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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바 칸시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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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누에바 칸시온은 20세기 중반 라틴 아메리카에서 발생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음악 운동이다. 멕시코 혁명과 아르헨티나의 아타우알파 유판키 등의 영향을 받아 1960년대 아르헨티나에서 '새로운 노래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며, 칠레, 쿠바 등 여러 국가로 확산되었다. 칠레에서는 비올레타 파라, 빅토르 하라 등이 중심이 되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1973년 쿠데타로 인해 탄압을 받기도 했다. 이후 군사 정권의 붕괴와 함께 부활하였으며, 현재까지 라틴 아메리카의 좌익 운동과 연관되어 계승되고 있다. 음악적으로는 라틴 아메리카 민속 음악의 영향을 받았으며, 사회, 정치적 주제를 다루는 가사와 풍자적인 스타일을 특징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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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에바 칸시온 - 킬라파윤
    킬라파윤은 1965년 칠레에서 결성되어 안데스 음악을 기반으로 누에바 칸시온 칠레나 운동에 영향을 미치고 칠레 쿠데타 이후 망명 생활을 하며 저항의 노래로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민중음악 그룹이다.
  • 누에바 칸시온 - 빅토르 하라
    빅토르 하라는 칠레의 싱어송라이터, 연극 연출가, 정치 활동가로서 누에바 칸시온 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었으나, 1973년 피노체트 쿠데타 이후 체포되어 고문 끝에 살해당하며 칠레의 어두운 역사를 상징하는 인물이자 민주주의와 인권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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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틴 재즈는 쿠바, 브라질 등 라틴 아메리카 리듬과 미국 재즈의 즉흥성이 결합된 음악으로, 1940년대 아프로-쿠반 재즈를 시작으로 룸바, 맘보, 살사 등 다양한 리듬을 기반으로 발전하여 독자적인 음악적 정체성을 구축했으며, 현대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재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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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룸바는 쿠바에서 유래한 아프리카계 문화 기반의 음악이자 춤으로, 사교 댄스와 국제 볼룸 댄스의 한 종류이며 쿠바 전통 룸바와 사교 댄스 룸바로 나뉘고, 쿠바의 룸바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누에바 칸시온
명칭
언어별 명칭스페인어:
일본어: ヌエバ・カンシオン
한국어: 누에바 칸시온
로마자 표기Nueva canción
기본 정보
스타일의 기원라틴 아메리카의 민속 음악
문화적 기원1960년대
파생 장르누에보 칸토
융합 장르해당 없음
지역적 배경아르헨티나
브라질
볼리비아
칠레
콜롬비아
쿠바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멕시코
니카라과
파라과이
페루
포르투갈
스페인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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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정보
설명누에바 칸시온 운동은 1950년대 후반부터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싹튼 뒤 그 범위가 넓어져 카리브해와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확산된 민족문화운동이었다. 시작 초기에는 전통민속문화에 대한 연구와 채집, 보급이 중심이었다. 칠레에서는 파블로 네루다의 권유로 비올레따 빠라에 의해 시작됐다. 이런 노력은 점차 자신들의 문화가 단순히 스페인 등 유럽에서 이식되어 온 것이 아니라 안데스 고산지대에서 300여년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잉카조상의 후예 인디오 문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각성으로 이어졌다. 칠레 민중들의 정체성을 찾아낸 것이다. 민중들에게 강렬한 호소력을 지닌 이 운동이 써내려간 노랫말과 인디오의 선율들은 라틴 아메리카 대륙의 수백년 역사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1970년대에는 이미 라틴 아메리카 민족운동의 큰 줄기로 자리 잡았다. 가난한 민중들을 억압하는 제도, 집단, 계급, 문화를 추방하는 운동으로 발전하면서 독재정권과 지배자들의 기반을 허무는데 큰 몫을 했다. 정치에서 종속을 거부하고, 경제에서 착취를 반대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화에서 정체불명의 제국주의 문화 침투를 배격하는 문화예술인들의 이러한 저항운동에는 당연히 혹독한 탄압과 희생이 뒤따랐다.
누에바 칸시온은 칠레의 음악, 라틴아메리카만의 음악이 아닌 세계의 음악으로서, '제3세계를 포함한 전 세계 민중이 인종과 종교, 가치와 신념을 초월해 공감할 수 있는 공통의 음악 언어'로 재정의할 수 있다. 아따우알빠 유빵끼를 '누에바 칸시온의 아버지'라 한다면 비올레따 빠라는 '누에바 칸시온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빅토르 하라는 바로 비올레따 빠라의 사상, 이념, 노래운동의 진정한 계승자라 할 수 있다.
"칠레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의 삶과 노래《내 마음속의 굴렁쇠》"

