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베이루트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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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의 베이루트 점령은 1772년과 1773년,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베이루트를 두 차례 점령한 사건이다. 예카테리나 2세의 지휘 아래 러시아는 지중해 세력 확장을 위해 베이루트를 전략적 요충지로 삼았으며, 드루즈족 및 시하브 가문과의 동맹을 통해 점령을 시도했다. 첫 번째 점령 이후 철수했으나, 1773년 재점령에 성공하여 재즈르 파샤를 축출하고 용병을 주둔시켰다. 이 사건은 퀴추크 카이나르지 조약 체결의 배경이 되었으며, 베이루트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쳐 도시 내 광장 조성의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의 베이루트 점령
개요
사건 개요
사건명러시아의 베이루트 점령
날짜1773년 6월 ~ 1773년 10월
장소베이루트
결과러시아 해군의 베이루트 철수, 오스만 제국의 통제 회복
교전 세력
교전 1러시아 제국
교전 2오스만 제국
지휘관 및 지도자
러시아 제국 지휘관알렉세이 그리고리예비치 오를로프
오스만 제국 지휘관불명
병력 규모
러시아 제국 병력러시아 해군 함선 다수
오스만 제국 병력베이루트 수비대
피해 규모
러시아 제국 피해불명
오스만 제국 피해베이루트 도시 상당 부분 파괴, 상당한 인명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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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8세기 초부터 오스트리아러시아오스만 제국 북부 국경에 가하는 압력이 커지면서, 제국 내 분산된 아랍 속주였던 오스만령 시리아에서는 지방 주지사들의 불복종이 심화되었다. 1768년,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국경 근처에서 폴란드의 봉기를 진압하던 중, 코사크 연대가 일부 반군을 국경 너머로 추격하여 발타 마을에서 학살을 자행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에 오스만 술탄은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술탄은 당시 오스만 이집트에서 가장 강력한 관리였던 맘루크 출신 알리 베이 알카비르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알리 베이는 처음에는 술탄을 지원하여 1769년에 3,000명의 군인을 파견했으나, 전쟁 상황을 지켜본 뒤 이듬해 러시아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이집트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후 그는 팔레스타인 북부의 부유한 아랍 통치자였던 자히르 알우마르와 동맹을 맺었다. 알리 베이와 자히르는 이슬람 근본주의, 유럽에 대한 술탄의 고립주의 정책, 그리고 오스만 고위 관료들의 강압적인 통치 방식에 반대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반 아이바좁스키의 야간 체스메 전투 (1848년)
이반 아이바좁스키야간 체스메 전투 (1848년)


한편, 흑해에 제대로 된 함대가 없었던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는 알렉세이 그리고리예비치 오를로프 백작과 함께 발트 함대의 상당수 함선을 지중해로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러시아는 이 함대가 후방에서 터키 해협을 공격하고, 에게해에서의 해군 활동이 그리스인들의 반란을 유도할 것으로 기대했다. 오를로프가 이끌고 그리고리 스피리도프 제독이 지휘하는 이 지중해 함대는 1769년 9월 23일 코펜하겐을 출발했다. 1770년 3월 1일까지 첫 분견대가 남부 모레아에 도착하여 '오를로프의 반란'을 일으켰고, 이후 몇 달간 이 지역 여러 곳에서 포격과 군대 상륙이 이어졌다. 1770년 7월 7일, 체스메 전투에서 러시아 함대는 오스만 함대를 격파했다. 이 전투로 오스만 해군은 사실상 무력화되었고, 러시아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살아남은 오스만 함선들은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후퇴했다. 해군 소장 존 엘핀스톤은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직접 공격을 제안했지만, 오를로프는 그의 함대로 해협을 봉쇄하고 나머지 함대는 북부 에게해에서 공세를 펼치도록 설득했다.

