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야마 가타이
1. 개요
다야마 가타이는 일본의 소설가이자 평론가로, 1871년 군마현 다테바야시시에서 태어나 1930년 사망했다. 그는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초기에는 게이엔 파의 와카와 서양 문학을 접하며 문학적 기반을 다졌다. 1904년 러일 전쟁 종군 경험을 바탕으로 자연주의 문학을 자각, 평론 "노골적인 묘사"와 소설 "소녀병"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했다. 1907년 발표한 소설 "이불"은 일본 자연주의 문학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만년에는 종교적 심경을 담은 작품을 썼으며, 기행문과 온천에 관한 책도 다수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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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다야마 로쿠야 |
|---|---|
| 출생일 | 1872년 1월 22일 |
| 출생지 | 일본, 군마현, 다테바야시시 (당시 도치기현 오라군 다테바야시) |
| 사망일 | 1930년 5월 13일 |
| 사망지 | 일본, 도쿄도, 시부야구, 요요기 (당시 도쿄부 도요타마군 다다하타마치) |
| 묘소 | 다마 묘원 |
| 국적 | 일본 |
| 직업 | 소설가 |
| 언어 | 일본어 |
| 장르 | 소설 |
|---|---|
| 사조 | 자연주의 문학 |
| 주요 작품 | '주에몬의 최후' (1902년) '이불' (1907년) '생' (1908년) '아내' (1909년) '시골 교사' (1909년) '인연' (1910년) '일병졸의 총살' (19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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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 전쟁 종군 기자 -
오카모토 기도
오카모토 기도는 일본의 극작가이자 소설가로, 언론인 활동 후 신가부키 희곡 작가로 데뷔하여 '겐로쿠 충신장', 《한시치 체포록》 등의 대표작을 남겼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는 문학상과 저널이 발행되고 있다. -
러일 전쟁 종군 기자 -
윌러드 디커맨 스트레이트
윌러드 디커맨 스트레이트는 러일 전쟁 당시 로이터 통신 특파원, 주한 미국 공사관 부영사, 심양 주재 미국 총영사를 지낸 미국의 외교관이자 언론인, 금융인으로 한국과 중국에서 활동하며 한국 근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남겼고, 금융계 진출 후에는 잡지 《뉴 리퍼블릭》을 창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그의 활동은 대한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 미친 영향에 대한 논쟁을 포함하여 긍정적, 비판적인 평가가 공존한다. -
군마현 출신 -
나카소네 야스히로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1918년 군마현 출생으로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제국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행정 개혁, 국철 민영화 등을 추진하다가 2019년 사망했다. -
군마현 출신 -
우치다 아야
우치다 아야는 2008년 데뷔하여 《키디 걸랜드》 주연, 《러브라이브!》 μ's 활동으로 인기를 얻은 일본의 여성 성우이자 가수로, 2014년 솔로 데뷔 후 음반 발매와 라이브 투어, 애니메이션 및 게임 캐릭터 연기, 내레이션, 라디오 진행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다. -
일본의 소설가 -
이와야 사자나미
이와야 사자나미는 메이지 시대에 아동 문학을 보급하고 일본 최초의 아동 문학 총서 간행, 전승 설화 리텔링, '옛날이야기 하이쿠 그림' 창조 등을 통해 일본 근대 아동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아동 문학가, 소설가, 시인, 수필가이자 문예 평론가이다. -
일본의 소설가 -
미시마 유키오
미시마 유키오는 1925년 도쿄에서 태어나 소설, 희곡, 평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일본의 전통과 현대 사이의 갈등을 작품에 담아낸 20세기 일본 문학의 중요한 인물이며, 1970년 자위대에서 쿠데타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할복 자살했다.
2. 경력
군마현 다테바야시시 출신으로, 초기 한학 교육을 받았으나 이후 상경하여 문학의 길을 걸었다. 오자키 코요 문하에 잠시 있었으나 에미 스이인, 구니키다 돗포, 시마자키 도손 등과 교류하며 작가로서 성장했다. 초기에는 겐유샤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모색했으며, 특히 모파상의 영향을 받았다. 하쿠분칸에서 근무하며 작품 활동을 병행했다.
