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규장전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규장전운은 정조가 조선에서 사용되던 운서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편찬을 명하여 1792년에 완성된 운서이다. 정조는 당시 운서들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며, 이덕무에게 규장전운 편찬을 명했다. 1796년 서울과 각 지방에 반포되었으며, 정리자로 인쇄되어 보급되었다. 규장전운은 한시 창작의 모범이 되도록 화음과 동음을 이상적인 규범음으로 표기한 것이 특징이다. 본문은 평성, 상성, 거성, 입성 순으로 4단 구성이며, 글자 배열은 동음, 자음, 화음의 성모 순으로 이루어졌다. 규장전운은 조선 후기 한자음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운서 - 동국정운
    1447년 조선에서 훈민정음 반포 직후 편찬된 운서인 동국정운은 신숙주, 최항, 성삼문, 박팽년 등이 《홍무정운》에 대응하여 조선의 표준적인 한자음을 제시하고자 편찬되었으며, 국어 연구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 운서 - 중원음운
    《중원음운》은 14세기 초 주덕청이 편찬한 운서로, 원나라 시기 북방 관화의 음운 변화를 반영하여 5,866개의 글자를 19개의 운부와 4개의 성조로 분류하고, 북곡의 운율에 부합하는 새로운 체계를 제시하며, 한국 한자음 변화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는다.
  • 한국어의 역사 - 이두
    이두는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한국어를 표기하는 방식으로, 신라 시대에 시작되어 한국어의 형태소와 문법 요소를 나타내는 데 활용되었으며 훈민정음 창제 이후 사용이 줄었지만 한국어 표기법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 한국어의 역사 - 훈민정음
    훈민정음은 1443년에 세종에 의해 창제된 한국의 고유 문자로, 한글의 창제목적, 원리, 사용법 등을 담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통해 1446년에 반포되었으며,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문자로 평가받는다.
  • 옛 한글이 사용된 문서 - 황제
    황제는 진시황에서 유래한 최고 통치자 칭호로, 동양에서는 천자의 개념과 연결되었고 서양에서는 로마 황제의 칭호에서 유래했으며,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따라 다양한 호칭과 의미를 지녔으나 현재는 일본 천황만이 유일하게 그 칭호를 유지하고 있다.
  • 옛 한글이 사용된 문서 - 외래어
    외래어는 다른 언어에서 유입되어 특정 언어에 정착한 단어 또는 표현으로, 다양한 요인에 의해 발생하며 발음, 의미, 형태 등이 변화하고 외국어, 차용어, 부분 바꿈, 번역 차용, 신조어, 뜻 차용 등의 형태로 수용되면서 원래 의미와 다르게 사용되기도 하며, 각 언어는 외래어 수용에 대한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외래어 순화 운동을 통해 사용을 제한하기도 한다.
규장전운

2. 편찬과 반포

정조이덕무에게 《규장전운》 편찬을 명하여 정조 16년(1792년)에 편찬을 완료하였다. 윤행임 등 여덟 명이 두 차례에 걸쳐 검토하였고, 1793년에 이덕무가 사망하자 1795년에 500냥을 내려 편찬을 지원하였다.

1796년에 《규장전운》을 서울과 각 지방에 반포하였다.[1] 이때 《규장전운》은 1795년에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인쇄하기 위하여 주조한 정리자로 인쇄되었다.[2] 정조는 전라도 제주목에서 열린 승보시(陞補試)에서 상위 여섯 명에게 규장전운을 내렸고[3], 같은 해 경기도 수원에서 유생들의 시문을 시상할 때에도 규장전운을 직접 하사하였다.[4]

2. 1. 정조의 문제의식

《규장전운》의 편찬은 정조의 불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정조는 당시 조선에서 널리 쓰이던 운서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홍재전서》의 기록에 따르면, 정조는 세종 때 지어진 운서가 정조 당대에 현전하지 않고 있음을 아쉽게 여겼다.[1] 또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면서 널리 사용되던 운서인 《삼운통고》(三韻通考)는 수록된 글자 수가 적고, 주석도 간단하며, 사성을 3단 체재로 실은 것을 지적하였다.[2] 최세진의 《사성통해》나 박성원의 《화동정음통석운고》 역시 당시에 널리 쓰였으나, 정조는 이들이 《삼운통고》의 영향을 받아 그 세 가지 단점을 그대로 답습하였다고 보았다.[3] 또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에 따르면, 과거 시험에서 한시를 지을 때 사람들이 증운(增韻)과 입성을 압운에 쓰지 않는 경향이 있어, 정조는 사람들이 잘못된 관행을 타파하고 규범으로 삼을 만한 운서를 지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4]

