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 다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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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바 다케시는 일본의 전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로, 유격수, 2루수 포지션으로 활약했으며, 감독으로서 여러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선수 시절에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활약하며 도루왕을 차지했고, 1970년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하여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은퇴 후에는 난카이 호크스 코치를 거쳐 1975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 감독으로 취임하여 팀을 창단 첫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이후 3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1987년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감독을 역임한 후,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으며, 2008년부터 도쿄 국제대학 야구부 감독을 맡기도 했다. 1999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고바 다케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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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고바 다케시의 모습
본명고바 다케시
출생일1936년 4월 22일
사망일2021년 11월 12일 (85세)
출생지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니시구
신장174
체중70
포지션내야수/감독
타석우타
투구우투
프로 입단 연도1958년
첫 출장1958년 4월 5일
최종 출장1971년
선수 경력
소속팀히로시마 카프 (1958–1969)
난카이 호크스 (1970)
통산 타율.252
홈런44
안타334
도루263
수상2× 센트럴 리그 도루왕 (1964, 1968)
감독 및 코치 경력
소속팀히로시마 카프 (1975–1985)
다이요 웨일스 (1987–1989)
구라시키 피치 재크스
도쿄 국제대학
주요 업적일본 시리즈 우승 (1979, 1980, 1984)
기타 정보
명예의 전당 헌액1999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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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수 경력

1958년 히로시마에 입단하여 프로 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입단 초기 등번호는 29번이었으나, 1959년에 1번으로 변경되었다. 유격수로 뛰며 1968년까지 주전으로 활약했다. 1959년 규정 타석을 채우며 타율 0.229를 기록했고, 1960년 0.267, 1961년 0.286으로 리그 5위에 오르는 등 꾸준히 성장했다.

1963년 올스타전에 처음 출전하여 3차전 MVP를 수상했다. 시즌 중 나가시마 시게오와 수위타자 경쟁을 펼쳤으나, 시마다 겐타로가 던진 슈트에 턱을 맞아 부상, 타율 0.339로 2위에 머물렀다. 이 부상으로 몸쪽 공에 대한 공포심이 생겨 타격 부진을 겪었지만, 도루에서 활로를 찾았다.

1964년 사구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57도루로 도루왕을 차지했다. 1965년부터 2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고, 1968년 39도루로 두 번째 도루왕을 획득했다. 이후 주루에 대한 관심은 감독으로서 전략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70년 네모토 리쿠오 감독과 불화, 노무라 가쓰야 선수 겸 감독의 요청으로 난카이 호크스로 트레이드되었다. 1971년까지 난카이에서 뛰었으나, 백 텀블링 훈련 중 부상으로 인한 채찍질 증후군과 후유증으로 손가락 마비까지 겪는 등 어려움을 겪었고, 1971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2.1. 프로 입단 전

고마치 국민학교 출신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 태평양 전쟁 종전을 맞이했다. 잿더미가 된 곳을 정리한 곳에서 지역 아이들과 야구를 한 것을 계기로 야구를 시작했다. 제제코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53년 3루수로서 봄의 선발에 출장했다. 1년 선배인 에이스 야마모토 칸스케(후에 한큐)의 호투로 준준결승에 진출했지만, 가타오카 히로오가 있던 나니와 상업고등학교에 연장 13회 끝에 0-1로 패했다. 같은 해 여름 고시엔 현 예선에서 준우승, 서큐슈 대회 준결승에 진출했지만 사가고에 패했다. 3학년 때인 1954년 여름에도 서큐슈 대회에서 도스 공업고등학교에 완봉패를 당해 고시엔 진출은 좌절되었다.

