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몬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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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몬 산성은 센고쿠 시대에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축성한 일본의 성이다. 1560년경에 축성되었으며, 시기 산성과 함께 야마토 국의 정청 및 교토 방어를 위한 요새로 사용되었다. 히사히데는 오다 노부나가의 지원을 받아 쓰쓰이 준케이 세력을 물리치기도 했으나, 결국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면서 1577년 해체되었다. 현재는 와카쿠사 중학교가 들어서 있으며, 성터의 일부가 남아있다. 다몬 산성은 당시의 뛰어난 건축 기술과 화려한 외관으로 유명했으며, 다도회 개최 등 문화적 가치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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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몬산성 | |
|---|---|
| 다몬산성 | |
![]() | |
| 위치 | 나라현 |
| 별칭 | 다몬조 |
| 구조 | 평산성 |
| 망루 구조 | 천수의 존재 불명 (고야구라가 천수라고 한다면 4층) |
| 축성자 | 마쓰나가 히사히데 |
| 축성 연도 | 에이로쿠 2년 (1559년) |
| 개축 | 불명 |
| 성주 | 마쓰나가 히사히데 마쓰나가 히사미치 하와 나오마사 |
| 폐성 연도 | 덴쇼 4년 (1576년) |
| 유적 | 토루, 공호 |
| 문화재 지정 현황 | 없음 |
| 재건 | 없음 |
| 좌표 | 34°41′39.98″N 135°49′53.191″E |
2. 역사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야마토 지배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미켄지산(표고 115m, 비고 30m)에 축성한 평산성이다. 성의 이름은 성 안에 다문천을 모신 것에서 유래했으며, 성터가 있는 산은 현재도 다몬산으로 불린다. 다문천은 불법에서 북방을 수호하는 신으로, 이는 나라 북쪽에 위치한 성에서 스스로를 나라의 수호자로 여기려 했던 히사히데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6]。 성은 나라 동쪽의 입구인 나라자카를 비롯하여 남동쪽의 도다이지, 남쪽의 고후쿠지 등을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았다.
다몬산성은 중세의 임시적인 성곽 형태에서 벗어나, 성 전체에 초석과 돌담을 사용하고 두꺼운 토벽과 기와지붕을 얹은 영구적인 건물을 세운 선진적인 성곽이었다. 혼마루에는 주전(主殿), 회소(会所), 구리(庫裏) 등 호화로운 건물이 들어섰으며, 정원, 가노파 화가의 그림, 다실 등도 갖추었다[1]。 특히 성벽 위에 긴 건물 형태의 망루를 세웠는데, 이는 '''다몬 망루'''의 시초로 여겨진다[3]。 이러한 특징들은 다몬산성이 중세 성곽에서 근세 성곽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형태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임을 시사한다。
축성은 에이로쿠 2년(1559년)에 시작되어[4], 히사히데는 에이로쿠 4년(1561년)에 입성했으며, 에이로쿠 7년(1564년)경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히사히데는 이곳을 거점으로 쓰쓰이 준케이 등 야마토의 기존 세력과 대립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에이로쿠의 변 이후에는 미요시 3인방과도 대립했으며, 도다이지 대불전 전투 등 여러 전투를 치렀다.
