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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가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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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도 가네토는 일본의 영화 감독이자 각본가로, 1912년에 태어나 2012년에 사망했다. 그는 사회주의적 시각을 바탕으로 빈곤, 여성, 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주로 제작했으며, 1950년에는 독립 영화 제작사 근대 영화 협회를 설립했다. 그의 작품은 국제적으로도 호평을 받았으며, 특히 《벌거벗은 섬》(1961)은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그는 《애처 이야기》(1951), 《오니바바》(1964), 《오늘을 살고, 내일 죽어라!》(1970) 등 다수의 작품을 연출했으며, 1996년에는 일본 아카데미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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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가네토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가네토 신도
본명신도 가네토
출생일1912년 4월 22일
출생지히로시마현 사에키구 이시우치촌 (현재의 히로시마시 사에키구)
사망일2012년 5월 29일
사망지도쿄도 미나토구
국적일본
직업영화 감독, 각본가, 영화 프로듀서, 작가
활동 기간1935년 - 2012년
배우자다카코 구지 (사실혼 관계, 1943년 사망)
미요 신도 (1946년 결혼, 1978년 사망)
오토와 노부코 (1978년 결혼, 1994년 사망)
자녀지로 신도, 신도 긴코
손자신도 리키야, 신도 후
수상
도쿄 국제 영화제심사위원 특별 그랑프리
2010년 한 장의 엽서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국제 연합 평화상
1956년 원폭의 아이
일본 아카데미상최우수 감독상
1996년 오후의 유언장
최우수 각본상
1979년 사건
1996년 오후의 유언장
특별 기획상
1996년 오후의 유언장
블루 리본상감독상
2012년 한 장의 엽서
기획상
1961년 나체의 섬
마이니치 영화 콩쿨각본상
1951년 기만적인 성대한 치장
감독상
1996년 오후의 유언장
관련 정보
소속근대 영화 협회 회장
명예 시민히로시마현 명예 현민
히로시마시 명예 시민
미하라시 명예 시민
기타
링크Film Reference
가와사키시 시민 뮤지엄
일본 영화 제작자 협회
가마쿠라시 가와키타 영화 기념관
닛카츠
TBS 라디오
웨지
매거진9
ZAKZAK
연합뉴스
니혼게이자이 신문
주코쿠 신문
닛칸 스포츠
히로시마시
미하라시
히로시마현
쇼비 대학 학술 정보 리포지토리
닛칸 스포츠

2. 생애

신도 가네토는 숙련된 장인 기술로 다양한 장르의 시나리오를 썼으며, 각본 작품은 약 370편에 달한다.[49] 사토 타다오는 신도가 자신의 감독 작품에서 가족과 직장 동료에 대한 감사, 군대 경험에 대한 분노, 농업에 대한 애정과 우려, 고향 히로시마를 통한 원자 폭탄에 대한 분노, 노령과 성 등 자신을 중심으로 한 가족, 직업, 지역, 국가에서 세계에 이르는 문제를 종합적으로 그린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영화 작가였다고 평가한다. 영화 감독이 고향을 그리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신도는 예외적인 존재로 평가받는다.[42]

신도는 1934년 22세에 신코 키네마에 입사하여 현상부에서 필름 건조 잡역부터 영화 경력을 시작했다.[36][38][50] 1941년에는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겐로쿠 충신장 건축 감독으로 교토 흥아 영화에 출향했다.[36][38] 1944년 4월, 일본 해군에 징집되어 이등수병으로 구레 진수부해병단에 입단했다.[36][37][48][57] 1945년 종전을 맞이할 때까지 군 복무를 했다.[36]

1951년, 애처 이야기로 감독 데뷔를 했으며,[38][55] 1952년에는 원폭의 아이를 발표했다.[36][37][38][58] 1960년에는 무언 영화 벌거벗은 섬을 제작하여 1961년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세계적인 영화 작가로 인정받았다.[36][38][60][61] 1964년에는 오니바바를 제작하여 파나마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3]

신도는 사회성이 강한 작품과 성의 금기에 도전한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38][41][64] 1995년 오토와 노부코가 사망한 후, 신도의 영화에서 그녀의 주연 역할은 오타케 시노부에게 넘어갔다. 2000년, 88세의 신도는 《바이 플레이어》를 촬영했다. 2003년의 올빼미》는 제25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 출품되었고, 신도는 세계 영화에 기여한 공로로 특별상을 수상했다.[21] 2010년, 신도는 엽서》를 연출했는데, 이 영화는 신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였다. 제23회 도쿄 국제 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23][24] 신도는 2012년 5월 29일 자연사했다.[28]

그의 초기 미술 담당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연도제목감독비고
1935사랑의 부도가와테 지로신흥 키네마
1935기소 정화마쓰자키 히로오미신흥 키네마
1936무기 없는 사람들아오야마 사부로신흥 키네마
1936잔월의 노래가와테 지로신흥 키네마
1936벚꽃 동산무라타 미노루신흥 키네마, 미술 조수
1936동백은 붉다아오야마 사부로신흥 키네마
1936안녕 외국인 부대이나 세이이치신흥 키네마
1936하녀 일기이나 세이이치신흥 키네마
1936마을의 간판 아가씨오치아이 요시토신흥 키네마
1937첫 시마다이나 세이이치신흥 키네마
1937기쁜 꿈아오야마 사부로신흥 키네마
1937울지마 갈매기야스미요시 겐지신흥 키네마
1937푸른 하늘의 장교오치아이 요시토신흥 키네마
1937소녀 19세히사마츠 세이지신흥 키네마
1937미다레 시마다이나 세이이치신흥 키네마
1937해군 폭격대히사마츠 세이지신흥 키네마
1937철권 눈물 있음이나 세이이치신흥 키네마
1938청춘 올림픽히사마츠 세이지신흥 키네마
1938토치카 소녀 행적기히사마츠 세이지신흥 키네마
1938남자의 혼소네 치하루신흥 키네마
1938엑스트라의 소녀사에구사 신타로신흥 키네마
1938아내의 혼소네 치하루신흥 키네마
1938소녀의 마음이나 세이이치신흥 키네마
1938누나는 엄마는스야마 마사키신흥 키네마
1938가난한 자의 행복누마나미 이사오신흥 키네마
1938죄 없는 죄스야마 마사키신흥 키네마
1938젊은 여자의 위기히사마츠 세이지신흥 키네마
1939평판 다섯 소녀히사마츠 세이지신흥 키네마
1939열혈의 길소네 치하루신흥 키네마
1939심판받는 여자누마나미 이사오신흥 키네마
1939신혼 집안 소동누마나미 이사오신흥 키네마
1939폭풍 속에 서 있는 여자아오야마 사부로신흥 키네마
1939여자의 혼히사마츠 세이지신흥 키네마
1939애증의 서히사마츠 세이지신흥 키네마
1939해당화의 노래후카다 슈조신흥 키네마
1939울고 웃는 천국스야마 마사키신흥 키네마
1939남자 한 마리히사마츠 세이지신흥 키네마
1939애정 일직선 길다카기 고이치신흥 키네마
1939쾌남아히사마츠 세이지신흥 키네마
1939원수이나 세이이치신흥 키네마
1939바위에 피는 꽃히사마츠 세이지신흥 키네마
1939어머니 그리워스야마 마사키신흥 키네마
1940사랑의 기념일이나 세이이치신흥 키네마
1940정열의 날개고이시 에이이치신흥 키네마
1940아내보다 어디로 갈까스야마 마사키신흥 키네마
1940어머니의 소원히사마츠 세이지신흥 키네마
1940현해탄하라 치아키신흥 키네마
1940여성 본원다나카 시게오신흥 키네마
1940비운의 자매이나 세이이치신흥 키네마
1941겐로쿠 충신장 전편미조구치 겐지쇼치쿠, 건축 감독
1942겐로쿠 충신장 후편미조구치 겐지쇼치쿠, 건축 감독, 키네마 준보 베스트 10 7위
1966마음의 산맥요시무라 고자부로본궁 방식 영화 제작의 회・킨다이 영화 협회・도호, 제작 협력, 키네마 준보 베스트 10 8위


