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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야마 노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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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가야마 노리오는 1949년 홋카이도에서 태어나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1968년 4명을 잇따라 살해하여 '나가야마 노리오 연속 사살사건'으로 불리는 사건의 범인이다. 그는 1969년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재판 과정에서 옥중에서 집필 활동을 시작하여 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1990년 사형이 확정되었고, 1997년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사건은 사형 제도, 소년 범죄, 빈곤 문제 등 사회적 문제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켰으며, 옥중 문학 활동은 범죄자의 교화 가능성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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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야마 노리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본명나가야마 노리오
출생일1949년 6월 27일
출생지아바시리, 홋카이도, 점령 하 일본
사망일1997년 8월 1일
사망 장소도쿄 구치소, 가쓰시카구, 도쿄도, 일본
사망 원인교수형
별칭해당사항 없음
범죄 정보
국적일본
범죄지도쿄도
교토
홋카이도
아이치
범행 시작일1968년 10월 11일
범행 종료일1968년 11월 5일
체포일1969년 4월 7일
형벌사형
사용 무기도난 당한 뢰머 RG-10 .22 구경 리볼버
유죄 판결살인죄 (4건)
범죄 상태사형 집행
피해자 수4명

2. 생애

나가야마 노리오는 홋카이도 아바시리시에서 태어나 이혼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 1965년 도쿄도로 이주하여 시부야에서 일하던 중 자마·시부야 총기 난사 사건을 목격했다.[1]

1968년 10월 11일부터 11월 5일 사이에 권총으로 4명을 살해했다. 그는 마지막 두 명의 피해자로부터 16,420엔(당시 화 가치로 16420JPY)을 강탈했다. 1969년 4월 7일에 체포되었으며, 체포 당시 19세로 당시 일본 법에 따라 미성년자였다.[1]

1979년 도쿄 지방 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1981년 도쿄 고등 재판소에서 무기 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83년 일본 최고 재판소는 고등 재판소의 판결을 파기했다. 이 판결은 오늘날 일본의 사형 집행에 대한 획기적인 결정으로 여겨진다. 항소심에서 고등 재판소는 이후 1987년에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이 결정은 1990년에 최고 재판소에서 유지되었다.[1]

나가야마는 감옥에서 많은 소설을 썼고, 1971년 첫 출판 작품 無知の涙|무지의 눈물일본어을 출간했다. 1983년에는 소설 木橋|나무 다리일본어로 상을 받았다. 일본 문학계는 유죄 판결을 받은 살인범이라는 그의 신분 때문에 그의 성공에 불안해했다. 그는 일본 문학가 협회에서 거절당했지만 1996년 독일 자르에서 인정을 받았다.[2]

1997년 8월 1일, 도쿄 구치소에서 48세의 나이로 사형 집행되었으며, 고베 아동 살해 사건의 14세 범인 사카키바라 세이토가 체포된 지 불과 34일 만이었다. 그는 마지막 진술을 하지 않았다. 그의 유언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재단이 설립되었다.[3]

2. 1. 출생과 불우한 유년 시절

1949년 6월 27일, 홋카이도 아바시리시에서 8남매 중 일곱째(4남)로 태어났다.[1] 아버지는 도박을 좋아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으며, 어머니는 행상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가정 형편은 매우 어려웠고, 결국 1954년 어머니는 나가야마를 포함한 아이 4명을 남겨둔 채 아오모리현 이타야나기정의 친정으로 도망치듯 떠났다.[1]

남겨진 아이들은 쓰레기를 줍거나 쓰레기통을 뒤지는 등 극심한 빈곤 속에서 생활했다. 1954년 봄, 복지사무소의 통보로 4명의 형제자매는 이타야나기에 있는 어머니에게 보내졌다.[1]

이타야나기에서의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나가야마는 쓰가루 방언을 사용하지 못해 따돌림을 당했고, 과묵한 성격 탓에 친구를 사귀기 어려웠다. 집에서는 둘째 형에게 심한 폭력을 당했으며, 어머니마저 아버지와 닮았다는 이유로 나가야마를 때렸다.[1] 이러한 학대는 나가야마가 초등학교 2학년 무렵부터 빈번하게 가출하는 원인이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홋카이도모리정까지 가출하기도 했다.[1]

