜 후,[5]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으나 할머니마저 14세 때 세상을 떠나자 계모와의 갈등을 겪었다.[6] 15세에 생계를 위해 에도(현재의 도쿄)로 보내진 후 10년간의 행적은 불분명하나, 니로쿠안(二六庵) 하이쿠 학교의 고바야시 치쿠아(小林 竹阿)와 관련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2]

간세이 12년(1800년)경, 잇사는 오사카와 교토의 하이진(俳人)들이 출판한 전국 하이진 순위표인 반즈케(番付)에서 갓쇼(葛飾)파 중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비록 낮은 순위였지만, 간사이(関西) 지역에서 발행되었음에도 에도(江戸) 하이진 중 유력 인사로 간주되었음을 보여준다. 잇사는 간세이 11년(1799년)에 니로쿠안을 정식으로 계승한 것으로 추정되나, 갓쇼파 내에서의 급부상으로 인해 시기와 반발을 샀다. 결국 쿄와 원년(1801년)을 마지막으로 니로쿠안이라는 명칭은 사라졌고, 잇사는 2년여 만에 칭호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2] 이는 쿄와 2년(1802년)에 갓쇼파의 소조(宗匠)가 된 하쿠세키(白芹)가 잇사를 견제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6년간의 서국(西国) 하이카이 수행을 통해 간사이의 자유로운 하이단(俳壇)을 경험한 잇사는 폐쇄적인 갓쇼파에 만족하지 못하고, 나쓰메 나루미(夏目成美) 등과 교류하며 독자적인 하이쿠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간세이 11년(1799년) 11월, 오랜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오오카와 릿샤(大川立砂)가 사망하자, 잇사는 깊은 애도의 마음을 담아 "화롯가여 어젯밤의 웃음이 작별 인사"(炉のはたやよべの笑ひが暇ごひ일본어)라는 구를 읊었다.[2] 이는 잇사 특유의 소박하고 솔직한 감정 표현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안에이 6년(1777년) 에도로 나온 후, 잇사는 하이카이 수행 여행을 제외하고는 에도에서 생활했다. 교와 3년(1803년)부터 잇사가 거주한 곳이 어느 정도 밝혀졌는데, 처음에는 혼조 5초메 오지마 아타고산(고토구 오지마 5초메)의 쇼치인(真言宗)에 세들어 살았다.[120] 그러나 분카 원년(1804년) 주지의 사망으로 료고쿠 근처의 혼조 아이오이초 5초메(스미다구 미도리초 1초메)로 이사하여 작은 단독 주택에서 생활했다.[121] 이 시기 잇사는 가난하고 고독한 삶 속에서도,

  • [122] (분카 원년(1804년))
  • [123] (분카 3년(1807년))


등의 하이쿠를 남겼다.

잇사는 시경, 역경 등 중국 고전과 겐지 이야기, 토사 일기 등 일본 고전문학을 탐독했다.[2] 문화 4년(1804년) 나츠메 세이비는 잇사의 이러한 학구열을 빗대어 "일본 기(紀)를 뒤적거리는 버릇이 있네"라고 비꼬기도 했다.[125] 잇사는 시경 305편 중 123편을 소재로 하이쿠를 지었으며,[127] 시경의 세계에 자신의 고독한 처지를 투영한 "매화 피었지만 꾀꼬리는 울지 않고 혼자 있네"[129] 등의 작품을 남겼다.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잇사가 살았던 일본은 아담 락스만, 니콜라이 레자노프 등 러시아 사절단의 내항으로 대외 관계가 부각되던 시기였다. 잇사는 이들의 내항을 소재로 하이쿠를 읊었으며,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저서를 읽고 국학 사상에 경도되어 "꽃들 모두 일본 혼 웅장하네"[138] (문화 4년(1807년))와 같은 일본 찬미의 구절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잇사는 단순한 애국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사회적 불안과 민중의 고통을 직시하며 "찬바람에 땅바닥에서 사는 길거리 노래꾼"[141] (문화 원년(1804년))과 같은 작품을 통해 낮은 시선에서 현실을 그려냈다.

교와 시대부터 분카 시대에 걸쳐 잇사는 나쓰메 세이비, 스즈키 미치히코, 타케베 소초 등 당대 유명 하이쿠 시인들과 교류했다. 특히 나츠메 세이비와는 깊은 관계를 맺고 그의 그룹에 소속되어 경제적, 하이단적 지원을 받았다.[158] 세이비 그룹에서 잇사는 구회 참석, 정보 교환, 연예 감상 등 다양한 활동에 참여했으며,[159] 니치렌 종 승려이자 하이쿠 시인이었던 잇표(一瓢)와도 친분을 쌓았다.[160] 키스이로 마츠이(其翠盧麦睡)라는 하이쿠 시인과도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분카 10년(1813년) 마츠이가 사망하면서 큰 슬픔을 겪었다.[161]

잇사는 카츠시카 파에서 점차 소원해졌는데, 이는 잇사에게 카츠시카 파의 작풍이 부족하게 느껴졌고, 폐쇄적인 체제에 싫증을 느꼈기 때문으로 보인다.[162] 결국 잇사는 카츠시카 파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하이쿠 풍을 확립해 나갔다.

2. 6. 귀향과 결혼

고바야시 잇사(小林 一茶)는 시나노국 시나노마치의 농가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으나, 아버지의 재혼 후 계모와의 불화로 15세에 에도(지금의 도쿄)로 떠났다.[2][5][6] 이후 10년간의 행적은 불분명하나, 니로쿠안(二六庵) 하이쿠 학교의 고바야시 치쿠아(小林 竹阿)와 관련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잇사는 일본 전역을 방랑하며 아버지의 유산 상속 문제로 계모와 갈등을 겪었고, '잇사의 아버지의 마지막 날'이라는 일기를 남겼다.[7]

교와 원년(1801년), 잇사의 아버지는 유산을 잇사와 동생에게 균등하게 상속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잇사는 아버지 사후 계모와 동생에게 유산의 균등 상속을 인정받고 에도로 돌아갔으며, 매년 가시와바라주쿠에 전마역 금을 납부하며 아버지 재산 상속 권리를 확보했다.[258] 분카 4년(1807년) 이후, 잇사는 아버지의 유산 상속 문제에 본격적으로 매달렸다. 잇사는 40대에 접어들면서 늙음에 대한 자각과 함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커졌고, 하이카이 시인으로서의 경제적 어려움과 스승 치쿠아의 가르침에 따라 유산 획득을 통해 안정된 생활을 추구했다.

