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다라노코니키시 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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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다라노코니키시 젠코는 백제 무왕의 손자이자 의자왕의 아들로, 631년경 형제들과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에 정착하여 덴지 천황으로부터 나니와(오사카)에 거처를 하사받았고, 지토 천황으로부터 구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라는 씨성을 받았다. 그는 일본 조정에서 높은 관직을 받았으며, 사후에는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에 구다라오 신사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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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다라노코니키시 젠코 | |
---|---|
기본 정보 | |
씨명 | 백제왕씨 |
이름 | 백제왕 선광 |
이명 | 부여용, 선광왕, 여선광 |
시대 | 아스카 시대 |
출생 | 미상 |
사망 | 지토 천황 7년 (693년 1월) |
관위 | 정광사, 증정광삼 |
주인 | 조메이 천황 → 고교쿠 천황 → 고토쿠 천황 → 사이메이 천황 → 덴지 천황 → 덴무 천황 → 지토 천황 |
씨족 | 백제왕씨 |
부모 | 아버지: 의자왕 |
형제 | 효, 태, 융, 연, 부여풍 |
자녀 | 창성 |
2. 생애
무왕의 손자이자 의자왕의 아들이다. 부여효, 부여태는 그의 형이고, 부여융, 부여연, 풍왕은 그의 형 또는 동생이라는 설이 있다. 본명은 부여용 또는 부여선광이며, 여용, 여선광 등으로도 불린다. 오오치씨 족보와 토요타씨 족보에는 그가 풍왕의 아들이라 기록되어 있다. 속일본기(續日本紀)에 따르면 631년경 부여 풍과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가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체류하였다고 한다.
부여풍은 백제 부흥군을 이끌고 나당 연합군과 싸우다 패하여 고구려로 도망갔지만, 젠코는 왜에 그대로 정착하였다. 왜국 조정은 젠코를 중용하며 왕족으로 예우하였다.[8] 젠코의 자손들은 일본 오사카에서 백제계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던 히라가타(당시의 가타노)로 터전을 옮겼다. 젠코의 후손 경복이 무쓰노 군의(지금의 도쿄) 지방장관으로 재임하던 시기는 쇼무 천황의 치세였다.[8]
스이메이 천황 시대에 백제 의자왕에 의해 형 풍(부여풍장)과 함께 인질로 일본에 보내져 궁가에서 근시하였다. 이후 사이메이 천황 6년(660년) 백제 멸망, 덴지 천황 원년(662년) 부여풍의 백제 귀국, 덴지 천황 2년(663년) 백촌강 전투 등이 있었지만, 젠코는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머물렀다.[1] 백촌강 전투로 인해 귀국이 불가능해진 젠코는 덴지 천황 3년(664년) 나니와에 거주지를 마련하였다.[2]
2. 1. 일본에서의 활동
무왕의 손자이자 의자왕의 아들로, 본명은 부여용 또는 부여선광이다. 631년경 부여 풍과 함께 일본에 왔다가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체류하였다고 한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부여풍은 백제 부흥군을 이끌고 나당 연합군과 싸우다 패하여 고구려로 도망갔지만, 젠코는 왜국에 그대로 정착하였다. 왜국 정부는 젠코를 중용하였고 왕족으로 예우하였다.[8]664년 3월 텐지 천황으로부터 나니와(지금의 오사카)에 거처를 하사받고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일본 정착 후 지토 천황으로부터 구다라노코니키시씨를 사성받고 해당 가문의 선조가 되었다.
덴무 천황 4년(675년) 원단 의식에서는 신라 시정(仕丁)과 사위녀(舍衛女) 등과 함께 약과 진귀한 물건을 헌상했다.[3] 주조 원년(686년) 덴무 천황의 장례에서 손자 량우가 젠코를 대신하여 뢰(誄)를 선언했다.[4]
지토 천황 통치 시기에는 백제왕이라는 씨성을 하사받았으며,[1] 691년까지 정광사(후의 삼위에 상당)의 관위를 받았다.[5] 같은 해에 가봉 100호를 받아 기존 분과 합쳐 봉호 200호를 받았다.[6] 이를 통해 일본 조정에서 주요 호족과 같은 대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693년 1월에는 정광참의 증위와 부물을 받았으며,[7] 이보다 조금 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생전 관직은 종3위 정광사(正廣肆)였고, 693년 1월에는 지토 천황으로부터 정광삼(正廣參) 정삼위(正三位)의 관위(官位)와 조위품(弔慰品)을 받았다.
