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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농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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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농동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을 의미하며, 사회주의 혁명의 중요한 전략으로 여겨진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봉건 사회에서 농민을 자영농과 소작농으로 구분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농민의 계급적 변화를 분석한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농민의 혁명성을 인정하고, 노농동맹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려 했다. 레닌은 농민을 빈농, 영세농, 소농, 중농, 부농으로 분류하고, 각 계층의 혁명성을 다르게 평가했다.

레닌은 나로드니키주의와 멘셰비키의 농민관을 비판하며, 소비에트 연방 성립 이후 협동조합을 통한 사회주의화를 추진했다. 스탈린은 노농동맹에 기반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조했으며, 신경제정책(NEP)과 농업 집단화를 통해 농민 정책을 펼쳤다. 한국 근현대사에서도 동학 농민 혁명, 일제강점기 농민 운동, 해방 이후 농지 개혁 등 농민 문제가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농촌의 고령화, 농산물 시장 개방, 농가 소득 감소 등의 문제와 더불어민주당의 농업 정책 등 다양한 현안이 존재한다.

2.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농민

마르크스주의의 봉건 사회에 관한 이론에서 농민은 자영농과 소작농으로 분류된다. 자영농은 토지를 소유한 농민으로, 봉건 사회에서 영주의 통제를 적게 받는 농민이며, 소작농은 농노 또는 소작농이라고 불린다.[1]

자영농은 소부르주아에 속하며, 봉건 사회에 대한 적대감을 갖고 있다. 농노는 영주에게 소유되어 봉건적인 소생산을 담당하는 완전한 피지배계급이다. 농민은 봉건 사회에서 피지배 계급이지만, 선진 의식은 자본가와 상인에 비해 뒤떨어지기에 자유주의 혁명에서 자본가의 지도를 받아 혁명을 완수한다.[2] 이후 형성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토지 개혁과 신분제 철폐를 통하여 농노가 자유민이 된다.[1]

자본주의는 농노에게 산업 기반의 성장으로 인한 농업 기반의 대규모 파괴를 통한 농노의 노동계급화를 강요한다. 봉건 사회에서 일정 정도의 자산을 유지한 자영농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농업 자본을 가진 소부르주아로서 지속적으로 역할을 할 수 있다. 토지 개혁으로 인해 소작제가 폐지되고, 자영농은 임대인으로서, 임차농(농업 프롤레타리아)을 고용할 수 있다.[1]

농노는 도시에서는 산업프롤레타리아로, 농촌에서는 임차농으로 되며 새로운 계급 대립을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농촌프롤레타리아는 도시프롤레타리아에 비해 계급의식을 빠르게 획득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농촌의 낙후성과 연결된다. 자본주의에 의한 전방위적인 파괴가 미치지 않는 농촌에서 봉건적 유제는 장기간 존속되며, 이에 꾸준히 영향을 받는 농촌프롤레타리아(임차농)는 상당 부분 봉건 의식의 잔재를 가진 상태로 살아간다.[1]

마르크스 학설에서 농민은 임대인의 자격을 갖춘 자영농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고, 노동자는 도시 지역의 산업프롤레타리아를 독점적으로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농민은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또는 소부르주아로 칭해진다.[1]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 다수는 농민이 차르 체제를 타도하는 혁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노동자의 사회주의 운동에는 전혀 참가할 수 없는 존재라고 보았다. 그러나, 레닌은 자유주의 혁명에서 소농 이하의 모든 농민이 사회주의 혁명과 적대적이지 않으며, 충분히 평화적으로 사회주의적 농업 소유 관계를 수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노농동맹에 기초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이룰 수 있다는 노농동맹에 관한 이론을 주장하며 사회주의 혁명의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려고 하였다.[3]

2. 1. 봉건 사회에서의 농민

2. 2.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농민

2. 3. 농민의 혁명성 논쟁

블라디미르 레닌은 '혁명의 제1단계'(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 1905년 ~ 1917년 2월)와 '혁명의 제2단계'(사회주의혁명, 1917년 4월 ~ 1917년 10월)를 구분하고, 전자에서는 전체 농민과의 동맹, 후자에서는 빈농과의 동맹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노농동맹 노선을 주장했다.[4] 그는 1907년에 저술한 『농업문제와 소위 '마르크스비판'』에서 농민의 경제사적 역할과 재화 소유 방식을 분석하여, 농민이 기본적으로 소부르주아적 성격을 갖고 있지만, 토지를 사회주의적 경제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역사성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농민을 '농촌 프롤레타리아'와 '농촌 부르주아'로 분류하고, 전자와의 협력을 추구하였다.[5]

