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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알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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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울 알폰신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의 변호사로, 급진시민연합 소속으로 활동하며 군사독재에 저항하다 투옥되기도 했다. 1983년 대선에서 승리하여 아르헨티나의 민간 출신 대통령이 되었으며, 군부 독재 청산과 경제 개혁을 추진했으나, 경제 정책의 실패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임했다. 재임 기간 동안 칠레, 브라질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메르코수르 형성에 기여했으며, 군부의 반란을 진압하고 인권 침해를 조사했다. 퇴임 후에도 정계에 복귀하여 활동하다가 2009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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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알폰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83년의 알폰신
1983년의 알폰신
이름라울 리카르도 알폰신
출생일1927년 3월 12일
출생지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주 차스코무스
사망일2009년 3월 31일
사망지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안장지레콜레타 묘지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정당급진 시민 연합
직업변호사
배우자마리아 로렌사 바레네체(1948년 2월 4일 결혼)
자녀6명 (리카르도 알폰신 포함)
기타 활동급진 시민 연합 대표 (1983–1991, 1993–1995, 1999–2001)
수상아스투리아스 공주상
부에노스아이레스 명예 시민
정치 경력
국가 상원 의원시작: 2001년 12월 10일
종료: 2002년 7월 3일
선거구: 부에노스아이레스주
헌법 제정 의회 의원시작: 1994년 5월 1일
종료: 1994년 8월 22일
선거구: 부에노스아이레스주
국가 하원 의원시작: 1973년 5월 25일
종료: 1976년 3월 24일
선거구: 부에노스아이레스주
국가 하원 의원시작: 1963년 10월 12일
종료: 1966년 6월 28일
선거구: 부에노스아이레스주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의원시작: 1958년 5월 1일
종료: 1962년 3월 29일
선거구: 5 선거구
차스코무스 시의원시작: 1954년 5월 7일
종료: 1955년 9월 21일
선거구: 전체
대통령 재임
대통령 직위아르헨티나 대통령
순서49대
임기 시작1983년 12월 10일
임기 종료1989년 7월 8일
부통령빅토르 마르티네스
이전 대통령레이날도 비뇨네
다음 대통령카를로스 메넴
서명
음성

2. 생애

라울 알폰신은 부에노스아이레스주에서 태어나 라플라타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가 되었다.[3] 급진시민연합 소속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회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군사독재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투옥되기도 했다.[6][7]

1983년 10월 대선에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됨으로써, 아르헨티나에서 오랜만에 민간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14][15] 그는 군사 독재정권의 악습을 청산하고 경제 문제를 해결할 개혁 정책을 내놓았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호르헤 비델라를 재판에 회부해 종신형을 선고받게 했으나, 이로 인해 옛 군사정권 인사들이 쿠데타를 모의하기도 했다.[10][11] 군사정부의 외채를 그대로 떠맡아 외채가 불어났고, 인플레이션이 심각했으나 소극적인 대책으로 일관하여 인기를 잃었다.[12]

1989년 아르헨티나의 실질 국민소득은 1964년 수준으로 추락했으며, 국민들의 반감으로 임기를 수 개월 남기고 사임했다. 후임 대통령으로는 정의당카를로스 메넴후보가 당선됐다.

1991년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급진시민연합 총재직에서 사임했지만, 1993년 다시 총재직에 복귀했다. 1994년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과의 밀약으로 대통령 임기를 변경했고, 다음 해 대선에 출마하지 않았다. 1995년 급진시민동맹 총재직을 내놓았다가 1999년 ~ 2001년 다시 총재직을 맡았다. 그 후 폐암을 앓다가 2009년 3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군부 독재를 청산하고 문민 정부를 구축한 공이 있으나 경제적으로는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김영삼 대통령과 비슷한 점이 있다.

