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덴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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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드레스덴 폭격은 1945년 2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영국 공군과 미국 육군 항공대가 독일 드레스덴에 가한 연합군의 공습을 말한다. 이 폭격은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고성능 폭탄과 소이탄을 사용하여 도시 전체에 화재를 일으키는 '화재 폭풍'을 유발했다. 당시 드레스덴은 군수 산업 시설과 피난민이 밀집해 있었으며, 폭격으로 인해 막대한 인명 피해와 도시 파괴가 발생했다.
폭격의 배경에는 소련군의 진격을 지원하고 독일군의 병력 이동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었으며, 얄타 회담에서 드레스덴이 공격 목표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드레스덴 폭격은 군사적 필요성, 민간인 피해 규모, 종전 직전의 공격 시점 등으로 인해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나치 독일과 소련은 이 사건을 선전전에 이용했다.
전후 드레스덴은 재건되었으며, 프라우엔키르헤, 젬퍼 오페라하우스 등 랜드마크 복원에 힘썼다. 드레스덴 폭격은 문학 작품과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으며, 현재까지도 역사적, 도덕적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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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덴 폭격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분쟁 | 드레스덴 공습 |
일부 | 서부 전선 |
날짜 | 1945년 2월 13일 - 1945년 2월 15일 |
장소 | 독일 드레스덴 |
결과 | 연합군의 승리 드레스덴의 주요 명소 파괴 도시 공습을 둘러싼 윤리 문제 대두 독일군에 심각한 타격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미국 공군 영국 공군 |
지휘관 | |
전력 | |
전력 1 | 769대 영국 공군 랭커스터 중폭격기 9대 영국 공군 모스키토 중형 폭격기 527대 미국 육군 항공대 B-17 플라잉 포트리스 중폭격기 784대 미국 육군 항공대 P-51 머스탱 전투기 |
전력 2 | 28대 메서슈미트 Bf 110 야간 전투기 대공포 |
사상자 및 피해 | |
사상자 1 | 7대 항공기 (B-17 1대, 랭커스터 6대, 승무원 포함) |
사상자 2 | 최대 25,000명 사망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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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945년 초, 독일군은 모든 전선에서 퇴각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다. 서방 연합국들은 전략폭격기를 이용하여 소련군을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 계획은 독일군과 난민에게 혼란을 야기하고 서부에서 독일군의 병력 증강을 방해하기 위해 베를린과 여러 동부 도시들을 폭격하는 것이었다.[95]
1945년 초, 독일군은 모든 전선에서 후퇴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다. 2월 8일, 소련군은 오데르 강을 건너 베를린에서 약 70km 떨어진 곳에 진지를 구축했다.[97] 윈스턴 처칠이 작성한 영국 합동 정보 소위원회 보고서는 소련이 독일 동부 방어선을 무너뜨리면 4월 중순까지 독일이 붕괴될 수 있다고 예측했다. 이 보고서는 소련이 실레시아를 점령하지 못하게 막는다면 독일이 11월까지 버틸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동부 전선에서 소련을 지원하는 것은 전쟁을 단축할 수 있었다.[98]
1944년 중반, 천둥소리 작전이라는 대규모 공중폭격 계획이 논의되었으나 8월 16일 무기한 연기되었다.[96] 이후 이 계획은 재검토되어 보다 제한적인 작전으로 결정되었다.[96] 1945년 1월 22일, RAF(영국 왕립 공군)의 폭격기작전국장 시드니 버프턴 공군 준장은 독일군의 사기에 불리한 영향을 줄 소련의 현 공세를 지원하기 위해 RAF가 동격 공습을 벌이는 것을 제안했다.[95]
얄타 회담에서 소련 참모차장인 알렉세이 안토노프 장군은 베를린과 라이프치히 간 연결을 공중 폭격으로 무력화시켜 독일군 병력 증강을 방해하는 방안을 제기했다. 얄타에 있던 찰스 포털 경은 소련과 논의할 목표 대상 목록을 요청했고, 목록에는 베를린과 드레스덴이 포함되었다.[97]
당시 드레스덴은 독일에서 7번째로 큰 도시였으며, RAF에 따르면 폭격받지 않고 남아있는 시가지가 가장 넓은 도시였다.[98] 미 공군 역사국 보고서에 따르면, 드레스덴에는 독일의 전쟁 물자를 지원하는 110개의 공장과 5만여 명의 노동자가 있었다.[97] 그러나, 드레스덴의 군수 산업 기여도가 계획자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중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98]
3. 폭격