2. 1. 초기 생애 (1912-1934)

신도는 1912년 히로시마현 사에키군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부유한 지주였지만, 아버지의 빚보증으로 인해 파산하여 모든 토지를 잃었다.[3] 형과 두 누나는 일자리를 찾아 떠났고, 신도와 그의 부모는 창고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농업 노동자가 되었지만 어린 시절에 돌아가셨다. 형은 유도를 잘해 경찰이 되었고, 누나 중 한 명은 간호사가 되어 원폭 피해자를 돌보는 일을 했다.[4] 다른 누나는 일본계 미국인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5]

1927년 이시우치 심상 고등 초등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후, 히로시마 시내의 친척 집에 맡겨졌다.[51] 이 시대는 『이시우치 심상 고등 초등학교 꽃은 흩어져도』에 그려져 있다.[51]

16세 때, 오노미치 경찰서에 근무하던 맏형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50] 형의 집은 도도도정에 있었고, 옆집이 오바야시 노부히코의 생가였다.[52]

1933년 (쇼와 8년), 징병 검사가 끝났을 무렵, 우연히 본 야마나카 사다오 감독의 영화 『반가쿠의 일생』에 감격하여 영화를 지망했고[36], 교토로 가기로 결심한다.[50] 신도는 야마나카 사다오 감독의 『반가쿠의 일생』을 보고 "이거다!"라고 생각하며 영화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회고했다.[56]

교통비를 모으기 위해, 형의 소개로 자전거 도매상 "야마구치 바이시클 상회"에서 일했다.[50] 이 상회는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생가이다.[53]

1934년, 형이 교토의 한 경찰에게 써준 소개장을 가지고 교토로 향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신코 키네마의 필름 현상 부서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6] 그는 현상 부서의 11명의 직원 중 한 명이었지만, 실제로는 3명만 일했고, 나머지는 회사 야구팀의 선수들이었다.[7] 이때 그는 영화가 시나리오에 기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오래된 시나리오가 화장지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나리오를 연구하기 위해 집으로 가져갔다.[5][7]

2. 2. 영화계 입문과 습작 시절 (1934-1944)

신도는 많은 영화 시나리오를 썼지만, 친구들에게 심한 비판을 받았다.[7] 댐 건설로 땅을 잃는 농부에 관한 시나리오 ''흙을 잃은 백성''을 영화 잡지에 제출하여 당시 월급 25엔의 4배인 100JPY의 상금을 받았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는 영화로 제작되지 않았다.[5]

1930년대 후반, 미조구치 겐지의 여러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특히 ''47인의 사무라이''의 수석 조감독 및 미술 감독으로 활동했다.[8][9] 미조구치에게 시나리오를 제출했지만, 미조구치는 그에게 시나리오 작가로서 "재능이 없다"고 말했고, 이 사건은 훗날 신도의 데뷔작 ''사랑하는 아내의 이야기''에서 극화되었다. 그의 첫 실현된 시나리오는 1940년 영화 ''남진 여성''이었다.[6] 우치다 토무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우치다의 때 이른 징병으로 인해 시나리오는 영화로 제작되지 못했다.[5]

1942년, 미조구치 겐지의 지도를 받아 쇼치쿠의 자회사인 고아 영화사에 입사했다. 1943년 쇼치쿠 스튜디오로 옮겼다. 그해 말, 사실혼 관계였던 쿠지 타카코가 결핵으로 사망했다.[25] 1944년 4월, 해군에 징집되었다. 처음에는 건물을 청소하는 임무를 받았고, 이후 추첨을 통해 일부는 배에서 복무하다 잠수함 공격으로 사망, 일부는 잠수함에서 복무 후 소식 두절, 일부는 군사용 화물선에서 기관총 사수로 복무하다 잠수함 공격으로 사망, 나머지는 다카라즈카 극장을 청소한 후 수용소로 보내졌다.[5]

1934년 22세에 신코 키네마에 입사했다.[36][38][50] 희망했던 영화 조감독의 길은 좁았고, 체구가 작아 조명에서도 꺼려져 현상부에서 필름 건조 잡역부터 영화 경력을 시작했다.[50] 만주국제정으로 이행한 해였다. 촬영소 변소에서 휴지로 쓰인 시나리오를 발견하고, 처음으로 영화가 시나리오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았다.[50]

신코 키네마 현상부의 도쿄 이전에 동행하여 미술 부문에 잠입했다.[36] 미술 감독이자 미술 부장인 미즈타니 히로시에게 가르침을 받았다.[36] 미술 조수로서 미술 디자인을 담당했다. 동료들로부터 혹평을 받으면서도, 틈을 내어 시나리오를 계속 써서 투고하여 상을 받았지만,[36] 영화화되지는 않았다. 구로사와 아키라, 진다이 타츠미, 각본가 야마다 노부오 등도 "감독이 각본을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나. 기다려도 오지 않아. 스스로 써야 해"라는 말을 남겼다. 집이 근처였던 오치아이 요시토가 감독으로 승진하여, 각본부에 추천되어 『남진 여성』으로 각본가 데뷔했다.[36]

1941년,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겐로쿠 충신장』의 건축 감독으로 1년간 교토 흥아 영화에 출향했다.[36][38] 이 작품에서 실물 크기의 마쓰의 복도를 제작한 것은 신도였다. 미조구치는 배우에게 연기를 묻자 "반사해주세요"라고 할 뿐 아무것도 배우에게 가르치지 않아, 다른 배우와 스태프와 마찬가지로 신도도 반발했다. 그러나 완성된 작품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연줄을 통해 미조구치의 내제자가 되기로 하고, 시나리오를 한 편 써서 미조구치에게 제출했지만, "이건 시나리오가 아니라, 스토리입니다"라고 혹평을 받아, 자살을 생각할 정도의 큰 충격을 받았다. 스크립터였던 아내 쿠지 타카코의 격려로 분발하여[55] 극작집을 탐독하며 재출발을 맹세한다. 타카코와는 1939년에 결혼했다는 자료도 있다.[56]