알폰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차스콤스의 집


그는 1927년 3월 12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남쪽으로 123km 떨어진 차스콤스에서 태어났다.[1] 그의 부모는 가게를 운영했으며, 아버지는 갈리시아인과 독일계 아르헨티나인의 후손이었고, 어머니는 웨일스계 아르헨티나인 이민자였다.[2] 알폰신은 초등학교 졸업 후, 헤네랄 산 마르틴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했다.[3] 5년 후 소위로 졸업했으나, 군인의 길을 걷지 않고 라플라타 국립 대학교와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23세에 졸업했다.[3] 1949년 마리아 로렌사 바레네체와 결혼하여 6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그 중 리카르도 알폰신만이 정치 경력을 따랐다.[4][5]

1946년 급진 시민 연합(UCR)에 가입하여 당내 파벌인 인트랜시젠트 갱신 운동의 일원이 되었다.[6] 1951년 차스콤스에서 당 위원회 회장, 1954년에는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6] 후안 페론 정부에 의해 잠시 구금되었고, ''해방 혁명'' 이후 다시 구금되어 시의회 의원직을 떠나야 했다.[6] UCR 분열 시기에 리카르도 발빈과 크리솔로고 라랄데가 이끄는 인민 급진 시민 연합(UCRP)을 따랐다.[6]

|thumb|left|1963년 국회의원 선거 운동 중인 알폰신]]

1958년 UCRP 소속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62년에 재선되었다.[7] 1962년 군사 쿠데타로 주 의회가 폐쇄되자 차스콤스로 돌아왔다.[7] 아르투로 움베르토 일리아 대통령 시기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국회에서 UCRP 블록의 부회장을 역임했다.[7] 1963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당 위원회 회장이 되었다.[7]

아르헨티나 혁명으로 일리아가 축출되자, 알폰신은 정치 집회를 열다 구금되었고, UCRP 위원회를 다시 열려고 했을 때 두 번째로 구금되었다.[9] 1966년 11월 의원직에서 사임해야 했으며, 1968년 정치 집회 후 세 번째로 구금되었다.[9] 더러운 전쟁 시기, 군사 독재와 게릴라를 모두 거부하고 자유 선거를 요구했다.[9] UCRP는 다시 UCR이 되었고, 알폰신은 UCR 내에서 갱신과 변화 운동을 만들어 발빈의 당 지도력에 도전했다.[9] 군사 독재가 자유 선거를 요구하자, 발빈과의 예비 선거에서 패배했지만, 본선에서 승리하여 의원으로 선출되었다.[9]

1975년 인권 상설 의회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 되었다.[10] 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 이후, ''인신 보호 영장''을 제출하여 강제 실종 피해자들의 자유를 요구했다.[11] 1976년 잡지 ''Propuesta y control''을 창간하여 군사 독재를 비판했다.[11] 1980년 그의 사설이 책 ''La cuestión argentina''에 수집되었다.

알폰신은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 반대하며, 분쟁 중 양측의 병력 배치에 대해 비판했다.[10][12] 그는 전쟁 초기부터 전쟁에 반대했던 몇 안 되는 정치인 중 한 명이었다.[12]

3. 대통령 재임 (1983년 - 1989년)

1983년 아르헨티나에서 대통령 선거와 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급진당이 오랜만에 정권을 되찾았고, 라울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군정기부터 이어진 인플레이션과 대외 채무, 포클랜드 전쟁으로 인한 국제적 고립 등 어려운 정국 속에서 경제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오랫동안 적대 관계였던 칠레, 브라질과의 관계를 대폭 개선했으며, 이러한 화해 노선은 이후 메르코수르 형성에 기여했다. 군정 시대에 인권 침해를 저지른 군인을 재판에 넘기고, 군의 예산과 정치력을 삭감해 나갔다. 이러한 정책에 대해 세 차례에 걸친 군의 반란이 있었지만, 알폰신은 결과적으로 군을 통제하에 두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아우스트랄 계획의 실패라는 경제적 실책으로 임기를 5개월 남기고 1989년 사임했다.