1944년 중반, 썬더클랩 작전이라는 코드명으로 베를린과 다른 동부 도시들에 대한 대규모 공중 공격이 검토되었지만, 8월 16일에 중단되었다.[99] 이후 재검토되어 더 제한적인 작전을 수행하기로 결정되었다.[100] 1945년 1월 22일, RAF 폭격기 작전 국장 시드니 버프턴은 공군참모차장 노먼 보텀리에게 썬더클랩 작전 시기를 소련 공세를 지원하는 공습으로 맞추면 폭격이 독일 사기에 더 큰 영향을 줄 것이라는 내용의 각서를 보냈다.[101] 1월 25일, 합동 정보 위원회는 이 아이디어를 지지했고, 울트라 기반 정보에 따르면 서부에 배치된 수십 개의 독일 사단이 동부 전선을 지원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었고, 이 병력 이동을 차단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여야 했다.[102] 폭격사령부의 AOC-in-C 아서 해리스는 "폭격기 해리스"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지역 폭격의 열렬한 지지자였다.[11] 그는 켐니츠, 라이프치히, 드레스덴에 대한 동시 공격을 제안했다.[103] 그날 저녁 처칠은 공군장관 아치볼드 싱클레어에게 이 제안을 수행하기 위한 계획을 물었다. 공군참모총장 찰스 포털은 베를린에 대한 대규모 공격과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켐니츠 또는 심각한 공습이 동부에서의 피난을 혼란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서부에서의 군대 이동을 방해할 다른 도시에 대한 공격에 사용 가능한 노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답했다.[104]
처칠은 이 대답에 만족하지 못했고, 1월 26일 싱클레어에게 작전 계획을 요구했다.[105] 싱클레어는 보텀리에게 접근했고, 보텀리는 해리스에게 달빛과 날씨가 허락하는 대로 베를린,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켐니츠를 공격하여 "성공적인 러시아군의 진격 중 위에서 언급한 도시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하는 특별한 목표"로 공격할 것을 요청했다.[106] 1월 31일, 보텀리는 포털에게 드레스덴과 다른 도시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은 "동부에서의 민간인 대피에 큰 혼란을 야기하고 다른 전선에서의 증원 이동을 방해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107]
2월 4일 얄타 회담에서 소련 총참모부 부총장 알렉세이 안토노프 장군은 공중 폭격으로 베를린과 라이프치히의 교차로를 마비시켜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증원을 방해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얄타에 있던 포털은 보텀리에게 소련과 논의할 목표 목록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보텀리의 목록에는 석유 공장, 탱크 및 항공기 공장, 베를린과 드레스덴 도시가 포함되었다.[108]
당시 RAF(영국 왕립 공군)에 따르면, 드레스덴은 독일에서 일곱 번째로 큰 도시이자 남아있는 가장 큰 미폭격 도시 지역이었다.[109] 테일러는 1942년 공식 도시 안내서에서 드레스덴을 "나치 독일의 주요 산업 지역 중 하나"라고 묘사했으며, 1944년 독일군 최고 사령부 무기국은 127개의 중대형 공장과 작업장이 군에 군수품을 공급하고 있다고 기록했다.[110]
미 공군 역사부는 폭격에 대한 국제적 우려에 따라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 보고서는 1978년 12월까지 기밀로 분류되었다.[111] 이 보고서에 따르면, 폭격 당시 드레스덴에는 독일의 전쟁 노력을 지원하는 110개의 공장과 5만 명의 노동자가 있었다.[12] 보고서는 항공기 부품 공장, 독가스 공장(Chemische Fabrik Goye and Company), 대공포 및 야포 공장(Lehman), 광학 제품 공장(Zeiss Ikon AG), 전기 및 X선 장비를 생산하는 공장( AG), 기어와 디퍼렌셜(Saxoniswerke), 전기 게이지(Gebrüder Bassler)가 있었다고 밝혔다. 또한 병영, 판잣집 캠프 및 탄약 저장소를 언급했다.[13] 미 공군 보고서에서는 드레스덴의 두 교통로가 군사적으로 중요하다고 밝혔다. 하나는 독일에서 체코슬로바키아로 이어지는 남북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중부 유럽 고지대를 따라 동서 방향이다.[14] 이 도시는 베를린-프라하-빈 철도선과 뮌헨-브레슬라우, 함부르크-라이프치히 철도선의 교차점에 있었다.[14]
폭격 당일 밤 조종사들에게 배포된 RAF의 메모에는 폭격의 이유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드레스덴 공습은 1945년 2월 13일 미국 육군 항공대(USAAF) 제8 공군의 폭격으로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유럽 전역에 걸친 악천후로 인해 미국 육군 항공대의 작전은 불가능해졌다. 결국 첫 번째 공습은 영국 왕립 공군 폭격 사령부(RAF Bomber Command)가 담당하게 되었다. 공습은 2차례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었는데, 두 번째 폭격기들이 첫 번째 공습 3시간 후에 공격하여 구조대가 화재 진압을 시도하는 시점에 다시 공격하는 것이었다.[113]