1942년, 정보국의 국민 영화 각본 공모에 응모하여 가작에 그쳤다. 당선은 도호의 조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고요해라』였다. 이듬해 『강풍』이 당선되었다.[36] 이것을 알게 된 미조구치로부터 연락이 와서 생애 단 한 번 기온에서 대접을 받았다. 1944년, 소속되어 있던 흥아 영화가 쇼치쿠 오후나 촬영소에 흡수되어 도쿄 본부로 이적했다.[36][38]

그의 초기 미술 담당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연도제목감독비고
1935사랑의 부도가와테 지로신흥 키네마
1935기소 정화마쓰자키 히로오미신흥 키네마
1936무기 없는 사람들아오야마 사부로신흥 키네마
1936잔월의 노래가와테 지로신흥 키네마
1936벚꽃 동산무라타 미노루신흥 키네마, 미술 조수
1936동백은 붉다아오야마 사부로신흥 키네마
1936안녕 외국인 부대이나 세이이치신흥 키네마
1936하녀 일기이나 세이이치신흥 키네마
1936마을의 간판 아가씨오치아이 요시토신흥 키네마
1937첫 시마다이나 세이이치신흥 키네마
1937기쁜 꿈아오야마 사부로신흥 키네마
1937울지마 갈매기야스미요시 겐지신흥 키네마
1937푸른 하늘의 장교오치아이 요시토신흥 키네마
1937소녀 19세히사마츠 세이지신흥 키네마
1937미다레 시마다이나 세이이치신흥 키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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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엑스트라의 소녀사에구사 신타로신흥 키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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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심판받는 여자누마나미 이사오신흥 키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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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해당화의 노래후카다 슈조신흥 키네마
1939울고 웃는 천국스야마 마사키신흥 키네마
1939남자 한 마리히사마츠 세이지신흥 키네마
1939애정 일직선 길다카기 고이치신흥 키네마
1939쾌남아히사마츠 세이지신흥 키네마
1939원수이나 세이이치신흥 키네마
1939바위에 피는 꽃히사마츠 세이지신흥 키네마
1939어머니 그리워스야마 마사키신흥 키네마
1940사랑의 기념일이나 세이이치신흥 키네마
1940정열의 날개고이시 에이이치신흥 키네마
1940아내보다 어디로 갈까스야마 마사키신흥 키네마
1940어머니의 소원히사마츠 세이지신흥 키네마
1940현해탄하라 치아키신흥 키네마
1940여성 본원다나카 시게오신흥 키네마
1940비운의 자매이나 세이이치신흥 키네마
1941겐로쿠 충신장 전편미조구치 겐지쇼치쿠, 건축 감독
1942겐로쿠 충신장 후편미조구치 겐지쇼치쿠, 건축 감독, 키네마 준보 베스트 10 7위
1966마음의 산맥요시무라 고자부로본궁 방식 영화 제작의 회・킨다이 영화 협회・도호, 제작 협력, 키네마 준보 베스트 10 8위


2. 3. 해군 징집과 종전 (1944-1945)

1944년 4월, 신도는 각본을 한 편도 쓰지 못한 채 일본 해군에 징집되어 이등수병으로 구레 진수부해병단에 입단했다.[36][37][48][57] "전쟁에 가면 죽는 건 당연하다", "이제 시나리오는 쓸 수 없는 건가"라며 절망했다고 한다.[57]

신도의 임무는 "청소 부대"였으며,[48] 처음에는 나라현천리교 본부 숙소에 해군 비행 예과 연습생이 배치되어 한 달을 보냈고, 효고현다카라즈카 가극단다카라즈카 대극장다카라즈카 음악학교에는 잠수함 승무원과 항공대(다카라즈카 해군 항공대)가 배치되어 그곳을 청소했다.[48][57]

32세였던 신도는 연하의 상등수병들에게 시중을 들며 부려졌다. 상관에게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나무 막대기로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맞았는데, 당시에는 병사를 때릴수록 강해진다고 믿었다. 이때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라는 의문이 훗날 영화 제작의 원점이 되었다고 한다.[37] 천리교 본부 청소에 동원된 100명 중 대다수가 전선으로 보내져 94명이 전사했고,[48][57] 신도를 포함한 6명만이 상관이 뽑은 제비뽑기에 걸리지 않아 살아남았다.[48] 전사한 94명은 전장이 아닌 곳에서 죽었다.[48]

이 기간 동안, 아내 효코(孝子)는 결핵에 걸렸지만 가난 때문에 제대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하고 사망했다.[55]

1945년, 다카라즈카 해군 항공대 소속으로 히로시마시 원자 폭탄 투하 소식을 들었으며, 다카라즈카 해군 항공대에서 종전을 맞이했다.[36] 이러한 경험은 60년 후 제작된 『육지에 오른 군함』(야마모토 야스히로 감독)에 묘사되었다.[57]

2. 4. 시나리오 작가 데뷔와 근대 영화 협회 설립 (1946-1950)

신도는 많은 영화 시나리오를 썼지만, 친구들에게 심한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댐 건설로 땅을 잃는 농부에 관한 시나리오 ''흙을 잃은 백성''을 영화 잡지에 제출하여 당시 월급 25엔의 4배인 100JPY의 상금을 받았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는 영화로 제작되지 않았다.[5]

1940년대 초, 미조구치 겐지의 여러 영화의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특히 ''47인의 사무라이''의 수석 조감독 및 미술 감독으로 활동했다.[8][9] 그는 미조구치에게 시나리오를 제출했지만, 미조구치는 그에게 시나리오 작가로서 "재능이 없다"고 말했다. 그의 첫 실현된 시나리오는 1940년 영화 ''남진 여성''이었다.[6] 그는 우치다 토무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우치다의 때 이른 징병으로 인해 시나리오는 영화로 제작되지 못했다.[5]

1942년, 쇼치쿠의 자회사인 고아 영화사에 입사했다. 1943년 그는 쇼치쿠 스튜디오로 옮겼다. 그해 말, 그의 사실혼 관계였던 쿠지 타카코가 결핵으로 사망했다.[25] 1944년 4월, 해군에 징집되었다. 그가 복무한 100명의 그룹은 처음에는 건물을 청소하는 임무를 받았다. 그 중 60명은 추첨을 통해 배에서 복무하게 되었고, 잠수함 공격으로 사망했다. 30명은 추첨을 통해 잠수함에서 복무하게 되었고, 그 이후 소식이 끊겼다. 4명은 추첨을 통해 군사용으로 개조된 화물선에서 기관총 사수로 선발되어 잠수함 공격으로 사망했다. 나머지 6명은 당시 군대에서 사용되던 다카라즈카 극장을 청소한 후, 모욕과 구타를 당하는 수용소로 보내졌다.[5]

일본의 항복 당시, 신도는 군복을 담배와 바꾸고 오후나에 있는 쇼치쿠 영화 스튜디오로 돌아갔다.