레닌은 사회주의에 적합한 농업 생산관계 형태가 노동집약적 산업과 연계되거나 별도로 존재할 수 있다고 강조하며, '자본주의 농업 발전의 두 가지 길' 이론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프랑스를 기준으로, 대토지 소유자가 온건적인 개혁 정책을 통해 자본주의화를 이끄는 '융커 모델'(보나파르트주의)이다. 레프 트로츠키이오시프 스탈린의 군사국가화와 농업 집산화를 '보나파르트주의'라고 비판했다. 두 번째는 영국의 모델로, 식민지 곡물 이출로 국내 지대를 약화시켜 자영농 계층을 붕괴시키고 다수의 빈농을 발생시키며, 자본주의 발전을 급진적으로 이룬다. 레닌은 스페인이탈리아의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나타난 지대 문제도 과학적으로 규명하였다.[6] 그는 봉건적 토지 소유 제도가 자본주의로 변화하면서 '소수의 대지주와 압도다수의 소농'으로 대표되는 봉건적 농업 체계가 붕괴하고 소규모 자영농이 일반화된 자본주의적 농업 구조로 발전하는 것을 실증했다.

자본주의 사회 내 농업 경제에서도 잉여가치 독점 현상이 발생하여 농민이 프롤레타리아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증명했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성립된 자본주의적 농업 소유 구조가 진보된 농업 경제 구조화를 막는다고 비판한 레닌은, 1920년 8월 7일 코민테른 2차 대회에서 혁명적 농민을 빈농·소농·영세농으로 규정하고, 중농과 부농은 제외했다. 자립 불가능한 영세농도 혁명적 농민으로 취급한 것이다.

{{Quotation|전세계 자본주의국가들에서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반드시''' 투쟁으로 인도해야 할, 혹은 적어도 자기 편으로 인입해야 할 농촌의 근로대중과 피착취 대중은 아래와 같은 계급들이다.

# 자본주의적 농업 기업에서 임금노동으로 자기의 생활자료를 얻어내는 임금노동자(1년 고용자·계정 고용자·납품팔이꾼)들인 농업 프롤레타리아.

# 반(半)프롤레타리아 혹은 영세 농민, 다시 말하면 자기의 생활자료를, 일부는 농업 및 산업자본 기업에서의 임금노동에서 얻으며, 또 다른 일부는 자기 가족을 먹여살리는 식료품의 일부를 주는 데 불과한 한 조각의 자기 소유지 또는 소작지에서 노동하는 것으로 얻는 농민들.

# 소농, 다시 말하면 자기 가족 및 자기 농사의 수요를 충족하는데 남의 노동력을 고용하지 않는 낮은 규모의 경지를 소유한 혹은 소작권에 의하여 점유하고 있는 소토지 소유자.|블라디미르 레닌, 1920년 8월 7일 코민테른 2차 대회 「농업문제에 관한 테제」에서[7]}}

농업의 자본주의화는 봉건적 농업보다 진보되었지만, 농업 노동력 착취는 여전하며, 농민의 빈곤화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는 농민이 산업노동자와 같은 혁명의 주체로서 거듭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된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빈농의 혁명성을 중시하며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계급과의 연대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농업의 하부 구조 변혁은 산업 변혁 속도보다 늦고 둔감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볼셰비키, 멘셰비키, 나로드니키주의자들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분파자본주의사회하 농민의 역사적 성격자본주의사회하 농민의 혁명성자본주의적 농업 생산 구조에 대한 평가농업 문제의 해결법사회주의적 농업 생산 구조의 가능성
볼셰비키부르주아·소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인정발전토지국유제(土地國有制)가능
멘셰비키부르주아·소부르주아불인정발전소농자치제(小農自治制)불가능
나로드니키주의자공산주의 형성의 주체인정퇴보토지공유제(土地公有制)원시적 농업 공동체를 사회주의/공산주의의 기반이라고 평가



소비에트 정부 성립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노농정부인가?"라는 논쟁에서 소비에트 정부가 노농동맹에 입각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며, 노농정부라고 불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Diktatur des Proletariatsde)는 노동자(산업프롤레타리아를 포함한 광범한 노동계급)·농민(빈농·소농·영세농)의 동맹에 기초한 사회주의국가이다. 트로츠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 '노동자국가'(Workers' State)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3. 레닌주의 이론에서 농민의 분류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을 의미하는 낫과 망치는 볼셰비키의 상징으로 쓰인 이래 줄곧 공산당의 상징으로 쓰여지고 있다.


레닌주의 이론에서 농민은 크게 빈농·영세농·소농·중농·부농이라는 다섯 가지로 구분된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혁명의 제1단계'(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 1905년 ~ 1917년 2월)와 '혁명의 제2단계'(사회주의혁명, 1917년 4월 ~ 1917년 10월)를 구분한 다음, 전자에서는 전체 농민과의 동맹, 후자에서는 빈농과의 동맹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노농동맹 노선을 주장했다.