영국 항공기 중 첫 번째 기체는 중앙유럽 표준시(CET) 오후 5시 20분경 이륙했다. 이는 폭격 사령부 제5비행단(No. 5 Group)의 제83비행대대(No. 83 Squadron) 소속 랭커스터 폭격기들로 구성된 부대였는데, 이들은 길잡이 부대(Pathfinders) 또는 조명탄 부대 역할을 맡아 드레스덴을 찾아 독일군이 "크리스마스 트리"라고 부르는 마그네슘 낙하산 조명탄을 투하하여 드레스덴을 밝히고 표적을 위한 표시를 하는 역할을 했다. 영국을 떠난 다음 항공기는 쌍발 모스키토 표적 표시기 항공기로, 이들은 표적 지역을 식별하고 표적 표시기(TI)를 투하하여 폭격기들이 조준할 수 있도록 했다.[114] 공습은 도시의 중세 알트슈타트(Altstadt, 구시가지) 옆에 있는 오스트라게헤게(Ostragehege) 경기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곳은 밀집된 매우 가연성의 목조 건물들이 즐비했다.[115]
"플레이트 랙(Plate Rack)"이라고 불리는 주요 폭격대는 길잡이 부대 직후에 이륙했다. 이 254대의 랭커스터 폭격기 부대는 500톤의 고성능 폭약과 375톤의 소이탄("소이탄")을 탑재했다. 총 20만 개의 소이탄이 있었고, 고성능 폭약 폭탄의 무게는 약 226.80kg에서 약 1814.37kg 범위였는데, 2톤짜리 블록버스터 폭탄("쿠키")은 전체 대형 건물이나 거리를 파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블록버스터"라고도 불렸다. 고성능 폭약은 상수도관을 파열시키고 지붕, 문, 창문을 날려 건물 내부를 노출시켜 공기 흐름을 만들어 소이탄에 의해 발생하는 화재를 확산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랭커스터 폭격기들은 솜(Somme) 강 근처 프랑스 상공을 지나 쾰른(Cologne) 북쪽 독일 상공으로 진입했다. 오후 10시, 뵈렌(Böhlen)으로 향하는 부대는 플레이트 랙(Plate Rack)으로부터 분리되어 엘베 강(Elbe)을 향해 남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때까지 10대의 랭커스터 폭격기가 작전 불능 상태가 되어 드레스덴으로 향하는 폭격기는 244대로 줄었다. 드레스덴에서는 오후 9시 51분(CET)에 공습 경보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모스키토기에 탑승한 주폭격대장(Master Bomber) 모리스 스미스(Maurice Smith) 소령(Wing Commander)은 랭커스터 폭격기들에게 "관제탑에서 플레이트 랙 부대에게: 계획대로 붉은색 표적 표시기의 빛을 향해 진입하여 폭격하십시오. 계획대로 붉은색 TI의 빛을 향해 폭격하십시오."라고 명령했다. [18]
첫 번째 폭탄은 오후 10시 13분에 투하되었고, 마지막 폭탄은 오후 10시 28분에 투하되어 랭커스터 폭격기들이 881.1톤의 폭탄(고성능 폭약 57%, 소이탄 43%)을 투하했다. 폭격을 받은 부채꼴 모양의 지역은 길이가 약 2.01km였고, 가장 넓은 부분은 약 약 2.82km였다.[19]
3시간 후, 두 번째 공격은 제1, 제3, 제6, 제8비행단(Group) 소속 랭커스터 폭격기들이 수행했다. 제8비행단은 길잡이 부대였다. 이때쯤에는 불타는 도시에서 발생하는 수천 개의 화재가 지상에서 약 96.56km 이상 떨어진 곳에서도 보일 정도였고, 제2차 공습 부대는 약 144.84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처음 발생한 화재를 볼 수 있었다. [20] 따라서 길잡이 부대는 표적을 확장하기로 결정하고, 첫 번째 공습에서 피해를 입지 않은 드레스덴 중앙역(Dresden Hauptbahnhof)과 그로서 가르텐(Großer Garten) 공원을 포함하여 화재 폭풍의 양쪽에 조명탄을 투하했다. [21] 새벽 1시 21분부터 1시 45분 사이에 529대의 랭커스터 폭격기가 1,800톤이 넘는 폭탄을 투하했다.
2월 14일 오전, 제8항공군 제1폭격사단 소속 미 육군 항공대(United States Army Air Force) 폭격기 431대가 정오 무렵 드레스덴을 폭격할 예정이었다. 드레스덴 상공의 연기 기둥은 이제 약 약 4572.00m에 달했고, 접근하는 폭격기들에게 분명하게 보였다.
주요 자료들은 목표 지점이 도시 중심부 근처의 분류장이었는지, 아니면 도시 지역 중심부였는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제1폭격사단 사령관이 상급 사령관에게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날씨가 좋다면 드레스덴의 도시 지역 중심부가 목표 지점이었다. 만약 구름이 드레스덴을 가렸지만 켐니츠가 맑다면, 켐니츠가 목표가 되었다. 두 곳 모두 가려져 있다면, H2X 레이더를 사용하여 드레스덴 중심부를 폭격할 예정이었다. 드레스덴 폭격에 사용된 폭탄 중 약 40%가 소이탄이었는데, 이는 미국 육군 항공대가 정밀 폭격에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비율보다 영국 공군의 도시 파괴용 폭격 혼합 비율에 훨씬 가까웠다.
B-17 플라잉 포트리스(B-17 Flying Fortress) 316대가 드레스덴을 폭격했고, 771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431대 중 나머지 115대는 목표를 잘못 식별했다. 60대가 프라하를 폭격하여 153톤의 폭탄을 투하했고, 다른 폭격기들은 브뤼크(Brüx)와 필젠(Pilsen)을 폭격했다. 379 폭격대는 12시 17분에 드레스덴 폭격을 시작했는데, 도시 중심부 서쪽 프리드리히슈타트 지역의 분류장을 목표로 했으며, 이 지역은 연기와 구름에 가려져 있지 않았다. 303 폭격대는 379 폭격대보다 2분 늦게 드레스덴 상공에 도착했는데, 시야가 구름에 가려져 있어 H2X 레이더를 사용하여 드레스덴을 폭격했다. 303 폭격대 뒤를 따른 폭격대(92, 303, 306, 379, 384, 457 폭격대)도 드레스덴이 구름에 가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H2X 레이더를 사용했다. H2X 레이더 조준으로 인해 드레스덴 지역에 폭탄이 넓게 흩어졌다. 드레스덴 공격 마지막 폭격대는 306 폭격대였고, 12시 30분에 공격을 종료했다.