3. 1. 취임 초기

라울 알폰신은 부에노스아이레스주에서 태어나 라플라타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가 되었다.[22] 급진시민연합 소속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하여 주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22]

1983년 10월 민정 이양 요구에 따라 치러진 대선에 급진시민연합 후보로 출마, 6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되어 아르헨티나 민간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22] 아르헨티나의 민주화를 이끈 인물로서 국민들의 기대를 받았으나, 군사 정권의 악습 청산과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한 개혁 정책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2]

1983년 라울 알폰신의 대통령 취임식


알폰신의 대통령 취임식에는 이사벨 페론이 참석했다.[22] 페론주의 정당은 패배에 대한 내부 비난에도 불구하고 군부의 복귀를 막기 위해 알폰신을 지지하기로 합의했다.[22]

취임 3일 만에 알폰신은 군부에 의해 제정된 자체 사면법을 폐지하는 법안을 의회에 보냈다.[23] 이를 통해 사법부는 더러운 전쟁 기간 동안 저질러진 범죄를 조사할 수 있게 되었다.[23] 알폰신은 또한 게릴라 지도자들과 군 지도자들에 대한 사법 절차를 시작하도록 명령했다.[23][31]

초대 내각은 차스코무스에서 구성되었으며, 대부분 알폰신의 신뢰를 받는 동료들로 구성되었다.[27] 안토니오 무치가 노동부 장관, 베르나르도 그린스푼이 경제부 장관, 알도 네리가 보건부 장관, 단테 카푸토가 외무부 장관, 안토니오 트로콜리가 내무부 장관, 로케 카란자가 공공 사업부 장관, 카를로스 알코나다 아람부루가 교육부 장관, 라울 보라스가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26][27] 후안 카를로스 푸글리에세가 하원 의장을 맡았고, 에디손 오테로가 상원 임시 의장을 맡았다.[27] 대통령 협상은 카사 로사다가 아닌 대통령 공식 관저인 킨타 데 올리보스에서 이루어졌다.[27]

3. 2. 내정

라울 알폰신은 부에노스아이레스주에서 태어나 라플라타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급진시민연합 소속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주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1983년 10월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민간 출신 대통령으로서 군사 독재정권의 악습 청산과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호르헤 비델라를 재판에 회부하여 종신형을 선고받게 했으나, 이로 인해 군사정권 인사들의 쿠데타 음모가 있었다.

알폰신은 군대의 정치적 권력을 줄이기 위해 예산 삭감, 군 인력 감축, 정치적 임무 변경을 시도했다.[29] 5월 광장 어머니회 등 인권 단체 및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휘 책임을 존중하고 하위 계급 군인들에 대한 "상관 명령" 방어를 수용하려 했다.[30] 국가 실종자 위원회(CONADEP)를 설립하여 실종, 인권 침해 및 아동 납치 사건을 기록하고, 군부 재판을 후원하여 군사 쿠데타 지도자들을 재판했다.[23][33] 호르헤 비델라와 에밀리오 마세라에게 종신형을 선고하고, 로베르토 에두아르도 비올라에게는 17년형을 선고했다.[34] 라몬 캄프스는 25년형을 선고받았다.[34]

반란이 일어났지만, 알폰신은 반란군과 직접 협상하여 항복을 받아냈다.[37] 그러나 정당한 복종의 법으로 인해 군에 대한 민간 통제 목표는 실패했다.[38] 모하메드 알리 세이넬딘 대령의 반란도 있었으나 진압되었다.[39] 엔리케 고리야란 메를로가 이끄는 소규모 게릴라 군대의 공격도 신속하게 진압되었다.[39]

알폰신은 노동조합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으나, 노동총연맹 (CGT)은 페론주의 세력으로 남아있었다.[45] 알폰신은 파업을 허용했고, 13차례의 총파업과 수천 건의 소규모 노동 분쟁이 발생했다.[48] 노동조합은 높은 인플레이션에 대응하여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하며 정부와 갈등했다.[50]

군사 독재가 끝나자 알폰신은 권위주의적 관습을 줄이기 위한 문화 및 교육 정책을 추진하고 언론의 자유를 증진했다.[51] 이혼을 합법화했지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에 따라 종교 교육 폐지를 막으려는 교회와 갈등했다.[52]

1989년 아르헨티나의 실질 국민소득은 1964년 수준으로 추락했고, 알폰신은 임기 종료를 수 개월 남기고 사임했다. 군부 독재를 청산하고 문민 정부를 구축한 공이 있으나 경제에 대해서는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3. 3. 외교 정책