1907년에 저술을 완료한 『농업문제와 소위 '마르크스비판'』[4]에서 농민의 혁명성을 인정하였다. 그는 농민의 경제사적 역할과 재화 소유 방식을 분석했을 때, 그들은 기본적으로 소부르주아적 성격을 갖고 있지만, 토지를 사회주의적 경제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역사성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농민을 '농촌 프롤레타리아'와 '농촌 부르주아'로 분류하고, 전자와의 협력을 추구한 것이다.[5]

1920년 8월 7일 코민테른 2차 대회에서 혁명적 농민을 빈농·소농·영세농으로 규정하였고, 중농과 부농은 이에 포함하지 않았다. 즉, 단순히 농업노동자가 아닌, 자립 불가능할 정도의 자영 영세농도 또한 혁명성이 존재하는 혁명적 농민으로 취급한 것이다.

{{Quotation|전세계 자본주의국가들에서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반드시''' 투쟁으로 인도해야 할, 혹은 적어도 자기 편으로 인입해야 할 농촌의 근로대중과 피착취 대중은 아래와 같은 계급들이다.

# 자본주의적 농업 기업에서 임금노동으로 자기의 생활자료를 얻어내는 임금노동자(1년 고용자·계정 고용자·납품팔이꾼)들인 농업 프롤레타리아.

# 반(半)프롤레타리아 혹은 영세 농민, 다시 말하면 자기의 생활자료를, 일부는 농업 및 산업자본 기업에서의 임금노동에서 얻으며, 또 다른 일부는 자기 가족을 먹여살리는 식료품의 일부를 주는 데 불과한 한 조각의 자기 소유지 또는 소작지에서 노동하는 것으로 얻는 농민들.

# 소농, 다시 말하면 자기 가족 및 자기 농사의 수요를 충족하는데 남의 노동력을 고용하지 않는 낮은 규모의 경지를 소유한 혹은 소작권에 의하여 점유하고 있는 소토지 소유자.|블라디미르 레닌, 1920년 8월 7일 코민테른 2차 대회 「농업문제에 관한 테제」에서[7]}}

; 빈농

빈농(貧農)은 농업 노동자와 극미한 토지를 소유한 자영농으로 분류된다. 전자는 농촌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후자는 농촌의 반(半)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분류된다. 빈농은 토지를 소유한 농민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가장 프롤레타리아에 가까운 농민이다.

빈농은 농촌에서 임차농 또는 농업 자본에 고용되어 농업 노동자로서 기능한다. 이들은 자유주의 및 사회주의 혁명에서 노동계급이 무조건 인입해야 할 계층으로, 노동력의 형태가 다를 뿐, 본질적으로 산업 프롤레타리아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농촌 프롤레타리아는 봉건적 유제가 상당히 남아 있는 농촌에 본을 두고 있는 프롤레타리아이기에 계급의식은 산업 프롤레타리아보다 발달되지 않았다. 동시에 농촌 프롤레타리아는 농촌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계층으로, 농촌의 진보를 추동할 수 있는 주도 세력이다.

; 영세농

영세농(零細農)은 자그마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농촌에서 여러 유통, 도매업에 종사하는 자영업자를 가리킨다. 이들은 토지 소유 규모가 매우 적고, 생활 양식에서 노동력 파생과 소생산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에 반(半)프롤레타리아라고 불린다. 이들의 의식은 일정 소부르주아와 공유하는 지점이 크지만, 엄연히 노동계급이 인입해야 하는 세력으로, 자유주의사회주의 혁명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

; 소농

소농(小農)은 소토지를 소유한 자영농을 가리키며, 소부르주아로 분류된다. 영세농과 다른 점은, 영세농은 다양한 분야의 업종과 노동 형태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며, 순수 농업 차원에서의 자립성이 존재하지 않으나, 소농은 순수 농업 차원에서의 자립성을 일정 향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농은 부농의 공격적인 토지 매입과,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언제든 도시나 농촌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떨어질 수 있는 운명에 처한 상태이다.

레닌은 소농이 소부르주아이며, 혁명성이 낮지만 프롤레타리아의 주요한 동맹으로서 자유주의 혁명뿐이 아닌, 사회주의 혁명에서도 노동계급이 인입해야 할 계층으로 여겼다. 그 이유는, 소농이 반(半)봉건 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위 계층의 부르주아에게 상당 부분의 이익을 침해당하고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농은 충분히 프롤레타리아의 경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언제든 프롤레타리아적 계급의식을 갖출 수 있는 존재라고 판단할 수 있다.

멘셰비키와 레닌의 볼셰비키는 소농이 사회주의 혁명에서까지 포섭될 수 있는 계층인가에 대한 문제로 상당한 논쟁을 벌였다. 멘셰비키파는 소농을 엄연한 부르주아이며, ‘노동계급의 적’이라고 보았으나, 레닌은 소농이 토지 자본 차원에서 부농 또는 일정 단계의 자본 수준에 이른 중농을 따라잡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기에 장기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의 동조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레닌은 소농이 표면적으로는 소부르주아이나, 장기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의 성격을 가진다고 하였다.

