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궈타이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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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궈타이위안은 타이완 출신의 야구 선수로, 아마추어 시절 투수로 전향하여 두각을 나타내며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동양 특급"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85년부터 1997년까지 일본 프로 야구(NPB)의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13년간 활약하며, 퍼시픽 리그 MVP와 베스트 나인,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다. 은퇴 후에는 타이완 프로 야구 감독 및 코치, 2007년과 2015년에는 중화 타이베이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으며, 2020년 대만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선수 시절 스리쿼터 투구폼으로 최고 158km/h의 강속구와 날카로운 슬라이더, 슈트를 구사하며 뛰어난 제구력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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궈타이위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궈타이위안, 2010년 중화 타이베이 야구 국가대표팀 코치 시절
궈타이위안, 2010년 중화 타이베이 야구 국가대표팀 코치 시절
출생일1962년 3월 20일
출생지타이난시, 타이완
포지션투수
투구/타석우투/우타
선수 경력
프로 입단1985년
첫 출장1985년 4월 8일
마지막 출장1997년 10월 5일
소속 구단세이부 라이온스 (1985–1997)
NPB 성적
리그NPB
등판 경기 수272
승-패117–68
세이브18
평균 자책점3.16
탈삼진1,069
수상 내역
주요 수상퍼시픽 리그 MVP (1991)
올스타2회 (1990, 1995)
감독 및 코치 경력
주요 경력청타이 코브라즈 (2004–2005, 감독)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13–2014, 코치)
퉁이 세븐일레븐 라이온스 (2015–2016, 감독)
현재 직책푸방 가디언스 고문
신체 정보
신장180 cm
체중72 kg
기타 정보
한자 표기郭泰源
가명 (일본어)かく たいげん (가쿠 다이겐)
로마자 표기Kuo Tai-Yuan (궈 타이위안)
대표팀차이니스 타이베이 대표팀
올림픽1984년
명예의 전당2020년 (82.1% 득표율, 경기 부문)

2. 아마추어 시절

궈타이위안은 타이난시 타이완에서 태어났다.[6][7] 타이난시의 농가에서 형과 누나가 각각 3명씩 있는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6][7] 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고, 클럽이 전 기숙사제였기 때문에 부모님 곁을 떠났다.[8] 원래 유격수였던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감독이 강견을 높이 평가해 투수로 전향했다.[9] 처음에는 투수로 전향하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했으나, 곧바로 수준급의 강속구와 슬라이더로 명성을 얻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합작금고은행에 취직했고, 1982년에는 중화민국 육군 야구부에 입대했다.[9]

1983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중화 타이베이대한민국의 경기에서 궈타이위안은 17이닝 연속 무실점 투구를 하였고, 그의 강속구는 최고 154km를 기록했다. 그는 결국 승리를 거두었고, 중화 타이베이가 1984년 하계 올림픽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

1984년 올림픽 예선에서 미국을 상대로 궈타이위안은 최고 158km[1]의 공을 던졌고, 완투하며 단 2실점(1자책점)만을 기록하여 "동양 특급"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중화 타이베이는 결국 윌 클락, 마크 맥과이어 등이 포함된 미국 팀에게 패했다. 궈타이위안은 이후 일본과의 준결승전에서 4.2이닝 동안 1실점하며 호투했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아시아 예선을 겸해 실시된 제12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대만·일본·대한민국의 3개국 동시 우승에 기여했다. 게다가 일본과의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표 결정전(대한민국은 이미 출전 결정)에서는 이케다 치카오키와의 투수전을 9회 2안타 1볼넷 완봉 승리로 제압하여,[10] 출전권 획득의 주역이 되었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도 대만 대표팀의 에이스로 출전했다. 예선 리그 미국전에서는 최고 시속 158km를 기록했고,[11] 108구를 던져 12탈삼진으로 완투했지만, 7회에 존 마르자노에게 홈런을 맞고 2실점으로 패했다. 준결승 일본전에서는 1회에 히로사와 카츠미의 타구가 오른쪽 정강이를 직격하는 불운이 있었고,[12] 4회 2/3를 던져 6안타 1실점으로 강판당했고, 팀도 연장 끝에 1대 2로 패하여 동메달에 그쳤다.