이에 따라 정조 3년(1779년)에 서명응 등에 의하여 《규장운서》(奎章韻瑞)가 편찬되나, 운서라기보다는 자전에 가까워 한시를 지을 때 참고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간행되지는 않았다. 또 정조 11년(1787년)에 간행된 《화동정음통석운고》의 재판(再版)에 정조는 중국의 한자음이 잘못 전해져 와음(訛音)이 된 현실을 박성원이 옳게 고쳤다는 내용의 서문을 실었으나, 이 책 역시 만족스럽게 여기지는 않았다.

2. 2. 편찬 과정

정조는 당시 조선에서 널리 쓰이던 운서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홍재전서》의 기록에 따르면, 정조는 세종 때 지어진 운서가 정조 당대에 현전하지 않고 있음을 아쉽게 여겼다. 또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면서 널리 사용되던 운서인 《삼운통고》(三韻通考)는 수록된 글자 수가 적고, 주석도 간단하며, 사성을 3단 체재로 실은 것을 지적하였다. 최세진의 《사성통해》나 박성원의 《화동정음통석운고》 역시 당시에 널리 쓰였으나, 정조는 이들이 《삼운통고》의 영향을 받아 그 세 가지 단점을 그대로 답습하였다고 보았다. 또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에 따르면, 과거 시험에서 한시를 지을 때 사람들이 증운(增韻)과 입성을 압운에 쓰지 않는 경향이 있어, 정조는 사람들이 잘못된 관행을 타파하고 규범으로 삼을 만한 운서를 지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이에 따라 정조 3년(1779년)에 서명응 등에 의하여 《규장운서》(奎章韻瑞)가 편찬되었으나, 운서라기보다는 자전에 가까워 한시를 지을 때 참고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간행되지는 않았다. 정조 11년(1787년)에 간행된 《화동정음통석운고》 재판(再版)에 정조는 중국의 한자음이 잘못 전해져 와음(訛音)이 된 현실을 박성원이 옳게 고쳤다는 내용의 서문을 실었으나, 이 책 역시 만족스럽게 여기지는 않았다. 결국 정조는 이덕무에게 《규장전운》 편찬을 명하여 정조 16년(1792년)에 편찬이 모두 끝났으며, 윤행임 등 여덟 명이 두 차례에 걸쳐 이를 검토하였다. 도중인 1793년에 이덕무가 죽자 1795년에 500냥을 내려 편찬을 지원하였다.

《규장전운》이 완성된 뒤, 정조는 1796년에 《규장전운》을 서울과 각 지방에 반포하였다.[1] 이때 《규장전운》은 1795년에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인쇄하기 위하여 주조한 정리자(整理字)로 인쇄되었다.[2]

2. 3. 반포와 보급

정조는 규장전운이 완성된 1796년에 서울과 각 지방에 반포하였다.[1] 이때 규장전운은 1795년에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인쇄하기 위해 주조한 정리자(整理字)로 인쇄되었다.[2] 이후 정조는 전라도 제주목에서 열린 승보시(陞補試)에서 상위 여섯 명에게 규장전운을 내렸고[3], 같은 해 경기도 수원에서 유생들의 시문을 시상할 때에도 규장전운을 직접 하사하는 등[4] 규장전운 보급에 힘썼다.

3. 특징

《규장전운》은 화동정음통석운고와 달리 한시를 지을 때 모범이 되도록 화음과 동음 모두 이상적인 규범음으로 표기하였다. 화음은 흰 원(○) 안에, 동음은 흰 사각형(□) 안에 기록하였다. 한자가 다른 화음으로도 읽히는 경우, 다른 성조에도 속하는 경우, 다른 운에도 나타나는 경우는 별도로 표시하였다. 다른 화음이나 운을 지닌 경우 흰 원 안에 그 음이나 운을 표기하였다. 다른 성조에 속하는 경우 한자의 오른쪽 위에서부터 기호를 달았는데, 평성은 흰 원(○), 상성은 검은 원(●), 거성은 흰 반원, 입성은 검은 반원(◗)으로 나타냈다.