2월 15일, 제1폭격사단의 주요 목표였던 라이프치히 근처 뵈렌(Böhlen) 합성유 공장이 구름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폭격대들은 보조 목표인 드레스덴으로 이동했다. 드레스덴 또한 구름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폭격대들은 H2X 레이더를 사용하여 도시를 공격했다. 목표 상공에 도착한 첫 번째 폭격대는 401 폭격대였지만, 도시 중심부를 놓치고 드레스덴 남동부 교외를 폭격했으며, 인근 도시 마이센(Meissen)과 피르나(Pirna)에도 폭탄이 떨어졌다. 다른 폭격대들은 모두 12시에서 12시 10분 사이에 드레스덴을 폭격했다. 그들은 프리드리히슈타트 지역의 분류장을 타격하지 못했고, 이전 폭격과 마찬가지로 폭탄이 넓은 지역에 흩어졌다.
드레스덴의 방공 시설은 동부 전선에서 적군(소련군)에 대항하기 위해 대공포가 징발되면서 고갈되었고, 1945년 1월에는 마지막 대규모 플락(Flak, 대공포) 포대도 상실했다. 부품과 정비 부족으로 비행이 위험한 비행기와 심각한 항공 연료 부족으로 루프트바페(Luftwaffe)는 사실상 무력했으며, 독일의 레이더 시스템도 열화되어 공습에 대한 경고 시간이 단축되었다. 영국 공군(RAF)은 또한 전자식 레이더 대응책 분야에서 독일군보다 우위를 점했다. 폭격에 참가한 영국 폭격기 796대 중 6대가 손실되었는데, 그중 3대는 상공에서 비행하는 항공기가 투하한 폭탄에 맞았다. 다음 날에는 미군 폭격기 1대만 격추되었는데, 대규모 호위대가 루프트바페의 주간 전투기를 막아 공격을 방해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3. 1. 지상 상황
드레스덴의 사이렌은 1945년 2월 13일 오후 9시 51분(CET)에 울렸다.[100] 많은 사람들이 대피소를 찾았지만, 드레스덴의 방공호는 수가 매우 적었다. 가장 넓은 드레스덴 역 방공호는 6,000명만 수용할 수 있었다.[105] 당시 공습 예비대책 중 하나는 건물들 사이 지하실 벽을 제거하고 얇은 칸막이로 대체하여 비상시 부수고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시 전체가 불타면서 사람들은 불타는 건물 지하실에서 다른 곳으로 대피하기 어려웠고, 이로 인해 한 지하실에서 천 명의 시체가 발견되기도 했다.[106]
생존자들은 끔찍한 화재와 시신들의 참상을 증언하며, 당시의 공포를 생생하게 묘사했다.[99][104]
드레스덴 경찰은 폭격 직후 구시가지와 동쪽 지역에 화재가 발생해 거의 12,000채의 집이 파괴되었다고 보고했다.[107] 켐핀스키 호텔에 위치한 독일 국방군의 중요 지시 우편소, 19개 군병원과 그 아래 군 시설들도 모두 파괴되었다.[107] 200여 개 공장이 피해를 입었는데, 그중 136개는 완전히 파괴되었고(차이스 회사의 정밀 광학기관 공장 포함), 28개는 중간 정도, 35개는 약간의 피해를 입었다.[108]
종류 | 수량 |
---|---|
은행 | 24개 |
보험 건물 | 26개 |
상점 및 소매상점 | 31개 |
상점 | 640개 |
창고 | 64개 |
시장 | 2개 |
대형 호텔 | 31개 |
술집 | 26개 |
행정기관 | 63개 |
극장 | 3개 |
영화관 | 18개 |
교회 | 11개 |
예배당 | 6개 |
기타 문화재 | 5개 |
병원 (기타 병원, 개인 병원 포함) | 19개 |
학교 | 39개 |
영사관 | 5개 |
동물원, 상수도, 철도, 우편 시설 | 각 1개 |
트램 시설 | 4개 |
선박과 유람선 | 19개 |
영국 공군은 산업 시설의 23%, 비산업 시설(주거 시설 제외)의 56%가 파괴되었다고 평가했다. 주택 78,000채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27,700채는 주거 불가능, 64,500채는 재건 가능할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94]
3. 1. 1. 사상자
드레스덴 폭격으로 인한 정확한 사상자 수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현재까지 가장 신뢰성 있는 추정치는 약 2만 5천 명이다.[29] 당시 독일의 많은 도시들이 연합군의 공습을 받았고, 동프로이센 지역에 소련군이 침공하면서 독일 전역에서 많은 난민들이 드레스덴에 머물고 있었다. 1939년 기준 64만 2천 명이었던 드레스덴 인구에 더해 20만 명 이상의 피난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수는 현재도 불명확하며 사망자 수 추정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27]폭격 직후 비교적 확실한 추정에 따르면 매장자는 2만 5000명에서 최대 6만 명으로 여겨졌지만, 역사학자들은 현재 매장자를 2만 5000명에서 3만 5000명 사이로 보고 있다. 1994년 드레스덴 역사학자 프리드리히 라이히어트(Friedrich Reichert)의 조사에서는 이 범위의 낮은 쪽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2010년 드레스덴시 역사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는 사망자 약 2만 5000명으로 발표되었다.[28]