궈타이위안의 뛰어난 활약은 세이부 라이온스의 특별한 주목을 받았고, 그는 1984년 하계 올림픽 이후 이 팀과 계약했다. 대회 종료 후, 궈는 계약금 8000만으로 세이부 입단이 결정되었다.

3. 일본 프로 야구 (NPB) 시절

1990년 세이부 라이온스 시절의 궈타이위안


궈타이위안은 1985년부터 1997년까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뛰면서 일본 프로 야구(NPB) 역사에 남을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특히, 세이부 라이온스 시절은 그의 선수 경력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

궈타이위안의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다.

1985년부터 1997년까지의 상세한 통산 기록은 하위 섹션 '세이부 라이온스 (1985-1997)'에 표로 자세히 나와있다.

잦은 부상으로 궈타이위안은 1997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은퇴 직후 세이부 라이온스 공식 웹사이트 투표에서 궈타이위안은 세이부 라이온스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외국인 선수로 만장일치로 선정되었다.

3. 1. 세이부 라이온스 (1985-1997)



신인 시절 궈타이위안은 세이부 라이온스의 선발 로테이션에 즉시 합류하여 데뷔 2개월도 안 된 1985년 6월 4일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퍼시픽 리그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선수 기록이었다.[15] 궈타이위안은 일본프로야구(NPB) 선수 시절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업적을 달성했다.

  • 1989 시즌 10연승
  • 1991 시즌 9경기 연속 완투, 퍼시픽 리그 최우수 선수로 선정
  • 1992 시즌 3경기 연속 완봉승
  • 1988년과 1994년 시즌 최고 승률


선수 경력 통계는 다음과 같다.

연도구단등판선발완투완봉무볼넷승리패전세이브홀드승률상대 타자 수이닝피안타피홈런볼넷고의사구HBP탈삼진폭투보크실점자책점ERAWHIP
1985세이부1515930950--.643484117.289144814751044332.521.16
19863995105716--.417450108.1931038701051039352.911.21
1987222111201340--.765640158.0136124064812156533.021.11
1988191815131331--.813583149.1113102332760050402.410.91
19892626144110100--.500804198.11721549731172078723.271.11
19901817510940--.692504119.1113144402842053473.541.32
1991242312411561--.714721184.11621730311080054532.591.04
199223239301440--.778661168.01281744541081154452.411.02
19932222411880--.500540133.1121152604883056523.511.10
199427214201350--.722569130.0137235223861075724.981.45
19952222320860--.571642163.01311134261150048462.541.01
19961411100060--.00024852.17292231261048437.391.80
199711000000------10.100000000000.000.00
통산 13년272229922461176818--.63268471682.11467167450393410691426555913.161.14


  • '''굵은 글씨'''는 당시 리그에서 최고 성적


궈타이위안은 부상으로 한 시즌을 통째로 쉬어야 했던 긴 부상 끝에 1997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궈타이위안 은퇴 직후 세이부 라이온스 공식 웹사이트에서 실시한 투표에서 궈타이위안은 세이부 라이온스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외국인 선수로 만장일치로 선정되었다.

1985년 시즌은 자율 훈련 투구 연습에서 히로오카 타츠로 감독과 미야타 세이테이 투수 코치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 후에도 히로오카의 캠프를 견뎌내,첫 등판이었던 4월 10일 긴테쓰전에서 바로 완투 승리를 거두었다.[13] 4월에는 3완투로 2승,방어율은 0.32라는 좋은 성적으로 월간 MVP를 수상했다. 6월 4일 니혼햄전(헤와다이 구장)에서는 노히트노런을 달성.[15] 시즌 도중 어깨 부상으로 이탈했지만,최종적으로는 9승을 거두었다.

