랴오둥반도 반환 조약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랴오둥반도 반환 조약은 1895년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기로 한 조약이다.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랴오둥 반도를 할양받았으나,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 간섭으로 인해 일본은 반환을 결정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은화 3000만 냥을 받고 랴오둥 반도에서 철수했으며, 일본 내 반러 감정을 악화시켜 러일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러시아는 랴오둥반도를 조차하여 철도를 부설하고 군항을 건설했으며, 조선은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95년 조약 - 시모노세키 조약
시모노세키 조약은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청나라와 체결한 강화 조약으로, 청나라는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고 랴오둥 반도, 타이완, 펑후 제도를 일본에 할양하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게 하였다. - 1895년 중국 - 삼국 간섭
삼국 간섭은 청일전쟁 후 일본이 얻은 요동반도를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반환하도록 요구한 사건으로, 일본의 국력 강화와 동아시아 질서 재편에 영향을 주었으며, 열강의 중국 분할 야욕과 러일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 1895년 중국 - 웨이하이 전투
웨이하이 전투는 1895년 청일 전쟁 중 일본군이 청나라 해군 기지인 웨이하이를 공격하여 점령한 전투로, 일본이 황해 제해권을 장악하고 화북 지역으로 진격하는 발판을 마련했으며 청일 전쟁의 주요 전환점이 되었다. - 1895년 일본 - 삼국 간섭
삼국 간섭은 청일전쟁 후 일본이 얻은 요동반도를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반환하도록 요구한 사건으로, 일본의 국력 강화와 동아시아 질서 재편에 영향을 주었으며, 열강의 중국 분할 야욕과 러일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 1895년 일본 - 제2차 이토 내각
이토 히로부미가 이끈 제2차 이토 내각은 불평등 조약 개정, 청일 전쟁 승리 등 성과에도 불구하고 삼국 간섭,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의 외교적 실패와 조선에서의 영향력 약화, 그리고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탈 정책 추진으로 비판을 받았다.
랴오둥반도 반환 조약 | |
---|---|
조약 정보 | |
제목 | 봉천반도 환부 니 관한 조약 |
통칭 | 랴오둥반도 환부 조약 |
원어 제목 | 交還奉天省南邊地方條約 |
로마자 표기 | Gyo hwan Bongcheonseong Nambyeon Jibang Joyak |
서명 | 1895년 11월 8일 |
서명 장소 | 베이징 |
효력 발생 | 알 수 없음 |
당사국 | |
기탁자 | 알 수 없음 |
번호 | 메이지 28년 12월 3일 조약 |
언어 | 일본어 중국어 |
내용 | 청나라에 대한 랴오둥반도의 반환 |
관련 | 시모노세키 조약 |
위키소스 | 봉천반도환부니관할조약 |
링크 | 봉천반도 환부 조약(아시아 역사 자료 센터) |
![]() |
2. 명칭
현대 일본에서는 '''요동환부조약'''(遼東還付条約)이라고 부르며, 중국에서는 '''랴오난 조약'''(遼南條約)이라고 칭한다.
3. 배경
3. 1. 청일 전쟁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청나라는 랴오둥 반도, 타이완 섬, 펑후 제도를 일본에 영구히 할양하고, 전쟁 배상금 2억 냥(당시 일본 돈 3억 2천엔)을 지불하기로 했다.
3. 2. 삼국 간섭
러시아는 동맹관계에 있던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의 랴오둥반도 획득이 청일 양국의 우호를 해치며, 동아시아의 평화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못하며, 청나라에 다시 반환하도록 일본정부를 압박하였고, 반환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무력을 행사할 뜻이 있음을 일본에 내비치었다.[3] 일본은 결국 이 세 나라의 힘에 굴복하여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게 반환하기로 합의하였다.[3]
4. 조약 체결
1895년 11월 8일, 청나라 베이징에서 청나라 대표 리훙장(李鴻章)과 일본 대표 하야시 다다스(林董)가 참석하여 조약이 체결되었다.[1] 청일 전쟁 강화 회담은 히로시마시 다음으로 시모노세키시(당시는 아카마세키시)에서 열렸고, 그 결과 압록강과 요하 사이 지역의 잉커우, 하이청, 펑황청을 잇는 선보다 남쪽의 랴오둥반도를 일본이 영유하게 되었다.[1] 그러나 프랑스 제3공화국,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의 삼국 간섭으로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게 되었다.[1]
5. 조약 내용
일본 제국은 청나라에 랴오둥 반도를 반환한다. 청나라는 1895년 11월 16일까지 반환에 대한 배상금으로 일본에 은화 3000만 냥을 지불한다. 배상금 지불 후 3개월 이내에 일본군은 랴오둥 반도에서 철수한다.
6. 영향
6. 1. 일본
삼국 간섭으로 인해 일본 내에서는 대러 감정이 악화되었다. 이는 조선과 만주를 둘러싼 러시아와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으며, 결국 러일 전쟁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다.6. 2. 러시아
1898년 러시아는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게 되돌려준 대가로 뤼순항과 다롄항을 조차받고 철도를 부설하였으며 군항을 설치하였다.[4] 같은 해 3월, 러시아는 청나라와 "여순항·다롄만 조차에 관한 노청 조약"을 맺고, 랴오둥반도에 철도를 부설하고 군항을 건설했다.6. 3. 조선
친러시아 성향의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암살된 후, 조선 정부의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아져,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사건이 일어났다.7. 기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랴오둥반도를 할양받았다. 그러나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 간섭으로 인해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해야 했다. 이후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랴오둥 반도는 다시 일본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참조
[1]
문서
海野(1992)pp.69-73
'#海野'
[2]
문서
加藤(2002)p.134
'#加藤暢'
[3]
서적
일본의 역사, 일청전쟁-일러전쟁(1992)
[4]
서적
전쟁의 일본근현대사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