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헌
1. 개요
김명헌은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여러 차례 과거에 낙방했으나 81세에 제주도에서 치러진 시험에 합격하고 정조의 특별 배려를 받아 문과에 급제했다. 그는 제주도 출신으로, 젊은 시절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서당 훈장으로 활동했다. 한성에서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제주도에서 치러진 시험에서 차상(次上)을 받으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정조는 그에게 특별히 전시(殿試)에 응시할 기회를 주었고, 문과 급제 후 사망하여 증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그의 답안지는 《탐라빈흥록》에 수록되었으며, 후손들이 추모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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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로로 죽은 사람 -
유억겸
유억겸은 일제강점기 교육자, 변호사, 체육인으로 조선기독청년회 사회 운동, 연희전문학교 부교장, 조선체육회 회장을 역임했으나, 흥업구락부 사건 이후 친일 활동에 가담했고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 발기인, 미군정 문교부장을 지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
과로로 죽은 사람 -
에른스트 쿠머
에른스트 쿠머는 19세기 프로이센의 수학자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근대 정수론의 기반을 다지고 정규 소수와 비정규 소수의 개념을 도입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 기여했다. -
전설 -
춘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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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
서동요
서동요는 백제 무왕의 아명인 서동이 신라 선화공주를 얻기 위해 노래를 지어 퍼뜨린 설화로, 미륵사 창건, 익산 천도 등과 연결되어 다양한 해석과 논란을 낳고 있다. -
1795년 사망 -
존 암스트롱
존 암스트롱은 아일랜드 출신으로 프랑스-인디언 전쟁과 미국 독립 전쟁에서 활약한 미군 장군이자 토목 기술자, 펜실베이니아 주 의회 대표였으며, 키타닝 원정에서의 공훈으로 "키타닝의 영웅"이라 불렸고, 찰스턴 방어 성공, 대륙회의 대표 활동, 미국 헌법 지지, 디킨슨 대학 설립 기여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
1795년 사망 -
윤유일
조선 천주교회 초기 신자 윤유일은 북경 밀사 파견, 주문모 신부 밀입국 지원, 가성직 제도 해체 노력 등 교회 운영과 발전에 기여했으나 을묘박해 때 순교했다.
2. 생애
제주도 대정현 중문리(현 서귀포시 중문동) 출신으로, 고려 시대 재상 김태현(金台鉉)과 김광재(金光載)의 후손이다. 그의 가계는 8대조 때 제주도로 이주해 정착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이후 서당의 훈장으로 활동했다. 관직에 뜻을 두고 한성에 올라가 여러 차례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이는 당시 과거 시험의 부패와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765년(영조 41년) 제주도에서 시행된 특별 과거인 제주도과(濟州島科)에서 차상(次上)을 차지했으며, 1795년(정조 20년)에는 81세의 고령으로 제주도시(濟州島試)에 차석(次席)으로 합격하였다. 정조는 그의 학문과 노력을 높이 사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명을 내렸고, 최종적으로 문과 병과 40등으로 급제하였다. 정조는 고령인 그를 배려하여 어사화와 홍패(紅牌)를 제주도로 내려보내 제주 객사(客舍)에서 사은숙배(謝恩肅拜)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1795년 2월 19일, 문과 급제 소식이 담긴 합격 증서가 도착하기 직전에 과로와 노환으로 향년 81세에 세상을 떠났다. 평생의 소원이었던 과거 급제를 눈앞에 두고 맞이한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2.1. 가계와 초기 생애
제주도 대정현 중문면 중문리(현, 서귀포시 중문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려 충렬왕부터 충숙왕 대의 재상이었던 문정공 김태현(金台鉉)의 12대손이며, 충숙왕 때 전리판서와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문간공 김광재(金光載)의 차남 윤조(胤祖)의 10대손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김여문(金汝文)이고, 아버지는 수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와 절충장군 겸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김장집(金章緝)이다. 그의 가계는 8대조 때 제주도로 이주해 왔다.
1730년대에는 중문면 호근리에 살던 제주 고씨 집안에 장가를 들면서 중문면 색달리 지경의 주승캐라는 곳으로 이주했으며, 1733년 10월에는 정의현 호근리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일찍이 저명한 성리학자에게 학문을 배웠으나, 스승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후 서당의 훈장(訓長)으로 활동했다. 한성으로 올라가 9번이나 과거 시험에 응시했지만, 당시 부패한 시험관들의 농간으로 번번이 낙방하고 급제는 다른 명문가 자제들에게 돌아갔다. 10번째 과거 시험을 본 뒤에는 낙방을 예감하고 글을 지어 바친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과거가 끝난 뒤 한 시험관은 "이 늙은 선비가 아홉 번이나 낙방했지만, 이런 글재주라면 매번 급제했을 터인데도 번번이 급제를 빼앗겼다"며 탄식했다고 전해진다. 훗날 그는 젊은이들과 어울릴 때 "이 몸은 아홉 번 아홉 번 과거에 낙방하기를 서른세 번이라네 (年年九九 落第三三)"라고 자신의 처지를 표현하기도 했다.