1946년, 쇼치쿠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안정적인 직장을 얻은 그는 즈시에 집을 사서 가정을 꾸리려고 했다. 쇼치쿠에서 신도는 요시무라 코자부로 감독을 만났다. 이들은 1947년 ''안조가의 무도회''로 비평적인 성공을 거두었다.[6] 신도는 오즈 야스지로를 제외한 거의 모든 쇼치쿠 감독의 시나리오를 썼다.[7]

신도와 요시무라는 쇼치쿠에 불만을 품고 1950년 퇴사하여 토노야마 타이지와 함께 독립 제작사 킨다이 에이가 쿄카이를 설립했다.

2. 5. 감독 데뷔와 국제적 명성 (1951-1970)

1951년, 다이에이의 의뢰를 받아 근대 영화 협회 첫 작품으로, 애처 이야기로 39세에 염원하던 감독 데뷔를 했다.[38][55] 이 자전적인 내용의 각본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55] 주연은 다이에이의 인기 스타 "백만 불짜리 보조개" 오토와 노부코였으며,[58] 오토와가 이 각본을 읽고 꼭 아내 역할을 하고 싶다고 청해 왔고, 신도에게는 애처 이야기의 모델인 부인 타카코와 오토와가 매우 닮았다는 이유로 결정되었다.[55]

1952년에는 근대 영화 협회 첫 자주 제작 작품으로, 원폭의 상처가 생생한 고향 히로시마에서 로케를 감행하여[37] 원폭의 아이를 발표했다.[36][37][38][58] 1953년 칸 영화제에 출품되었으나,[58] 당시 일본 정부는 미국의 압력으로 외무성을 통해 수상 방해 공작을 시도했다는 사실이 외교 문서를 통해 밝혀졌다.[56][58] 서독에서는 반전 영화라는 이유로 군 당국에 압수되는 소동도 있었지만,[56] 체코 국제 영화제 평화상, 영국 영화 아카데미 유엔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원폭의 아이 주연을 맡은 오토와 노부코는 영화 제작 당시 근대 영화 협회로 강제 이적했고, 이후 신도와 오토와의 관계는 계속되었으며, 사생활에서는 신도에게 본처 미요와 그 자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무렵부터 오토와와 애인 관계가 되었다.[55]

이후 신도는 자신의 시나리오를 자신의 자금으로 감독하는 독립 영화 작가가 되어,[36] 극단 민예의 협력 등을 얻어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다.[36] 1960년에는 현대 영화 협회 해산 기념 작품으로 무언의 영화 벌거벗은 섬을 제작했다.[38][60][61] 히로시마현 미하라시의 무인도인 숙미섬을 무대로, 제작비 500만, 스태프 13명, 촬영 기간 1개월로 제작했다.[61] 신도는 "영화는 영상으로 밀어붙이면 반드시 진실을 잡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일부러 대사를 뺀 영화를 만들었다고 밝혔다.[61]

1961년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며[36][38] 세계적인 영화 작가로 인정받았다.[61] 세계 62개국에 작품 상영권을 판매하여 빚을 갚았다.[36][41][61]

1964년에는 오니바바를 제작하여 파나마 영화제 그랑프리,[3] 1964년 블루 리본 상 여우조연상(요시무라 지츠코)과 촬영상(쿠로다 키요미)을 수상했다.

1968년에는 쿠로네코를 제작하여 1968년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에서 여우주연상(오토와 노부코)과 촬영상(쿠로다 키요미)을 수상했다.

1970년에는 연쇄 살인범 나가야마 노리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오늘을 살고 내일 죽어라!를 제작하여 1971년 제7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상을 수상했다.[16]

2. 6. 사회파 작품과 성의 금기에 대한 도전 (1970-1995)

신도는 1972년부터 1981년까지 일본 시나리오 작가 조합의 의장을 역임했다.[17] 같은 해 단편 영화 '산카'를 연출했는데, 이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문학 작품을 각색한 두 번째 작품이었다.

1974년 영화 '나의 길'은 일본 정부의 이주 노동자 학대를 폭로한 작품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늙은 여성이 남편의 시신을 찾기 위해 9개월 동안 정부의 관료주의와 무관심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3]

1975년, 신도는 그의 스승에 대한 다큐멘터리 '미조구치 겐지: 영화 감독의 생애'를 제작했고,[3] 1976년에는 미조구치에 관한 책을 썼다.[18]

1977년에는 맹인 샤미센 연주자 다카하시 지쿠잔의 삶을 다룬 '지쿠잔의 생애'가 개봉되어 제10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 출품되었다.[19] 같은 해, 신도는 히로시마 원자 폭탄에 대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다큐멘트 8.6'을 촬영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폭탄 투하 비행기 조종사 폴 티베츠를 촬영하지는 못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1978년에 방송되었다.

1978년, 전 부인 사망 후 오토와 노부코와 결혼했다.[25]

국내 드라마 '교살'은 제36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오토와 노부코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81년 개봉된 '에도 포르노'는 18세기 일본 목판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삶을 그렸다.

1984년 신도는 그의 누나의 삶을 바탕으로 한 '지평선'을 제작했다. 이 영화는 가난한 농가의 딸로 일본계 미국인에게 통신 판매 신부로 팔려가 다시는 가족을 보지 못한 그녀의 경험을 연대순으로 기록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소에서 보낸 시간과 고난, 실망의 삶을 그리고 있다.[3]

1988년 세미 다큐멘터리 '사쿠라타이 지루'를 통해 신도는 다시 한 번 핵무기와 그 결과라는 주제로 돌아와 히로시마 폭격으로 사망한 극단 단원들의 운명을 따라갔다.

신도의 영화 '마지막 노트' 제작 중 오토와 노부코는 간암 진단을 받고 1994년 12월에 사망했다. 1995년에 개봉된 이 영화는 블루 리본상 등 수많은 상을 수상했으며, 일본 아카데미상 감독상 등에서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했다.