; 중농

중농(中農)은 중규모 토지를 소유한 자영농이며, 소부르주아로 분류된다. 농촌에서 불균형 발전 이론에 따르면, 중농은 부농으로 올라갈 수도, 아니면 빈농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중농은 소시민적 사고가 매우 강하기에 그들 스스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어떻게든 노력한다면 부유한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으며, 일정 의식을 부르주아와 공유하는 습성이 존재한다. 이들은 한편, 농촌에 존재하는 반동분자의 선동에 취약한 계층이며, 그 결과 자유주의 혁명에서 일정 역할을 할 수 있을지라도, 사회주의 혁명에서는 노동계급의 적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하였다.

레닌은 소비에트 연방 성립 후 농촌 지역에 협동조합을 설립하였을 때, 중농을 격화된 계급 투쟁 없이 사회주의 조직에 흡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중농은 사회주의 혁명의 대열에 능동적으로 설 수 없으나, 사회주의 경제 조직 과정에서는 흡수될 수 있는 수동적인 성격을 가진 농민 계층이라고 분석한 것이다.

한편, 중농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서유럽과 동유럽 등에서 등장한 파시즘의 주요한 동맹자가 되었다.

; 부농

부농(富農)은 대토지를 소유한 자영농이며, 자본가 계급으로 분류된다. 레닌은 러시아의 부농이 사회주의 혁명에 찬동할 수 없으며, 자유주의 혁명 단계에서도 노동계급의 지도 없이는 긍정적인 기능을 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는 차르 체제에서 부농이 관료지주의 성격을 겸하며, 매판적이고 반동적인 부르주아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940년 마오쩌둥은 옌안 근거지에서 〈신민주주의론〉을 발표하면서, 노동계급이 신민주주의 혁명 과정에서 부농을 지도할 수 있으며, 양심적인 부농은 혁명의 동조자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마오쩌둥은 신민주주의 혁명에 참가하는 부농을 ‘민족 부르주아’ 범주에 포함시켰다. 신민주주의 혁명은 공산주의 혁명이 아닌 민주주의 혁명이자 민족 해방 전쟁으로, 레닌주의 이론으로도 부농이 이에 동조할 수 있다.

부농의 농업 자본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산업 자본가의 역량을 소화하며, 제한적인 자유주의 혁명 또는 개혁을 독점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융커 모델’의 주도자가 된다. 단, 융커 모델에서 사회의 자본주의화는 영국식 모델보다 훨씬 느리며, 오랜 기간 전(前)자본주의적 요소를 남긴다. 레닌은 이러한 국가의 대표적인 예시로 스페인을 언급했다.

한편, 부농은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운동을 탄압하는 반동 음모의 최대 후원 집단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레닌 사후 스탈린은 융커 모델에 따라 발전한 제국주의 단계의 자본주의 국가가 안정적인 초과 착취 달성을 위해 국내 혁명 운동에 대한 공공연한 테러를 주도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모델을 ‘농업파시즘’이라고 한다. 부농은 소비에트 연방에서 스탈린 주도로 1929년부터 실시한 농업 집산화에 매우 격렬하게 저항하였으며, 1930년대 중반 소비에트 연방 국내에서 완전히 소멸하였다.

3. 1. 빈농

빈농(貧農)은 농업 노동자와 극미한 토지를 소유한 자영농으로 분류된다. 전자는 농촌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후자는 농촌의 반(半)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분류된다. 빈농은 토지를 소유한 농민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가장 프롤레타리아에 가까운 농민이다.

빈농은 농촌에서 임차농 또는 농업 자본에 고용되어 농업 노동자로서 기능한다. 이들은 자유주의 및 사회주의 혁명에서 노동계급이 무조건 인입해야 할 계층으로, 노동력의 형태가 다를 뿐, 본질적으로 산업 프롤레타리아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농촌 프롤레타리아는 봉건적 유제가 상당히 남아 있는 농촌에 본을 두고 있는 프롤레타리아이기에 계급의식은 산업 프롤레타리아보다 발달되지 않았다. 동시에 농촌 프롤레타리아는 농촌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계층으로, 농촌의 진보를 추동할 수 있는 주도 세력이다.

3. 2. 영세농

영세농(零細農)은 자그마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농촌에서 여러 유통, 도매업에 종사하는 자영업자를 가리킨다. 이들은 토지 소유 규모가 매우 적고, 생활 양식에서 노동력 파생과 소생산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에 반(半)프롤레타리아라고 불린다. 이들의 의식은 일정 소부르주아와 공유하는 지점이 크지만, 엄연히 노동계급이 인입해야 하는 세력으로, 자유주의사회주의 혁명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

3. 3. 소농

소농(小農)은 소토지를 소유한 자영농을 가리키며, 소부르주아로 분류된다. 영세농과 다른 점은, 영세농은 다양한 분야의 업종과 노동 형태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며, 순수 농업 차원에서의 자립성이 존재하지 않으나, 소농은 순수 농업 차원에서의 자립성을 일정 향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농은 부농의 공격적인 토지 매입과,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언제든 도시나 농촌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떨어질 수 있는 운명에 처한 상태이다.

