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고바르드의 철관
1. 개요
랑고바르드의 철관은 전설에 따르면 성 헬레나가 발견한 참 십자가의 못으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왕관으로, 랑고바르드 왕국과 중세 이탈리아 왕국의 상징이었다. 이 왕관은 6개의 금 조각과 22개의 보석으로 장식되었으며, 그 안에는 철 고리가 있다. 9세기부터 17세기까지 여러 왕과 황제의 대관식에 사용되었으며, 나폴레옹 1세는 이 왕관을 사용하여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하기도 했다. 현재는 몬차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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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7세 (신성 로마 황제) -
제정론
군주론은 단테 알리기에리가 집필한 3권으로 구성된 책으로, 교황주의에 맞서 신성 로마 황제의 필요성을 옹호하며 교황과 황제의 권력은 모두 신으로부터 직접 받았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
이탈리아의 상징 -
이탈리아의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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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상징 -
이탈리아 왕국의 국가
이탈리아 왕국의 국가는 1831년부터 1946년까지 사용된 "왕실 행진곡"으로, 사르데냐 왕국 시절 국가로 채택되어 이탈리아 통일 운동에 기여했으며 왕국 폐지 후에도 역사적 유산으로 남아 기념식 등에서 연주된다. -
관 유물 -
신라 금관
신라 금관은 신라 시대 지배 계층이 사용한 관으로, 금관총 등에서 발굴되었으며 샤머니즘적 권위, 신목 숭배 사상, 유라시아 초원 문화 등 다양한 문화적 영향을 받아 발전했고, 현재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관 유물 -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은 5~6세기경 제작된 금관, 장신구, 반지, 귀걸이 등으로 구성되어 국보 제138호로 지정되었으며 신라와 백제 양식이 혼합된 금관을 포함하고 있고 현재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도굴 후 소유권 및 출토지 논란이 있다.
2. 전설과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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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헬레나가 참 십자가의 못을 두드려 깎아 콘스탄티누스 1세를 위해 이 왕관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롬바르드족의 공주 테오델린다에게 외교적 선물로 전달했으나, 기증 목록에는 언급되지 않았다. 테오델린다는 628년에 몬차의 교회에 이 왕관을 기증했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철관은 콘스탄티누스의 투구와 재갈의 일부였으며,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가 테오도시우스 1세의 장례식에서 언급했다고 한다. 재갈은 밀라노에 남아 대성당에 보존되었고, 투구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졌다. 테오도리크 대왕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하여 이탈리아 왕으로서의 권리로 왕관을 요구하자, 비잔틴인들은 그에게 왕관을 보냈다. 투구는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 전시되어 있다가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이후 분실되었다. 테오도리크 왕은 암브로시우스의 De obitu Theosdosii에 묘사된 왕관을 자신의 왕관으로 채택했고, 이는 고트족이 이탈리아를 침략했을 때 롬바르드족에게 넘겨졌다.
이 왕관은 774년 샤를마뉴의 롬바르드족 왕 즉위식에 사용되었다.
2.1. 랑고바르드 왕국과의 관계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롬바르드족의 공주 테오델린다에게 외교적 선물로 철관을 전달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히 어떻게 랑고바르드 왕국의 소유가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테오델린다는 이 왕관을 628년에 몬차의 교회에 기증했다.
테오델린다(아우타리 및 아길룰프의 왕비)가 철관을 발견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철관은 랑고바르드 왕국과 중세 이탈리아 왕국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3. 구조와 특징
랑고바르드의 철관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사용된 못으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너비 1cm의 띠를 포함하고 있다. 왕관 바깥쪽은 부분적으로 에나멜 처리된 6개의 금 조각이 경첩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십자가와 꽃 모양으로 돋보이게 배치된 22개의 보석7개의 붉은 가넷, 7개의 푸른 사파이어, 4개의 보라색 자수정, 4개의 녹색 유리 페이스트이 박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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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관은 금으로 된 서클릿 안쪽에 폭 1cm 정도의 철 고리가 부착된 구조로, 안쪽 지름은 16.5cm, 바깥쪽 지름은 17.2cm, 안쪽 원둘레는 48cm이다. 이 철 고리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사용된 못을 두드려 늘려 얇은 띠 모양으로 만든 것이라고 전해지며, 성유물로 여겨진다.
작은 크기와 경첩 구조 때문에 철관은 원래 커다란 팔찌이거나 봉헌 왕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두 개의 조각이 손실된 후 크기가 재조정되었다고 한다.
3.1. 과학적 분석
1993년, 밀라노 대학교에서 X선 형광 분석(XRF)과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사용하여 철관에 대한 광범위한 과학적 분석이 이루어졌다.
XRF 분석 결과, 철관의 주요 부분(포일, 로제트, 베젤)은 84~85% 금, 5~7% 은, 8~10% 구리로 만들어진 동일한 합금으로 제작되었고, 에나멜 판 외부의 필레와 경첩 핀은 90~91% 금과 9~10% 은으로 만들어졌다. 이를 통해 주요 부분은 동시대에 제작되었고, 이후 재작업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24개의 유리질 에나멜 판 중 3개는 다른 판들과 시각적으로 색상과 구조가 달랐는데, XRF 분석 결과 다른 기술로 만들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이 3개의 판 유리는 칼륨 염으로, 나머지 판 유리는 나트륨 염으로 만들어졌다.
