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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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확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1400년에 태어나 음서로 관직에 진출했으며, 세종 대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공물 면제를 주청하는 등 외교적 능력을 발휘했다. 그의 누이들이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되면서 외교적 입지를 더욱 강화했으며, 세조의 즉위를 돕는 과정에서 정난공신으로 책록되어 우의정에 올랐다. 한확은 세조의 명나라 책봉을 성사시키는 데 기여했으나, 1456년 명나라로 가는 길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딸은 소혜왕후가 되었으며, 사후 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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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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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한확 |
본명 | 한확 |
출생일 | 1400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노환으로 병사) |
사망일 | 1456년 음력 9월 11일 |
거주지 | 조선 한성부 |
별명 | 자는 자유(子柔), 호는 간이재(簡易齋), 시호는 양절(襄節) |
학력 | 한학 수학 |
종교 | 유교(성리학) |
관직 | |
좌의정 | 시작: 1455년 8월 6일 종료: 1456년 10월 10일 이전: 정인지 이후: 이사철 |
우의정 | 시작: 1453년 11월 15일 종료: 1455년 8월 6일 이전: 정분 이후: 이사철 |
가족 관계 | |
배우자 | 홍씨 부인 |
자녀 | 정선군부인 (딸) 소혜왕후 (딸) 한치례 (아들) |
친척 | 월산대군 이정 (외손) 조선 성종 이혈 (외손) |
부모 | 아버지: 한영정 어머니: 김씨 부인 |
2. 생애
한확은 1400년(정종 2년) 한영정(韓永矴)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의성 김씨이다. 세조 때의 권신 한명회와는 9촌 숙질간이었다.[8]
1418년(세종 즉위년) 세종의 즉위를 알리는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고, 1419년(세종 1년) 명나라 황제의 책봉 고명서를 받들고 명나라 책봉정사(冊封正使)가 되어 부사와 함께 귀국하였다.[9]
1420년(세종 2년) 조선의 흉년에 따른 공물 면제를 요청하기 위해 하연(河演)과 함께 명나라에 파견되어, 금, 은 공물 면제를 요청하여 황제의 허락을 받았다.[9]
1425년(세종 7년) 전감무 김성정의 첩의 딸과 간통한 사건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세종은 죄를 줄 수 없다며 윤허하지 않았다.[10]
1429년(세종 11년) 다섯째 누이가 명나라 선종의 후궁 공신부인으로 선발되자, 진헌사(進獻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9] 이후 창성과 윤봉이 한영정의 막내딸이 아름답다고 명나라에 알려 막내 누이도 명나라로 가게 되었다.[11] 그는 중국어와 한자에 능통하여 명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선위사(宣慰使)로 파견되어 접대하였다.[9]
1435년(세종 17년) 중추원부사, 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437년 딸이 계양군에게 시집가 정선군 부인(旌善郡夫人)에 봉해졌다. 또 다른 딸은 수양대군의 아들 도원군과 결혼하는데, 이 딸이 인수대비이다.
1438년(세종 21년) 중추원사가 되었다가 통행금지 시간을 어기고 수문장에게 압력을 가하여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탄핵받고 파면당했다.[13] 그해 복직하여 정헌대부 중추원사를 거쳐, 1439년 판한성부사, 경기도관찰사, 판병조사, 함경도 관찰사를 거쳐 판한성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440년 지중추원사, 병조 판서, 판병조사를 거쳐 함길도도관찰사로 나갔다. 1442년(세종 25년) 동지중추원사와 판한성부사를 지냈다.
1443년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그해 의금부제조를 겸하였고, 다시 판병조사 겸 지중추원사를 거쳐 판한성부사가 되었다. 1444년 경상도, 전라도의 진상품을 받을 것을 청하였으나 세종이 듣지 않았다. 그 해 판이조사가 되었는데, 이때 인사에 공정을 기하여 명망이 있었다. 1445년 중추원지사 겸 판병조사(병조판서)를 겸하다가, 다시 판이조사(이조판서)가 되었다. 1446년 판중추원사로 승진되었다가 1447년 이조 판서가 되고, 평안도 관찰사로 나아갔다. 1448년 평안도병마절도사 겸하였다. 1450년(세종 32년) 판중추원사가 되었다.
1450년 문종 즉위 후 판중추원사로 소환되었고, 의금부 제조가 되었다.[13] 이듬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로 연경에 다녀왔다. 1452년 초에 귀국, 의정부 좌찬성이 되었다. 이후 한명회, 신숙주, 권람, 정인지 등과 긴밀히 연락하며 사돈 수양대군의 즉위를 도왔으며, 명나라에 있는 누이 공신부인과 죽은 여비 한씨의 후광에 힘입어 이들의 거사를 은밀히 지원하였다.