1904년 러일전쟁에 종군 기자로 참전한 경험은 그의 문학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후 자연주의 문학을 표방하며 평론 "노골적인 묘사" 등을 발표했다. 1907년 발표한 『이불』은 큰 반향을 일으키며 일본 자연주의 문학과 사소설의 방향을 결정짓는 작품이 되었다. 이후 『생』, 『처』, 『인연』의 3부작과 『시골 교사』 등을 발표하며 시마자키 도손과 함께 대표적인 자연주의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다이쇼 시대 이후 문단의 주류에서는 다소 벗어났으나, 『일등병의 총살』 등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으며, 기행문과 온천 연구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만년에는 종교적, 정신주의적 경향을 보였으며, 1930년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2.1. 초기 생애와 교육
다야마 가타이는 군마현 다테바야시시(당시 도치기현우츠노미야현과 통합되기 전의 구 도치기현은 현재의 군마현 일부를 포함하고 있었다. 온라쿠 군 다테바야시 정)에서 다테바야시번의 번사(藩士)였던 다야마 쇼주로(田山鋿十郎)와 데쓰(てつ) 부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아키모토 씨를 섬긴 사무라이 가문이었다. 아버지 쇼주로는 생계를 위해 1876년 경시청 순사(라졸)가 되어 가족과 함께 상경했으나, 1877년 세이난 전쟁에 종군하여 히고(肥後) 이이다 산록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후 가족들은 다테바야시로 돌아왔다.
1880년 겨울, 9세의 나이로 아시카가에서 잠시 하숙 생활을 한 뒤 이듬해 상경하여 서점 점원으로 일하기도 했으나, 1882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2세부터는 번의 유학자 요시다 로켄(吉田魯献)이 운영하던 한학 서당 휴휴 서당(揖々書堂)에서 한시문을 배웠고, 14세에는 직접 한시집을 엮을 정도로 재능을 보였다. 또한 게이엔 파(桂園派)의 와카나 서양 문학에도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다.
1886년 가족 전체가 다시 도쿄로 이주한 후에는 형을 따라 마쓰우라 다쓰오(松浦辰男)에게 시를 배우기도 했다. 1890년 야나기타 구니오와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이듬해 1891년에는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위해 오자키 코요의 문하로 들어갔다. 코요의 지시로 에미 스이인의 지도를 받으며 작가로서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1896년에는 구니키다 돗포, 시마자키 도손 등과 교류하며 문학적 시야를 넓혔다.
2.2. 문단 활동
1890년 야나기타 구니오를 알게 되었고, 이듬해 1891년 오자키 고요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러나 곧 오자키와 사이가 나빠졌고, 그의 지시로 에미 스이인의 지도를 받았다. 에미 스이인의 도움으로 여행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참외밭』(瓜畑)을 처음 발표하고 이듬해부터 '가타이'(花袋)라고 칭했다. 처음에는 겐유샤(硯友社)의 영향을 받았지만, 1896년에 구니키다 돗포, 시마자키 도손을 알게 되었다. 이듬해, 돗포, 구니오 등과 『서정시』(抒情詩)를 간행하여, 여기에 40편의 시를 수록했다. 돗포를 통해 모파상 등 서양 작가를 접하고 큰 영향을 받았다. 1899년에 결혼하고, 오하시 오토와(大橋乙羽)의 소개로 하쿠분칸(博文館)에 근무하여, 교정 일을 했다.
1902년에 헤르만 주데르만의 Katzensteg에서 영감을 받은 『주자에몬의 최후』(従右衛門の最後)를 발표하여, 이것으로 작가로서 처음 성공을 거두며 역량을 인정받았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제2군 사진반 소속 종군 기자로 만주에 파견되었다. 3월 23일 도쿄를 출발하여 히로시마에서 모리 오가이를 처음 만나 자주 교류했으며(8월 15일 발열로 9월 16일 귀항, 9월 20일 귀향), 훗날 오가이의 미학 논의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이 종군 경험은 『일병』(一兵, 1908) 같은 작품의 바탕이 되었다. 그 무렵부터 자연주의 문학을 자각하고, 평론 『노골적인 묘사』(『태양』, 1904년 2월)나 소설 『소녀병』을 발표하고, 새로운 문학의 담당자로서 활약하게 되었다. 1906년 하쿠분칸에서 『문장세계』가 창간되자 편집 주임이 되었다. 『문장세계』는 처음에는 실용문 투고 잡지를 목적으로 발간되었지만, 다야마 등의 영향으로 자연주의 문학의 거점이 되었다.