생존자들은 끔찍한 화염과 시체들, 그리고 공포 속에서 대피하던 상황을 증언했다.[99][104] 많은 사람들이 대피소를 찾았지만, 드레스덴의 방공호는 수가 매우 적었다. 가장 넓은 드레스덴 역 방공호는 6,000명만 수용할 수 있었다.[105] 당시 공습 예비대책으로 건물 지하실 벽을 제거하고 얇은 칸막이로 대체하여 비상시 부수고 들어가도록 했지만, 실제로는 도시 전체가 불타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몰려 한 방에서 천 명의 시체가 발견되기도 했다.[106]
독일의 공식 보고서인 ''Tagesbefehl''(지시의 날) no. 47 ("TB47")에 따르면, 3월 22일에 다시 집계된 사망자 수는 ''알트마르크트''에서 소각된 6,865명을 포함하여 총 20,204명이며, 전체 사망자 수는 약 25,000명이라고 예상했다.[110][111][112] 다른 보고서는 4월 3일 집계된 시체 수가 22,096명이었다고 전한다.[110] 시립 공동묘지에는 21,271명의 희생자가 공습으로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중 17,295구는 ''헤이데프리에드호프'' 공동묘지에 묻혔다(집계는 ''알트마르크''에서 화장한 재도 포함).[113] 노동력 부족으로 매장과 화장을 할 인력이 부족하여 시체들은 한꺼번에 화염방사기로 화장되기도 했다.[113] 1966년에는 재건 공사 도중에 1,858구의 희생자가 한꺼번에 발견되기도 했다.[114]
나치의 선전성은 피해를 선전에 이용했고, 냉전 초기 소련 역시 영미를 적대시하는 목적으로 피해를 과장하여 선전했다. 이 때문에 드레스덴 폭격의 사망자 수는 한때 최대 30만 명으로 부풀려지기도 했지만, 이는 신뢰성이 낮은 정보원에 근거한 것이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독일 측의 추정 사망자 수가 높고, 영국 측의 추정 사망자 수가 낮게 추산되지만, 폭격 당시 영국 측은 피해를 크게 추산하고, 독일 측은 작게 추산했다. 현재 독일의 공식 기록에는 2만 1271명의 매장자가 등록되어 있으며, 그중에는 알트마르크트(구시가지)에서 화장된 6865명도 포함되어 있다.
도시 | 인구 (1939년) | 톤수 (t) | ||
---|---|---|---|---|
미군 | 영국군 | 합계 | ||
4,339,000 | 22,090 | 45,517 | 67,607 | |
1,129,000 | 17,104 | 22,583 | 39,687 | |
841,000 | 11,471 | 7,858 | 19,329 | |
772,000 | 10,211 | 34,712 | 44,923 | |
707,000 | 5,410 | 6,206 | 11,616 | |
667,000 | 1,518 | 36,420 | 37,938 | |
642,000 | 4,441 | 2,659 | 7,100 |
4. 반응
드레스덴 폭격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드레스덴은 폭격 이전의 자료를 참고하여 젬퍼 오페라와 프라우엔키르헤 등 바로크 양식의 도시 경관을 복구했다. 공습으로 파괴된 후 남은 잔해를 최대한 활용하고, 새로운 석재와 검게 그을린 잔해를 조합하여 지어진 건물들은 전쟁의 비참함을 강하게 상기시킨다.
미국의 소설가 커트 보네거트 주니어는 포로로 끌려갔던 드레스덴에서 이 폭격을 경험했다. 이후 그는 대표작인 『도살장 넘버 5』에서 SF적 기계 장치를 사용하여 이 경험을 묘사했다.
한편, 현재 독일에 존재하는 극우(네오나치) 정당인 독일 국가민주당은 드레스덴 폭격을 포함하여 연합군의 각 도시에 대한 공습에 대해 "폭탄에 의한 홀로코스트"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의 공습을 받은 독일 각 도시의 희생자야말로 애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공습은 동부 전선에서 독일을 공격해 온 소련군의 진격을 지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전쟁의 승패가 거의 결정된 시점이었기에 전략적으로 의미 없는 공습이었다. 독일 공군의 공습을 받았던 영국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Oxford Companion to the Second World War』에 따르면, 폭격 이틀 후 열린 연합군의 비공식 기자회견에서 영국 공군 중장 콜린 매케이 그리어슨은 기자들에게 "썬더클랩 작전"의 목적은 주택 밀집 지역을 폭격하여 구호 물자를 전달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AP 통신의 종군 기자 하워드 코헨은 이를 바탕으로 연합군이 "테러 폭격"에 의존하고 있다는 기사를 작성했다. 이 기사에 이어 많은 사설이 실리면서 전략폭격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고, 영국 의회 하원에서 리처드 스톡스 의원의 질문이 있었다.