3. 1. 글자 배열

본문은 4단으로 나누어 위에서부터 평성(윗길성), 상성(올림소리), 거성(떨침소리), 입성(닫음소리)에 해당하는 글자를 차례로 적었다.[1] 글자는 세 가지 기준을 따라 배열하였는데, 첫째로 동음(한국에서 쓰이는 한자음)을 기준으로 《훈몽자회》의 모음 순, 둘째로 훈몽자회의 자음 순, 셋째로 음이 같은 글자의 경우 화음(중국에서 쓰이는 한자음)의 성모 순이다.[2] 기존 운서에 수록된 글자 수가 적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함이라는 편찬 동기에도 불구하고, 《규장전운》의 글자 수는 동시대의 운서보다 몇천 자 늘어난 1만 3345자이다.[3] 이덕무는 이를 원(原) 1만 964자, 증(增) 2102자, 협(叶) 279자로 나누어 적었는데, 원(原)은 《규장전운》을 지을 때 참고로 한 《화동정음통석운고》의 글자 수와 거의 같고, 증(增)은 《화동정음통석운고》에 없고 이덕무가 새로 추가한 글자이며, 협(叶)은 협음(현실 한자음으로는 운이 같지 않지만, 예전의 문헌에 기록된 한자음으로는 운이 같거나 통하는 한자음)이 기록된 글자이다.[4] 협음까지 실린 이유는 정조가 《규장전운》을 시인들이 모범으로 삼아 두보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화동정음통석운고》와 달리, 《규장전운》은 한시를 지을 때 모범이 되도록 화음과 동음 모두 이상적인 규범음으로 표기하였다. 화음은 흰 원(○) 안에, 동음은 흰 사각형(□) 안에 기록하였다. 한 한자가 다른 화음으로도 읽히는 경우, 다른 성조에도 속하는 경우, 다른 운에도 나타나는 경우는 별도로 표시하였다. 먼저 다른 화음이나 운을 지닌 경우 흰 원 안에 그 음이나 운을 표기하였다. 다른 성조에 속하는 경우 한자의 오른쪽 위에서부터 기호를 달았는데, 평성은 흰 원(○), 상성은 검은 원(●), 거성은 흰 반원, 입성은 검은 반원(◗)으로 나타냈다.

3. 2. 글자 수

《규장전운》의 글자 수는 13,345자이다.[1] 이는 동시대의 운서보다 몇천 자 늘어난 것이다. 이덕무는 이를 원(原) 10,964자, 증(增) 2,102자, 협(叶) 279자로 나누어 적었다.[2] 원(原)은 《규장전운》을 지을 때 참고한 《화동정음통석운고》의 글자 수와 거의 같고, 증(增)은 《화동정음통석운고》에 없고 이덕무가 새로 추가한 글자이며, 협(叶)은 협음叶音|협음중국어이 기록된 글자이다.[3] 협음은 현실 한자음으로는 운이 같지 않지만, 예전의 문헌에 기록된 한자음으로는 운이 같거나 통하는 한자음을 말한다.[3] 협음까지 실린 이유는 정조가 《규장전운》을 시인들이 모범으로 삼아 두보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4]

3. 3. 한자음 표기

훈몽자회》의 모음 순, 훈몽자회의 자음 순, 화음華音|화음중국어의 성모 순으로 동음東音|동음중국어을 기준으로 세 가지 기준을 따라 글자를 배열하였다.[1] 기존 운서의 단점을 보완하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규장전운》의 글자 수는 동시대 운서보다 몇천 자 늘어난 1만 3345자이다.[2] 《화동정음통석운고》는 화음과 동음 모두 일상에서 쓰이는 속음으로 적어 실용적이었으나, 《규장전운》은 한시를 지을 때 모범이 되도록 화음과 동음 모두 이상적인 규범음으로 표기하였다.[3]

