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양
1. 개요
김시양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60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를 시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광해군 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전라도 도사로 재직 중 왕의 실정을 비유한 시제를 출제하여 유배되기도 했다. 인조반정 이후 예조 좌랑, 병조 정랑 등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했으며, 정묘호란 당시 평안도 관찰사,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척화론을 주장하다 유배되기도 했으며, 이후 청백리에 녹선되고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선조실록≫ 개수에 참여하려 했으나 안질로 불참했다. 저서로는 ≪하담파적록≫, ≪하담집≫ 등이 있으며, 시호는 충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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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1년 출생 -
헨드릭 브라우어르
헨드릭 브라우어르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선장이자 총독으로서 브라우어르 항로 개척, 일본과의 관계 개선, 아유타야 왕국과의 무역 관계 확립, 영국 동인도 회사와의 분쟁 해결 노력, 태평양 탐험 지원, 칠레 발디비아 재점령 원정 등을 통해 네덜란드 동인도 제국 확장에 기여했다. -
1581년 출생 -
도쿠가와 히데타다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셋째 아들이자 1605년부터 1623년까지 에도 막부의 제2대 쇼군으로 재임하며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는 데 기여하고 막부의 통치 기반을 강화했으며, 쇄국정책을 추진하고 강력한 반기독교 정책을 시행했다. -
1643년 사망 -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는 17세기 초 건반 악기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로, 토카타, 칸초나, 리체르카레, 변주곡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
1643년 사망 -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는 르네상스 후기와 바로크 초기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오페라의 선구자로, 만토바 궁정 활동과 오페라 《오르페오》 초연을 통해 극적인 음악극 장르를 개척하고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 악장으로 교회 음악을 개혁하며 오페라 발전에 기여, 모노디 양식 발전과 불협화음 활용, 악기 편성 혁신 등으로 음악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조선의 문신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문신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예조 좌랑, 병조 정랑, 수찬(修撰), 교리(敎理)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원익의 종사관으로 활약했으며, 난이 평정된 후 응교(應敎) 겸 문학,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625년(인조 3) 응교 겸 문학, 이듬해 인헌왕후의 산릉역(山陵役) 공로로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징후로 평안도 관찰사 겸 체찰부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의정부의 의논에 따라 도원수와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하였다.
그러나 왕의 뜻을 어기고 척화를 주장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634년 지중추부사에 서용(敍用)되었다. 그 뒤 한성판윤, 호조판서 겸 동지춘추,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을 거쳐 9월에 다시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이듬 해 강화유수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1636년 청백리에 뽑혀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으나 눈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인 충주로 내려갔다. 1641년 ≪선조실록≫ 개수 때 대제학 이식과 총재관(總裁官) 홍서봉 등의 추천으로 다시 판중추부사 겸 춘추관사를 제수받았으나 지병인 안질로 실록개수(實錄改修)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전적(典籍)과 경사(經史)에 밝았다.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하담파적록 荷潭破寂錄≫, ≪하담집≫, ≪부계기문 ?溪記聞≫ 등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2.1. 초기 생애
1605년(선조 38)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1607년 주서(注書)가 되고 1609년(광해군 1)에 예조좌랑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했으며, 1610년 동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1년(광해군 3) 전라도 도사로 향시를 주관할 때 시제(試題)에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한 문제를 출제했다 하여 종성(種城)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 영해(寧海)로 옮겨졌다.
2.2. 관직 생활과 유배
1605년(선조)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1607년 주서(注書)가 되고 1609년(광해군 1)에 예조좌랑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했으며, 1610년 동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1년(광해군 3) 전라도 도사로 향시를 주관할 때 시제(試題)에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한 문제를 출제했다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 영해에 이배(移配)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예조 좌랑·병조 정랑·수찬(修撰)·교리(敎理)를 역임하였고,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원익의 종사관으로 활약했으며, 난이 평정된 후 응교(應敎)로 문학을 겸임하고, 이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625년(인조 3) 응교(應敎)가 되어 문학을 겸했고, 이듬해 인헌왕후의 산릉역(山陵役)에 공로가 많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날 징후가 보이자 평안도관찰사 겸 체찰부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의정부의 의논에 따라 도원수와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하였다.
그러나 왕의 뜻을 어기고 척화를 주장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634년 지중추부사에 서용(敍用)되었다. 그 뒤 한성판윤을 거쳐 호조판서 겸 동지춘추·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이 되었다가 9월에 다시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이듬 해 강화유수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1636년 청백리에 뽑혀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으나 눈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인 충주로 내려갔다. 1641년 ≪선조실록≫을 개수할 때 이식과 총재관(總裁官) 홍서봉 등의 추천으로 다시 판중추부사 겸 춘추관사를 제수받았으나 지병인 안질로 실록개수(實錄改修)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2.3. 인조반정과 군사적 활약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예조 좌랑, 병조 정랑, 수찬(修撰), 교리(敎理)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원익의 종사관으로 활약했으며, 난이 평정된 후 응교(應敎)로 문학을 겸임하고, 이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625년(인조 3) 응교(應敎)가 되어 문학을 겸했고, 이듬해 인헌왕후의 산릉역(山陵役)에 공로가 많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날 징후가 보이자 평안도 관찰사 겸 체찰부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의정부의 의논에 따라 도원수와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하였다.
그러나 왕의 뜻을 어기고 척화를 주장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2.4. 정묘호란과 척화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날 징후가 보이자 평안도관찰사 겸 체찰부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의정부의 의논에 따라 도원수와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하였다. 그러나 왕의 뜻을 어기고 척화를 주장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634년 지중추부사에 서용(敍用)되었다.
2.5. 후기 생애와 사망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예조 좌랑, 병조 정랑, 수찬, 교리를 역임하였고,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원익의 종사관으로 활약했으며, 난이 평정된 후 응교 겸 문학,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625년(인조 3) 응교 겸 문학, 이듬해 인헌왕후의 산릉역(山陵役) 공로로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징후로 평안도관찰사 겸 체찰부사, 병조판서, 도원수,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하였다.
그러나 왕의 뜻을 어기고 척화를 주장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634년 지중추부사에 서용(敍用)되었다. 그 뒤 한성판윤, 호조판서 겸 동지춘추,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을 거쳐 9월에 다시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이듬 해 강화유수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1636년 청백리에 뽑혀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으나 눈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인 충주로 내려갔다. 1641년 ≪선조실록≫ 개수 때 대제학 이식과 총재관(總裁官) 홍서봉 등의 추천으로 다시 판중추부사 겸 춘추관사를 제수받았으나 지병인 안질로 실록개수(實錄改修)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전적(典籍)과 경사(經史)에 밝았다.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하담파적록 荷潭破寂錄≫, ≪하담집≫, ≪부계기문 ?溪記聞≫ 등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