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1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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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731 부대는 1932년 일본 육군이 만주에 설립한 비밀 생체 실험 부대로, 세균 무기 개발과 생체 실험을 수행했다. 이시이 시로가 지휘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중국, 한국, 러시아, 미국 등의 포로와 민간인을 대상으로 생체 해부, 세균 감염, 화학 무기 실험 등 끔찍한 인체 실험을 자행하여 수천 명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냈다. 전쟁 후 증거 은폐를 위해 시설을 파괴하고 관련자를 처분했으며, 미국은 이들의 정보를 얻는 대가로 기소를 면제했다. 731 부대의 만행은 현재까지도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인정과 진상 규명이 미흡하며, 하얼빈에 유적지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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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부대 | |
---|---|
개요 | |
![]() | |
명칭 | 731 부대 |
일본어 명칭 | 731部隊 (나나산이치 부타이) |
부대 종류 | 검역급수대 |
소속 | 관동군 |
역할 | 생물전 연구 및 개발 |
소재지 |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핑팡 구 |
통칭 | 만주 제731 부대 |
연혁 | |
창설 | 1936년 |
해체 | 1945년 |
인물 | |
주요 인물 | 이시이 시로 기타노 마사지 |
책임자 | 이시이 시로(군의총감) |
최종 책임자 | 기타노 마사지(중장) |
활동 | |
주요 활동 | 인체 실험 생물 무기 개발 및 사용 화학 무기 개발 및 사용 |
실험 대상 | 마루타 (항일군, 죄수, 민간인 등) |
추정 사망자 수 | 인체 실험: 약 3,000명 이상 생물전: 40만 명 이상 전체: 23,000명 ~ 300,000명 |
무기 | 생물 무기 화학 무기 폭약 |
조직 | |
상위 부대 | 관동군 방역급수부 |
관련 부서 | 방역급수부 |
기타 | |
주요 참전 | 노몬한 사건 중일 전쟁 |
관련 사건 | 마루타 |
참고 자료 | 구 일본군 '731 부대' 직원표 등 공식 문서 발견 |
2. 역사
731부대는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핑팡구에 주둔하며 관동군 관할 구역 내의 정수 업무를 하는 것으로 위장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화학·세균전 준비를 위한 연구와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생체 실험을 했다. 대외적으로는 관동군 주력부대에 물을 공급하는 급수전문 전투지원부대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생체실험을 자행한 부대였다.[250]
731부대는 일본제국이 세운 생물전 연구기관 중 하나였으며, 동아시아 각지에 세워진 516부대, 543부대, 773부대, 100부대, 1644 부대, 1855부대, 8604부대, 200부대, 9420부대 등도 731부대와 유사하거나 731부대의 생체실험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다.
1939년 노몬한 사건에서는 관동군 방역부가 출동 부대의 급수 지원을 했다. 이시이식 여수기 등을 장비한 방역 급수대를 편성하여 현지로 파견했으며, 이시이 시로도 직접 현장 지도를 했다. 최전선에서의 급수 활동·위생 지도는 소화기 계통의 전염병 발생률을 낮추는 데 기여했다.
1940년 7월, 군령 육갑 제14호에 의해 관동군 방역부는 "관동군 방역 급수부 (통칭: 만주 제659부대)"로 개편되었다. 그 중 본부가 "관동군 방역 급수부 '''본부''' (통칭: 만주 제'''731부대''')"이다.
저장성닝보, 위산, 진화 등의 도시에 장티푸스균, 콜레라균 살포가 이루어졌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페스트균에 감염된 벼룩을 닝보와 진화에 투하하여 성공했다. 1942년에는 저간 작전을 감행하였다.
731부대와 관련된 많은 과학자가 나중에 정치, 학계, 사업, 의학 부문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일부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하바로프스크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다. 또 다른 일부는 중국공산당에 체포되어 푸순전범관리소에서 심문을 받으며 진술서를 작성했다. 미국에 항복한 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자료를 제공하는 대가로 사면받았다. 731부대의 잔인한 행위는 유엔에 의해 전쟁범죄로 선포되었다.