2. 2. 상경과 범죄

1965년 도쿄도로 상경하여 시부야 등지에서 여러 직업을 전전했으나,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갔다.[1] 1968년 10월부터 11월 사이에 주일 미군 숙사에서 훔친 권총으로 도쿄, 교토, 하코다테, 나고야에서 4명을 연속 사살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나가야마 노리오 연속 사살사건, 광역중요지정 108호 사건)[7] 이 사건은 1965년에 일어난 소년 소총마 사건에 자극받은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 4건 사이에 냉각기가 없으므로 연쇄살인이 아닌 연속살인으로 분류한다.[1]

나가야마는 1968년 10월 8일경, 주일 미국 해군 요코스카 기지 내 주택에 침입하여 소형 권총(22구경)과 총탄 50발 등을 훔쳤다. 그 권총을 사용하여, 같은 해 10월에는 도쿄도미나토구의 도쿄 프린스 호텔 (10월 11일)과 교토부교토시히가시야마구야사카 신사 (같은 달 14일)에서 남성 경비원 2명을 잇따라 사살하였다. 돈에 궁핍해지자 택시 강도를 계획하여, 10월 26일에는 홋카이도가메다군나나에정에서, 11월 5일에는 아이치현나고야시미나토구에서 택시 운전사를 잇따라 사살했다.

나가야마는 4건의 연쇄 살인 이후, 요코하마로 돌아가 잠시 동안 부두 노동자로 일했지만, 그 후에는 도쿄도 나카노구의 아파트로 이주하여, 신주쿠구가부키초의 대중 바에 취직했다. 하지만 대중 바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단 결근하여 퇴직, 체포 전에는 가부키초의 재즈 찻집 "빌리지 뱅가드"에 취직했었다.

1969년 4월 7일, 강도 살인 미수 혐의로 체포되었다.[7] 체포 당시 19세였으며 당시 일본 법에 따라 미성년자로 간주되었다.[1] 나가야마는 4건의 살인 및 강도 살인을 인정했기 때문에, 신병이 아타고 경찰서 수사 본부로 이송되어, 도쿄 프린스 호텔에서의 살인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다.[7]

2. 3. 재판과 수감 생활

1969년 4월 당시 19세 10개월의 나이로 도쿄에서 체포되었다.[1] 1979년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12] 1981년 도쿄 고등재판소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지만,[14] 1990년 최고재판소는 "가정 환경의 열악함은 분명 동정할 가치가 있으나, 형제들은 흉악범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확정했다.[16] 이 사건에서 4명 이상을 살해하면 사형을 선고하는 나가야마 기준이 확립되었다.

1심 첫 공판은 1969년 8월 8일에 도쿄 지방 법원에서 열렸다.[10] 세간의 관심이 높아 70명의 방청객이 몰려들었다. 재판은 변호단의 해임·사임 등으로 10년에 걸쳐 장기간 심리가 진행되었고, 그 사이에 재판장도 3번 교체되었다. 나가야마 체포 약 10년 3개월 후인 1979년 7월 10일, 도쿄 지방 법원은 검사의 구형대로 사형 판결을 선고했다.[12]

변호단은 도쿄 고등 법원에 항소했고, 항소심에서는 변호단과 옥중 결혼한 아내, 고도 출판의 전 편집장 등이 나가야마에 대한 정상 참작을 호소했다. 나가야마 자신도 피해자 유족에게 출판된 인세를 증정하여 위로의 마음을 보이는 등 심경의 변화를 보였다. 그 결과, 1981년 8월 21일 도쿄 고등 법원은 원심의 사형 판결을 파기하고 무기 징역 판결을 선고했다.[14]

그러나 이 판결에 대해 도쿄 고등 검찰청은 판례 위반·양형 부당을 이유로 최고 재판소에 상고했다.[15] 1983년 7월 8일, 최고 재판소는 검사 측의 상고를 받아들여 무기 징역 판결을 파기하고, 심리를 도쿄 고등 법원에 돌려보내는 판결을 선고했다.[16] 최고 재판소가 양형 부당을 이유로 피고인에게 불이익한 방향으로 항소심 판결을 파기하고, 고등 법원에 환송(항소심 재심리)을 명령한 사례는 전후 형사 재판 사상 처음이었다.[16]