라울 알폰신은 포클랜드 전쟁으로 인해 긴장 관계에 있던 영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다. 1984년 아르헨티나 비글 해협 분쟁 해결 국민투표에서 82%의 지지를 얻어 1984년 칠레-아르헨티나 평화 우호 조약을 체결, 비글 해협 분쟁을 종식시켰다.[54][55] 비글 해협의 3개 섬(피크턴 섬·레녹스 섬·누에바 섬)의 칠레 영유를 인정했다.[53]

브라질이 1985년 3월 민정 이양을 하자, 11월 조제 사르네이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갖고, 1986년 7월 아르헨티나-브라질 통합 의정서에 조인하여 양국의 오랜 적대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59][60]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통합 및 경제 협력 프로그램(PICE)을 체결했고, 1988년에는 두 나라와 우루과이가 공동 시장 창설에 합의했다. 이는 1991년 아순시온 조약으로 이어져 메르코수르가 창설되었다.

알폰신,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과 만남


알폰신은 브라질, 우루과이, 페루와 동맹을 맺고 콘타도라 지원 그룹을 창설하여 남아메리카의 콘타도라 그룹을 지원했다. 이들은 미국과 니카라과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57][58] 알폰신은 소련을 공식 방문한 최초의 아르헨티나 국가 원수였다.

3. 4. 경제 정책: 아우스트랄 계획과 실패

라울 알폰신은 집권 초기에 이전 10년 동안 국가 경제가 15% 위축되고,[61] 대외 부채는 430억 달러에 달했으며, 국내총생산 감소, 높은 실업률과 209%에 달하는 인플레이션 등 심각한 경제 문제에 직면했다.[62]

초대 경제부 장관 베르나르도 그린스푼은 임금을 인상하고 국가의 대외 부채에 대해 더 유리한 조건을 협상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국제 통화 기금(IMF)과 협상했지만, IMF는 지출 삭감을 요구했다.[63] 1985년 3월, 그린스푼은 사임하고 후안 비탈 소루일레가 아우스트랄 계획을 설계했다. 이 계획은 물가와 임금을 동결하고, 통화 발행을 중단하며, 지출을 삭감하고, 새로운 통화인 아우스트랄을 도입했다.[63] 이 계획은 단기적으로 성공했지만, 인플레이션이 다시 상승하고 노동계와 재계의 반대에 부딪혔다.[64] 알폰신은 일부 국유 자산의 민영화와 경제 규제 완화를 시도했지만, 정의당과 급진시민연합 양측의 반대에 직면했다.[64]

1986년 FIFA 월드컵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의 활약으로 아르헨티나가 우승하여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세계 은행의 지원을 받아 1987년에 세금 인상, 민영화, 정부 지출 감소를 시도했지만, 1987년 중간 선거에서 패배하고 정부를 지지했던 노조는 거리를 두었으며, 재계는 명확한 행동 방침을 제시하지 못했다.[65] 봄 계획은 물가와 임금을 동결하고 연방 적자를 줄여 경제를 안정시키려 했지만, 아우스트랄 계획보다 더 좋지 않은 반응을 얻었고, 세계 은행과 IMF는 아르헨티나에 대한 신용 연장을 거부했다.[66] 대형 수출업체들은 중앙 은행에 달러 판매를 거부하여 중앙 은행의 외환 보유고가 고갈되었다.[66] 1989년 2월 아우스트랄이 평가 절하되고, 높은 인플레이션은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바뀌었다.[61] 1989년 초에 미국 달러는 14 아우스트랄의 가치를 가졌지만, 5월에는 17000 아우스트랄의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61] 결국, 알폰신은 경제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임기를 5개월 남기고 조기 퇴진했다.[67]

1989년과 1990년의 인플레이션율


3. 5. 군부의 반란과 민주주의 위기

라울 알폰신은 대통령 취임 후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고 군부를 문민 통제하에 두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28] 이를 위해 군 예산 삭감, 병력 감축, 정치적 임무 변경 등을 통해 군의 정치적 영향력을 줄이려 했다.[29]

