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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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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문기는 1399년 출생하여, 조선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여 단종 복위 운동을 계획하다 발각되어 능지처참된 인물이다. 1426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으며,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를 지냈다. 사후 복권되었고 충의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삼중신에 포함되었다. 사육신 논란을 거쳐,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으로 사육신으로 현창되었으나, 2008년 기존의 사육신 6인으로 정의되었다. 저서로는 《백촌유사》와 《백촌선생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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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김문기
한자 표기金文基
출생일1399년
출생지조선 충청북도 옥천군
사망일1456년
국가조선
직업문신

2. 생애

김문기는 1399년 정종 초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효기(孝起)였으나 장인의 이름이 효정(孝貞)이어서 문기(文基)로 고쳤다. 아버지는 영의정에 추증된 김관(金觀)이고, 아들은 김현석(金玄錫)으로 영월군수에 재직 중 그와 함께 순절하였다.

1426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르는 동안 관직에 임명되지 않았다. 이후 예문관 검열, 사간원 좌헌납을 거쳐 함길도 도진무(都鎭撫)에 임명되었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 병조 참의, 형조 참판 등을 지냈다.

1455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공조판서겸삼군도진무로 있으면서 은밀히 단종 복위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김질, 정창손의 밀고로 계획이 발각되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등은 체포되었으며, 유성원는 자결하였다. 김문기는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충절을 굽히지 않아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참을 당했다.[1]

3. 사후

김문기는 1731년(영조 7) 후손 김정구의 청으로 복권되었고, 1778년(정조 2)에는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791년(정조 15)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정할 때 민신, 조극관과 함께 삼중신(三重臣)에 포함되었다. 김천의 섬계서원과 사육신공원의 의절사 등에 제향되었다.[7][8]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오정각길 35에 건립된 오정각(五旌閣,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호)에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표창하여 동네에 정문을 세웠는데, 김문기와 아들 김현석의 충신 정려각, 김충주(김문기의 손자) · 김경남(김문기의 증손) · 김약전(김문기의 현손)의 효자 정려각 등 5대에 걸친 충효 정려각이 있다.[7][8]

3. 1. 복권과 추증

1731년(영조 7) 김문기의 후손 김정구의 청으로 복권되었고, 1778년(정조 2)에는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791년(정조 15)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정할 때 삼중신(三重臣)에 포함되었다. 김천의 섬계서원과 사육신공원의 의절사 등에 제향되었다.[7][8]

또한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오정각길 35에 건립된 오정각(五旌閣,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호)에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표창하여 동네에 정문을 세웠는데 김문기와 아들 김현석의 충신 정려각, 김충주(김문기의 손자) · 김경남(김문기의 증손) · 김약전(김문기의 현손)의 효자 정려각 등 5대에 걸친 충효 정려각이 있다.

3. 2. 제향

1731년(영조 7) 김문기의 후손 김정구의 청으로 복관 되었고, 1778년(정조 2)에는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791년(정조 15)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정할 때 민신, 조극관과 함께 삼중신(三重臣)에 포함되었다. 김천의 섬계서원과 사육신공원의 의절사 등에 제향되었다.[7][8]

또한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오정각길 35에 건립된 오정각(五旌閣,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호)에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표창하여 동네에 정문을 세웠는데 김문기와 아들 김현석의 충신 정려각, 김충주(김문기의 손자) ⋅ 김경남(김문기의 증손) ⋅ 김약전(김문기의 현손)의 효자 정려각 등 5대에 걸친 충효 정려각이 있다.

3. 3. 오정각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오정각길 35에 건립된 오정각(五旌閣,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호)에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마을에 정문을 세웠는데, 김문기와 그의 아들 김현석의 충신 정려각, 김문기의 손자 김충주, 증손자 김경남, 현손 김약전의 효자 정려각 등 5대에 걸친 충효 정려각이 있다.[7][8]

4. 사육신 논란

1455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은밀히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김질, 정창손의 배신으로 계획이 발각되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등은 체포되었고, 유성원은 자결했다. 김문기는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충절을 굽히지 않아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참을 당했다.[1]

사육신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하여 절개를 지키다 죽은 6명을 말한다. 사육신이라는 말은 생육신 남효온의 저서 《추강집》의 육신전으로 인해 세상에 널리 퍼졌다.[3] 육신전에는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만 등장한다. (육신전의 사육신은 세조실록 기사와 배치된다. 선조실록에서 선조는 육신전을 망서로 규정했다)

1456년 성삼문, 박팽년 등이 주도한 단종 복위 계획이 발각되어 모두 처형될 때 김문기도 연루되어 처형되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김문기를 사육신에 포함할 것인가 여부로 논란이 일었다. 1977년 7월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사육신 문제를 규명하는 특별위원회를 설치하여 여러 차례 논의했다. 최종적으로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결의가 만장일치로 채택되어 노량진 사육신묘에 김문기의 사당을 건설하게 되었다.[4] [5]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 찬반 양론이 일었고 신문에 논설이 실려 논란을 일으켰다.[1]

2008년 12월 18일 국사편찬위원회는 1982년 11월 11일의 합의 사항대로[6] 기존대로 사육신은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6인으로 정의했다.

5.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김관(金觀)
부인선산 김씨(善山 金氏)장릉등록, 조선왕조실록 세조편 "난신의 부녀자를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어라."에 기록이 전함.[1]
아들김현석(金玄錫)
며느리권영금(權英今)장릉등록, 조선왕조실록 세조편 "난신의 부녀자를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어라."에 기록이 전함.[2]
아들김인석(金仁錫)
아들김원석(金元錫)
아들김의석(金義錫)
아들김정석(金正錫)
아들김현동(金玄仝)
고명딸김종산(金終山)족보 기록에는 존재 하지 않으나 "金 文 起 女 終 山"으로 장릉등록, 조선왕조실록 세조편 "난신의 부녀자들을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어라."에 기록이 전함.[3]
사위이번(李蕃)
사위박장윤(朴長胤)
사위문절(文節)
사위허연령(許延齡)



단종사화 이후 부녀자와 나이 어린 자손들은 노비로 보내진 뒤 실종되어 족보에 기록이 전하지 않아 묘의 위치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족보 기록에 있는 김녕 김씨 충의공파 12세손 "김명지"의 실전된 묘를 충북 옥천군 양산면 죽산리 오정 저수지 옆의 산에서 찾았고, 묘가 위치한 산에서 총 15기 정도의 묘를 발견하였다. 인근 산에서 족보 기록에 있는 김문기의 동생인 김정기의 묘로 추정되는 곳을 함께 발견하고 "옥천문화 2021"에 "옥천 죽항촌 후곡 지명고증 연구"라는 글에 위치 기록을 남겼다.[4]

6. 저서


  • 《백촌유사》(白村遺事): 단종 복위운동에 참여했다가 죽음을 당한 김문기의 유사를 모아 편찬한 책이다.[1]
  • 《백촌선생문집》(白村先生文集): 김문기의 시문집으로 1928년에 후손 김연석(金淵錫) 등이 간행하였다.[2]

참조

[1] 간행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서적 백촌 김문기 연구 동방도서 1994
[3] 문서
[4] 뉴스 사육신’ VS ‘사칠신’… 후손들 끝없는 다툼 http://news.kukinews[...] 국민일보 2013-07-07
[5] 문서
[6] 뉴스 어정쩡한 사육신 논쟁 마무리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82-11-15
[7] 간행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8] 서적 백촌 김문기 연구 동방도서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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