잇사가 유산 상속 문제에 매달릴 무렵, 고향 가시와바라는 호쿠리쿠 가도의 숙장 마을로서 존폐 위기에 직면했다. 가와히가시 가도를 이용한 짐 수송 증가로 호쿠리쿠 가도의 짐 취급량이 감소하자, 가시와바라 숙 등 3개 숙장 마을은 에도 도중 봉행에게 가와히가시 가도를 이용한 짐 수송 금지를 호소했다. 이 소송은 효조쇼까지 이어지는 장기전이 되었고, 잇사는 에도에 머물며 고향의 소송을 지원하며 가시와바라 유력자들과의 관계를 구축하여 유산 상속 문제를 유리하게 이끌고자 했다.[201]

분카 5년(1808년) 2월, 잇사의 동생 센로쿠는 잇사를 할머니의 33주기에 초대하기 위해 에도를 방문했다. 3월에는 3숙 패소 판결이 내려졌으나, 가시와바라 숙은 곧 추소(追訴)를 했다. 잇사는 동생과의 유산 분할 협상과 함께 귀향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그는 기타시나노에서 하이카이 결사인 잇사 사중[一茶社中]을 결성하여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고자 했다.[218] 문화 5년(1808년) 귀향 시, 잇사는 나가노시 등지에 사중을 만들고, 나카노시의 오오토미 신사(大富神社)에 걸린 하이액(俳額)의 선자 중 한 명이 되면서 북 시나노의 하이쿠 애호가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195]

분카 7년(1810년)부터 잇사는 '7번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분세이 2년(1819년) '오라가 하루(おらが春)'에 이르는 시기는 잇사 특유의 경지에 도달한 '잇사조(一茶調)' 작품이 다수 창작된 시기였다.[195] 그는 당시 기성 하이쿠의 세계를 비판하며, 일상생활 속 희로애락을 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97] 분카 8년(1811년), 오사카에서 발간된 전국 하이카이시 번호 매김에서 잇사는 동방 최상단에 이름을 올리며 에도 하이단(俳壇)을 대표하는 하이인(俳人)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196]

잇사는 분카 7년(1810년) 류가시에 정착하여 기타시나노의 하이쿠 애호가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고향에서의 하이카이 결사 조직화에 힘썼다.[199] 그는 가시와바라 역의 소송에 협력하며 본진의 나카무라 로쿠자에몬 도시토시 등 유력자들과 관계를 맺고, 어머니 쪽 사촌인 도쿠자에몬의 지원을 받아 유산 문제 해결에 힘썼다.[203] 분카 9년(1812년) 11월 17일(1812년 12월 20일), 잇사는 귀향을 결심하고 에도를 떠나 고향 가시와바라로 향했다.[207]

잇사는 귀향 후에도 에도나 보소(房総) 방면에 가끔 나갔다. 분카 11년(1814년) 8월, 에도행의 주요 목적은 잇사의 에도 하이단 은퇴와 시나노 정주를 기념한 하이분집 '삼한인(三韓人)' 출판이었다.[219] 분카 14년(1817년) 이후, 잇사는 에도, 보소 방면에 가는 일 없이 시나노의 잇사가 되었다.[221] 그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많은 하이쿠 애호가들이 그를 찾아왔다.[222] 잇사 사중은 기타시나노를 넘어 에치고(越後)까지 확장되었고, 잇사는 문인들에게 대면 지도와 첨삭 지도를 병행하며, 하이쇼 출판을 지원했다.[224] 그는 문인들에게 기술론이나 고상한 예술론보다 '마음의 성실함'을 읊도록 가르쳤고, 잇사조를 모방하는 것을 경계했다.[239][241]

분카 10년(1813년) 1월 유산 문제 해결 후, 잇사는 기타시나노 각지의 문인들을 방문했으나, 6월부터 엉덩이 종기로 고생했다. 분카 11년(1814년) 2월, 동생 센로쿠와 가옥 분할을 실행하고, 4월 11일(1814년 5월 30일), 잇사는 28세의 기쿠와 결혼했다.[245] 잇사와 기쿠는 가시와바라 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농사에도 힘썼다.[247]

문화 13년 4월 14일(1815년 5월 10일), 아내 키쿠는 장남 센타로를 낳았지만, 센타로는 28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250] 분세이 원년 5월 4일(1818년 6월 7일), 딸 사토가 태어났으나, 분세이 2년(1819년) 6월 21일(1819년 8월 11일) 천연두로 사망했다. 잇사는 '오라가 하루(おらが春)'에 사토에 대한 슬픔을 기록했다.[254]

분세이 3년 10월 5일(1820년 11월 10일), 차남 이시타로가 태어났으나, 분세이 4년 1월 11일(1821년 2월 13일) 어머니 키쿠의 등에서 질식사했다.[256][257] 잇사는 아내를 비난하고, 전마역금 면제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이기적이고 격정적인 면모를 보였다.[261]

분세이 5년 3월 10일(1822년 5월 1일), 셋째 아들 킨자부로가 태어났으나, 아내 키쿠는 산후 조리가 좋지 않았고, 분세이 6년(1823년) 5월 12일(1823년 6월 20일)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268] 킨자부로 역시 분세이 6년 12월 21일(1824년 1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271] 잇사는 분세이 7년(1824년) 정월을 홀로 맞이하며, 에도 생활은 줄곧 혼자였고, 원래의 혼자로 돌아간 것에 불과하다는 체념의 경지를 읊었다.[273]

2. 7. 재혼 실패와 중풍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는 나가노현 시나노마치의 농가에서 고바야시 노부유키(小林信之)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이름은 고바야시 야타로(小林弥太郎)였다.[2]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읜 후,[5]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으나, 아버지의 재혼으로 이복동생이 태어나고 14세에 할머니마저 돌아가시면서 힘든 유년 시절을 보냈다.[6] 1년 후, 생계를 위해 에도(지금의 도쿄)로 보내졌고, 이후 10년간의 행적은 묘연하다. 니로쿠안(二六庵) 하이쿠 학교의 고바야시 치쿠아(小林竹阿)와 관련이 있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2] 이후 일본 전역을 방랑하며, 아버지의 유산 상속 문제로 계모와 갈등을 겪기도 했다.[2]

49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기쿠(菊)와 결혼하였으나, 첫 아이와 딸 사토요(里世)를 잇달아 잃는 비극을 겪었다.[7] 아내의 죽음 이후 잇사는 슬픔을 하이쿠로 표현하였다.[8]

9년 동안 함께한 아내 키쿠와 그 사이에 태어난 4명의 아이들을 모두 잃고, 1824년(분세이 7년) 정초를 홀로 맞이하여, "원래부터 자신은 혼자였다"라는 생각을 하이쿠로 지었다.[274] 그러나 곧 재혼을 희망하여 지인들에게 소개를 부탁하였고, 본가의 야이치(弥一)의 도움으로 이이야마 번 사사(士) 타나카 씨의 딸 유키(雪)와 재혼하게 되었다.[276] 유키는 38세로, 이전 결혼에 실패하고 친가로 돌아온 여성이었다.[277]

하지만 유키와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이웃과 친척 방문, 촌역인에 대한 인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잇사는 신혼임에도 불구하고 하이진들의 방문과 문인 순회로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278] 결국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키는 친가로 돌아갔고, 잇사는 이혼하게 되었다.[278] 이혼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잇사는 젠코지 마을에서 중풍이 재발하여 언어 장애를 겪게 되었지만,[279] 다행히 지적 능력은 유지되었다.[280]