러시아 기록에서는 15세기부터 무슬림을 '하가리우스파'로 묘사했는데, 이는 성경에 나오는 하갈의 후손으로 시나이 사막으로 추방되었다는 의미를 담은 경멸적인 표현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궁정은 18세기에 오스만 제국의 튀니스, 알제리, 트리폴리 등이 자치권을 얻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무슬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잠재적인 동맹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주저하지 않았다. 1769년 7월 15일, 그녀는 스피리도프 제독에게 도발받지 않는 한 이들 국가의 선박을 공격하지 말라고 지시하며, 바르바리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도록 부추기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튀니스와 알제리가 오스만 편에서 싸우면서 예카테리나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고, 트리폴리의 알리 파샤와 오를로프 간의 서신 교환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770년 말, 알리 베이는 신뢰하던 장군 무함마드 베이 아부 알-다하브가 지휘하는 4만 명의 군대를 팔레스타인으로 보냈다. 이 군대는 1771년 봄 자히르의 군대와 합류하여 레반트의 여러 도시를 점령했다. 그러나 6월 초 다마스쿠스를 함락시킨 직후, 오스만 측 요원들은 아부 알-다하브를 설득하여 알리 베이를 배신하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아부 알-다하브에게 알리 베이 대신 이집트 통치자 자리를 약속했다. 아부 알-다하브는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돌아가 이전 주군이었던 알리 베이와 권력 투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자히르는 자신의 영토에서 고립되어 오스만 제국의 반격에 홀로 맞서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알리 베이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통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1771년 12월, 그는 야쿠브라는 아르메니아 특사를 에게해의 파로스섬에 있는 지중해 함대 사령부로 보내 오를로프를 만나 러시아에 동맹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나중에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수락되었지만, 그녀가 동맹 제안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알리 베이가 이집트에서 쫓겨난 후였다. 알리 베이는 아부 알-다하브와의 무력 충돌 끝에 이집트를 떠나 동맹인 자히르에게 피신해야 했다. 알리 베이의 도주 사실을 모른 채 오를로프의 명령으로 그와 접촉하라는 지시를 받은, 그리스인 부관 리조가 지휘하는 분견대가 다미에타로 항해했지만, 알리 베이의 상황을 알게 된 후 즉시 항구를 떠났다. 이후 분견대는 팔레스타인 해안을 따라 알리 베이를 수색했고, 마침내 1772년 6월 3일 아크레에서 그를 발견했다. 리조는 이후 분견대를 북쪽으로 보내 티레 근처 베이루트에서 오스만 프리깃함 한 척을 요격했다. 한편, 시돈에서는 자히르의 6,000명 소규모 군대가 드루즈파 병력을 포함한 3만 명의 오스만군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리조의 함선들이 오스만 공격군을 향해 포격을 가하며 수비대를 지원하자, 오스만군은 곧 철수했다.

3. 첫 번째 점령 (1772년)

시돈에서 오스만 제국 군대가 패배한 후, 새로 결성된 연합군은 당시 드루즈족이 통제하던 작은 항구 도시인 베이루트러시아 함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연구자 윌리엄 페르센에 따르면, 이 원정의 목적은 드루즈파의 관심을 끌고 오스만 제국 편을 든 것에 대한 처벌이었으며, 항구를 봉쇄함으로써 이를 달성하고자 했다. 또한 베이루트는 당시까지 오스만 통치하에 남아 있던 이 지역의 유일한 항구였다.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포르테) 사이의 최근 휴전 협정을 알지 못했던 리조의 함대는 1772년 6월 18일 티레와 아크레 분견대와 합류하여 베이루트 해안에 나타났다. 이 함대는 호위함 2척(Sv. 니콜라이성. 파벨), 폴라카 4척, 범요선 5척, 지벡 4척으로 구성되었다. 함대는 주로 그리스와 알바니아 용병으로 구성된 보병 사단을 수송하고 있었다. 같은 날 도시에 대한 포격이 시작되었고, 항구에 정박해 있던 오스만 군함들은 침몰했다. 예카테리나 2세와 동양의 저자인 오리앙은 이 사건에 대한 자신의 기록에서 리조가 베이루트 수비대에게 24시간 내에 러시아 국기를 게양하고 조공을 바치라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고 적었다.

해군 공세는 5일간 지속되었으며, 6월 21일에는 상륙 부대의 공격이 실패하기도 했다. 이틀간의 집중 포격 끝에 러시아군은 마침내 6월 23일 상륙에 성공했다. 상륙 후 러시아군은 마을과 시장을 약탈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약 55만 키르시 상당의 무역 상품과 현금을 약탈했다. 러시아군은 6월 28일 철수했는데, 이는 주변 산맥을 통치하던 드루즈 에미르인 유수프 시하브로부터 추가적인 지불을 받은 후였다. 유수프 시하브는 또한 러시아 측과 4개월간의 동맹을 맺는 데 동의했다.