2. 역사적 배경

20세기 초 멕시코 혁명에서 이미 혁명을 노래한 수많은 노래가 불려졌으며, 누에바 칸시온의 기원이라고 할 만한 것에는 긴 역사가 있다. 또한, 1920년대부터 활동한 아르헨티나의 가수 아타우알파 유판키도 후대의 누에바 칸시온에 영향을 주는 노래를 많이 불렀다. “누에바 칸시온”이라는 명칭은 1962년 아르헨티나에서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 등이 결성한 “새로운 노래 운동”이 최초로 여겨진다. 거의 동시에 쿠바와 칠레에서도 유사한 운동이 활발해졌다. 특히 칠레에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3년까지 비올레타 파라빅토르 하라를 중심으로 많은 뛰어난 음악가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칠레에서는 1973년 9월 쿠데타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사정권이 수립되자, 누에바 칸시온은 큰 탄압을 받았다. 빅토르 하라는 살해당했으며, 다른 많은 음악가들도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거나 국외 추방되어 운동은 일시적으로 침체되었다. 1976년에는 아르헨티나에서도 쿠데타가 일어나, 군사정권의 인권 탄압으로 메르세데스 소사를 비롯한 아르헨티나 누에바 칸시온의 중심 인물들이 국외 망명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는 대부분의 국가가 군사 정권 하에 있었고, 쿠바멕시코를 제외한 라틴 아메리카 각국의 누에바 칸시온은 암흑기를 맞이했다.

한편 1979년 산디니스타 혁명 이후 니카라과에서는 메히아 고도이 형제 등을 중심으로 누에바 칸시온이 번영을 맞이했다. 또한, 1982년 아르헨티나, 1990년 칠레에서 군정이 무너지고, 그 전후 시기에 다시 누에바 칸시온 운동이 활기를 띠면서 반군정 활동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에서는 6년, 칠레에서는 15년 동안 지속된 군정 기간 동안 국외로 망명했던 유명 음악가들과 국내에서 활동했던 음악가들 사이에는 음악적 경향의 차이가 생겼다. 70년대까지 활동하다 망명을 강요당한 음악가들은 전통적인 민족 음악(포르크로레)을 기반으로 했던 반면, 군정 하에 국내에서 활동했던 음악가들은 오히려 등 서구 기원의 음악을 기반으로 변화해 갔다. 이는 각자의 사회적, 음악적 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후자, 국내에서 활동을 계속한 음악가들의 활동을 누에보 칸토(Nuevo canto, 의미는 누에바 칸시온과 같지만 단어 순서를 바꾼 것)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2. 1. 1950-60년대: 민속 음악 부흥과 누에바 칸시온의 탄생

20세기 초 멕시코 혁명에서는 이미 혁명을 노래한 수많은 노래가 불려졌으며, 누에바 칸시온의 기원이라고 할 만한 것에는 긴 역사가 있다. 또한, 1920년대부터 활동한 아르헨티나의 가수 아타우알파 유판키도 후대의 누에바 칸시온에 영향을 주는 노래를 많이 불렀다. “누에바 칸시온”이라는 명칭은 1962년 아르헨티나에서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 등이 결성한 “새로운 노래 운동”이 최초로 여겨진다. 거의 동시에 쿠바와 칠레에서도 유사한 운동이 활발해졌다. 특히 칠레에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3년까지 비올레타 파라빅토르 하라를 중심으로 많은 뛰어난 음악가들이 등장했다.

2. 2. 1960-70년대: 누에바 칸시온의 확산과 탄압

20세기 초 멕시코 혁명에서는 이미 혁명을 노래한 수많은 노래가 불려졌으며, 누에바 칸시온의 기원이라고 할 만한 것에는 긴 역사가 있다. 또한, 1920년대부터 활동한 아르헨티나의 가수 아타우알파 유판키도 후대의 누에바 칸시온에 통하는 노래를 많이 불렀다. “누에바 칸시온”이라는 명칭은 1962년 아르헨티나에서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 등이 결성한 “새로운 노래 운동”이 최초로 여겨진다. 거의 동시에 쿠바와 칠레에서도 유사한 운동이 활발해졌다. 특히 칠레에서는 60년대 후반부터 1973년까지 비올레타 파라빅토르 하라를 중심으로 많은 뛰어난 음악가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칠레에서는 1973년 9월 칠레 쿠데타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사정권이 수립되자, 누에바 칸시온은 큰 탄압을 받았다. 빅토르 하라는 살해당했으며, 다른 많은 음악가들도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거나 국외 추방되어 운동은 일시적으로 침체되었다. 1976년에는 아르헨티나에서도 쿠데타가 일어나, 군사정권의 인권 탄압으로 메르세데스 소사를 비롯한 아르헨티나 누에바 칸시온의 중심 인물들이 국외 망명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는 대부분의 국가가 군사 정권 하에 있었고, 쿠바와 멕시코를 제외한 라틴 아메리카 각국의 누에바 칸시온은 암흑기를 맞이했다.

