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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 쓰네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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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케다 쓰네요시는 1909년 메이지 천황의 외손자로 태어나 쇼와 천황의 사촌이 되었으며, 1919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다케다노미야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병 장교로 복무하며 육군 기병 학교 교관을 역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대본영 참모로 활동하며 731 부대 관련 논란에 휩싸였으며, 종전 후에는 천황 특사로 만주에 파견되어 관동군의 무장 해제를 지시했다. 1947년 신적강하로 황족 지위를 잃고 평민이 된 후, 스포츠계에서 활동하며 1962년 일본 올림픽 위원회 회장, 1967년부터 1981년까지 국제 올림픽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1992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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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 쓰네요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다케다 쓰네요시
출생일1909년 3월 4일
출생지도쿄
사망일1992년 5월 11일
아버지쓰네히사 다케다 왕
어머니마사코 쓰네 공주
배우자미쓰코 산조
자녀쓰네타다 다케다
모토코 다케다
노리코 다케다
쓰네하루 다케다
쓰네카즈 다케다
왕족 정보
가명다케다노미야
작위왕 → (황적 이탈)
경칭전하 → (황적 이탈)
아버지다케다노미야 쓰네히사 친왕
어머니쓰네히사 왕비 마사코 내친왕
자녀쓰네마사 왕
사토 모토코(모토코 여왕)
와타나베 노리코(노리코 여왕)
쓰네하루 왕
쓰네카즈
매장지도요시마오카 묘지
군사 경력
소속일본 제국
군종육군
복무 기간1930년 – 1945년
계급육군 중좌
부대731 부대
남방군
관동군
참전 전투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직책
직책육군군인(육군중좌)
섬유 회사 경영
일본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
국제 올림픽 위원회 이사
국제 올림픽 위원회 명예 위원
일본 마술 연맹 회장
일본 스케이트 연맹 회장
전국 라디오 체조 협회 회장
일본 체육 협회 전무 이사
왕위
즉위 시작1919년 4월 23일
즉위 종료1947년 10월 14일
가주 시작1919년 4월 23일
가주 종료1992년 5월 11일

2. 유년기

1909년 메이지 천황의 첫 외손자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다케다 쓰네히사 왕자이고 어머니는 메이지 천황의 여섯 번째 딸인 마사코 왕녀로, 쇼와 천황과는 사촌 관계였다.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사촌 동생이자 이웃에 살던 키타시라카와노미야 나가히사 왕과 형제처럼 지냈다.

1919년 아버지 쓰네히사 왕이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하자 10세의 나이로 다케다노미야 가문의 제2대 당주가 되었다. 사망 당시 육군 소위였던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가쿠슈인을 졸업하고 일본 귀족원에서 잠시 활동한 후, 육군 사관 학교에 진학하여 1930년 42기로 졸업하고 기병 소위로 임관했다. (일부 자료에서는 32기로 언급되기도 한다.) 특히 말을 사랑하고 마술(馬術)에 재능이 뛰어나 육군 기병 학교 교관을 맡는 등 기병 장교의 길을 걸었다. 당시 육군사관학교 동기생 중에는 대한제국의 옛 황족이었던 의친왕의 장남 이건도 있었다.

3. 군 경력

아버지 쓰네히사 왕이 제국 육군 기병 장교였던 영향으로 군인의 길을 걸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42기)하고 육군 장교로 임관했다. 1930년 8월 소위로, 1936년 8월 대위로 진급했으며, 1938년에는 육군대학교(50기)를 졸업했다.

육군대학 졸업 후 중일 전쟁 최전선 참전을 희망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하고, 만주 하이라얼의 기병 제14연대 중대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부대가 전선으로 이동할 때 황족이라는 이유로 후방으로 보내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본인이 직접 이를 거부하고 전선에 참여했다. 관동군 복무 시절 만주국 황제 푸이와 교류하며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전해진다.