1452년 원접사(遠接使)로 명나라의 사신을 맞이하였고, 9월 개성부 선위사가 되어 개성 지역을 위문하고 돌아왔다. 12월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임명되었다.
1453년 계유정난이 성공하면서 정난공신으로 책록된 뒤 우의정부사로 발탁되어 서성부원군에 봉군되었다. 계유정난 당시 명나라에서 외교적인 문제를 제기할 때 명나라 사신을 설득하여 수양대군의 정치적 입지를 탄탄히 하였다. 11월 좌찬성이 되었다가 다시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의정부 우의정 서원 부원군(西城府院君)에 봉작되었다.
1454년 왕비 책봉의 공로로 상을 받았다. 1455년 초 형조 판서 이변·도승지 신숙주와 함께 벽제역에 가서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였다.
1455년 좌의정이 되고 그해 사은사로서 세조의 왕위 찬탈을 양위로 명분을 세워 명나라를 설득하러 연경에 갔다. 명나라에서 단종의 양위를 의심하는 추궁에 세조의 왕위찬탈을 양위(讓位)라고 설득시켰다.
세조의 책봉고명을 성사시킨 공로로 좌익공신 1등에 오르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개봉되었다.
1456년 난신에 연좌된 부녀를 분배할 때 조청로의 어미, 아내, 최득지의 아내, 이현로의 첩의 딸 등을 노비로 하사받았다.[14]
음력 9월 11일 귀국길에 세조의 책봉 고명을 받아 돌아오던 중, 칠가령(七家嶺)에 이르러 병을 얻어, 귀환하는 도중에 사하포(沙河浦)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향년 56세였다.[15]
2. 1. 생애 초반
한확은 1400년(정종 2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순창군사를 지내고 사후 의정부 영의정 서성부원군에 추증된 한영정(韓永矴)이고, 어머니는 의성군 양소공 김영렬(金英烈)의 딸인 정경부인 의성 김씨이다. 세조 때의 권신 한명회와는 9촌 숙질간으로, 한명회는 한확보다 15세 연하였다.[8]1418년(세종 즉위년) 세종의 즉위를 알리는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고, 1419년(세종 1년) 1월 명나라 황제의 책봉 고명서를 받들고 명나라 책봉정사(冊封正使)가 되어 부사 홍려시승 유천(劉泉)과 함께 귀국하였다.[9]
1420년(세종 2년) 1월에는 조선의 흉년에 따른 공물 면제를 요청하기 위해 예조참판 하연(河演)과 함께 명나라에 파견되어, 태종 때부터 추진해온 금, 은 공물 면제를 요청하여 황제의 허락을 받아냈다.[9]
1425년(세종 7년) 전감무(前監務) 김성정(金成鼎)의 첩의 딸 고미(古未)와 간통한 사건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세종은 그에게 죄를 줄 수 없다며 윤허하지 않았다.[10]
1429년(세종 11년) 다섯째 누이가 명나라 선종의 후궁 공신부인으로 선발되자, 진헌사(進獻使)가 되어 진헌부사(進獻副使) 조종생(趙從生)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9] 이후 창성과 윤봉이 한영정의 막내딸이 아름답다고 명나라에 알리면서 막내 누이도 명나라로 뽑혀 가게 되었다.[11] 그는 중국어와 한자에 능통하여 이후 명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선위사(宣慰使)로 파견되어 접대하였다.[9]
2. 1. 1. 출생과 가계
1400년(정종 2년) 녹사를 지내고 증 병조판서에 추증된 한녕(韓寧)의 손자이며, 지순창군사를 지내고 증 의정부영의정 서성부원군에 추증된 한영정(韓永矴)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증 정경부인 의성 김씨는 의성군 양소공 김영렬(金英烈)의 딸이다.세조의 측근이었던 한명회와는 9촌 숙질간으로, 한확은 한악(韓渥)의 넷째 아들 한방신의 증손이었고, 한명회는 한악의 둘째 아들 한공의의 4대손이었다.[8]
부친 | 한영정(韓永矴; 1375–?) |
---|---|
모친 | 의성 김씨 정경부인(鄭敬夫人 義城金氏; 1375 – 1423년 3월 13일) |
형제자매 | |
배우자 | 남양 홍씨 남양부부인(南陽府夫人 洪氏; 1403–1450) |
자녀 |
2. 1. 2. 명과의 관계
1418년(세종 즉위년) 세종의 즉위를 알리는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고, 1419년(세종 1년) 1월 명나라 황제의 책봉 고명서를 받들고 명나라 책봉정사(冊封正使)가 되어 부사 홍려시승 유천(劉泉)과 함께 귀국하였다.[9]1420년(세종 2년) 1월에는 조선의 흉년에 따른 공물 면제를 요청하기 위해 예조참판 하연(河演)과 함께 명나라에 파견되어, 태종 때부터 추진해온 금, 은 공물 면제를 요청하여 황제의 허락을 받아냈다.[9] 1424년 영락제가 북정(北征) 중 유목천(楡木川)에서 사망한 뒤에는 장군 절제사(掌軍節制使)가 되었다.[9]