1825년 63세의 잇사는 불편한 몸으로도 하이카이 스승으로서 활동하며, "개양귀비(芥子) 들고 싸움(喧嘩) 속을 지나가네", "쓸쓸함에 밥을 먹네 가을바람" 등의 대표작을 남겼다.[281] 가네코 토타(金子兜太)는 잇사의 "개양귀비 들고 싸움 속을 지나가네"라는 구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이카이라고 평가하며, 거칠고 비릿한 심리 연출과 젊음을 느낄 수 있다고 평했다.[282][283] 아베 칸이치(阿部完市)는 이 구에서 혼자이면서 대중의 일원이기도 한 잇사의 모습을 보았다.[284] 타카하 시게유키(高羽 茂愉)는 "쓸쓸함에 밥을 먹네 가을바람"이라는 구에서 처절한 쓸쓸함과 비릿함을 느낀다고 평가했다.[285][286][287]

1826년, 64세에 잇사는 다시 재혼 이야기가 오가게 되었다.[288]

2. 8. 사망

고바야시 잇사(小林 一茶)는 1827년 11월 19일 (\1828년 1월 5일) 고향 나가노현 시나노마치에서 사망했다.[297] 65세였다. 잇사는 그해 윤 6월 1일(1827년 7월 24일) 가시와바라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집이 전소되어, 토장(土蔵)에서 생활하고 있었다.[291] 화재 이후에도 하이카이(俳諧) 스승으로서의 활동은 계속했지만, 두 번의 중풍으로 신체적 불편함과 언어 장애를 겪었다.[292]

잇사는 죽기 직전까지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오치아이지(小千谷)의 간논지(観音寺)에 봉납할 하이액(俳額)을 선정하고, 토장의 지붕을 수리하는 등 쇠퇴를 느끼게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295][296] 11월 8일(1827년 12월 25일), 순회 지도를 마치고 카시와바라(柏原)의 토장으로 돌아왔으나, 11월 19일(1828년 1월 5일)에 급사했다.[297] 그의 유해는 다비에 부쳐졌고, 유골은 보리사(菩提寺)인 메이센지(明専寺)에 안치되었다.[297]

잇사는 말년에 두 번 더 결혼했다.[8] 1826년에는 이웃에서 발생한 스캔들을 계기로, 에치고 출신의 야오(やを)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289][290] 야오는 잇사 사후 1828년 4월에 딸 야타(やた)를 낳았다.[298] 야타는 잇사가 죽은 후 태어난 유일한 자식으로, 잇사의 염원이었던 가문의 존속을 이루었다.[300]

잇사의 자녀 일람표
이름어머니생년월일(구력)사망일(구력)사망 당시의 나이(세는 나이)
센타로(장남)기쿠1816년 4월 14일1816년 5월 11일1세
사토(장녀)기쿠1818년 5월 4일1819년 6월 21일2세
이시타로(차남)기쿠1820년 10월 5일1820년 11월 11일1세
킨사부로(삼남)기쿠1822년 3월 10일1823년 12월 21일2세
야타(차녀)야오1828년 4월1874년 9월 13일47세



3. 작품 세계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는 2만 편이 넘는 하이쿠를 창작하여 오늘날까지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9] 그의 작품은 대중적이었지만, 그는 심각한 금전적 어려움을 겪었다.[9] 그의 시는 방언과 구어체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식물과 하등 동물을 주제로 한 많은 구절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9] 잇사는 달팽이에 관한 하이쿠 54편, 두꺼비에 관한 하이쿠 15편, 개구리에 관한 하이쿠 200편, 반딧불이에 관한 하이쿠 약 230편, 모기에 관한 하이쿠 150편 이상, 파리에 관한 하이쿠 90편, 벼룩에 관한 하이쿠 100편 이상, 매미에 관한 하이쿠 약 90편 등, 이러한 생물들에 관한 하이쿠를 모두 합하면 약 1,000편에 달한다.[9] 이는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약 2,000편)보다 훨씬 많은 양이다.[10]

잇사의 하이쿠는 때로는 섬세했지만, 그의 불경함과 풍자적인 유머로 가장 두드러진다.[11] 로버트 하스는 잇사의 시를 번역하며 그의 이러한 특징을 보여주었다. 잇사는 '강렬한 개성과 생생한 언어[와] 충격적으로 열정적인 시'로 '일반적으로 정통 바쇼 전통에 가장 두드러진 이단자로 여겨진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시와 삶은 하나였고...[&] 시는 그의 마음의 일기'였기에, '잇사가 19세기 하이카이 시인들 중 바쇼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말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13]

잇사는 하이분(俳文, 하이쿠가 통합된 산문)인 ''오라가 하루/おらが春일본어''(おらが春 "나의 봄")과 ''시치반 닛키''(七番日記 "일곱 번째 일기")를 저술했으며, 250편 이상의 렌쿠(連句, 공동 연시)에 참여했다.[14] 그는 그림에도 능했으며, 그의 그림은 하이쿠와 함께 어우러져 독특한 예술 세계를 보여준다. "하이쿠의 불교는 스케치의 선(禪)과 대조를 이룬다".[15] 그의 그림은 "센가이와 유사하다...잇사의 스케치는 특정 유형의 경험을 단순화하는 하이쿠의 개념에 따라, 극도로 축약된 점이 높이 평가된다."[16]

잇사의 작품은 그의 사후에도 널리 알려져, J. D. 샐린저의 소설 ''프래니와 주이''(1961)에 그의 하이쿠가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아르카디와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 ''경사면의 달팽이''(1966–68년 출판)는 잇사의 하이쿠에서 제목을 따왔다.

잇사의 작품 수는 21,200구에 달하며,[356] 이는 바쇼(약 1,000구)나 요사 부손(약 3,000구)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357] 그러나 그의 작품 중에는 유사한 작품이 많고,[359] 모든 작품이 걸작은 아니라는 평가도 있다.[362] 오기와라 세이센스이(荻原井泉水)는 "생애에 2만 구에 가까운 구를 써 남겼지만, 그 대부분이 시시한 작품으로……사막의 모래 속에서 보석이 발견되는 듯한 구가 있다"고 평했다.[363]

잇사의 다작은 그의 "반사형" 구작 스타일에 기인한다는 견해가 있다.[364] 그는 즉흥적으로 구를 짓는 경향이 있었지만,[365] 서간 등을 통해 보면 고전 등을 통해 사물을 흡수하고 선배, 동시대 하이쿠 작가들의 작품을 배우는 등 제대로 된 구작 스타일을 취했다는 반론도 있다.[367]

잇사는 독특한 표현 방법과 소재 선택으로 "잇사조(一茶調)"라는 독자적인 하이쿠 풍을 확립했다.[368] 그는 의성어, 의태어, 의음어(오노마토페)를 적극적으로 사용했으며,[372] 속어와 똥, 오줌 등 비속한 소재도 사용했다.[374] 의인법을 자주 사용했으며,[375] 금전을 읊은 구도 많다.[376] 당시 하이쿠에서는 금전을 읊지 않는 관습이 있었지만, 잇사는 이러한 관습에 얽매이지 않았다.[376]

잇사는 계절어를 결여한 무계절 구나 5·7·5를 크게 무너뜨린 파조 구는 적게 썼다.[378] 그러나 그는 당시 하이단의 주류였던 계절어 취미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안이한 계절어 취미에 반발하는 듯한 구를 읊었다.[379]

