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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요시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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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카하시 요시히코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롯데 오리온스, 한신 타이거스에서 활약했다. 홋카이도 출신으로, 조사이 고등학교 시절 투수와 4번 타자로 활약했고, 1974년 드래프트에서 히로시마에 3순위로 지명되어 입단했다. 스위치 히터로 전향하여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히로시마의 1번 타자로 활약하며, 1979년 일본 시리즈 MVP를 수상했고, 33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세웠다. 3차례 도루왕을 차지하며 1980년대 히로시마 황금기를 이끌었으며,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 코치, 유튜버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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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요시히코 - [인물]에 관한 문서
선수 정보
이름다카하시 요시히코
원어 이름高橋 慶彦
로마자 표기Yoshihiko Takahashi
출생일1957년 3월 13일
출생지홋카이도 아시베쓰시
신장176cm
체중79kg
포지션유격수, 외야수
투구우투
타석양타
프로 입단 정보
드래프트 연도1974년
드래프트 순위3순위
첫 출장1976년 4월 7일
최종 출장1992년 5월 19일
선수 경력
선수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5~1989)
롯데 오리온스 (1990)
한신 타이거스 (1991~1992)
감독 및 코치 경력
감독 및 코치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5~1997)
지바 롯데 마린스 (2004~2012)
오릭스 버펄로스 (2016)
城西大学附属城西高等学校
타격 성적
타율.280
홈런163
타점604
도루477
수상 내역
수상1979년 일본 시리즈 MVP
유튜브 정보
채널 이름よしひこチャンネル (요시히코 채널)
채널 URLよしひこチャンネル
활동 시작일2019년 6월 25일
장르야구
구독자 수15.5만 명
조회수94,079,262회
이미지 정보
지바 롯데 마린스 코치 시절의 다카하시 요시히코
지바 롯데 마린스 코치 시절

2. 선수 경력

1957년 홋카이도 출신으로, 조사이 고등학교 시절 투수 겸 4번 타자로 활약하며 1974년 여름 고시엔에 출전했다. 같은 해 드래프트 회의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3순위로 지명되어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입단 초기에는 유격수로 뛰었으나 곧 외야수로 전향했고, 고바 다케시 감독의 지시로 스위치히터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1977년부터 다시 유격수로 기회를 얻어 1978년 주전 자리를 확보했으며, 1979년에는 '''33경기 연속 안타'''라는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을 세우고 첫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하는 등 맹활약했다.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걸쳐 히로시마의 황금기를 이끈 핵심 선수 중 한 명으로, 빠른 발을 앞세운 赤ヘル機動力野球|아카헤루 기동력 야구일본어를 상징하는 선수로 평가받았다. 통산 세 차례 도루왕과 다섯 차례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으며, 1979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MVP를 수상하며 팀의 일본 시리즈 제패에 크게 기여했다.

1980년대 후반 들어 주력 저하와 구단과의 갈등 등으로 입지가 좁아졌고, 1989년 시즌 종료 후 타카사와 히데아키·미즈카미 요시오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롯데 오리온스로 이적했다. 롯데에서 한 시즌을 보낸 뒤 1990년 시즌 종료 후 다시 한신 타이거스로 트레이드되었으며, 1992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2. 1. 프로 입단 전

1957년, 홋카이도 아시베쓰시에 있는 구 미쓰이 광산의 탄광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게이키는 미야기현 다마즈쿠리군 나루코정 (현 오사키시) 출신으로 실업팀 크로스컨트리 스키 선수였으며[3], 현역 시절에는 전일본 스키 선수권 대회에서 입상 경력도 있다. 게이키가 시바우라 공업대학 스키부 감독으로 취임함에 따라 4세 때 도쿄도 기요세시로 이사했다.