환송 항소심 결과, 나가야마는 1987년 3월 18일 도쿄 고등 법원에서 다시 사형 판결을 선고받았다.[17] 나가야마는 이 판결에 불복하여 상고했지만, 1990년 4월 17일 최고 재판소에서 상고 기각 판결을 받았다.[18][19] 나가야마의 국선 변호인은 판결 정정 신청을 했지만 기각되었고, 1990년 5월 9일 나가야마에게 통보되었다.[20] 이로써 나가야마 노리오는 체포된 지 21년 만에 사형이 확정되었다.[21]

반려 심사에서 무기 징역이 어려워지자 나가야마는 항소심 무렵까지의 주장을 뒤집고, 1심과 같이 국가 권력에 대한 발언으로 바뀌었다. 또한 구치소에서 면회를 온 사람에게 사회에 나갔을 때의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변호사에게 "살 희망이 없던 사람에게 살 희망을 주어 놓고 결국 죽이다니, 이런 식으로 하는군요"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나가야마는 옥중에서 많은 편지를 썼다. 옥중 결혼한 아내나 후원자와의 주고받음에서부터 책 독자들의 고민 상담까지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편지 왕래 속에서 국가에 대한 심정에서 속죄 의식으로 바뀌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3. 작가로서의 활동

나가야마 노리오는 옥중에서 독학으로 집필 활동을 시작하여, 1971년 수필 《무지의 눈물》과 《인민을 잊은 카나리아들》을 발표했다. 인세는 피해자 유족들에게 전달되었고, 이는 1981년 고등재판소 판결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는 계기가 되었다.[1] 1983년에는 소설 《나무다리》로 제19회 신일본문학상을 수상했다.[2] 그의 첫 출판 작품은 1971년 無知の涙|무지의 눈물일본어이었다.[2]

3. 1. 옥중 집필과 문학적 성취

나가야마는 옥중에서 읽고 쓰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독학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71년 수필 《무지의 눈물》과 《인민을 잊은 카나리아들》을 발표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2] 인세는 피해자 유족에게 전달되었고, 이는 1981년 고등재판소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1983년 소설 《나무다리》로 제19회 신일본문학상을 수상했다.[2] 1990년 아키야마 슌과 가가 오토히코의 추천으로 일본문예가협회에 입회를 신청했으나, 살인사건의 형사피고인이라는 이유로 사에키 쇼이치, 스기모리 히사시데 등 이사 일부가 반대하여 입회가 거부되었다.[2] 이에 항의하여 나카가미 겐지, 쓰쓰이 야스타카, 가라타니 고진 등이 일본문예가협회에서 탈퇴했다.[2] 나가야마는 1996년 독일 자를란트주 작가동맹에 정식으로 입회했다.[2]

옥중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창작활동을 통해 문단에서 일정한 지위를 획득한 나가야마는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3. 2. 문단과의 갈등

1990년 아키야마 슌, 가가 오토히코의 추천으로 일본문예가협회에 입회를 신청했으나, 협회 이사회에서 사에키 쇼이치, 스기모리 히사시데 등 일부 이사가 살인사건의 형사피고인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입회가 불허되었다.[2] 이에 항의하여 나카가미 겐지, 쓰쓰이 야스타카, 가라타니 고진 등이 일본문예가협회에서 탈퇴했다.[2] 1996년 독일 자를란트주 작가동맹에 정식으로 입회했다.[2]

4. 나가야마 기준

나가야마 노리오 사건의 최고재판소 판결(1983년)에서 제시된 사형 양형 기준으로, 다음 9가지 요소를 고려하여 사형 적용 여부를 결정한다.[1]

나가야마 기준
번호고려 요소
1범행의 죄질
2범행 동기
3살해 방법
4결과의 중대성 (특히 살해된 피해자 수)
5유족의 감정
6사회적 영향
7범인의 연령
8전과
9범행 후의 정황



이 기준은 이후 일본의 사형 판결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4명 이상을 살해하면 사형을 선고하는 기준으로 인식되기도 했다.[1]

5. 사형 집행과 논란

1997년 8월 1일, 도쿄 구치소에서 나가야마 노리오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향년 48세였다.