1568년 오다 노부나가가 상경하자 히사히데는 노부나가에게 복속했으나, 이후 여러 차례 반기를 들었다. 덴쇼 원년(1573년), 노부나가에게 다시 반기를 들었다가 시기산성에서 궁지에 몰리자 항복하고 다몬산성을 넘겨주었다。 노부나가는 성의 가치를 인정하여 직접 방문하기도 했으며, 아케치 미쓰히데, 호소카와 후지타카, 시바타 가쓰이에 등 부하 장수들이 차례로 성을 관리했다[7][8]。 덴쇼 3년(1575년)에는 하노 나오마사가 야마토 수호로 임명되어 성주가 되었으나[9][10], 이듬해 이시야마 전투 중 덴노지 요새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후 야마토 지배를 맡게 된 쓰쓰이 준케이에게 노부나가는 고리야마성을 제외한 야마토 내 모든 성의 파괴를 명령했다. 이에 따라 다몬산성은 덴쇼 4년(1576년) 7월부터 교토 소시다이 무라이 사다카쓰의 감독 하에 해체되기 시작하여 덴쇼 5년(1577년) 6월경 완전히 파괴되었다. 성이 존재했던 기간은 약 16년에 불과했다. 성의 건자재는 무라이 사다카쓰에 의해 교토로 옮겨져 니조 신 고쇼 건설에 사용되었고[11][12], 석재는 쓰쓰이성과 고리야마성 축성에 재활용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 야마토의 거점으로 재정비할 계획이 있었으나 중지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성터 남쪽 기슭에 난토 봉행소의 요리키나 도신의 저택이 들어섰고, 막부 말기에는 언덕이 연병장으로 활용되었다. 쇼와 시대 중기까지 축성 당시의 지형이 비교적 잘 남아 있었으나, 1948년 나라 시립 와카쿠사 중학교가 건설되고 1978년 교사 신축 과정에서 북쪽의 토루터 등이 파괴되면서 현재는 성의 유구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성터에서는 두 차례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축성 이전에는 중세의 묘지였음이 밝혀졌고, 토루, 석조 배수구, 우물 터, 기와 등이 확인되었다.
2. 1. 센고쿠 시대: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야망과 좌절

센고쿠 시대에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미요시 나가요시의 가신으로 활동하며, 나가요시가 기나이 지역의 대세력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히사히데는 야마토 국의 통치를 맡게 되었다.
1559년 음력 8월, 히사히데는 당시 야마토 국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쓰쓰이 준케이를 비롯한 지역 호족들을 몰아내고 시기 산성에 입성하여 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했다. 이를 통해 그는 야마토 국의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했다.
1560년경 다몬 산성이 축성되었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정확한 시기는 불분명하다. 발굴 조사 결과, 성터는 축성 이전에 묘지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1561년 축성 도중부터 성이 사용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몬 산성은 시기 산성과 함께 야마토 국의 행정 중심지이자 교토 방면으로 출병할 때의 거점 요새 역할을 수행했다.
1564년 음력 7월 이모리 산성에서 미요시 나가요시가 병사하자, 미요시 가문 내에서 히사히데의 영향력이 커졌다. 1565년 음력 8월, 그는 미요시 3인방과 함께 에이로쿠의 변을 일으켜 제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암살했다. 그러나 같은 해 음력 11월, 미요시 3인방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그들은 쓰쓰이 준케이와 연합하여 히사히데를 공격했다. 1566년 음력 6월, 연합군은 쓰쓰이 성을 탈환하고 야마토 국에서 히사히데 세력을 몰아냈다. 1567년 음력 4월에는 난토(나라 남부)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며 히사히데를 압박했다. 하지만 같은 해 음력 10월 10일, 히사히데는 도다이지에 진을 친 쓰쓰이-미요시 연합군을 기습 공격하여 승리했다(도다이지 대불전 전투). 그럼에도 전투는 계속되었고, 1568년 음력 6월 시기 산성 전투에서 시기 산성이 함락되면서 히사히데는 다시 위기에 처했다.

