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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제헌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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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민제헌의회는 1789년 프랑스에서 설립되어 프랑스 혁명 시기에 활동한 의회이다. 경제 파탄과 사회 혼란 속에서 삼부회가 소집되었으나 의결 방식 문제로 교착 상태에 빠지자, 제3신분 대표들이 국민의회를 결성하고 테니스 코트의 서약을 통해 헌법 제정을 결의하면서 시작되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이후 실질적인 정부 역할을 수행하며, 봉건제 폐지, 인권 선언 채택, 가톨릭 교회 재산 국유화 등의 개혁을 추진했다. 국왕의 거부권과 의회 제도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좌익과 우익의 기원이 형성되었으며, 바렌 도주 사건을 거치며 1791년 헌법을 제정하고 9월 30일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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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제헌의회 - [의회]에 관한 문서
개요
이름제헌 국민 의회
로마자 표기Assemblée nationale constituante
국가프랑스 왕국
의회 유형단원제
의원 수가변적; 총 1315명
회의 장소가변적
설립1789년 7월 9일
해산1791년 9월 30일
이전 의회국민 의회
다음 의회입법 의회
프랑스 국민 의회 휘장 (1789-1792)
프랑스 국민 의회 휘장 (1789-1792)

2. 역사

18세기 후반 루이 16세 치세 하에 프랑스 경제는 파탄 직전에 놓였다. 이상 기후로 농업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농민과 노동자 등 서민들의 생활은 비참한 수준이었고, 폭동, 시위, 약탈 등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다. 루이 16세는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12] 결국 그는 특권층인 성직자와 귀족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세제 개혁을 위해 175년 만에 삼부회를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1789년 5월 5일 개최된 삼부회에서 의결 방법을 둘러싼 제3신분(평민)과 제1, 2신분(성직자, 귀족)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파행이 계속되자, 6월 17일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 주도로 제3신분 대표들은 별도로 '국민의회'를 결성했다.[13] 이들은 자신들의 동의 없이 어떠한 세금도 징수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14] 분노한 루이 16세는 '국민의회' 해산 명령과 함께 회의장을 봉쇄했다.

이에 국민의회는 굴복하지 않고 6월 20일 테니스 코트의 서약을 통해 헌법 제정 시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결의했다.[13][15][16][17][18] 국왕은 국민 의회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고, 많은 성직자와 일부 귀족이 의회에 합류했다. 이후 국왕의 권고에 따라 나머지 세력도 국민 의회에 참여하면서 혼란은 일단 수습되었다. 7월 9일 국민의회는 국민제헌의회로 개칭되어 헌법 제정 준비에 착수했다.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고, 혁명은 각지의 농촌으로 확산되며 영주에 대한 폭동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 폭동으로 특권 신분인 귀족과 성직자 다수가 망명했고, 앙시앵 레짐은 붕괴되었다. 의회는 8월 11일 법령으로 봉건제 폐지를 결정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영주 재판권 등 인격적 지배만을 부정했을 뿐 지대 폐지 등의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8월 26일에는 프랑스 인권 선언(“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제정되어 신분제 사회의 틀이 완전히 부정되고, 기본적인 인권을 가지며 자유롭고 권리에 있어서 평등시민으로 구성되는 시민 사회의 여러 원칙이 확인되었다.

9월 11일 회의에서 "국왕의 법률 거부권", "단원제·양원제" 문제를 두고 의장석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국왕 거부권 있음·양원제(귀족원 있음)"를 주장하는 보수·온건파, 왼쪽에 "국왕 거부권 없음·단원제(귀족원 없음)"를 주장하는 공화·혁신파가 자리 잡았다. 이는 현재 좌익・우익의 유래가 되었다.[11]

1789년 11월, 국민제헌의회는 가톨릭 교회의 재산국유화를 결정했다. 1790년부터 이 자금을 담보로 아시냐 채권(사실상의 지폐)을 발행했지만, 신용이 낮아 경제 혼란을 야기했다. 1790년부터 경제면에서 자유주의적인 여러 입법이 이루어졌고, 1791년에는 길드도 폐지되었다. 1790년 7월 성직자 민사 기본법에 의해 성직자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을 요구했다. 이러한 정책은 로마 교황의 반감을 사, 혁명 정부와 로마 교황의 대립 구도를 만들었다.

1791년 6월 말, 프랑스 국왕 일가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국경 부근으로 도주를 시도한 바렌 도망 사건이 발생했다. 의회는 이 사건을 국왕의 유괴 사건이라고 속였지만, 이 일로 민중의 반발을 사 대규모 반 부르봉 왕가·반 의회 운동이 파리에서 일어났다. 정부는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여 사태를 수습했다. 이러한 대응을 둘러싸고 혁명을 조기에 수습하려는 세력(푀양파)과 더욱 급진적인 세력으로 내부 분열이 심화되었다. 9월 3일 프랑스 최초의 헌법(1791년 헌법)이 가결되었고, 곧 국왕 루이 16세에 의해 승인되어 9월 말에 의회는 해산되었다.