잇사는 작은 동물과 식물을 소재로 한 시를 많이 썼다.[381] 그는 정토진종의 가르침과 동물 애호가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으며,[381] 벼룩이나 모기, 파리 등 혐오감을 주는 소재를 사용하기도 했다.[382] 그는 동식물의 모습을 통해 지나친 인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384] 특히 고양이를 좋아하여 300수가 넘는 고양이 시를 읊었다.[386]

잇사는 자신의 생활고, 고독, 여행 등 자신의 경애구(境涯句)를 짓곤 했다.[389] 오기하라 세이센스이는 잇사가 아내를 잃은 후 읊은 시를 평하며,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 그 자체도 훌륭하게 하이쿠가 될 수 있음을 실증한 최초의 하이쿠 시인이라고 평가했다.[390]

잇사는 북신농(北信濃)의 농민 출신으로, 생활고를 겪으며 살아왔다.[392] 그는 도시나 농촌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구에 담았으며,[392] 서민의 일상생활을 읊은 구도 개척했다.[394]

잇사는 일본을 몹시 좋아했으며,[395] 일본을 칭송하는 구를 만년까지 읊었다.[397] 그는 사회 불안이 증대되던 시대에 "세상 바로잡기"를 읊기도 했으며,[399] 다이묘 등 지배자를 비판하는 구절을 읊기도 했다.[401] 그러나 잇사는 기본적으로 평균적인 서민 감각의 소유자였으며, 권력에 대한 반감을 사상화하거나 행동화하지는 않았다.[402]

3. 1. 주요 특징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는 2만 편이 넘는 하이쿠를 창작하여 오늘날까지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9] 그의 작품은 대중적이었지만, 그는 심각한 금전적 어려움을 겪었다.[9] 그의 시는 방언과 구어체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식물과 하등 동물을 주제로 한 많은 구절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9] 잇사는 달팽이에 관한 하이쿠 54편, 두꺼비에 관한 하이쿠 15편, 개구리에 관한 하이쿠 200편, 반딧불이에 관한 하이쿠 약 230편, 모기에 관한 하이쿠 150편 이상, 파리에 관한 하이쿠 90편, 벼룩에 관한 하이쿠 100편 이상, 매미에 관한 하이쿠 약 90편 등, 이러한 생물들에 관한 하이쿠를 모두 합하면 약 1,000편에 달한다.[9] 이는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약 2,000편)보다 훨씬 많은 양이다.[10]

잇사의 하이쿠는 때로는 섬세했지만, 그의 불경함과 풍자적인 유머로 가장 두드러진다.[11] 로버트 하스는 잇사의 시를 번역하며 그의 이러한 특징을 보여주었다. 잇사는 '강렬한 개성과 생생한 언어[와] 충격적으로 열정적인 시'로 '일반적으로 정통 바쇼 전통에 가장 두드러진 이단자로 여겨진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시와 삶은 하나였고...[&] 시는 그의 마음의 일기'였기에, '잇사가 19세기 하이카이 시인들 중 바쇼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말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13]

잇사는 하이분(俳文, 하이쿠가 통합된 산문)인 ''오라가 하루/おらが春일본어''(おらが春 "나의 봄")과 ''시치반 닛키''(七番日記 "일곱 번째 일기")를 저술했으며, 250편 이상의 렌쿠(連句, 공동 연시)에 참여했다.[14] 그는 그림에도 능했으며, 그의 그림은 하이쿠와 함께 어우러져 독특한 예술 세계를 보여준다. "하이쿠의 불교는 스케치의 선(禪)과 대조를 이룬다".[15] 그의 그림은 "센가이와 유사하다...잇사의 스케치는 특정 유형의 경험을 단순화하는 하이쿠의 개념에 따라, 극도로 축약된 점이 높이 평가된다."[16]

잇사의 작품은 그의 사후에도 널리 알려져, J. D. 샐린저의 소설 ''프래니와 주이''(1961)에 그의 하이쿠가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아르카디와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 ''경사면의 달팽이''(1966–68년 출판)는 잇사의 하이쿠에서 제목을 따왔다.

잇사의 작품 수는 21,200구에 달하며,[356] 이는 바쇼(약 1,000구)나 요사 부손(약 3,000구)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357] 그러나 그의 작품 중에는 유사한 작품이 많고,[359] 모든 작품이 걸작은 아니라는 평가도 있다.[362] 오기와라 세이센스이(荻原井泉水)는 "생애에 2만 구에 가까운 구를 써 남겼지만, 그 대부분이 시시한 작품으로……사막의 모래 속에서 보석이 발견되는 듯한 구가 있다"고 평했다.[363]

잇사의 다작은 그의 "반사형" 구작 스타일에 기인한다는 견해가 있다.[364] 그는 즉흥적으로 구를 짓는 경향이 있었지만,[365] 서간 등을 통해 보면 고전 등을 통해 사물을 흡수하고 선배, 동시대 하이쿠 작가들의 작품을 배우는 등 제대로 된 구작 스타일을 취했다는 반론도 있다.[367]

잇사는 독특한 표현 방법과 소재 선택으로 "잇사조(一茶調)"라는 독자적인 하이쿠 풍을 확립했다.[368] 그는 의성어, 의태어, 의음어(오노마토페)를 적극적으로 사용했으며,[372] 속어와 똥, 오줌 등 비속한 소재도 사용했다.[374] 의인법을 자주 사용했으며,[375] 금전을 읊은 구도 많다.[376] 당시 하이쿠에서는 금전을 읊지 않는 관습이 있었지만, 잇사는 이러한 관습에 얽매이지 않았다.[376]

잇사는 계절어를 결여한 무계절 구나 5·7·5를 크게 무너뜨린 파조 구는 적게 썼다.[378] 그러나 그는 당시 하이단의 주류였던 계절어 취미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안이한 계절어 취미에 반발하는 듯한 구를 읊었다.[379]

잇사는 작은 동물과 식물을 소재로 한 시를 많이 썼다.[381] 그는 정토진종의 가르침과 동물 애호가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으며,[381] 벼룩이나 모기, 파리 등 혐오감을 주는 소재를 사용하기도 했다.[382] 그는 동식물의 모습을 통해 지나친 인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384] 특히 고양이를 좋아하여 300수가 넘는 고양이 시를 읊었다.[386]

잇사는 자신의 생활고, 고독, 여행 등 자신의 경애구(境涯句)를 짓곤 했다.[389] 오기하라 세이센스이는 잇사가 아내를 잃은 후 읊은 시를 평하며,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 그 자체도 훌륭하게 하이쿠가 될 수 있음을 실증한 최초의 하이쿠 시인이라고 평가했다.[390]

잇사는 북신농(北信濃)의 농민 출신으로, 생활고를 겪으며 살아왔다.[392] 그는 도시나 농촌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구에 담았으며,[392] 서민의 일상생활을 읊은 구도 개척했다.[394]

잇사는 일본을 몹시 좋아했으며,[395] 일본을 칭송하는 구를 만년까지 읊었다.[397] 그는 사회 불안이 증대되던 시대에 "세상 바로잡기"를 읊기도 했으며,[399] 다이묘 등 지배자를 비판하는 구절을 읊기도 했다.[401] 그러나 잇사는 기본적으로 평균적인 서민 감각의 소유자였으며, 권력에 대한 반감을 사상화하거나 행동화하지는 않았다.[402]

