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 다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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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나카 다쓰오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10년 야마구치현에서 육군 군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입사한 후, 관료와 비서관을 거쳐 귀족원 의원과 야마구치현 지사를 역임했다. 1953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된 후 자유민주당에서 내각관방부장관, 통산상, 문부상 등을 지냈으며, 1990년 정계 은퇴 후 1998년 사망했다. 그는 6.25 전쟁 당시 야마구치현 지사로서 한국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태풍 루스 피해 당시 자위대의 재해 파견을 이끌어내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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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다쓰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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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Tanaka Tatsuo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무소속 → 일본민주당 → 자유민주당 |
의원 | 중의원 의원 |
선거구 | 야마구치현 제1구 |
당선 횟수 | 13회 |
임기 시작 | 1953년 4월 20일 |
임기 종료 | 1990년 1월 24일 |
기타 직책 1 | 공선 초대-제2대 야마구치현 지사 |
당선 횟수 | 2회 |
임기 시작 | 1947년 4월 16일 |
임기 종료 | 1953년 3월 24일 |
기타 직책 2 | 귀족원 의원 |
임기 시작 | 1946년 5월 11일 |
임기 종료 | 1947년 5월 2일 |
기타 직책 3 | [[파일:Liberal Democratic Party (Japan) Emblem.svg|20px]] 제25대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
(총재) | 스즈키 젠코 |
임기 시작 | 1981년 |
임기 종료 | 1982년 |
주요 직책 | |
제102대 문부대신 | 내각: 스즈키 젠코 내각 임기 시작: 1980년 7월 17일 임기 종료: 1981년 11월 30일 |
제35대 통상산업대신 | 내각: 후쿠다 다케오 내각 임기 시작: 1976년 12월 24일 임기 종료: 1977년 11월 28일 |
제16대 총리부 총무장관 | 내각: 제2차 사토 제1차 개조 내각 임기 시작: 1967년 11월 25일 임기 종료: 1968년 11월 30일 |
내각관방부장관 (정무 담당) | 내각: 제1차 기시 개조 내각 임기 시작: 1957년 7월 12일 임기 종료: 1958년 6월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910년 9월 20일 |
출생지 | 야마구치현 하기시 |
출신 학교 | 도쿄제국대학 |
이전 직업 | 남만주철도 직원 기획원, 군수성 관료 농상대신, 상공대신 비서관 |
칭호 및 훈장 | 남작 |
위계 | 정3위 |
훈장 | 훈1등욱일대수장 |
가족 (정치인) | 아버지: 다나카 기이치 (총리) |
2. 생애
1910년 9월 20일에 지금의 야마구치현 하기시에서 육군 군인 다나카 기이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구제 교세이 중학교와 구제 우라와 고등학교(지금의 사이타마 대학)를 거쳐 도쿄 제국대학(지금의 도쿄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이때 아버지가 사망해 남작을 습작했으며 다나카 세쓰코와 결혼했다.[1]
1937년에 대학을 졸업한 뒤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입사했다. 이후 기획원 조사관, 군수성 군수관을 역임한 뒤 고이소 내각에서 농상상 시마다 도시오의 비서관으로 일했다.[1]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에 시데하라 내각의 상공상 오가사와라 산쿠로의 비서관으로 근무하다가 1946년 5월 11일에 보궐선거에서 귀족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1] 1947년 5월 2일 「일본국 헌법」의 시행을 앞두고 귀족원이 폐지되었다. 그 해에 지사 선출 방식이 관선에서 민선으로 바뀌자 야마구치현지사 선거에 출마해 당선돼 초대 민선 지사가 되었다. 1951년에 재선에 성공했다가 동향 선배인 기시 노부스케의 권유를 받고 1953년 총선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때 무소속으로 출마했음에도 지역구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당선 후 기시가 소속된 자유당에 입당했다. 이후 총리대신 요시다 시게루를 비판하던 기시가 자유당에서 제명되자 다나카도 기시를 좇아 자유당을 탈당한 뒤 일본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1]