밀랍 조각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특이한" 판 아래의 밀랍은 기원후 500년경, "정상적인" 판 아래의 밀랍은 기원후 800년경으로 나타났다. 이는 테오도리크 재위 기간에 에나멜을 추가하여 장식하고, 샤를마뉴 재위 기간에 광범위하게 복원된 더 오래된 왕관이라는 전통과 일치한다.
"철 못"은 99% 은으로 밝혀져, 철관에는 철이 전혀 없다. 1345년 왕관을 복원한 금세공인 안텔로토 브라치포르테는 경첩이 약해져 왕관을 강화하기 위해 은색 고리를 추가했다는 추측이 제기되었다. 1352년, 몬차 대성당 보물 목록에서 처음으로 왕관을 작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왕관의 보석은 7개의 붉은 가넷, 7개의 푸른 강옥(사파이어), 4개의 보라색 자수정, 그리고 유리로 만든 4개의 보석이다.
4. 역사적 의의와 사용
철관은 롬바르드 왕국과 중세 이탈리아 왕국의 왕위 계승 의식에 사용된 중요한 상징물이었다. 9세기부터 17세기까지 샤를마뉴 대제를 비롯한 많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이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하면서 철관을 사용했다. 바르톨로메오 주키는 철관을 사용한 대관식을 34회로 집계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이탈리아 국왕의 대관식에 철관을 사용했다는 최초의 확실한 기록은 1312년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7세의 대관식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후 철관이 사용된 대관식은 다음과 같다.
* 카를 4세 (1355, 페트라르카 참석)
* 지기스문트 (1431)
* 카를 5세 (1530)
전통적인 대관식 장소는 파비아였으나, 1026년 콘라트 2세 이후 밀라노에서 거행되었다.
4.1. 중세 시대
9세기부터 18세기까지 이탈리아 왕들은 신성 로마 황제이기도 했으므로,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왕국의 공식 수도인 파비아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철관을 대관식에 사용했다는 가장 초기의 확실한 기록은 1311년 또는 1312년 헨리 7세의 밀라노 대관식에서였다. 이 의식은 프랑스와 로마의 영향을 받았으며, 밀라노 대관식의 가장 정교한 예시였다. 왕에게는 "Accipe coronam regni라틴어"('이 왕관을 받으십시오')라는 말과 "Deus perpetuitatis라틴어"('영속의 신')이라는 기도를 하면서 왕관이 수여되었다. 이는 왕이 국가 검을 받은 후 홀, 지팡이, 그리고 보주와 십자가를 받기 전에 이루어졌다.
10세기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동시에 이탈리아 왕이기도 했다. 많은 군주는 로마로 가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대관식을 거행했지만, 그 도중에 롬바르디아로 가서 철왕관을 쓰고 이탈리아 왕이 되는 의식을 치렀다. 샤를마뉴 대제, 오토 1세, 하인리히 4세,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와 같은 유명한 황제들도 철왕관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전통적으로 대관식이 거행되는 곳은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였던 파비아였지만, 1026년 콘라트 2세의 대관식 이후에는 밀라노에서 의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1530년, 카를 5세는 볼로냐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의 대관식과 함께 철왕관 대관식도 거행했다.
4.2. 근대 이후
1805년 5월 26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밀라노에서 스스로 대관식을 치르고 이탈리아 왕이 되었다. 이때 일반적인 왕관으로 의식을 치른 후, 철관을 사용하여 랑고바르드 왕국의 의식에 따라 "Dio me l'ha data, guai a chi la tocca.이탈리아어"(신이 내게 주셨으니, 누구든지 함부로 손대면 재앙이 있을 것이다)라고 선서했다. 1805년 6월 15일, 나폴레옹은 철관 훈장을 제정했다.
나폴레옹의 몰락 후, 오스트리아가 롬바르디아를 다시 병합하자, 1816년 1월 1일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가 철관 훈장을 다시 제정했다. 철관으로 대관식을 치른 마지막 사례는 1838년 9월 6일 페르디난트 1세가 롬바르도-베네토 왕으로 밀라노에서 대관식을 치른 것이다.
1859년의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으로 롬바르디아 전역은 사르데냐 왕국에 할양되었다. 그러나 철관은 오스트리아에 의해 빈으로 옮겨졌다. 철관이 다시 몬차로 돌아온 것은 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후인 1866년이다.
5. 문화적 영향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 37장 "황혼"에는 롬바르디아의 철관이 언급된다. 이 장은 에이해브 선장의 독백으로, 그는 스스로를 롬바르디아의 철관을 쓴 왕으로 상상한다. 에이해브 선장은 선원들을 복종시키는 자신의 지배력을 철관에 비유하며, 왕관의 위엄이 보는 이의 눈을 멀게 한다고 묘사한다.
알레산드로 블라세티 감독의 이탈리아 영화 라 코로나 디 페로(1941)는 철관이 이탈리아에 도착하는 과정을 다룬다.
TV 시리즈 파더 브라운 70화에 철관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