조사이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에이스이자 4번 타자로 활약했다. 1학년 때에는 훗날 일본 총리가 되는 기시다 후미오가 소속된 개성 고등학교와 대전하여 콜드 게임으로 승리했다.[4][5][6] 이후 두 사람은 "PRIDE JAPAN★47★BASEBALL CUP2024"에서 기시다가 대회 명예 회장, 다카하시가 대회 홍보 대사를 맡기도 했다.[7] 3학년 때인 1974년 여름 고시엔에 히가시도쿄 대표로 출전했다. 2회전(첫 경기)에서 사세보 공고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뒀지만, 3회전에서 고리야마 고교에 패배했다.[8] 이때 선보인 주루 플레이가 히로시마 도요 카프 스카우트 코바 쿄의 눈에 띄게 되었다. 같은 해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히로시마로부터 3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계약금은 800만, 연봉은 120만이었다.[9]

2. 2.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 (1975년 ~ 1989년)

입단 초기에는 유격수였으나 곧 외야수로 전향했고, 1975년 시즌 중 감독으로 승격한 고바 다케시의 지시로 스위치히터가 되기 위해 타격 코치 야마모토 가즈요시와 함께 맹훈련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왼쪽 타석에서 스윙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엄청난 연습량을 소화하며 빠르게 실력을 키웠다. 프로 입단 직후 타자로 전향했을 때 프로의 높은 수준에 위기감을 느꼈고, 수비 주루 코치였던 고바로부터 "발만으로도 밥벌이를 할 수 있다"는 조언을 듣고 빠른 발을 살리는 데 집중했다. 1975년에는 1군 출전 기회가 없었다.

1977년에는 미무라 토시유키, 키노시타 토미오와 번갈아 기용되며 35경기에 유격수로 선발 출전했다. 당시 1군 외야진은 야마모토 코지, 미즈타니 사토오, 짐 라이틀 등 주축 타자들이 확고히 자리를 잡고 있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반면 내야에서는 오시타 타케시의 노쇠화로 인해 기존 유격수였던 미무라를 2루수로 이동시키고, 빈 유격수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구상이 있었기에 다카하시는 다시 유격수로 기회를 얻었다.

1978년, 등번호를 40번에서 2번으로 바꾸고 개막전부터 1번 타자 겸 유격수로 발탁되었다. 이는 고바 감독이 코칭스태프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린 결정이었으며, 다카하시에게 "네가 성공하든 내가 잘리든 둘 중 하나"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 해 다카하시는 타율 .302(리그 13위)를 기록하며 주전 자리를 꿰찼고, 생애 첫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1979년에는 '''33경기 연속 안타'''라는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을 세웠고, 55도루를 기록하며 도루왕 타이틀을 처음으로 차지했다[10]. 시즌 120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304(리그 9위)를 기록하며 팀의 센트럴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고, 2년 연속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긴테츠 버팔로스와의 1979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7경기 동안 27타수 12안타, 타율 .444라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고, 시리즈 MVP로 선정되었다[11].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걸쳐 히로시마의 황금기를 이끈 핵심 선수 중 한 명으로, 주로 1번 타자로 활약하며 고바 다케시 감독의 '빨간 헬멧 기동력 야구'(赤ヘル機動力野球の申し子일본어)를 상징하는 선수로 평가받았다. 통산 세 차례 도루왕을 차지했으며[50], 전성기에는 후쿠모토 유타카의 뒤를 이을 주자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의 타격과 주루 스타일은 야마사키 류조, 쇼다 고조 등 후배 선수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야마사키가 두각을 나타낸 후에는 주로 '1번 다카하시 - 2번 야마사키' 타순을 이루었고, 쇼다가 등장하고 다카하시 본인의 장타력이 향상된 후에는 '1번 쇼다 - 2번 야마사키 - 3번 다카하시'로 이어지는 빠른 발을 갖춘 스위치 히터 트리오로 상위 타선을 형성하기도 했다.