1425년(세종 7년) 전감무(前監務) 김성정(金成鼎)의 첩의 딸 고미(古未)와 간통한 사건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세종은 그에게 죄를 줄 수 없다며 윤허하지 않았다.[10]
1429년(세종 11년) 다섯째 누이가 명나라 선종의 후궁 공신부인으로 선발되자, 진헌사(進獻使)가 되어 진헌부사(進獻副使) 조종생(趙從生)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9] 이후 창성(昌盛)과 윤봉(尹鳳)이 한영정의 막내딸이 아름답다고 명나라에 알리면서 막내 누이도 명나라로 뽑혀 가게 되었다.[11] 막내 누이는 병이 나자 한확이 약을 주었으나, "누이 하나를 팔아서 부귀가 이미 극진한데 무엇을 위하여 약을 쓰려 하오."라며 거절하고, 칼로 침구를 찢고 준비해두었던 재물을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다.[11]
1427년(세종 9년)에는 과거 한확을 공격했던 좌군 도사(左軍都事) 최징(崔澄)이 무고죄로 처벌받기도 하였다.[12] 1429년 명나라에서 귀국할 때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쳐진 내관 백언(白彦)이 그의 어머니에게 주는 단초(段綃)와 성(成)·차(車)·정(鄭)·노(盧)·안(安)·오(吳)·최(崔)씨 등 공녀로 바쳐진 여인들이 쓴 편지를 고국의 가족들에게 전달하였다.[9] 그는 중국어와 한자에 능통하여 이후 명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선위사(宣慰使)로 파견되어 접대하였다.[9]
2. 1. 3. 외교 활동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책봉 고명을 위한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들어갔고, 1419년 1월 명나라 황제의 책봉 고명서를 받들고 명나라의 책봉정사(冊封正使)가 되어 부사인 홍려시승 유천(劉泉)과 함께 귀국하였다.[9]1420년 1월 조선의 흉년기에 공물 면제를 위한 사절단의 대표로 예조참판 하연(河演)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의 광록시소경으로서 태종 이래 추진하였던 금과 은의 공물 면제를 주청하여 황제의 허락을 받고 귀국하였다. 1424년 명나라 성조가 북정(北征) 중 유목천(楡木川)에서 죽자 여비는 영락제 사후 순장당하였다.[9]
1425년 전감무(前監務) 김성정(金成鼎)의 첩의 딸 고미(古未)와 간통하였다가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당하였으나 세종대왕은 윤허하지 않았다.[10]
1429년(세종 11년) 진헌사가 되어 진헌부사 조종생(趙從生)과 함께 진헌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11]
1427년에는 그를 공격했던 좌군 도사(左軍都事) 최징(崔澄)이 역으로 무고죄로 처벌을 받았다.[12] 1429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할 때는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쳐진 내관 백언(白彦)이 그의 어머니에게 주는 단초(段綃)와 성(成)·차(車)·정(鄭)·노(盧)·안(安)·오(吳)·최(崔)씨 등 명나라에 공녀로 바쳐진 여인들이 쓴 편지를 고국의 가족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그는 중국어와 한자에 능통했는데, 이후 명나라 사신이 입국할 때마다 선위사(宣慰使)로 파견되어 접대하였다.
2. 2. 관료 생활
한확은 1418년 태종이 양위하고 세종이 즉위하자 책봉 고명을 위한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들어갔다. 1419년(세종 1년) 1월 명나라 황제의 책봉 고명서를 받들고 명나라의 책봉정사(冊封正使)가 되어 부사인 홍려시승 유천(劉泉)과 함께 귀국하여 판한성 부사가 되었다.[9]1420년 1월 조선에 흉년이 들자, 한확은 공물 면제를 위한 사절단의 대표로 예조참판 하연(河演)과 함께 명나라에 갔다. 그는 명나라 광록시소경으로서 태종 때부터 추진했던 금과 은의 공물 면제를 주청하여 황제의 허락을 받고 귀국하였다. 1424년 명나라 성조가 북정(北征) 중 유목천(楡木川)에서 사망하자 여비는 영락제 사후 순장되었다.[9] 이후 한확은 장군 절제사(掌軍節制使)가 되었다.