1940년 8월 소령으로, 1943년 8월에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1942년부터 관동군의 재무 담당 지휘관 및 참모로 활동하며 731부대 운영에 관여했다는 비판을 받는다.[8] 그는 731부대의 최고 재무 책임자로서 행정적 책임을 맡았으며,[3] 생체실험을 포함한 부대의 반인륜적 행위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작가 스털링 시그레이브는 다케다가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아시아 각지에서 조직적인 약탈을 감독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3]

1942년 다케다와 아내 미쓰코 여왕, 두 장남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대본영 참모의 일원으로 '미야타 쓰네요시(宮田恒吉)'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필리핀 공략전, 과달카날 전투 등에 관여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라바울 등 최전선 시찰을 강행하기도 했으며, 남방군 총사령관 데라우치 히사이치 원수의 사이공 사령부에 천황의 개인 연락 장교로 파견되어 일본군의 패색이 짙은 전황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1945년 7월, 만주에서 일본 본토로 귀환하여 제1총군 참모로 복무하던 중 패전을 맞이했다. 그의 후임 관동군 참모는 세지마 류조 중령이었다. 패전 직후에는 쇼와 천황의 특사 자격으로 다시 만주로 파견되어 신징에서 관동군에게 정전 명령을 전달하고 무장 해제를 지시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3. 1. 군사 교육

아버지인 쓰네히사 왕(恒久王)이 제국 육군기병 장교였던 영향으로, 쓰네요시는 육군 군인을 지망하여 학습원을 거쳐 육군 유년 학교, 육군 사관 학교 예과로 진학했다. 1930년 7월에는 육군사관학교 본과(42기)를 기병 병과로 졸업했다. 조선 공족의 이건 공과는 동기이며, 병과와 최종 계급도 같다.

쓰네요시는 마술에 능숙하여 육군 기병 학교 교관을 맡기도 했으며, 1938년 5월 30일에는 육군 대학교 (50기)를 졸업했다.

3. 2.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1938년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후 중일 전쟁의 최전선 참전을 희망했으나, 만주 하이라얼의 기병 제14연대 제3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소속 부대가 전선으로 이동하게 되자 황족인 그를 안전한 후방으로 보내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스스로 이를 거절하고 처음으로 실제 전장에 참여했다. 관동군 시절 교류를 통해 만주국 황제 푸이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1940년 8월에는 소령으로, 1943년 8월에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1942년부터는 관동군의 재무 담당 지휘자로 활동하며 731부대의 운영 및 소위 '마루타 생체실험'에 관여했다는 비판을 받는다.[8] 그는 훗날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의 생체실험 관여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정도 생체 실험에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이 없다. 미국도 원자폭탄을 만들어 히로시마에 투하하지 않았는가"라고 반문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다니엘 바렌블랫에 따르면 다케다는 미카사노미야 친왕과 함께 이시이 시로로부터 1940년 중국 닝보에 페스트균 살포를 위해 세균 폭탄을 싣는 장면을 담은 영화를 특별 상영받았다고 한다.[4] 역사학자 할 골드는 저서 "731 부대 증언"에서 다케다가 '미야타 중령'이라는 가명으로 작전부 전략과 장교로서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했으며, 안다 근처에서 30명의 포로에게 독가스 실험을 하는 것을 지켜봤다는 부대원의 증언을 인용했다. 종전 후 한 스태프 사진가는 다케다가 만주국 핑팡의 731부대 시설을 방문하여 정문에서 사진을 찍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5]

작가 스털링 시그레이브는 다케다가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 홍콩,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금과 기타 귀중품 약탈을 감독했다고 주장한다.[3] 시그레이브에 따르면 약탈품 대부분은 필리핀의 175개 금고에 보관되었으며, 상당 부분이 전 필리핀 대통령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등에 의해 회수되었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대본영 참모의 일원으로 '미야타 쓰네요시(宮田恒吉)'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필리핀 공략전, 과달카날 전투 등에 관여했다. 그는 종종 전선 시찰을 희망하여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험 지역인 라바울 시찰을 감행하기도 했다. 또한 남방군 총사령관 데라우치 히사이치 원수의 사이공 사령부에 천황의 개인 연락 장교로 잠시 파견되어 라바울, 과달카날, 루손 등지에서 일본군의 절망적인 상황을 직접 목격했다.