1986년 시즌은 캠프 막바지까지 어깨 통증이 남아 있었고,어깨를 걱정한 신임 감독 모리 마사아키의 방침에 따라 개막부터 마무리로 돌아서 16 세이브를 기록했다. 9월쯤부터 선발로 복귀하여,일본 시리즈에서는 3차전 선발로 시리즈 첫 등판을 경험하여 4회 2/3이닝을 던져 4실점으로 패전 투수가 되었다. 7차전에서는 6회 도중부터 구원으로 3회 1/3이닝을 던져 시리즈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

1987년 시즌은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하여,본인 첫 두 자릿수 승리인 13승을 거두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 시리즈 3차전에서는 에가와 스구루와의 투수전을 1실점 완투로 제압하여 시리즈 첫 승리를 거두었다.

1988년 시즌은 6월 25일 롯데전까지 12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10승 무패를 기록했다.[19] 6월에는 모두 완투로 4승을 거두어 방어율 1.25로 두 번째 월간 MVP로 선정되었다. 7월 8일 난카이전에서 연장 11회를 완투하고 패배한 직후 팔꿈치 통증을 호소하여 올스타전에 추천되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13승을 기록하며 첫 타이틀인 최고 승률을 획득했다. 일본 시리즈 2차전에서는 7회까지 3실점으로 막았지만 8회에 4점을 내주며 패전 투수가 되었다.

1989년 시즌은 본인 최다인 26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198이닝 1/3을 던져 리그 3위의 방어율 3.27을 기록했다.

1990년 시즌은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팔꿈치나 어깨 부상으로 4년 만에 규정 투구 이닝을 채우지 못했지만[23],18경기에서 9승을 거두었다. 일본 시리즈 4차전에서 6이닝을 3실점으로 막아 3년 만에 일본 시리즈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991년 시즌은 7월 30일 롯데전부터 9월 28일 오릭스전까지,퍼시픽 리그 역대 2위인 9경기 연속 완투 승리를 기록했다. 이 기간 동안 8월,9월 모두 무패로 4완투 승리,방어율도 각각 2.00,1.00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어 2개월 연속 월간 MVP를 수상했다. 긴테쓰를 상대로 방어율 0.78로 7승 1패를 기록하며 호투하여 우승의 원동력이 되었으며,MVP와 베스트 나인에 빛났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2차전에서는 4회 1/3이닝을 던져 4실점으로 패했다. 6차전에서는 5이닝을 1실점으로 막았다.

1992년 시즌은 8월 21일 오릭스전부터 9월 8일 닛폰햄전까지,퍼시픽 리그 타이기록인 3경기 연속 완봉 승리를 거두는 등 14승을 거두었다. 2년 연속으로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다.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일본 시리즈 2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6회 1/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 승리 투수가 되었다.

1993년 시즌은 3년 만에 두 자릿수 승리에 미치지 못하고 8승 8패로 끝났다.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일본 시리즈 2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2회 0/3이닝 8안타 4실점으로 부진했지만,6차전 선발에서는 6이닝 3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하며 승리 투수가 되었다.

1994년 시즌은 본인 첫 개막 투수를 맡아 개막 9연승을 장식했지만,투구 내용은 좋지 않아 타선의 지원에 힘입은 형태였다. 9월에는 이시이 타케히로와 함께 선발 로테이션에서 제외되어 중간 계투로 강등되었다. 구원 투수로 전향한 후에는 6경기에 등판하여 4승 무패, 방어율 0.71의 좋은 성적으로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규정 투구 이닝을 채운 투수 중에서 리그 최악의 방어율 4.98을 기록했지만,13승 5패로 본인 두 번째 최고 승률 타이틀을 획득했다. 자이언츠와의 일본 시리즈 4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2회 2/3이닝을 5안타 2실점으로 강판했다.