1903년 여성 팬인 오카다 미치요(岡田美知代, 1885-1968)가 편지를 보내온 것을 계기로, 게르하르트 하웁트만의 희곡 『고독한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그녀를 도쿄로 오게 하여 문학 제자로 삼았다. 오카다는 1904년 2월에 도착했으나, 다야마가 3월 23일 만주로 떠나기 전까지 한 달 남짓 머물렀다. 그가 9월 20일 귀국한 후 다시 그의 집에 머물며 1906년 1월까지 지냈다. 그는 불륜 관계를 시작하지는 않았으나, 이 시기의 낭만적 긴장감을 소재로 1907년 『신소설』 9월호에 중년 작가의 여제자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그린 『이불』(蒲団)을 발표했다. 여제자에게 떠나간 남자가, 그녀가 사용하던 홑이불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고, 눈물을 흘리는 묘사는, 독자, 나아가 문단에 충격을 주었다. 이 작품에 의해, 일본의 자연주의 문학의 방향이 결정되었고, 사소설(私小説)로 알려진 일본 문학 장르를 확립했다. (실제 『이불』의 상당 부분은 3인칭 시점으로 서술된다. 1909년 1월, 오카다가 가족에게 상속권을 박탈당하자 다야마는 그녀를 양녀로 입양했다.)
『이불』 발표 이후, 『생』(生, 요미우리 신문 연재, 1908년 4월 13일-7월 19일), 『처』(妻), 『인연』(縁)의 장편 3부작, 신작 장편 소설 『시골 교사』(田舎教師, 1909년 10월 20일 간행)를 쓰고, 시마자키 도손과 나란히 대표적인 자연주의 작가가 되었다. 다이쇼 시대에 들어와서는 자연파의 쇠퇴와 신예 작가의 등장으로 점차 문단의 주류에서 밀려났다. 하지만 『일등병의 총살』 등의 작품을 정력적으로 발표했다.
1907년에는 게이샤 이이다 요네(飯田よね, 1889-?)와 불륜 관계를 시작했다. 이 경험은 불행했고 친구와 가족의 죽음으로 점철되었으며, 그 결과 그의 후기 작품은 모호하고 비관적이며 종교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이이다의 집이 재해로 파괴되자 가타이는 그녀에게 머물 곳을 제공했다. 이 시기의 관계는 소설 『백야』(百夜, 1927)에 담겨 있다.
또한 기행문에도 뛰어나, 『남선북마』(南船北馬), 『산행수행』(山行水行) 등이 있다. 또한 일본 전국의 온천을 돌아다니며 온천에 관한 책도 많이 남겼다. 하쿠분칸의 『일본 명승지지』(日本名勝地誌) 집필에 참여했고, 후에 다야마 가타이 편으로 『신선 명승지지』(新撰名勝地誌) 전 12권의 감수를 했다.
만년에는 종교적 심경에 이르러, 정신주의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다. 1928년 말 뇌출혈로 입원했고, 더 나아가 후두암에 걸렸다. 한때 회복세를 보였지만, 1930년 4월부터 병세가 악화되었다. 같은 해 5월 11일, 병문안 온 시마자키 도손에게 기뻐하는 한편, 죽음을 각오하고 심경을 전했다. 5월 12일에는 위독해져 도쿠다 슈세이, 치카마츠 키슈, 마에다 쵸, 시라이시 미츠조, 나카무라 세이코, 나카무라 하쿠요 등이 달려왔다. 다음 날인 5월 13일, 도쿄부 요요기하타마치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58세였다.
