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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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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선조실록은 선조 재위 기간(1567년~1608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실록으로, 1609년부터 1616년까지 약 7년에 걸쳐 편찬되었다. 총 221권 116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임진왜란으로 인한 사료 부족과 당파 싸움의 영향으로 기록의 부실함과 불공정성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후 《선조실록》의 내용을 수정하기 위해 《선조수정실록》이 편찬되었으며, 1657년에 완료되었다. 《선조수정실록》은 42권 8책으로 구성되었으며, 기존 실록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당파적 편향성을 수정하려는 시도가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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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기본 정보
조선 제14대 왕 선조 어진
조선 제14대 왕 선조 어진
균 (鈞) → 연 (昖)
묘호선조 (宣祖)
시호소경정륜립극성범대중연모돈민순성효왕 (昭敬正倫立極盛範大中延謨敦敏淳聖孝王)
능호목릉 (穆陵)
재위 기간1567년 ~ 1608년
출생1552년 12월 26일 (음력 11월 11일)
사망1608년 3월 16일 (음력 2월 1일)
부모아버지: 덕흥대원군
어머니: 하동부부인 하동 정씨
배우자의인왕후 박씨
인목왕후 김씨
후궁: 공빈 김씨, 순빈 김씨, 정빈 민씨, 온빈 한씨, 귀인 홍씨, 소용 엄씨
자녀영창대군 이의
광해군 이혼
정원군 이부
기타 정보
종교유교

2. 《선조실록》

《'''선조실록'''》은 1609년(광해군 1년)부터 1616년(광해군 8년)까지 약 7년간 편찬된 실록으로, 선조 재위 40년 7개월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정식 명칭은 《선조소경대왕실록》이며, 총 221권 116책으로 구성되어 《조선왕조실록》의 일부를 이룬다.

임진왜란 중인 1595년(선조 28년)에 이미 1592년(선조 25년) 이전의 사초 소실 문제가 지적되었고, 정경세는 사관이나 각 지방관들의 기억, 개인의 야사, 조보, 정목 등을 수집할 것을 건의하였다.[1] 그러나 사초 수집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유희춘의 《미암일기》나 이정형의 《동각잡기》 등만 춘추관에 보관되었다.

선조 승하 후 1608년(광해군 즉위년) 음력 9월 실록청 설치를 건의하면서 편찬 논의가 시작되었고, 1609년(광해군 1년) 음력 7월 12일 본격적으로 편찬이 시작되었다.[2] 하지만 사초 부족 문제는 여전하여, 사대부가의 기록이나 개인 일기를 사료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광해군은 명나라 사신이 귀국하면 실록 편찬을 시작하도록 지시하였다.[3] 사료 부족 문제는 계속 지적되었으며,[4] 춘추관에 보관하던 유희춘이나 이정형의 일기 등을 참고하려 했으나 임진왜란 이전 기록은 매우 적었다.[5] 사망한 관원들의 개인 일기, 각 부서와 지방의 공문서까지 동원되었다. 《광해군일기》에서는 사관 4명이 선조 시대 사초를 불태우고 도망갔다고 지적하였다.[6] 사초 편중 문제로 임진왜란 이후 기록이 먼저 제작되었다.[7]

1611년(광해군 3년) 음력 3월에는 실록 편찬 작업이 더디자 사헌부에서 실록 편찬자들의 근무 기강을 잡도록 상소하였다.[8] 실록 편찬은 1616년(광해군 8년) 음력 11월에 완료되었다.[2]

편찬관은 영사에 기자헌, 감사에 이항복, 지사 17명, 동지사 24명, 편수관 48명, 기주관 52명, 기사관 81명 등 총 224명이다. 총재관은 원래 서인 출신의 이항복이었으나, 후에 북인 출신의 기자헌으로 교체되었다.

1929년부터 1932년에 걸쳐 경성제국대학에서 영인본을 간행하였고, 1955년부터 1958년까지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영인본을 간행하였다.[9]

2. 1. 편찬 과정

2. 2. 편찬 참여자

2. 3. 특징 및 평가

《선조실록》은 임진왜란으로 인한 사료 부족으로 임진왜란 이전의 기사는 기록되지 않은 달이 있을 정도로 부실하다.[9] 반면 임진왜란 이후의 기사는 사초 보관이 가능했으나, 기사가 조잡하거나 당파 성향에 의해 공정하지 않게 기록된 경우가 많다.[9] 이에 따라 권수의 편차도 커서, 선조 즉위년부터 1592년(음력 3월)까지 약 25년분의 실록은 26권에 불과하지만, 임진왜란 이후부터 선조 승하 때까지 약 16년분의 기사는 195권이나 된다.[9] 이러한 이유로 《선조실록》은 역대 실록 중 가장 질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9]

갑인자체 목활자와 을해자[21]체 목활자, 새로 제작된 목활자 등 여러 글씨체가 섞여있다.[22] 특히 임진왜란 때 새로 인쇄한 이전 왕의 실록 활자에는 주자가 섞여있어 인쇄 상태가 깨끗하지만, 《선조실록》은 모두 목활자인데다가 그 새김도 거칠어 인쇄가 조잡하다.[22]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선조실록》의 인쇄에 쓰인 목활자만 "선조실록자"로 칭하는 것이 맞다는 견해를 보인다.[22]

3. 《선조수정실록》

《선조실록》의 내용을 수정하기 위해 편찬한 실록으로, 총 42권 8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지에는 《선조소경대왕수정실록》(宣祖昭敬大王修正實錄)으로 쓰여 있으며, 역시 《조선왕조실록》의 일부를 이룬다. 《선조수정실록》은 기존에 편찬된 실록이 개수된 최초의 사례이다.