2. 2. 사망
693년 정월, 젠코는 정광참(正廣參)의 증위와 부물(賻物)을 받았다.[7] 이는 젠코가 이보다 조금 전에 사망했음을 의미한다. 686년 덴무 천황의 장례에서는 젠코의 손자 량우가 젠코를 대신하여 뢰(誄)를 선언했다.[4]2. 3. 사후
지토 천황 7년(693년) 정월에 정광참(正廣參)의 증위와 부물을 받았으며, 이보다 조금 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7] 주조 원년(686년) 덴무 천황의 장례에서 손자 량우가 젠코를 대신하여 뢰(誄)를 선언했다.[4]일본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에는 백제 왕족 선광왕의 신주를 모신 사당 구다라오 신사가 세워졌다. 후일 간무 천황의 생모는 무령왕의 후손인 다카노노 니가사(高野新笠)이고, 자신의 비빈(妃嬪)도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 젠코의 후손인 구다라노코니키시에서 맞아들였다.[9]
3. 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의자왕[1] | |
어머니 | 불명 | |
배우자 | 불명 | |
아들 | 백제왕 창성 | ? ~ 674[1] |
분류:백제 왕족
분류:일본의 백제계 도래인
분류:아스카 시대 사람
분류:나라 시대 사람
분류:600년대 태어남
분류:680년대 죽음
분류:오치군
분류:백제 유민
4. 기타
무왕의 손자이자 의자왕의 아들로, 부여효, 부여태는 그의 형이고, 부여융, 부여연, 풍왕은 그의 형 또는 동생이라는 설이 있다. 그의 본명은 부여용 또는 부여선광이다. 일명 여용, 여선광 등으로 부른다. 오오치씨 족보와 토요타씨 족보에 의하면 그는 풍왕의 아들이라 한다.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의하면 그는 부여 풍(夫餘豊)과 함께 631년경 일본에 왔다가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체류하였다 한다.[8]
부여풍은 부흥군을 이끌고 나당 연합군과 싸우다 참패해서 고구려로 도망했고, 자신은 왜국에 그대로 정착하였다. 왜국 정부는 선광을 중용하였고 왕족으로 예우하여 주었다.[8] 선광의 자손들은 일본 오오사카에서 백제계 사람들이 많이 사는 히라가타(당시의 가타노)로 터전을 옮겼다. 선광의 후손 경복이 무쓰노 군의(지금의 도쿄) 지방장관으로 있을 때는 쇼우무 천황의 치세였다.[8]
664년 3월 텐지 천황으로부터 나니와(難波, 지금의 오사카)에 거처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일본 정착 후 지토 천황으로부터 구다라노코니키시씨를 사성받고 해당 가문의 선조가 되었다. 생전 관직은 종3위 정광사(正廣肆)에 이르렀고, 693년 1월에는 지토 천황으로부터 정광삼(正廣參) 정삼위(正三位)의 관위(官位)와 조위품(弔慰品)을 받았다. 덴지 천황과 지토 천황으로부터 왕족으로 인정받고 일본 황족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다. 지토 천황이 그에게 수여한 백제왕은 작위가 아니라 성씨로 보고 있다.
참조
[1]
서적
続日本紀
"766-08-07"
[2]
서적
日本書紀
"664-04"
[3]
서적
日本書紀
"675-02-01"
[4]
서적
日本書紀
"686-10-30"
[5]
서적
日本書紀
"691-02-12"
[6]
서적
日本書紀
"691-02-18"
[7]
서적
日本書紀
"693-02-18"
[8]
웹사이트
아스카 백제 문화를 찾아서 : 7. 히라가타의 백제사사적(百濟寺寺跡)과 백제왕 신사
http://www.bostonkor[...]
[9]
뉴스
부여계의 성지, 히라노 신사
http://www.pressian.[...]
프레시안
2009-01-21
[10]
문서
장남은 부여융 아니면 부여효이다.
[11]
문서
의자왕의 차남이 확실하며 나머지 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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