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빈 최씨
1. 개요
공빈 최씨는 전주 최씨 최도일의 딸로, 1454년에 태어났다. 1462년 예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소훈에 봉해졌으며, 숙의를 거쳐 귀인으로 품계가 올랐다. 예종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으며, 사망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대자산에 있다. 영조와 정조 때 공빈 최씨가 문종의 계비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문종의 왕비가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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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미상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생몰년 미상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
조선의 후궁 -
숙의 나씨 (중종)
조선 중종의 후궁인 숙의 나씨는 나주 나씨로, 중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26세에 출산 중 사망하여 경빈 박씨와의 관계 속에서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으며, 그녀의 묘는 이천시의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
조선의 후궁 -
숙의 방씨
숙의 방씨는 철종의 후궁으로 두 딸을 낳았으나 모두 요절하였고, 사후 조귀인의 예에 따라 장례를 치렀으며 묘는 서삼릉 후궁 묘역으로 이장, 해당 묘역은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드라마에서 묘사되기도 했다. -
조선 예종 -
성종 (조선)
성종은 조선의 제9대 국왕으로, 세조의 손자이자 덕종의 아들이며 예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거쳐 친정 후 홍문관 설치, 경국대전 반포 등 조선의 통치 체제 확립과 문화 발전에 기여했으나, 폐비 윤씨 사사 사건과 서얼 차별 강화는 비판받기도 한다. -
조선 예종 -
세조 (조선)
세조는 조선의 제7대 왕으로서,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올라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육조직계제를 실시하고 경국대전 편찬을 시작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을 추진했다.
2. 생애
공빈 최씨는 1483년(성종 14년) 음력 6월 15일 종2품 숙의에서 종1품 귀인으로 봉해졌으나, 예종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대자산에 경혜공주의 묘 근처에 있다.
영조 때 공빈 최씨가 문종의 계비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1747년 (영조 23년), 충청도 유학 박통원이 《명사》 기록 등을 근거로 문종의 왕비에 대한 고찰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영조는 《실록》을 확인하고, 공빈 최씨는 문종의 왕비가 아니며, 현덕왕후 이후 왕비는 없었다고 선언했다. 1791년 (정조 때)도 비슷한 상소가 올라왔으나, 정조 역시 영조 때의 기록과 《명사》 정본을 근거로 공빈 최씨가 문종의 왕비가 아니라고 확인했다. 대한제국 고종 때에도 유사한 상소가 있었으나, 고종은 상소 내용을 이해시키고 뉘우치게 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2.1. 초기 생애 및 입궁
전주 최씨 최도일의 딸로, 1462년(세조 8년) 음력 6월 11일 당시 세자였던 예종의 후궁으로 선발되어 종5품 소훈에 책봉되었다. 공빈은 영순군의 부인과 자매간이며, 공빈의 고모할머니들은 각각 함녕군과 금성대군의 부인이고, 고모는 임영대군의 부인으로 귀성군을 낳는 등 왕실과 여러 갈래로 얽힌 인척이다.
恭嬪중국어 최씨는 1454년 전주 최씨 가문의 최도일과 경주 정씨 부인 정씨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오빠와 언니가 있었는데, 언니 또한 1457년에 왕실과 혼인하였다. 1462년 6월 11일(세조 8년), 8세의 나이로 당시 세자였던 예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세자빈 5품인 소훈으로 봉해졌다.
2.2. 후궁 생활
전주 최씨 최도일의 딸로, 1462년(세조 8년) 음력 6월 11일 당시 세자였던 예종의 후궁으로 선발되어 종5품 소훈에 책봉되었다. 공빈은 영순군의 부인과 자매간이며, 공빈의 고모할머니들은 각각 함녕군과 금성대군의 부인이었고, 고모는 임영대군의 부인으로 귀성군을 낳는 등 왕실과 여러 갈래로 얽힌 인척 관계였다. 1483년(성종 14년) 음력 6월 15일 종2품 숙의에서 종1품 귀인으로 봉해졌다. 예종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2.3. 묘소
정조 때 공빈 최씨의 무덤에 대해 수소문하였는데, 지평 정필조는 "고양 대자동에 경혜공주 무덤이 있는데, 그 옆에 예장한 큰 무덤이 있으나 비석이 마멸되어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묘지기는 "최빈의 묘라고는 하는데 자세한 빈호는 알 수가 없다."고 하였고, 공빈 가문의 후손 최광억은 "공빈의 묘가 대자동 경혜공주 무덤 왼쪽에 있다고는 하는데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다."고 하였다.