4. 알리 베이의 반란의 종식

알리 베이는 아크레에서 동맹군과 함께 베이루트를 포격하던 중, 예카테리나 2세가 보낸 사절 야쿠브를 만났다. 야쿠브는 러시아 호위함을 타고 와 예카테리나 2세의 선물과 러시아와의 동맹을 확인하는 우호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러나 알리 베이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아부 알다하브에게 빼앗긴 이집트를 되찾기 위해 러시아에 보병, 포병, 해군 지원 등 실질적인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알리 베이는 이러한 요청을 담은 새로운 사절을 오를로프 백작에게 보냈다. 역사가 에두아르 로크루아(Édouard Lockroy)에 따르면, 알리 베이는 지원의 대가로 예루살렘의 기독교 성지에 대한 지배권을 러시아에 제안했을 가능성도 있다.

오를로프는 오스만 제국과의 휴전 협정 때문에 직접적인 지원이 어렵다고 답했다. 대신 소규모 장교단과 포병 지원을 약속하며,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덧붙였다. 1772년 여름, 알리 베이와 자히르 알 우마르의 군대는 야파를 포위했다. 9월, 러시아 수송선이 야파 근처에 포병대를 상륙시키며 포위 공격에 가담했다. 한 달 뒤, 알리 베이는 다시 오를로프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11월에는 파나이오티 알렉시아노 중위가 이끄는 또 다른 러시아 해군 분견대가 야파에 도착해 포격에 합류했으며, 오를로프가 알리 베이를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파견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알렉시아노의 함대는 호위함 성 바오로(Sv. Pavel)와 다수의 폴라카로 구성되었으며, 이전에 다미에타에서 바르바리 해적선 두 척을 격침하고 소형 선박 여러 척을 나포한 전력이 있었다.

한편 알리 베이는 경쟁자인 아부 알다하브 진영 내부에 반란 조짐이 있다는 소문과 이집트 내에서 자신에 대한 지지 여론이 커지고 있다는 소식에 주목했다. 그는 러시아의 지원을 더 기다리지 못하고, 1773년 4월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로 향했다. 이는 러시아 지원이 곧 도착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지 한 달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알리 베이의 군대는 카이로 근교에서 아부 알다하브 군대에게 패배했고, 알리 베이는 포로로 잡힌 뒤 며칠 후 사망했다. 사인은 독살로 추정된다.

알리 베이가 이집트로 떠난 사이, 베이루트 방어를 맡았던 아흐메드 베이 알자자르는 도시를 요새화하고 유수프 시하브와는 독립적으로 행동하기로 결정했으며, 도시에 대한 술탄의 권위만을 인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오를로프가 약속했던 함대는 미하일 코주호프 대위의 지휘 아래 1773년 6월 아크레에 도착했다. 알리 베이의 사망 소식을 들은 코주호프는 대신 자히르 알 우마르와 "우호 조약"을 체결했다.

5. 두 번째 점령 (1773년)

1773년 7월, 코주호프(Kozhukhov)는 최소 222문의 대포를 갖춘 함대를 이끌고 베이루트 해안에 나타났다. 함대는 1,200명의 알바니아 용병과 기동 포병 부대를 수송하고 있었다. 자히르는 이미 시하브와 동맹을 맺었으나, 다마스쿠스의 파샤는 자자르에 맞서는 시하브에게 지원을 거부했다. 이후 한 달간의 협상 끝에, 드루즈 에미르인 시하브는 자히르와 그의 삼촌 아미르 무사 만수르를 통해 코주호프를 설득하여 베이루트를 자신에게 넘기도록 했다. 시하브는 30만 키르시의 조공을 바치고 도시를 러시아의 보호 아래 두기로 합의했다. 코주호프는 그의 군대가 1772년 러시아 침략 당시처럼 도시를 약탈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양측은 시하브가 조공을 전액 지불할 때까지 러시아가 만수르를 인질로 잡고 있기로 합의했다.

전투 순서

코주호프 함대가 베이루트에 나타났을 때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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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총포
나데즈다 (코주호프 기함)프리깃32
세인트 파벨프리깃26
세인트 니콜라이프리깃26
낙시아프리깃22
슬라바프리깃16
세인트 알렉시폴라카20
세인트 안나폴라카20
세인트 예카테리나폴라카18
스닉스폴라카12
자비아카스쿠너18
6개의 범요선


8월 2일 포격이 시작되어 하루 종일 이어졌고, 항구 지역과 탑들이 파괴되었다. 도시의 프랑스 영사에 따르면 포격 소음이 너무 커서 약 40km 떨어진 시돈에서도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아랍 자료에 따르면 다마스쿠스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베이루트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지만, 재즈르는 항복을 거부했다. 코주호프는 지상 공격을 위해 군대와 포병대의 상륙을 명령했다. 성벽은 여러 군데에서 무너졌지만, 시하브는 코주호프가 드루즈족에게 돈을 받고 도시를 넘겨주기로 한 협정을 이유로 자신의 군대를 투입해 도시를 공격하는 것을 거부했다. 코주호프는 해상 및 육지 봉쇄를 유지하며 도시의 식량 공급을 차단하기로 결정했다. 시하브와 자히르의 군대는 베카 계곡에서 접근해 온 트리폴리의 파샤가 지휘하는 오스만 구호군을 격파했다.