1995년 시즌은 2년 연속으로 개막 투수를 맡았지만,초회에 7실점의 대혼전으로 시작했다. 이라부 히데키와 최우수 방어율 타이틀을 마지막까지 다퉜지만 시즌 막바지에 손목 부상을 입어,이라부와 0.01 차이의 방어율 2.54로 아쉽게 타이틀을 놓쳤다.[28]

1996년 시즌은 전년에 다친 손목의 영향으로 개막부터 부진했고,새롭게 팔꿈치도 부상당하면서 장기 이탈하여,본인 첫 1군 무승으로 끝났다.

1997년 시즌은 개막부터 2군 생활이 이어졌고,전년부터 현저해진 쇠퇴에서 부활하지 못하고 9월에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 홈구장인 세이부 라이온즈 구장에서의 최종전이 된 10월 5일 다이에이전이 은퇴 등판이 되었고,오랫동안 팀 동료였던 아키야마 고지가 다이에이의 1번 타자로 출전하여,모두 직구만 던져 중비로 잡아냈다.

3. 2. 주요 기록 및 수상

연도소속팀경기 수투구 이닝승리패전세이브완투완봉볼넷탈삼진자책점평균자책점
1985세이부 라이온스15117.2950935275332.52
1986세이부 라이온스39108.157165138105352.91
1987세이부 라이온스22158.013401124081533.02
1988세이부 라이온스19149.113311512376402.41
1989세이부 라이온스26198.11010014449117723.27
1990세이부 라이온스18119.1940514484473.54
1991세이부 라이온스24184.1156112430108532.59
1992세이부 라이온스23168.014409344108452.41
1993세이부 라이온스22133.1880412688523.51
1994세이부 라이온스27130.01350425586724.98
1995세이부 라이온스22163.08603240115462.54
1996세이부 라이온스1452.1060102326437.39
1997세이부 라이온스10.1000000000.00
합계2721682.11176818922446410695913.16



궈타이위안은 일본 프로 야구(NPB)에서 활동하며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 최고 승률: 2회 (1988년, 1994년)[28]
  • MVP: 1회 (1991년)
  • 베스트 나인: 1회 (1991년)
  • 골든 글러브상: 2회 (1991년, 1992년)
  • 월간 MVP: 4회 (1985년 4월, 1988년 6월, 1991년 8월, 1991년 9월)
  • 첫 등판·첫 선발 등판·첫 완투·첫 승리·첫 선발 승리·첫 완투 승리: 1985년 4월 8일, 긴테쓰 버펄로스전 (세이부 라이온스 구장)[13]
  • 첫 탈삼진: 상동, 1회 초 구리하시 시게루[13]
  • 첫 완봉 승리: 1985년 4월 25일, 롯데 오리온즈전 (세이부 라이온스 구장)[15]
  • 첫 세이브: 1986년 4월 4일, 난카이 호크스전 (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 1000 투구 이닝: 1991년 9월 6일, 긴테쓰 버펄로스전 (후지이데라 구장)
  • 100승: 1994년 5월 10일, 오릭스 블루웨이브전 (요나고 시민 구장)
  • 1500 투구 이닝: 1995년 4월 30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 (지바 마린 스타디움)
  • 1000 탈삼진: 1995년 6월 23일, 긴테쓰 버펄로스전 (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 노히트 노런: 1985년 6월 4일, 닛폰햄 파이터스전 (헤이와다이 구장)[15]
  • 올스타 게임 출장: 2회 (1990년, 1995년)[54]


1988년과 1994년에는 최고 승률을 기록했으며, 특히 1994년에는 규정 이닝을 채운 투수 중 가장 낮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28] 1991년에는 퍼시픽 리그 MVP와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고, 1991년과 1992년에는 골든 글러브상을 받았다. 또한, 1985년 4월, 1988년 6월, 1991년 8월과 9월에는 월간 MVP로 선정되었다.