나가야마는 생전에 지인에게 “형이 집행될 때는 전력으로 저항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여러 명은 처형 시에 격렬하게 저항했다고 증언했다.[40] 나가야마의 시체가 구치소 내에서 바로 화장된 것도 이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41]

같은 해 6월 28일에 체포된 고베 연속 아동 살상사건의 범인이 소년(당시 14세 11개월)이었던 것이 나가야마의 사형 집행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소년법으로 소년 범죄 가해자가 보호받는 것에 대한 여론의 반발이 높아짐에 따라, 미성년일 때 범죄로 사형수가 된 나가야마의 사형을 집행시켜 그 반발을 완화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나가야마의 영결식은 도쿄도 분쿄구의 린센 사에서 거행되었으며, 상주는 도쿄 고등재판소 파기환송심과 이후 상고심에서 변호를 맡은 엔도 마코토 변호사가 맡았다. 나가야마의 유언에 따라 화장 후 유골은 엔도 변호사에 의해 고향 오호츠크해에 뿌려졌다.

사후 변호인들에 의해 ‘나가야마 어린이 기금’이 창설되었다. 이는 저작권 인세를 일본과 세계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기부하고 싶다는 나가야마의 유언으로 설립된 것으로, 빈곤이 범죄로 연결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소원이 담겨 있다.

5. 1. 사형 집행 과정

1997년 8월 1일, 도쿄 구치소에서 나가야마 노리오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향년 48세였다.

나가야마는 생전에 지인에게 "형이 집행될 때는 전력으로 저항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여러 명은 처형 시에 격렬하게 저항했다고 증언했다.[40] 나가야마의 시체가 구치소 내에서 바로 화장된 것도 이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41]

1997년 7월 25일, 법무성 교정국에서 사형 집행에 관한 비밀 회의가 열렸고, 7월 28일 마츠우라 코우 법무대신이 도쿄 고등 검찰청 검사장에게 사형 집행을 명령했다. 같은 날, 나가야마의 면회인이 도쿄 구치소를 방문하여 신원 인수에 대한 면회를 요청했다. 사형 집행이 임박했음을 느낀 나가야마는 노트에 "철저히 저항하여 처참한 시체가 될지도 모른다", "시체는 해부하여 사인을 밝혀주길 바란다"는 등의 내용을 암호와 퍼즐을 이용해 기록했다.

주간문춘 보도에 따르면, 당시 소장의 뜻을 헤아린 간부 직원이 '사형 집행할 수 없는 사정 없음'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고 한다.[27]

1997년 8월 1일 오전 8시 25분, 나가야마는 독방에서 나와 복도에서 다수의 교도관에게 둘러싸여 형장으로 연행될 것을 깨닫고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교도관들에게 제압당했으며, 심한 폭행을 당해 형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는 증언도 있다.[29] 다이도지 마사시는 자서전에서 당일 9시 전에 항의와 같은 절규가 들렸다고 기록했다.[30] 오전 10시경 나가야마는 목에 밧줄을 감은 상태로 교수형을 집행당했으며, 오전 10시 39분에 사망했다.[31]

나가야마의 시체는 다음 날 요츠기 화장장으로 운반되어 화장되었다. 사카모토는 구치소가 나가야마의 저항과 폭행으로 인한 처참한 모습을 은폐하기 위해 시체를 소각했다고 주장했다.[32]

항소심에서 국선 변호인을 맡았던 엔도 마코토 변호사는 8월 4일에 나가야마의 유골을 받았다. 장례는 8월 14일 린센지(도쿄도 분쿄구)에서 치러졌으며, 유골은 고향 바다인 오호츠크해에 뿌려졌다. 사후, 나가야마의 유언에 따라 "나가야마 어린이 기금"이 창설되었다.[36]

5. 2. 고베 연속 아동 살상사건과의 연관성 논란

1997년 나가야마 노리오의 사형 집행은 같은 해 6월 28일에 체포된 고베 연속 아동 살상사건의 범인이 소년(당시 14세 11개월)이었던 것과 연관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소년법에 따라 소년 범죄 가해자가 보호받는 것에 대한 여론의 반발이 커지자, 미성년자일 때 범죄를 저지른 나가야마의 사형을 집행하여 그 반발을 누그러뜨리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다.[40]