1945년 8월, 소련 대일 참전으로 731부대 등 관동군 방역 급수부 제 부대는 신속하게 일본 본토 방면으로 철수했다. 패전과 함께 군은 관련 문서 처분을 명령하고, 증거 은폐를 꾀했다.[155]
2. 1. 설립 배경
1932년 이시이 시로는 ‘육군 전염병 예방 연구소’라는 의무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15] 그는 부하들과 함께 종마 수용소를 건설했는데, 이곳은 그 지역에서 종마 요새로 알려졌다. 이 실험 수용소는 하얼빈 시에서 남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진 ‘베이인허’에 있었다. 이시이 시로는 화학 및 생물학 작전을 위한 비밀 연구 그룹인 ‘토고 부대’를 조직했다. 1935년 탈옥과 폭발 사건이 발생하여 이시이는 종마 요새를 닫고, 핑팡구(하얼빈 시 남쪽 24킬로미터)에 더 큰 새로운 시설을 만들었다.[15]1936년 히로히토는 부대 확장을 승인하고 관동군에 전염병 예방 부서로 통합하는 칙령을 발표했다.[16] 당시 부대는 "이시이 부대"와 "와카마츠 부대"로 나뉘었으며, 신징에 기지를 두었다. 1940년 8월부터 이 부대는 "관동군 전염병 예방 및 정수 부서" 또는 "731 부대"로 불렸다.[17]
1925년 제네바 의정서에서 국가 간 분쟁 시 생물학 무기 사용을 금지하자, 일본 제국은 1930년대에 생물학 무기 프로그램을 시작했다.[1] 일본은 이 금지가 오히려 생물학 무기의 효과를 입증한다고 판단했다.[1] 만주사변 이후 1931년 만주를 점령한 일본은 연구 기지를 본토에서 격리하고, 시험 대상인 중국인들을 확보하기 위해 만주에 731 부대를 건설했다.[11] 일본은 중국인들을 무상 자산으로 간주하여 생물학전에서 경쟁 우위를 확보하고자 했다.[11]
이시이의 주요 지지자 중 한 명은 육군 내 고이즈미 치카히코 대령으로, 그는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후생노동대신을 역임했다. 고이즈미는 1915년 제1차 세계 대전 중 비밀 독가스 연구 위원회에 합류했는데, 이는 그와 다른 일본 제국 육군 장교들이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 독일이 염소 가스를 성공적으로 사용한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18][19]
1925년 화학 무기와 세균 무기 사용을 금지하는 제네바 의정서가 체결되자, 이시이 시로는 조약으로 금지해야 할 정도로 세균 무기가 위협적이고 효과적이라면 이를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해외여행 후 최강국들이 세균전을 준비하고 있으며, 일본도 준비하지 않으면 큰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라고 육군성과 참모본부 간부들을 설득했다.[159]
1932년 8월, 육군 군의학교 방역부 산하에 이시이 시로 등 군의 5명이 소속된 방역 연구실(별명 "삼연")이 개설되었다. 동시에 만주에 연구 시설 설치가 시작되었고, 관동군 방역반이 조직되었다. 1933년 가을부터 하얼빈 동남 70km 지점 베이인허에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무렵 관동군 방역반은 이시이 시로의 변명인 "도고 하지메"에서 유래하여 "도고 부대"로 통칭되었다.[160]
1936년 4월 23일, 관동군 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재만 병비 충실에 대한 의견"에서 관동군 방역부 신설을 제안했고,[161] 같은 해 8월 군령 육갑 제7호에 의해 정식 발족했다. 1940년 연간 예산은 1000만엔이었다.[159] 관동군 방역부는 이시이 시로의 출신지인 지바현 산부군 시바야마정 가모 부락 출신자가 많아 "가모 부대"라고도 불렸다. 이때 관동군 군마 방역창(만주 제100부대)도 편성되었다. 1936년 12월 관동군 방역부 소속 인원은 군인 65명(장교 36명), 군속 105명이었다. 부대 규모 확장에 따라 핑팡 구 (하얼빈 남방 24km)에 신 시설이 착공되어 1940년에 완공되었다.[160]
이시이는 "파스퇴르 연구소"나 "록펠러 연구소" 같은 종합 의학 연구 시설을 구상했지만, 생체 실험을 위해 만주 북단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토 제국대학 의학부에서 이시카와 타치오 (병리학), 오카모토 고조 (해부학), 타베이 카즈 (장티푸스 연구), 미나토 마사오 (콜레라 연구), 요시무라 히토 (동상 연구), 카사하라 시로 (바이러스 연구), 니키 히데오 (결핵 연구), 키호인 아키오 (천연두 연구) 등 젊고 우수한 연구자들이 파견되었다.[159]
2. 2. 부대 연혁
1932년 이시이 시로는 ‘육군 전염병 예방 연구소’라는 이름의 의무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토고 부대’를 조직했는데, 이는 화학 및 생물학 작전을 위한 비밀 연구 그룹이었다.[15] 1933년 가을부터 하얼빈 동남 70km 지점의 베이인허에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무렵의 관동군 방역반은 이시이 시로의 변명인 "도고 하지메"에서 유래하여 "도고 부대"로 통칭되었다.[160]1935년 탈옥과 폭발이 발생하여 이시이는 종마 요새를 닫고, 핑팡(하얼빈 시에서 남쪽으로 24킬로미터)에 더 큰 새로운 시설을 만들었다.