1955년 센슈 대학에 진학했으나, 같은 해 여름 방학 때 모교인 제제코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후배들에게 플레이를 보여주던 중 우연히 방문한 닛테쓰 후타세의 코이토 아유무 감독의 눈에 띄어 닛테쓰 광업 입사를 권유받았다. 집안 형편을 고려하여 센슈 대학을 중퇴하고 닛테쓰 광업에 입사, 닛테쓰 후타세에서 1956년부터 도시 대항에 2년 연속 출장했다. 1957년 대회 1회전에서 가네카 가네카론을 상대로 닛테쓰 후타세의 무라카미 슌스케 투수가 대회 사상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1957년 12월에 동료인 에토 신이치의 입단 교섭을 위해 방문한 히로시마 카프의 시라이시 가쓰미 감독에게 코이토 감독은 고바를 추천했고, 고바는 히로시마에 입단하게 되었다. 도에이 플라이어즈로부터도 제안이 있었지만, 선수층이 얇아 출전 기회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어 코이토 감독은 히로시마를 선택했다고 한다. 고바는 계약 당일 허리 삐끗을 하는 바람에 계약에 참석하지 못했고, 형이 대리로 계약을 맺었다.

2.2.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

1958년 히로시마에 정식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입단 초기에는 유격수로 뛰었다. 1963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나가시마 시게오와 수위타자 경쟁을 펼쳤으나, 10월 13일 다이요 웨일스전에서 시마다 겐타로가 던진 공(슈트)에 턱을 맞아 부상당했다. 턱뼈가 두 동강 날 정도로 큰 부상이었지만, 병상에서 "나는 구장에 간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팬들을 위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타석에 선다"라고 말할 정도로 야구에 대한 열정이 강했다. 나가시마 시게오로부터 "부상에서 완쾌하라"는 내용의 전보를 받기도 했다. 결국 2리 차이로 나가시마에게 수위타자 타이틀을 내줬지만, 베스트 나인(유격수 부문)에 선정되었다.

이후 타격에 지장을 느껴 기동력을 중심으로 플레이 스타일을 바꿨고, 1964년과 1968년에 도루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는 훗날 감독 시절 팀 운영의 초석이 되었다.

1958년 입단 당시 등번호는 29번이었으나, 1959년에 1번으로 변경되었다. 1968년까지 주전 유격수로 활약했다. 1959년에는 규정 타석을 채우며 타율 .229를 기록했고, 1960년에는 .267, 1961년에는 .286으로 리그 5위에 오르는 등 꾸준히 성장했다.

1963년에는 올스타전에 처음 출전하여 3차전에서 MVP를 수상했다. 올스타전 이후 타격감이 좋아져 8월 중순부터 약 1개월 동안 74타수 34안타(타율 .459)를 기록하며 타율을 3할 3푼대로 끌어올렸다. 나가시마 시게오와 치열한 수위타자 경쟁을 펼쳤으나, 부상으로 인해 아쉽게 2위에 머물렀다.

1964년에는 사구 후유증으로 타격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도루 능력을 활용하여 자기 최다인 57도루를 기록하며 도루왕을 차지했다. 1965년부터는 2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고, 1968년에도 39도루로 두 번째 도루왕을 획득했다.

2.3. 난카이 호크스 시절

1970년, 네모토 리쿠오 감독과의 불화로 출전 기회를 잃어가던 중, 노무라 가쓰야 선수 겸 감독의 요청을 받아 구니사다 야스히로와의 맞트레이드로 조노 가쓰히로와 함께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했다. 처음에는 "히로시마를 떠나느니 그만두겠다"라고 생각했지만, 후카미 야스히로 1군 타격 코치의 "다른 팀의 야구를 공부하는 것은 플러스가 된다"라는 조언을 듣고 이적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캠프 전 나카즈토구장에서 백 텀블링 훈련을 하다가 채찍질 증후군으로 목을 다쳐, 캠프에서 제대로 훈련하지 못한 채 개막을 맞이하게 되었다. 채찍질 증후군의 후유증으로 손가락에 마비가 남아, 땅볼을 잡아도 글러브에서 공을 놓치는 일이 있었지만, 이를 숨기고 계속 플레이하여 83경기에 출전, 타율 .274를 기록했다. 1971년에는 후유증이 호전되었지만 48경기 출전에 그쳤고, 이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난카이에서 플레이한 2년간은 만족스러운 결과를 남길 수 없었다고 한다.

