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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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풍왕은 백제의 왕족으로, 의자왕의 아들이다. 631년 외교적 인질로 일본에 건너가 약 30년간 거주했으며,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 부흥 운동을 위해 귀국하여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귀실복신과의 갈등, 백강 전투 패배 이후 고구려로 망명했다가 당나라에 끌려가 유배되었다. 그의 정확한 사망 시점과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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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왕 - 백강 전투
백강 전투는 663년 백제 부흥군과 일본군 연합군이 나당 연합군과 금강 하구에서 벌인 전투로, 백제 부흥 운동의 종말과 동아시아 국제 정세 변화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일본의 국가 체제 개혁과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풍장왕 - 주류성
주류성은 백제 부흥운동 당시 백제 유민과 왜군이 근거지로 삼았던 성으로, 현재까지 정확한 위치는 논쟁 중이며, 여러 학설과 함께 충청남도 홍성의 학성산성, 서천의 건지산성, 세종특별자치시 연기군의 당산성, 전라북도 정읍의 두승산성, 부안의 위금암산성 등이 주요 후보지로 거론된다. - 백제 부흥운동가 - 흑치상지
흑치상지는 백제 부흥 운동에 참여했다가 당나라에 투항하여 당나라 장군으로 활약하며 티베트, 돌궐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나, 모함으로 옥사 후 명예를 회복한 인물이다. - 백제 부흥운동가 - 도침
도침은 백제 멸망 후 귀실복신, 부여풍과 함께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으나 내분으로 복신에게 살해되었고, 이후 백강 전투에서 부흥 운동이 붕괴된 인물이다. - 백제 유민 - 예군
예군은 백제 멸망 전후 당나라에서 활동하며 백제 유민들을 위무하는 데 힘쓴 백제 좌평 출신의 인물로, 시안에서 발견된 묘지명에 '일본'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여 논쟁이 있다. - 백제 유민 - 억례복류
억례복류는 7세기 백제 유민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후쿠도메로도 불렸으며 덴지 천황으로부터 대산하의 관위를 받은 인물이고,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근초고왕의 손자이자 석야련의 조상이다.
풍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부여풍 |
한자 표기 | 扶餘豊 |
로마자 표기 | Buyeo Pung |
다른 이름 | 풍장왕(豊璋王)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가족 | 아버지: 의자왕 |
왕위 | |
즉위 | 662년? - 668년경? |
직함 | 백제 왕 |
생애 | |
주요 활동 | 왜국에 볼모로 있었음. 백제 부흥 운동에 참여. |
가계 | |
아버지 | 의자왕 |
배우자 | 다우기고(多宇氣古)의 딸 |
자녀 | 부여사(扶餘絲) |
2. 생애
풍왕의 도래 시기는 『일본서기』에 따르면 스메이 천황 3년(631년) 3월이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의자왕 13년(653년) 왜국과 통호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 무렵이 아니겠는가 하는 설도 있다. 황극 천황 원년(642년) 1월, 백제에서 "대란"이 발생하여 "제왕자 아교기"와 그 가족 및 고관들이 섬으로 유배되었고, 4월에 그 교기 등이 대사로 왜국에 내조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교기 = 풍왕 동일 인물 설에서는 이때 왜국에 도래했다고 본다. 스즈키 야스미는 이 일련의 흐름을 교기 = 풍왕이 "대란"으로 인해 태자의 지위를 이복 형에게 빼앗기고 유배된 후, 왜국에 인질로 국외 추방된 것으로 보고 있다.[3]
663년 6월, 풍왕은 귀실복신을 살해했다. 이로 인해 백제 부흥군은 현저히 약화되었고, 당나라-신라 연합군의 침공을 초래하게 되었다. 풍왕은 주류성에 웅거하여 왜국의 원군을 기다렸지만, 8월 13일 성을 버리고 탈출하여 왜국 원군과 합류했다. 이후 당나라 본국에서 유인궤가 이끄는 7,000명의 구원 부대가 도착했고, 8월 27일과 28일 양일간 왜국 수군과 백촌강(한국에서는 백강, 백마강이라고도 한다)에서 충돌했다. 그 결과, 왜국-백제 연합군은 대패했다.