2. 1. 설립 과정

18세기 후반, 루이 16세 치하의 프랑스는 심각한 경제난에 직면했다. 이상 기후로 인한 농업 생산량 급감과 더불어 경제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특히 서민들의 생활은 비참한 수준이었다.[12] 루이 16세는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1789년 5월 5일, 175년 만에 삼부회를 소집하여 특권층인 성직자와 귀족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세제 개혁을 시도했다.

삼부회에서는 의결 방법을 둘러싸고 제3신분(평민)과 제1, 2신분(성직자, 귀족)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1789년 6월 17일,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의 주도로 제3신분 대표들은 별도로 '국민의회'를 결성하고, 자신들의 동의 없이는 어떠한 세금도 징수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13][14]

이에 분노한 루이 16세는 국민의회 해산 명령과 함께 회의장을 봉쇄했으나, 국민의회는 6월 20일 테니스 코트의 서약을 통해 헌법 제정 시까지 해산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13][15][16][17][18]

장 루이 프리외의 그림을 바탕으로 피에르 가브리엘 베르토가 제작한 구리 판화(1789). 대표자들은 프랑스에 새로운 헌법을 부여할 때까지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미완성 작품 테니스 코트의 서약


결국 국왕은 국민의회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고, 많은 성직자와 일부 귀족이 의회에 합류했다. 이후 국왕의 권고로 나머지 세력도 국민의회에 참여하면서 혼란은 일단락되었다. 7월 9일, 국민의회는 국민제헌의회로 개칭되어 헌법 제정 준비에 착수했다.

2. 2. 프랑스 혁명의 발발

루이 16세는 국민제헌의회의 활동에 불만을 품고 군대를 동원하여 탄압하려 했다. 이 소식을 접한 파리 시민들은 제헌의회를 보호하기 위해 폭동을 일으켰다. 7월 14일 시민들은 무장을 위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는데, 이로써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19]

바스티유 감옥 습격


혁명은 각지의 농촌으로 퍼져나가 영주에 대한 폭동이 일어났다. 이 폭동으로 특권 신분인 귀족, 성직자 대부분이 망명하고 앙시앵 레짐이 무너졌다. 이러한 무질서한 무력 봉기는 특권 신분의 권력뿐만 아니라 의회까지 부정할 수 있는 것이어서 의회는 사태 수습에 나섰다. 8월 4일에 발령된 법령으로 봉건제의 폐지를 결정하고[19] 사태를 진정시켰지만, 영주재판권을 비롯한 인격적인 지배를 부정하는 것, 지대 폐지 등의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8월 26일에는 《프랑스 인권 선언(“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채택하였다.[19] 이로써 신분제 사회 구조가 완전히 부정되고 기본적인 인권, 자유, 권리와 자격이 평등한 시민으로 구성되는 시민 사회의 원칙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의회의 결정은 국왕 정부가 인정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이미 구체제의 붕괴로 인해 정부의 권력은 한계에 달해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루이 16세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동생 아르투아 백작에게 국왕 정부의 권한을 쥐여주고 있었지만, 절대 왕정은 여기서 끝난 셈이다. 국민 의회는 이러한 법령을 제정하고 정부 대신 국가의 주권자적 지위를 확립하였다.

2. 3. 경제, 종교 정책

1789년 11월, 제헌 국민 의회는 가톨릭 교회의 재산을 국유화하기로 결정했다.[1] 그 자금을 담보로 하여 다음 해인 1790년부터 아시냐 채권(사실상의 지폐)을 발행했지만, 그 신용은 매우 낮아 경제 혼란을 일으켰다.[1] 1790년부터 경제면에서 자유주의적인 여러 입법이 이루어졌고, 1791년에는 길드도 폐지되었다.[1] 1790년 7월 성직자 민사 기본법에 의해 성직자의 국가에 대한 충성을 요구했다.[1] 이러한 정책은 로마 교황의 반감을 사, 혁명 정부와 로마 교황의 대립 구도를 만들었다.[1]

2. 4. 바렌느 도주 사건과 헌법 제정

1791년 6월 말,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 일가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국경 부근으로 도주를 시도한 바렌 도망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의회는 대응에 나서야 했다.[1] 혁명의 급진화를 우려한 당시 의회 다수파는 이 사건을 국왕의 유괴 사건으로 발표했지만, 이로 인해 민중들의 반발을 샀다. 파리에서는 대규모 반 부르봉 왕가·반 의회 운동이 일어났으며, 정부는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여 사태를 수습했다.[1]