'더러운 전쟁' 기간 동안 자행된 범죄에 대해 알폰신은 지휘 책임을 강조하고 하위 계급 군인들에 대한 '상관 명령' 방어를 수용하려 했으며, 그 조건으로 군사정권 지도자들은 군사 재판을 받도록 했다.[30]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5월 광장 어머니회 등 인권 단체와 여론의 반대에 직면했다.[30] 군부는 더러운 전쟁이 합법적이었다고 주장하며 기소를 부당하게 여겼다.[31]

알폰신은 국가 실종자 위원회(CONADEP)를 설립하여 실종, 인권 침해, 아동 납치 사건을 조사하도록 했다.[23] 위원회는 "''Nunca más''"(다시는es) 보고서를 통해 더러운 전쟁의 참상과 군부의 책임을 폭로했다.[32]

국가 실종자 위원회에서 발간한 보고서 "Nunca más"(다시는) 표지


이에 따라 알폰신은 군부 재판을 추진했고, 1985년 아르헨티나 대법원에서 군사 쿠데타 지도자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33] 그 결과 호르헤 비델라와 에밀리오 마세라에게 종신형이 선고되는 등 군부 인사들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34]

그러나 군부는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며, 카라핀타다 반란을 일으켰다. 알도 리코 중령은 캄포 데 마요에서 바레이로를 지원하며 또 다른 반란을 일으켰다. 알폰신은 반란군과 직접 협상하여 그들의 항복을 받아냈다.[37] 그러나 정부는 정당한 복종의 법을 제정하여 재판을 규제했고, 이는 군에 대한 굴복으로 비춰지기도 했다.[38]

1988년에도 알도 리코와 모하메드 알리 세이넬딘 대령이 주도하는 반란이 발생했지만 진압되었다. 1989년에는 엔리케 고리야란 메를로가 이끄는 소규모 게릴라 군대가 라 타블라다 연대를 공격했지만, 육군에 의해 신속하게 진압되었다.[39]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알폰신 정부가 군부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음을 보여준다.

4. 퇴임 이후

라울 알폰신은 1989년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임기 종료를 수개월 앞두고 조기 사임했다.[71] 1991년 총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급진시민연합 총재직에서 물러났으나,[71] 1993년 다시 당 대표로 복귀했다.[72] 그는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과의 올리보스 협약을 통해 대통령 중임 4년으로 헌법 개정을 이끌었으며, 1994년 아르헨티나 헌법 개정에 참여했다.[73] 1995년 급진시민동맹 총재직을 사임했고,[74]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다시 총재직을 맡았다.

1997년 아르헨티나 입법 선거에서 노동, 정의, 교육을 위한 동맹이 승리하는데 기여했다.[75] 1999년 리오네그로주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39일 동안 입원하기도 했다.[76] 2001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곧 사임했다.[77][78]

2001년 12월 아르헨티나 폭동으로 페르난도 데 라 루아 대통령이 사임한 후, 알폰신은 에두아르도 두알데를 새 대통령으로 지지하여 정국 안정에 기여했다.[77] 2006년에는 2007년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에서 로베르토 라바냐 후보를 지지했다.[79] 2008년 10월,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대통령으로부터 그의 초상이 새겨진 흉상을 받았다.[80]

알폰신(가운데)과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오른쪽) 대통령,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왼쪽) 총리의 2008년 마지막 공개 석상


2009년 3월 31일, 알폰신은 1년간의 폐암 투병 끝에 82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사망했다.[81] 아르헨티나 국회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며, 수많은 추모객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81][83]
아르헨티나 국회에서 열린 알폰신의 추도식
그의 유해는 레콜레타 묘지에 안장되었다.[83]

5. 평가

역사가 펠릭스 루나, 미겔 안젤 데 마르코, 페르난도 로치 등은 모두 더러운 전쟁 이후와 민주주의 회복에 있어 라울 알폰신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다.[85] 루나는 또한 알폰신이 유능한 대통령이었으며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국가를 사용하지 않는 모범을 보였다고 여긴다. 데 마르코는 당시가 매우 민감한 시기였으며, 작은 실수라도 새로 수립된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또 다른 쿠데타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85] 앞서 언급된 역사가들은 올리보스 협정에 대한 시각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한다. 루나는 메넴UCR과의 협상 없이 헌법 개정을 추진했다면 발생했을 혼란을 막기 위한 필요악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데 마르코와 로치는 그것이 알폰신의 정치 경력에서 가장 큰 실수였다고 믿는다.[85]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이 라울 알폰신에 대한 전시회를 개막했다.