한편 1979년 산디니스타 혁명 이후 니카라과에서는 메히아 고도이 형제 등을 중심으로 누에바 칸시온이 번영을 맞이했다. 또한, 1982년 아르헨티나, 1990년 칠레에서 군정이 무너지고, 그 전후 시기에 다시 누에바 칸시온 운동이 활기를 띠면서 반군정 활동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에서는 6년, 칠레에서는 15년 동안 지속된 군정 기간 동안 국외로 망명했던 유명 음악가들과 국내에서 활동했던 음악가들 사이에는 음악적 경향의 차이가 생겼다. 70년대까지 활동하다 망명을 강요당한 음악가들은 전통적인 민족 음악(포르크로레)을 기반으로 했던 반면, 군정 하에 국내에서 활동했던 음악가들은 오히려 등 서구 기원의 음악을 기반으로 변화해 갔다. 이는 각자의 사회적, 음악적 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후자, 국내에서 활동을 계속한 음악가들의 활동을 누에보 칸토(Nuevo canto, 의미는 누에바 칸시온과 같지만 단어 순서를 바꾼 것)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2. 3. 1970-80년대: 저항과 암흑기

쿠데타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사정권이 수립되자, 누에바 칸시온은 큰 탄압을 받았다. 빅토르 하라는 살해당했으며, 다른 많은 음악가들도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거나 국외 추방되어 운동은 일시적으로 침체되었다. 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로 군사정권의 인권 탄압으로 메르세데스 소사를 비롯한 아르헨티나 누에바 칸시온의 중심 인물들이 국외 망명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는 대부분의 국가가 군사 정권 하에 있었고, 쿠바멕시코를 제외한 라틴 아메리카 각국의 누에바 칸시온은 암흑기를 맞이했다.

산디니스타 혁명 이후 니카라과에서는 메히아 고도이 형제 등을 중심으로 누에바 칸시온이 번영을 맞이했다. 1982년 아르헨티나와 1990년 칠레에서 군정이 무너지고, 그 전후 시기에 다시 누에바 칸시온 운동이 활기를 띠면서 반군정 활동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에서는 6년, 칠레에서는 15년 동안 지속된 군정 기간 동안 국외로 망명했던 유명 음악가들과 국내에서 활동했던 음악가들 사이에는 음악적 경향의 차이가 생겼다. 70년대까지 활동하다 망명을 강요당한 음악가들은 전통적인 민족 음악(포르크로레)을 기반으로 했던 반면, 군정 하에 국내에서 활동했던 음악가들은 오히려 록 음악 등 서구 기원의 음악을 기반으로 변화해 갔다. 이는 각자의 사회적, 음악적 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후자, 국내에서 활동을 계속한 음악가들의 활동을 누에보 칸토(Nuevo canto, 의미는 누에바 칸시온과 같지만 단어 순서를 바꾼 것)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2. 4. 1980-90년대: 민주화와 누에바 칸시온의 부활

1979년 산디니스타 혁명 이후 니카라과에서는 메히아 고도이 형제 등을 중심으로 누에바 칸시온이 번영을 맞이했다. 1982년 아르헨티나, 1990년 칠레에서 군정이 무너지고, 그 전후 시기에 다시 누에바 칸시온 운동이 활기를 띠면서 반군정 활동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에서는 6년, 칠레에서는 15년 동안 지속된 군정 기간 동안 국외로 망명했던 유명 음악가들과 국내에서 활동했던 음악가들 사이에는 음악적 경향의 차이가 생겼다. 70년대까지 활동하다 망명을 강요당한 음악가들은 전통적인 민족 음악(포르크로레)(folclore)를 기반으로 했던 반면, 군정 하에 국내에서 활동했던 음악가들은 오히려 등 서구 기원의 음악을 기반으로 변화해 갔다. 이는 각자의 사회적, 음악적 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후자, 국내에서 활동을 계속한 음악가들의 활동을 누에보 칸토(Nuevo canto, 의미는 누에바 칸시온과 같지만 단어 순서를 바꾼 것)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2. 5.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와 누에바 칸시온의 변화

소련 붕괴와 그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의 부상으로, 사회주의적 정치 성향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누에바 칸시온 운동은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과거 누에바 칸시온의 선구자들 중에는 현재 정치적·사회적 주장을 포기했다고 여겨지는 음악가들도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경제로 인한 빈부 격차 확대에 대한 반발로 90년대 후반 이후 라틴 아메리카는 급격한 좌경화가 진행되었고, 그에 따라 누에바 칸시온은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다. 특히, 이제 쿠바를 대신하여 라틴 아메리카 좌익 운동의 진원지가 된 베네수엘라에서는 누에바 칸시온의 번영이 두드러진다.