1945년 7월, 만주에서 일본 본토로 돌아와 제1총군 참모로 복무하던 중 패전을 맞이했다. 그의 후임으로 관동군 참모가 된 인물은 세지마 류조 중령이었다. 패전 직후에는 쇼와 천황의 특사로 다시 만주로 파견되어 신징에서 관동군에게 정전 명령을 전달하고 무장 해제를 지시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3. 3. 731 부대 관련 논란

1942년부터 관동군의 재무 담당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731부대 운영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관동군의 최고 재무 책임자로서 731 부대에 대한 행정적 책임을 맡았으며,[3] 1943년 8월에는 중좌로 승진하며 731부대 담당 참모가 되었다.[8] 731 부대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다양한 세균과 바이러스를 이용해 인간을 대상으로 생물학 무기 연구를 수행한 부대로 악명이 높다.

다케다 쓰네요시는 731부대의 소위 '마루타'로 불린 생체실험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작가 다니엘 바렌블랫에 따르면, 다케다는 미카사노미야 친왕과 함께 1940년 중국 닝보페스트를 살포하기 위해 황실 비행기가 세균 폭탄을 싣는 장면을 담은 영상을 이시이 시로로부터 특별 상영받기도 했다.[4]

역사학자 할 골드는 저서 《731 부대 증언》에서 다케다 친왕이 '미야타 중령'이라는 가명으로 작전부 전략과 장교로서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골드는 1994년 7월 모리오카에서 열린 이시이 시로의 실험 관련 순회 전시회에서 증언한 한 청년대 참전 용사의 말을 인용했는데, 이 용사는 다케다가 헤이룽장성 안다 근처에서 30명의 포로에게 독가스 실험을 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종전 후 한 스태프 사진가는 다케다 친왕이 만주국 하얼빈시 핑팡에 있는 731 부대 시설을 방문하여 정문에서 사진을 찍었던 날을 회상하기도 했다.[5]

후일 다케다 쓰네요시는 언론과의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생체실험 참여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정도 생체 실험에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이 없다. 미국원자폭탄을 만들어 히로시마에 투하하지 않았는가"라고 반문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4. 결혼과 가족

1934년 5월 12일, 산조 기미테루 공작의 차녀 미쓰코(三條光子)와 결혼하여[1] 3남 2녀를 두었다.

구분이름한자출생년도비고
장남쓰네타다恒正1940년현 다케다 가 당주.[1] 네즈 재벌 총수이자 도부 철도 회장인 네즈 가이치로의 셋째 딸 교코와 결혼.
장녀모토코素子1942년산유식품 이사 사토 히로시와 결혼.[11]
차녀노리코紀子1943년
차남쓰네하루恒治1944년불가리아 주재 일본 대사.[2] 미쓰코시 백화점 사장 오카다 시게루의 딸 이쿠미코와 결혼.
삼남쓰네카즈恆和1947년일본 올림픽 위원회 회장.


5. 패전 이후

1947년 10월 14일 신적강하로 황족 지위를 잃고 평민이 되었다. 그는 새로운 성 '다케다'가 대중적이어서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9] 황적 이탈 직후 잠시 공직 추방되었으나, 초기에는 지바현에서 경주마를 키우거나 편물 기계 회사를 운영하며 생계를 모색했다.

이후 스포츠계로 활동 방향을 전환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승마 선수로 참가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1950년 일본 스케이트 연맹 회장을 시작으로 여러 스포츠 단체의 요직을 거쳤다. 특히 1962년 일본 올림픽 위원회 회장으로 취임하여 1964년 도쿄 올림픽1972년 삿포로 동계 올림픽 유치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위원으로도 활동하는 등 일본 스포츠계 발전에 기여했다.

1987년 자서전을 출간했으며, 1992년 83세의 나이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의 도쿄 저택이었던 다케다노미야저(竹田宮邸)는 패전 직후 세이부 그룹에 매각되어 현재 그랜드 프린스 호텔 다카나와의 귀빈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5. 1. 신적강하와 사업

1947년 10월 14일 신적강하로 인해 황족의 지위를 잃고 평민이 되었다. 당시 그는 새로운 성씨가 된 '다케다'에 대해 "다른 미야케의 성씨들과 달리 한층 대중적이어서 마음에 든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황적 이탈 직후 공직 추방 대상이 되기도 했다.[9] 전쟁과 전후의 막대한 부유세로 재산 대부분을 처분한 그는 한동안 지바현의 자택에서 경주마를 키우며 지냈다. 이후 편물 기계를 생산하는 '다케다 직물회사'를 설립하며 사업을 시작했으나 이 회사는 얼마 못 가 파산하였다.