화음은 흰 원(○) 안에, 동음은 흰 사각형(□) 안에 기록하였다.[4] 한 한자가 다른 화음으로도 읽히는 경우, 다른 성조에도 속하는 경우, 다른 운에도 나타나는 경우는 별도로 표시하였다. 다른 화음이나 운을 지닌 경우 흰 원 안에 그 음이나 운을 표기하였다. 다른 성조에 속하는 경우 한자의 오른쪽 위에서부터 기호를 달았는데, 평성은 흰 원(○), 상성은 검은 원(●), 거성은 흰 반원, 입성은 검은 반원(◗)으로 나타냈다.

4. 구성


  • 어정규장전운 의례(義例): 일종의 서문이다.
  • 어정규장전운 부목(部目): 106개 운목(韻目)의 순서와 서로 통하는 운(韻)을 열거하였다.
  • 본문


이 외에 규장전운의 편찬 배경과 체계에 관하여 상세히 다룬 규장전운 범례가 존재하나, 규장전운이 아니라 이덕무의 문집인 《청장관전서》 제24권 〈편서잡고〉 제4권에 실려 있다.[1][2]

5. 체계

《규장전운》은 화음(華音)과 동음(同音)의 운모 체계를 다르게 제시하고 있다.
화음(華音)의 운모 체계화음은 중성 24개를 사용하여, 정조 당시의 발음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1] 이는 ㅏ, ㅓ, ㅗ, ㅜ, ㅡ, ㅣ 여섯 개의 단모음과 여기에 반모음 /j/와 /w/가 결합된 모음들로 구성되었다.[2] 운미는 ㄴ, ㅁ, ㅇ 세 가지를 사용했다. 16세기 이전에 중국에서 침운(侵韻), 담운(覃韻), 염운(鹽韻), 함운(咸韻)의 운미가 /-m/에서 /-n/으로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규장전운》에서는 이를 반영하지 않고 여전히 ㅁ으로 표기했다.
동음(同音)의 운모 체계동음은 중성 23개를 사용했으며, (아래아)의 소실 등이 반영되지 않았다.[3] 운미는 ㄱ, ㄴ, ㄹ, ㅁ, ㅂ, ㅇ 여섯 가지를 사용했는데, 이는 15세기부터 21세기까지 한자음에 6종성이 사용된 것과 동일하다.

《규장전운》의 운목은 성조의 유무에 따라 106개 또는 31개로 분류된다. 각 운목에 따른 화음과 동음의 운모는 아래 표와 같다. (편의상 초성은 ㅇ으로 표시)

《규장전운》의 운목과 운모 체계
운목화음동음
1東董送屋웅, 융옹, 옥, 용, 웅, 욱, 융, 육
2冬腫宋沃웅, 융옹, 옥, 용, 욕, 욱, 융
3江講絳覺앙, 양앙, 악
4支紙寘○으, 이, 예, 우, 위, ᄋᆔ유, 이, ᄋᆞ, 외, 위, ᄋᆔ, 의, 예, 웨
5微尾未○이, 예, 위이, 위, 의, 웨
6魚語御○우, 유어, 여, 오
7虞麌遇○우, 유오, 우, 유
8齊薺霽○애, 이, 여, 얘, 예, 위여, 유, 이, 예, 의, 에, 위, ᄋᆔ, 웨
9佳蟹泰○애, 얘, 위, 왜애, 외, ᄋᆡ, 왜
10灰賄卦○애, 얘, 위, 왜애, 외, ᄋᆡ, 예, 왜
11○○隊○애, 이, 위애, 예, 외, ᄋᆡ, 왜, 웨
12眞軫震質은, 인, 운, 윤운, 울, 윤, 율, 은, 을, 인, 일
13文吻問物인, 운, 윤온, 운, 울, 올, 은, 을
14元阮願月은, 연, 운, 완, 원, ᄋᆑᆫ안, 알, 언, 얼, 온, 올, 운, 울, 은, 을, ᄋᆞᆫ, ᄋᆞᆯ, 원, 월
15寒旱翰曷안, 언, 완, 원안, 알, 완, 왈
16刪潸諫黠안, 얀, 완, 원안, 알, 완, 왈
17先銑霰屑연, ᄋᆑᆫ언, 얼, 연, 열, 원
18蕭篠嘯○ᄋᅽ
19肴巧效○ᄋᅶ, ᄋᅸ오, 요
20豪皓号○ᄋᅶ
21歌哿箇○어, 야, 워, ᄋᆑ아, 와
22麻馬禡○아, 야, 여아, 야, 와
23陽養漾藥앙, 양, 왕앙, 악, 양, 약, 왕, 왁
24庚梗敬陌읭, 잉, 윙, ᄋᆔᆼ영, 역, 욍, 왹, ᄋᆡᆼ, ᄋᆡᆨ, 잉, 익, 윽
25靑逈徑錫읭, 잉, ᄋᆔᆼ영, 역, 잉, 익, 응, ᄋᆡᆼ
26蒸○○職읭, 잉, 윙억, 역, 옥, 욍, 웅, 욱, 응, 윽, 잉, 익, ᄋᆡᆨ
27尤有宥○ᄋᆕ, ᄋᆛ우, 유
28侵寢沁緝음, 임음, 읍, 임, 입, ᄋᆞᆷ, ᄋᆞᆸ
29單感勘合암, 압
30監琰豔葉엄, 업, 염, 엽
31咸豏陷洽암, 얌암, 압, 엄, 업, 엽