1760년대에는 회수동 동해촌으로 이주했다. 1765년(영조 41년) 제주도에서 시행된 특별 과거인 제주도과(濟州島科)에 응시하여 차상(次上)을 차지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당시 영조는 유학 김명헌의 나이가 70세에 가깝고 문장이 볼 만하다며, 먼 지방 백성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차원에서 특별히 종이 3권, 붓 5자루, 먹 5자루를 상으로 내렸다.
만년에는 둘째 아들이 사는 원동산 부락으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 1794년 성내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많은 집이 불타고 인명 피해도 컸다. 1795년(정조 20년), 정조는 위문을 위해 제주도 안핵순무어사(按覈巡撫御史) 심낙수(沈樂洙)를 파견했고, 심낙수는 그해 4월 21일 정조의 특명으로 제주도시(濟州島試)를 주관했다. 김명헌은 이 시험에서 2등 차석(次席)으로 합격했다. 당시 그의 나이가 81세였기에 특별히 급제시킨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조는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 책에서 지차(之次)인 대정의 유학 김명헌(金命獻)은 이에 앞서 어사를 별도로 보내 시취할 때에 나이가 70에 가깝다는 이유로 특별히 시상했는데, 올해 또 81세로 응시하여 입격하였다. 경과(慶科)에 응시한 팔도의 유생 중 7, 8십 세의 연로한 유생에 대해서는 별도로 가서 시취하고 특별히 특례로 급제의 자격을 하사하도록 하였으니, 함께 경하하고 모든 백성을 동일하게 대하는 취지로 볼 때 어찌 제주의 백성만 빠뜨릴 수 있겠는가. 김명헌에게도 전시에 곧바로 응시할 자격을 주고 내년에 무과(武科)에 응시하는 사람과 함께 올려보내라고 목사에게 하유(下諭)하라. 곧바로 응시할 자격을 인정하는 첩문(帖文)도 즉시 작성해서 보낼 것을 해당 방(房)은 잘 알라.
이에 따라 김명헌은 정조의 명으로 직부전시(直赴殿試) 자격을 얻어 전시에 응시한 뒤 제주도로 돌아왔다. 정조는 1794년 7월 12일자 문과 합격자 명단에 김명헌을 병과 40등으로 포함시키도록 명했다. 심낙수가 김명헌이 81세의 고령으로 한성에 갈 수 없음을 보고하자, 정조는 "제주 대정현의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한 유생 김명헌은 다음 해 급제자 발표 때 명단 끝에 넣고, 어사화와 홍패(紅牌)를 내려보내어 이름을 부른 다음 제주 객사(客舍)의 뜰에서 임금에게 감사하는 절(사은숙배)을 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1795년(정조 19년) 2월 19일, 합격 증서인 창방(唱榜)이 제주도에 도착하기 직전에 과로와 노환으로 향년 81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평생 소원이던 과거 급제를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을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2.2. 과거 도전과 좌절
그는 일찍이 저명한 성리학자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나, 스승의 이름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이후 서당의 훈장(訓長)으로 활동하며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김명헌은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 한성으로 올라가 총 9차례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당시 만연했던 시험관들의 부정부패와 비리 때문에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실력보다는 가문 배경이 중시되면서 급제의 영광은 주로 명문가 자제들에게 돌아갔다.
10번째 과거 시험을 본 뒤, 김명헌은 또다시 낙방할 것을 예감하고 글을 지어 바친 뒤 제주도로 발길을 돌렸다. 시험이 끝난 뒤 채점을 하던 한 시험관은 그의 글을 보고 "이 노선비가 아홉 번이나 낙방했다니 믿을 수 없다. 이 정도 글재주라면 매번 장원 급제감인데, 번번이 부당하게 합격을 빼앗겼구나"라며 안타까워했다고 전해진다.
훗날 김명헌은 젊은이들과 어울리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듯 "年年九九 落第三三ko-Hani, 이 몸은 아홉 번 과거에 응시하고 아홉 번 낙방했고, 해마다 과거에 떨어지는 것이 세 번씩이나 된다네."라고 읊었다고 한다. 이는 그의 오랜 좌절과 순탄치 않았던 과거 도전 과정을 보여준다.
2.3. 제주도과 급제와 정조의 특별 대우
1765년(영조 41년) 제주도과(濟州島科)에 응시하여 차상(次上)을 받았다. 당시 승정원일기 기록에 따르면, 영조는 유학 김명헌(金命獻)의 나이가 70세에 가깝고 문장이 뛰어나다는 점을 고려하여 특별히 포상하였다. 이는 먼 지방의 백성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며, 종이 3권, 붓 5자루, 먹 5자루를 상으로 하사했다.