2. 1. 일본 생활
부여풍은 의자왕의 아들로, 631년 일본에 외교 인질로 건너가 약 30년간 거주하였다.[7] 삼국사기에는 "일찍이 왜에 인질로 있던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삼았다"[8]고 기록되어 있다.일본에서는 다우기고(多宇氣古)의 딸과 결혼했으나, 왕비의 생몰년과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9]
일본서기에 따르면, 650년 2월 15일 난바 궁에서 있었던 백치(흰꿩) 헌상 의식에 부여풍이 참석했다. 이는 부여풍이 일본과 백제 간의 관계를 보증하는 인질이었지만, 다이 야스마로의 일족인 다노 오오마로의 여동생과 결혼하는 등, 왜국에서의 대우가 나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자, 왜국의 실권자였던 나카노 오오에 황자(후의 덴지 천황)는 백제 부흥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662년 5월, 사이메이 천황은 부여풍에게 아즈미노 히라후 등이 이끄는 병사 5,000명과 군선 170척을 주어 백제로 파견하였고, 부여풍은 약 30년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2. 2. 백제 부흥운동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을 비롯한 2천 명의 왕족, 귀족, 백성이 당나라로 끌려가자, 무왕의 조카인 좌평 복신, 흑치상지, 도침 등에 의해 부여풍은 왜국 현지에서 왕으로 추대되어 왜군과 함께 귀국하였다. 백제 멸망 소식이 왜국에 전해지자 텐지 천황은 부여풍에게 귀국하여 왕위를 이으라 명하고 왜군을 파견하였다.[10]그러나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하면서 부여풍은 제사만 맡게 되었다. 결국 663년 부여풍은 복신을 살해하고, 왜의 군사를 동원하여 나·당 연합군에 맞섰으나, 백강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고, 근신만을 거느리고 배 한 척으로 고구려로 도주하였다.[10]
2. 3. 고구려 망명과 최후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패한 부여풍은 몇몇 사람들과 함께 고구려로 도망쳤다.[4] 그러나 고구려는 668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면서 내분에 휩싸였고, 부여풍은 당나라 군대에 포로로 잡혔다.[5] 부여풍은 고구려 왕족들과 함께 당나라 수도로 압송되었는데, 보장왕을 비롯한 고구려 왕족들은 당나라로부터 용서를 받고 관작까지 받았지만, 부여풍은 용서받지 못하고 중국 영남 지방으로 유배되었다.[5]부여풍의 동생 부여용은 형과 함께 왜국에 인질로 와 있었으나,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귀국하지 않았다. 백촌강 전투 이후, 지토 천황은 부여용에게 백제왕이라는 성을 하사하였다.
부여풍의 정확한 사망 시점, 장소, 매장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3. 사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같은 정사에서는 백제의 마지막 왕을 의자왕으로 보았고, 한국의 현행 국사 교과서 역시 의자왕을 끝으로 연대를 작성한다. 따라서 정식 즉위식을 치르지 못한, 중앙 정부가 붕괴된 상태에서 복신과 도침에 의해 임시로 추대된 부여풍을 정식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다만 조선 후기 실학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일본의 시각을 인용하여 부여풍을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언급했으며, 660년부터 663년까지를 부여풍의 재위 기간으로 보고 백제의 멸망을 663년으로 기록하였다.[11]
4. 가계
4. 1. 부모
扶餘豊중국어의 아버지는 백제 무왕이며, 어머니는 알려지지 않았다.[12]4. 2. 형제
무왕의 아들 부여사의 아들로, 형제로는 부여효, 부여태, 부여연, 부여융, 부여용, 부여선광 등이 있었다.[12][13]4. 3. 배우자
왕비: 다우기고(多宇氣古)의 딸 다씨(多氏)4. 4. 자녀
扶餘絲|부여사중국어[12]5. 대중문화
1992년~1993년 KBS 드라마 《삼국기》, 2006년~2007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 2012년~2013년 KBS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 풍왕이 등장한다. 나카무라 마리코의 만화 《천지천무 - 신설·일본서기 -》에도 주요 등장인물로 나오며, 백강 전투 이후 일본으로 도망쳐 나카토미노 가마타리로 칭한다.[1]
5. 1. 드라마
- 1992년~1993년 KBS 드라마 《삼국기》, 배우: 조재현
- 2006년~2007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 배우: 이종박
- 2012년~2013년 KBS 드라마 《대왕의 꿈》, 배우: 장태성
- 나카무라 마리코의 만화 《천지천무 - 신설·일본서기 -》에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백강 전투 이후 일본으로 도망쳐 나카토미노 가마타리로 칭한다.
5. 2. 만화
나카무라 마리코의 만화 천지천무 - 신설·일본서기 -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백강 전투 이후 일본으로 도망쳐 나카토미노 가마타리로 칭한다.6. 기타
만엽집 권1 제5번과 제6번에 軍王|이쿠사노 오오키미일본어라고 칭하는 인물이 스메이 천황의 행차에 수행했을 때 지은 일본 노래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군왕"을 "고니키시노오오키미"라고 읽으며 풍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6]
6. 1. 군왕 칭호
『만엽집』 권1 제5번과 제6번에 軍王|이쿠사노 오오키미일본어이라고 칭하는 인물이 스메이 천황의 행차에 수행했을 때 지은 와카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군왕"을 "고니키시노오오키미"라고 읽으며 풍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6]참조
[1]
서적
Samguk Sagi
http://www.koreandb.[...]
2007-09-27
[2]
간행물
豊璋と翹岐
[3]
서적
日本の古代国家の形成と東アジア
吉川弘文館
[4]
문서
日本書紀
[5]
문서
資治通鑑
https://web.archive.[...]
[6]
서적
古代豪族
講談社
[7]
서적
일본서기
[8]
서적
삼국사기
[9]
문서
일본서기, 속일본기
[10]
문서
자치통감
[11]
문서
동사강목
[12]
문서
장남은 부여융 아니면 부여효이다.
[13]
문서
의자왕의 차남이 확실하며 나머지 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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