보수합동으로 1955년에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자 자민당 소속이 되었다. 1957년 7월에 제1차 기시 내각 (개조)이 발족하자 내각관방부장관(정무 담당)이 되어 11개월을 재임했다. 1967년 11월에 제2차 사토 내각 (제1차 개조)이 출범하자 총리부 총무장관에 취임해 처음 입각했으며 이후 후쿠다 다케오 내각에서 통산상, 스즈키 젠코 내각에서 문부상을 지냈다. 문부상에서 물러난 1981년에는 자유민주당 총무회장에 취임해 1년간 재임했다.[1]
1990년에 중의원 해산이 이루어지자 총선에 출마하지 않고 정계를 은퇴했다. 지역구는 야마구치현의회 의원이던 가와무라 다케오가 물려받았다. 같은 해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1]
1998년 3월 30일에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87세. 묘소는 다마 공동묘지에 있다.[1]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910년 9월 20일, 육군 군인 다나카 기이치의 장남으로 야마구치현 하기시에서 태어났다. 교세이 중학교를 거쳐 1년의 재수 끝에 우라와 고등학교 (현 사이타마 대학)에 진학,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이 기간 동안 아버지 기이치를 잃고 남작 작위를 습작했으며, 도쿄 제국대학 재학 중에 다카하시 세쓰코와 결혼했다.2. 2. 관료 경력
1910년 9월 20일 야마구치현 하기시에서 육군 군인 다나카 기이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7년 도쿄 제국대학(지금의 도쿄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입사했다.[1] 이후 기획원 조사관, 군수성 군수관을 역임한 뒤 고이소 내각에서 농상상 시마다 도시오의 비서관으로 일했다.[1]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에는 시데하라 내각의 상공상 오가사와라 산쿠로의 비서관으로 근무했다.[1] 1946년 5월 11일 보궐선거에서 귀족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4][5] 1947년 5월 2일 「일본국 헌법」의 시행을 앞두고 귀족원이 폐지되었다.[6] 같은 해, 지사 선출 방식이 관선에서 민선으로 바뀌자 야마구치현지사 선거에 출마해 당선돼 초대 민선 지사가 되었다.[1] 쇼와 천황의 전후 순행때 수행 역할을 맡았다.[7] 1952년에는 국유 재산 관리 처분 관계 사건(전함 "무쓰" 관계 사건)으로 중의원 행정 감찰 특별 위원회에 증인 소환되었다.[8]
1951년 재선에 성공했다가 동향 선배인 기시 노부스케의 권유를 받고 1953년 총선에 출마해 당선됐다. 무소속으로 출마했음에도 지역구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당선 후 기시가 소속된 자유당에 입당했다. 이후 총리대신 요시다 시게루를 비판하던 기시가 자유당에서 제명되자 다나카도 기시를 좇아 자유당을 탈당한 뒤 일본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1]
2. 3. 정치 경력
1910년 야마구치현 하기시에서 육군 군인 다나카 기이치의 장남으로 태어난 다나카 다쓰오는 사이타마 대학과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1] 대학 졸업 후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입사하여 기획원 조사관, 군수성 군수관을 역임했고, 고이소 내각에서 농상상 시마다 도시오의 비서관으로 일했다.[1]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시데하라 내각의 상공상 오가사와라 산쿠로의 비서관으로 근무하다가 1946년 보궐선거에서 귀족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1][4][5] 1947년 귀족원이 폐지되자 야마구치현지사 선거에 출마해 초대 민선 지사가 되었고, 1951년 재선에 성공했다.[1] 1952년에는 국유 재산 관리 처분 관계 사건(전함 "무쓰" 관계 사건)으로 중의원 행정 감찰 특별 위원회에 증인 소환되었다.[8]
1953년 동향 선배인 기시 노부스케의 권유를 받고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지역구 1위로 당선되었다.[1][2] 당선 후 기시가 소속된 자유당에 입당했으나, 기시가 자유당에서 제명되자 다나카도 기시를 좇아 일본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1]