1795년(정조 20년), 제주도에 큰 화재가 발생하자 정조는 위문차 안핵순무어사(按覈巡撫御史) 심낙수(沈樂洙)를 파견했다. 심낙수는 정조의 특명에 따라 그해 4월 21일 제주도시(濟州島試)를 주관하였고, 김명헌은 이 시험에서 2등 차석(次席)으로 입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가 81세였기에 특별히 합격시킨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정조는 김명헌이 81세의 고령으로 합격한 것을 기특히 여겼다. 이전에도 김명헌이 70세에 가까운 나이로 시취(試取)했을 때 특별히 상을 내린 바 있었는데, 이번 81세 합격을 계기로 경과(慶科)에 응시한 다른 7, 80세 유생들에게 특례로 급제 자격을 주는 것처럼 김명헌에게도 동일한 은전을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모든 백성을 동등하게 대우하려는 정조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정조는 김명헌에게 직부전시(直赴殿試), 즉 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고 다음 해 무과(武科) 응시자와 함께 한성으로 올려 보내도록 제주목사에게 명하였다. 또한 직부전시 자격을 인정하는 첩문(帖文)도 즉시 작성하여 보내도록 지시했다.
정조의 명에 따라 김명헌은 직부전시의 영예를 안고 전시에 응시한 뒤 제주도로 돌아왔다. 이후 정조는 김명헌이 고령으로 한성에 와서 합격자 발표 의식에 참여하기 어렵다는 심낙수의 보고를 받았다. 이에 정조는 김명헌을 다음 해 문과 합격자 명단 끝에 포함시키도록 명하고, 어사화와 홍패(紅牌)를 제주도로 내려보내 이름을 부르게 한 뒤, 제주 객사(客舍) 뜰에서 임금에게 감사하는 예를 올리도록(사은숙배, 謝恩肅拜) 특별히 배려하였다.
2.4. 문과 급제와 죽음
1795년(정조 19년) 정조가 위문차 보낸 제주도 안핵순무어사(按覈巡撫御史) 심낙수(沈樂洙)가 특명으로 주관한 그해 4월 21일의 제주도시(濟州島試)에 2등 차석(次席)으로 입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81세였기에 특별히 급제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정조는 김명헌이 이전에 70세에 가까운 나이로 시취에 응했던 점과 이번에 81세로 다시 입격한 점을 고려하여, 팔도의 연로한 유생들에게 특례로 급제 자격을 부여하는 것처럼 제주 백성 역시 소외될 수 없다는 취지에서 특별히 직부전시(直赴殿試)를 명하였다. 그는 전시에 응시한 뒤 제주도로 되돌아왔다.
1794년 7월 12일 문과 합격자 명단에 병과 40등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심낙수가 그의 나이가 81세로 한성에 갈 수 없음을 정조에게 아뢰자, 정조는 "제주 대정현의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한 유생 김명헌은 다음 해 급제자로 명단 끝에 넣고, 어사화와 홍패(紅牌)를 내려보내어 이름을 부른 다음 제주 객사(客舍)의 뜰에서 사은 숙배케 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고령의 선비에 대한 정조의 배려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795년(정조 19년) 2월 19일, 합격 창방(唱榜, 합격자 발표)이 제주에 도착하기 직전에 과로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평생 소원이던 과거 급제를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을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81세였다.
3. 사후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본문 생략)
3.1. 추증과 교지
입관 후, 1795년(정조 19년) 3월 특별히 문과 병과 40등의 홍패교지가 추서되었다. 이 교지는 제주목사를 거쳐 대정현감이 전달하는 과정에서 지체되었다고 전해진다. 뒤늦게 한성부에서 온 전령이 분향 후 그의 관 위에 교지를 올리자, 관이 떨리며 교지가 땅바닥에 떨어졌다는 일화가 구전된다. 사후 특명으로 증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처음에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추증되었으나, 1794년 그가 노인직으로 가선대부에 임명된 사실이 있어 증직에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다시 논의를 거쳐 2품의 실직(實職)으로 증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교지에는 전시(殿試) 출신자가 사망하였으므로 의법전(依法典)에 따라 상당한 관직을 추증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1795년(정조 19) 특별 제주도시에서 그가 제출한 답안지는 다른 합격자들의 답안지와 함께 《탐라빈흥록(耽羅賓興錄)》이라는 책으로 묶여 인쇄 및 반포되었다. 이 책은 훗날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소장하게 되었다. 1963년 9월에는 6대손 김승민(金承玟)이 서귀포시 중문동 1801번지에 '문과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겸동지의금부사 김공명헌 추모비(文科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使金公命獻追慕碑)'를 건립하였다.
3.2. 탐라빈흥록과 추모비
1795년(정조 19년) 특별 제주도시에서 김명헌이 제출한 답안지는 다른 합격자들의 답안지와 함께 《탐라빈흥록(耽羅賓興錄)》으로 묶여 인쇄 및 반포되었다. 이 책은 후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입수하였다.
1963년 9월에는 그의 6대손 김승민(金承玟)이 서귀포시 중문동 1801번지에 '문과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겸동지의금부사 김공명헌 추모비(文科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使金公命獻追慕碑)'를 세웠다.
4. 기타
(내용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