3. 2. 대표작

고바야시 잇사는 2만 편이 넘는 하이쿠를 창작하여 오늘날까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9] 그의 작품은 방언과 구어체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식물과 하등 동물을 주제로 한 많은 구절"을 포함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9] 잇사는 달팽이(54편), 두꺼비(15편), 개구리(200편), 반딧불이(약 230편), 모기(150편 이상), 파리(90편), 벼룩(100편 이상), 매미(약 90편) 등 다양한 생물에 대한 하이쿠를 썼는데, 이를 모두 합하면 약 1,000편에 달한다.[9] 이는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총 2,000편)보다 훨씬 많은 양이다.[10]

잇사의 하이쿠는 때로는 섬세하지만, 불경함과 풍자적인 유머로 유명하다.[11] 예를 들어 로버트 하스의 번역 시 중에는 "새해 첫날— / 모든 것이 만개했네! / 나는 그저 그런 기분이다."와 같은 작품이 있다.[11] 잇사는 '강렬한 개성과 생생한 언어[와] 충격적으로 열정적인 시'로 인해 '일반적으로 정통 바쇼 전통에 가장 두드러진 이단자로 여겨진다'.[12] 그러나 '그에게 시와 삶은 하나였고...[&] 시는 그의 마음의 일기'였기에, '잇사가 19세기 하이카이 시인들 중 바쇼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말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13]

잇사는 하이쿠 외에도 하이분(하이쿠가 통합된 산문)인 ''나의 봄''과 ''시치반 닛키'' (일곱 번째 일기)를 썼으며, 250편 이상의 렌쿠(공동 연시)에 참여했다.[14] 또한 그림에도 능하여 하이쿠와 함께 곁들인 작품을 남겼는데, 그의 그림은 "센가이와 유사하다...잇사의 스케치는 특정 유형의 경험을 단순화하는 하이쿠의 개념에 따라, 극도로 축약된 점이 높이 평가된다."[16]

R.H. 블라이스가 번역한 잇사의 하이쿠 "아 달팽이 / 후지산에 오르라, / 하지만 천천히, 천천히!"는 J. D. 샐린저의 소설 ''프래니와 주이''에 등장한다. 아르카디와 보리스 스트루가츠키의 소설 ''경사면의 달팽이''는 이 하이쿠의 러시아어 번역을 표제로 사용했다.

잇사의 주요 작품으로는 ''여행에 버리다''(1795년), ''안녕, 삿갓''(1798년), ''삼한인''(1814년), ''아버지의 종언 일기''(1801년) 등이 있다. 이 외에도 ''간세 구첩'', ''서국기행'', ''간세 3년 기행'', ''구사쓰도의 기'', ''7번 일기'', ''옅은 푸른 하늘'', ''8번 일기'', ''나의 봄''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4. 잇사조(一茶調)

잇사는 2만 편이 넘는 하이쿠를 썼으며, 오늘날까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대중적이었지만 그는 심각한 금전적 불안에 시달렸다.[9] 그의 시는 방언과 구어체를 자유롭게 사용하며, "식물과 하등 동물을 주제로 한 많은 구절을 포함"하고 있다.[9] 잇사는 달팽이에 관한 하이쿠 54편, 두꺼비에 관한 하이쿠 15편, 개구리에 관한 하이쿠 200편, 반딧불이에 관한 하이쿠 약 230편, 모기에 관한 하이쿠 150편 이상, 파리에 관한 하이쿠 90편, 벼룩에 관한 하이쿠 100편 이상, 매미에 관한 하이쿠 약 90편을 썼으며, 이런 생물들에 관한 하이쿠를 모두 합하면 약 1,000편에 달한다.[9] 반면, 바쇼의 시는 상대적으로 적어 총 2,000편 정도이다.[10] 잇사의 하이쿠는 때로는 섬세했지만, 그의 불경함과 풍자적인 유머로 가장 두드러진다.[11]

잇사는 '강렬한 개성과 생생한 언어[와] 충격적으로 열정적인 시'로 '일반적으로 정통 바쇼 전통에 가장 두드러진 이단자로 여겨진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시와 삶은 하나였고...[&] 시는 그의 마음의 일기'였기에, '잇사가 19세기 하이카이 시인들 중 바쇼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말할 수 있다'는 주장은 적어도 타당하다.[13]

잇사의 작품에는 ''하이분''(하이쿠가 통합된 산문)인 ''오라가 하루/おらが春일본어'' (おらが春일본어 "나의 봄")과 ''시치반 닛키/七番日記일본어'' (七番日記일본어 "일곱 번째 일기")가 있으며, 그는 250편 이상의 렌쿠(공동 연시)에 참여했다.[14]

잇사는 또한 그의 그림으로도 유명하며, 일반적으로 하이쿠를 동반했다. "하이쿠의 불교는 스케치의 선과 대조를 이룬다".[15] 그의 접근 방식은 "센가이와 유사하다...잇사의 스케치는 특정 유형의 경험을 단순화하는 하이쿠의 개념에 따라, 극도로 축약된 점이 높이 평가된다."[16]

R.H. 블라이스가 번역한 잇사의 하이쿠 중 하나가 J. D. 샐린저의 1961년 소설 ''프래니와 주이''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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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달팽이
  • 후지산에 오르라,
  • 하지만 천천히, 천천히!


('''' 蝸牛そろそろ登れ富士の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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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는, 러시아어 번역으로, 아르카디와 보리스 스트루가츠키의 소설 ''경사면의 달팽이''(1966–68년 출판)의 표제로 사용되었으며, 소설 제목도 제공했다.

잇사는 독특한 표현 방법과 소재 선택으로 "잇사조(一茶調)"라고 불릴 정도로 독자적인 하이쿠 풍을 밀고 나갔다는 인상이 강하지만, 젊은 시절에는 다양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주로 전통적인, 바쇼의 영향이 짙은 구를 읊었다.[368] 교와(享和) 연간 이후 잇사는 그 독특한 표현 방법을 의욕적으로 개척해 나갔으며, "7번 일기(七番日記)"의 집필이 시작된 분카(文化) 연간 후기 이후 "잇사조"는 확립되었다.[369]

잇사의 구의 표현 방법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의성어, 의태어, 의음어, 이른바 오노마토페의 다용이다. 잇사는 교와(享和) 연간이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오노마토페를 구에 사용하고 있다. 분카(文化) 연간 이후 자주 사용하게 되었으며, 분카(文化) 7년(1810년)의 7번 일기 시작 이후 자유자재로 사용하게 되었다.[372]

속어와, 똥, 오줌 등과 같은 비속한 소재도 잇사는 종종 사용했다.