5. 1. 성모 체계

華音중국어의 성모는 《사성통해》를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정조 연간의 華音중국어과도 차이를 보이는 이상적인 음이다.[1] 예를 들어, 18세기에는 이미 의모(疑母)와 미모(微母)가 사라지고, 견모(見母)와 정모(精母) 계통의 구개음화가 일어난 뒤인데, 이러한 변화가 《규장전운》에는 반영되지 않았다.[2]

《규장전운》 華音중국어의 성모 체계[2]
전청차청전탁불청불탁
아음(牙音) 見 k 溪 k' 君 g'ㆁ 疑 ŋ
설음(舌音) 端 t 透 t' 定 d 泥 n
순음(脣音) 幇 p 滂 p' 竝 b 明 m
ㅸ 非 fㅹ 奉 vㅱ 微 ɱ
치음(齒音)ᄼ 心 sᅎ 精 tsᅔ 淸 ts'ᄽ 邪 zᅏ 縱 dz
ᄾ 審 ʃᅐ 照 tʃᅕ 穿 tʃ'ᄿ 禪 ʒᅑ 床 dʒ
후음(喉音)ㆆ 影 ʔ 曉 xㆅ 匣 ɣ 喩 ∅
반설음(半舌音)colspan="2" |colspan="2" | 來 l
반치음(半齒音)colspan="2" |colspan="2" |ㅿ 日 ʑ



同音중국어의 초성은 정조 연간의 현실 한자음과 거의 같다.[1] 다만 당시에 이미 경음이었던 ‘雙(쌍)’과 ‘喫(끽)’ 등의 초성을 평음으로 적은 것이 다르다.[3]

《규장전운》 同音중국어의 성모 체계[4]
전청차청불청불탁
아음(牙音)
설음(舌音)
순음(脣音)
치음(齒音)
후음(喉音)
반설음(半舌音)


5. 2. 운모 체계

화음의 중성은 24가지가 쓰였는데, 정조 연간의 화음과 정확히 같지는 않다.[1] 이는 ㅏ, ㅓ, ㅗ, ㅜ, ㅡ, ㅣ 여섯 개의 단모음과 거기에 반모음 /j/와 /w/가 덧붙은 모음으로 이루어졌다.[2] 한편, 동음의 중성은 23가지가 쓰였는데, (아래아)의 소실 등이 반영되지 않았다.[3]

화음의 운미에는 ㄴ, ㅁ, ㅇ의 세 가지가 쓰였다.[4] 16세기 이전에 이미 중국에서는 침운(侵韻), 담운(覃韻), 염운(鹽韻), 함운(咸韻) 등 네 운의 운미가 /-m/에서 /-n/으로 바뀌었음에도, 《규장전운》은 이를 반영하지 않고 여전히 ㅁ으로 표기하였다. 한편, 동음의 운미에는 ㄱ, ㄴ, ㄹ, ㅁ, ㅂ, ㅇ의 여섯 가지가 쓰였다. 한자음에 6종성만 쓰인 것은 15세기부터 21세기까지 동일하다.