3. 각국의 누에바 칸시온


  • 칠레
  • * 빅토르 하라 (Víctor Jara)
  • * 비올레타 파라 (Violeta Parra)
  • * 안헬 파라 (Ángel Parra) (비올레타 파라의 아들, 군사독재 시절 프랑스로 망명)
  • * 킬라파윤 (Quilapayún) (1965년 결성, 군사독재 시절 프랑스로 망명)
  • * 인티 일리마니 (Inti-Illimani)
  • * 이야푸 (Illapu) (1972년 결성, 군사독재 시절 초기에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1980년 망명하여 멕시코로 이주)

  • 볼리비아
  • * 사비아 누에바 (Savia Nueva)
  • * 루이스 리코 (Luis Rico)
  • * 하이메 후나로 (Jaime Junaro)
  • * 세사르 후나로 (César Junaro)
  • * 에마 후나로 (Emma Junaro)

  • 페루
  • * 타니아 리베르타 (Tania Libertad) (주로 멕시코에서 활동)

  • 베네수엘라
  • * 알리 프리메라 (Alí Primera)
  • * 솔레다드 브라보 (Soledad Bravo)

  • 니카라과
  • * 카를로스 메히아 고도이 (Carlos Mejía Godoy)
  • * 루이스 엔리케 메히아 고도이 (Luis Enrique Mejía Godoy)

  • 멕시코
  • * 암파로 오초아 (Amparo Ochoa Castaños)
  • * 로스 포르클로리스타스 (Los Folkloristas)

3. 1. 칠레: 누에바 칸시온 칠레나

비올레타 파라(Violeta Parra)는 1952년부터 농민들의 노래를 수집하기 시작했으며, 이사벨 파라(Isabel Parra)와 안헬 파라(Ángel Parra (singer-songwriter))는 문화 센터 페냐 데 로스 파라(Peña de los Parra)[7]를 설립하여 초기 누에바 칸시온 관련 주요 인물들이 모이는 장소를 제공했다.[8] 여기에는 파트리시오 만스(Patricio Manns), 빅토르 하라(Víctor Jara), 롤란도 알라르콘(Rolando Alarcón), 세르히오 오르테가(Sergio Ortega (composer)) 등이 참여했다.[8]

1968년 킬라파윤(Quilapayún)의 앨범 ''포르 베트남(Por Vietnam)''이 예상 외로 매진되면서 누에바 칸시온에 대한 대중적 수요가 확인되었고,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의 1970년 대선 운동은 누에바 칸시온 칠레나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빅토르 하라(Víctor Jara)의 "벤세레모스(Venceremos)" 등이 널리 사용되었다.[13] 아옌데 당선 후, 누에바 칸시온 예술가들은 칠레 내외에서 아옌데 지지 홍보에 활용되었으며,[13] 인티 일리마니(Inti-Illimani)와 킬라파윤(Quilapayún) 등은 정부 지원을 받았다.[14]

1973년 군사 쿠데타로 아옌데 정부가 전복되고, 빅토르 하라(Víctor Jara)는 고문 후 처형되었다.[17][18] 이는 칠레 역사에서 "아파곤 쿨투랄(Apagón Cultural)"(문화적 블랙아웃)로 불리는 시기의 시작이었다.[12]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정권은 누에바 칸시온 음반을 금지하고 예술가들을 탄압했다.[20]

1975년 말, 예술가들은 "안데스 바로크" 앙상블을 통해 제한을 우회하기 시작했고, 이 음악은 "칸토 누에보(Canto Nuevo)"로 불렸다.[12] 칸토 누에보는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은유적인 표현을 사용했으며, 1980년대에는 기술 발전과 규제 완화로 대중 앞에 나설 기회를 얻었다.[12]

오늘날 비올레타 파라(Violeta Parra)와 같은 인물들의 유산은 여전히 남아있으며, 그녀의 노래 "삶에 감사하며(Gracias a la Vida)"는 2010년 칠레 지진 이후 구호 기금을 모으기 위해 다시 녹음되기도 했다.[21] 2019년 칠레 시위에서는 누에바 칸시온이 다시 부활하는 모습을 보였다.[21]

3. 2. 아르헨티나: 누에보 칸시오네로

아르헨티나의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는 초기 누에바 칸시온(Nueva canción) 음악가 중 한 명이었다.