1425년 전감무(前監務) 김성정(金成鼎)의 첩의 딸 고미(古未)와 간통하였다가 사헌부 집의(執義) 정연(鄭淵)·헌납 윤맹겸(尹孟謙) 등으로부터 탄핵을 당하였으나, 세종은 윤허하지 않았다.[10]
1429년(세종 11년) 한확의 다섯째 누이가 명나라 선종(宣宗) 선덕제의 후궁으로 선발되어 공신부인이 되었다. 한확은 진헌사가 되어 진헌부사 조종생(趙從生)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창성(昌盛)과 윤봉(尹鳳)이 한영정의 막내딸이 아름답다고 명나라에 고하여, 한확의 막내 누이도 명나라로 뽑혀 가게 되었다.[11] 막내 누이는 병이 나자 한확이 약을 주었으나, "누이 하나를 팔아서 부귀가 이미 극진한데 무엇을 위하여 약을 쓰려 하오."라며 먹지 않고 칼로 침구(寢具)를 찢고 재물을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다.[11]
1427년 한확을 공격했던 좌군 도사(左軍都事) 최징(崔澄)이 도리어 무고죄로 처벌받았다.[12] 1429년 한확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할 때,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쳐진 내관 백언(白彦)이 그의 어머니에게 주는 단초(段綃)와 성(成)·차(車)·정(鄭)·노(盧)·안(安)·오(吳)·최(崔)씨 등 공녀로 바쳐진 여인들이 고국 가족에게 쓴 편지를 전달해 주었다. 그는 중국어와 한자에 능통하여, 이후 명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선위사(宣慰使)로 파견되어 접대하였다.
1435년(세종 17년) 한확은 자헌대부 행중추원부사, 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437년 그의 딸 한씨가 계양군 이증과 혼인하여 정선군 부인(旌善郡夫人)에 봉해졌다. 그의 또 다른 딸은 수양대군의 아들 도원군 숭과 결혼하는데, 이 딸이 바로 인수대비이다.
1438년(세종 21년) 한확은 중추원사가 되었다가 통행금지 시간을 어기고 수문장에게 압력을 가하여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탄핵받고 파면당했다.[13] 그해 복직하여 정헌대부 중추원사를 거쳐, 1439년 판한성부사, 경기도관찰사, 판병조사, 함경도 관찰사를 거쳐 판한성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440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병조 판서, 판병조사를 거쳐 함길도도관찰사로 나갔다. 1442년(세종 25년) 동지중추원사와 판한성부사를 지냈다.
1443년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그해 의금부제조(義禁府提調)를 겸하였고, 다시 판병조사 겸 지중추원사를 거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가 되었다. 1444년 경상도, 전라도의 진상품을 받을 것을 청하였으나 세종이 이를 듣지 않았다. 그 해 판이조사가 되었는데, 이때 인사에 공정을 기하여 명망이 있었다. 1445년 중추원지사 겸 판병조사(병조판서)를 겸하다가, 다시 판이조사(이조판서)가 되었다. 1446년 판중추원사로 승진되었다가 1447년 이조 판서가 되고, 행평안도 관찰사로 나아갔다. 1448년 평안도병마절도사 겸하였다. 1450년(세종 32년) 판중추원사가 되었다.
1450년 문종 즉위 후 판중추원사로 소환되었고, 그해 의금부 제조가 되었다.[13] 이듬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로 연경에 다녀왔다. 1452년 초에 귀국, 그해 의정부 좌찬성이 되었다. 이후 한명회, 신숙주, 권람, 정인지 등과 긴밀히 연락하며 사돈 수양대군의 즉위를 도왔으며, 명나라에 있는 누이 공신부인과 죽은 여비 한씨의 후광에 힘입어 이들의 거사를 은밀히 지원하였다.
1452년 원접사(遠接使)로 명나라의 사신을 맞이하였고, 9월 개성부 선위사가 되어 개성 지역을 위문하고 돌아왔다. 12월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임명되었다.
1453년 계유정난이 성공하면서 정난공신으로 책록된 뒤 우의정부사로 발탁되어 서성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이어 계유정난 당시 명나라에서 외교적인 문제를 제기할 때 명나라 사신을 설득하여 수양대군의 정치적 입지를 탄탄히 하였다. 그해 11월 좌찬성이 되었다가 다시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의정부 우의정 서원 부원군(西城府院君)에 봉작되었다.
1454년 왕비 책봉의 공로로 상을 받았다. 1455년 초 형조 판서 이변(李邊)·도승지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벽제역(碧蹄驛)에 가서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였다.
