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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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세는 1320년에 태어난 원나라 귀화인으로,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 토벌에 기여한 무관이다. 1363년 홍건적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워 2등공신이 되었으며, 최유의 난 때는 도병마사로 활약했다. 왜구 방어에 실패하여 투옥되기도 했으나, 이후 목호 토벌, 북원 군사 방어, 왜구 격퇴 등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1380년 최무선 등과 함께 진포 해전에서 왜선 500척을 불태우는 큰 전과를 올렸다. 고려 멸망 후 조선에서도 무관으로 활동하며 해적 토벌에 나섰으나 1397년 용주에서 왜적을 막다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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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한글 | 나세 |
한자 | 羅世 |
히라가나 | 라 세이 |
가타카나 | 나・세 |
인물 정보 | |
시대 | 고려 말기(14세기) ~ 조선 초기 |
생애 | 원나라(元) 연우(延祐) 7년/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7년(1320년) ~ 조선(朝鮮) 태조(太祖) 6년(1397년) 9월 17일(음력) |
주군 | 고려: 공민왕(恭愍王) → 우왕(禑王) → 창왕(昌王) → 공양왕(恭讓王), 조선: 태조 |
관직 | |
직책 | 판도판서(版圖判書), 교동만호(喬桐萬戶), 도병마사(都兵馬使),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경상도부원수(慶尙道副元帥), 밀직부사(密直副使), 서해도상원수(西海道上元帥) 겸 도순문사(都巡問使), 전라도상원수(全羅道上元帥) 겸 도안무사(都安撫使),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판숭녕부사, 해도원수(海道元帥), 문하평리(門下評理), 동강도원수(東江都元帥), 경상도조전원수(慶尙道助戰元帥), 병선조전절제사(兵船助戰節制使),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도추포사(都追捕使) |
봉호 | 연안군(延安君) |
2. 생애
1320년 원(元)에서 귀화한 나세는 1363년 홍건적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워 2등공신이 되었고, 1364년 최유의 난 때는 도병마사로 고려군 좌익을 지휘했다. 그러나 교동만호 시절 왜구 방어에 실패하여 투옥되기도 했다.[3]
1374년, 명에 말을 바치라는 고려 조정의 명을 거부한 제주 목호(牧胡) 토벌에 부원수로 종군했다. 1375년에는 북원(北元) 군사들을 막기 위해 서해도상원수 겸 도순문사에 임명되었다.
1376년 전라도상원수 겸 도안무사로서 부령현을 약탈한 왜구를 격퇴했고, 1377년에는 강화도로 침입한 왜구를 몰아냈다. 이후에도 신주, 옹진, 문화 등지를 약탈하는 왜구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고 조정에 원군을 요청하기도 했다.
1378년 왜구가 연안부와 해주를 거쳐 금주와 양천을 약탈하자, 나세는 심덕부(沈德符)와 함께 전함을 이끌고 왜구를 수색했다. 1380년에는 진포대첩에서 최무선(崔茂宣) 등과 함께 왜선 5백 척을 불태우는 큰 공을 세웠다.
1381년 동강도원수가 되었고, 1383년에는 경상도조전원수로 임명되었으나 왜구 토벌에 소극적이었다는 이유로 옥에 갇혔다가 풀려났다.
조선(朝鮮) 건국 후인 1393년 병선조전절제사(兵船助戰節制使)로 임명되었고,[4] 1397년에는 도추포사(都追捕使)로 경기도, 풍해도, 서북면 등지의 해적을 토벌했다.[5] 같은 해 용주(龍州)에 침입한 왜적을 막다가 진중에서 사망했다.[3]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1320년 원(元)에서 귀화한 인물로, 1363년 홍건적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2등 공신이 되었다.[3] 이듬해 1월에는 최유의 난 진압에 참여하여 도병마사가 되었고, 안우경(安遇慶), 이귀수(李龜壽), 지용수(池龍壽) 등과 함께 고려군 좌익을 맡아 싸웠다. 그러나 교동만호(喬桐萬戶)로 재직 중 왜구의 침입을 막지 못하고 도망친 죄로 투옥되기도 했다.1374년 명(明)에 바칠 말을 요구한 고려 조정의 명을 거부한 제주(濟州)의 목호(牧胡)들을 토벌하는 지휘관 중 한 명으로, 경상도원수(慶尙道元帥) 지윤(池奫) 휘하의 부원수로 종군했다.
1375년 8월, 북원(北元) 군사들을 막기 위한 군사 지휘관으로 서해도상원수 겸 도순문사에 임명되었다.
2. 2. 왜구 토벌과 활약
1363년 홍건적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워 2등공신이 되었고, 이듬해 1월에는 최유의 난 때 정주(定州)에서 적에게 잡혀간 도병마사 홍선(洪瑄)을 대신해 도병마사가 되었다. 안우경(安遇慶), 이귀수(李龜壽), 지용수(池龍壽) 등과 함께 고려군 좌익을 맡아 싸웠으나, 이후 교동만호(喬桐萬戶)로서 왜구의 침입을 막지 못하고 도망쳐 온 죄로 순위부(巡衛府)에 투옥되기도 했다.[3]1374년 제주도의 목호 토벌에 지휘관으로 참여, 경상도원수(慶尙道元帥) 지윤의 휘하에서 부원수로 종군했다.