1955년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자 자민당 소속이 되었다.[1] 1957년 제1차 기시 내각 (개조)에서 내각관방부장관(정무 담당)을 맡았다.[1] 1967년 제2차 사토 내각 (제1차 개조)에서 총리부 총무장관으로 처음 입각했으며, 이후 후쿠다 다케오 내각에서 통산상, 스즈키 젠코 내각에서 문부상을 지냈다.[1][2] 1981년에는 자유민주당 총무회장에 취임했다.[1]
1990년 중의원 해산이 이루어지자 총선에 출마하지 않고 정계를 은퇴했다.[9][2]
2. 4. 은퇴 이후
1990년 중의원 해산을 계기로 정계를 은퇴했다.[2] 지역구는 야마구치현의회 의원이던 가와무라 다케오가 물려받았다. 같은 해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2]1998년 3월 30일에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87세. 묘소는 다마 공동묘지에 있다.[10]
3. 6.25 전쟁 관련 활동
야마구치현지사로 재임할 때 한반도의 긴장이 높아지자 위기감을 가지고 지사 직할로 조선정보실을 창설했다.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한 적이 있거나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인재를 모아 중·단파 라디오를 감청해 번역을 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맡았다.[11] 6.25 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사령부가 불리한 상황임을 탐지하고 정부에 연락했다. 미국 국무장관 고문 존 포스터 덜레스의 낙관적인 견해를 전해들은 요시다 시게루는 다나카의 연락을 무시했다. 하지만 전황이 악화하자 6만 명 정도 되는 한국 망명 정권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야마구치현에 타진하는 상황이 되었다. 다나카는 이를 거절했으나 아부정에 난민 캠프를 비밀리에 짓는 계획을 추진했다.[11]
1951년 10월에 야마구치현이 태풍 루스의 피해를 입자 다나카는 현내에 소재하는 경찰예비대에 구조 지원을 요청했다. 오즈키 주둔지에 있던 보통과 제11연대(현·육상자위대제11보통과연대)는 후쿠오카현에 있던 제4관구총감부에 연락했는데 총감부는 내각의 명령이 없었고 자연재해 때문에 예비대가 출동한 사례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러자 11연대는 부연대장을 총감부에 보내 직접 상황을 설명하도록 했다. 부총감은 기존의 지시를 따르라고 했으나 부연대장은 총감을 직접 만나러 갔고, 이에 총감이 도쿄에 있는 경찰예비대 총대총감부에 연락했고 요시다 시게루 총리대신의 지시가 내려와 출동이 결정됐다. 이를 계기로 재해 파견에 대한 규정이 만들어졌다.[12]
3. 1. 자위대 창설 관련 활동
야마구치현지사로 재임할 때 한반도의 긴장이 높아지자 위기감을 가지고 지사 직할로 조선정보실을 창설했다.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한 적이 있거나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인재를 모아 중·단파 라디오를 감청해 번역을 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맡았다.[11] 6.25 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사령부가 불리한 상황임을 탐지하고 정부에 연락했다. 미국 국무장관 고문 존 포스터 덜레스의 낙관적인 견해를 전해들은 요시다 시게루는 다나카의 연락을 무시했다. 하지만 전황이 악화하자 6만 명 정도 되는 한국 망명 정권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야마구치현에 타진하는 상황이 되었다. 다나카는 이를 거절했으나 아부정에 난민 캠프를 비밀리에 짓는 계획을 추진했다.[11]1951년 10월에 야마구치현이 태풍 루스의 피해를 입자 다나카는 현내에 소재하는 경찰예비대에 구조 지원을 요청했다. 오즈키 주둔지에 있던 보통과 제11연대(현·육상자위대제11보통과연대)는 후쿠오카현에 있던 제4관구총감부에 연락했는데 총감부는 내각의 명령이 없었고 자연재해 때문에 예비대가 출동한 사례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러자 11연대는 부연대장을 총감부에 보내 직접 상황을 설명하도록 했다. 부총감은 기존의 지시를 따르라고 했으나 부연대장은 총감을 직접 만나러 갔고, 이에 총감이 도쿄에 있는 경찰예비대 총대총감부에 연락했고 요시다 시게루 총리대신의 지시가 내려와 출동이 결정됐다. 이를 계기로 재해 파견에 대한 규정이 만들어졌다.[12]
4. 평가 및 비판
4. 1. 긍정적 평가
4. 2. 부정적 평가
5. 역대 선거 기록
다나카 다쓰오는 1947년 지방선거에서 야마구치현지사에 당선되어 1953년까지 재임했다. 이후 총선거를 시작으로, 제38회 총선거까지 야마구치현 제1구에서 중의원 의원에 연속 당선되었다. 초기에는 무소속이었으나, 1955년 총선거에서는 일본민주당, 이후에는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했다.