레닌은 소농이 소부르주아이며, 혁명성이 낮지만 프롤레타리아의 주요한 동맹으로서 자유주의 혁명뿐이 아닌, 사회주의 혁명에서도 노동계급이 인입해야 할 계층으로 여겼다. 그 이유는, 소농이 반(半)봉건 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위 계층의 부르주아에게 상당 부분의 이익을 침해당하고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농은 충분히 프롤레타리아의 경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언제든 프롤레타리아적 계급의식을 갖출 수 있는 존재라고 판단할 수 있다.

멘셰비키와 레닌의 볼셰비키는 소농이 사회주의 혁명에서까지 포섭될 수 있는 계층인가에 대한 문제로 상당한 논쟁을 벌였다. 멘셰비키파는 소농을 엄연한 부르주아이며, ‘노동계급의 적’이라고 보았으나, 레닌은 소농이 토지 자본 차원에서 부농 또는 일정 단계의 자본 수준에 이른 중농을 따라잡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기에 장기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의 동조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레닌은 소농이 표면적으로는 소부르주아이나, 장기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의 성격을 가진다고 하였다.

3. 4. 중농

중농(中農)은 중규모 토지를 소유한 자영농이며, 소부르주아로 분류된다. 농촌에서 불균형 발전 이론에 따르면, 중농은 부농으로 올라갈 수도, 아니면 빈농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중농은 소시민적 사고가 매우 강하기에 그들 스스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어떻게든 노력한다면 부유한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으며, 일정 의식을 부르주아와 공유하는 습성이 존재한다. 이들은 한편, 농촌에 존재하는 반동분자의 선동에 취약한 계층이며, 그 결과 자유주의 혁명에서 일정 역할을 할 수 있을지라도, 사회주의 혁명에서는 노동계급의 적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하였다.

레닌은 소비에트 연방 성립 후 농촌 지역에 협동조합을 설립하였을 때, 중농을 격화된 계급 투쟁 없이 사회주의 조직에 흡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중농은 사회주의 혁명의 대열에 능동적으로 설 수 없으나, 사회주의 경제 조직 과정에서는 흡수될 수 있는 수동적인 성격을 가진 농민 계층이라고 분석한 것이다.

한편, 중농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서유럽과 동유럽 등에서 등장한 파시즘의 주요한 동맹자가 되었다.

3. 5. 부농

부농(富農)은 대토지를 소유한 자영농이며, 자본가 계급으로 분류된다. 레닌은 러시아의 부농이 사회주의 혁명에 찬동할 수 없으며, 자유주의 혁명 단계에서도 노동계급의 지도 없이는 긍정적인 기능을 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는 차르 체제에서 부농이 관료지주의 성격을 겸하며, 매판적이고 반동적인 부르주아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940년 마오쩌둥은 옌안 근거지에서 〈신민주주의론〉을 발표하면서, 노동계급이 신민주주의 혁명 과정에서 부농을 지도할 수 있으며, 양심적인 부농은 혁명의 동조자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마오쩌둥은 신민주주의 혁명에 참가하는 부농을 ‘민족 부르주아’ 범주에 포함시켰다. 신민주주의 혁명은 공산주의 혁명이 아닌 민주주의 혁명이자 민족 해방 전쟁으로, 레닌주의 이론으로도 부농이 이에 동조할 수 있다.

부농의 농업 자본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산업 자본가의 역량을 소화하며, 제한적인 자유주의 혁명 또는 개혁을 독점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융커 모델’의 주도자가 된다. 단, 융커 모델에서 사회의 자본주의화는 영국식 모델보다 훨씬 느리며, 오랜 기간 전(前)자본주의적 요소를 남긴다. 레닌은 이러한 국가의 대표적인 예시로 스페인을 언급했다.

한편, 부농은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운동을 탄압하는 반동 음모의 최대 후원 집단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레닌 사후 스탈린은 융커 모델에 따라 발전한 제국주의 단계의 자본주의 국가가 안정적인 초과 착취 달성을 위해 국내 혁명 운동에 대한 공공연한 테러를 주도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모델을 ‘농업파시즘’이라고 한다. 부농은 소비에트 연방에서 스탈린 주도로 1929년부터 실시한 농업 집산화에 매우 격렬하게 저항하였으며, 1930년대 중반 소비에트 연방 국내에서 완전히 소멸하였다.

4. 나로드니키주의와 멘셰비키에 대한 비판

블라디미르 레닌은 '혁명의 제1단계'(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 1905년 ~ 1917년 2월)와 '혁명의 제2단계'(사회주의혁명, 1917년 4월 ~ 1917년 10월)를 구분한 다음, 전자에서는 전체 농민과의 동맹, 후자에서는 빈농과의 동맹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노농동맹을 노선을 주장했다.

