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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토공석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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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토공석공(DEST)은 1938년 베를린에서 설립된 회사로, 건축 자재 조달, 노예 노동 조직, 채석장 운영을 목적으로 했다. 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가 창설했으며, 친위대 경제 부문 책임자인 오스발트 폴이 직접 경영했다. DEST는 강제 수용소 죄수들을 노예 노동력으로 착취했으며, 이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범 혐의의 주요 원칙 중 하나가 되었다. 1943년 이후 군수 산업을 담당하게 되었고, 항공기 동체, 카빈총 등을 생산하여 메서슈미트 등 회사에 공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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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토공석공 - [회사]에 관한 문서
개요
회사 종류유한책임회사
설립1938년
해산1948년
본사 위치베를린
산업건축자재
모회사SS (나치 친위대)
상세 정보
독일어 명칭Deutsche Erd- und Steinwerke GmbH
약칭DEST
운영주로 강제 노동 수용소 수감자들을 이용하여 건축 자재를 생산하고 채석장을 운영했다.
관련 인물오스발트 폴
추가 정보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SS에 의해 운영됨.

2. 역사

독일토공석공(DEST, Deutsche Erd- und Steinwerke GmbHde)은 1938년 4월 친위대에 의해 설립되어[5] 나치 독일의 건축 프로젝트를 위한 자재 조달 및 강제 수용소 노동력 관리를 담당했다. 초기에는 아돌프 히틀러알베르트 슈페어가 구상한 대규모 건축 계획에 필요한 석재 및 벽돌 생산에 주력했으며, 이를 위해 다수의 강제 수용소를 운영하며 수감자들을 노예 노동에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극심한 인권 유린이 자행되었으며, 이는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오스발트 폴과 같은 주요 책임자들이 전범으로 처벌받는 근거가 되었다.

1943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황 변화와 연합군의 공습으로 인해 건설 사업이 어려워지자, DEST는 군수 산업으로 사업 영역을 일부 확장하여 항공기 부품 등을 생산하기도 했다.[7] 그러나 전쟁 말기까지도 회사 매출의 약 70%는 여전히 채석 및 건자재 생산에서 발생하여, 본래의 성격을 유지했다.[8]

2. 1. 설립 배경

독일토공석공(Deutsche Erd- und Steinwerke GmbH, 약칭 ''DEST'')은 1938년 4월 29일 베를린에서 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창설된 유한회사(GmbH)이다.[5] 이 회사는 친위대 경제관리본부(SS-Wirtschafts- und Verwaltungshauptamt, 약칭 ''WHVA'')의 관리하에 운영되었으며, 힘러를 포함한 친위대 고위 간부들이 주주로 이름을 올렸다.

DEST의 설립 목적은 나치 독일의 거대 건축 프로젝트에 필요한 건축 자재를 조달하고,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을 이용한 노예 노동을 조직하며, 채석장 운영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이는 총통 아돌프 히틀러와 베를린 건설 총감 알베르트 슈페어가 구상했던 대규모 건축 계획을 위한 자재 공급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었다. 회사의 정관에는 주요 업무로 "1. 채석장 개발 및 천연석 채석, 2. 벽돌 제조, 3. 도로 건설" 등이 명시되어 있었다.[5]

회사의 실질적인 경영은 친위대 경제 부문 책임자였던 오스발트 폴이 담당했으며, 운영 자금은 주로 드레스너 은행으로부터 조달되었다.[6] 노동력은 전적으로 친위대가 운영하는 강제 수용소의 수감자들로 충당되었는데, 이들은 극도로 잔혹한 조건 하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DEST는 특히 채석장에서 대부분 유대인이었던 수감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데 주력했으며, 이러한 비인간적인 처사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범 혐의의 주요 근거 중 하나가 되었다. 프로그램 책임자였던 오스발트 폴은 1947년 전범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1951년 처형되었다.

DEST의 운영과 밀접하게 연관된 강제 수용소들은 벽돌 제조에 적합한 토양을 갖추고 있거나 기존의 벽돌 공장 또는 채석장과 인접한 지역에 전략적으로 배치되었다. 이러한 수용소로는 작센hausen(1936년 설립), 부헨발트(1937년), 플로센뷔르크(1938년), 마우트하우젠(1938년), 나츠바일러-스트루트호프(1939년), 그로스 로젠(1940년), 노이엔감메(1940년) 등이 있다.

