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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도 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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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곤도 주조는 1771년 에도에서 태어난 에도 시대 후기의 막부 관리이자 학자이다. 유학을 공부하고 17세에 사숙을 열 정도로 학문에 능했으며, 60여 종 1,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나가사키 부교, 에도 막부 관리 등을 역임하며 북방 영토 개척에 힘썼고, 에조지(蝦夷地)를 탐험하며 사할린 상지론을 주장했다. 1819년 오사카로 좌천되었고, 아들의 살인 사건으로 인해 오미조 번으로 유배되었다가 1829년 사망했다. 그는 아이누 민족을 차별하지 않았으나, 일본식으로 동화시키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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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도 주조
기본 정보
에슈 [[오미야 번|오미야 번]] 유폐 무렵으로 보이는 초상 ([[하코다테시 중앙도서관|하코다테시 중앙도서관]] 소장)
에슈 오미야 번 유폐 무렵으로 보이는 초상 (하코다테시 중앙도서관 소장)
씨명곤도 주조
시대에도 시대 후기
출생메이와 8년 (1771년)
사망분세이 12년 6월 16일 (1829년7월 16일)
이명쇼사이 (正斎)
쇼텐신진 (昇天真人)
시호모리시게 (守重)
묘소2개소 (도쿄도분쿄구사이젠지, 시가현 미즈키인)
막부에도 막부막신
주군도쿠가와 이에나리
씨족후지와라 씨
부모곤도 모리토모 (近藤守知)
자녀곤도 도미조

2. 생애

메이와 8년(1771년), 에도(江戸) 고마고메에서 오사키테구미(御先手組) 요리키(与力)였던 곤도 모리토모(近藤守知)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불렸으며, 8세에 사서오경을 암송하고, 17세에 사숙(私塾) "백산의학(白山義學)"을 열 정도로 뛰어났다.[39] 야마모토 호쿠잔에게서 유학(儒學)을 배웠으며, 평생 60여 종 1,500여 권의 저작을 남겼다.[39]

칸세이 2년(1790년) 아버지 은퇴 후 가독을 상속받아[2] 히쓰케 도조쿠 아라타메카타로도 근무했다.[5] 칸세이 6년(1794년)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행한 성당 학문소(1797년부터 쇼헤이자카 학문소) 학문 음미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1][5][6] 칸세이 7년(1795년) 나가사키 부교 테다시 역이 되어 나가사키에서 저술 활동을 했다.[2] 칸세이 9년(1797년) 간조 부교 전임에 따라 에도로 돌아왔고, 지불 간조가타가 되었다.[7][2]

칸세이 8년(1796년) 영국 해군 윌리엄 로버트 브로턴의 프로비던스 호가 에조치 우치우라만에 정박하는 사건이 발생했다.[8][9] 에도 막부는 히가시에조치를 조사했고, 곤도는 모가미 도쿠나이와 함께 행동하게 되었다.[10]

간세이 9년(1797년), 곤도는 에도 막부에 해방(海防) 강화를 주장하며 에조치가 무방비 상태여서 외국의 지배를 받을 수 있다고 보고, 막부 직할화(상지, 上知)와 북방 조사를 건의했다.[41][44]

간세이 10년(1798년), 곤도는 마쓰마에에조치고요(松前蝦夷地御用)로 에조치에 부임했다. 막부 조사대가 에조치를 조사했고,[42] 곤도는 모가미 도쿠나이와 함께 구나시리섬(国後島)과 에토로후섬(択捉島)을 조사했다.[42][45] 같은 해 7월, 에토로후섬 탄네모이(丹根萌)에 '대일본에토로후(大日本惠登呂府)' 나무 기둥을 세웠다.[46][47]

에토로후섬 지형도. 탄네모이와 가모이왓카곶(カモイワッカ岬), 에토로후회소(エトロフ会所)의 위치


우루프섬(得撫島)에 러시아인이 입식(入植)한 것을 확인하고 곤도는 위기감을 느꼈다.[46] 곤도는 홋카이도 도로 건설의 효시가 된 루베시베츠산도(ルベシベツ山道)를 건설했다.[49][50]