1936년 히로히토는 부대 확장을 승인하고 관동군에 전염병 예방 부서로 통합하는 칙령을 발표했다.[16] 같은 해 8월에는 군령 육갑 제7호에 의해 '''관동군 방역부'''가 정식 발족했다.[161] 이 부대는 ‘이시이 부대’와 ‘와카마쓰 부대’로 나뉘어 신징에 있었다. 1940년 8월부터 이 부대는 "관동군 전염병 예방 및 정수 부서" 또는 간단히 "731 부대"로 불렸다.[17] 1940년의 연간 예산은 1000만엔 이라는 거액이었다.[159] 관동군 방역부는 통칭 "가모 부대"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이시이 시로의 출신지인 지바현 산부군 시바야마정 가모 부락 출신자가 다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동시에 관동군 군마 방역창(후에 통칭: 만주 제100부대)도 편성되었다. 부대 규모 확장에 대응하기 위해 핑팡 구 (하얼빈 남방 24km)에 신 시설이 착공되어, 1940년에 완공되었다.[160]
1940년 7월, 군령 육갑 제14호에 의해 관동군 방역부는 "관동군 방역 급수부 (통칭: 만주 제659부대)"로 개편되었다. 그 중 본부가 "관동군 방역 급수부 '''본부''' (통칭: 만주 제'''731부대''')"이다. 731부대를 포함한 관동군 방역 급수부 전체의 소속 인원은 1940년 7월의 개편 시점에서 군인 1235명(그 중 장교 264명)과 군속 2005명으로 증가했으며, 도쿄 대학에 필적하는 연간 200만엔(1942년도)의 연구비가 주어졌다.[160] 후생노동성의 집계에 따르면, 1945년 종전 직전 소속 인원은 3560명(군인 1344명, 군속 2208명, 불명 8명)이었다.[162]
1942년 8월부터 1945년 3월까지 관동군 방역 급수부장이 이시이 시로에서 키타노 마사츠구 군의 소장으로 바뀌었지만, 731부대 등은 이시이의 영향 하에 있었다.[152]
1945년 8월, 소련 대일 참전으로 731부대 등 관동군 방역 급수부 제 부대는 일본 본토 방면으로 철수했다. 패전에 즈음하여, 군은 관련 문서 처분을 명령하고, 증거 은폐를 꾀했다.[155]
2. 3. 주요 인물
이름 | 731부대 당시 직책 | 전후 행적 및 비고 |
---|---|---|
이시이 시로 | 제1, 3대 부대장, 육군 중장 | |
기타노 마사지 | 제2대 부대장, 육군 군의 소장 | |
나이토 료이치 | 육군 군의학교 방역 연구실, 육군 중좌 | |
유아사 켄 | 일본 제국 육군 외과의 | |
요시무라 히사토 | 동상 연구반 | |
가사하라 시로 | 바이러스연구반 | 기타사토 연구소 |
다나카 히데오 | 페스트, 벼룩 연구반 | 오사카 시립대학 의학부장 |
미나토 마사오 | 콜레라 연구반 | 교토 대학 교수 |
다나베 이와 | 티푸스 연구반 | |
도코로 야스오 | 유행성출혈열 연구반 | |
에지마 신페이 | 이질 연구반 | 국립 예방위생 연구소 |
후타키 히데오 | 결핵 연구반 | 녹십자 공동 설립자 |
오카모토 코조 | 병리 연구반 | |
이시카와 다치오마루 | 병리 연구반 | |
구사미 마사오 | 약리 연구반 | 쇼와 약리대학 교수 |
야기자와 유키마사 | 식물학 연구반 | |
아사히나 세이지로 | 발진티푸스·백신 제조반 | 국립 예방 위생 연구소 |
소노구치 다다오 | 세균전 연구반 | 육상 자위대 위생학교 부교장 |
마스다 미호 | 세균전 연구반 | 방위대학교 교수 |
안도 코지 | 다롄 지부장 | |
가스가 다다요시 | 다롄 지부장 | |
무라타 료스케 | 난징 1644 부대 | 제7대 국립 예방위생 연구소 소장 |
오가와 도오루 | 난징 1644부대 | 나고야 시립대학 의학부 교수 |
미야가와 요네지 | 도쿄 제국대학 전염병연구소 소장 | 도시바 생물 물리 연구소 소장 |
오가타 도미오 | 도쿄 제국대학 전염병연구소 조교수 | 도쿄 대학 의학부 교수 |