현재 공빈 최씨의 묘는 고양시 대자동 964-1번지 전주 최씨봉례공파종중회 선산 묘역에 있으며, 전주최씨 봉례공파에서는 매년 후손들이 공빈 최씨의 시향제를 올리고 있다. 전주최씨 봉례공파는 전주 최씨 중 가장 번성한 계파로 시조 최순작의 후손들이다. 문열공계 8세 평도공 최유경(평도공파), 9세 경절공 최사강(경절공파)에서 분파되어 10세 봉례증우의정 최승령을 시조로 모시고 있으며, 공빈 최씨는 11세 최도일의 막내딸이다. 9세 경절공 최사강(경절공파), 10세 봉례증우의정 최승령(봉례공파), 11세 최도일은 조선 왕조와 혼인 관계를 맺었다.
3. 사후 논란
영조 때 문종의 계비가 공빈 최씨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이 논란은 정조와 고종 때까지 이어졌다.
3.1. 문종 계비 논란
1747년(영조 23년) 음력 12월 16일, 충청도의 유학 박통원이 문종의 왕비에 대해 다시 살펴볼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박통원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했다.
* 《명사》〈열전〉에 문종 시기 명나라에서 조선의 왕비에게 고명을 내린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 고양에 공빈 최씨의 것으로 추정되는 묘가 있으며, 최씨 족보에 따르면 실제로 공빈 최씨가 존재하고 그 시기가 문종 때로 추정된다.
* 현덕왕후가 사망한 후 12년 동안 세자빈 및 왕비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이에 영조는 《실록》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다음 날, 영조는 조현명과 원경하에게 최씨에 대해 물었다. 원경하는 북경에서 "권씨는 곧 최씨인데, 최씨는 최도일의 딸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답했다. 영조는 "최도일은 임영대군 부인의 동생일 뿐"이라고 반박했고, 조현명은 《단종의궤》를 근거로 공빈 최씨에 대한 근거가 없다고 답했다. 영조는 강화도에 사람을 보내 《실록》을 자세히 알아보도록 했다.
문제가 된 《명사》의 기록은 "문묘의 왕후 최씨"라는 내용으로, 청나라의 왕홍서가 작성했다. 청나라에 다녀왔던 영의정 김재로는 이를 "권씨"로 고쳤다. 영조가 묻자 김재로는 "모르는 사이에 놀라 바꿨다"고 답했다. 영조는 《실록》을 확인한 후에야 결정할 수 있으며, 왕홍서의 기록은 신뢰할 수 없다고 말했다.
1747년(영조 23년) 음력 12월 21일, 영조는 춘추관 관리를 만나 공빈 최씨는 문종의 왕비가 아니며, 현덕왕후 이후 문종의 왕비는 없었다고 선언했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 현덕왕후 사후 문종이 후궁을 맞은 기록은 있으나 세자빈 책봉 기록은 없다.
* 소헌왕후 승하 시 세자빈 복제 및 문종 승하 시 왕비 복제를 마련하지 않았다.
* 문종 때 기록에 "공빈 최씨"라는 언급이 없다.
* 단종 때 강맹경 등이 "오랫동안 모후가 안 계셨으니 귀인 홍씨로 하여금 내정을 총괄하게 하소서"라는 상소를 올렸다.
영조는 왕홍서의 기록은 성씨를 잘못 쓴 것이고, 전주 최씨 족보에 공빈 최씨를 기록한 것은 억지라고 주장했다.
1791년(정조 15년), 사간 윤행리가 다시 이 문제를 제기했다. 정조는 영조 때의 기록과 왕홍서의 《명사》 초고를 검토했다. 이후 반포된 《명사》 정본에는 문종의 왕비가 권씨로 기록되어 있어, 공빈 최씨는 문종의 왕비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고종 때에도 비슷한 상소가 올라왔다. 조정은 상소를 올린 이국응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고종은 상소 원본을 돌려주고 이국응을 이해시키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