간세이 11년(1799년), 막부는 동에조치를 가상지(仮上知)했다 (1802년부터 영상지(永上知)).[51][52] 곤도는 에조치 막령화(幕領化)를 주장했고, 막부는 곤도의 주장을 받아들였다.[43]

1799년, 곤도는 다카다야 카헤에에게 쿠나시르・에토로후 간의 항로(에토로후 항로)를 열게 하였고, 에토로후 섬과 우루프섬을 답사했다.[1] 또한, 에토로후 섬의 아이누에게 일본 풍속을 권하는 등, 카헤에와 협력하여 에토로후 개발을 진행했다.[1]

간세이 12년(1800년) 곤도는 쿠나시르 섬 도마리에서 아이누 오토나들에게 술과 담배를 대접했고, 에토로후 섬에 회소를 열었다.[20] 같은 해 에토로후부 섬의 인별장을 작성했고,[13][21] 카모이왓카 곶에 "다이닛폰 에토로후부" 표주를 세웠다.[22]

어장 17곳을 열고, 7향 25개 촌의 향촌제를 실시했다.[9][13] 장소 청부제가 폐지되고 직찰제가 시행되어, 막부 관리가 상거래 부정을 방지했다.[18][24] 이러한 아이누 보호책과 무육책은 에도 막부의 위광을 알리고 일본화하려는 것이었다.[25]

곤도는 교와 원년(1801년)과 교와 2년(1802년)에도 에토로후 섬에 출두했다.[26]

교와 2년(1802년) 에조치 부교가 설치되었고, 동 에조치가 영구 상지되었다.[26] 그러나 막부 내 노선 대립과 재정난으로 개발이 제한되었다.[26]

교와 3년(1803년) 곤도는 고후신방으로 전임했다.[2][27] 문정 2년(1819년) 오사카 근무 어궁봉행으로 좌천되었고,[2] 오시오 헤이하치로와 쿠사마 나오카타와 교류했다.[2]

곤도는 미타무라 창개자키(현 도쿄도 메구로구 나카메구로 2-1)에 "옹서성"이라 불리는 별장을 지었다.[30] 분세이 2년(1819년) 후지코 신자들이 곤도에게 땅을 빌려 후지즈카(메구로 후지)를 건설했다.[30][31] "메구로 신후지" 또는 "곤도 후지" 등으로 불렸다.[31]

분세이 4년(1821년), 곤도는 에도 타키노가와 마을(현 도쿄도 기타구)에 은거하며 타키노가와 문고를 열었다.[2] 그러나 갑옷 차림 석상 문제로 견책을 받았다.[2][30]

분세이 9년(1826년), 장남 곤도 토미조가 이웃 주민과 다투다 7명을 살해하여 하치조섬으로 유배되었고, 곤도도 오미국오미조번에 위탁되었다.[1] 곤도는 유배 중에도 본초학 서적 『고슈 본초』를 저술했다.

1829년 7월 16일(분세이 12년 6월 16일) 곤도는 유배지에서 병사했다.[2] 향년 59세. 1860년(만엔 원년) 곤도는 사면되었지만, 아들 토미조는 1880년(메이지 13년)에야 유형에서 풀려났다.

1911년(메이지 44년), 곤도 주조는 정5위를 추증받았다.[32]

2. 1. 어린 시절

메이와 8년(1771년), 오사키테구미(御先手組) 요리키(与力)였던 곤도 모리토모(近藤守知, 혹은 곤도 우젠모리토모近藤右膳守知)의 셋째 아들로 에도(江戸) 고마고메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불렸으며, 8세에 사서오경을 암송하고, 17세에 사숙(私塾) "백산의학(白山義學)"을 열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39] 박식하기로 유명한 야마모토 호쿠잔에게서 유학(儒學)을 배웠으며, 동문으로는 오타 킨조, 오가와 타이잔, 오타 젠사이 등이 있었다. 평생 60여 종 1,500여 권의 저작을 남겼다.[39]