이 무렵 간논지 성 전투에서 승리한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쇼군으로 옹립하기 위해 1568년 음력 9월 상경했다. 궁지에 몰린 히사히데는 아쿠타가와 산성에서 노부나가를 만나 지원을 요청했다. 노부나가의 원군 2만 명을 얻은 히사히데는 시기 산성을 공격하여 4개월 만에 되찾았고, 쓰쓰이-미요시 연합군을 야마토에서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1571년 음력 8월 다쓰이치 성 전투에서 쓰쓰이 군이 승리하자, 노부나가는 쓰쓰이 준케이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아케치 미쓰히데를 보내 준케이를 복속시켰다. 이로써 쓰쓰이 준케이와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오다 가문 내에서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되었고, 히사히데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다몬 산성은 미켄지 산(표고 115m, 비고 30m)에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축성한 성이다. 성의 이름은 다문천을 모신 데서 유래했으며, 성터가 있는 산은 지금도 다몬 산으로 불린다. 다문천은 불법에서 북방을 수호하는 신으로, 나라 북쪽에 위치한 다몬 산성에서 자신을 나라의 수호자로 자처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6]。 성은 나라 동쪽 입구인 나라자카, 남동쪽의 도다이지, 남쪽의 고후쿠지를 조망할 수 있는 요지에 위치하여 야마토 지배의 핵심 거점이 되었다.
다몬 산성은 중세의 임시 성곽 형태에서 크게 발전한 모습을 보였다. 성 전체 구역에 걸쳐 초석과 돌담을 사용하고, 두꺼운 토벽과 기와지붕을 얹은 영구적인 건물을 세워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평산성이었다. 성 안 혼마루에는 주전, 회소, 쿠리 등 호화로운 건물이 들어섰고, 정원, 가노파 화가의 그림, 다실 등이 꾸며져 있었다[1]。 특히 어전은 2층 건물로 '양귀비의 방'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서일본 제일의 호화로운 성곽으로 평가받으며, 귀중한 그림과 다도구들이 수집되었다。 니시노마루에는 중신과 가신들의 저택이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또한, 덴쇼 5년(1577년) 해체 당시 '다카오야구라'라고 불린 4층 망루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4층 천수라면 아즈치성보다 앞선 천수의 선구적인 사례일 수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2]。 성벽 위에는 긴 건물 형태의 망루가 세워졌는데, 이것이 '''다몬 망루'''의 시초로 여겨진다[3]。 다몬 산성은 중세 성곽 양식에서 벗어난 선구적인 요소를 가졌지만, 혼마루와 가신 지구가 일체화된 후대의 근세 성곽과는 다른 형식을 보여준다. 아즈치성 등으로 직접 이어지지는 않지만, 근세 성곽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성곽으로 평가된다。
에이로쿠 2년(1559년)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축성을 시작하여[4], 에이로쿠 4년(1561년) 입성하고 에이로쿠 7년(1564년)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히사히데는 덴쇼 원년(1573년) 말, 노부나가에게 다시 반기를 들었다가 시기산성에 고립되었다. 다케다 신겐의 사망과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추방 등 노부나가 포위망이 와해되자, 히사히데는 사쿠마 노부모리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다몬 산성이 포위되자 화의를 요청하고 12월에 항복했다. 거듭된 반역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는 다몬 산성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히사히데를 용서했는데, 이는 성의 가치와 히사히데의 영향력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12월 26일 다몬 산성은 노부나가 측에 넘겨졌고, 야마오카 가게사, 아케치 미쓰히데, 호소카와 후지타카, 시바타 가쓰이에 등이 차례로 성을 관리했다[7][8]。
덴쇼 2년(1574년) 3월 27일, 노부나가는 다몬 산성에 직접 방문하여 성을 살펴보고, 다음날에는 쇼소인의 명향 란자타이를 성으로 옮겨와 일부를 잘라내어 부하들에게 감상하게 했다. 덴쇼 3년(1575년) 3월에는 하노 나오마사가 야마토 수호로 임명되어 다몬 산성의 성주가 되었으나[9][10], 덴쇼 4년(1576년) 5월 이시야마 전투 중 전사했다. 이후 쓰쓰이 준케이가 야마토 지배를 맡게 되었고, 노부나가는 고리야마성 외의 성들, 즉 다몬 산성을 포함한 성들의 파괴를 명령했다. 파괴 공사는 덴쇼 4년 7월부터 시작되어 덴쇼 5년(1577년) 6월경 완료되었으며, 성이 존재했던 기간은 약 16년에 불과했다. 성의 건물과 내장재는 교토의 니조 신 고쇼 건설에 사용되었고[11][12], 석재는 쓰쓰이성과 고리야마성 축성에 재활용되었다. 히사히데는 덴쇼 5년(1577년) 8월 다시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시기산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자결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현재 성터에는 나라 시립 와카쿠사 중학교가 들어서 있으며, 주변에는 다몬 산성의 돌담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들이 일부 남아 있다.