1967년 공연 중인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


아르헨티나에서 이 운동은 누에보 칸시오네로(Nuevo Cancionero)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으며, 1963년 2월 11일 아르헨티나 멘도사에서 14명의 예술가가 모여 누에보 칸시오네로 창립 선언문(Manifiesto Fundacional de Nuevo Cancionero)에 서명하면서 공식적으로 체계화되었다.[23] 음악가와 시인들이 모두 참석했으며, 특히 아르헨티나 운동은 음악과 문학이 결합된 것이었다. 아르만도 테하다 고메스(Armando Tejada Gomez)와 같은 작가들은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독창적인 시 형태로 이 운동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선언문의 서론은 누에보 칸시오네로의 뿌리를 민속 음악과 토착 전통의 재발견에서 아타왈파 유판키(Atahualpa Yupanqui)와 부에나벤투라 루나(Buenaventura Luna)의 작품, 그리고 시골 아르헨티나인들을 부에노스아이레스 수도로 이끈 도시 내부 이주에서 찾고 있다. 본문에서는 이 운동의 목표, 즉 아르헨티나 국민 음악에서 탱고-폴크 음악의 지배를 극복하고 순수 상업주의를 거부하는 국가적 노래의 발전을 개괄하고 있다. 대신 누에보 칸시오네로는 비판적 사고와 아이디어의 자유로운 교류를 장려하는 제도를 포용하려 했다.[23]

누에보 칸시오네로의 가장 유명한 지지자는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였다. 그녀는 1965년 코스킨 축제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아르헨티나 폴크 음악의 거장 호르헤 카프루네(Jorge Cafrune)가 무대에서 그녀를 신예로 지목한 후 누에보 칸시오네로를 대중에게 널리 알렸다.[24] 1967년, 소사는 미국과 유럽에서 첫 해외 순회 공연을 마쳤다.[25] 이 시대의 다른 주목할 만한 누에보 칸시오네로 예술가로는 티토 프랑시아(Tito Francia), 빅토르 에레디아(Víctor Heredia), 그리고 솔로 가수로 전향하기 위해 폴크 음악 그룹 로스 프론테리소스(Los Fronterizos)를 떠난 세사르 이셀라(César Isella)가 있다. 1969년 그는 아르만도 테하다 고메스의 시에 곡을 붙여 "모두를 위한 노래(Canción para todos)"를 만들었는데, 이 노래는 나중에 유네스코에 의해 라틴 아메리카의 찬가로 지정되었다.[26]

누에보 칸시오네로 예술가들은 아르헨티나의 1976년부터 1983년까지의 군사 독재 하에서 약 3만 명의 강제 실종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27] 추가적인 검열, 협박, 박해로 많은 예술가들이 망명 생활을 해야 했고, 그곳에서 라틴 아메리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더 자유롭게 알리고 비판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소사는 1979년 런던에서 열린 첫 번째 국제앰네스티 콘서트에 참여했으며, 계속해서 녹음하면서 이스라엘, 캐나다, 콜롬비아, 브라질에서도 공연을 했다.[28]

1983년 독재 정권이 무너진 후 아르헨티나 예술가들은 귀국하여 대규모 복귀 콘서트를 열었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스포츠 경기장과 공원을 가득 채웠다.[29] 해외 망명 생활에서 보낸 시간의 영향은 하모니카, 드럼 세트, 베이스 기타, 전자 키보드, 관악기 합주단, 백업 가수, 현악기(특히 더블 베이스와 바이올린)와 클래식, 재즈, 팝, 록, 펑크 사운드스케이프의 스타일리시하고 조화로운 영향을 통해 명확하게 나타났다. 특히 누에보 칸시오네로와 이념적으로 유사한 록 나시오날(Rock Nacional) 지지자들 사이에서 협업이 점점 더 일반화되었다.

누에보 칸시오네로 예술가들은 승리한 국가 정체성의 상징이 되었다.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가 사망했을 때, 그녀의 시신이 국가적 상징 중 가장 중요한 인물에게만 허용되는 영예인 대성당에 안치되자 수백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30] 누에보 칸시오네로 전통으로 적극적으로 작곡하는 음악가들의 공동체는 작지만, 누에보 칸시오네로 고전 음악의 녹음과 커버는 아르헨티나에서 여전히 인기가 있다.

3. 3. 쿠바: 누에바 트로바

누에바 트로바피델 카스트로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쿠바 혁명 이후 등장했다는 점에서 다른 국가의 누에바 칸시온과 구별된다.[31] 누에바 트로바는 전통적인 트로바(trova)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사회주의, 불의, 성차별, 식민주의, 인종차별 등과 같은 '심각한' 문제에 초점을 맞춘 '진보적'이고 정치화된 가사를 결합한 것이 특징이다.[31] 리우바 마리아 에비아(Liuba María Hevia)처럼 사랑과 고독 같은 전통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시적인 스타일의 가사를 사용한 예외도 존재한다. 후기 누에바 트로바 음악가들은 당시의 록 음악(rock music)과 팝 음악(pop music)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실비오 로드리게스파블로 밀라네스는 누에바 트로바의 가장 중요한 대표 인물이다. 카를로스 푸에블라호세이토 페르난데스는 오랫동안 트로바 가수로 활동하며 새로운 정권에 힘을 보탰는데, 카를로스 푸에블라는 혁명을 지지하는 특별한 노래를 작곡했다.[32]