《규장전운》의 운목은 성조의 차이를 고려하면 106가지, 고려하지 않으면 31가지로 분류된다. 화음과 동음에서 각 운목에 쓰인 운모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편의상 초성 자리에 음가 없는 ㅇ을 표시한다.

《규장전운》의 운목과 운모 체계
운목화음동음
1東董送屋웅, 융옹, 옥, 용, 웅, 욱, 융, 육
2冬腫宋沃웅, 융옹, 옥, 용, 욕, 욱, 융
3江講絳覺앙, 양앙, 악
4支紙寘○으, 이, 예, 우, 위, ᄋᆔ유, 이, ᄋᆞ, 외, 위, ᄋᆔ, 의, 예, 웨
5微尾未○이, 예, 위이, 위, 의, 웨
6魚語御○우, 유어, 여, 오
7虞麌遇○우, 유오, 우, 유
8齊薺霽○애, 이, 여, 얘, 예, 위여, 유, 이, 예, 의, 에, 위, ᄋᆔ, 웨
9佳蟹泰○애, 얘, 위, 왜애, 외, ᄋᆡ, 왜
10灰賄卦○애, 얘, 위, 왜애, 외, ᄋᆡ, 예, 왜
11○○隊○애, 이, 위애, 예, 외, ᄋᆡ, 왜, 웨
12眞軫震質은, 인, 운, 윤운, 울, 윤, 율, 은, 을, 인, 일
13文吻問物인, 운, 윤온, 운, 울, 올, 은, 을
14元阮願月은, 연, 운, 완, 원, ᄋᆑᆫ안, 알, 언, 얼, 온, 올, 운, 울, 은, 을, ᄋᆞᆫ, ᄋᆞᆯ, 원, 월
15寒旱翰曷안, 언, 완, 원안, 알, 완, 왈
16刪潸諫黠안, 얀, 완, 원안, 알, 완, 왈
17先銑霰屑연, ᄋᆑᆫ언, 얼, 연, 열, 원
18蕭篠嘯○ᄋᅽ
19肴巧效○ᄋᅶ, ᄋᅸ오, 요
20豪皓号○ᄋᅶ
21歌哿箇○어, 야, 워, ᄋᆑ아, 와
22麻馬禡○아, 야, 여아, 야, 와
23陽養漾藥앙, 양, 왕앙, 악, 양, 약, 왕, 왁
24庚梗敬陌읭, 잉, 윙, ᄋᆔᆼ영, 역, 욍, 왹, ᄋᆡᆼ, ᄋᆡᆨ, 잉, 익, 윽
25靑逈徑錫읭, 잉, ᄋᆔᆼ영, 역, 잉, 익, 응, ᄋᆡᆼ
26蒸○○職읭, 잉, 윙억, 역, 옥, 욍, 웅, 욱, 응, 윽, 잉, 익, ᄋᆡᆨ
27尤有宥○ᄋᆕ, ᄋᆛ우, 유
28侵寢沁緝음, 임음, 읍, 임, 입, ᄋᆞᆷ, ᄋᆞᆸ
29單感勘合암, 압
30監琰豔葉엄, 업, 염, 엽
31咸豏陷洽암, 얌암, 압, 엄, 업, 엽


참조

[1] 문헌 《어정규장전운》을 서울과 지방에 반포해 내리다 http://sillok.histor[...] 《정조실록》 45권 20년 8월 11일
[2] 문헌 각종 경적 인쇄처의 명칭을 국초와 같이 주자소로 부를 것을 명하다 http://sillok.histor[...] 《정조실록》 45권 20년 12월 15일
[3] 문헌 제주에 시험관의 미비로 승보시가 여의치 않자 그 대책을 지시하다 http://sillok.histor[...] 《정조실록》 46권 21년 1월 6일
[4] 문헌 수원 등의 유생이 응제한 시문을 보고 시상하고 군졸의 활쏘기 시험을 보다 http://sillok.histor[...] 《정조실록》 47권 21년 9월 12일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