1985년 6월 4일에는 헤이와다이 야구장에서 니혼햄 파이터스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여 일본 프로 야구에서 54번째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15] 1990년과 1995년에는 올스타 게임에 출전했다.[54]

4. 타이완 프로 야구 및 지도자 경력

타이완 메이저 리그(TML)는 궈타이위안이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은퇴한 후인 2003년 초, 리그가 붕괴될 때까지 그를 "수석 기술 고문"으로 고용했다. 궈타이위안은 이 기간 동안 세이부 시절 동료였던 이시이 다케히로와타나베 히사노부를 TML에 선수 및 코치로 합류하도록 주선했다. 또한, 당시 젊은 쉬밍지에와 장즈자가 세이부 라이온스에 입단하도록 돕는 중개인 역할도 수행했다.[39]

2003년 시즌 후 실직과 결혼 문제로 어려움을 겪은 궈타이위안은[39] 2004년 마코토 코브라스의 감독을 맡아 2005년 시즌까지 팀을 이끌었다. 코브라스에서 2시즌 동안 93승 97패 17무의 성적을 기록했다. 2005년 대만 시리즈에서 코브라스는 시논 불스에게 0-4로 완패했고, 궈타이위안은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사임했다. 이후 그는 마코토 코브라스 선수 린언유와 린잉지에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 합류하도록 주선했다.[39]

2007년 2월 15일, 궈타이위안은 중화 타이베이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중화 타이베이 야구 협회에 의해 임명되었다. 2007년 야구 월드컵2007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대표팀을 이끌었으나, 두 대회 모두 부진한 성적을 거두면서 2007년 12월 15일에 감독직에서 해임되었다.[39]

그의 투구 폼은 스리쿼터이며,[39] ''''오리엔탈 익스프레스''''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최고 158km/h(프로 입단 후 최고 속도는 156km/h)의 강속구 외에 날카로운 고속 슬라이더, 슈트를 던졌다.[40]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궈타이위안과 대결한 경험이 있는 히로사와 카츠미는 "(궈타이위안의) 당시 강속구는 (세이브 수 일본 타이기록을 세운) 경의 후지카와 큐지에게도 뒤지지 않는다"[40]라고 평가했고, 쇼다 코조는 "(궈타이위안의 강속구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깨끗한 회전으로 낮게 꽂혀 들어왔다"[41]라고 평가했다. 레론 리와 후쿠모토 유타카는 궈타이위안의 직구가 슈트 회전을 한다고 말했다.

궈타이위안은 젊었을 때부터 슈트를 가장 강력한 무기로 여겼으며, 슈트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슬라이더를 많이 던졌다. 슬라이더는 컷 패스트볼과 비슷한 궤적으로, 구속을 떨어뜨리지 않고 가로로 변화하여 항상 낮게 제구되었으며,[42] 삼진을 잡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시라이 카즈유키는 궈타이위안의 슬라이더 궤도에 대해 "베이스 하나 분량으로 꺾인다"라고 말했다.[43] 궈타이위안은 "곤란할 때는 슈트였다. 그것이 있었기에 슬라이더가 살아났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토 츠토무에게 있어서 슬라이더는 세이부의 모든 투수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변화구였고, 궈타이위안은 이 공의 사인에 고개를 저은 적이 전혀 없었다고 하며, "컨디션이 좋을 때는 거의 미트를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높게 뜨는 일도 없고, 받아보면 이토록 편하고 즐거운 투수는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세이부 황금기 투수진 중에서도 궈타이위안의 제구력은 손꼽히는 수준이었다고 한다.[44] 이토는 궈타이위안의 제구력에 대해 "공이 절대로 높이 오지 않는다. 낮은 공은 땅을 기어가는 듯한 느낌으로 처지지 않고, 오히려 팝업된다"라고 말하며, 컨디션에 상관없이 스트라이크를 잡을 수 있었지만, 좋지 않을 때는 가운데로 들어가 얻어맞는 경우가 있었기에 "스트라이크를 너무 던지지 마!"라고 일부러 볼을 많이 던지게 하여 피칭을 하는 것을 생각하며 리드했지만, 궈타이위안의 경우 볼을 의식적으로 던지게 해도 결코 거기서 자멸하는 일은 없었다고 회고했다.