카스트로 정부는 미국의 제국주의에 반대하거나 혁명을 지지하는 노래를 쓰는 음악가들에게 많은 지원을 제공했다.[33] 1967년 아바나의 카사 데 라스 아메리카스에서는 프로테스트송 페스티벌(Festival de la canción de protesta)이 열렸다.[33] 타니아 카스테야노스는 미국의 정치 운동가 앤젤라 데이비스를 지지하는 "¡Por Ángela!"를 작곡했고, 세사르 포르티요 데 라 루스는 "Oh, valeroso Viet Nam"을 작곡했다.[33] ICAIC의 음향 실험 그룹(Grupo de Experimentación Sonora del ICAIC, GES)과 같은 기관은 누에바 트로바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아마추어 쿠바 예술가들에게 음악 교육을 제공했다.

3. 4. 스페인: 노바 칸송

1950년대 후반 프랑코 독재 시대 스페인에서 카탈루냐어 음악을 장려했던 예술 운동인 누에바 칸시온(Nova Cançó)은 카탈루냐가 함락된 후 공개적인 사용이 금지되었던 카탈루냐어의 사용을 정상화하려고 했다.[34] 예술가들은 카탈루냐어를 사용하여 대중 음악에서 카탈루냐 정체성을 주장하고 프랑코 정권의 부정의를 규탄했으며, 음악적으로는 프랑스 샹송의 영향을 받았다.[34]

1957년, 작가 호세프 마리아 에스피나스(Josep Maria Espinàs)는 "우리 시대의 트루바두르"라고 부른 프랑스 싱어송라이터 조르주 브라상스(Georges Brassens)에 대한 강연을 했다.[37] 에스피나스는 브라상스의 노래를 카탈루냐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1958년에는 ''Hermanas Serrano cantan en catalán los éxitos internacionales'' 와 ''José Guardiola: canta en catalán los éxitos internacionales''라는 두 개의 EP가 발매되었는데,[35][36] 이들은 현재 카탈루냐어로 된 현대 음악의 최초 녹음으로 간주된다.[36] 폰트 셀라보나와 루디 벤투라와 같은 다른 가수들과 함께 이 가수들은 누에바 칸시온의 전조를 형성했다.[37]

호세프 베네트 이 데 죠안과 마우리시 세라히마의 제안으로 자우메 아르멩골, 루이스 세라히마, 미켈 포르테르로 구성된 그룹이 카탈루냐어 노래 작곡을 시작했다.[37] 1959년, 루이스 세라히마가 쓴 "Ens calen cançons d’ara" ("우리에게는 오늘의 노래가 필요하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Germinàbit''에 실린 후 더 많은 작가와 가수들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37] 미켈 포르테르, 호세프 마리아 에스피나스, 레메이 마가리트는 ''엘스 세트제 쥬제스(Els Setze Jutges)''(카탈루냐어로 열여섯 명의 판사)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그들의 첫 콘서트는 1961년 12월 19일 바르셀로나에서 열렸고,[34] ''엘스 세트제 쥬제스''라는 이름으로 처음 공연한 것은 1962년 프레미아 드 마르(Premià de Mar)였다.[34] 델피 아벨라(Delfí Abella)와 프란세스크 피 드 라 세라(Francesc Pi de la Serra)와 같이 그 후 몇 년 동안 새로운 가수들이 그룹에 합류하여 열여섯 명이 되었다.[34] 최초의 누에바 칸시온 레코드는 1962년에 등장했고, 많은 음악 밴드, 보컬 그룹, 싱어송라이터, 그리고 가수들이 이러한 추세를 따랐다.[34]

1963년, 카탈루냐의 전문 가수 살로메와 발렌시아 출신의 라이몬(Raimon)은 "Se’n va anar" ("떠났다")라는 노래로 제5회 지중해 노래 축제에서 1등을 수상했다.[38] 1966년 스페인 비평가상을 수상한 기예임 데파크(Guillem d'Efak)와 누리아 펠류(Núria Feliu), 그리고 엘스 세트제 쥬제스의 다른 신규 멤버들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34] 라이몬 외에도 엘스 세트제 쥬제스의 전 멤버들은 기예르미나 모타(Guillermina Motta), 프란세스크 피 드 라 세라, 마리아 델 마르 보넷(Maria del Mar Bonet), 루이스 랴크(Lluís Llach), 호안 마누엘 세랫(Joan Manuel Serrat)을 포함하여 성공적인 경력을 이어갔다. 발렌시아 출신의 오비디 몬트요르(Ovidi Montllor)과 같이 다른 중요한 인물들이 다소 늦게 등장했다.