의인법은, 잇사의 구 안에서 가장 자주 보이는 표현이다. 잇사의 의인법은 작은 동물, 식물, 심지어 구름이나 별과 같은 무생물까지 대상을 하고 있다. 역시 분카(文化) 연간부터 그 사용이 눈에 띄게 되었으며, 역시 7번 일기 이후, 활발하게 사용하게 되었다.[375]

잇사의 구 안에는 금전을 읊은 구가 많은 것도 특징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잇사가 살았던 에도 시대 후기, 기본적으로 하이카이는 금전을 읊지 않는 관습이 있었다. 잇사는 그러한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금전을 적극적으로 구에 읊어 넣었다.[376]

오노마토페와 속어, 의인법의 다용, 당시 하이쿠에는 사용하지 않는 관습이었던 금전을 읊는 등, 당시 하이쿠에서는 대담하다고 할 수 있는 표현 방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잇사였지만, 계절어를 결여한 무계절 구나, 5·7·5를 크게 무너뜨린 파조(破調) 구의 수는 적다. 이처럼 하이쿠의 전통적인 규칙에 충실한 면도 있었다.[378]

그러나 잇사는 당시 하이단(俳壇)의 주류였던 계절어에 기초하여 구를 읊는, 이른바 계절어 취미를 따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안이한 계절어 취미에 반발하는 듯한 구를 종종 읊었다.

5. 평가와 영향

앞서 언급했듯이 생존 당시 잇사는 하이쿠계에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사후에도 인지도와 인기는 떨어지지 않았다. 잇사는 화정기를 대표하는 하이쿠인으로서의 평가를 확립했다. 그러나 잇사의 작품 스타일은 당시 하이쿠계에 널리 퍼지지 않았고, 잇사 사중의 영향력도 문인에 그쳐 다른 북 시나노의 유력 하이카이 결사만큼의 영향력도 남기지 못했다. 이처럼 에도 시대의 잇사의 하이쿠계에서의 영향력은 제한적인 것에 머물렀다고 할 수 있다.

메이지 후기 이후, 잇사의 구는 하이쿠계의 틀을 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게 되었다. 그리고 마쓰오 바쇼, 요사 부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에도 시대를 대표하는 하이쿠인이라는 평가도 굳어졌다. 그러나 근대 하이쿠의 주류가 객관 사생에서 정밀하고 정적인 화조풍영으로 이행해 가는 가운데, 하이쿠계에서는 잇사의 구는 이단시되었고, 일부를 제외하고 그 영향력은 작았다. 근대 하이쿠 안에서 잇사의 영향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무라카미 키조이다. 키조는 생활고와 신체적 장애에 시달리면서 하이단(俳壇)의 주류와는 크게 다른 뛰어난 경애구를 계속 읊었다. 잇사의 구와 키조의 구에는 유사점이 많이 지적되어, 잇사의 작품 스타일이 키조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잇사에게는 높은 인지도가 있고, 더 나아가 바쇼, 부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뛰어난 개성, 독자적인 하이풍이 인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쇼, 부손에 비해 하이단, 문학사에 미친 영향력은 작았다.

에도 시대를 대표하는 하이쿠 시인으로 "바쇼, 부손, 잇사"라는 세 명의 이름을 거론하는 관습이 있다. 이 기술은 많은 문학서 등에서 보이며, 잇사가 바쇼, 부손과 함께 에도 시대를 대표하는 하이쿠 시인 중 한 명이라는 평가는 정착되었다. 물론 다른 뛰어난 하이쿠 시인도 존재했지만, 이 세 명은 다른 하이쿠 시인과 비교하여 뛰어난 개성, 독창적인 작풍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429]

야마시타 이쓰미는 에도 시대 하이쿠 시인 3 거두인 바쇼, 부손, 잇사의 구(句)의 특징을 각각 한 글자로 표현하면, 바쇼는 "도(道)", 부손은 "예(藝)", 그리고 잇사는 "생(生)"이라고 했다[430]。 츠다 소키치, 가토 슌손, 가네코 도타 등, 지금까지 많은 잇사에 대한 논자들은 생활, 생명, 생명감 등 잇사의 구에서 보이는 "생"과 관련된 사항에 주목해 왔다[431]。 잇사에 대해 비판적인 야마모토 겐키치조차 잇사의 구의 생명적인 강함은 비할 데가 없다고 평가했다。

또한 잇사에게 하이쿠는 인생 그 자체였다는 지적도 보인다. 오기와라 이센스이는 잇사를 자나 깨나 하이쿠를 짓지 않고는 못 배기는 "뼈 속까지 하이쿠 시인"이라고 평가했고, 마루야마 가즈히코 또한 잇사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의식, 감각을 스쳐가는 모든 것을 되는 대로 구로 읊었고, 하이카이(俳諧)에 일념으로 살아갔다고 한다. 잇사의 작품과 "생"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432]。 또한 나쓰메 소세키는 "바쇼는 자연으로 가고, 잇사는 사람으로 간다"라고 평했다[433]

잇사의 구의 생명력의 근원으로서 많은 논자가 지적하는 것은 농민 기질, 흙에 대한 의식, 타고난 야생이다. 실제로 잇사가 손에 땀을 쥐고 밭을 갈았던 것은 에도로 봉사하기 전인 15세 이전의 일이었지만, 마지막까지 농민 기질, 흙에 대한 의식을 잃지 않았다. 구리야마 리이치는 잇사를 관통하는 숙명적인 흙에 대한 애착을 지적하고, 폐쇄감이 강해지는 사회 속에서 현저한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하이단(俳壇)에 타고난 야생, 토착적인 근성으로 맞섰다고 평가했다[434]。 카토 슌손은 잇사 안에 살아 숨 쉬던 농민 기질이야말로 잇사의 구의 생명력의 근원이라고 평가했고[435], 마루야마 카즈히코도 또한 잇사는 대중화의 반면, 저속화와 타락이 현저해지고 있던 하이단의 모습에 반발하여, 타고난 억센 야생, 끊임없는 인간생활 전반에 관한 관심을 원동력으로 강렬한 자아, 인간의 생생한 육성을 구에 반영하려 시도하여 성공했다고 한다[436]。 그리고 미즈카미 쓰토무는 잇사의 삶의 방식은 고향의 흙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토속의 혼을 품으면서, 신음하며 읊어온 현세 추구의 수라의 사람으로서 구를 읊어왔다고 한다[437]

가네코 도타는 잇사가 읊는 분뇨, 방귀와 같은 주제의 구에서 혐오감이 느껴지지 않고 자연스러운 점에서도, 역시 흙과 살아있는 생물을 상대하는 생업인 농민 혼을 발견하면서, 거기에 더하여 살아있는 모든 것과 공존, 공감하고, 일체화해 가는 애니미즘적인 것을 보고 있다[438]。 잇사의 구에는 만물의 정령에게 말을 거는 성격이 있다는 지적도 있으며[439], 와타나베 히로시는 잇사의 구의 세계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공생적인 세계관에 주목하고 있다[440]

잇사의 하이쿠가 사는 것을 주제로 하고 있다고 해도, 그럴듯한 이치나 인생론 등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시정에 사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있는 그대로의 희로애락을 구로 읊어갔다. 이른바 잇사는 생활 속에서 문학을 만들어냈으며, 카토 슌손은 잇사의 작품에는 생생한 인간으로부터 방사되는 듯한 체취가 있으며, 그것은 단련된 것에서 풍겨 나오는 생명감이 아니라, 거리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며 생활하는 인간끼리 맡는 듯한 생의 감촉이 있다고 한다[441]。 마루야마 카즈히코는 불행이 끊이지 않았던 생애의 영향으로 잇사의 작품에는 특이한 왜곡이 있지만, 이것은 사는 슬픔에 깊이 뿌리내린 왜곡이며, 인간 세상의 깊이에 닿는 무언가가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442]