1907년에 저술을 완료한 『농업문제와 소위 '마르크스비판'』[4]에서 농민의 혁명성을 인정하였다. 그는 농민의 경제사적 역할과 재화 소유 방식을 분석했을 때, 그들은 기본적으로 소부르주아적 성격을 갖고 있지만, 토지를 사회주의적 경제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역사성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농민을 '농촌 프롤레타리아'와 '농촌 부르주아'로 분류하고, 전자와의 협력을 추구한 것이다.[5]

레닌은 사회주의에 적합한 농업 생산관계 형태가 노동집약적 산업과는 별도로, 또는 서로 연계된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자본주의 농업 발전의 두 가지 길'이라는 이론을 내세웠다. 첫 번째는 당시 농업생산력이 높았던 프랑스를 기준으로, 대토지 소유자가 온건적인 개혁 정책을 전개하여 자본주의화를 앞당기는 것이다. 이러한 발전 양상은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이 주도하였다. (레닌은 이를 ‘융커 모델’이라고 칭한다) ― 훗날, 레프 트로츠키는 자신의 저서 『노동자국가, 테르미도르 그리고 보나파르티즘』(Рабочее государство, термидор и бонапартизм영어)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군사국가화와 농업 집산화 등의 정책을 '보나파르트주의'라고 칭했는데, 바로 이 맥락에서 쓰인 것이다. ― 두 번째는, 식민지 곡물을 이출하여 국내 지대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 경우 광범위한 자영농 계층은 붕괴하고 다수의 농업노동자인 빈농을 파생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자본주의 발전은 프랑스의 그것보다 더욱 급진적으로 이뤄진다. 이 경로는 바로 영국의 모델이다. 그는 스페인이탈리아가 거친 자본주의화하의 지대 문제도 과학적으로 규명하였다.[6] 그는 봉건적 토지 소유 제도도 또한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맞아들면서 기존의 '소수의 대지주와 압도다수의 소농'으로 대표되는 봉건적 농업 체계가 흔들리고 소규모 자영농이 일반화 된 자본주의적 농업 구조로 발전한다는 것을 실증하였다.

이후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의 농업 경제도 잉여가치 독식이라는 현상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기에, 농민도 또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향하는 과도기적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성격을 일정 수준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는 1917년 2월 혁명의 이후 성립된 자본주의적 농업 소유 구조는 더 진보된 농업 경제 구조화를 막는 원인이 되었다고 하였다. 사회주의혁명 달성 후 블라디미르 레닌1920년 8월 7일 코민테른 2차 대회에서 혁명적 농민을 빈농·소농·영세농으로 규정하였고, 중농과 부농은 이에 포함하지 않았다. 즉, 단순히 농업노동자가 아닌, 자립 불가능할 정도의 자영 영세농도 또한 혁명성이 존재하는 혁명적 농민으로 취급한 것이다.

{{Quotation|전세계 자본주의국가들에서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반드시''' 투쟁으로 인도해야 할, 혹은 적어도 자기 편으로 인입해야 할 농촌의 근로대중과 피착취 대중은 아래와 같은 계급들이다.

# 자본주의적 농업 기업에서 임금노동으로 자기의 생활자료를 얻어내는 임금노동자(1년 고용자·계정 고용자·납품팔이꾼)들인 농업 프롤레타리아.

# 반(半)프롤레타리아 혹은 영세 농민, 다시 말하면 자기의 생활자료를, 일부는 농업 및 산업자본 기업에서의 임금노동에서 얻으며, 또 다른 일부는 자기 가족을 먹여살리는 식료품의 일부를 주는 데 불과한 한 조각의 자기 소유지 또는 소작지에서 노동하는 것으로 얻는 농민들.

# 소농, 다시 말하면 자기 가족 및 자기 농사의 수요를 충족하는데 남의 노동력을 고용하지 않는 낮은 규모의 경지를 소유한 혹은 소작권에 의하여 점유하고 있는 소토지 소유자.|블라디미르 레닌, 1920년 8월 7일 코민테른 2차 대회 「농업문제에 관한 테제」에서[7]}}