이러한 대응을 둘러싸고 혁명을 조기에 수습하려는 세력(푀양파)과 더욱 급진적인 세력 간의 내부 분열이 심화되었다.[1] 이러한 가운데, 1791년 9월 3일 프랑스 최초의 헌법(1791년 헌법)이 가결되었다.[1] 이 헌법은 곧 국왕 루이 16세에 의해 승인되었고, 9월 말에 의회는 해산되었다.[1] 푀양파에게 이는 혁명의 종료를 의미했지만, 혁명은 이제부터 더욱 급진화되어 갔다.[1]

3. 1789년 여름 국민의회 구조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 이후, 국민제헌의회는 프랑스의 실질적인 정부가 되었다. 역사가 프랑수아 미네는 "의회는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조합은 의회에 의존했고, 국민 방위군은 의회에 복종했다... 국왕의 권력은 정당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종을 받지 못해 어느 정도 효력이 정지되었으며, 의회는 자체적인 활동으로 이를 보충해야 했다."라고 평가했다.[19]

티모시 태킷에 따르면, 1789년 7월 중

3. 1. 주요 인물

혁명 초기 국민의회를 이끈 주요 인물들은 다양한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 보수적 반대 세력 (우파):
  • 자크 앙투안 마리 드 카잘레스: 귀족 출신으로 귀족 계급의 입장을 대변했다.
  • 장-시프랭 모리 신부: 교회의 대표자였지만, 다소 완고한 입장을 취했다.
  • 군주파: 자크 네케르와 연대하여 영국식 헌법 모델에 따라 귀족원과 하원으로 구성된 양원제를 갖춘 프랑스를 만들고자 했다.
  • 피에르 빅토르, 말루에 남작
  • 트로핌-제라르, 랄리-톨랑달 후작
  • 스타니슬라 마리 아델라이드, 클레르몽-토네르 백작
  • 장 조제프 무니에
  • 좌파 (국민당): 혁명과 민주주의를 지지했으며, 중산층의 이익을 주로 대표했지만 일반 대중에게도 공감을 얻었다.
  • 오노레 미라보
  • 라파예트 후작
  • 장-실뱅 바예이: 이 두 명은 귀족 출신이었다.
  • 아드리앵 뒤포르
  • 앙투안 피에르 조제프 마리 바르나브
  • 알렉상드르 라메: 이들은 당시 가장 급진적인 지도자로, 혁명이 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샤를 라메: 알렉상드르 라메의 형제.


엠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 신부는 입헌 군주제를 원하는 사람들과 더 민주적이고 공화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좁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3]

4. 의사진행 절차

국민제헌의회의 회의록 및 관련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사를 참조하면 된다.


  • 봉건제 폐지부터 성직자 민사기헌까지의 프랑스 혁명
  • 1790년 여름부터 입법의회 수립까지의 프랑스 혁명


국민제헌의회 의장 목록은 프랑스 국민의회 의장 목록을, 국민제헌의회 의원 명단(부분 목록)은 1789년 국민제헌의회 의원 가나다순 목록을 참조하면 된다.

5. 국왕의 복위

1791년 여름, 국민제헌의회는 국왕이 헌법을 수용한다면 왕위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은 국왕의 실패한 바렌느 도주 사건 이후에 내려졌다.[8] 이 결정은 많은 파리 시민들을 분노하게 하여 항의 시위를 벌였고, 주요 시위 중 하나는 샹 드 마르스 학살로 번져 국민 방위군에 의해 12명에서 50명이 사망했다.[9]

6. 해산

2년간의 혁명적 변화를 겪은 후, 국민제헌의회는 1791년 9월 30일에 해산되었다. 다음 날, 1791년 헌법이 발효되어 입법 의회에 권한을 부여했다.

참조

[1] 서적 The French Revolution and Napoleon 1964
[2]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French Revolution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3] 서적 Citizens: A Chronicle of The French Revolution Penguin Books Limited 2004
[4] 서적 Source Problems on the French Revolution Harper & Brothers 1913
[5] 서적 The A to Z of the French Revolution Scarecrow Press 2007
[6] 서적 History of the French Revolution from 1789 to 1814 1856
[7] 서적 Becoming a Revolutionary: The Deputies of the French National Assembly and the Emergence of a Revolutionary Culture (1789–1790). Princeton University Press
[8] 서적 The French Legislative Assembly of 1791 https://books.google[...] Brill Archive 1988
[9] 서적 Lafayette
[10] 서적 Rights, Representation, and Reform: Nonsense Upon Stilts and Other Writings on the French Revolution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11] 서적 The Government and Politics of France https://books.google[...] Routledge
[12]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13]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14]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15] 지식백과 테니스 코트의 서약 pmg 지식엔진연구소 1789-06-17
[16] 백과사전 테니스코트의 서약 [Serment du Jeu de Paume] 두산백과
[17] 백과사전 테니스코트의 서약 (Serment du Jeu de Paume) 다음백과 사전
[18] 교과서 '[고등교과서 세계사]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 https://100.daum.net[...] 천재교육 편집부
[19]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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