2. 2. 에도 막부 관리

메이와 8년(1771년), 오테구미 요리키·곤도 우젠 모리토모의 셋째 아들로 에도 고마고메에서 태어났다. 칸세이 2년(1790년) 아버지 은퇴 후 가독을 상속받아[2] 오테구미 요리키로 출사, 히쓰케 도조쿠 아라타메카타로도 근무했다.[5] 칸세이 6년(1794년)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행한 성당 학문소(1797년부터 쇼헤이자카 학문소) 학문 음미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해 포상을 받았다.[1][5][6] 칸세이 7년(1795년) 나가사키 부교 테다시 역이 되어 나가사키에서 『청속기문』, 『안남기략』, 『홍모서』를 저술했다.[2] 칸세이 9년(1797년) 4월, 부교 나카가와 타다히데의 간조 부교 전임에 따라 에도로 돌아왔고,[7] 같은 해 12월 센테 요리키에서 지불 간조가타가 되어 나카가와 타다히데가 겸임하는 간토 군다이 테다시 역에 임명되었다.[7][2]

칸세이 8년(1796년) 8월, 영국 해군 장교 윌리엄 로버트 브로턴이 지휘하는 프로비던스 호가 에조치 우치우라만에 정박하는 사건이 발생했다.[8][9] 에도 막부는 이에 충격을 받고 견분역을 마쓰마에에 파견, 히가시에조치를 조사했다.[8] 조사 결과 영국 배는 단순 표류였고 밀수도 없어 특별한 문제는 없었지만, 동시에 측량을 실시한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9] 브로턴 탐험대는 칸세이 9년 7월 에토모(지금의 무로란시 주변)에 "표착", 윤7월 마쓰마에 앞바다에 나타났다.[8] 곤도는 브로턴의 에조치 내항을 계기로 모가미 도쿠나이와 함께 행동하게 되었다.[10]

2. 3. 에조치 탐험과 상지

곤도 주조는 간세이 9년(1797년) 9월, 하야시 주츠사이(林述斎)를 통해 에도 막부에 해방(海防) 강화를 주장했다.[41][44] 그는 러시아와 영국의 이국선(異国船)이 내항하여 에도만(江戸湾)을 봉쇄할 경우, 에도(江戸)의 군사적 취약성과 일본 국내 시장의 혼란을 지적했다.[44] 곤도는 에조치(蝦夷地)가 무방비 상태여서 외국의 지배를 받을 수 있다고 보고, 막부 직할화(상지, 上知)와 북방 조사를 건의했다.[41][44]

간세이 10년(1798년), 곤도 주조는 마쓰마에에조치고요(松前蝦夷地御用) 취급으로 에조치에 부임했다. 막부는 메즈케(目付) 와타나베 준(渡辺胤) 등에게 마쓰마에 출장을 명했고, 180명 규모의 조사대가 에조치를 조사했다.[42] 마쓰마에번의 밀무역(누케니, 抜け荷) 의혹도 조사 대상이었다.[42] 곤도는 오가와치 마사토시(大河内政壽) 대(隊)의 별동대로 모가미 도쿠나이(最上徳内)와 함께 구나시리섬(国後島)과 에토로후섬(択捉島)을 조사했다.[42][45]

간세이 10년(1798) 7월, 에토로후섬 탄네모이(タンネモイ, 丹根萌)에 '대일본에토로후(大日本惠登呂府)' 나무 기둥을 세웠다.[46][47] 표주(標柱)에는 곤도 주조, 모가미 도쿠나이, 기무라 겐지(木村謙次) (시모노 겐스케, 下野源助라는 변명(変名) 사용) 등의 이름과 12명의 아이누 이름이 기록되었다.[48]

이 탐험에서 우루프섬(得撫島)에 러시아인이 이미 입식(入植)했고, 아이누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확인하고 곤도는 위기감을 느꼈다.[46] 곤도는 히로오(広尾)에서 악천후로 발이 묶이자, 히다카(日高) 해안길 정비를 위해 사비로 도로(루베시베츠산도, ルベシベツ山道)를 건설했는데, 이는 홋카이도 도로 건설의 효시가 되었다.[49][50]