2. 2.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오다 노부나가의 활용과 파각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인 1572년, 다케다 신겐이 상경군을 이끌고 출진하자,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미요시 요시쓰구와 함께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1573년 음력 4월 신겐이 병사하고, 같은 해 음력 11월 와카에 성 전투에서 미요시 요시쓰구마저 사망하자, 히사히데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노부나가에게 항복했다.이후 다몬 산성은 노부나가에게 넘어가 아케치 미쓰히데, 시바타 가쓰이에 등이 성주로 부임했다. 1574년 음력 11월, 노부나가는 도다이지의 쇼소인에서 명향 '란자타이'를 잘라 오는 길에 다몬 산성에 들렀다. 이때 노부나가는 다몬 산성의 4층 천수(망루)를 눈여겨보았으며, 이는 훗날 노부나가가 아즈치성을 축조할 때 모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575년 야마토국의 슈고로 반 나오마사가 부임하여 다몬 산성의 성주가 되었으나[5][10], 1576년 음력 5월 3일 이시야마 전투의 덴노지 요새 전투에서 오다군의 사령관으로 지휘하던 중 혼간지의 조총대에 의해 전사했다. 그 후 야마토 국 슈고에는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대립 관계였던 쓰쓰이 준케이가 임명되었다. 준케이는 다몬 산성에 입성하는 대신, 같은 해 음력 7월 교토 소시다이 무라이 사다카쓰의 감독 하에 성의 해체를 시작했다.
1577년 음력 6월경에는 '다카오야구라'라고 불린 4층 망루[2]도 해체되면서[11][12], 중세 성곽에서 근세 성곽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지표였던 다몬 산성은 축성 16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같은 해 8월,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다시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시기 산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자결했다. 이 무렵 다몬 산성의 해체는 거의 완료되었고, 건물의 부재는 무라이 사다카쓰의 지휘 아래 교토로 옮겨져 니조 신 고쇼 (구 니조성) 건설에 활용되었으며[11][12], 석재 등 남은 부재는 쓰쓰이 성과 고리야마 성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 니조 신 고쇼는 훗날 혼노지의 변 때 오다 노부타다와 함께 소실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 고리야마 성을 대신할 야마토의 거점으로 다몬 산성을 재정비할 계획이 있었으나 중지되었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 성터 남쪽 기슭에는 난토 봉행소의 요리키나 도신의 저택이 들어섰고, 막부 말기에는 언덕이 연병장으로 활용되었다. 폐성 후에도 터는 계속 활용되었으며, 쇼와 시대 중기까지 지형은 축성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8년 나라 시립 와카쿠사 중학교가 건설되고, 1978년 교사 신축 과정에서 북쪽에 남아 있던 토루터마저 파괴되었다.
2. 3. 현재
1948년 성터에 와카쿠사 중학교가 건립되었고, 1978년 교사 신축공사를 위해 북쪽에 남아있던 성루 터가 파괴되었다. 현재 다몬산성 터에는 과거 성의 모습을 떠올릴 만한 유구(遺構)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혼마루가 있던 자리에는 와카쿠사 중학교가 들어서 있으며, 혼마루의 크기는 길이 140m, 최대 폭 110m이다. 발굴 조사 결과, 원래 다몬산은 평탄했으며 대규모 삭평 공사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성터 곳곳에서 석재를 빼낸 흔적과 이를 모아 쌓은 유구도 확인된다. 덴쇼 7년(1579년) 다몬성의 석재가 쓰쓰이성으로 옮겨졌다는 기록이 있는데[5], 이것이 앞서 언급된 집석재(集石材)인지, 아니면 혼마루 경사면의 석축을 허물어 가져간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토루(土塁) 밖은 현재도 흙으로 된 급경사면이며, 설령 석축이 있었다 하더라도 철거 과정에서 붕괴될 정도의 대규모 높은 석축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교사와 와카쿠사 중학교 운동장 사이에는 큰 호리키리(堀切, 해자)가 있어 다몬산과 젠쇼지산(善勝寺山)을 나누는 성곽의 일부를 이룬다.