1375년 8월, 심양왕 탈탈불화(脫脫不花)와 그 어머니를 호종해 고려로 오려는 북원 군사를 막기 위해 서해도상원수 겸 도순문사에 임명되었다.
1376년 9월 전라도상원수 겸 도안무사가 되었다. 10월, 왜구 선단 50척이 웅연(熊淵)에 정박, 적현(狄峴)을 넘어 부령현을 약탈하고 동진교(東津橋)를 불태우자, 변안열(邊安烈), 조사민(趙思敏) 등과 함께 밤에 다리를 놓아 왜구를 공격, 행안산(幸安山)으로 달아난 왜구를 사면에서 포위 공격해 승리했다.
1377년 3월, 왜구가 강화도로 쳐들어오자 왕에게 글을 올려 왜구 토벌을 자청했고, 우왕은 그에게 내구마(內廐馬) 두 필을 내렸다가 또 열 필을 주었다. 나세는 조사민, 이원계(李元桂), 강영(康永), 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쳐서 내쫓았으나, 5월에 왜구는 다시 남양(南陽), 안성(安城), 종덕(宗德)을 치고 50척의 선단으로 강화를 공격, 부사(府使) 김인귀(金仁貴)를 죽이고 고려군 수졸 1천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수원(水原)까지 쳐들어왔다. 나세는 원수 양백연(楊伯淵)과 함께 전함 50척을 거느리고 왜구를 쫓았다.
6월, 왜구 선단 45척이 신주(信州), 옹진(瓮津), 문화(文化) 등의 현을 약탈하자 원수 조인벽(趙仁璧), 심덕부 등과 함께 공격했다. 8월, 다시 신주, 문화, 안악(安岳), 봉주(鳳州)로 쳐들어온 왜구에 맞서 심덕부, 양백익(梁伯益), 박보로(朴普老)와 함께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조정에 원병을 청했다. 이에 조정은 이성계, 임견미, 변안열, 밀직부사 유만수, 홍징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삼아 나세에게 원군을 파견했다.
1378년 8월, 왜구가 연안부(延安府)와 해주를 거쳐 금주(衿州)와 양천(陽川)을 약탈하자, 심덕부와 함께 전함을 거느리고 섬들을 돌며 왜구를 수색했다. 이듬해 4월, 왜구가 다시 연안부를 공격하자 김유와 함께 전함 50척을 거느리고 왜구를 막았으며, 5월에는 용강현(龍岡縣) 목곶포(木串浦)에서 왜구의 배 두 척을 잡아 모두 죽였다.
1380년 8월, 해도원수로서 심덕부, 최무선 등과 함께 전함 1백 척을 지휘해 진포(鎭浦)에 정박해 있던 왜선 5백 척을 불사르고 포로로 잡혀 있던 고려 백성 330인을 구해냈다(진포 해전).
1381년 동강도원수가 되어 강의 요충지를 막게 되었다. 1383년 2월, 해도원수를 거쳐 6월에는 경상도조전원수로서 축산도(丑山島)에 들어온 왜구를 치라는 왕명에 머뭇거렸다는 이유로 광주(廣州)의 옥에 갇혔다가 곧 풀려났다.
조선 건국 후인 1393년 병선조전절제사(兵船助戰節制使)로 임명되어 친군위(親軍衛) 용사들을 거느리고 바닷가로 파견되었으며,[4] 1397년 도추포사(都追捕使)로 임명되어 경기도, 풍해도 및 서북면 등지의 해적 토벌에 나섰다.[5] 같은 해 8월 14일 용주(龍州)에 침입한 왜적을 막기 위해 파견되었다가[6] 9월 17일 진중에서 사망했다.[3]
2. 3. 조선 개국 이후
1392년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나세는 새 왕조의 무관으로 계속 복무했다. 1393년(태조 2년) 병선조전절제사(兵船助戰節制使)로 임명되어 친군위(親軍衛) 용사들을 거느리고 해안 지역으로 파견되었다.[4]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뒤, 1397년(태조 6년) 다시 도추포사(都追捕使)로 임명되어 경기도, 풍해도, 서북면 등지에서 해적 토벌에 나섰다.[5] 같은 해 8월 14일, 용주(龍州)에 침입한 왜적을 막기 위해 파견되었다가[6] 9월 17일 진중에서 사망했다.[3]3. 가족 관계
나세는 원에서 귀화하였으나, 그 후손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태종실록》 1401년 10월 10일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나세의 딸은 행사직(行司直) 송렴(宋廉)과 사통하고 있었는데, 나세는 이 사실을 모른 채 딸을 생원(生員) 윤임(尹任)에게 시집보냈다. 그러나 혼인 후에도 두 사람은 계속 정을 통했고, 이 일이 사헌부에 발각되어 나세는 투옥되고 송렴은 달아났다.
나세는 사헌부 심문에서 송렴의 누이이자 지형조사(知刑曹事) 권진(權軫)의 처가 자신과 송렴 사이를 중매했다고 진술했다. 이에 사헌부는 권진이 집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며 탄핵했다.[1]
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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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東アジア海域と倭寇 : 9世紀末の新羅海賊との比較史的考察を通して
https://hdl.handle.n[...]
京都産業大学
2014-03-01
[2]
서적
中外科學之交流
https://books.google[...]
香港中文大學出版社
1993-01-01
[3]
서적
태조실록
1397-09-17
[4]
서적
태조실록
1393-04-21
[5]
서적
태조실록
1397-07-03
[6]
서적
태조실록
1397-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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