그리고 야시로 세이이치는 잇사의 구에 대해 고고한 문학가의 작품이 아니라, 바로 옆에 사는 세속적인 일반 서민과 마찬가지로, 땅을 기어가는 사람의 것이라고 한 다음

라고 평가했다[443]

5. 1. 당대의 평가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는 생전에도 하이쿠 시인으로서 널리 알려졌고, 사후에도 그 인기는 계속되었다.[324][325] 화정기(化政期)를 대표하는 하이쿠 시인으로 평가받았으나, 그의 독특한 작품 스타일은 당시 하이쿠계에 널리 퍼지지는 않았다.[326] 잇사의 사후, 그의 암호였던 "해회사(俳諧寺)"는 후계자가 없었고[324], 그의 문인 중에서 해회사가 된 사람도 없었다. 또한 잇사의 작풍을 잇는 문인도 나타나지 않아, 동시대 및 다음 세대에 미친 영향은 제한적이었다.[325]

잇사는 당시 매너리즘에 빠진 하이단(俳壇)에 반발하여 인간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작품을 추구했다.[326] 그의 작품은 개성이 넘쳤지만, 개인적인 경험과 성격에 기반한 것이었기 때문에 널리 수용되지는 못했다.[326] 잇사와 친분이 두터웠던 나쓰메 세이미(夏目成美)는 그의 작품을 "활구(活句)"라 칭찬하며 높이 평가했지만, 일반적으로는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운 구를 읊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327]

메이지 시대 후기, 잇사의 작품은 하이쿠계를 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요사 부손(与謝蕪村)과 함께 에도 시대를 대표하는 하이쿠 시인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 하이쿠의 주류가 객관적 사생(寫生)으로 변화하면서, 잇사의 작품은 이단시되었고, 무라카미 키조(村上鬼城)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전문적인 하이쿠 시인들 사이에서는 잇사의 작품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가토 슈손(加藤楸邨)은 잇사의 작품이 속정(俗情)에 호소하며 시인으로서 저급하다는 견해를 보였고,[420][421] 야마모토 겐키치(山本健吉)는 잇사의 작품에 사적인 감정이 지나치게 포함되어 있다고 지적했다.[422]

잇사는 오노마토페(의성어, 의태어)를 많이 사용했는데, 이것이 작품의 여운과 시적 내용을 부족하게 만든다는 비판도 있었다.[424] 구리야마 리이치(栗山理一)는 잇사가 섬세한 감각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성급하게 작품을 완성하는 경향이 있어 감성의 기복이 심하게 드러난다고 지적했다.[426] 또한, 잇사의 작품에는 다양한 요소가 혼재되어 통일성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었다.[427][428]

5. 2. 메이지 시대 이후의 재평가



메이지 중기까지 잇사에 대한 평가는 에도 시대에 출판된 분세이판, 가에이판의 "잇사 홋쿠슈", "오라가 하루"에 의해 형성되었다.[321] 특히 "오라가 하루"는 잇사의 이름을 전국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321] 잇사는 사후에도 하이쿠 애호가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그의 서예는 고가로 거래되었다.[323] 이는 카세이 시대를 대표하는 하이진으로서 잇사가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323]

1848년 잇사를 사숙했던 이마이 보쿠호에 의해 "가에이판 잇사 홋쿠슈"가 출판되었는데, 이는 사후 20년 이상 지난 시점에서 이례적인 일이었다.[317] 이 판본은 에도에서도 판매되어 널리 퍼진 것으로 보인다.[317] 1852년에는 나카노의 시라이 가즈유키가 "오라가 하루"를 출판했다.[318] 시라이는 잇사의 문인이었던 야마기시 바이지가 소유하고 있던 잇사 필의 "오라가 하루"를 양도받아 출판에 착수했고, 권두문에 이어진 구절인 "메데타사모 치우이 나리오라가 하루(めでたさもちう位也おらが春)"에서 "오라가 하루"라고 명명했다.[318] "오라가 하루" 초판의 발문은 하이진 세이안 세이바가 집필했는데, 그는 잇사 작품의 본질을 정확하게 표현했다.[320]

1854년에는 에도의 간다 신세키초의 서점, 스하라야 겐스케가 "오라가 하루"를 재간행하면서 "잇사 오 하이카이 문집"이라는 제목으로 판매했다.[321] 시라이 가즈유키의 "오라가 하루" 판목은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소실될 때까지 발행자와 출판사를 바꾸면서 계속 사용되었다.[322]

메이지 전반에는 에도 시대 하이쿠 작가의 계보를 잇는 구파 하이쿠 작가들이 잇사를 평가하고 소개했다.[330] 1883년 미모리 간오는 자신이 주재하는 하이쿠 잡지에서 잇사를 높이 평가했고, 1893년에는 자서에서 잇사의 평전을 소개하고 그 하이쿠 풍을 높이 평가했다.[330] 1886년경에는 이하라테이가 잇사 구집 발행을 계획하고, 스승 우쓰미 료다이에게 서문을 의뢰하기도 했다.[330]

1892년경부터 하이쿠 개혁의 기수였던 마사오카 시키가 잇사에 주목하기 시작했다.[331] 시키는 신문 일본 지상에 연재했던 "달사서옥 하이화"에서 잇사를 소개했고, 1897년 간행된 "하이인 잇사"에서는 잇사의 구의 특징을 해학, 풍자, 자애의 3요소로 꼽으며, 특히 해학은 잇사의 독무대라고 칭찬했다.[331] 시키의 문인 사토 코로쿠는 스승 시키가 잇사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매력에 대해 가르침을 주었다고 회상했다.[331] "하이인 잇사"는 잇사의 전기와 작품을 전국적으로 알린 최초의 서적이었으며, 잇사가 마쓰오 바쇼, 요사 부손과 함께 에도 시대를 대표하는 하이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332]

마사오카 시키의 잇사 평가와 함께 잇사의 고향인 나가노현에서도 재평가 움직임이 시작되었다.[333] 1893년 하이진 고다이라 셋진이 잇사의 고향 가시와바라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잇사 자료 발굴이 진행되었고, 1902년에는 잇사 현창을 목적으로 하는 "옥성회"가 발족했다.[333] 1908년에는 나카무라 로쿠로가 "잇사 동호회"를 결성했다.[333] 1907년에는 잇사 보리사 묘센지에서 잇사 오 추도 80주년 법요가 거행되었고, 1910년에는 가시와바라 주민들이 묘센지 뒤편 고마루야마 공원에 잇사를 기리는 "잇사 우츠시도"를 세웠다.[334]

1900년 시노노이 마이니치 신문 지상에 "하이카이지 잇사"가 연재되었고, 1910년에는 잇사 동호회가 이를 단행본으로 간행했다.[335] "하이카이지 잇사"는 최초의 본격적인 잇사 연구 성과로, 잇사의 전모를 널리 소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336] 이 책에서 소쿠마쓰 로코는 잇사를 "웃음 속에 눈물을 머금은 표일한 시인"으로 묘사했으며, 국가주의자로서의 면모에도 주목했다.[338]