이후 스포츠계로 방향을 전환하여, 1950년 일본 스케이트 연맹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전 1936년 베를린 올림픽승마 선수로 참가하여 "스포츠 왕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다. 1962년 일본 올림픽 위원회 회장으로 취임하여 1964년 도쿄 올림픽1972년 삿포로 동계 올림픽 유치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1967년부터 1981년까지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이 중 5년간은 집행 이사를 맡았다. 이 외에도 일본 체육 협회 전무 이사, 일본 마술 연맹 회장 등 여러 스포츠 관련 단체의 직책을 역임했으며, 체육의 날 제정에도 참여했다.

1987년 자서전 雲の上下 思い出話|구모노우에 시타: 오모이데바나시일본어를 출간했으며, 가루이자와 별장 인연으로 미치코 황후와 친밀하게 지냈다는 일화도 있다.[10]

그의 도쿄 저택이었던 다케다노미야저(竹田宮邸)는 패전 직후 세이부 그룹에 매각되어 현재 그랜드 프린스 호텔 다카나와의 귀빈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92년 5월 12일, 83세의 나이로 심부전으로 사망하였다.

5. 2. 스포츠계 활동

평소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승마 경기에 참가하여 "스포츠 왕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이 대회 단체 6위 입상마 "파레즈호"의 마주이기도 했다.

1947년 신적강하 이후 잠시 공직 추방되었으나,[9] 1950년 일본 스케이트 연맹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스포츠계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여러 스포츠 관련 단체의 요직을 맡으며 일본 스포츠계 발전에 기여했다.

1962년에는 일본 올림픽 위원회(JOC) 회장(위원장)으로 취임하여 1964년 도쿄 올림픽1972년 삿포로 동계 올림픽 유치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일본의 체육의 날 제정에도 참여했다.

1967년부터 1981년까지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이 기간 중 5년 동안은 집행 이사회의 이사를 역임했다. 이후 IOC 명예 위원으로 추대되었다.

그가 역임한 주요 스포츠 관련 직책은 다음과 같다.

단체직책
일본 스케이트 연맹회장
일본 올림픽 위원회위원장 (회장)
국제 올림픽 위원회위원, 집행 이사, 명예 위원
일본 체육 협회전무 이사
일본 마술 연맹회장
전국 라디오 체조 협회회장



한때 동시에 15개 단체의 임원을 겸임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5. 3. 사망

1987년 자서전적 에세이집인 雲の上下 思い出話|구모노우에 시타 오모이데바나시일본어(구름 위와 아래: 추억담)를 출판했다. 이후 1992년 5월 11일, 83세를 일기로 심부전으로 사망하였다.

참조

[1] 서적 The Japan Year book Nihon Gaiji Kyōkai 1943
[2] 웹사이트 http://www.bg.emb-ja[...]
[3] 웹사이트 Secret of Hirohito's hidden billions http://www.ldolphin.[...] 2012-07-10
[4] 서적 A Plague upon Humanity 2004
[5] 서적 Unit 731 Testimony
[6] 웹사이트 Genealogy https://reichsarchiv[...] 2013-11-07
[7] 웹사이트 Genealogy https://reichsarchiv[...] 2010-04-30
[8] 서적 21世紀の戦争論 昭和史から考える 文藝春秋 2016-05-20
[9] 뉴스 1947-10-17
[10] 서적 祈り 美智子皇后 文藝春秋 1999-04
[11] 간행물
[12] 서적 貴族院要覧 貴族院事務局 1947-04
[13] 간행물 帝国議会 1946-06-13
[14] 간행물 叙任及辞令 1929-10-28
[15] 간행물 叙任及辞令 1930-10-27
[16] 간행물 叙任及辞令 1931-12-28
[17] 간행물 叙任及辞令 1940-11-05
[18] 간행물 辞令二 194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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