1455년 좌의정이 되고 그해 사은사로서 세조의 왕위 찬탈을 양위로 명분을 세워 명나라를 설득하러 연경에 갔다. 명나라에 가서 단종의 양위를 의심하는 추궁에 세조의 왕위찬탈을 양위(讓位)라고 설득시켰다.
세조의 책봉고명을 성사시킨 공로로 좌익공신 1등에 오르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개봉되었다.
1456년 난신에 연좌된 부녀를 분배할 때 조청로(趙淸老)의 어미 덕경(德敬)·아내 노비(老非), 최득지(崔得池)의 아내 막덕(莫德), 이현로(李賢老)의 첩의 딸 이생(李生) 등을 노비로 하사받았다.[14]
2. 2. 1. 세종 시기
1418년 태종이 양위하고 세종이 즉위하자 한확은 책봉 고명을 위한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들어갔다. 1419년(세종 1년) 1월 명나라 황제의 책봉 고명서를 받들고 명나라의 책봉정사(冊封正使)가 되어 부사인 홍려시승 유천(劉泉)과 함께 귀국하여 판한성 부사가 되었다.[9]1420년 1월 조선에 흉년이 들자, 한확은 공물 면제를 위한 사절단의 대표로 예조참판 하연(河演)과 함께 명나라에 갔다. 그는 명나라 광록시소경으로서 태종 때부터 추진했던 금과 은의 공물 면제를 주청하여 황제의 허락을 받고 귀국하였다. 1424년 명나라 성조가 북정(北征) 중 유목천(楡木川)에서 사망하자 여비는 영락제 사후 순장되었다.[9] 이후 한확은 장군 절제사(掌軍節制使)가 되었다.
1425년 전감무(前監務) 김성정(金成鼎)의 첩의 딸 고미(古未)와 간통하였다가 사헌부 집의(執義) 정연(鄭淵)·헌납 윤맹겸(尹孟謙) 등으로부터 탄핵을 당하였으나, 세종은 윤허하지 않았다.[10]
이후 여비 한씨의 절개가 높이 평가받아, 1429년(세종 11년) 한확의 다섯째 누이가 명나라 선종(宣宗) 선덕제의 후궁으로 선발되어 공신부인이 되었다. 한확은 진헌사가 되어 진헌부사 조종생(趙從生)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창성(昌盛)과 윤봉(尹鳳)이 한영정의 막내딸이 아름답다고 명나라에 고하여, 한확의 막내 누이도 명나라로 뽑혀 가게 되었다.[11] 막내 누이는 병이 나자 한확이 약을 주었으나, "누이 하나를 팔아서 부귀가 이미 극진한데 무엇을 위하여 약을 쓰려 하오."라며 먹지 않고 칼로 침구(寢具)를 찢고 재물을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침구는 시집갈 때를 위하여 준비했던 것이었다.[11]
1427년 한확을 공격했던 좌군 도사(左軍都事) 최징(崔澄)이 도리어 무고죄로 처벌받았다.[12] 1429년 한확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할 때,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쳐진 내관 백언(白彦)이 그의 어머니에게 주는 단초(段綃)와 성(成)·차(車)·정(鄭)·노(盧)·안(安)·오(吳)·최(崔)씨 등 공녀로 바쳐진 여인들이 고국 가족에게 쓴 편지를 전달해 주었다. 그는 중국어와 한자에 능통하여, 이후 명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선위사(宣慰使)로 파견되어 접대하였다.
1435년(세종 17년) 한확은 자헌대부 행중추원부사, 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437년 그의 딸 한씨가 계양군 이증과 혼인하여 정선군 부인(旌善郡夫人)에 봉해졌다. 그의 또 다른 딸은 수양대군의 아들 도원군 숭과 결혼하는데, 이 딸이 바로 인수대비이다.
1438년(세종 21년) 한확은 중추원사가 되었다가 통행금지 시간을 어기고 수문장에게 압력을 가하여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탄핵받고 파면당했다.[13] 그해 복직하여 정헌대부 중추원사를 거쳐, 1439년 판한성부사, 경기도관찰사, 판병조사, 함경도 관찰사를 거쳐 판한성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해 경기도감사로 나갔다가 복귀, 1440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병조 판서, 판병조사를 거쳐 함길도도관찰사로 나갔다. 이때 그는 관직을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함길도로 부임하였다. 1442년(세종 25년) 동지중추원사와 판한성부사를 지냈다.