초기에 DEST는 건축 자재 생산에 주력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이 격화되면서 1943년부터는 군수 산업으로 사업의 초점을 옮겼다. 독일 주요 도시들이 연합군의 공습으로 파괴되면서 건설 사업의 지속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후 DEST는 독일 항공기 제조사 등의 하청 업체로서 기능하며 Bf 109, Me 262와 같은 항공기 부품 및 총기류 생산에 관여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말기까지 회사 매출의 약 70%는 여전히 채석 사업에서 발생하여 건자재 공급업체로서의 성격을 유지했다.[8]

2. 2. 강제 수용소 노동력 착취

1938년 4월 29일 베를린에서 설립된 독일토공석공(DEST, Deutsche Erd- und Steinwerke GmbH)은 친위대 경제행정본부(SS-WVHA)의 관리 하에 건축 자재 조달, 노예 노동 조직, 채석장 운영 감독을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이 회사는 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가 1938년 4월 창설한 유한회사(GmbH) 형태로, 힘러를 비롯한 친위대 간부들이 주주로 참여했다. DEST의 직접적인 경영은 친위대 경제 부문 책임자인 오스발트 폴이 맡았으며, 경영 자금은 대부분 드레스너 은행에서 조달했다.[6]

DEST 정관에 명시된 주요 업무는 다음과 같다.[5]

구분내용
1채석장 개발 및 천연석 채석
2벽돌 제조
3도로 건설



DEST는 강제 수용소의 수감자들을 노동력으로 혹사시켰다. 이를 위해 벽돌 제조에 적합한 토양이나 기존 벽돌 공장, 채석장과 가까운 곳에 아래와 같은 수용소들을 건설했다.

수용소설립 연도
작센hausen1936년
부헨발트1937년
플로센뷔르크1938년
마우트하우젠1938년
나츠바일러-스트루트호프1939년
그로스 로젠1940년
노이엔감메1940년



DEST는 채석장에서 주로 유대인 수감자들을 포함한 노예 노동력을 착취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력은 극도로 잔혹하게 다루어졌으며, 이러한 비인간적인 착취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다루어진 주요 전범 혐의 중 하나가 되었다. 베를린에 본부를 두고 프로그램을 총괄했던 SS-Obergruppenführer 오스왈드 폴은 1947년 뉘른베르크에서 전범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1951년에 처형되었다.

초기 DEST는 총통 아돌프 히틀러와 베를린 건설 총감 알베르트 슈페어가 구상했던 거대 건축 프로젝트를 위한 자재 생산에 주력했다. 그러나 1943년 이후 연합군의 공습으로 독일 도시들이 파괴되면서 건설 사업 추진이 불가능해지자, DEST는 석재 산업에서 군수 산업으로 사업 방향을 전환했다.[7] 이 시기부터 DEST는 친위대(SS)가 주요 전쟁 산업에 깊숙이 관여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장크트 게오르겐과 구젠에 위치한 산업 단지에서는 Bf 109, Me 262와 같은 항공기 동체, 카빈총, 기관총 등을 생산하여 BFW, 메서슈미트, 슈타이어-다임러-푸흐와 같은 기업에 주요 부품 공급 업체가 되었다. 구젠 및 마우트하우젠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을 동원하여 사업을 운영하기 위해, DEST는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장크트 게오르겐 안 데어 구젠 마을에 본부인 Granitwerke Mauthausen을 운영했는데, 이곳은 가장 크고 중요한 산업 그룹(Werkgruppe)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EST의 전체 매출에서 채석 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쟁 말기까지 70%에 달했으며, 건자재 제조업체로서의 기본적인 성격은 끝까지 유지되었다.[8]

2. 3. 군수 산업으로의 전환

1943년 이후 독일의 여러 도시가 연합군의 공습을 받게 되면서 건축 사업 추진이 어려워지자, DEST는 기존의 석재 및 건축 자재 생산 중심에서 군수 산업으로 업무 초점을 변경했다.[7] 이 시기부터 DEST는 SS가 주요 전쟁 관련 산업에 관여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DEST는 여러 강제 수용소 내에 작업장을 마련하고, 독일의 주요 항공기 제조사들의 하청 생산 기지로 기능했다.[7] 예를 들어, 마우트하우젠 강제 수용소에서는 메서슈미트 사의 하청을 받아 항공기 생산을 지원했으며, 나츠바일러 강제 수용소에서는 융커스,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에서는 하인켈과 협력하여 부품 생산 등을 담당했다. 특히 장크트 게오르겐과 구젠의 산업 단지에서는 Bf 109, Me 262와 같은 항공기 동체와 카빈총, 기관총 등을 생산하여 BFW, 메서슈미트, 슈타이어-다임러-푸흐 등 주요 방산업체에 납품하는 핵심 공급처가 되었다. 또한,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와 같은 일부 수용소에서는 기존의 벽돌 공장을 대전차포 생산 공장으로 개조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군수 산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음에도 불구하고, DEST의 전체 매출에서 채석 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쟁 말기까지 약 70%에 달했으며, 건축 자재 생산 기업으로서의 기본적인 성격은 끝까지 유지되었다.[8]

2. 4. 종전과 전범 재판

독일토공석공(DEST)은 채석장에서 주로 유대인이었던 노예 노동력을 잔혹하게 착취했다. 이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다루어진 전범 혐의의 주요 근거 중 하나가 되었다. 프로그램 책임자였던 SS 친위대 최고지도자 오스왈드 폴은 1947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범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1951년에 처형되었다.