사카모토 토시오는 자신의 저서에서 "법무성이 고베 사건에 대해 '소년이라도 흉악한 살인 사건을 일으키면 이렇게 된다!'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중략) 흉악 사건에 대한 여론의 분노가 있었기 때문에 그 시점에 성가신 사형수였던 나가야마 등 3명을 처형했을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마쓰우라 이사오 법무대신은 1997년 8월 5일 기자 회견에서 "나가야마의 사형 집행은 고베 사건과 무관하다"라고 밝혔다.[38]

6. 사회적 영향 및 평가

나가야마 노리오 사건은 일본 사회에 사형 제도, 소년 범죄, 빈곤 문제에 대한 깊은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의 옥중 문학 활동은 범죄자의 교화 가능성과 사회 복귀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2] 1983년 소설 《나무다리》(木橋)로 신일본문학상을 수상했지만, 일본문예가협회에서는 그의 범죄 경력 때문에 입회가 거부되었다. 이에 항의하여 나카가미 겐지, 쓰쓰이 야스타카, 가라타니 고진 등이 협회를 탈퇴하는 사건도 있었다.

1997년 사형 집행 후, 그의 유언에 따라 '나가야마 어린이 기금'이 창설되었다. 이 기금은 저작 인세를 일본과 세계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기부하여 빈곤이 범죄로 이어지는 것을 막고자 하는 그의 소원을 담고 있다.[3] 이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사형 집행은 고베 연속 아동 살상사건의 범인이 소년(당시 14세 11개월)이었던 점과 맞물려 소년법에 대한 여론의 반발을 유화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논란을 낳기도 했다.

7. 주요 작품 목록

종류제목출판사출판일비고
수필無知の涙|무지의 눈물일본어합동출판, 카도카와 문고, 카와데 문고1971년
수필人民をわすれたカナリアたち|인민을 잊은 카나리아들일본어변경사, 카도카와 문고, 카와데 문고1971년
수필愛か-無か|사랑인가―무인가일본어합동출판1973년
수필動揺記1|동요기1일본어변경사1973년
수필反-寺山修司論|반―데라야마 슈지 론일본어JCA1977년
소설집木橋|나무다리일본어릿푸 쇼보, 카와데 문고1984년제19회 신일본문학상 수상작
소설집捨て子ごっこ|버려진 아이 놀이일본어카와데 서방 신사1987년
소설집なぜか、海|어째서, 바다일본어카와데 서방 신사1989년
소설집異水|이수일본어카와데 서방 신사1990년
소설ソオ連の旅芸人|소련의 방랑예술인일본어쇼와 출판1986년
소설死刑の涙|사형의 눈물일본어1988년
소설華|꽃일본어카와데 서방 신사1997년
수기나가야마 노리오의 옥중 독서 일기 - 사형 확정 전후아사히 신문사1990
수기일본 유고집모험사1997
수기문장학 노트사키 류조 감수 아사히 신문사1998
수기사형 확정 직전 옥중 일기카와데 서방 신사1998
기타미타 소스케 凝視の地獄|응시의 지옥일본어1973년


8. 관련 작품

나가야마 노리오와 관련된 작품은 다음과 같다.