1443년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그해 동지중추원사로 의금부제조(義禁府提調)를 겸하였고, 다시 판병조사 겸 지중추원사를 거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가 되었다. 1444년 경상도, 전라도의 진상품을 받을 것을 청하였으나 세종이 이를 듣지 않았다. 그 해 판이조사가 되었는데, 이때 인사에 공정을 기하여 명망이 있었다. 1445년 중추원지사 겸 판병조사(병조판서)를 겸하다가, 다시 판이조사(이조판서)가 되었다. 1446년 판중추원사로 승진되었다가 1447년 이조 판서가 되고, 행평안도 관찰사로 나아갔다. 그해 행평안도관찰사로 평양판윤과 평안도 병마도절제사까지 겸임하였다. 1448년 평안도병마절도사 겸하였다. 1450년(세종 32년) 판중추원사가 되었다.
2. 2. 2. 문종, 단종 시기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이 즉위하자 판중추원사로 소환되었고, 그해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가 되었다.[13] 이듬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로 연경에 다녀왔다. 1452년(문종 2년) 초에 귀국, 그해 의정부 좌찬성이 되었다. 이후 한명회, 신숙주, 권람, 정인지 등과 긴밀히 연락하며 사돈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즉위를 도왔으며, 명나라에 있는 누이 공신부인과 죽은 여비 한씨의 후광에 힘입어 이들의 거사를 은밀히 지원하였다.1452년 원접사(遠接使)로 명나라의 사신을 맞이하였고, 그해 9월 개성부 선위사가 되어 개성 지역을 위문하고 돌아왔다. 12월 초 다시 개성부 선위사가 되어 개성을 순찰하고 되돌아온 뒤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임명되었다.
1453년(단종 원년) 계유정난이 성공하면서 정난공신으로 책록된 뒤 우의정부사로 발탁되어 서성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이어 계유정난 당시 명나라에서 외교적인 문제를 제기할 때 명나라 사신을 설득하여 수양대군의 정치적 입지를 탄탄히 하였다. 그해 11월 계유정난의 성공 이후 수양대군을 도와 좌찬성이 되었다가 다시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의정부 우의정 서원 부원군(西城府院君)에 봉작되었다.
그해 11월에는 창덕궁에서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좌의정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단종의 왕비감을 간택하는데 세 번 참여하였다. 12월 몇 번의 처녀 간택에 참여한 뒤 단종에게 왕비를 맞이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2. 2. 3. 세조 시기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이 즉위하자 판중추원사로 소환되었고, 그해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로 연경에 다녀왔다.[13] 1452년(문종 2년) 초에 귀국, 그해 의정부 좌찬성이 되었다. 이후 한명회, 신숙주, 권람, 정인지 등과 긴밀히 연락하며 사돈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즉위를 도왔으며, 명나라에 있는 누이 공신부인과 죽은 여비 한씨의 후광에 힘입어 이들의 거사를 은밀히 지원하였다.1452년 원접사(遠接使)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였고, 그해 9월 개성부 선위사가 되어 개성 지역을 위문하고 돌아왔다. 12월 초 다시 개성부 선위사가 되어 개성을 순찰하고 되돌아온 뒤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임명되었다.
1453년(단종 원년) 계유정난이 성공하면서 정난공신으로 책록된 뒤 우의정부사로 발탁되어 서성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이어 계유정난 당시 명나라에서 외교적인 문제를 제기할 때 명나라 사신을 설득하여 수양대군의 정치적 입지를 탄탄히 하였다. 계유정난 성공 이후 수양대군을 도와 그해 11월 좌찬성이 되었다가 다시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의정부 우의정 서원 부원군(西城府院君)에 봉작되었다.
그해 11월 창덕궁에서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좌의정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단종의 왕비감을 간택하는데 세 번 참여하였다. 12월 몇 번의 처녀 간택에 참여한 뒤 단종에게 왕비를 맞이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454년 왕비 책봉의 공로로 상을 받았다. 1455년(단종 3년) 초 형조 판서 이변(李邊)·도승지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벽제역(碧蹄驛)에 가서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였다.
1455년(세조 1년) 좌의정이 되고 그해 사은사로서 세조의 왕위 찬탈을 양위로 명분을 세워 명나라를 설득하러 연경에 갔다. 명나라에 가서 단종의 양위를 의심하는 추궁에 세조의 왕위찬탈을 양위(讓位)라고 설득시켰다.
세조의 책봉고명을 성사시킨 공로로 좌익공신 1등에 오르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개봉되었다.