신도 가네토의 작품에는 사회성이 강한 작품과 성의 금기에 도전한 작품이 많다.[38][41][64] 1970년 연쇄 권총 발포 사건의 나가야마 노리오를 소재로 한 『벌거벗은 열아홉 살』, 1972년 플라워 메그의 누드가 거의 전편에 걸쳐 흐르는 『철륜(가나와)』[65]을 발표했다. 『철륜』은 일본의 전통 예능을 소재로 한 전위 작품이었다. 가정 내 폭력을 소재로 한 『교살』, 죽음과 무능을 테마로 한 『성의 기원』, 히구치 가나코의 누드가 등장하는 『호쿠사이 만화』[66](1981년), 성의 금기에 도전한 『묵동기담』 등을 발표했다.[64]

2. 7. 만년의 활동과 사망 (1995-2012)

오토와 노부코가 사망한 후, 신도의 영화에서 그녀의 주연 역할은 오타케 시노부에게 넘어갔다. 오타케 시노부는 신도의 영화 네 편에 출연하였다. 1999년 작 《살고 싶은》은 노화의 문제를 다룬 블랙 코미디로, 오타케는 양극성 장애를 앓는 딸 역할을 맡았고, 미쿠니 렌타로가 연기한 대변 실금이 있는 노인의 딸 역할을 연기했다.[25]

2000년, 88세의 신도는 배우이자 오랜 동료였던 토노야마 타이지를 다룬 전기 영화 《바이 플레이어》를 촬영했는데, 여기에는 신도의 영화사 킨다이 에이가 쿄카이의 역사가 일부 포함되었으며, 1994년에 촬영된 오토와의 영상이 사용되었다.

2003년의 올빼미》는 오타케가 다시 주연을 맡았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만주에서 일본 식민지로부터 쓸모없는 농지로 돌려보내진 농부들의 실화를 배경으로 했다. 영화 전체는 신도의 이동성 문제 때문에 단일 세트에서 촬영되었다.[25] 이 영화는 제25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 출품되었고, 신도는 세계 영화에 기여한 공로로 특별상을 수상했다.[21]

2010년, 신도는 제2차 세계 대전 말년에 징집된 중년 남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엽서》를 연출했는데, 이 영화는 신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였다. 《엽서》는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일본 출품작으로 선정되었지만,[22] 1월 최종 후보에는 오르지 못했다. 건강이 악화되면서, 신도는 도쿄 국제 영화제에서 열린 시사회에서 이 영화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23][24]

신도는 생애 마지막 40년 동안 아카사카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오토와 노부코가 사망한 후, 그는 혼자 살았다. 80대에는 도쿄 전역을 걸어 다닐 수 있었지만, 90대에는 다리의 이동성을 잃었다. 간병이 필요했기 때문에, 카제 신도가 그의 아파트로 이사하여 생애 마지막 6년 동안 그와 함께 살면서 간병인 역할을 했다.[25] 카제 신도는 신도의 후기 영화 크레딧에 "칸토쿠 켄코 칸리", 즉 "감독 건강 관리"로 출연한다.

2012년 4월부터 5월까지 히로시마시의 한 위원회는 신도의 100번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그에게 헌정 행사를 열었다.[26] 이 행사에는 그의 대부분의 영화 상영과 신도 본인과 오랜 팬인 베니치오 델 토로와 같은 특별 게스트가 포함되었다.[27]

신도는 2012년 5월 29일 자연사했다.[28] 그의 아들 지로에 따르면,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새로운 영화 프로젝트에 대해 잠꼬대를 했다고 한다.[20] 그는 자신의 유해를 미하라의 스쿠네 섬에 뿌려달라고 요청했는데, 이곳은 《맨발의 섬》이 촬영된 곳이며 오토와 노부코의 유해의 절반이 뿌려진 곳이기도 하다.[29]

신도는 오랜 영화 제작에 대한 공로로 1996년에 제14회 가와키타상[69], 1997년에 문화공로자[38], 2002년에 문화 훈장을 수여받았다.[41][62]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는 『벌거벗은 섬』, 『벌거벗은 19세』로 그랑프리, 『살고 싶다』로 금상을 수상하였고, 2003년에 특별상을 수상했다. 또한 영화를 통해 평화를 계속 호소해 온 공적으로 2005년에 타니모토 키요시 평화상을 수상했다. "많은 걸작 영화를 세상에 내놓고, 일본 최고령 현역 감독으로서 영화 '한 장의 엽서'를 완성했다"라는 이유로 2011년에 제59회 기쿠치 간 상을 수상했다. '한 장의 엽서'는 2010년 10월 31일에 크랭크업했다.

1996년, 일본의 인디펜던트 영화의 선구자인 신도 감독의 업적을 기려, 독립 프로 58개사가 조직하는 일본 영화 제작자 협회에 소속된 현역 프로듀서만이 그 해에 가장 뛰어난 신인 감독을 선정하는 '''신도 가네토상'''을 새롭게 창설했다.

2010년 시점에서 신도는 일본 최고령 현역 영화 감독이었다. 세계에서도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에 이어 두 번째였지만, 같은 해 제23회 도쿄 국제 영화제 시상식에서 『한 장의 엽서』를 감독 은퇴작으로 할 것을 공표했지만, 원하면 아직 찍고 싶은 마음도 나타냈다. 만년에는 고령으로 이동에 휠체어가 필수적이게 되었다.

2012년 2월 14일도쿄도 내에서 열린 제54회 블루리본상 시상식에서는 신인상을 수상한 당시 7세의 아시다 마나와의 "92세 차 투샷"으로 화제를 모았다.[70] 두 달 뒤인 4월 22일에 100세를 맞아, 도쿄도 내에서 생일 파티가 열렸고, 모인 영화인들을 앞에 두고 "이것이 마지막 말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안녕"이라고 인사했다.[71]

3. 작품 세계

신도는 영화를 "이미지의 움직임과 비움 사이의 변증법 또는 상호 작용으로 구성된 '몽타주' 예술"이라고 정의했다.[3] 초기에는 시각적 스타일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었으나, 영화 평론가 조앤 멜렌은 《오니바바》를 "시각적으로 절묘하다"라고 평가했다.[3]

1972년 조안 멜렌과의 인터뷰에서 신도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서구 영화 감독으로 오슨 웰스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을 꼽았고, 구세대 일본 영화 감독 중에서는 미조구치 겐지를 가장 존경한다고 밝혔다. 또한 자신의 모든 작품에 "강한 프로이트의 영향"이 있다고 말했다.[30]

베니치오 델 토로와의 인터뷰에서 신도는 미조구치 겐지에게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답했다. 미조구치는 8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었지만, 그 중 대부분은 지루했고, 단지 5~6편 정도만이 좋은 영화였지만, 실패가 없었다면 《우게츠 이야기》와 같은 성공도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31]

신도는 숙련된 장인 기술로 다양한 장르시나리오를 썼으며,[49] 각본 작품은 약 370편에 달한다. "부탁받은 일은 거절하지 않는다"는 신조로[36] 대형 영화사 기획 작품 각본도 다수 다루었다.[36] 높은 평가를 받은 각본 작품으로는 가와시마 유지 감독의 《정숙한 짐승》(1962년),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싸움 엘레지》(1966년), 나카히라 코 감독의 《혼혈아 리카》 시리즈(1970년대), 고야마 세이지로 감독의 《하치코 이야기》(1987년) 등이 있다. 오락 괴작으로는 에도가와 란포 원작을 뮤지컬로 만든 《흑도마뱀》 (1962년) 등이 있다.