농업의 자본주의화는 봉건적 농업에 비해 진보된 것이나, 농업 노동력의 착취는 여전하며, 대다수 농민은 언제든 자립 불가능한 수준의 소농으로 전락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전체적으로 농업 생산력은 정체기를 맞을 것이기에 농민과 농업의 빈곤화라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는 자본주의사회하에서 농민이 산업노동자와 같은 혁명의 유적존재로서 거듭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된다. 토지의 사회주의화는 자본주의사회하에서 빈농의 인간해방을 위한 것이기에, 블라디미르 레닌은 빈농의 혁명성을 중시하였고,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이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농업의 하부 구조 변혁은 상업 이후의 산업이라는 공간의 변혁 속도에 비해서 매우 늦고 둔감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이는 즉, 농민이 혁명적 변화에 있어서 근로대중보다 느릴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한 것이다. 이 사실에 근거하여 볼셰비키, 멘셰비키, 나로드니키주의자들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분파자본주의사회하 농민의 역사적 성격자본주의사회하 농민의 혁명성자본주의적 농업 생산 구조에 대한 평가농업 문제의 해결법사회주의적 농업 생산 구조의 가능성
볼셰비키부르주아·소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인정발전토지국유제(土地國有制)가능
멘셰비키부르주아·소부르주아불인정발전소농자치제(小農自治制)불가능
나로드니키주의자공산주의 형성의 주체인정퇴보토지공유제(土地公有制)원시적 농업 공동체를 사회주의/공산주의의 기반이라고 평가



소비에트 정부 성립 이후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노농정부인가?"라는 논쟁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비에트 정부가 노농동맹에 입각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노농정부라고 불릴 수 있다고 하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논의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Diktatur des Proletariatsde)는 노동자(산업프롤레타리아를 포함한 광범한 노동계급)·농민(빈농·소농·영세농)의 동맹에 기초한 사회주의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트로츠키주의의 경우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하여 '노동자국가'(Workers' State)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4. 1. 나로드니키주의 비판

19세기 말 러시아에서 발생한 브 나로드에서 파생된 나로드니키주의(Народничество)는 농촌 공동체를 이상화하고 자본주의 발전을 부정했다.[9] 당시 러시아 인민주의자들은 자본주의적 농업 소유 구조를 악(惡)으로 규정하고, 원시적 농업 형태를 공산주의적 공동체의 전형으로 보았다.[9]

블라디미르 레닌은 유럽 국가의 산업 발전과 농업 구조 변혁을 검토하고, 마르크스주의 지대 이론에 따라 자본주의적 농업 구조가 봉건적 농업 구조보다 발전된 양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부농, 소규모 자영농, 임차농, 농업 프롤레타리아가 혼재하고 경자유전의 원칙이 지켜지는 자본주의 농업이 산업 발전을 촉진하며, 지주의 권한을 약화시켜 인민의 생산수단 접근성을 높인다고 보았다.[9]

이러한 관점에서 레닌은 러시아 인민주의자들이 경제 문제에 도덕주의를 씌웠다고 비판하며, 이는 소유 구조의 발전 과정을 고려하지 않은 공상적 사회주의와 유사하다고 평가했다.[9] 그는 자본주의 발전을 통한 농업 생산력 증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4. 2. 멘셰비키 비판

율리 마르토프와 레프 트로츠키를 비롯한 멘셰비키는 농민을 소부르주아 계급으로 규정하고 혁명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다.[10] 이들은 농업이 중세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넘어오는 과도기적 단계에서 발전성을 다했으며,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산업 노동자에게 달려있다고 보았다. 농민은 토지라는 생산수단을 소유했기에 부르주아 또는 소부르주아로 취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10]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러한 멘셰비키의 주장을 비판했다. 레닌은 자본주의 농업 구조에서 수익이 소수의 자영농에게 몰리고, 부농은 다수의 소농에게 농지를 임대하여 농지가 '허용받은 프롤레타리아가 다루는 (부르주아의)생산수단'으로 전환된다고 분석했다.[10] 즉, 토지를 임차한 임차농은 봉건 사회의 농노나 소작농과 다를 바 없으며, 이들의 수가 지주(부농)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다. 멘셰비키가 소농을 포함한 모든 농민을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로 규정하여 타도 대상으로 본 것은 현실과 맞지 않으며 마르크스주의와도 관련이 없다고 비판했다.[10]

또한 레닌은 농업이 공산제에서 노예제로, 노예제에서 봉건제로 넘어올 때 항상 변혁을 겪었으며,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이러한 변화가 사라진다는 보장은 없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농업 소유 구조는 농업 생산 구조의 완벽한 모습이라고 하기 어려우며, 농지 임대 금지는 농업생산력을 감소시키는 요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자본주의하 농업 구조는 다수의 소농과 극소수 부농의 양극화, 또는 생산력 감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구조이며, 이는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산업 발전 구조와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10]

레닌은 '스스로의 노동이 경제적 기득권에 의해 잉여가치로 전유될 수 있거나, 실제 이런 상태에 있는 모든 계층', 즉 자본주의 국가에서 경제적 약자에게 혁명성을 부여했다. 1908년 저술된 『마르크스주의와 수정주의』에서 레닌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 외에도 광범한 소부르주아와 소소유자층이 존재하며, 새로운 '중간층'들이 자본주의에 의해 생겨나고 이들이 프롤레타리아 대열로 내던져진다고 언급했다. 그는 소부르주아적 세계관이 노동자 대열 내에서 계속 고개를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주장했다.[11]

결과적으로, 노동자와 빈농뿐 아니라 영세 자영업자, 지식인도 혁명성이 있는 존재로 취급될 수 있다는 것이다. 멘셰비키의 입장은 훗날 트로츠키주의가 그대로 고수했는데, 이들은 '노동자에 의해 지도되는 농민'만이 가능하며, 대등한 위치에서의 노농동맹은 불가능하고, 혁명의 동력은 오직 산업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론을 내세웠다.[12] 로자 룩셈부르크 또한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객관적 조건을 형성하기 위해 농업자본을 희생시켜야 한다."라는 농업희생론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멘셰비키와 같은 입장이었다.