간세이 11년(1799년), 막부는 동에조치를 가상지(仮上知)했다 (1802년부터 영상지(永上知)).[51][52] 곤도는 에조치 막령화(幕領化)를 주장했고, 막부도 러시아와 아이누의 결탁을 우려하여 이를 받아들였다.[43] 곤도는 막부가 사쓰마번(薩摩藩)에게 류큐(琉球) 지배를 인정한 주인장(朱印状)과 달리, 마쓰마에번에 발급한 흑인장(黒印状)에는 에조치 영유를 인정한 내용이 없으므로 에조치 공영화(公領化)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53]

2. 4. 무육 정책과 좌천

1799년, 곤도는 상인 다카다야 카헤에에게 쿠나시르・에토로후 간의 항로(에토로후 항로)를 열게 하였고, 이듬해에 걸쳐 에토로후 섬, 더 나아가 우루프섬을 답사했다[1]。또한, 에토로후 섬의 아이누에게 물품과 어구를 지급하고, 에조를 "무라카타"라고 부르게 하여, 일본의 풍속을 권하는 등, 카헤에와 협력하여 에토로후 개발을 진행했다[1]

간세이 12년(1800년) 4월, 곤도는 쿠나시르 섬의 도마리에서 아쓰케시 소오토나 이코토이 등을 포함한 아이누의 오토나들에게 술과 담배를 대접했고, 윤4월에는 에토로후 섬으로 건너가 회소를 후리베츠군 오이토(로몬)에 열었다[20]。같은 해 6월에는 에토로후부 전체 섬의 인별장을 작성했고[13][21], 7월에는 다카다야 카헤에 등과 함께 에토로후 섬 북단의 카모이왓카 곶에, 다시 한번 "다이닛폰 에토로후부"의 표주를 세웠다[22]

더욱이, 어장 17곳을 열게 하고, 7향 25개 촌의 향촌제를 실시했다[9][13]。어장을 개발한 것은, 남부 시모키타군 출신의 토라키치 등이었다[23]。에토로후 섬을 포함한 동 에조치에서는, 아이누 사람들의 불만의 씨앗이 되었던 장소 청부제가 폐지되어 직찰제가 되었고, 거래 시에는 막부 관리가 입회하여, 상거래에서의 부정을 방지하도록 했다[18][24]。이로써, 에토로후・쿠나시르를 포함한 동 에조치의 어업도 아이누와의 거래도 막부의 직영이 되었다[9]。이러한 아이누 보호책과 무육책은, 에도 막부의 위광을 아이누 사람들에게 알리고 언어・풍속・생활 전반을 일본인화하려는 것이었다[25]

곤도는 교와 원년(1801년)과 교와 2년(1802년)에도 에토로후 섬에 출두했다[26]。계속해서 에토로후 섬의 내국화, 아이누 민족의 일본식 화 정책을 추진했다고 생각되지만, 자세한 사항을 기록하지 않아 자세한 것은 불명이다[26]

교와 2년 2월 23일, 에조치 부교가 설치되었고, 토가와 야스노리・하타 마사요 2명이 부교로 임명되었으며 5월 11일에는 하코다테 부교로 개칭되었다[26]。7월 24일에는 가상지였던 동 에조치가 영구 상지가 되었다[26]。그러나, 막부의 실정은, 에조치 직할파(개발파)와 마쓰마에번 위임파(비개발파)와의 노선 대립이 심각했고, 적극적으로 개발을 진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며, 재정난 때문에 신규 지출을 동반하는 사업은 엄격히 제한되었다[26]。곤도는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품고 전역 운동을 시작했다[26]

교와 3년(1803년) 1월 25일, 곤도 주조는 에조지(蝦夷地) 관련 직책에서 물러나 고후신방으로 전임했다[2][27]