드레스덴의 파괴는 영국의 지식인들에게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맥스 헤이스팅스에 따르면, 1945년 2월까지 독일 도시들에 대한 공습은 전쟁 결과와 거의 무관하게 보이기 시작했고, "드레스덴"이라는 단어는 전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매우 많은 매력과 아름다움의 고향, 트롤로프 작품의 히로인들의 피난처, 그랜드 투어의 랜드마크"라는 울림을 주었다. 그는 드레스덴 폭격이 연합국 국민들이 처음으로 나치를 물리치기 위한 군사 작전에 의문을 가진 순간이었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는 드레스덴 폭격의 비인도성이 문제가 되었을 때, 미국 육군 항공대 사령관 헨리 아놀드 대장은 "부드러워져서는 안 된다. 전쟁은 파괴적이어야 하며, 어느 정도까지는 비인도적이고 잔혹해야 한다"고 말했다.[83]
4. 1. 나치 독일
로베르트 라이나 요제프 괴벨스는 드레스덴 폭격으로 민간인 피해가 극심해지자 연합군이 제네바 협약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나치 독일은 폭격의 실상을 선전에 이용했다. 괴벨스는 폭격 소식을 듣고 20분간 격노하며 울음을 터뜨렸고, 헤르만 괴링을 맹비난했다.[30]1945년 2월 16일, 선전부는 드레스덴이 문화 도시이며 군수 산업 시설이 없다는 보도 자료를 발표했다.[30]


1945년 초, 독일군의 불지 작전과 독일 공군의 신년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4. 2. 연합군
드레스덴 폭격은 영국 지식인 사회에 불안감을 야기했다. 맥스 헤이스팅스(Max Hastings)에 따르면, 1945년 2월까지 독일 도시들에 대한 공습은 전쟁 결과와는 크게 무관해졌고, 드레스덴이라는 이름은 유럽 전역의 교양 있는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33] 그는 이 폭격이 연합국 국민들이 독일을 패배시키기 위해 사용된 군사 작전에 대해 심각하게 의문을 제기한 첫 번째 사례라고 적었다.이러한 불안감은 연합군이 테러 폭격(terror bombing)에 의존했다는 내용의 AP 통신 기사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 폭격 후 이틀 뒤 연합군 최고 사령부(Supreme Headquarters Allied Expeditionary Force)가 개최한 기자 회견에서, 영국 공군 준장 콜린 맥케이 그리어슨(Colin McKay Grierson)은 기자들에게 드레스덴 폭격의 주요 목표가 독일군이 군수품을 이동하는 것을 막고 가능하면 모든 방향의 이동을 중지시키기 위한 통신망 공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서 부수적인 발언으로 이 공습이 "독일의 사기 저하에 도움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AP 통신의 종군 기자 하워드 카우언(Howard Cowan)은 이후 연합군이 테러 폭격에 의존했다고 주장하는 기사를 작성했다. 이 문제에 대한 후속 신문 사설이 있었고, 오랫동안 전략 폭격에 반대해 온 리처드 스토크스(Richard Stokes) 국회의원은 3월 6일 하원에서 질문을 했다.[34]

윈스턴 처칠은 그 후 폭격 작전의 목표를 재평가하여 전략적 목표보다는 전술적 중요성이 있는 목표에 더 중점을 두었다.[34] 1945년 3월 28일, 그는 영국 참모총장과 공군참모총장을 위해 헤이스팅스 라이오넬 이즈메이(Hastings Lionel Ismay) 장군에게 보낸 전보 메모에서 "이제 독일 도시를 단순히 공포를 증가시키기 위해, 다른 구실 아래서라도 폭격하는 문제를 재검토해야 할 때가 온 것"이라고 언급하며, 드레스덴 파괴를 연합군 폭격에 대한 심각한 의문으로 묘사했다.[35]

1945년 3월 29일, 아서 해리스 공군 원수는 처칠의 메모에 대해 "도시 공격은 다른 모든 전쟁 행위와 마찬가지로 전략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 한 참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공격은 전쟁을 단축하고 연합군 병사들의 목숨을 보존하는 데 기여하는 한 전략적으로 정당화됩니다."라고 반박하며, 드레스덴이 군수 공장, 정부 중심지, 교통 중심지였음을 강조했다. 결국 처칠은 참모총장의 압력과 해리스 등의 의견에 따라 자신의 메모를 철회하고 새로운 메모를 발표했다.[36]
미국에서는 드레스덴 폭격의 비인도성이 문제가 되었을 때, 헨리 아놀드 대장은 "전쟁은 파괴적이어야 하며, 어느 정도까지는 비인도적이고 잔혹해야 한다"고 말했다.[83]
5. 전후 논쟁
드레스덴 폭격은 종전 직전, 군사적 의미를 상실한 문화도시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점에서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48] 특히, 나치 독일과 소련은 이 폭격을 선전전에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현재에도 극우/네오나치 세력이 이를 '폭탄에 의한 홀로코스트'로 규정하며 역사 왜곡을 시도하고 있다.
몇 가지 요인들이 이 폭격을 독특한 논쟁과 논의의 지점으로 만들었다. 그중 첫 번째는 나치 정부가 그 직후에 과장된 주장을 했던 것이다. 의도적인 화염폭풍의 생성, 희생자 수, 그리고 전쟁이 끝날 무렵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폭격이 종전을 앞당기는 데 필요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49]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과 친나치 논객들, 특히 영국 작가 데이비드 어빙은 이 폭격을 이용하여 나치 정부가 저지른 전쟁 범죄와 연합군의 폭격으로 인한 독일 민간인 사망을 도덕적으로 동등하게 만들려고 시도한다. 그 결과, 수년에 걸쳐 엄청나게 과장된 사상자 수가 발표되었는데, 많은 수치는 아돌프 히틀러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가 만든 위조된 사상자 보고서인 '일일 명령'(Tagesbefehl) 47호에 언급된 20만 명 이상의 사망자 수치를 기반으로 한다.[51][52][53] 어빙 자신도 그의 저서 ''드레스덴 파괴''에서 사망자 수를 13만 5천 명으로 엄청나게 과장하여 주장했는데, 이 수치는 처음에는 널리 받아들여졌지만, 현재는 터무니없이 과장된 것으로 간주된다.[54]
독일의 극우 정치인들은 드레스덴 폭격을 "Bombenholocaust"(폭탄에 의한 홀로코스트)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극우 민족주의 정당인 디 하이마트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당의 대표인 위르겐 간젤은 드레스덴 폭격을 "대량학살"이자 "드레스덴의 폭탄 홀로코스트"라고 묘사했다.[66]
법적 측면에서, 드레스덴 폭격이 전쟁 범죄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 육상 및 해상 전시 행위 규범을 다루는 헤이그 협약은 공군력의 부상 이전에 채택되었다. 공중전을 포함하도록 제정된 국제 인도주의법을 업데이트하기 위한 반복적인 외교적 시도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에는 업데이트되지 않았다. 구체적인 국제 인도주의법이 없다고 해서 전쟁법이 공중전을 다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기존 법률은 해석의 여지가 남아 있었다.[50]
일부 역사학자들은 드레스덴 폭격을 전쟁 범죄로 규정하며,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연합군 지도자들의 책임을 주장하기도 한다. 역사학자 도널드 블록섬은 "1945년 2월 13일~14일 드레스덴 폭격은 전쟁 범죄였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재판하는 데 강력한 ''prima facie'' 근거가 있으며, 이론적으로 처칠이 유죄 판결을 받을 수도 있었다고 주장한다.[60]
반면, 영국의 철학자 A. C. 그레이링은 RAF의 지역 폭격을 "비도덕적인 행위"이자 "도덕적 범죄"로 묘사했지만, "지역 폭격을 '전쟁 범죄'로 묘사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정확하지 않다"고 주장했다.[49]
6. 전후 복구 및 화해
전쟁 후, 그리고 독일 통일 이후, 드레스덴의 프라우엔 교회, 젬퍼 오페라 하우스(작센 주립 오페라하우스), 츠빙거 궁전 (후자 두 곳은 통일 이전에 재건됨)과 같은 랜드마크들을 재건하기 위한 노력이 기울여졌다.