1988년에는 공이 보기 쉽고 강속구 위주의 투수가 불리하다고 여겨졌던 데이 게임에서 연승을 거두는 등, 일본 진출 3년째인 1987년경부터 변화구를 잘 사용하는 투구 스타일을 확립했다. 반대로 변화하는 슈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타자는 슬라이더에 대해 섣불리 덤벼들지 못하게 되었고, 이에 더해 커브나 포크볼 등의 완만한 공도 유효하게 사용했다.

궈타이위안 다음에 마운드에 오른 카토리 요시타카는 발판이 전혀 파여 있지 않은 것에 놀랐다고 회고하고 있다.[45] 또 이토에 따르면 "큰 무대에서 진심을 다하지만, 대개 80퍼센트 정도의 힘으로 던졌다"라고 하며, 토마스노 세이지에 따르면, "한 번 150킬로를 던져봐"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지만, 궈타이위안은 "150킬로를 던지지 않아도 막을 수 있으니, 쓸데없는 힘은 쓰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고 한다.[46] 다카다 시게루는 "주자가 있을 때와 없을 때 피칭이 완전히 달라지네요. 주자가 있을 때는 기합이 다릅니다"라고 말하며, 한 구도 방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후쿠모토 유타카오이시 다이지로는 궈타이위안의 필딩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오이시는 "센터 앞을 빠져나갈 것 같은 타구도 달려들어 잡아내고, 번트 수비도 천하제일, 12개 구단 최고가 아닌가요"라고 평가했고, 후쿠모토는 "유격수를 했다면 굉장한 유격수가 되었을 것이다" "투수로 해두는 것이 아깝다"라고 말했다.

1980년대 일본 야구계에서 4일 또는 5일 간격의 선발 로테이션이 일반적이었지만, 궈타이위안은 팔꿈치 수술에서 복귀한 무라타 초지와 함께 6일 간격 로테이션의 선구적인 존재였다. 이시게 히로노리는 "예전에는 4일 또는 5일 간격 선발이 일반적이었지만, 궈타이위안의 경우 6일 간격으로 던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소중하게 기용되었다는 인상이 남아있습니다."라고 말했다.[47]

당시 주력 투수로서 200이닝 이상 던진 해가 없었고, 잦은 부상으로 인해 "아프다 아프다 병"이라고 조롱받기도 했다. 어깨와 팔꿈치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6일 또는 5일 간격 선발을 기본으로 했으며, 등판 다음 날에는 가볍게 땀을 흘리고, 이틀째에도 런닝 정도, 3일째는 캐치볼, 4, 5일째에는 80% 정도의 힘으로 60~70구를 던지고, 6일째에는 땀을 흘리는 정도로 다음 날 등판에 대비하는 조정을 했다. 감독 모리 마사아키는 "우리 선발 투수진 중 궈타이위안이 회복력이 가장 떨어진다"고 말했다.[48]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이 스탠스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지만, 현대 야구에서는 주류가 되었다.[49]

이토에 따르면 궈타이위안은 세이부 구장 근처 도코로자와에 살았는데, 술을 매우 좋아해서 과음을 하지는 않았지만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았고, 그 영향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대만에 프로 야구가 없던 시절부터 일본 프로 야구에서 활약한 대만인 선수들의 효시로서, 궈위안즈, 좡성슝과 함께 이궈이좡으로 불렸다. 통산 117승은 외국인 투수 중 역대 최다(무국적자인 빅토르 스타루힌 제외)이다. 체격적으로 일본인과 차이가 없고 프로 야구 경험도 없는 상태로 일본에 와서, 시즌 중 대우도 일본인과 동일하다는 점 등으로 인해 대만인 선수들에게도 외국인 선수 쿼터 규정을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대한 배려를 요청했다.[53]

대만 프로 야구 연맹 고문 시절에는 투수 코치를 구하기 위해 히가시오 오사무와 상담하여 와타나베 히사노부를 선수 겸 코치로 초빙했고, 이시이 타케히로의 대만 야구계 진출도 주선하는 등, 대만 야구계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쉬밍지에, 차오쥔양 등 대만인 선수들의 일본 야구계 진출을 도왔다.