2.3. 자연주의 문학의 확립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제2군 사진반의 종군 기자로 참전했다. 이 시기 히로시마시에서 모리 오가이와 처음 만나 교류했으며, 이후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전쟁 경험은 훗날 "일등병의 총살" (1917)과 같은 작품의 바탕이 되었다.
러일전쟁 종군을 전후하여 자연주의 문학을 자각하기 시작했으며, 평론 "노골적인 묘사"(『태양』, 1904년 2월)와 소설 "소녀병" 등을 발표하며 새로운 문학의 기수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06년에는 하쿠분칸에서 창간한 잡지 『문장세계』의 편집 주임이 되었다. 『문장세계』는 당초 실용문 투고 잡지로 기획되었으나, 다야마 등의 영향으로 자연주의 문학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1907년에는 『신소설』에 중편 소설 "이불"을 발표하며 문단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중년 작가가 자신의 여제자(오카다 미치요)에게 품었던 복잡한 감정을 그린 것으로, 여제자가 떠난 뒤 그녀가 쓰던 이불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으며 눈물 흘리는 마지막 장면은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비록 실제 불륜 관계는 아니었으나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삼은 이 작품은 일본 자연주의 문학의 방향을 결정짓는 동시에, 작가 자신의 사적인 경험을 고백적으로 서술하는 사소설이라는 장르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작품 자체는 3인칭 시점으로 서술된 부분도 많다.)
"이불" 발표 이후, 다야마는 장편 3부작인 "생(生)"(요미우리 신문, 1908), "처(妻)"(1909), "연(緣)"(1910)과 장편 소설 "시골 교사"(1909) 등을 연이어 발표하며 시마자키 도손과 함께 일본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다이쇼 시대에 접어들면서 자연주의 문학의 퇴조와 새로운 문학 사조의 등장으로 문단의 중심에서는 점차 멀어졌지만, 이후에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2.4. 다이쇼 시대 이후
다이쇼 시대에 들어서면서 자연주의 문학의 쇠퇴와 새로운 작가들의 등장으로 점차 문단의 주류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일등병의 총살 등의 작품을 정력적으로 발표하며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기행문에도 뛰어나 남선북마(南船北馬), 산행수행(山行水行) 등을 남겼다. 일본 전국의 온천을 답사하며 온천 관련 저술도 다수 남겼으며, 하쿠분칸(博文館)의 일본명승지지(日本名勝地誌) 집필에 참여했고, 후일 자신의 이름으로 편집된 신선명승지지(新撰名勝地誌) 전 12권의 감수를 맡기도 했다.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에는 재해로 집이 파괴된 이이다 요네(飯田よね, 1889-?)
만년에는 종교적 심경에 이르러 정신주의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다. 1928년 말 뇌일혈로 입원했으며, 이후 후두암이 발병했다. 병세가 악화되어 1930년 5월 13일, 도쿄부 요요기하타마치(代々幡町) 자택에서 5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묘는 다마 영원(多磨霊園)에 있으며, 시마자키 도손이 쓴 글이 새겨져 있다. 유언에 따라 토장되었다고 전해진다.