1980년에는 130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307(리그 7위)을 기록하며 팀의 2년 연속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3년 연속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38도루로 2년 연속 도루왕 타이틀도 차지했다. 팀은 1980년 일본 시리즈에서도 긴테츠를 꺾고 2년 연속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1983년에는 기량 향상을 위해 히로시마의 임시 코치로 초빙된 야마우치 가즈히로의 지도를 받아 레벨 스윙을 도입했고, 그 결과 홈런 수가 20개 이상으로 늘어났지만 동시에 삼진도 증가했다. 타격폼 수정과 홈런 증가의 연관성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으나, 다카하시 본인은 이를 부인했다. 팀 동료였던 키누가사 사치오는 훗날 다카하시가 안타에만 집중했다면 3000안타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 해 다카하시는 124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305(리그 8위)를 기록했다.

1984년에는 타율 .303, 71타점으로, 리그 최다인 97득점을 기록하며, 그해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1984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3차전 4회에 미야모토 시로로부터 2점 홈런, 7차전에서는 5타수 4안타 1타점을 기록했으며, 이 시리즈에서 타율 .500(통산 30타수 15안타), 1홈런, 3타점, 3도루(3경기 연속 도루의 시리즈 기록)를 기록하며 팀의 4승 3패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나가시마 키요유키가 요점에서 득점을 올리는 활약을 보였고, 최종적으로 타율 .333, 3홈런, 10타점의 좋은 성적을 남겼기 때문에 MVP를 양보하는 형식이 되었다(우수 선수상에는 선정되었다).

1985년에는 자기 최고 기록인 73도루를 기록하며, 3번째 도루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아난 준로가 감독으로 취임한 1986년에는 130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284로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1987년에는 개막 2일 전에 열린 '카프 격려의 밤'을 '시기가 좋지 않다'라며 보이콧하여 구단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개막부터 2주간 출장 정지를 받았다[12][13][14]. 그 때문에, 계속 이어오던 연속 경기 출장도 끊어졌지만, 같은 해에는 근신 중인 12경기를 제외하고는 전 경기에 출장했다.

1988년에는 127경기에 출장하여 타율이 .238로 하락했다. 이 해 오프 시즌에 세이부 또는 롯데와의 트레이드 이야기가 나왔고[15], 이적할 팀에서의 다카하시의 연봉도 결정되었지만 카프 측에서 교환 내용에 난색을 표하며 결렬되었다[16].

야마모토 코지가 감독으로 취임한 1989년 8월 14일 주니치 드래곤즈전에서는 스기모토 마사로부터 사요나라 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 해에는 도루는 13개로 규정 타석을 채운 이후 최소였고, 15차례의 도루 실패를 기록하는 등, 주력의 쇠퇴가 현저해져 7월 11일 요미우리전 이후에는 6번 타자나 7번 타자로 출장하게 되었다.

1989년에 입단한 같은 포지션의 노무라 겐지로의 두각으로 인해, 그해 오프 시즌 타카사와 히데아키·미즈카미 요시오와의 대형 트레이드로, 시라타케 요시히사·스기모토 세이시와 함께 롯데 오리온즈로 이적했다.

2. 3. 롯데 오리온스 시절 (1990년)

롯데에서는 가네다 마사이치 감독의 지휘 아래 유격수보다는 외야수로서의 활약이 기대되었으나, 이미 전성기가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에 뚜렷한 성적을 올리지는 못했다. 결국 1990년 시즌 종료 후 도야마 쇼지와의 맞트레이드를 통해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하였다.