메이지 말기 이후 자연주의 문학이 유행하면서 "아버지의 종언 일기", "7번 일기"가 출판되어 잇사는 일본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339] 소마 교후는 잇사를 번뇌를 가진 인간으로 평가하는 논설을 발표했고, 오기하라 이세스이는 자유율 하이쿠 시인으로서 잇사를 높이 평가하고 많은 평론을 집필했다.[339]

1926년 잇사 100주기를 맞아 각지에서 다양한 행사와 출판이 이루어졌고, 고향 나가노에서는 젠코지(善光寺)와 카시와바라에서 성대한 추도 행사가 거행되었다.[340] 1927년 쇼와 2년, 카츠미네 신푸는 "일본 하이서 대계" 시리즈에서 분카 분세이 시대를 "잇사 시대"라고 명명하고, 잇사를 바쇼, 부손과 나란히 칭하며 "잇사 일대집"을 간행했다.[341] 츠다 소키치 또한 에도 시대 평민 문학 속에서 잇사를 높이 평가했다.[342]

1918년부터 1932년까지 사용된 제3기 국정 교과서에 잇사의 구절이 채택된 것은 잇사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343]

"참새 새끼 비켜라 비켜라 말 지나간다", "아, 때리지 마라 파리가 손을 비비고 발을 한다", "파리한 개구리 지지 마라 잇사가 여기 있노라" 등의 구절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343]

5. 3. 현대의 평가

고바야시 잇사는 생전부터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사후에도 인지도와 인기가 높았다. 화정기를 대표하는 하이쿠 시인으로서의 평가가 확립되었으나, 에도 시대 하이쿠계에서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429] 메이지 후기 이후에는 하이쿠계를 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마쓰오 바쇼, 요사 부손과 함께 에도 시대를 대표하는 하이쿠 시인으로 평가받는다.[429]

야마시타 이쓰미는 바쇼, 부손, 잇사의 특징을 각각 "도(道)", "예(藝)", "생(生)"으로 표현했다.[430] 츠다 소키치, 카토 슌손, 카네코 토타 등은 잇사의 작품에서 보이는 "생"에 주목했다.[431] 나쓰메 소세키는 "바쇼는 자연으로 가고, 잇사는 사람으로 간다"라고 평했다.[433]

잇사 하이쿠의 생명력의 근원은 농민 기질, 흙에 대한 의식, 타고난 야생으로 평가된다.[434] 쿠리야마 리이치는 잇사가 폐쇄적인 하이단에 맞섰다고 평가했고,[434] 카토 슌손은 잇사의 농민 기질이 작품 생명력의 근원이라고 평가했다.[435] 미즈카미 쓰토무는 잇사의 삶이 고향의 흙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평가했다.[437]

카네코 토타는 잇사의 작품에서 분뇨, 방귀와 같은 주제에서도 혐오감이 느껴지지 않는 점을 농민 혼과 연결 지으며, 애니미즘적인 면모를 보았다.[438] 와타나베 히로시는 잇사의 작품에서 모든 생명과의 공생적인 세계관에 주목했다.[440]

잇사는 거창한 이론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읊었다. 카토 슌손은 잇사의 작품에 생생한 인간의 체취가 있다고 평가했다.[441] 마루야마 가즈히코는 불행했던 잇사의 생애가 작품에 특이한 왜곡을 가져왔지만, 이는 삶의 슬픔에 뿌리내린 왜곡이며 인간 세상의 깊이에 닿는 무언가가 있다고 평가했다.[442]

야시로 세이이치는 잇사를 "인생을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육성으로 구를 읊은 범용(凡庸)하고 비범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443] 근대 하이쿠에서 잇사의 영향을 받은 인물로는 무라카미 키조가 있다.

6. 잇사 연구

고바야시 잇사의 연구는 쇼와 31년(1956년) 오자와 요시오가 제창한 시대 구분을 바탕으로 연구자들 사이에서 계승되어 왔다. 연구사의 시기는 다음 5기로 구분된다.

# 잇사 사후부터 메이지 20년대 무렵까지

# 메이지 20년대 무렵부터 다이쇼

# 다이쇼 초부터 쇼와 초

# 쇼와 10년대

# 종전 이후

잇사가 죽은 직후, 잇사의 문인들과 남동생 센로쿠는 구비 건립과 구집 편찬을 추진했다.[307] 구비 건립은 센로쿠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307] 문인들은 잇사의 작품 중 "松影に寝てくふ六十よ州かな(송영에 누워 자는 육십여 주)"라는 도쿠가와 가문의 평화를 칭송하는 구를 선택했다.[308][309] 이 구비는 1829년에 건립되었으며, 1876년 도로 확장 공사로 스와 신사 경내로 옮겨졌다.[312]

잇사의 유고는 유족과 문인들의 손에 남겨졌고, 14명의 유력 문인들은 공동으로 구집 "잇사 핫쿠슈"를 1829년에 출판했다.[313] 그러나 잇사의 만년 애제자였던 야마기시 바이진은 "잇사 핫쿠슈" 편찬에 참여하지 못하고, 독자적으로 "잇사 핫쿠슈 속편"을 완성했지만 출판되지는 못했다.[315] 문인 니시하라 분코는 1827년 "잇사 오 종언기"를 집필하여 잇사 연구의 시작을 알렸다.[316]

쇼와 시대 전반기, 잇사의 고향 가시와바라에서는 잇사 현창 사업이 진행되었다. 1928년 "잇사옹 유물 보존회"가 결성되었고, 1933년에는 잇사 종언의 흙 창고가 나가노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42년에는 이토 마사오의 "고바야시 잇사"가 간행되어 잇사를 농민 시인으로 정의하고, 잇사 연구의 에포크 메이킹으로 평가받았다.

전후 잇사 연구는 하이카이지 잇사 보존회, 하이쿠 잡지 "시노", 시나노 교육회가 주도했다.[348] "시노"는 신자료 발굴에 기여했고,[349] 시나노 교육회는 1978년 "잇사 전집"을 간행했다.[350] 다양한 형태의 잇사 연구가 진행되었고,[351] 후지사와 슈헤이, 이노우에 히사시, 타나베 세이코 등은 잇사를 소재로 한 소설을 발표했다.[352] 잇사상은 시대와 사회 배경에 따라 변화했지만, 전전에 제창된 잇사상의 연장선상에 있었다.[353]

향후 잇사 연구는 작품 연구 심화, 렌쿠 연구, 하이단에서의 위치 확인, 학제적 연구를 통한 실상 재검토 등이 과제로 제시되고 있다.[354][355]

종전 직후, 가시와바라에서는 잇사 현창의 기운이 높아져 1946년 "하이카이 사찰 잇사 보존회"가 설립되었다.[449] 매년 잇사 기 행사가 열리고,[449] 1951년 잇사 125주기 기념 사업으로 "잇사 축제"가 출판되었다.[451] 1960년 잇사 기념관이 개관했고,[455] 2003년 신관이 증축되었다.[457] 잇사 기념관은 잇사 관련 자료를 보존, 전시하고 잇사 연구 사업을 하고 있다.[457]

7. 한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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