3. 5. 니카라과

니카라과의 누에바 칸시온(''Nueva canción nicaragüense'') 음악가들은 산디니스타 혁명 기간 동안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대중의 이념적 동원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카를로스 메히아 고도이 y 로스 데 팔라카귀나는 이 장르의 대표적인 음악가로 꼽힌다.[1]

4. 음악적 특징

누에바 칸시온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음악 장르로, 대중 계층에 뿌리를 둔 가사와 풍자적인 스타일을 사용한다.[1] 빈곤, 제국주의, 인권 등 사회 정치적 주제를 다루며, 라틴 아메리카 정체성을 강조한다.[1]

음악적으로는 안데스 음악, 무시카 네그라, 스페인 음악, 쿠바 음악 등 라틴 아메리카 민속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1] 기타가 주로 사용되며, 케냐, 삼포냐, 차랑고, 카혼 등의 악기가 사용되기도 한다. 가사는 대부분 스페인어로 되어 있고, 일부 원주민 언어가 섞여 있으며, 코플라와 데시마 같은 시적 형식이 사용된다.[1]

누에바 칸시온은 좌익 정치와 관련이 깊으며, 카사 데 라스 아메리카스에서 주최한 1967년 칸시온 프로테스타 회의(Encuentro de la Canción Protesta)에서 "누에바 칸시온"이라는 용어가 채택되었다.[3][2] 195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민속 음악 붐" 속에서 발전했으며, 비올레타 파라와 아타왈파 유판키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1] 후안 페론의 국립 음악 보호 법령과 같은 법률적 지원도 있었다.[2]

1970년대까지 활동한 음악가들은 각국의 민족 음악을 기반으로 사회적 주장을 담거나, 새로운 멜로디와 화성을 도입하는 경향이 있었다. 누에바 칸시온은 포르크로레의 일부로 간주되기도 하며, 칠레에서는 볼리비아의 안데스 음악 요소를 도입하기도 했다.

군정 하에서 활동한 음악가들은 록 등 상업 음악에서 출발한 경우가 많았으며, 레온 지에코가 대표적인 예이다. 군정 이후에는 양자의 교류와 융합이 진행되어 차이가 줄어들었다.

5. 대표적인 노래

벤세레모스, 불굴의 민족, 평화롭게 사는 권리, 인생아 고마워, 티오 삼, 오직 신에게 기도할 뿐 등이 대표적인 누에바 칸시온 노래이다.

6. 누에바 칸시온 관련 인물


  • 칠레
  • * 빅토르 하라 (Víctor Jara)
  • * 비올레타 파라 (Violeta Parra)
  • * 안헬 파라 (Ángel Parra) (비올레타 파라의 아들, 군사독재 시절 프랑스로 망명)
  • * 킬라파윤 (Quilapayún) (1965년 결성, 군사독재 시절 프랑스로 망명)
  • * 인티 일리마니 (Inti-Illimani)
  • * 이야푸 (Illapu) (1972년 결성, 군사독재 시절 초기에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1980년 망명하여 멕시코로 이주)

  • 볼리비아
  • * 사비아 누에바 (Savia Nueva)
  • * 루이스 리코 (Luis Rico)
  • * 하이메 후나로 (Jaime Junaro)
  • * 세사르 후나로 (César Junaro)
  • * 에마 후나로 (Emma Junaro)

  • 페루
  • * 타니아 리베르타 (Tania Libertad) (주로 멕시코에서 활동)

  • 베네수엘라
  • * 알리 프리메라 (Alí Primera)
  • * 솔레다드 브라보 (Soledad Bravo)

  • 니카라과
  • * 카를로스 메히아 고도이 (Carlos Mejía Godoy)
  • * 루이스 엔리케 메히아 고도이 (Luis Enrique Mejía Godoy)

  • 멕시코
  • * 암파로 오초아 (Amparo Ochoa Castaños)
  • * 로스 포르클로리스타스 (Los Folkloristas)

6. 1. 칠레

칠레에서는 누에바 칸시온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빅토르 하라, 비올레타 파라와 같은 음악가들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비올레타 파라의 아들 안헬 파라는 군사독재 시절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1965년 결성된 킬라파윤 역시 군사독재 시절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인티 일리마니와 1972년 결성된 이야푸도 누에바 칸시온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야푸는 군사독재 초기에는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1980년 망명하여 멕시코로 이주하였다.

6. 2. 아르헨티나

아타우알파 유판키는 스스로 누에바 칸시온이라고 칭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누에바 칸시온 음악가로 분류된다. 메르세데스 소사, 레온 히에코, 빅토르 에레디아 등이 아르헨티나의 누에바 칸시온 음악가로 활동했다.