와카쿠사 중학교 서쪽 부지는 학교 건물이 들어서지 않아 구루와(曲輪, 성곽 내부 구역)의 면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이 구역 북서쪽에서 서쪽에 걸쳐 높이 1.5m의 토루가 있으며, 모퉁이 부분은 높이 3m, 폭 2m의 단(壇) 모양을 이루고 있어 망루 터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닌쇼 황태후 릉은 다몬산 남쪽으로 돌출되어 있으며, 현재 쇼무 천황 릉과 함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일본 성곽 대계(日本城郭大系)』에서는 나라 문화재 연구소(奈良文化財研究所)가 작성한 지형도를 바탕으로, 닌쇼 황태후 릉 서남쪽 구석에 토루와 망루대(櫓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이 서쪽을 절단하고 쇼무 천황 릉과의 사이에 호리키리를 만들어 혼마루와 분리했으며, 이 호리키리에서 나오는 길과 고구치(虎口, 성문)를 감시했을 것으로 본다. 쇼무 천황 릉에도 단 모양의 오비구루와(帯曲輪, 띠 모양의 작은 성곽) 같은 부분이 관찰되어 데구루와(出曲輪, 성 바깥쪽의 작은 성곽)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릉묘(陵墓) 모두 다몬산성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3. 성곽 구조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미켄지 산(표고 115m, 비고 30m)에 축성하였다. 성에서 사천왕 중 하나인 다문천왕의 제를 지냈기 때문에 산 이름이 다몬 산으로 바뀌었고, 성 이름도 다몬 산성이 되었다. 다문천은 불법에서 북방을 수호하는 신장이므로, 나라 북쪽에 위치한 다몬 산성에서 야마토 국을 지배하는 자신을 나라의 수호자로 자임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된다. 성의 동쪽에는 나라의 입구인 나라사카가 있고, 남동쪽에는 도다이지, 남쪽에는 고후쿠지가 있어 이들을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아 야마토 국 지배의 거점이 되었다.[4]
다몬 산성은 중세의 임시적인 성곽 형태에서 크게 발전하여, 구루와 전체에 사찰이나 귀족 저택에서나 사용되던 초석과 돌담을 사용하고, 두꺼운 흙벽과 기와 지붕을 얹은 영구적인 건물을 세운 선진적인 평산성이었다. 성 안에는 혼마루(쓰메노마루)에 어전, 회소(會所), 구리(庫裏, 사찰의 부엌 및 승려 거처) 등 호화로운 다다미방 건물들이 들어섰다. 정원, 금속 공예 장식, 가노파 화가의 그림, 다실의 낙천장(落天井)[1] 등 정교한 장식과 구조를 갖추었다.[13][2] 시마즈 이에히사의 일기에 따르면 어전은 2층 건물이었으며 '양귀비의 방'이 있었다고 한다. 서일본 제일의 호화로운 성곽으로 평가받았으며, 유명한 그림과 다기(茶器)들도 수집되었다. 니시노마루에는 중신들의 저택과 가신들의 집이 세워졌다고 한다.