선거명 | 실시년도 | 횟수 | 직책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지방선거 | 1947년 | 1회 | 야마구치현지사 | 야마구치현 선거구 | 무소속 | 196,577표 | 38.95% | 1위 | 당선 | 소선거구제 |
지방선거 | 1951년 | 2회 | 야마구치현지사 | 야마구치현 선거구 | 무소속 | 644,760표 | 93.87% | 1위 | 당선 | 소선거구제 |
총선거 | 1953년 | 26회 | 중의원 의원 | 야마구치현 제1구 | 무소속 | 90,830표 | 26.8%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거 | 1955년 | 27회 | 중의원 의원 | 야마구치현 제1구 | 일본민주당 | 81,711표 | 23.4%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거 | 1958년 | 28회 | 중의원 의원 | 야마구치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102,882표 | 27.1%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거 | 1960년 | 29회 | 중의원 의원 | 야마구치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78,179표 | 21.6%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거 | 1963년 | 30회 | 중의원 의원 | 야마구치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79,294표 | 21.8%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거 | 1967년 | 31회 | 중의원 의원 | 야마구치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70,659표 | 18.8%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거 | 1969년 | 32회 | 중의원 의원 | 야마구치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82,303표 | 22.6%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거 | 1972년 | 33회 | 중의원 의원 | 야마구치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72,868표 | 19.2%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거 | 1976년 | 34회 | 중의원 의원 | 야마구치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75,886표 | 20.8%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거 | 1979년 | 35회 | 중의원 의원 | 야마구치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77,050표 | 20.5%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거 | 1980년 | 36회 | 중의원 의원 | 야마구치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84,361표 | 21%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거 | 1983년 | 37회 | 중의원 의원 | 야마구치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67,211표 | 17.6%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거 | 1986년 | 38회 | 중의원 의원 | 야마구치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70,093표 | 17.5%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6. 가족 관계
- 아버지: 다나카 기이치
- 어머니: 스에(1874년 - 1937년) - 오오츠키 나오시의 여섯째 딸
- 아내: 다나카 세츠코(1914년 - ?) - 다카하시 유우지의 딸.
- 자녀: 다나카 모토오(일본제강 사원), 다나카 타쿠지, 타카사키 유미코(하이쿠 시인, 도쿄 후원회 가와무라 타케오를 기르는 모임 회장)
7. 관련 인물
- 안도 모모후쿠 - 제염 사업과 선거에서 깊은 관계가 있었다.
참조
[1]
사전
20世紀人名辞典
日外アソシエーツ
[2]
서적
20世紀人名辞典
日外アソシエーツ
[3]
문서
[4]
문서
貴族院要覧(丙)
1946-12
[5]
문서
官報
1946-06-05
[6]
문서
議会制度百年史 - 貴族院・参議院議員名鑑
[7]
서적
昭和天皇御召列車全記録
新潮社
[8]
회의록
第13回国会 衆議院 行政監察特別委員会 第16号 昭和27年3月28日
https://kokkai.ndl.g[...]
[9]
문서
[10]
웹사이트
田中龍夫
http://www6.plala.or[...]
2024-11-28
[11]
웹사이트
朝鮮戦争直前「韓国の亡命政権、難民に備えよ」…国防意識高めた山口県 楽観する国とは別に情報収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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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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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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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経スタイル
2018-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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