5. 소비에트 연방 성립 이후 농민 정책

블라디미르 레닌은 협동조합을 통한 사회주의화를 다그쳤으며,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에서 농민 일반이 노동계급과 대립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같은 볼셰비키 내 분파인 좌익공산주의파에 커다란 비판을 받았다.[13]

좌익공산주의파는 초공업화론(超工業化論)을 주장하며, 노동계급이 농민을 수탈하여 공업화의 본원적 축적을 달성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주장의 대표적인 옹호자는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첸스키/Евге́ний Преображе́нскийru(1886 - 1937)로, 그는 볼셰비키 내 초공업화론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 당시 레프 트로츠키도 프레오브라첸스키의 초공업화론에 동의하고 레닌에 반대하였다.

레닌은 좌익공산주의파의 주장에 대해 “노동계급과 농민 사이의 불필요한 계급 투쟁을 격화시키는 주장”이라고 비판하였다.[13]

5. 1. 신경제정책 (NEP)

레닌은 협동조합을 통한 사회주의화를 다그쳤으며,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에서 농민 일반이 노동계급과 대립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13]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같은 볼셰비키 내 분파인 좌익공산주의파에 커다란 비판을 받았다.[13]

좌익공산주의파는 초공업화론(超工業化論)을 주장하며, 노동계급이 농민을 수탈하여 공업화의 본원적 축적을 달성해야 함을 강조하였다.[13] 이러한 주장의 대표적인 옹호자는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첸스키/Евге́ний Преображе́нскийru(1886 - 1937)로, 그는 볼셰비키 내 초공업화론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 당시 레프 트로츠키도 프레오브라첸스키의 초공업화론에 동의하고 레닌에 반대하였다.

레닌은 좌익공산주의파의 주장에 대해 “노동계급과 농민 사이의 불필요한 계급 투쟁을 격화시키는 주장”이라고 비판하였다.[13]

5. 2. 농업 집단화

레닌은 협동조합을 통한 사회주의화를 다그쳤으며,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에서 농민 일반이 노동계급과 대립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같은 볼셰비키 내 분파인 좌익공산주의파/Ле́вые коммуни́стыru에 커다란 비판을 받았다.[13]

좌익공산주의파는 초공업화론(超工業化論)을 주장하며, 노동계급이 농민을 수탈하여 공업화의 본원적 축적을 달성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주장의 대표적인 옹호자는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첸스키/Евге́ний Преображе́нскийru(1886 - 1937)로, 그는 볼셰비키 내 초공업화론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 당시 레프 트로츠키도 프레오브라첸스키의 초공업화론에 동의하고 레닌에 반대하였다.

레닌은 좌익공산주의파의 주장에 대해 “노동계급과 농민 사이의 불필요한 계급 투쟁을 격화시키는 주장”이라고 비판하였다.[13]

6. 한국 근현대사에서의 농민 문제

6. 1. 동학 농민 혁명

6. 2. 일제강점기 농민 운동

6. 3.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토지 정책

6. 4. 해방 이후 농지 개혁

7. 현대 한국 사회에서의 농민

7. 1. 농촌 공동화와 고령화

7. 2. 농산물 시장 개방과 농가 소득 감소

7. 3. 더불어민주당의 농업 정책

참조

[1] 논문 The genesis of the capitalist farmer: towards a Marxist accounting history of the origins of the English agricultural revolution Warwick Business School, University of Warwick, Coventry CV4 7AL, UK 2003
[2] 문서
[3] 서적 Facing Reality 1974
[4] 서적 사회민주주의의 농업강령
[5] 서적 사회민주주의의 농업강령 백두 1989
[6] 서적 사회민주주의의 농업강령 백두 1989
[7] 서적 노농동맹과 농민문제 학민사 1989
[8] 서적 노농동맹과 농민문제 학민사 1989
[9] 서적 사회민주주의의 농업강령 백두 1989
[10] 서적 사회민주주의의 농업강령 백두 1989
[11] 서적 레닌저작집 4-3 전진 1991
[12] 웹사이트 Итоги и перспективы. Глава 5. Пролетариат у власти и крестьянство http://www.1917.com/[...] 1906
[13] 웹인용 On Cooperation https://www.marxists[...] 20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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