3. 지도자 경력

고바 다케시는 2년간 호크스 코치, 1년간 카프 코치로 일했다. 1975년 당시 감독이었던 조 루츠가 시즌 중 팀을 떠나면서 카프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팀 창단 26년 만에 첫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그는 그 해에 행복의 상징인 파랑새가 그의 새장에 날아드는 등 신비로운 사건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1979년, 1980년, 1984년에는 팀을 다시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했다. 1985년 시즌을 끝으로 팀을 떠났으며, 2009년 기준으로 카프를 일본 챔피언으로 이끈 유일한 감독이다.

감독으로서 고바 다케시는 주루 플레이를 특히 강조했다. 그가 감독을 맡았던 11년 동안, 팀의 한 시즌 도루 수는 11번이나 100개를 넘었다. 또한, 제한된 선수 수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내야수와 외야수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유틸리티 선수"를 훈련시켰다. 게다가 팀 소유주에게 당시 일본 야구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실내 훈련장을 건설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야구 지휘에서도 종반 3, 4점 차로 승리가 확실해져도 더욱 점수를 내는 등 엄격한 모습을 보였다. 기누가사 사치오가 미야케 히데후미가 가지고 있던 연속 풀이닝 출장 기록(700경기)에 22경기 차로 접근했을 때, 극심한 부진을 이유로 기누가사를 선발 멤버에서 제외하거나, 1979년 일본 시리즈 7차전 9회말, 구원 에이스 에가와 스구루가 무사 만루의 위기를 맞았을 때 기타벳푸나 이케타니에게 투구 연습을 시작하게 하는 등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 지휘가 특징이었다.

다만, 타이틀 경쟁에서 온정을 베푼 적도 있다. 야마모토 코지(히로시마)와 이노우에 히로아키(주니치)가 수위 타자 타이틀을 다투었던 1975년 히로시마 vs 주니치 최종전에서 9모 차이로 타율 1위인 야마모토를 결장시키고, 고의 사구(고의 4구)를 예상한 주니치 측은 이노우에를 선발에서 제외한 뒤 만루 상황에서 대타로 기용했으나, 고바는 이노우에에게 고의 사구를 지시하여 야마모토가 타이틀을 획득하게 했다.

고바 다케시의 좌우명은 "견디고 승리한다"이다. 같은 제목의 저서도 있다. 하지만 다이요 감독 시절에는 성적이 좋지 않아 "승리할 때까지 견딘다"고 조롱받기도 했다.

선수들의 중매인을 10명 이상 맡았다. 처음에는 이케타니 코지로를 제외하고는 "선수에게 정이 든다는, 주변에서 생각할 것"을 이유로 거절했지만, 1985년 다카하시 요시히코, 가와구치 가즈히사, 나가시마 기요유키 등 주력 선수들의 결혼 러시 때는 "감독밖에 없다"는 부탁을 받고 거의 모든 선수의 중매를 맡았다.

고바 다케시의 동생 고바 후쿠오는 히로시마현 키타가와 공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고 있었다. 그의 제자 중에는 이하라 하루키가 있었다.

고바의 히로시마 현역 시절 동료이자 1975년, 1984년 일본 시리즈에서 맞붙었던 우에다 도시하루는 고바에 대해 "엄격함과 상냥함을 가진 좋은 감독"이라고 평가했다.

3.1. 난카이 호크스 코치 시절

난카이 호크스 코치 시절, 고바는 언론과 팬들에게는 온화했지만 선수들에게는 철권 제재를 서슴지 않는 엄격한 지도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야마모토 코지는 "젊은 선수들에게는 철권 제재가 자주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다쓰카와 미쓰오 역시 고바에게 발로 차인 경험을 이야기하며, "감독도 목숨을 걸고 하는 거잖아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야구 지휘에서도 종반 3, 4점 차로 승리가 확실해도 더욱 점수를 내는 등 엄격함을 보였다. 벤치 끝에서 닌자처럼 몸을 반쯤 내밀었다 숨기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는 야쿠 미쓰루, 이시이 히사이치나 가와이 준지등이 그린 야구 만화의 소재로 자주 사용되기도 했다. 고바는 그곳이 그라운드 전체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라고 설명했다.

난카이 코치 시절, 공격 시 3루 코치는 돈 브레이저, 1루 코치는 고바가 맡았다. 이러한 인연으로 고바는 1978년 난카이를 떠난 브레이저를 히로시마에 코치로 초빙하여 1년간 헤드 코치를 맡기기도 했다.