호소야 세이고 | 도쿄 제국 대학 전염병연구소 교수 | 도쿄 대학 전염병 연구소 교수 |
야나기자와 켄 | 결핵 연구 | 국립 예방 위생 연구소 소장 |
고지마 사부로 | 도쿄 제국대학 전염병 연구소 교수 | 국립 예방 위생 연구소 소장 |
고바야시 로쿠조 | 도쿄 제국대학교수 | 국립 예방 위생 연구소 소장 |
도다 쇼조 | 도쿄 제국대학 교수 | |
기무라 렌 | 도쿄 제국대학 교수 | 행적 불명 |
731부대는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이 세운 생물전 연구기관 중 하나로,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핑팡구에 주둔하며 관동군 관할 구역 내의 정수 업무를 하는 것으로 위장했다.[250] 그러나 실제로는 화학·세균전 준비를 위한 연구와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생체 실험을 자행했다.[250] 대외적으로는 관동군 주력부대에 물을 공급하는 급수전문 전투지원부대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생체실험을 자행한 부대였다.[250]
1945년 8월 9일, 소련 대일 참전으로 731부대는 신속하게 일본 본토로 철수했다. 군은 관련 문서 처분을 명령하고, 증거 은폐를 꾀했다.[155] 전후, 부대 소속 의사들은 미국에 연구 자료 등을 제공하는 대가로 전범 면제를 받았다.[155] 전 대원 코시 사다오에 따르면, 대원들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731에 재적했던 사실을 숨기고, 군력을 숨길 것", "모든 공직에는 취임하지 않을 것", "대원 상호 간의 연락은 엄금할 것"을 명령받았다.
2018년 4월, 일본 국립공문서관은 731부대원 3,607명의 거의 완전한 명단을 시가 의과대학의 니시야마 가쓰오 교수에게 공개했다. 니시야마 교수는 이 명단을 온라인에 공개하여 부대에 대한 추가 연구를 장려할 계획이라고 알려졌다.[102]
3. 주요 활동
731부대는 일본의 정치적 선전 및 일본 군대의 사상적 대표로서 업무를 수행했다.[250] 처음에는 공산주의 정치 선동에 대항했으나, 이후 화학 무기·생물 무기 (세균 무기) 준비를 위한 연구와 생체 실험으로 영역이 확대되었다.
731부대는 일본 제국이 세운 생물전 연구기관 중 하나였으며, 516부대(치치하얼 시), 543부대(하이라얼 시), 773부대(Songo), 100부대(창춘), 1644 부대(난징), 1855부대(베이징), 8604부대(광저우), 200부대(만주), 9420부대(싱가포르) 등 동아시아 각지에 세워진 기관도 731부대와 유사하거나 731부대의 생체실험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다.
제네바 의정서는 전쟁 시 화학 무기 및 생물 무기 사용을 금지했지만, 개발·생산·저장은 금지하지 않았다. 쓰네이시 게이이치, 하타 이쿠히코에 따르면, 731 부대는 생물 무기 연구뿐만 아니라 페스트, 티푸스 등 각종 병원균 및 벼룩을 이용한 생물 무기를 실제로 사용했다.[157][167] 1940년 10월 27일 닝보 공격에는 페스트균을 가진 벼룩이 사용되었고, 11월 3일까지 37명이 사망했다.[176] 1941년 11월 4일 창더 공격은 중국 측의 빠른 대처로 피해를 줄였다.[181]
731부대 관련 과학자들은 전후 정치, 학계, 사업, 의학 분야에서 성공했다. 일부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하바로프스크 전범 재판에 회부되거나 중국 공산당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미국에 항복한 자들은 자료 제공 대가로 사면받았다. 731부대의 잔혹 행위는 유엔에 의해 전쟁범죄로 선포되었다.