2. 4. 한신 타이거스 시절 (1991년 ~ 1992년)

본인은 원래 한신 팬으로, 야수로는 안도 모토오, 투수로는 우에다 지로의 팬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1991년 한신에 입단하게 되어 기뻤지만, 스스로 "세로 줄무늬 유니폼이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라고 말했다[19]

한신 소속이던 1991년 3월 28일, 후지이데라 구장에서 열린 긴테쓰 버팔로스와의 시범 경기에서는 시구식 투수 야마다 마사토에게 공을 맞기도 했다[47][19]。 또한 같은 해 5월에 발표된 전년도(1990년) 고액 납세자 순위의 프로 야구 선수 부문에서 상위에 이름을 올렸는데, 이는 히로시마 시절 소유했던 부동산을 롯데로 이적할 당시 버블 경제 시기에 매각하여 얻은 수입에 대한 세금 납부 영향이 컸다.

3. 지도자 경력

코치로 활동하던 시기에는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세・퍼 교류전 경기가 끝난 후, 팀 버스가 호텔로 출발하기 직전까지 창문을 통해 히로시마 팬들에게 끊임없이 사인을 해주었다.

4. 은퇴 후 활동

(내용 없음)

5. 플레이 스타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입단 후 타자로 전향했으며, 조 루츠 감독의 지시에 따라 스위치히터가 되기 위해 타격 코치 야마모토 가즈요시와 함께 맹훈련을 했다. 뛰어난 연습량과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체력을 키워 1978년부터 팀의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이어진 히로시마 황금 시대에 주로 1번 타자로 활약했다. 조 루츠의 뒤를 이은 고바 다케시 감독 아래에서 ‘빨간 헬멧 기동력 야구의 산물’(赤ヘル機動力野球の申し子|아카헤루 기도료쿠 야큐노 모시코일본어)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빠른 발을 자랑하며 세 차례 도루왕 타이틀을 획득했다.[50] 1979년에는 33경기 연속 안타라는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을 세웠고, 같은 해 1979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7경기 모두 안타를 치며 타율 .444를 기록,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전성기에는 후쿠모토 유타카의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으며, 그의 타격과 주루 스타일은 야마사키 류조, 쇼다 고조 등 후배 히로시마 선수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야마사키가 두각을 나타낸 후에는 주로 '1번 다카하시, 2번 야마사키' 타순을 이루었고, 쇼다가 등장하고 다카하시 본인의 장타력이 향상되면서 '1번 쇼다, 2번 야마사키, 3번 다카하시'로 이어지는 빠른 발의 스위치히터 트리오가 상위 타선을 형성하기도 했다.

1983년에는 더 높은 수준을 목표로 히로시마의 임시 코치로 초빙된 야마우치 가즈히로의 지도를 받아 레벨 스윙을 도입했고, 그 결과 홈런 수가 20개 이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1985년 이후 타율이 하락하면서 타격폼 수정과 홈런 증가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으나, 다카하시 본인은 이를 부인했다.

스위치히터로서 통산 타율 3할을 5번, 20홈런 이상을 4번 기록했으며, 33경기 연속 안타 일본 기록을 세우는 등[38]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성공은 일본 야구계에 스위치히터의 유효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리그를 불문하고 많은 후배 스위치히터 탄생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히로시마에서는 야마사키 류조와 쇼다 고조가 그의 뒤를 이어 스위치히터로 성공하며 1980년대 팀의 강력한 상위 타선을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스위치히터 전향 당시 야마모토 가즈요시 코치와의 맹훈련은 혹독했는데, 아침부터 밤까지 배트를 휘둘렀고 식사 시간이나 잠잘 때도 배트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 결과, 기구를 이용한 근력 운동이 보편화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야구 연습만으로 보디빌더와 같은 강인한 육체를 만들었다.

통산 477도루는 역대 5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지만, 도루 실패도 많았다. 통산 206번의 도루 실패는 후쿠모토 유타카의 299번에 이어 역대 2위 기록이며, 히로시마와 한신 시절 기록한 통산 202번의 도루 실패는 센트럴 리그 기록이다. 1983년에는 70도루를 기록했지만 28번의 도루 실패를 기록했는데, 이는 시즌 최다 도루 실패 센트럴 리그 기록이다.[39] 공교롭게도 같은 해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마츠모토 마사시가 76도루(센트럴 리그 기록)로 도루왕을 차지하면서, 다카하시의 70도루는 도루왕 타이틀을 놓친 선수 중 역대 최다 도루 기록으로 남아있다.