2. 5. 창개자키 사건과 유배

문정 2년(1819년), 곤도 주조는 오사카 근무 어궁봉행으로 좌천되었는데[2], 이는 그의 자신만만하고 호탕한 성격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오사카에서는 오사카 동정봉행 요리키오시오 헤이하치로와 친분을 쌓았으며[2], 곤도와 오시오는 서로를 "다다미 위에서는 죽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훗날 덴포 8년(1837년)에 막부에 대한 반란(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을 일으켰다. 곤도는 오사카에서 『삼화도휘』의 저자이자 상인 학자인 쿠사마 나오카타와도 교류했다[2]

곤도 주조는 본가 외에 미타무라 창개자키(현, 도쿄도 메구로구 나카메구로 2-1)에 넓은 부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시나가와 방면을 조망할 수 있는 "옹서성"이라 불리는 별장을 지었다[30]。이 별장은 매우 호화로웠는데, 천장에는 용이 그려져 있고 미닫이문에는 에조지의 풍경이 그려져 있어 마치 현대의 도서관과 같았기 때문에 책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자주 모였다[30]。곤도는 저택 내에 미타 용수를 끌어들여 폭포도 만들었다[31]

분세이 2년(1819년), 아자부 마을후지코 신자들이 곤도에게 메구로의 토지를 빌려달라고 부탁하자, 곤도는 땅을 무상으로 빌려주었다. 신자들은 많은 인부를 동원하여 순식간에 후지산을 본뜬 후지즈카(메구로 후지)를 건설했다[30][31]。 "아자부 후지"보다 크다고 하여 "메구로 신후지" 또는 "곤도 후지", "동후지" 등으로 불리며 참배객으로 붐볐고, 문전에는 노점상도 나타날 정도였다[31]

분세이 4년(1821년), 곤도는 오사카 근무가 해제되어 소프신 입차 대기를 명령받고, 에도 타키노가와 마을(현, 도쿄도 기타구)에 은거했다[2]。 타키노가와 마을에서는 많은 자서와 희귀본을 소장하는 타키노가와 문고를 열었다[2]。 그러나 자신의 갑옷 차림의 석상을 타키노가와에 세워 문제가 되었고[2], 이후의 견책으로 이어진다고 한다[30]

분세이 9년(1826년), 메구로 별장의 관리를 맡았던 장남 곤도 토미조가 저택의 경계 분쟁으로 이웃 주민과 다투다가 7명을 살해하는 사건을 일으켰다[1]。이 사건으로 토미조는 하치조섬으로 유배되었고, 아버지 주조도 책임을 지고 오미국오미조번(번주는 와케베 씨. 현재의 시가현다카시마시)에 위탁되었다[1]

2. 6. 유배 생활과 죽음

분베 미츠야스는 곤도 주조를 정중하게 대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유명인이었던 곤도는 작은 번이면서 교토와도 가까워 학문과 견식을 얻는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오오미조 번에게는 안성맞춤인 귀한 손님과도 같았다. 곤도는 유배인이었지만 서적을 하사받았으며, 번사를 상대로 의견 교환을 하거나, 번사와 한시를 읊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오오미조에서 본초학 서적인 『고슈 본초』 전 30권을 저술했다. 오오미조를 중심으로 한 오미 국의 식물 도감이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1829년 7월 16일(분세이 12년 6월 16일) 곤도는 유배 중인 채로 같은 지역에서 병사[2]했다. 향년 59세. 오오미조 번 내의 엔코 선사의 탑두즈이세츠인에 묻혔다. 곤도 주조 사후 1860년(만엔 원년), 곤도 주조의 연좌 처분이 풀려 사면되었지만, 장남인 토미조의 죄는 반 세기 이상 사면되지 않았고, 토미조에 의한 망부의 묘참이 드디어 실현된 것은 토미조 유형에서 53년이 지난 1880년(메이지 13년)이었다.

1911년(메이지 44년), 곤도 주조 모리시게는 정5위를 추증받았다[32].