3. 1. 생체 실험
731부대는 '마루타'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특별 계획을 통해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사용했다. 실험 대상은 주변 인구 집단에서 징용되었으며, 이들은 '통나무(마루타)'라고 불렸다.[252] 이 용어는 부대원들이 이 시설을 지역 당국에 제재소라고 설명했기 때문에 생긴 농담에서 유래했다.[252]
실험 대상은 민간인과 군인을 포함하여 1만 명의 중국인, 조선인, 몽골인, 러시아인이었다.[250] 일부 미국인과 유럽인 등 연합군 전쟁 포로도 731부대에 잡혀갔다.[250] 남녀노소 불문하고 임산부까지 동원되었으며,[252] 수많은 실험과 해부가 마취 없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부패 등이 실험 결과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252]
주요 실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 중국, 몽골, 러시아의 군인과 시민, 여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약 1만 명의 사람들이 생화학 병기의 실험 재료로서 살해되었고,[265] 그 중에는 일부 흑인과 유럽인도 포함되었다.[265] 731부대에서 개발된 생화학 무기로 인해 수십만 명의 중국인이 학살되었다.[265]
3. 1. 1. 규슈제국대학 생체 해부 사건
1945년 5월부터 6월에 걸쳐 규슈제국대학 의학부 제1외과 이시야마 후쿠지로와 그의 제자들은 격추된 미군 B-29 탑승원 포로 8명을 대상으로 생체 해부 실험을 실시했다.[257]
실험 내용은 다음과 같다.[257]
날짜 | 실험 내용 |
---|---|
5월 17일 | 포로 2명의 한쪽 폐 전부 적출 |
5월 22일 | |
5월 25일 | 포로 1명에게 뇌수술(3차 신경 차단) 실시 |
6월 2일 |
이러한 실험은 731부대 뿐만 아니라 일본군 내에서 생체 실험이 광범위하게 자행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 유아사 켄(湯浅謙)은 생체실험은 731부대 밖에서도 널리 행해졌으며[255] 중국 대륙에서의 실험에 약 1000명의 일본군이 관여되어 있을 것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256]
3. 2. 생물학 무기 개발 및 실험
731부대는 페스트, 콜레라, 탄저 등 각종 세균 및 독가스를 이용한 생물학 무기 개발을 위해 설립되었다. 이들은 중국 도시 및 민간인을 대상으로 생물학 무기를 실험하고 살포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발생시켰다.[260] 특히, 일본군이 고의로 세균을 살포하여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음이 강조된다.[47]731부대는 전염성 벼룩, 감염된 의류와 물자를 폭탄 안에 포장하여 다양한 목표물에 투하했다. 이때 이시이 시로 중장이 직접 개발한 도자기 폭탄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폭발력을 고의로 약하게 만들어 안에 내장된 세균이 죽는 것을 최소화했다.[260]
연구소에서 키운 벼룩을 저공비행으로 중국 도시에 살포했는데, 1940년에는 닝보시에서, 1941년에는 창더 시와 허난성에서 살포가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발생한 페스트 전염으로 수천 명이 살해당했다.[263]
특히 페스트균 실험을 많이 했다. 페스트균은 흑사병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14세기 지중해 연안, 프랑스, 독일, 영국, 북유럽으로 확산해 4년 만에 유럽 인구 1/3 이상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였다. 이를 살육전에 적용하려 한 731은 '페스트 벼룩'을 개발한다. 균 자체를 그대로 뿌리는 것이 아니라 매개 동물인 벼룩을 페스트균에 감염시켜 완충물에 섞거나 도자기 폭탄에 담아 뿌렸다고 한다. 실제 중국에 살포한 세균의 상당수는 이 페스트균이었다.[262]
최소 12건의 대규모 생물학 무기 현장 실험이 수행되었고, 최소 11개의 중국 도시가 생물학적 제제로 공격받았다. 1941년 창더에 대한 공격으로 약 10,000명의 생물학적 사상자와 준비가 덜 된 일본군 1,700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되었는데, 대부분은 콜레라 때문이었다.[103]
미국 의회 도서관에는 731 부대에서 작성된 세 건의 기밀 해제 문서가 보관되어 있는데, 각 문서의 길이는 100페이지가 넘으며 일본어에서 영어로 번역되었다. 이 문서들은 일본인 의사들이 실험한 무력한 죄수들의 몸속에서 다양한 병원체의 일일 진행에 대한 포괄적인 임상 기록을 제공했다.[43]