또한 《어머니》(1963년)에서 오가와 마유미를, 《오니바바》(1964년)에서 요시무라 미키를, 《숲 속의 검은 고양이》(1968년)에서 다이치 키와코를 각각 스타로 만들었다.[67]

3. 1. 주제 의식

신도 가네토는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묘사했으며, 그의 작품에서는 빈곤, 여성, 성과 관련된 사회 비판이 주요 주제로 다루어진다.[3] 사토 타다오는 신도의 영화가 그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지적하며, "현대 일본은 농업 국가에서 산업 국가로 발전했다.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하여 불안정한 삶에 뛰어들었다. 신도 가네토의 촬영 스타일은 이러한 불안감을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으며, 농민들의 끈기와 인내를 묘사한다."라고 말했다.[3]

조앤 멜렌은 "신도의 영화는 최고조에 달했을 때 성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결합한다. 그의 급진적인 인식은 인간의 성생활을 특정 사회 계급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이라는 맥락에서 분리한다... 신도에게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우리의 열정과 사회 계급의 구성원으로서의 우리의 야망은 무의식 안에서 끝없는 투쟁을 유발한다. 이러한 투쟁이 시각화되고 의식적인 삶으로 드러나는 순간은 그의 작품을 최고의 예술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라고 평가했다.[3]

사토 타다오는 신도가 히로시마 원폭에 대한 분노, 노령과 성 등 자신을 축으로 한 가족, 직업, 지역, 국가에서 세계에 이르는 문제를 종합적으로 그린 세계에 유례없는 영화 작가였다고 평가한다. 신도의 작품에는 사회성이 강한 작품, 성의 금기에 도전한 작품이 많다.[38][41][64]

그는 "드라마도 인생도 발단·갈등·종결의 3단계로 구성된다"는 지론을 가졌으며, 감독으로서는 순수한 오락 작품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각본가로서는 코미디나 미스터리 등에도 높은 기술을 발휘하는 장인적인 면모를 보였다.

3. 2. 영화적 스타일

신도는 영화를 "이미지의 움직임과 비움 사이의 변증법 또는 상호 작용으로 구성된 '몽타주' 예술"이라고 말했다.[3] 초기에는 시각적 스타일이 거의 없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영화 평론가 조앤 멜렌은 영화 《오니바바》를 "시각적으로 절묘하다"라고 칭찬했다.[3]

신도는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묘사했는데, 그의 작품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주제는 빈곤, 여성, 성과 관련된 사회 비판이다.[3] 사토 타다오는 신도의 정치 영화가 그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지적하며, "현대 일본은 농업 국가에서 산업 국가로 발전했다.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하여 불안정한 삶에 뛰어들었다. 신도 가네토의 촬영 스타일은 이러한 불안감을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으며, 농민들의 끈기와 인내를 묘사한다."라고 말했다.[3]

조앤 멜렌은 "신도의 영화는 최고조에 달했을 때 성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결합한다. 그의 급진적인 인식은 인간의 성생활을 특정 사회 계급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이라는 맥락에서 분리한다... 신도에게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우리의 열정과 사회 계급의 구성원으로서의 우리의 야망은 무의식 안에서 끝없는 투쟁을 유발한다. 이러한 투쟁이 시각화되고 의식적인 삶으로 드러나는 순간은 그의 작품을 최고의 예술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라고 썼다.[3]

1972년 조안 멜렌과의 인터뷰에서 신도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서구 영화 감독으로 오슨 웰스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을 꼽으며 "최고"라고 칭했고, 구세대 일본 영화 감독 중에서는 미조구치 겐지를 가장 존경한다고 말했다. 같은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작품에 "강한 프로이트의 영향"이 있었음을 확인했다.[30]

베니치오 델 토로가 미조구치 겐지로부터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신도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답했다. 신도에 따르면, 미조구치는 8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었지만, 그 중 대부분은 지루했고, 단지 5~6편 정도만이 좋은 영화였지만, 실패가 없었다면 《우게츠 이야기》와 같은 성공도 없었을 것이다.[31]

신도 가네토의 작품에는 사회성이 강한 작품, 성의 금기에 도전한 작품이 많다.[38][41][64] 1964년 『오니바바』에서는 요시무라 미키, 사토 게이가 전라로 달리는 장면을 촬영했다. 1970년 연쇄 권총 발포 사건의 나가야마 노리오를 소재로 한 『벌거벗은 열아홉 살』, 1972년에는 플라워 메그의 누드가 거의 전편에 걸쳐 나오는 『철륜』[65]을 발표했다. 『철륜』은 일본의 전통 예능을 소재로 한 전위 작품이었다.

1974년 귀환자에서 도호쿠 개척 농민이 된 사람들을 그린 『나의 길』, 1977년 쓰가루 샤미센의 다카하시 죽산을 소재로 한 『다케야마 홀로 여행』, 히로시마 원폭으로 사망한 사쿠라 부대를 소재로 한 『사쿠라 부대 흩어지다』, 가정 내 폭력을 소재로 한 『교살』, 죽음과 무능을 테마로 한 『성의 기원』, 히구치 가나코가 아름다운 누드를 선보인 『호쿠사이 만화』[66](1981년), 성의 금기에 도전한 『묵동기담』 등을 발표했다.[64]

"드라마도 인생도, 발단·갈등·종결의 3단계로 구성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감독으로서는 순수한 오락 작품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각본가로서는 코미디나 미스터리 등에도 높은 기술을 발휘하는 장인적인 면모를 보인다. 자신의 감독 작품 외에도 다른 감독에게 각본을 제공하고 높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아, 각본가로서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4. 주요 작품 목록

신도 가네토는 영화감독이자 각본가로,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고 각본을 썼다.

연도제목비고
1951애처 이야기감독 데뷔작
1952눈사태
1952원폭의 아이
1953축도
1953여자의 일생
1954도브
1955늑대
1956은심중
1956유리의 기슭
1956여배우
1957바다의 사나이들
1958슬픔은 여자에게만
1959제5복룡환
1959신부님은 세계 제일
1960벌거벗은 섬
1962인간
1963어머니
1964오니바바
1965악당
1966본능
1967성의 기원
1968수풀 속의 검은 고양이
1968고집불통 여자와 겁쟁이 남자
1969아지랑이
1970촉각
1970벌거벗은 열아홉 살
1972철륜
1972찬가
1973마음
1974나의 길
1975어떤 영화 감독의 생애 미조구치 겐지의 기록
1977다케야마 홀로 여행
1978다큐멘터리 8.6
1979교살
1981호쿠사이 만화
1984지평선
1986블랙보드
1986낙엽수
1988벚꽃 부대 흩어지다
1992묵동기담
1995오후의 유언장
1999살고 싶다
2000삼류 배우
2003부엉이
2008이시우치 죠토 고등학교 꽃은 져도
2010한 장의 엽서