3. 곤도 주조의 아이누 민족관

곤도 주조는 아이누 민족에 대해 이민족으로서 차별감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서민과 비교해도 인간으로서 열등한 점은 없다고 평가했다.[54] 곤도는 아이누 풍속에 대해 '산발, 때 낀 얼굴, 거친 옷, 악취' 등으로 인해 에도의 거지같다고 평했지만, 이는 생업, 주거, 기후 등 환경 탓이며 기질과 지능은 일본 서민과 같다고 강조했다.[54]

동시에 곤도는 아이누를 일본 서민처럼 지배받아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여 풍속과 문화를 존중하려는 의식은 없었다.[54] 곤도는 구미 식민지적 침략으로부터 막번제 국가의 위기를 구하려는 지사적 의식을 가졌지만, 막번제 국가 존속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55]

4. 저서

곤도 주조의 저서는 국방, 지리, 풍속, 탐험, 법제, 경제, 서지학, 고고학 등 다방면에 걸쳐 있으며, 1,500권에 달한다고도 하지만, 산일된 것도 있다.[2] 국서간행회에서 『곤도 쇼사이 전집』이 간행되었다.[2]

나가사키부교(長崎奉行) 수부역 재임 중에는 『청속기문(淸俗紀聞)』, 『안남기략(安南紀略)』, 『홍모서(紅毛書)』 3권을 저술했다.[2] 1808년(문화 5년) 에도 막부 홍엽산 문고의 서물봉행이 된 후 11년간 재직하면서 『금은도록』, 『보화통고』, 『전록』, 『호서고사』, 『외만통서』, 『외번통고』 등을 저술하여 막부에 헌상했다.[2]

특히, 『외만통서』 전 27권은 1599년부터 호레키 연간(1751년 - 1764년)까지 막부와 여러 외국과의 왕복 문서를 각국별·편년순으로 수록하여 면밀한 고증을 더한 외교 문서집으로, 조선 (제1-5권), 네덜란드 (제6·7권), 명나라 (제8-10권), 안남 (제11-14권), 샴 (제15-17권), 캄보디아 (제18·19권), 참성(참파) 및 태니(파타니)(제20권), 루손 (제21-23권), 마카오 (제24-25권), 멕시코 (제26권), 영국 (제27권)이 망라되어 있다.[29]

곤도는 도서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오타 난포(쇼쿠산진)나 카리야 에키사이와 같은 장서가 및 서지학자와도 교우 관계를 맺고 있었다.[30] 홍엽산 문고의 장서를 비롯한 막부 소유의 도서에 대해 정밀히 조사하여, 그 내력과 고증을 기록하여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서물에 관한 저작도 하였다.[30] 곤도의 서지 관련 저작에는 『어본일기』, 『우문고사』, 『정재서적고』 등이 있다.[30] 도쿠가와 씨의 장서가 많이 공개된 것도, 곤도의 공헌에 의한 바가 적지 않다.[30]


  • 『청속기문』
  • 『안남기략』
  • 『외번통서』
  • 『라마고』

5. 묘소

시가현 다카시마 스이세츠인(瑞雪院) 묘지


다음 두 곳에 묘소가 있다.

6. 관련 건축물


  • 요시쓰네 신사 (간세이 11년 (1798년), 홋카이도 사루 군 비라토리정)
  • 칼승 신사 (현, 도카치 신사. 홋카이도 히로오 군 히로오정 모요리): 1798년, '루베시베츠 산길' 개척을 현창하여, 기무라 겐지(시모노 겐스케)가 쓴 '동예가 신도기 조각판'(홋카이도 지정 문화재)을 봉납했다.[15]
  • 대일본혜도려부 표주 (1798년: 에토로후 섬 탄네모이, 1800년: 에토로후 섬 카모이왓카 곶)
  • '곤도 시게조 유래의 땅' 석비 (1976년 10월 9일, 홋카이도 가미카와 군와사무정 시오카리)[36]

「곤도 시게조 유래의 땅」 석비 정면


「곤도 시게조 유래의 땅」 석비 정면 아래


「곤도 시게조 유래의 땅」 석비 후면

  • 석조 곤도 모리시게 좌상
    석조 곤도 모리시게 좌상 (도쿄도 기타구 쇼주인)