3. 작품 세계
다야마 가타이는 군마현 다테바야시시 출신으로, 사무라이 계급이었던 시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세이난 전쟁 중 전사했으며, 이후 가타이는 도쿄에서 문학 수업을 받고 오자키 코요, 에미 스이인 등과 교류하며 문학 경력을 시작했다. 1896년에는 '분가쿠카이' 그룹에 합류하여 구니키다 돗포와 친구가 되었고, 그를 통해 기 드 모파상과 같은 서양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1902년 헤르만 주데르만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주에몬의 최후'로 문학적 성공을 거두었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만주에 전쟁 특파원으로 파견된 경험은 이후 '일병'(1908)과 같은 작품의 바탕이 되었다. 그의 대표작 '이불'(1907)은 사소설 장르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후 그의 작품은 개인적인 경험과 시대적 분위기의 영향으로 점차 어둡고 비관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그는 1923년 간토 대지진 등의 사건을 겪으며 글쓰기를 계속했고, 1930년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주요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 연도 | 제목 | 비고 |
|---|---|---|
| 1891 | 「瓜畑」 | 瓜畑일본어 |
| 1899 | 「ふる郷」 | ふる郷일본어 |
| 1902 | 「重右衛門の最期」 | 重右衛門の最期일본어 |
| 1907 | 「蒲団」 | 蒲団일본어, 한국어 번역: "이불" (오경 역, 소화, 1998) |
| 1908 | 「土手の家」 | 土手の家일본어 |
| 1908 | 「生」 | 生일본어, 한국어 번역: "삶" (한영옥 역, 소화, 1998) |
| 1909 | 「田舎教師」 | 田舎教師일본어, 한국어 번역: "시골선생" (김욱송 역, 도서출판 숲, 2006) |
| 1909 | 「妻」 | 妻일본어 |
| 1910 | 「縁」 | 縁일본어 |
| 1916 | 「時は過ぎ行く」 | 時は過ぎ行く일본어 |
| 1917 | 「一兵卒の銃殺」 | 一兵卒の銃殺일본어, '일병'으로도 알려짐 |
| 1917 | 「河ぞひの家」 | 河ぞひの家일본어 |
| 1917 | 「残雪」 | 残雪일본어 |
| 1919 | 「河ぞひの春」 | 河ぞひの春일본어 |
| 1920 | 「新しい芽」 | 新しい芽일본어 |
| 1924 | 「源義朝」 | 源義朝일본어 |
| 1927 | 「百夜」 | 百夜일본어 |
| 「源義経」 | 源義経일본어 | |
| 「通盛の妻」 | 通盛の妻일본어 | |
| 「再び草の野に」 | 再び草の野に일본어 |
이 외에도 종군기 '제2군 종정일기'(1905), 평론 '노골적인 묘사'(1904), 기행문 '일본일주'(1914~1916), '산수소화'(1917), 회상집 '도쿄의 30년'(1917)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남겼다.
3.1. 사소설
1903년, 여성 팬인 岡田美知代jp (1885-1968)가 다야마에게 편지를 보냈다. 게르하르트 하웁트만의 희곡 고독한 사람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다야마는 그녀가 도쿄로 와 문학 제자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 오카다는 1904년 2월에 도착했지만, 다야마가 3월 23일 만주로 떠나기 전까지 한 달 동안만 그의 집에 머물렀다. 다야마가 9월 20일에 돌아온 후 그녀는 다시 이사 와서 1906년 1월까지 함께 지냈다. 다야마는 그녀와 실제 불륜 관계를 맺지는 않았지만, 둘 사이의 낭만적인 긴장감을 그의 가장 야심 찬 작품인 이불(1907)의 소재로 사용했다. 이 작품은 다야마에게 작가로서 큰 명성을 안겨주었으며, 사소설로 알려진 일본 문학 장르를 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실제 이불의 내용은 대부분 3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어 있다. (1909년 1월, 오카다는 가족으로부터 상속을 받지 못하게 되자 다야마는 그녀를 양녀로 입양했다.)
4. 주요 작품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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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도 | 원제 | 한국어 제목/설명 | 구분 |
|---|---|---|---|
| 1891 | 瓜畑일본어 | 오이밭 | 소설 |