1956년 드레스덴은 코벤트리와 자매 도시 관계를 맺었다. 군사 및 군수품 생산의 중심지였던 코벤트리는 1940년과 1941년 코벤트리 블리츠 기간 동안 루프트바페의 공격을 받아 영국 도시 중 가장 큰 피해를 입었으며, 1,200명이 넘는 민간인이 사망하고 코벤트리 대성당이 파괴되었다.[39]
1990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저명한 드레스덴 시민들로 구성된 그룹이 프라우엔 교회 재건을 위한 국제적인 호소인 "드레스덴의 호소"를 발표했다. 프라우엔 교회의 파괴는 수년 동안 폭격의 상징이 되었다.[40] 1743년에 완공된 바로크 양식의 성모 마리아 교회(프라우엔 교회)는 처음에는 폭격에서 살아남은 것처럼 보였지만, 며칠 후 붕괴되었고, 이후 공산 정권은 반전 기념물로 폐허를 그대로 남겨두었다.
1993년 영국의 자선 단체인 드레스덴 트러스트가 설립되어 재건을 위한 지원 요청에 응답하여 자금을 모금했으며, 영국의 2,000명의 개인과 100개의 기업 및 신탁기금으로부터 600000GBP를 모금했다. 그들이 프로젝트에 기증한 것 중 하나는 런던의 금세공인 Gant MacDonald가 제작한 8미터 높이의 구체와 십자가였다. 이는 코벤트리 대성당 지붕 폐허에서 발견된 중세 시대 못을 사용하여 제작되었으며, 폭격에 참여했던 조종사의 아들인 Alan Smith가 일부 제작에 참여했다.[4]
새로운 프라우엔 교회는 건축가들이 3D 컴퓨터 기술을 사용하여 오래된 사진과 보관되어 있던 모든 파편을 분석하여 7년에 걸쳐 재건되었으며, 2005년 10월 30일 독일 대통령인 호르스트 쾰러, 전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앙겔라 메르켈, 그리고 켄트 공작 에드워드를 포함한 약 1,800명의 손님이 참석한 가운데 공식적으로 봉헌되었다.[41][42]
드레스덴 역사 지구 재건에 대한 또 다른 발전은 1999년 드레스덴 역사 노이마르크트 협회(GHND)가 설립되면서 이루어졌다.[43] 이 협회는 역사적인 도심을 최대한 재건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44] 드레스덴 프라우엔 교회 재건 계획이 확정되자 GHND는 주변의 역사적 건물 재건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2003년 노이마르크트 지역 재건을 지지하는 청원에 전체 유권자의 15%에 해당하는 약 6만 8천 명이 서명했다. 이는 이 계획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와 역사적인 드레스덴에 대한 널리 퍼진 감사를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시의회는 역사적인 디자인에 따라 많은 바로크 양식 건물을 재건하기로 결정했지만, 그 사이에 현대식 건물도 포함되었다.[45]
주변 노이마르크트 건물의 재건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46][47]
폭격 직후 경찰 보고에 따르면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동부가 하나의 화염에 휩싸여 1만 2천 동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구분 | 상세 내역 |
---|---|
은행 | 24곳 |
보험회사 | 26곳 |
소매점 | 31곳 |
상점 | 647곳 |
창고 | 64곳 |
대형 시장 | 2곳 |
대형 호텔 | 31곳 |
공공시설 | 26곳 |
행정시설 | 63곳 |
극장 | 3곳 |
영화관 | 18곳 |
교회 | 11곳 |
예배당 | 6곳 |
사적(史蹟) 건물 | 5곳 |
병원 | 19곳 (수용 인원 과다의 임시 병원 및 개인 병원 포함) |
학교 | 39곳 |
영사관 | 5곳 |
동물원 | 1곳 |
상수도 시설 | 1곳 |
철도 시설 | 1곳 |
우편 시설 | 19곳 |
시전(市電) 시설 | 4곳 |
선박 및 바지선 | 19척 |
또한 타셴베르크 궁전(Taschenbergpalais)에 있던 국방군 사령부, 19곳의 군 병원, 기타 많은 중요하지 않은 군사 시설이 파괴되었다고 전했다. 공장 200곳은 대부분 피해를 입었고, 특히 자이스 이콘(Zeiss Ikon)의 광학 기기 공장을 포함한 136곳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28곳은 중규모 파괴를, 35곳은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
영국군의 평가는 "도시의 산업 시설의 23%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외 건물(주택 등)의 56%가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결론지었다. "시내 부동산 중 주택에 관해서는 7만 8천 동이 붕괴되었고, 2만 7천 7백 동은 주거 불가능하지만 수리 불가능하지는 않고, 6만 4천 5백 동은 피해가 작아 수리 가능하다"고 평가되었다. 후일 조사에서는 "도시 주택의 80%가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입었고, 50%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거나 소멸했다"고 미군 보고는 전하고 있다.