1456년 난신에 연좌된 부녀를 분배할 때 조청로(趙淸老)의 어미 덕경(德敬)·아내 노비(老非), 최득지(崔得池)의 아내 막덕(莫德), 이현로(李賢老)의 첩의 딸 이생(李生) 등을 노비로 하사받았다.[14]
2. 3. 사후
음력 9월 11일 귀국길에 세조의 책봉 고명을 받아 돌아오던 중, 칠가령(七家嶺)에 이르러 병을 얻어, 귀환하는 도중에 사하포(沙河浦)에서 갑작스럽게 객사하였다. 당시 향년 56세였다.[15] 사망 당시 가사에 대한 말은 한마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둘째 딸은 세종의 서자 계양군 증에게 출가했고, 여섯째 딸은 인수대비로 덕종의 비이며 월산대군·성종의 어머니였다.한확은 세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충신이었다. 그는 그의 누나가 명나라 성조(成祖)의 후궁이 되면서 명나라 황실의 벼슬을 받고 외교채널이 된다.[16] 그리고 누이동생 또한 명나라 선종(宣宗)의 후궁으로 간택돼 더욱 외교적 입지를 다지게 된다. 사실 한확의 두 누이이자 인수대비의 고모들은 명나라에 공녀로 바쳐진 가슴 아픈 사연을 지녔다. 한확은 계유정난 때 세조를 도와 정난공신 1등에도 올랐는데 세조의 왕위 찬탈을 승인하지 않던 명나라에 들어가 단종이 왕위를 물려준 양위라고 설득한다. 그러나 한확은 골치 아픈 외교 문제를 해결하였다.[16]
동생 한전(韓磌)·한질(韓)이 모두 일찍 죽었는데, 한확이 그 고아를 무육(撫育)하기를 자기 자식과 다름이 없었다. 작품으로는 고려말기의 문신 차원부를 애도하는 치제문이 있다. 그가 죽자 세조는 9월 22일까지 정사와 조회를 중단하였다. 이때 강무까지 중단하려 하였으나 승정원의 반대로 강무는 계속하였다.
사후 시신은 국내로 운구되어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69-5) 동두미진 상조곡산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소가 왕릉과 비슷한 크기라 하여 후일 능내, 능내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묘비명은 사가 서거정이 묘지명을 지었다. 한편 그의 부인의 묘소는 양주군 은현면 용암리에 소재해 있다.
1470년(성종 1년)에 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양절(襄節)이다.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가 아버지의 묘에 비가 없음을 슬퍼하자 성종은 특명을 내려 1494년(성종 25년) 4월 우참찬 어세겸(漁世謙)에게 한확의 신도비문을 짓게하고 한확의 셋째아들 한치례(韓致禮)에게 비의 건립을 감독하게 하여 1495년 세웠다고 한다. 신도비문의글씨는 성종의 사돈 임사홍(任士洪)이 썼다. 한확의 신도비는 후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7호로 지정되었다.
은현면에 있는 그의 부인 남양홍씨의 신도비는 임사홍이 지었다.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할아버지 | 한녕(韓寧) | ? - ? | |
아버지 | 한영정(韓永矴) | 1375년 - ? | |
어머니 | 의성 김씨 | ? - 1423년 3월 13일 | 의성군 양소공 김영렬(金英烈)의 딸 |
누이 | 여비 한씨 | 1398년 - 1424년 8월 12일 |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 |
여동생 | 공신부인 한계란(韓桂蘭) | 1410년 - 1484년 | 명나라 선덕제의 후궁 |
동생 | 한전(韓磌) | 1408년 - 1447년 | |
동생 | 한질(韓𥑇) | 1406년 - ? | |
조카 | 한치형 | ? - ? | |
부인 | 남양부부인 홍씨 | 1403년 - 1450년 | 남양 홍씨 이조판서, 대제학 문양공 홍여방(洪汝方)의 딸 |
자녀 (3남 6녀) | |||
아들 | 한치인(韓致仁) | 1421년 - 1477년 | |
아들 | 한치의(韓致義) | 1440년 - 1473년 | |
아들 | 한치례(韓致禮) | 1441년 - 1499년 | 영돈녕부사, 서릉부원군,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 장간(莊簡) |
며느리 | 죽산 안씨 | ? - ? | 안맹담(安孟聃)의 딸[18][19] |
손자 | 한익(韓翊) | ? - ? | 보조공신, 군기시판관, 증 병조참판, 서성군 |
손주며느리 | 순천 박씨 | ? - ? | 판중추부사 평양군(平陽君) 박중선(朴仲善)의 딸 |
증손자 | 한세창(韓世昌) | ? - ? |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 영흥 대도호부사, 증 호조판서, 청원군 |
증손자 | 한숙창(韓叔昌) | ? - ? |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 장례원 판결사, 증 공조판서, 서평군 |
장녀 | 한유산(韓榴山) | 1423년 - ? | |
사위 | 이계녕 | ? - ? | |
차녀 | 정선군부인 한씨(한유산,韓柚山) | 1426년 4월 12일 - 1480년 7월 27일 | |
사위 | 계양군[20] | ? - ? | |
삼녀 | 한감산(韓柑山) | 1427년 - ? | |
사위 | 김자완 | ? - ? | |
사녀 | 한시산(韓枾山) | 1431년 - ? | |
사위 | 최연 | ? - ? | |
오녀 | 한이산(韓梨山) | 1434년 - 1481년 | |
사위 | 권집 | ? - ? | |
육녀 | 인수대비(소혜왕후) | 1437년 10월 7일 - 1504년 5월 11일 | |
사위 | 의경세자(덕종) | 1438년 10월 3일 - 1457년 9월 20일 | |
손자 | 월산대군 | 1455년 1월 14일 - 1489년 1월 31일 | |
손녀 | 명숙공주 | 1456년 - 1482년 11월 23일 | |
손자 | 조선 성종 | 1457년 8월 28일 - 1495년 1월 29일 | |
장인 | 홍여방(洪汝方) | ? - ? | |
외할아버지 | 김영렬(金英烈) | ? - ? |
4. 평가
한확은 사치하지 않고 검소하였으며, 누나와 누이동생이 명나라 성조와 선종의 총애를 받아 명나라 후궁의 일족이라는 후광을 얻었으나 거만하지 않았다. 딸 소혜왕후에게는 일찍이 한학과 사서삼경을 가르치고 부녀자로서 지켜야 할 범절을 가르쳤으며, 세자빈이 된 뒤에도 검소하고 자신을 낮출 것을 권고하였다.