  • 수필
  • * 《무지의 눈물》(無知の涙일본어, 1971년)
  • * 《인민을 잊은 카나리아들》(人民をわすれたカナリアたち일본어, 1971년)
  • * 《사랑인가―무인가》(愛か-無か일본어, 1973년)
  • * 《동요기1》(動揺記1일본어, 1973년)
  • * 《반―데라야마 슈지 론》(反-寺山修司論일본어, 1977년)
  • 소설집
  • * 《나무다리》(木橋일본어, 1984년) - 제19회 신일본문학상 수상작
  • * 《버려진 아이 놀이》(捨て子ごっこ일본어, 1987년)
  • * 《어째서, 바다》(なぜか、海일본어, 1989년)
  • * 《이수》(異水일본어, 1990년)
  • 소설
  • * 《소련의 방랑예술인》(ソオ連の旅芸人일본어, 1986년)
  • * 《사형의 눈물》(死刑の涙일본어, 1988년)
  • * 《꽃》(華일본어, 1997년)
  • 영화
  • * 『약칭·연속 사살마』(1969년) - 아다치 마사오, 마쓰다 마사오, 사사키 마모루 외 제작. 나가야마가 태어나 사건을 일으키기까지의 발자취를 따라 실제 토지를 방문하여, 나가야마가 보았을 풍경의 영상을 연결하고, 거기에 나레이션만 덧씌우는 수법("풍경론"이라고 불림)으로, 나가야마의 인생을 따라간 다큐멘터리. 정식 제목은 『작년 가을 네 개의 도시에서 같은 권총을 사용한 네 개의 살인 사건이 있었다 올해 봄 19세 소년이 체포되었다 그는 연속 사살마라고 불렸다』
  • * 『나체의 19세』(1970년) - 감독: 신도 가네토, 주연: 하라다 다이지로.
  • 텔레비전 드라마
  • * 토요 와이드 극장 『사형수 나가야마 노리오와 어머니』(1998년 8월 1일) - 오카다 요시노리가 나가야마 노리오 역을, 오타케 시노부가 어머니 요시 역을 연기.
  •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 * 「ETV 특집 사형수 나가야마 노리오 ~옥중 28년간의 대화~」(2009년 10월 11일) - 디렉터: 호리카와 케이코 제작 총괄: 미야타 오키 출연: 카즈미(나가야마의 전 부인), 신도 가네토 외
  • * 「ETV 특집 나가야마 노리오 100시간의 고백 ~봉인된 정신 감정의 진실~」(2012년 10월 14일) - 디렉터: 호리카와 케이코 제작 총괄: 마스다 히데키 출연: 이시카와 요시히로(감정의) 외
  • 무대
  • * 『바치다(捧ぐ) - 나가야마 노리오에게의 70행』(1971년 6월 1일 초연, 작·출연·연출: 쇼와 세이고(1인극)[39])
  • * 『tatsuya - 가장 사랑하는 자의 곁으로 -』가네시타 다쓰오 - 예술선장 신인상 수상.

공연 기간배우비고
1991년 8월 14일 - 8월 22일지바 테츠야
1992년 8월 26일 - 9월 2일시오노야 마사유키개정 결정판 tatsuya
1994년 7월 27일 - 7월 31일쓰쿠다 노리히코
1999년 9월 2일 - 9월 19일KONTA(곤도 아쓰시)
2006년 2월 28일 - 3월 5일쓰다 겐지로


  • 만화
  • * 『언럭키 영맨』(오쓰카 에이지 원작, 후지와라 카무이 작화)에서는, 모델을 특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N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 악곡
  • * 『권총 마의 소년』(1971년) - 작사·작곡·노래: 미카미 칸. 앨범 『미카미 칸의 세계』수록.