3.2. 히로시마 도요 카프 감독 시절

1974년 모리나가 가쓰야의 요청으로 히로시마의 수비 코치로 복귀했다. 이듬해 1975년에는 15경기 만에 감독직에서 사임한 조 루츠 감독의 뒤를 이어 5월에 감독으로 취임, 시즌 동안 무서운 기세로 10월 15일 요미우리전(고라쿠엔 구장)에서 구단 창단 이후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에도 기동력을 살린 치밀한 야구를 전개하면서 1979년, 1980년, 1984년에 팀을 3차례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1985년 시즌 종료 후 히로시마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감독으로서 그는 주루 플레이를 특히 강조했다. 그가 감독을 맡았던 11년 동안, 팀의 한 시즌 도루 수는 11번이나 100개를 넘었다. 또한 제한된 선수 수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내야수와 외야수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유틸리티 선수"를 훈련시켰다. 게다가 팀 소유주에게 당시 일본 야구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실내 훈련장을 건설해 줄 것을 요청하여 선수들이 비가 오는 날에도 훈련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그가 카프를 이끌었던 11년 동안 카프는 9번이나 1, 2, 3위에 해당하는 최상위권에 들었고, 4번의 리그 우승, 3번의 일본 챔피언을 차지했다.

선수들에게는 철권 제재를 서슴지 않는 엄격한 지도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야마모토 코지는 "나와 기누가사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바 감독은 그라운드에서는 성격이 급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었고 우리보다 후배들에게는 꽤 화를 냈다. 요시히코나 야마자키 등 젊은 선수들에게는 철권 제재가 자주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무언의 격려라고 할까."라고 회고했다.

벤치 끝에서 닌자처럼 몸을 반쯤 내밀었다 숨기는 버릇이 유명하다. 고바 본인이 말하길, 그곳이 가장 그라운드 전체를 잘 볼 수 있다고 한다.

히로시마 감독 시절에는 승리의 징크스를 위해, 히로시마 시민 구장 근처의 찻집 "마리나"(2012년 폐점)에서 달걀 카레를 먹었다.

3.3.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감독 시절

1987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의 성과를 높이 평가받아 5년 계약으로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의 감독직을 맡았다. 그러나 팀을 상위권으로 이끌지 못하고 1989년 시즌 말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감독으로서 873승은 일본 프로 야구 역대 14위에 해당한다.

다이요 감독 시절에는 성적 부진에 시달려, 감독 3년 차인 1989년에 퇴임하게 된다. 같은 해 시즌 최종전을 승리로 마치고, 다이요 선수들에게 헹가래를 받게 되자 고바는 "그건 이기고 나서 하는 거야"라며 헹가래를 거부했다. 이 3년간에 대해, 다카하시 요시히코오노 유타카는 고바가 목표로 하는 야구와 다이요의 야구가 맞지 않았던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으며, 다카기 유타카는 외부 감독이므로 조심했던 것이 아니냐고 회상하고 있다. 과거 고바 밑에서 선수로 뛰었던 사이토 아키오에 따르면, 만났을 때 "다이요에서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일이 할 수 없었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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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순위경기승리패전무승부승률
홈런

타율

방어율
나이
1987년쇼와 62년다이요5위13056686.452113.2594.2651세
1988년쇼와 63년4위13059674.46885.2763.9352세
1989년헤이세이 원년6위13047803.37074.2604.0753세

4. 은퇴 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감독에서 물러난 후 야구 해설가가 되었으며, 국제 소년 야구 협회 일본(International Boys Baseball Association Japan) 회장을 맡아 일본만큼 야구가 인기 없는 국가에서 야구를 보급하기 위해 노력했다. 1999년에는 일본 야구계에 뚜렷한 공헌을 한 인물을 기리는 야구 명예의 전당 회원이 되었다.

2008년 2월부터는 도쿄 국제 대학 야구부 감독을 맡고 있다. 61년 만에 전직 프로 감독이 대학 야구팀 감독을 맡게 된 것이어서 그의 대학 감독 취임은 스포츠 신문뿐만 아니라 일부 일반 신문에서도 보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