연도제목비고
1947결혼
1947안조가의 무도회
1948유혹
1949나의 사랑은 타오르지 않는다
1951무희원작: 가와바타 야스나리
1951겐지 이야기
1956아코 낭사 천의 권 지의 권
1961아코 낭사
1962흑도마뱀
1962점잖은 짐승
1964
1966자토이치 바다를 건너다
1966싸움 엘레지
1971어둠 속의 요마
1971격동의 쇼와사 오키나와 결전
1972군기는 휘날리는 아래에
1972혼혈아 리카
1973혼혈아 리카 혼자 가는 방랑의 여행
1973혼혈아 리카 하마구레 자장가
1978사건
1979아코 낭사TV 시리즈
1987하치 이야기
1999게이샤 하우스


4. 1. 감독

1951년, 다이에이로부터 의뢰를 받아 근대 영화 협회 첫 작품으로, 『애처 이야기』로 39세에 감독 데뷔를 하였다.[38][55] 이 자전적인 내용의 각본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55] 주연은 다이에이 인기 스타 오토와 노부코였으며, 오토와가 이 각본을 읽고 꼭 아내 역할을 하고 싶다고 청해 왔고, 신도에게는 애처 이야기의 모델인 타카코와 오토와가 매우 닮았다는 이유로 캐스팅되었다.[55]

1952년, 근대 영화 협회 첫 자주 제작 작품으로, 원폭의 상처가 생생한 고향 히로시마 로케를 감행하여[37], 『원폭의 아이』를 발표했다.[36][37][38][58] 이듬해 1953년, 칸 영화제에 출품되었다.[58] 외교 문서에 따르면, 당시 일본 정부는 이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고, 미국의 압력으로 외무성이 수상 방해 공작을 시도했으나, 칸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56][58] 황금종려상을 기대했지만, 수상에는 실패했다.[58] 서독에서는 반전 영화로서 군 당국에 압수되는 소동도 있었으며,[56] 각국에서 물의를 빚었지만 세계적으로 반향을 불러 체코 국제 영화제 평화상[36], 영국 영화 아카데미 유엔상, 폴란드 저널리스트 협회 명예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원폭의 아이 주연을 맡은 오토와는 영화 제작 당시 근대 영화 협회로 이적했고, 이후 신도와 오토와의 관계는 계속되었으며, 신도에게 본처 미요와 자녀들이 있었음에도 이 무렵부터 오토와와 애인 관계가 되었다.[55]

이후에는 자신의 시나리오를 자신의 자금으로 감독하는 독립 영화 작가가 되어[36], 극단 민예의 협력 등을 얻어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다.[36] 그러나 예술성과 상업성 간의 모순에 고뇌하며 실패와 시행착오를 반복했다. 핵무기 관련 작품도 계속되어, 1959년 『제5복룡환』을 발표했지만 흥행에 실패[36], 근대 영화 협회에는 거액의 빚이 남아 해산 위기에 놓였다.[36][60]

이 무렵, 일본 영화에 쇠퇴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대형 영화사의 경영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산업으로서의 영화의 쇠퇴는 "사회파 영화"나 "전위 예술 영화" 약진의 기회이기도 했다. 대형 영화 회사에 의한 영화관 독점 지배 체제가 완화되면서, 작은 독립 프로가 제작하는 영화도 상영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연도제목
1951애처 이야기
1952눈사태
1952원폭의 아이
1953축도
1953여자의 일생
1954도브
1955늑대
1956은심중
1956유리의 기슭
1956여배우
1957바다의 사나이들
1958슬픔은 여자에게만
1959제5복룡환
1959신부님은 세계 제일
1960벌거벗은 섬
1962인간
1963어머니
1964오니바바
1965악당
1966본능
1967성의 기원
1968수풀 속의 검은 고양이
1968고집불통 여자와 겁쟁이 남자
1969아지랑이
1970촉각
1970벌거벗은 열아홉 살
1972철륜
1972찬가
1973마음
1974나의 길
1975어떤 영화 감독의 생애 미조구치 겐지의 기록
1977다케야마 홀로 여행
1978다큐멘터리 8.6
1979교살
1981호쿠사이 만화
1984지평선
1986블랙보드
1986낙엽수
1988벚꽃 부대 흩어지다
1992묵동기담
1995오후의 유언장
1999살고 싶다
2000삼류 배우
2003부엉이
2008이시우치 죠토 고등학교 꽃은 져도
2010한 장의 엽서


4. 2. 각본

신도 가네토는 각본가로서 다양한 장르와 주제의 영화에 참여하여 폭넓은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다음은 신도 가네토가 각본을 담당한 작품 목록이다.