3. 사업

Deutsche Erd- und Steinwerke GmbH|도이체 에르트 운트 슈타인베르케 게엠베하de(DEST)는 설립 초기 나치 독일의 대규모 건축 계획에 필요한 석재 확보를 위해 강제 수용소의 채석장 운영을 핵심 사업으로 삼았다. 부헨발트, 플로센뷔르크 등 여러 곳의 채석장을 인수하고 기계화 등을 통해 생산량을 늘렸으며, 점령지까지 확대하여 운영했다.

채석 사업 외에도 작센하우젠 등지의 벽돌 공장을 인수·확장하며 건축 자재 생산에도 관여했으나, 이는 전체 사업에서 부차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심화되면서 1943년부터는 사업의 중심을 군수품 생산으로 전환했다. 기존 시설을 활용하거나 개조하여 메서슈미트, 융커스, 하인켈 등 독일 군수 기업의 하청 생산 기지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는 친위대가 전쟁 경제에 깊숙이 관여하는 주요 통로가 되었다. 이러한 모든 사업 활동의 기반에는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강제 노동 착취가 있었다.

3. 1. 채석 사업

Deutsche Erd- und Steinwerke GmbH|도이체 에르트 운트 슈타인베르케 게엠베하de(DEST)는 1938년 4월 29일 베를린에서 설립되어 친위대 경제행정본부(WHVA)의 관리하에 운영되었다. 주요 목적은 건축 자재 조달, 강제 노동력 동원 및 관리, 그리고 채석장 운영 감독이었다. 설립 초기부터 채석 사업은 DEST의 핵심 업무였다.

나치 독일은 강제 수용소 부지를 선정할 때 벽돌 제조에 적합한 토양이나 기존 벽돌 공장, 채석장과의 인접성을 중요하게 고려했다. 작센hausen(1936년), 부헨발트(1937년), 플로센뷔르크(1938년), 마우트하우젠(1938년), 나츠바일러-스트루트호프(1939년), 그로스 로젠(1940년), 노이엔감메(1940년) 등이 이러한 기준에 따라 선택된 대표적인 예이다.

DEST는 설립 첫해에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의 채석장을 인수했으며, 이후 여러 강제 수용소의 채석장을 차례로 확보했다.

연도확보한 채석장 위치
1938년 이전부헨발트, 플로센뷔르크, 마우트하우젠
1939년그로스-로젠
1941년나츠바일러 (알자스 지역)
1942년 5월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특히 플로센뷔르크 강제 수용소에서는 양질의 화강암이 생산되었으며, 생산량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계화가 이루어져 DEST 초기 성과에 크게 기여했다. 1941년에는 점령하 프랑스 알자스 지역 북부에서 발견된 붉은 빛의 화강암 채굴을 위해 알베르트 슈페어하인리히 힘러에게 의뢰하여 DEST가 채굴장을 설치하고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을 동원했다. 이곳이 바로 나츠바일러 강제 수용소이다.

DEST는 채석장에서 주로 유대인을 포함한 수감자들을 노예 노동력으로 동원하여 극심하게 착취했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노동력 착취는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다루어진 주요 전범 혐의 중 하나가 되었다. 이 프로그램을 책임졌던 베를린 주둔 친위대 오스왈드 폴(SS-Obergruppenführer)은 1947년 뉘른베르크에서 전범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1951년에 처형되었다.

1943년부터 DEST는 채석 사업에서 병기 생산으로 사업의 초점을 전환했다. 이 시기부터 DEST는 SS가 주요 전쟁 산업에 진출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오스트리아 장크트 게오르겐과 구젠의 산업 단지가 대표적인 예로, 이곳에서 DEST는 BFW, 메서슈미트, 슈타이어-다임러-푸흐와 같은 회사에 Bf 109, Me 262 전투기 동체, 카빈총, 기관총 등을 공급하는 주요 업체가 되었다. 이를 위해 DEST는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장크트 게오르겐 안 데어 구젠에 본부인 'Granitwerke Mauthausen|그라니트베르케 마우트하우젠de'을 운영했으며, 이는 DEST의 가장 크고 중요한 산업 그룹(Werkgruppe)이었다.

