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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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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말용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1919년 고령군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여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했으며, 중화민국, 타이완 등지에서 항일 운동을 이어갔다. 광복 후에는 한국독립당에 재가입하여 활동하다가 탈당했고, 대한민국 국방부 공보관을 역임했다. 1959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재미 교포 사회운동에 참여했으며, 199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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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말용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도말용
원래 이름都末用
로마자 표기Do Mal-yong
영어 이름Thomas Doh
출생일1899년 11월 5일
사망일1988년 11월 10일
출생지대한제국 경상북도 고령
사망지대한민국 인천
거주지대한민국 서울
본관성주(星州)
종교유교(성리학)
가족 관계
아버지도현준
어머니고령 박씨 부인
외종조부박기로
배우자초취 성주 이씨
계취 해주 최씨
자녀3남 3녀
학력
학교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경력
정당한국독립당
주요 경력한국독립당 초급행정위원
한국독립당 군사첩보행정위원
한국독립당 대표행정자치위원
직책대한민국 국방부 공보관 겸 행정관
임기1956년 11월 30일 ~ 1959년 1월 23일
소속 정당무소속
서훈
훈장1999년 8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장 추서
웹사이트
공식 웹사이트공식 사이트

2. 생애

경상북도 고령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동안 국내외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19년 고향에서 3.1 운동의 일환인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중화민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했다. 1926년 탈당 후 잠시 타이완 등지에서 생활하다 1931년 만주 지린성 지린에서 한국독립당에 재입당하여 군사 첩보 활동을 수행했다. 이듬해 다시 탈당하고 타이완으로 건너가 중일 전쟁 시기에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중국인으로 위장하며 활동하다 타이베이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1946년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여 1947년 한국독립당에 다시 참여했으나 1948년 탈당했다. 이후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근무했으며, 1959년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재미 교포 사회 활동에 참여하다 1980년 영구 귀국하였다.

2. 1. 독립 운동

경상북도 고령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동안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고향 고령에서 3.1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만세 시위를 작은외할아버지 박기로와 함께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0년 중화민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예하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하였으며, 이후 1926년 탈당 후 타이완 등지에서 소작농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31년 만주 지린성 지린에서 한국독립당에 재입당하여 군사첩보 활동을 하였으나, 이듬해 다시 탈당하고 타이완으로 건너갔다.

중일 전쟁 시기에는 일제 식민 통치하의 타이완 타이베이에서 중국인으로 위장하며 활동하였고, 그곳에서 1945년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6년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여 1947년 한국독립당에 다시 복당하여 활동하다 1948년 탈당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국방부 근무 및 미국 교민 사회 활동 등을 하였다.

2. 1. 1. 1919년 고령 4.8 만세 운동 주도

경상북도 고령(高靈) 출신이다.

1919년 4월 8일 고령군 우곡면(牛谷面) 대곡동(大谷洞)에서 전개된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만세 운동은 그의 작은외할아버지였던 박기로(朴基魯)가 계획하였다. 평소 만세 시위를 준비하던 박기로는 1919년 4월 8일 밤, 시위를 결행하기로 결심하고 도말용을 비롯한 청년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뜻을 함께하기로 한 이들은 마을 주민들에게도 계획을 알리고, 그날 오후 11시경 나팔 소리를 신호로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약속했다.

약속된 시각이 되자 도말용 등이 나팔을 불었고, 이에 동민 50여 명이 모여 나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곧바로 일제 주재소에 알려지면서 주도자들이 체포되었다. 도말용 역시 사건의 주도 공범으로 함께 체포되어, 같은 해 5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일제가 적용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19년 10월 8일 만기 출감하였다.

2. 1. 2.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한국독립당 활동

1919년 4월 8일,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대곡동에서 박기로 등이 주도한 대한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시위로 체포되어 같은 해 5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9년 10월 8일 만기 출감하였다.

이후 1920년 중화민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예하 한국독립당에 참여하여 초급행정위원 직을 맡았다. 그러나 1926년 2월 1일 한국독립당을 탈당하고 상하이를 떠나 타이완 타이난 등지에서 소작농 등으로 생활하였다.

1931년 중화민국 만저우 지방 지린성 지린으로 이동하여 한국독립당에 재입당하고 군사첩보행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1년 뒤인 1932년 다시 한국독립당을 탈당하고 지린을 떠나 타이완 타이베이로 갔다.

1945년 광복 후 1946년 11월 16일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였다. 1947년 5월 서울에서 한국독립당에 다시 복당하여 1948년 6월까지 한국독립당 대표행정자치위원을 지냈다. 1948년 6월, 대표행정자치위원직을 사임하면서 다시 한국독립당을 탈당하였다.

2. 1. 3. 중일전쟁 시기 타이완에서의 항일 운동

1932년 지린성 지린을 떠나 타이완 타이베이로 이주한 도말용은 와이셔츠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다. 그는 타이베이에 머무는 동안 1937년 발발한 중일 전쟁 소식을 접했다. 당시 타이완은 일본의 식민 통치하에 있었는데, 도말용은 중국 푸젠성 출신으로 위장하여 활동했다. 그는 푸젠어와 타이완어, 베이징어, 광둥어 등 다양한 중국 방언을 능숙하게 구사하며 타이완에 주재하던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했다. 이러한 기지를 발휘하여 그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타이베이에서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광복 후 이듬해인 1946년 11월 16일, 도말용은 마침내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였다.

2. 2. 광복 이후 활동

광복 후 1946년 11월 16일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였다. 이듬해 한국독립당에 복당하여 활동하였으나, 1948년 다시 탈당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공보관 겸 행정관으로 근무하였다. 1959년에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재미 교포 사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80년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하였다.

2. 2. 1. 한국독립당 재입당과 탈당

1931년 중화민국 만저우 지방 지린성 지린으로 건너가 한국독립당에 재입당하여 군사첩보행정위원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1년 뒤인 1932년, 해당 직위를 사퇴하고 다시 한독당을 탈당하였다. 이후 지린을 떠나 중화민국 타이완 타이베이로 이동했다.

광복 후인 1946년 11월 16일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였다. 이듬해인 1947년 5월, 미군정 하 남조선과도정부의 수도였던 서울에서 한국독립당에 다시 복당하였다. 복당 후 1947년 5월부터 1948년 6월까지 한국독립당 대표행정자치위원으로 활동했다. 1948년 6월, 대표행정자치위원 직위를 퇴임하면서 한독당을 다시 탈당하였다.

2. 2. 2. 대한민국 국방부 공보관 겸 행정관

1956년 11월 30일부터 1959년 1월 23일까지 대한민국 국방부 공보관 겸 행정관을 지냈다.

2. 2. 3. 미국 이주와 재미 교포 사회운동

1959년 11월 26일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다. 이후 21년 동안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며, 미국에 사는 대한민국 교민들의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 1980년 12월 6일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하였다.

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9년 8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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