5. 한국 야구와의 인연

궈타이위안은 일본 프로 야구에서 활동하면서 한국 야구와도 인연을 맺었다.


  • 1989년 6월 7일 롯데 오리온즈와의 경기에서 좡성슝과 선발 맞대결을 벌였으나 0:1로 패했다.
  • 1991년 MVP와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다. 그해 긴테쓰를 상대로 방어율 0.78, 7승 1패를 기록하며 팀 우승에 기여했다.

6. 플레이 스타일

궈타이위안은 빠른 속구를 가진 투수로 평가받았다. 이토 쓰토무는 "어쨌든 빠르다. 처음 공을 받았을 때, 이런 투수가 있나 하고 충격을 받았다"라고 회상했고[50], 와타나베 히사노부는 "내가 가장 빠른 공을 던진다고 생각했던 것은 궈타이위안의 공을 보기 전까지였다"라고 말했다. 이토는 궈타이위안을 능가하는 투수는 찾기 어렵다고 평가하며, 유일하게 다르빗슈 유가 궈타이위안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고 언급했다.

시마다 마코토는 궈타이위안을 "지금까지 상대했던 투수들 중 최고"라고 평가했으며, 야마모토 코지는 궈타이위안의 두뇌 회전을 언급하며 "심리학을 전공했나 싶을 정도로, 우리의 예상과 반대로 간다"라고 말했다. 나시다 마사타카는 궈타이위안의 컨트롤과 구종, 강속구를 칭찬하며 포수로서 리드해 보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다카다 시게루는 궈타이위안이 에가와 스구루보다 컨트롤, 구위, 두뇌 회전, 야구에 임하는 자세가 몇 수 위라고 평가했고, 크리스 나이만은 메이저 리그에서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는 투수라고 평가했다.

오치아이 히로미츠는 1985년 인터뷰에서 궈타이위안의 직구는 에가와 스구루가 더 빠르지만, 궈타이위안의 두뇌는 최고라고 평가했다[51]. 그러나 후년에는 궈타이위안이 현역 시절 가장 고생했던 투수였다고 언급했다[52].

한편, 1985년 당시 궈타이위안은 변화구 위주의 투구를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나오 가즈히사는 궈타이위안에게 좀 더 자신을 드러내는 피칭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고, 오치아이 히로미쓰는 궈타이위안을 강속구 투수가 아닌 변화구 투수라고 평가했다. 르론 리는 궈타이위안이 변화구를 너무 많이 던져 몇 년 못 던질 것이라고 우려했고, 야마모토 코지는 궈타이위안이 빠른 공을 더 던지면 좋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7. 사생활

궈타이위안은 1993년 12월에 대만 모델이자 배우인 장충쯔(張瓊姿, 중국 언론에서는 장추이즈(張秋子)로 표기)와 결혼했다.[27] 결혼 후 장충쯔는 궈타이위안이 1997년 말 은퇴할 때까지 일본에서 함께 생활하기 위해 잠시 대만에서의 연기 활동을 중단했다. 이들 부부는 1997년과 1999년에 태어난 두 딸을 두었다.

8. 등번호


  • 1985년 - 1986년: '''12'''
  • 1987년 - 1997년: '''18'''
  • 2004년 - 2005년, 2015년 - 2016년: '''88'''
  • 2013년 - 2014년: '''8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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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간행물 最強日本代表をつくろう! 台湾というアウェーへようこそ オリエンタル・エクスプレスからの招待状 郭泰源・台湾代表監督 週刊ベースボール 2007-03-19
[4] 간행물 "[頭脳派捕手の回顧]伊東勤「私が受けた最高の豪腕」" Sports Graphic Number 2020-07-20
[5] 간행물 必殺仕事人』大田卓司のこの男を斬る! そろそろ台湾選手を外人枠の対象からはずしてもいいのでは? 週刊ベースボール 1988-07-04
[6] 뉴스 報知新聞 1984-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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