참조

[1] 문서 井黒(1994)
[2] 문서 下村(1979)p.687
[3] 웹사이트 「近藤重蔵の墓」 http://www.city.taka[...] 滋賀県高島市 2022-06-26
[4] 문서 川上(2011)pp.180-183
[5] 간행물 村尾元長『近藤守重事績考』 1893
[6] 웹사이트 "4.学問吟味(多聞櫓文書)」" https://www.archives[...] 国立公文書館 2022-06-26
[7] 문서 川上(2011)pp.184-187
[8] 문서 賀川(1992)pp.207-211
[9] 문서 田端(2000)pp.128-133
[10] 문서 横山(2013)pp.107-108
[11] 웹사이트 函館市史 通説編1 第3編 - 第3章 - 第1節 東蝦夷地直轄の経緯:幕府の蝦夷地調査 https://adeac.jp/hak[...] ADEAC 2022-06-26
[12] 문서 横山(2013)pp.96-98
[13] 문서 川上(2011)pp.61-62
[14] 문서 川上(2011)pp.205-206
[15] 웹사이트 北海道指定文化財「東蝦新道記彫字板」 https://www.town.hir[...] 北海道広尾町 2022-06-26
[16] 논문 道の歴史を訪ねて http://rmec.or.jp/wp[...] 北海道道路管理技術センター
[17] 문서 木村(1998)pp.32-39
[18] 문서 井上(2009)pp.116-119
[19] 문서 桑原(1994)pp.202-205
[20] 문서 川上(2011)pp.193-194
[21] 문서 川上(2011)pp.198-199
[22] 논문 國後擇捉の建標に關する斷案 https://hdl.handle.n[...] 札幌博物學會
[23] 문서 菊池(1991)pp.248-249
[24] 문서 宮地(2012)pp.18-20
[25] 문서 川上(2011)pp.190-191
[26] 문서 川上(2011)pp.199-200
[27] 문서 川上(2011)pp.200-201
[28] 문서 横山(2013)pp.156-158
[29] 문서 外蕃通書
[30] 간행물 市島春城著『芸苑一夕話(上)』 1922
[31] 웹사이트 歴史を訪ねて「富士講」 http://www.city.megu[...] 東京都目黒区 2022-06-26
[32] 서적 田尻編『贈位諸賢伝 増補版 上』(1975)特旨贈位年表 p.28
[33] 문서 川上(2011)p.188
[34] 문서 川上(2011)pp.201-202
[35] 문서 川上(2011)pp.173-175
[36] 서적 和寒町史 1975
[37] 웹인용 "近藤重蔵の墓" http://www.city.taka[...] 滋賀県高島市 2022-06-26
[38] 서적 川上(2011)pp.180-183
[39] 간행물 村尾元長『近藤守重事績考』 "{{NDLDC|991308/12}}[...] 1893
[40] 웹인용 "4.学問吟味(多聞櫓文書)" https://www.archives[...] 국립공문서관 2022-06-26
[41] 서적 川上(2011)pp.184-187
[42] 서적 賀川(1992)pp.207-211
[43] 서적 田端(2000)pp.128-133
[44] 서적 横山(2013)pp.107-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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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서적 横山(2013)pp.96-98
[47] 서적 川上(2011)pp.61-62
[48] 서적 川上(2011)pp.205-206
[49] 웹인용 北海道指定文化財「東蝦新道記彫字板」 https://www.town.hir[...] 北海道広尾町 2022-06-26
[50] 저널 道の歴史を訪ねて http://rmec.or.jp/wp[...] 北海道道路管理技術センター
[51] 서적 木村(1998)pp.32-39
[52] 서적 井上(2009)pp.116-119
[53] 서적 桑原(1994)pp.202-205
[54] 서적 川上(2011)p.188
[55] 서적 川上(2011)pp.201-202
[56] 서적 川上(2011)pp.173-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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