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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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여태는 백제 의자왕의 차남으로, 660년 나당 연합군이 사비성을 포위하자 스스로 왕을 칭했다. 의자왕의 적손 부여문사의 반발과 백성들의 이탈로 결국 항복했으며, 이후 낙양으로 끌려간 후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드라마 삼국기, 계백, 대왕의 꿈 등 여러 작품에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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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노는 졸본 부여 또는 연타발의 딸로, 북부여 우태와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으며, 고구려 동명성왕과 혼인하여 고구려 건국을 돕고 두 아들과 함께 백제를 건국한 인물이다. - 백제의 왕족 - 진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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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태 | |
---|---|
기본 정보 | |
국적 | 대한민국 |
출생 | 기원전 6세기경 |
사망 | 기원전 6세기경 |
가족 | 아버지: 부여위구태 배우자: 미상 아들: 부여창 |
관력 | |
직업 | 군주 |
봉호 | 부여국의 군주 |
재위기간 | 미상 |
칭호 | 부여태왕 |
2. 생애
부여태는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차남이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후 낙양으로 끌려갔으며,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2]
2. 1. 백제 멸망과 항복
660년(의자왕 2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군을 물리치고 수도 사비에 육박하자 의자왕과 태자[2]는 웅진으로 피신하였다. 사비성에 남아있던 부여태는 내성이 포위당하는 와중에도 왕을 칭하였다. 의자왕의 적손 부여문사는 ‘왕과 태자가 성을 나갔는데 숙부가 멋대로 왕을 칭했으니 당군이 물러나면 우리 부자(父子)는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며 그 측근을 데리고 성 아래로 내려갔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 부여태도 말릴 수 없었다. 소정방의 병사가 성에 올라 당나라 깃발까지 꽂으니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2. 2. 가계
형은 부여융 아니면 부여효 중 하나로 기록이 상이하며 부여태를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의 순서도 정확히 알 수 없다.[1]
2012년부터 2013년까지 KBS1 TV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 허정민이 부여태 역을 연기했다.
3. 대중문화에서의 등장
3. 1. 드라마
扶餘泰중국어가 등장하는 드라마는 다음과 같다.
참조
[1]
서적
Samguk Sagi
http://www.koreandb.[...]
2007-09-27
[2]
문서
백제의 마지막 태자에 대해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대당평백제국비]]〉, 〈[[당유인원기공비]]〉 등 [[중국]]의 기록은 [[부여융]]이라 하고, 《[[삼국사기]]》는 [[부여효]]라 하였다. 《삼국사기》28권 백제본기 제6 의자왕 20년, 44권 열전 제4 [[김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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