현역 시절 헤드 슬라이딩의 대명사로 알려졌다. 2021년 NPB에서 헤드 슬라이딩으로 인한 부상자가 속출하자, 그는 "헤드 슬라이딩은 평소에 하지 않는 선수가 갑자기 하면 부상당할 뿐, 그 자체는 위험하지 않다. 부상이 두렵다면 캠프 때부터 제대로 연습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헤드 슬라이딩을 두려워했던 무라마츠 아리토에게 이를 권유했지만 부상 없이 성공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또한 주루 시 항상 전력 질주하는 습관을 들이면 부상을 예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40]

수비에서는 오랫동안 히로시마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며 베스트 나인에 여러 차례 선정되었지만, 골든 글러브 상은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다. 다카하시 본인은 동시대 센트럴 리그에 명 유격수 야마시타 다이스케가 있었고, 입스로 인해 가까운 거리 송구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팀 동료였던 쇼다 고조는 다카하시의 넓은 수비 범위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유격수 정면으로 오는 타구를 처리할 때 실책이 잦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1987년에는 시즌 개막을 앞두고 열린 구단 격려회 참가를 "시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등 구단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같은 포지션의 노무라 겐지로가 입단하면서 1989년 시즌 종료 후 다카자와 히데아키, 미즈카미 요시오와의 대형 트레이드를 통해 시라타케 요시히사, 스기모토 마사시와 함께 롯데 오리온스로 이적했다.

6. 논란 및 사건 사고

(해당 섹션에 대한 정보가 원본 소스에 없습니다.)

7. 수상 및 타이틀 경력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히로시마 황금 시대의 주역으로 활약하며 세 차례 도루왕 타이틀을 획득했다.[50] 특히 1979년에는 '''33경기 연속 안타'''라는 일본 기록을 세웠고,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타율 0.444를 기록하며 일본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7. 1. 타이틀


  • 도루왕: 3회 (1979년, 1980년, 1985년) ※5년의 공백 후 수상은 동상 최장 타이기록 (그 외 가와노 아키테루, 시바타 이사오, 이시이 타쿠로)
  • 최다 안타: 1회 (1980년) ※당시는 타이틀이 아니었으며 연맹 표창도 없었음. 1994년부터 타이틀로 제정됨.
  • 베스트 나인: 5회 (1978년 ~ 1980년, 1983년, 1986년)
  • 월간 MVP: 1회 (1979년 7월)
  • 일본 시리즈 MVP: 1회 (1979년)
  • 일본 시리즈 타격상: 1회 (1979년)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1회 (1984년)

7. 2. 수상


  • 베스트 나인: 5회 (1978년 ~ 1980년, 1983년, 1986년)
  • 월간 MVP: 1회 (1979년 7월)
  • 일본 시리즈 MVP: 1회 (1979년)
  • 일본 시리즈 타격상: 1회 (1979년)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1회 (1984년)