참조

[1] 뉴스 Death Sentence Fuels Japan's Soul-Searching https://query.nytime[...] 2008-06-24
[2] 웹사이트 Muchi no Namida https://web.archive.[...] 2008-06-24
[3] 웹사이트 Killer's legacy builds bridges https://web.archive.[...] 2008-06-24
[4] 문서 書籍・雑貨等を取り扱う小売店の[[ヴィレッジヴァンガード (書籍・雑貨店)|ヴィレッジヴァンガード]]とは無関係。
[5] 뉴스 【二十歳のころ ビートたけし(1)】 ジャズ喫茶の“同僚”に連続射殺事件の永山則夫が…(4/6ページ) https://www.sanspo.c[...] 産業経済新聞社 2020-08-15
[6] 웹사이트 びーとたけしの新宿を歩く http://www.tokyo-kur[...] 東京紅團(東京紅団) 2004-02-28
[7] 뉴스 連続射殺魔ついに逮捕 178日ぶり、けさ代々木の5件目で 19歳のボーイ自供 東京、京都、 函館、名古屋の全犯行 “カネが欲しかった” 英語学校に侵入 ガードマン負傷 神宮の森で警官の手に 読売新聞東京本社 1969-04-07
[8] 뉴스 '『永山』を地検へ逆送' 読売新聞東京本社 1969-05-16
[9] 뉴스 '『永山』を六つの罪名で起訴' 読売新聞東京本社 1969-05-24
[10] 뉴스 射殺魔『永山』の初公判 東京の事件殺意否認 青ざめうなずくだけ 読売新聞東京本社 1969-08-08
[11] 뉴스 うつろな表情の永田 行商の母は傍聴を断念 1969-08-08
[12] 뉴스 連続射殺魔『永山』に死刑 東京地裁判決 生い立ち同情するが『冷酷、反省もない』 読売新聞東京本社 1979-07-11
[13] 뉴스 連続射殺事件 永山被告、獄中結婚していた 父が日系米人の妻 『無知の涙』読み決意 控訴審で証言 読売新聞東京本社 1981-03-21
[14] 뉴스 永山(連続射殺魔)無期に減刑 東京高裁判決 福祉に一因、本人も反省 読売新聞東京本社 1981-08-22
[15] 뉴스 減刑の『永山』を上告 高検、量刑不当も挙げ 読売新聞東京本社 1981-09-04
[16] 뉴스 連続射殺犯 永山の『無期』判決を破棄 最高裁、死刑含み差し戻し 『量刑甚だしく誤る』 4人殺害は残虐で重大 初めて死刑基準 読売新聞東京本社 1983-07-08
[17] 뉴스 連続射殺犯・永山に死刑判決 情状くんでも量刑不当でない/東京高裁 読売新聞東京本社 1987-03-18
[18] 뉴스 連続射殺 永山被告の死刑確定 執拗・残虐な犯行 差し戻し上告を棄却/最高裁 読売新聞東京本社 1990-04-17
[19] 뉴스 永山被告の死刑確定 連続射殺事件 最高裁が上告棄却 『罪責は誠に重大』 情状考慮しても妥当 違憲主張退ける 中日新聞社 1990-04-17
[20] 뉴스 永山被告の死刑が確定 朝日新聞社 1990-05-10
[21] 뉴스 永山被告の死刑確定 最高裁 異議申し立て棄却 中日新聞社 1990-05-10
[22] 뉴스 連続射殺事件・永山被告の入会を拒否 文芸家協会に強い心理的抵抗感 読売新聞東京本社 1990-03-09
[23] 뉴스 [文芸90]≪5月≫(上) 世俗的常識か文学か 永山死刑囚の入会問題(連載) 読売新聞東京本社 1990-05-24
[24] 뉴스 永山問題で抗議の脱退 文芸家協会 筒井康隆氏ら3氏表明 中日新聞社 1990-05-07
[25] 뉴스 井口時男氏らから退会届 『永山入会問題』で日本文芸家協会総会揺れる 中日新聞社 1990-05-15
[26] 뉴스 入会手続きは従来通り 文芸家協会、小委新設は不要と判断 読売新聞東京本社 1990-07-09
[27] 웹사이트 (3ページ目)「絶対に殺してはいけない」現場が声を上げた死刑囚…その最期の瞬間に待っていたもの | 文春オンライン https://bunshun.jp/a[...]
[28] 뉴스 永山則夫死刑囚の刑執行 19歳の時、4人射殺 全国で計4人執行 読売新聞東京本社 1997-08-02
[29] 웹사이트 (4ページ目)「絶対に殺してはいけない」現場が声を上げた死刑囚…その最期の瞬間に待っていたもの | 文春オンライン https://bunshun.jp/a[...]
[30] 서적 死刑確定中 太田出版 1997-12-01
[31] 뉴스 '『印税は世界の貧しい子どもたちに活用を』 永山死刑囚、最後の手紙で' 中日新聞東京本社 1997-08-05
[32] 웹사이트 (3ページ目)「絶対に殺してはいけない」現場が声を上げた死刑囚…その最期の瞬間に待っていたもの | 文春オンライン https://bunshun.jp/a[...]
[33] 뉴스 永山死刑囚 拘置所内で火葬 中日新聞東京本社 1997-08-03
[34] 뉴스 永山死刑囚 『印税を貧しい子に』 刑執行4日前 弁護士あてに手紙 中日新聞社 1997-08-05
[35] 뉴스 永山死刑囚の葬儀 支援者ら120人参列 中日新聞社 1997-08-15
[36] 웹사이트 永山子ども基金とは https://nagayama-chi[...] 永山子ども基金 2020-08-17
[37] note 北田暁大ほか『現代ニッポン論壇事情』“検閲”読書会 https://note.com/toy[...]
[38] 뉴스 '『神戸事件と関係はない』 死刑執行で法相' 東京新聞 1997-08-05
[39] 웹사이트 寺山修司と死刑囚永山則夫 http://www.osk.3web.[...] 昭和精吾オフィシャルサイト 1997-11-22
[40] 서적 사형확정중 오타 출판 1997-12
[41] 서적 남은 유언의 행방, 사형수 나가야마 노리오가 남긴 것 도쿄 슈레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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