특히 성 안에는 4층 망루(혹은 천수)가 세워졌는데, 이는 아즈치성보다 앞서 근세 성곽 천수의 초기 형태로 여겨지기도 한다. 다만 당시 기록에는 '망루'로 표기되어 있고, 어전 기능을 갖춘 다른 성들의 초기 천수와는 성격이 달라 천수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2] 성벽 위에는 길게 늘어선 나가야 형태의 망루를 세웠는데, 이것이 '''다몬 망루'''의 시초로 여겨진다.[3] 이러한 선구적인 요소들 때문에 다몬 산성은 중세 성곽에서 근세 성곽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 중요한 성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혼마루와 가신 지구가 일체화된 구조는 이후 근세 성곽과는 다른 형태로, 아즈치성 등으로 직접 이어지는 계보는 아니라고 본다.
1562년 음력 8월 12일에는 4층 망루의 상량식이 열렸고, 나라 주민들을 초대하여 야마토 국 지배를 과시하는 행사로 삼았다. 이는 방어 목적의 성뿐만 아니라 권위를 보여주는 성으로서의 성격 변화를 보여준다.
〈일본국토교통성〉
선교사 루이스 데 알메이다는 1565년에 다몬 산성을 방문하고 남긴 기록에서 성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했다. 그는 "기독교 국가에서도 본 적 없는 매우 희고 광택 있는 벽"을 언급하며, 이는 석회에 모래 대신 특수한 흰 종이를 섞어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붕은 두껍고 검은 고급 기와로 덮여 있었으며, 400~500년은 거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성 내부는 "마치 천국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라고 표현하며, 궁전 건물은 삼나무로 지어져 향기로웠고, 벽에는 옛 역사를 그린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그림이 없는 곳은 금으로 장식되었다고 기록했다. 기둥은 금칠과 조각으로 장식되었고, 방과 방 사이는 이음매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는 "세계 대부분에 이와 같이 미려한 것이 어디 있으랴", "사람이 만든 것처럼 생각되지 않는다"고 극찬하며, 일본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성을 보러 온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기록은 다소 과장되었을 수 있으나, 다른 기록들에서도 성의 화려함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상당 부분 사실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성을 일반에 공개한 것은 권위를 상징하는 '보여주는 성'으로서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웅장한 성의 축조가 가능했던 배경으로는 마쓰나가 히사히데 개인의 축성 능력이 뛰어났다는 점과 함께, 나라 지역 대사찰들의 건축 기술 노하우가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성에 사용된 기와는 니시노쿄, 이카루가 지역의 세습 기와 장인 집단과 고후쿠지, 도다이지의 기와 공방을 통합하여 성곽 전용으로 간략화된 기와를 처음으로 생산한 사례로 여겨진다.
아사노 문고 소장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다도에도 조예가 깊어, 다몬 산성에서 여러 차례 다회를 열었다. 기록에 따르면 성 안에는 6첩(약 10.8m²)과 4첩 반(약 8.1m²) 크기의 다실 또는 다정(茶亭)이 최소 두 곳 이상 있었다. 이곳에서는 후에 오다 노부나가에게 헌상된 쓰쿠모 나스 다호(茶壺)나, 시기 산성 함락 시 소실된 것으로 알려진 히라구모 차솥(茶釜) 등이 사용되었다.
다몬 산성 주변에는 성하 마을이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 북쪽과 동서쪽은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고, 남쪽은 사호 강을 자연 해자 삼아 소규모 성하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택지 개발로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이치조 대로에서 호렌 대로에 걸쳐 마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를 통해 다몬 산성이 외성을 갖춘 평산성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다몬 산성 터에는 나라 시립 와카쿠사 중학교가 들어서 있어 당시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혼마루 터는 길이 140m, 최대 폭 110m 정도이다. 발굴 조사 결과, 산 정상을 대규모로 깎아 평탄화하지는 않았으며, 성 곳곳에서 석재를 채취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혼마루 사면은 석벽으로 보강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1577년 성이 파괴될 때[5] 석재 대부분이 쓰쓰이 성과 고리야마 산성 축조에 사용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교사와 운동장 사이에는 큰 호리키리(堀切, 산 능선을 끊어 만든 해자)[14]가 있어 다몬 산과 동쪽의 젠쇼지 산(현 운동장 부지)을 분리하고 있다.