8. 주요 기록

9. 기타


  • 통산 1000안타: 1984년 8월 7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5차전(고라쿠엔 구장), 1회초에 니시모토 다카시로부터 우전 안타 ※역대 133번째.
  • 통산 300도루: 1985년 7월 6일, 대 한신 타이거스 11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8회초에 2루 안착(투수: 이케다 지카후사, 포수: 기도 가쓰히코) ※역대 16번째.
  • 통산 1000경기 출장: 1985년 8월 20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19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2번·유격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257번째.
  • 통산 350도루: 1985년 10월 21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26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8회말에 2루 안착(투수: 사이토 아키오, 포수: 고야마 아키하루) ※역대 11번째.
  • 통산 100홈런: 1986년 4월 8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차전(고라쿠엔 구장), 1회초에 니시모토 다카시로부터 선두 타자 홈런 ※역대 138번째.
  • 통산 400도루: 1987년 6월 25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14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5회말에 2루 안착(투수: 고마쓰 다쓰오, 포수: 나카무라 다케시) ※역대 6번째.
  • 통산 1500안타: 1988년 4월 23일, 대 한신 타이거스 5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7회초에 나카다 요시히로로부터 중전 안타 ※역대 55번째[51]
  • 통산 450도루: 1988년 10월 18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25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5회초에 홈으로 안착(투수: 나카모토 시게키, 포수: 하타 신지) ※역대 5번째.
  • 통산 150홈런: 1989년 7월 18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13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9회초에 야노 가즈야로부터 좌월 역전 결승 2점 홈런 ※역대 88번째.
  • 통산 1500경기 출장: 1989년 8월 8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8차전(도쿄 돔), 7회초에 오노 유타카의 대타로서 출장 ※역대 94번째.
  • 통산 1000득점: 1991년 10월 8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24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6회초에 토머스 오말리의 희생 플라이로 홈을 밟으며 달성 ※역대 23번째.
  • 일본 시리즈 3경기 연속 도루(1984년) ※시리즈 기록.
  • 33경기 연속 안타(1979년 6월 6일 ~ 7월 31일) ※일본 기록.
  • 11경기 연속 득점(1982년 6월 8일 ~ 6월 22일)
  • 8경기 연속 도루(1983년 5월 26일 ~ 6월 4일)
  • 6경기 연속 도루: 2회(1979년 6월 17일 ~ 6월 23일, 1986년 10월 5일 ~ 10월 12일)
  • 1경기 4도루: 2회(1982년 5월 30일, 1983년 4월 30일)
  • 통산 첫회 선두 타자 홈런: 34개(1회초 13개, 1회말 21개) ※역대 3위.
  • 센트럴 리그 통산 첫회 선두 타자 홈런: 32개(1회초 12개, 1회말 20개) ※역대 2위.
  • 2경기 연속 첫회 선두 타자 홈런(1989년 6월 4일 ~ 6월 6일)
  • 개막전 첫회 선두 타자 홈런: 1회(1989년 4월 8일)
  • 좌우 양타석 홈런: 1983년 4월 26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1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52]
  • 시즌 20홈런 이상·70도루 이상: 2회(1983년, 1985년)[53]
  • 첫회 선두로부터 3자 연속 홈런: 1989년 6월 4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9차전(아키타 시영 야바세 구장), 1번·다카하시, 2번·쇼다 고조, 3번·웨이드 로든에서 기다 이사무로부터 기록
  • 올스타전 출장: 6회(1979년, 1980년, 1983년 ~ 1986년)


고라쿠엔 구장의 전광판에서는 선수 이름이 '''高橋ょ'''로 표시된 적이 있다. 이는 당시 고라쿠엔 구장의 전광판 도트가 거칠어 획수가 많은 '慶' 자를 제대로 표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고안된 임시방편이었다. 이후 기술 발전으로 '高橋慶'로 정상 표시가 가능해졌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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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Youtube 【総理大臣】高校時代、岸田総理と野球で対戦した思い出を語る【高橋慶彦】【プロ野球OB】 https://www.youtube.[...]
[5] Youtube 【vs岸田文雄】高橋「高校時代に…」「広島でよかったことは…」古葉さんPart④ https://www.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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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Youtube 【vol.4】金田監督との確執! 阿南監督の采配ミスはなぜ起きたのか? ◆ 赤き疾風の追憶 ★ 高橋慶彦 ◆ アスリートアカデミア【岡崎郁 公式チャンネル】- YouTube https://www.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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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트윗 ボール、喜んで頂けて父も幸せだと思います(*´-'*)! 2018-09-01
[49] 뉴스 劇場公開作品|オールイン エンタテインメント http://all-in-ent.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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