1641년(인조 19년) 당시 대제학 이식이 《선조실록》의 개수를 건의하면서 편찬 논의가 시작되었다. 당시 이식은 《선조실록》을 북인인 기자헌, 이이첨, 박건 등이 편찬하여 일부 기록은 삭제하고 없는 사실을 적는 등 그 사실 관계가 잘못된 것이 많고, 이이첨이 좋아하던 사람은 성인처럼 기록하고 미워하던 사람은 매도하는 등의 기록이 있다고 하였다. 또 《선조수정실록》의 수정 범례에 의하면 임진왜란 이전 기사가 지나치게 적은 것 또한 문제가 되었던 듯 하다.[10] 이에 인조가 이식이 개수를 전담하는 방식으로 이를 윤허하였으나,[11] 당시 실록의 개수를 한 사람이 담당할 수는 없다고 하여 사관을 지낸 이들의 집에서 사초를 수집하도록 하였다.[12] 1643년(인조 21년) 음력 5월 본격적으로 편찬이 개시되었고,[13] 이식과 검열 심세정이 적상산사고에 내려가 《선조실록》의 잘못된 곳을 뽑아와 보고하였다.[14] 그러나 1646년(인조 24년) 이식이 파직되고 이듬해 사망하면서 실록 개수 작업은 중단되었다. 당시 이식의 졸기에는 실록 개수를 주창하였으나 이루지 못 하고 죽은 것을 사람들이 애통해했다고 적고 있다.[15]

실록의 개수는 효종 즉위 후로 미뤄졌고, 1649년(효종 즉위년) 실록의 개수를 다시 시작하고자 하였으나[16] 이루어지지 못 했다. 이후 1657년(효종 8년) 경덕궁에 실록 개수를 위한 관청을 설치하여 김육에게 총괄하게 하였으며,[17] 이어 관청의 이름을 실록수정청이라 하였다.[18] 그리고 그 해 음력 9월 30일 마침내 실록 개수를 완료하였다.[19] 《선조수정실록》의 부록에는 실록 수정의 범례[10]와 실록 수정에 참가한 채유후의 후기 등이 함께 실려 있다.[17]

원래 당쟁이 생기기 이전의 실록은 비교적 공정하게 서술되어 있었으나, 당쟁 발생 이후의 실록은 당파의 성향에 의해 실록이 수정되는 일이 몇 차례 발생하게 된다. 이후 실록이 개수된 예로 《현종개수실록》과 《경종수정실록》 등을 들 수 있다. 《선조수정실록》의 완성 이후에도 기존의 《선조실록》 역시 그대로 보존되어 기사의 비교가 가능하다. 이 실록 역시 1955년부터 1958년에 걸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영인본을 간행하였다.[20]

3. 1. 편찬 배경

3. 2. 편찬 과정

3. 3. 특징 및 평가

《선조수정실록》은 1년 분의 기사를 1권으로 만들어 총 4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20] 이 중 선조 즉위년부터 재위 29년까지 총 30권은 이식이, 재위 30년부터 재위 41년까지 총 12권은 효종 때 김육, 채유후 등이 편찬하였다.[20]

1657년 《선조수정실록》 편찬 과정을 기록한 의궤인 《선조대왕실록수정청의궤》가 간행되었다.[23]

《선조수정실록》의 활자는 《선조실록》의 활자보다 크기가 조금 더 크고 경오자[24]체인 "인조실록자" 계통을 사용하였다.[22]

4. 《선조대왕실록수정청의궤》

5. 두 실록의 비교 및 의의

6. 같이 보기

참조

[1] 문서 선조실록 60권, 선조 28년 2월 15일 무오 6번째기사
[2] 문서 선조실록 1권, 편수관 명단
[3] 문서 광해군일기 중초본 8권, 광해 즉위년 9월 17일 신축 1번째기사
[4] 문서 광해군일기 중초본 18권, 광해 1년 7월 13일 임진 1번째기사
[5] 뉴스 역사가의 자격, "욕먹는 자는 사필을 잡을 수 없다" https://news.naver.c[...]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null
[6] 문서 광해군일기 중초본 21권, 광해 1년 10월 5일 계축 1번째기사
[7] 문서 광해군일기 중초본 39권, 광해 3년 3월 24일 갑자 3번째기사
[8] 문서 광해군일기 중초본 39권, 광해 3년 3월 3일 계묘 2번째기사
[9] 웹사이트 선조실록 https://terms.naver.[...]
[10] 문서 선조수정실록 42권, 《선조실록》 수정 범례
[11] 문서 인조실록 42권, 인조 19년 2월 12일 정사 1번째기사
[12] 문서 인조실록 42권, 인조 19년 5월 7일 신사 1번째기사
[13] 문서 인조실록 44권, 인조 21년 5월 22일 갑인 1번째기사
[14] 문서 인조실록 44권, 인조 21년 7월 13일 갑진 1번째기사
[15] 문서 인조실록 48권, 인조 25년 6월 13일 임오 3번째기사
[16] 문서 효종실록 2권, 효종 즉위년 10월 18일 계묘 1번째기사
[17] 문서 선조수정실록 42권, 《선조실록》 수정에 참가한 채유후의 후기
[18] 문서 효종실록 18권, 효종 8년 1월 12일 을묘 3번째기사
[19] 문서 효종실록 19권, 효종 8년 9월 30일 기사 3번째기사
[20] 웹사이트 선조수정실록 https://terms.naver.[...]
[21] 웹사이트 을해자 https://terms.naver.[...]
[22] 웹사이트 실록자 https://terms.naver.[...]
[23] 웹사이트 실록청의궤 https://terms.naver.[...]
[24] 웹사이트 경오자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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