| 1899 | ふる郷일본어 | 고향 | 소설 |
| 1902 | 重右衛門の最期일본어 | 쥬에몬의 최후 | 소설 |
| 1904 | 露骨なる描写일본어 | 노골적인 묘사 | 평론 |
| 1905 | 第二軍従征日記일본어 | 제2군 종정 일기 | 종군기 |
| 1907 | 蒲団일본어 | 이불 | 소설 |
| 1908 | 土手の家일본어 | 둑의 집 | 소설 |
| 1908 | 生일본어 | 삶 | 소설 |
| 1909 | 田舎教師일본어 | 시골 선생님 | 소설 |
| 1909 | 妻일본어 | 아내 | 소설 |
| 1910 | 縁일본어 | 연 | 소설 |
| 1914–1916 | 日本一周일본어 | 일본 일주 | 기행문 |
| 1916 | 時は過ぎ行く일본어 | 시간은 흘러간다 | 소설 |
| 1917 | 一兵卒の銃殺일본어 | 한 병졸의 총살 | 소설 |
| 1917 | 河ぞひの家일본어 | 강가의 집 | 소설 |
| 1917 | 残雪일본어 | 잔설 | 소설 |
| 1917 | 山水小話일본어 | 산수 소화 | 기행문 |
| 1917 | 東京の三十年일본어 | 도쿄의 30년 | 회상집 |
| 1919 | 河ぞひの春일본어 | 강가의 봄 | 소설 |
| 1920 | 新しい芽일본어 | 새로운 싹 | 소설 |
| 1924 | 源義朝일본어 |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 소설 |
| 1927 | 百夜일본어 | 백야 | 소설 |
| 연도 미상 | 源義経일본어 |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 소설 |
| 연도 미상 | 通盛の妻일본어 | 토모모리의 아내 | 소설 |
| 연도 미상 | 再び草の野に일본어 | 다시 풀밭에 | 소설 |
5. 가족 관계
군마현 오라군 다테바야시정(현 다테바야시시)에서 아버지 田山 鋿十郎일본어와 어머니 데쓰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다야마 가문은 다테바야시번을 다스리던 아키모토 씨 가문의 번사였다. 아버지 쇼주로는 1876년 경시청 순사가 되어 가족과 함께 도쿄로 이주했으나, 이듬해 1877년 세이난 전쟁에 종군하여 히고 이이다 산록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후 가족은 다시 다테바야시로 돌아왔다.
가타이는 1899년에 결혼했다. 1909년 1월에는 자신의 팬이었던 岡田 美知代일본어를 양녀로 입양했다.
주요 가족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 관계 | 이름 | 비고 |
|---|---|---|
| 아버지 | 田山 鋿十郎일본어 | 다테바야시번 번사 출신, 경시청 순사. 세이난 전쟁에서 전사. |
| 어머니 | 데쓰 | |
| 형 | 다야마 미노루 (田山 実일본어, 본명: 宮人일본어) | 6세 연상. 대일본지진사료, 대일본고문서 편찬 참여. 가타이의 소설 『생』, 『시간은 흘러간다』의 모델. |
| 누나 | (이름 미상) | |
| 매형 | 石井 秀일본어 | |
| 조카 | 愛子일본어 | 이시이 슈의 딸. 가타이의 작품에 등장. |
| 배우자 | (이름 미상) | 1899년 결혼. |
| 장남 | 千造일본어 | 대학 교수 요시이에 코간의 딸을 짝사랑하여 요시이에의 집을 방문했다가 경찰에 신고당함. |
| 차녀 | 千代일본어 | 회계학자 하세가와 야스베에와 결혼했으나, 가타이의 제자 関口 鎮雄일본어와 가출했다가 돌아옴. |
| 사위 | 하세가와 야스베에 (長谷川 安兵衛일본어) | 치요의 남편. 회계학자. |
| 양녀 | 岡田 美知代일본어 | 1909년 1월 입양. |
6. 기타
* 시부야구 요요기 3-49에는 다야마 가타이가 사망한 곳임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는 1906년(메이지 39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 그의 고향인 다테바야시시에는 다야마 가타이 기념 문학관이 있으며, 같은 시 제2자료관 내에는 그가 살았던 옛집("다야마 가타이 구거")도 보존되어 있다.
* 군마현에서 널리 사용되는 조모 카루타(上毛かるた)에는 "자랑스러운 문호 다야마 가타이(誇る文豪 田山花袋)"라는 글귀가 적힌 패가 있다.
* 그의 소설 "시골 교사"의 배경이 된 사이타마현 하뉴시에는 하뉴시의 명물인 "가타이 센베이(かたい煎餅)"가 있다. 딱딱한 센베이로 오해받기도 한다.
* 2021년, 구메 마사오가 촬영했던 영상이 복원되었는데, 이 영상에서 다야마 가타이의 모습이 확인되었다. 이는 그의 모습이 담긴 최초의 영상 자료이다.
* 1923년 9월에 발생한 간토 대지진 당시, 편집자 키사키 마사루는 다야마 가타이의 집에 원고를 받으러 갔다가 그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다야마 가타이는 자신의 집 정원으로 피신해 온 조선인을 끌어내어 때렸다고 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