재즈르는 9월 말 공격자들과 협상을 시작했다. 그는 시하브나 코주호프에게 항복하면 결국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대신 자히르에게 항복하고 그의 지휘 아래 들어가겠다고 제안했다. 재즈르는 10월 10일에 베이루트를 항복하고, 이후 800명의 마그레브 수비대와 함께 아크레로 떠났다. 공세가 끝날 무렵 러시아군의 사상자는 사망 34명, 부상 96명이었다. 코주호프는 시하브와의 합의에 따라, 정박한 배 두 척과 일부 무기만 압수했다. 그러나 시하브가 약속한 조공 전액을 지불하지 못하자, 코주호프는 인질로 잡고 있던 만수르를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 시하브가 일부 금액을 지불하자, 코주호프는 나머지 금액을 추후 지불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수락했다. 러시아 사령관과 그의 분대는 에게 해로 떠났고, 가택 연금 상태인 만수르를 감시하고 도시를 점령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300명의 알바니아 용병을 남겨두었다.

알바니아 용병들은 1774년 1월 말 또는 2월 초까지 베이루트를 점령했지만, 그들이 받아야 할 조공의 나머지를 받았는지는 불분명하다. 시돈의 프랑스 영사관 보고서에 따르면, 점령 기간 동안 베이루트에는 러시아 국기가 게양되었고, 도시 정문 위에는 예카테리나 대제의 큰 초상화가 걸려 여행자들은 이에 경의를 표하도록 강요당했다.

6. 여파와 유산

1788년에 인쇄된 군도 지도집 의 베이루트 지도
1788년에 인쇄된 군도 지도집 의 베이루트 지도


아흐마드 파샤 알자자르(Ahmad Pasha al-Jazzar)와 그의 마그레브 용병들은 베이루트가 항복하자 자히르 알 우마르(Zahir al-Umar)의 진영을 떠나 오스만 제국 측으로 돌아섰다. 1774년 초 러시아군이 철수하고 같은 해 퀴추크 카이나르지 조약이 체결되면서, 자히르는 오스만 제국의 보복에 홀로 맞서게 되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지중해 연안 원하는 곳에 영사관을 설치하고 중동과의 무역로를 확보했으며, 성지에 있는 기독교 순례자의 안전을 보장받는 권리를 얻었다. 하지만 조약은 자히르나 러시아가 전쟁 중 점령한 영토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자히르는 1775년 8월, 이집트의 아부 알다하브(Abu al-Dhahab)가 이끄는 오스만 군대가 아크레를 포위하던 중 사망했다. 유수프 시하브(Yusuf Shihab)는 오스만 제국에 직접 반기를 든 적이 없었기에 빠르게 사면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 시돈의 파샤로 임명된 알자자르가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자, 시하브는 결국 1776년 베이루트를 알자자르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이 사건은 아랍 도시가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간 첫 사례였으며, 동시에 오스만 제국이 16세기 초 레반트 지역을 정복한 이후 베이루트가 처음으로 오스만의 통치에서 벗어난 사례이기도 했다. 오늘날 순교자 광장으로 알려진 베이루트 중심가의 광장은 1773년부터 '플라스 데 캐논'(Place des Canons, 대포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 비공식적인 명칭은 1950년대까지 사용되었는데, 이는 러시아군이 당시 성벽 바깥 동쪽의 빈터였던 부르즈(Burj) 지역에 대규모 포병 부대를 주둔시킨 데서 유래했다.

이 짧았던 점령의 역사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갈린다. 윌리엄 퍼슨(William Persen)은 1952년 이 사건을 단순히 "중동에 대한 서구 세력의 새로운 침투" 정도로 평가절하했다. 반면 P. 페르미노프(P. Perminov) 등 구소련 학자들은 이를 냉전 시대 소련이 제3세계 국가들의 민족 해방 운동을 지원했던 것의 초기 형태로 해석하기도 했다.

7. 추가 읽기

* Davie, Michael F.; Frumin, Mitia (2007). Late 18th century Russian Navy maps and the first 3D visualization of the walled city of Beirut (보존된 문서). E-Perimetron 2 (2): 5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