연도제목비고
1940남진 여성
1940왕도란의 탄식
1941맹수 부리는 자매
1941북극광시대 고증
1941춘성 부인
1946여성의 승리
1946기다리는 여자
1946열쇠를 쥔 여자
1946오히카리의 혼담
1947가면의 거리
1947결혼
1947처녀는 진주와 같이
1947안조가의 무도회키네마 준보 베스트 10 1위
1947딸의 역습
1948유혹
1948소문의 남자
1948위대한 X
1948불의 장미
1948나의 생애의 빛나는 날키네마 준보 베스트 10 5위
1948행복의 한계
1948네 번째 숙녀
1949질투
1949나의 사랑은 타오르지 않는다
1949아가씨 건배!키네마 준보 베스트 10 6위
1949주순 아직 지지 않아
1949모리노 이시마쓰키네마 준보 베스트 10 9위
1949살인귀
1949요츠야 괴담
1949대도시의 얼굴
1949한낮의 원무곡
1949탈선 정열 아가씨
1950춘설
1950위험한 나이
1950봄의 조수전편, 후편
1950알프스 이야기 야성
1950전화의 종말
1950나가사키의 종
1950새벽의 추적
1950아카기에서 온 남자
1950칠색의 꽃
1950처녀 벌
1951그릇된 성적키네마 준보 베스트 10 3위
1951아수라 판관
1951열사의 백란
1951자유 학교
1951누가 나를 심판하는가
1951조슈 가라스
1951정염의 부두
1951사이조 가의 향연
1951무희원작: 가와바타 야스나리
1951도쿄 비가
1951겐지 이야기키네마 준보 베스트 10 7위
1951이십야 가도
1952니시진의 자매
1952폭력
1953천 마리 학
1953여자 혼자 대지를 간다
1953촌 팔분
1953욕망
1953그대에게 바칠 목숨이라면
1953새벽 전원작: 시마자키 도손
1953땅의 끝까지원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1954아시즈리 곶원작: 타미야 토라히코
1954진흙투성이의 청춘
1954젊은이들
1955사랑하면 할수록 제1화 꽃 파는 아가씨
1955긴자의 여자
1955자매
195519살의 신부
1955미녀와 괴룡키네마 준보 베스트 10 10위
1955어머니 없는 아이
1956아코 낭사 천의 권 지의 권원작: 오사라기지로
1956시집가는 날
1956병든 아내 이야기 아야에게 사랑
1956노려진 남자
1956한가로운 부부
195648세의 저항
1957다정 불심
1957행복은 우리들의 소원
1957히카게의 딸
1957죽인 것은 누구인가
1957장어 잡이
1957미덕의 비틀거림원작: 미시마 유키오
1957지상
1957백조 이야기미공개
1958금지된 입술
1958빙벽원작: 이노우에 야스시
1958밤의 고원작: 지카마츠 몬자에몬
1958부적절한 남자
1958한 알의 밀
1958한밤중의 얼굴
1958벌거벗은 태양원작: 히무로 카즈토시, 키네마 준보 베스트 10 5위
1958밤의 맨얼굴
1959카라타치 일기
1959재녀 기질
1959그 벽을 부숴라
1959전화는 저녁에 울린다
1959귀족의 계단
1960위대한 여정
1960구니사다 주지
1960길가의 돌
1960멋진 녀석
1960여자의 언덕
1960힘내라! 반가
1960위대한 맹진
1961마츠카와 사건
1961태동기 우리는 천사가 아니다
1961"도전"보다 사랑과 불꽃과
1961여자의 훈장원작: 야마자키 도요코
1961구름이 찢어질 때
1961배덕의 메스원작: 구로이와 시게고
1961열애자
1961헌신
1962가정의 사정
1962흑도마뱀원작: 에도가와 란포, 원작 희곡: 미시마 유키오
1962난(다다레)원작: 도쿠다 슈세이
1962심판받는 에치젠노카미원작: 요시카와 에이지
1962저 하늘의 끝에서 별은 또 반짝인다
1962푸른 베카 이야기원작: 야마모토 슈고로
1962베다원작: 시바타 렌자부로
1962고래신원작: 우노 코이치로
1962당하는 대장
1962점잖은 짐승키네마 준보 베스트 10 6위
1963거짓 제3화 「여체」
1963무희와 암살자
1963해군원작: 이와타 토요오
1964상처투성이의 산하원작: 이시카와 타츠조, 키네마 준보 베스트 10 7위
1964스루가 유협전 도박판 황폐원작: 코모자와 칸
1964원작: 타니자키 준이치로
1964사라의 문원작: 미즈카미 츠토무
1964육체의 성적
1965쥐 도둑 지로키치원작: 오사라기 지로
1965세이사쿠의 아내원작: 요시다 겐지로
1966자자원작: 타니자키 준이치로
1966술 취한 박사
1966자토이치 바다를 건너다원작: 코모자와 칸
1966속・술 취한 천사
1966싸움 엘레지원작: 스즈키 타카시
1966술 취한 부두
1967한정된 날을 사랑하며 살아서원작: 쿠사나기 미노루
1967아내 둘원작: 패트릭 퀸틴 「두 아내를 가진 남자」
1967타락하는 여자
1967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원작: 아리요시 사와코, 키네마 준보 베스트 10 5위
1968잠자는 미녀원작: 가와바타 야스나리
1969천 마리 학원작: 가와바타 야스나리
1969귀신이 사는 관원작: 타니자키 준이치로
1971어둠 속의 요마원작: 에노모토 시게미 「피투성이 그림 에킨」
1971격동의 쇼와사 오키나와 결전
1971달콤한 비밀원작: 도쿠다 슈세이
1972군기는 휘날리는 아래에원작: 유키 마사하루, 키네마 준보 베스트 2위
1972혼혈아 리카원작: 본텐타로
1973혼혈아 리카 혼자 가는 방랑의 여행원작: 본텐타로
1973혼혈아 리카 하마구레 자장가원작: 본텐타로
1975쇼와 말라가는 수수원작: 유키 마사하루
1978위험한 관계원작: 라클로
1978사건원작: 오카 쇼헤이, 키네마 준보 베스트 4위,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각본상
1979배달되지 않은 세 통의 편지원작: 엘러리 퀸
1980지진 열도
1980아득한 여정
1980렌뇨와 그 어머니원작: 히라이 키요타카
1983적목 붕괴원작: 호즈미 타카노부
1987영화 여배우키네마 준보 베스트 5위
1987하치 이야기
1990돈마이
1991도쿄 교차점
1992머나먼 낙일


5. 수상 내역

연도수상 내역작품비고
1961년제2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대상벌거벗은 섬[33]
1964년파나마 영화제 그랑프리오니바바
1971년제7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금상오늘 살고 내일 죽다![16]
1996년일본 아카데미상 감독상라스트 노트[34]
1996년가와키타상[69]
1998년문화공로자
1999년제21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황금 성 게오르기 상살고 싶은 마음[35]
2002년문화훈장[10]
2003년일본 아카데미상 공로상
2003년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특별상
2005년타니모토 키요시 평화상
2011년기쿠치 간 상


6. 유산 및 평가

1996년 일본 영화계의 독립영화 선구자로 평가받는 신도 가네토 감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독립 프로덕션 58개사가 조직한 일본 영화 제작자 협회 소속 현역 프로듀서만이 그 해에 가장 뛰어난 신인 감독을 선정하는 '''신도 가네토상'''이 신설되었다.[32]

신도는 오랜 영화 제작 활동에 대한 공로로 1996년 제14회 가와키타상[69], 1997년 문화공로자[38], 2002년 문화 훈장을 수여받았다[41][62].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는 『벌거벗은 섬』, 『벌거벗은 19세』로 그랑프리, 『살고 싶다』로 금상을 수상하였고, 2003년에는 특별상을 수상했다. 2005년에는 영화를 통해 평화를 지속적으로 호소해 온 공로로 타니모토 키요시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2011년에는 "많은 걸작 영화를 세상에 내놓고, 일본 최고령 현역 감독으로서 영화 '한 장의 엽서'를 완성했다"는 이유로 제59회 기쿠치 간 상을 수상했다.

2010년 당시 신도는 일본 최고령 현역 영화감독이자, 세계에서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에 이어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영화감독이었다. 같은 해 제23회 도쿄 국제 영화제 시상식에서 『한 장의 엽서』를 감독 은퇴작으로 발표했으나, 이후에도 영화를 찍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만년에는 고령으로 인해 이동 시 휠체어가 필요했다.

2012년 2월 14일 도쿄도에서 열린 제54회 블루리본상 시상식에서는 신인상을 수상한 당시 7세의 아시다 마나와 함께 찍은 "92세 차 투샷"으로 화제가 되었다[70]. 4월 22일, 100세 생일을 맞아 도쿄도 내에서 열린 생일 파티에서 "이것이 마지막 말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안녕"이라고 인사했다[7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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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뉴스 新藤兼人さん葬儀に400人…柄本明が弔辞 http://www.sanspo.co[...] 2012-06-04
[75] 뉴스 故新藤兼人氏に従三位 https://www.nikkansp[...] 2012-06-26
[76] 뉴스 訃報:新藤兼人さん100歳=映画監督・脚本家 http://mainichi.jp/s[...] 2012-05-30
[77] 서적 이키테이루카기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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