넓은 도량과 온화하고 간결한(溫簡) 성품으로 상하의 신망을 받았으며, 명나라 황실과의 유대와 공정하고 결단성 있는 정사로 외교와 내치에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아우 참의공 한전이 일찍 죽자 아버지 없는 어린 조카들을 데려다가 친자식처럼 양육하였다.
그러나 태종·세종 때 차례로 두 누이동생을 공녀로 보낸 한확은 우의정과 좌의정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가 간통을 저질렀을 때도 세종은 "내가 죄줄 수 없는 사람"이라며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21]
5. 기타
사후 시신은 국내로 운구되어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69-5) 동두미진 상조곡산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소가 왕릉과 비슷한 크기라 하여 후일 능내, 능내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묘비명은 서거정이 묘지명을 지었다. 한편 그의 부인의 묘소는 양주군 은현면 용암리에 있다.[1]
1470년(성종 1년) 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양절(襄節)이다.[1]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가 아버지의 묘에 비가 없음을 슬퍼하자 성종은 특명을 내려 1494년(성종 25년) 4월 우참찬 어세겸에게 한확의 신도비문을 짓게하고 한확의 셋째아들 한치례에게 비의 건립을 감독하게 하여 1495년 세웠다고 한다. 신도비문의 글씨는 성종의 사돈 임사홍이 썼다. 한확의 신도비는 후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7호로 지정되었다.[1]
은현면에 있는 그의 부인 남양 홍씨의 신도비는 임사홍이 지었다. 부인 홍씨의 묘소는 양주군 은현면 용암리에 있다.[1]
부인 홍씨의 신도비는 왕족, 후궁 여성 외의 여성의 신도비로서는 최초로 건립된 것이다. 1497년(연산군 3년) 3월 16일 소혜왕후의 명으로 임사홍에게 신도비문을 짓게 하여 수립하였다.[1]
6. 대중문화
참조
[1]
문서
[2]
문서
[3]
문서
[4]
문서
[5]
문서
[6]
문서
[7]
백과사전
한확
[8]
문서
[9]
문서
[10]
세종실록
장군 절제사 한확이 간통했다고 갈아 임명하게 하다
1425-09-28
[11]
세종실록
진헌할 처녀로 간택된 한영정의 막내딸이 혼수로 준비했던 재물을 나눠주다
1427-05-01
[12]
세종실록
한확과 홍인을 무고한 죄로 좌군 도사 최징을 의금부에 가두라 명하다
1427-12-05
[13]
세종실록
성문 출입에 문제가 있던 한확·연경·이연기·남계영을 벌주다
1438-10-19
[14]
세조실록
의금부에 난신에 연좌된 부녀를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다
1456-09-07
[15]
문서
[16]
뉴스
王을 만나다·16서오릉-경릉 ( 추존 덕종·소혜왕후) : 남존여비 '女訓'과 상반된 '여성상위능'
http://www.kyeongin.[...]
경인일보
2010-01-14
[17]
웹사이트
양성지와 한확의 차원부관련 글에 대한 고찰
http://cafe.daum.net[...]
[18]
문서
[19]
서적
상신(相臣) 한확의 비명(碑銘)
국역 국조인물고
[20]
문서
[21]
뉴스
나라가 힘이 없어 중국에 바쳐진 인간 진상품… 貢女(공녀) 잔혹사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1-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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