알폰신은 비글 해협 분쟁 종식에 기여한 역할과 아르헨티나 민주주의 재건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1985년 아스투리아스 공작 부인상 국제 협력 부문을 수상했다. 그는 200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명예 시민", 2009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명예 시민"으로 선정되었다. 후자의 상은 사후에 수여되었으며 스페인 대사인 그의 아들 리카르도 알폰신이 받았다.[86]

5. 1. 긍정적 평가

역사가 펠릭스 루나, 미겔 안젤 데 마르코, 페르난도 로치 등은 모두 더러운 전쟁 이후와 민주주의 회복에 있어 라울 알폰신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다.[85] 루나는 또한 알폰신이 유능한 대통령이었으며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국가를 사용하지 않는 모범을 보였다고 여긴다. 데 마르코는 당시가 매우 민감한 시기였으며, 작은 실수라도 새로 수립된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또 다른 쿠데타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85]

알폰신은 비글 해협 분쟁 종식에 기여한 역할과 아르헨티나 민주주의 재건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1985년 아스투리아스 공작 부인상 국제 협력 부문을 수상했다. 그는 200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명예 시민", 2009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명예 시민"으로 선정되었다. 후자의 상은 사후에 수여되었으며 스페인 대사인 그의 아들 리카르도 알폰신이 받았다.[86]

5. 2. 부정적 평가

역사가 펠릭스 루나, 미겔 안젤 데 마르코, 페르난도 로치 등은 모두 더러운 전쟁 이후와 민주주의 회복에 있어 라울 알폰신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다.[85] 루나는 또한 알폰신이 유능한 대통령이었으며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국가를 사용하지 않는 모범을 보였다고 평가한다.[85] 데 마르코는 당시가 매우 민감한 시기였으며, 작은 실수라도 새로 수립된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또 다른 쿠데타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85]

앞서 언급된 역사가들은 올리보스 협정에 대한 시각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한다. 루나는 메넴UCR과의 협상 없이 헌법 개정을 추진했다면 발생했을 혼란을 막기 위한 필요악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데 마르코와 로치는 그것이 알폰신의 정치 경력에서 가장 큰 실수였다고 믿는다.[85]

6.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1983년 선거아르헨티나의 대통령39대급진시민연합51.75%7,724,559표1위
25px



라울 알폰신은 1983년 총선에서 51.7%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21] 이는 후안 도밍고 페론의 부상 이후 페론주의 정당이 선거 사기나 공직 배제 없이 선거에서 패배한 첫 번째 사례였다.[21] 알폰신은 카를로스 콘틴과의 당내 경선에서 승리한 후 급진시민연합 후보로 출마했으며, 부통령 후보로는 빅토르 마르티네스가 지명되었다.[16]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알폰신은 군부와 페론주의 노조 간의 협약을 비난하고, 군대에 대한 민간 정부의 지배와 노조 규제를 주장했다.[19] 또한 더러운 전쟁 기간 동안 군의 행동에 대한 조사를 제안하며, 아르헨티나 헌법 전문을 읽는 것으로 선거 운동을 마무리했다.[19]

알폰신-마르티네스 선거 티켓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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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문서 Lagleyze, pp.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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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문서 Burns, p. 119
[9] 문서 Lagleyze, pp. 14–19
[10] 문서 Rock, p. 387
[11] 문서 Burns, p. 120
[12] 문서 Burns, p. 124
[13] 문서 Burns, p.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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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웹사이트 Diez anécdotas de Alfonsín, el padre de la democracia moderna en Argentina https://www.infobae.[...] Infobae 2017-10-12
[17] 문서 Lagleyze, p. 23
[18] 문서 Rock, p. 388
[19] 문서 Lagleyze, pp. 23–26
[20] 문서 Rock, 389
[21] 문서 Lagleyze, p. 26
[22] 문서 Rock, p. 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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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서적 Lagleyze, pp. 4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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