와카쿠사 중학교 서쪽 부지에는 건물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 비교적 구루와의 형태가 남아있다. 북서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높이 1.5m의 토루(土塁, 흙으로 쌓은 방어벽)가 있으며, 모서리 부분은 높이 3m, 폭 2m의 단상 형태로 되어 있어 망루 터 중 하나로 추정된다.
성 남쪽으로 돌출된 닌쇼 황태후 릉과 그 서쪽의 쇼무 천황 릉 역시 다몬 산성의 일부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닌쇼 황태후 릉 남서쪽 구석에는 토루와 망루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서쪽을 호리키리로 끊어 혼마루와 분리했다. 쇼무 천황 릉 쪽에도 단상 형태의 오비쿠루와(帯曲輪, 성곽 주위를 둘러싼 좁고 긴 구루와)와 같은 지형이 있어, 데구루와(出曲輪, 성곽 본체에서 돌출된 작은 구루와)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들 능묘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2차 발굴 조사를 통해 북쪽 토루 자리에서 구조 일부가 확인되었다. 토루 기저부에는 묘석 등 석조 유물을 평평하게 깔고 그 위에 기와를 겹쳐 쌓아 다졌으며, 북쪽으로 경사를 두어 배수를 용이하게 했다. 동서 22m에 걸쳐 석조 배수구도 확인되었다. 또한, 옛 지도에도 표시된 원형 우물 터가 발굴되었는데, 직경 약 5m, 깊이 약 4.5m의 큰 규모로, 지하 수맥까지 닿지 않아 빗물을 모으는 용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기와 중에는 '도다이지(東大寺)' 명문 기와 등 사찰에서 가져온 유용 기와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동일 규격으로 새로 제작된 것으로 보여, 성곽 전용 기와 생산 체계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4. 평가 및 의의
중세의 임시 성곽 형식을 크게 벗어나, 구루와(성곽 내부 구역) 전체에 초석과 돌담을 사용하고, 두꺼운 토벽과 기와지붕을 얹은 영구적인 건물을 세웠다. 이는 당시까지 주로 사원 건축이나 공가 저택에만 적용되던 방식으로, 다몬 산성은 나라 시내를 조망하며 야마토 전체를 통치하기 위한 거점으로서 선진적인 평산성의 면모를 갖추었다. 성 안의 혼마루(주요 구역)에는 주전(主殿), 회소(会所), 구리(庫裏, 사찰의 부엌 및 승려 거주 공간) 등 호화로운 다다미방 건물들이 들어섰으며, 정원, 금속 공예 장식, 가노파 화가의 그림, 다실의 정교한 구조 등 사치스러운 요소들이 가득했다. 나카가와 타카히로는 혼마루 구조가 무로마치 시대 수호 저택 등에서 유행한 하나노고쇼 양식을 모방한 마지막 사례 중 하나로 본다. 1575년 방문한 시마즈 이에히사의 기록에 따르면, 어전은 2층 건물이었고 '양귀비의 방'이라는 공간도 있었다고 한다. 서일본 제일의 호화로운 성곽으로 평가받았으며, 귀중한 그림과 다도구들이 수집되었다.
선교사 루이스 데 알메이다는 1565년 성을 방문한 후 남긴 기록에서 성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며 극찬하였다.[13] 그는 성벽이 "기독교 국가에서 본 적 없는 매우 하얗고 광택 있는" 모습이며, 이는 석회에 특수한 흰 종이를 섞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 또한 지붕에는 두껍고 검은 고급 기와가 사용되었으며, 성 전체가 "마치 당일 낙성한 것 같고, 천국에 들어간 듯한 느낌"을 준다고 평가했다. 그는 "세계 대부분에 이와 같은 아름다운 물건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며 성의 아름다움을 강조했다. 성 내부는 더욱 호화로웠는데, 삼나무로 지어진 궁전은 향기로웠고, 넓은 판재와 옛 역사를 그린 벽화, 금박 장식, 놋쇠로 감싼 기둥 등으로 꾸며져 있었다. 알메이다는 "사람이 만든 물건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고 감탄하며, 정원의 아름다움 또한 높이 평가했다.