3. 2. 벽돌 제조

DEST의 설립 목적 중 하나는 건축 자재 조달이었으며, 이는 WHVA의 관리하에 이루어졌다. 벽돌 제조는 DEST의 주요 사업 분야 중 하나로 간주되었다.

나치 강제 수용소 부지를 선정할 때, 벽돌 제조에 적합한 토양과의 인접성 또는 기존 벽돌 공장과의 근접성이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작센하우젠, 부헨발트, 플로센뷔르크, 마우트하우젠, 나츠바일러-스트루트호프, 그로스 로젠, 노이엔감메 등의 수용소 위치가 결정되었다.

벽돌 제조 사업은 DEST 전체 수익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았지만, 책임자였던 오스왈드 폴은 기업 전략상 이 분야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DEST 설립 첫해인 1938년,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에 있던 기존 벽돌 공장을 인수하고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규모를 크게 확장했다. 이후 1942년 1월에는 슈투트호프 강제 수용소에도 벽돌 공장 세 동을 추가로 건설하며 생산 능력을 늘려나갔다. 이러한 벽돌 공장 운영에는 수용소 수감자들의 강제 노동이 동원되었다.

3. 3. 병기 제조

1943년, 독일토공석공(DEST)은 기존의 석재 산업 중심에서 벗어나 병기 산업으로 활동의 초점을 전환했다. 이 시기부터 DEST는 SS가 주요 전쟁 산업에 진출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장크트 게오르겐 안 데어 구젠과 구젠 강제 수용소에 위치한 산업 단지를 통해 이러한 변화가 두드러졌다.

DEST는 이곳에서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을 동원하여 메서슈미트 Bf 109메서슈미트 Me 262와 같은 전투기의 동체, 카빈총, 기관총 등을 생산했다. 생산된 물품은 메서슈미트, 슈타이어-다임러-푸흐와 같은 군수 기업에 주요 공급 업체로서 납품되었다. 이러한 사업을 운영하기 위해 DEST는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장크트 게오르겐 안 데어 구젠 마을에 본부인 'Granitwerke Mauthausen'를 두었으며, 이곳은 가장 크고 중요한 산업 그룹("Werkgruppe")으로 기능했다.

병기 생산은 다른 강제 수용소로도 확대되었다. 마우트하우젠 강제 수용소에서는 메서슈미트사의 하청 기업으로서 항공기 생산을 지원했으며, 나츠바일러 강제 수용소에서는 융커스,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에서는 하인켈과 협력하여 유사한 생산을 진행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기존의 벽돌 공장을 대전차포 공장으로 개조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DEST의 이러한 병기 생산은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의 잔혹한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채석장에서 유대인을 중심으로 한 노예 노동력 착취는 매우 심각했으며, 이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다루어진 주요 전범 혐의 중 하나가 되었다. 이 프로그램을 총괄했던 ''SS-Obergruppenführer'' 오스왈드 폴은 1947년 뉘른베르크에서 전범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1951년에 처형되었다.

4. 기타

참조

[1] 서적 St. Georgen-Gusen-Mauthausen – Concentration Camp Mauthausen Reconsidered BoD, Norderstedt 2008
[2] 서적 Business and industry in Nazi Germany Berghahn Books 2004-03
[3] 웹사이트 United States Nuremberg Military Tribunals (NMT). NMT 4 U.S.A. vs. Pohl Et. Al. Harvard Law School Library, Nuremberg Trials Project. http://www.nuremberg[...] 2010-03-01
[4] 서적 St. Georgen – Gusen – Mauthausen: Concentration Camp Mauthausen Reconsidered
[5] 문서 長谷川、p.231
[6] 문서 長谷川、p.232
[7] 문서 長谷川、p.234
[8] 문서 長谷川、p.234
[9] 문서 長谷川、p.231
[10] 문서 グレーバー、p.153
[11] 문서 長谷川、p.231
[12] 문서 グレーバー、p.153
[13] 문서 長谷川、p.232
[14] 문서 長谷川、p.232
[15] 문서 山下、p.152
[16] 서적 St. Georgen-Gusen-Mauthausen – Concentration Camp Mauthausen Reconsidered BoD, Norderstedt 2008
[17] 서적 Business and industry in Nazi Germany Berghahn Books 2004-03
[18] 웹사이트 United States Nuremberg Military Tribunals (NMT). NMT 4 U.S.A. vs. Pohl Et. Al. Harvard Law School Library, Nuremberg Trials Project. http://www.nuremberg[...] 201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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