6. 3. 쿠바

쿠바에서는 파블로 밀라네스(Pablo Milanés)와 실비오 로드리게스(Silvio Rodríguez)가 누에바 칸시온 운동을 이끌었다.

6. 4. 베네수엘라

알리 프리메라(Alí Primera)와 솔레다드 브라보(Soledad Bravo)는 베네수엘라를 대표하는 누에바 칸시온 음악가들이다.

6. 5. 니카라과

카를로스 메히아 고도이(Carlos Mejía Godoy)와 루이스 엔리케 메히아 고도이(Luis Enrique Mejía Godoy) 형제가 대표적인 누에바 칸시온 음악가이다.

참조

[1] 서적 Socially Conscious Music Forming the Social Conscience: Nicaraguan música testimonial and the Creation of a Revolutionary Moment Routledge
[2] 학술지 La Nueva Canción Latinoamericana
[3] 웹사이트 Equipo de trabajo de la Casa de las Américas http://www.casa.cult[...] 2012-09-21
[4] 학술지 Cantautores Catalanas: De la Nova Canco a la Nova Canco D'ara. El paso y el peso del pasado.
[5] 뉴스 Violeta Parra, gracias a la vida por sus canciones https://elpais.com/c[...] 2017-10-04
[6] 웹사이트 Violeta Parra http://www.icarito.c[...] 2009-12-01
[7] 웹사이트 El olvido en que cayó la histórica casa que acogió la Peña de los Parra https://radio.uchile[...]
[8] 서적 Cantores que reflexionan: notas para una historia personal de la nueva canción chilena LAR
[9] 서적 Chilean New Song: The Political Power of Music Temple University Press 2015
[10] 학술지 Part II The Industry: 16. Recording: Record Labels/Companies: DICAP (Chile)
[11] 서적 Chilean New Song: The Political Power of Music Temple University Press 2015
[12] 학술지 Canto Porque es Necesario Cantar: The New Song Movement in Chile, 1973-1983
[13] 서적 Music, Politics, and Nationalism in Latin America: Chile During the Cold War Era Cambria Press
[14] 서적 Acting in Concert Rutgers University Press
[15] 서적 "Classified U.S. State Department Documents on the Overthrow of Chilean President Salvador Allende, 1973." In Voices of the U.S. Latino Experience https://go.gale.com/[...] Gale 2008
[16] 서적 "The Extradition of Chilean General Augusto Pinochet: Justice Delayed?" In History Behind the Headlines: The Origins of Conflicts Worldwide. https://go.gale.com/[...] Gale 2001
[17] 웹사이트 Jara v. Barrientos No. 6:13-cv-01426-RBD-GJK http://cja.org/artic[...] 2015-04-29
[18] 뉴스 Agony of Chile's dark days continues as murdered poet's wife fights for justice https://www.theguard[...] 2013-09-10
[19] 뉴스 Chile recognizes 9,800 more victims of Pinochet's rule https://www.bbc.com/[...]
[20] 서적 Chilean New Song: the Political Power of Music, 1960s-1973 Temple UP 2015
[21] 뉴스 "El derecho de vivir en paz": Standing in solidarity with Chile https://www.glasgowu[...]
[22] 뉴스 Chile despertó, también su música: canciones inspiradas en la revolución https://www.potq.net[...]
[23] 웹사이트 Manifiesto Fundacional de Nueva Canción http://www.mercedess[...]
[24] 웹사이트 Recording of Cosquin Folklore Festival 1965 https://www.youtube.[...]
[25] 웹사이트 Mercedes Sosa, un símbolo para su generación http://www.shock.com[...]
[26] 뉴스 Cróncias del poeta descalzo http://www.losandes.[...] 2009-04-19
[27] 서적 A Modern History I.B. Tauris and Co., Ltd.
[28] 학술지 Mercedes Sosa 1996-05-01
[29] 웹사이트 Biografía http://www.leongieco[...]
[30] 뉴스 Mercedes Sosa, Who Sang of Argentina's Turmoil, Dies at 74 https://www.nytimes.[...] 2009-10-05
[31] 서적 Cuban music from A to Z
[32] 문서 Puebla's compositions
[33] 서적 La música y el pueblo
[34] 서적 Diccionari de la Cançó. D'Els Setze Jutges al Rock Català Enciclopèdia catalana 2000
[35] 서적 Diccionari de la Cançó: D'Els Setze Jutges al Rock Català Enciclopèdia catalana 2000
[36] 뉴스 José Guardiola, la voz que desafió la oscuridad franquista https://elpais.com/c[...] 2018-11-04
[37] 서적 ́Ens calen cançons d ́ara ́. Retrospectiva sobre la Nova Cançó a 50 anys vista https://books.google[...] Universitat de Lleida 2010
[38] 서적 Diccionari de la Cançó. D'Els Setze Jutges al Rock Català Enciclopèdia catalana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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