이러한 평가는 단순히 외국인의 찬사만은 아니었다. 《겸우향기(兼右卿記)》에도 "화려함에 눈을 빼앗겼다"는 기록이 있으며, 사쓰마 국의 시마즈 이에히사도 일기 《가구군상경일기(家久君上京日記)》에서 "다몬 성 안에서 야마토가 한눈에 보였다"고 적어 성의 웅장함과 뛰어난 조망을 뒷받침한다.
다몬 산성은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축성한 여러 성 중에서도 특히 '근세식 성곽 건축의 시조'로 평가받는데, 이는 알메이다의 기록을 통해 그 선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성벽 위에 긴 망루 건물을 올린 '다몬 망루' 양식은 이 성에서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3] 또한, '다카오야구라'라고 불린 4층 망루가 있었는데, 이것이 후대의 천수의 효시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2] 센다 요시히로는 당시 천수가 거주 기능을 겸했던 사카모토성이나 쇼류지성 등과 달리 다몬 산성의 망루는 고층 구조물 자체에 중점을 두었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히사히데가 남긴 1562년 서장에도 '천수'에 대한 언급은 없다.[1]
알메이다의 기록 말미에 "일본 전국에서 이것을 보기 위해 오는 자가 많다"고 언급된 것처럼, 성을 대중에게 공개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성이 단순한 방어 시설을 넘어 권위를 과시하는 상징물이었음을 보여주며,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아즈치성 등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처럼 웅장한 성을 지을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나라 지역 사찰 건축에서 축적된 높은 기술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에 사용된 기와는 고후쿠지, 도다이지 등의 기와 공방 기술을 통합하여 성곽 전용으로 간략화된 기와를 소성한 첫 사례로 여겨진다.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다도에도 조예가 깊어, 야마토, 사카이, 교토의 유력 상인이나 문화인들을 초청하여 다몬 산성에서 여러 차례 다회를 열었다. 《마쓰야 다회기(松屋茶会記)》에 따르면 성 안에는 6조(畳)와 4조 반 크기의 다실 또는 다정(茶亭)이 최소 두 개 이상 있었으며, 이곳에서는 후에 오다 노부나가에게 헌상된 명품 다기 쓰쿠모 나스(九十九髪茄子)나 시기 산성 함락 시 사라진 히라구모(平蜘蛛釜) 찻솥 등이 사용되었다.
이처럼 다몬 산성은 중세 성곽에서 근세 성곽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혼마루(주요 영역)와 가신들의 거주 구역이 통합된 구조는 후대의 완전한 근세 성곽과는 차이가 있지만[3], 건축 기술, 과시적 성격, 문화적 기능 등 여러 면에서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비록 축성된 지 16년 만인 1577년 해체되었지만, 성의 건축 부재들은 교토의 니조성 축조에 재활용되었으며, 석재는 쓰쓰이성과 고리야마성 축조에도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5. 교통
참조
[1]
서적
図説茶室の歴史:基礎がわかるQ&A
淡交社
[2]
간행물
『イエズス会日本通信』
[3]
서적
日本名城総覧
新人物往来社
[4]
웹사이트
https://www.pref.nar[...]
[5]
웹사이트
https://kotobank.jp/[...]
[6]
논문
戦国期大和の権力と在地構造:興福寺荘園支配の崩壊過程
東京堂出版
1991
[7]
서적
ここまでわかった!明智光秀の謎
KADOKAWA
[8]
서적
奈良の鹿「鹿の国」の初めての本
京阪奈情報教育出版
[9]
문서
多聞院日記同月25日
[10]
웹사이트
https://kotobank.jp/[...]
[11]
서적
信長の天下所司代 村井貞勝
中央公論新社
[12]
기타
[13]
기타
[14]
문서
산이나 언덕을 절단하여 낸 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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