더불어, "미국 육군 항공대의 철도 시설에 대한 14일과 15일 양일에 걸친 공격으로 철도는 심각한 타격을 입어 교통이 마비되었고, 왕래에 있어 사활적으로 중요한 엘베 강의 철교는 사용 불가능하게 되어, 폭격 후 수주간 통행이 금지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성모교회(Frauenkirche)는 일부 벽을 제외하고 전소되었다. 전후, 동독 정부는 종교 시설 재건을 미루었으나, 주민 운동에 의해 잔해를 최대한 활용하여 "세계 최대의 지그소 퍼즐"이라 불린 재건 공사가 자원봉사자들의 기부금 등으로 1996년 - 2006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특히 꼭대기의 십자가는 실제로 폭격을 가했던 영국 공군 병사들의 가족들의 기부금으로 2004년에 복원되었다.
츠빙거 궁전(Zwinger)은 거의 전소되어, 1988년 - 1992년에 걸쳐 재건되었다.
젠퍼 오페라하우스는 거의 전소되어, 1977년 - 1985년에 걸쳐 재건되었다.
7. 문학과 예술에서의 드레스덴 폭격
커트 보네거트는 소설 《제5도살장》(1969)에서 포로로서 드레스덴 폭격 당시의 경험을 묘사했다. 보네거트는 데이비드 어빙의 저서에서 13만 5천 명의 사망자 수를 인용했지만, 어빙은 이후 이 수치를 수정했고, 학계 연구와 일치하는 2만 5천 명으로 낮췄다. 그럼에도 보네거트가 대중화한 수치는 여전히 널리 퍼져 있다.[71]
보네거트는 "완전한 파괴"와 "상상할 수 없는 대학살"을 회상하며, 독일군이 포로들을 시체 수습에 동원했다고 묘사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고 명성을 얻었으며, "죽은 사람 한 명당 2~3달러를 벌었다"고 썼다.[74]
드레스덴 폭격은 조지 로이 힐의 1972년 영화 《제5도살장》에도 묘사되었다. 보네거트의 드레스덴 경험은 다른 여러 책에도 사용되었으며, 사후 출판된 『회고록 아마겟돈』에도 포함되어 있다.[72]
프리먼 다이슨은 보네거트의 책이 사실적이며, 유일한 부정확성은 야간 공격이 영국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것이라고 썼다.[76]
독일 영화 《드레스덴, 운명의 날》(2006)은 드레스덴 폭격을 배경으로 영국 폭격기 조종사와 독일 간호사의 로맨스를 다룬다.[89]
쇼스타코비치 현악사중주 8번(1960)은 드레스덴 폭격에 대한 헌정으로 작곡되었으며, 매우 어둡고 우울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빌헬름 루돌프는 드레스덴 폭격으로 작업실과 작품을 잃은 후, 파괴된 모습을 기록한 목판화 연작을 제작했다. 그는 "강박 상태"에서 "전적으로 환상적인 것이 현실이다"라고 묘사하며 전쟁의 참상을 기록했다.[79]
드레스덴 폭격을 소재로 다룬 기타 문학 작품 및 예술 작품은 다음과 같다.
- 헤니 브레너(Henny Brenner)의 회고록 "노래는 끝났다: 드레스덴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소녀"
- 빅토르 클렘페러(Victor Klemperer)의 저서
- 보ഹു밀 흐라발(Bohumil Hrabal)의 소설 좁게 관찰된 기차들(Closely Observed Trains)
-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 더 파이널 컷(The Final Cut)의 "영웅의 귀환(The Hero's Return)"
- 조너선 새프런 포어(Jonathan Safran Foer)의 소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Extremely Loud and Incredibly Close)
- 5일 5야(Five Days, Five Nights (1960 film)) (1961년 소련-동독 합작 영화)
- 인간 심장의 지도(Map of the Human Heart) (1992년 영화)
- 네버 룩 어웨이(Never Look Away (2018 film))[80]
- 오늘밤 도시는 죽는다(Tonight a City Will Die) (1961년 폴란드 영화)
- 다니엘 부크비치(Daniel Bukvich)의 관악 합주곡 "교향곡 1번: 드레스덴 독일, 1945년 추모곡(Symphony I: In Memoriam, Dresden Germany, 1945)" (1978년)
- 귀스타브 쿠르베의 《돌을 쪼는 노동자》(소실)
- 성모교회 - 1996년 - 2006년에 걸쳐 재건.
- 츠빙거 궁전 - 1988년 - 1992년에 걸쳐 재건.
- 젠퍼 오페라하우스 - 1977년 - 1985년에 걸쳐 재건.
- 레오 아른슈탐(Лео Арнштам) 감독의 1960년 소련 영화 『드레스덴의 5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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