일본 군인들은 이 연구 프로그램이 매달 상당한 양의 생물학적 제제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증언을 제공했다. 즉, 페스트 300kg, 탄저병 500~700kg, 장티푸스 800~900kg, 콜레라 1000kg이었다. 상당한 생산량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박테리아는 소량이라도 심각한 피해와 사망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었다.[44]
이시이 시로는 벼룩이 페스트를 전파하는 효율적인 매개체라고 판단하여 731 부대가 상당한 수의 벼룩을 사육하는 데 집중하게 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731 부대는 약 4500개의 벼룩 배양기를 가지고 있었고, 각 배양기는 한 주기당 최소 45kg의 벼룩을 생산할 수 있었다. 페스트 박테리아와 벼룩의 상당한 양과 페스트 감염과 관련된 심각한 질병 및 사망률을 감안할 때, 이는 일본이 보유한 막강한 생물학전 생산 능력을 보여준다.[44]
'작전 PX'(밤의 벚꽃 작전)는 1944년 12월 일본 해군이 계획한 미국 본토 공격 계획이었다. 이 작전에는 센토쿠 잠수함 항공모함에서 발사된 ''세이란'' 항공기가 미국의 서해안, 특히 샌디에고,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를 공격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비행기는 무기화된 선페스트, 콜레라, 발진티푸스, 뎅기열 및 기타 병원체를 인구에 대한 생물학적 테러 공격으로 확산시킬 것이다. 잠수함 승무원들은 스스로 감염된 후 자살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51][52][53][54] 731부대의 기술이 적용될 가능성이 있었으나, 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는 "세균전을 수행하면 일본과 미국 간의 전쟁 차원에서 인류와 세균 간의 끝없는 싸움으로 확대될 것입니다. 일본은 세상의 조롱을 받을 것입니다."라며 반대하여 작전은 보류되었다.[55]
3. 3. 기타 실험
731부대는 수용자를 대상으로 다양한 실험을 자행했다.- 질식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목을 매달았다.[264]
- 색전 발생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동맥(또는 심장)에 공기를 주입했다.[264]
- 신장에 말의 소변을 주입했다.[264]
- 물과 음식을 전혀 주지 않고 사망까지 걸리는 시간을 측정했다.[264]
- 사망할 때까지 저기압 방에 가두었다.[264]
- 극저온에 노출시켜 동상을 유발하고, 생존 시간 및 인체 부패, 괴저의 영향을 연구했다. (주로 여성 수용자 대상)[264]
- 온도와 화상, 인간 생존의 관계를 파악하는 실험을 했다.[264]
- 원심분리기에 넣어 사망할 때까지 회전시켜 인체의 수분 함량 비율(약 70%)을 측정했다.[264]
- 동물의 혈액을 주입하여 그 효과를 연구했다.[264]
- 가스실에서 다양한 화학 무기 실험을 했다.[264]
- 바닷물이 생리식염수를 대체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바닷물을 주사했다.[264]
- 다양한 거리에서 인간을 표적으로 수류탄 살상력을 시험했다.[264][265]
- 화염방사기, 생화학 무기, 기타 폭탄 실험의 표적으로 삼았다.[264][265]
3. 4. 실험 외 살인
731 부대는 실험 외에도 수용자들에게 잔혹한 살인 행위를 자행했다. 실험 후 쇠약해진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단검 던지기 게임을 하거나, 여성 수용자들을 강간하는 일이 빈번했다.[259] 간수들은 수용자들을 폭행하고 살해하기도 했다.[259]오사카 대학의 명예 교수인 나카가와 요네조는 전쟁 중 교토 대학에서 731 부대의 인체 실험 및 처형 영상을 보았다고 증언하며, 실험자들이 장난삼아 이러한 행위를 했다고 말했다.[26] 그는 "머리 베기를 하고 연구하는 데 어떤 의학적 목적이 있었을까? 전혀 없었다. 그건 그냥 장난이었다."라고 말했다.[26]
미국 역사학자 셸던 H. 해리스에 따르면, 도고 부대는 인간의 뇌 연구를 위해 경비병들에게 희생자의 머리를 도끼로 부숴 뇌를 가져오게 했다.[25]
4. 조직 구조
(石井四郎)
(北野政次)
(吉村寿人)
(笠原四郎)
(田中英雄)
(湊政雄)
(田部井和)
(所安夫)
(江島真平)
(二木秀雄)
(岡本耕造)
(石川太刀雄丸)
(草味政夫)
(八木沢行正)
(朝比奈正二郎)
(園口忠男)
(増田美保)
(安東洪次)
(春日忠善)
(村田良介)
(小川透)
(内藤良一)
(宮川米次)
(緒方富雄)
(細谷省吾)
(柳沢謙)
(小島三郎)
(小林六造)
(戸田正三)
(木村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