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 화친 조약
1. 개요
러일 화친 조약은 1855년 일본과 러시아 제국 간에 체결된 조약으로, 일본의 쇄국 정책이 약화되는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 조약은 쿠릴 열도에서 일본과 러시아의 국경을 이투루프 섬과 우루프 섬 사이로 확정하고, 사할린의 지위는 미정으로 남겨두었다. 또한, 하코다테, 시모다, 나가사키를 러시아 선박에 개방하고 러시아 영사의 주재를 허용했다. 조약 체결 이후 사할린 국경 문제는 일러 사할린 섬 가규칙과 사할린-쿠릴 교환 조약으로 해결되었다. 현재 북방 영토 문제와 관련하여 조약의 해석을 두고 논쟁이 있으며, 일본 정부는 이 조약 체결일인 2월 7일을 북방 영토의 날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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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러시아 -
크림 전쟁
크림 전쟁은 1853년부터 1856년까지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프랑스, 영국, 사르데냐 연합군 간에 벌어진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 쇠퇴, 러시아 남하 정책, 종교적 갈등이 원인이 되었으며, 1856년 파리 조약으로 러시아의 흑해 해군력 제한 등의 결과를 낳고 근대 간호 발전 등에 영향을 주었다. -
1855년 일본 -
안세이 대지진
안세이 대지진은 1854년부터 1860년 사이 일본에서 발생한 일련의 강력한 지진들로, 막부 말기의 사회 혼란을 가중시키고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사회 변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855년 일본 -
히다 지진
1858년에 발생한 히다 지진은 히다 국 시라카와고 지역에 산사태를 일으켜 도로 단절 및 가옥 파괴 등의 피해를 초래했으며, 특히 호키와키 촌에서는 민가 붕괴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
시모다시의 역사 -
미일 화친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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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다시의 역사 -
이나즈사촌
이나즈사 촌은 시즈오카현 가모군에 위치했던 촌으로, 1889년에 발족하여 1955년 시모다시로 합병되면서 폐지되었다.
2. 일본의 고립과 개항
도쿠가와 막부는 17세기 초부터 쇄국 정책을 추진하여 외국과의 교류를 제한했다. 네덜란드, 조선 통신사, 청나라와의 무역은 나가사키에서만 엄격한 통제 하에 이루어졌다. 쇄국 정책은 서구 열강의 침략과 기독교 확산, 그리고 유력 다이묘의 성장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쇄국 정책은 도전을 받게 되었다. 1844년 네덜란드 국왕 빌렘 2세는 일본에 쇄국 정책 철회를 권고하는 서한을 보냈다. 1846년 미국의 제임스 비들 제독이 개항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3. 푸탸틴의 파견과 협상
19세기 초, 러시아는 미국이 매튜 C. 페리 준장(Commodore (USN))이 이끄는 원정대를 통해 일본을 개항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러시아는 미국이 태평양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일본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것을 우려하여 극동에 사절단을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러시아 외무부 장관 카를 네셀로데는 예프피미 바실리예비치 푸탸틴 부제독을 사절단 대표로 임명했다. 원정에는 저명한 작가 이반 곤차로프가 포함되었으며, 이반 운코프스키가 지휘하는 팔라다가 기함으로 선정되었다. 곤차로프는 자신의 저서 프레가트 팔라다(1858)에서 항해와 협상 과정을 상세히 묘사했다.
팔라다는 1852년 10월 7일 크론슈타트를 출발하여 미국과 동등한 조건의 조약을 체결하고, 사할린과 쿠릴 열도에서 일본과 러시아 간의 국경을 획정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항해 도중 배가 원정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판명되어 새로운 프리깃함 다이아나가 파견되었지만, 페리의 흑선 함대는 푸탸틴이 홍콩과 보닌 제도 사이에 있는 동안 일본에 도착했다.
푸탸틴은 1853년 8월 21일, 에도 만 대신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푸탸틴은 페리와 달리 외교적 접근을 시도했다. 그는 일본의 법률과 러시아 황제의 바람을 존중하여 에도 대신 나가사키를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나가사키 부교는 러시아가 미국보다 협조적이며, 그들의 제국이 미국의 위협을 상쇄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푸탸틴의 조건을 수용할 것을 에도에 촉구했다. 그러나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의 사망과 후계 문제로 결정이 지연되었고, 실질적인 행정은 호타 마사요시가 이끄는 원로 회의 (로주)의 손에 맡겨졌다. 푸탸틴은 협상이 지연되자 1853년 11월 일본을 떠났다가 1854년 봄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푸탸틴은 1854년 11월 7일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그 사이 크림 전쟁이 발발했고, 영국 해군이 오호츠크 해와 나가사키 주변 해역에서 그의 함대를 수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팔라다의 문제로 그는 기함을 다이아나로 변경했다. 푸탸틴이 돌아왔을 때, 미국은 이미 1854년 초 가나가와 조약을 통해 일본을 개항시킨 후였다. 러시아 조약을 막기 위해 영국은 일본에 중립을 요구했고, 잘못된 번역으로 인해 1854년에 영일 화친 조약을 체결했다. 푸탸틴은 나가사키 대신 오사카 만을 선택했고, 교토와의 근접성 때문에 일본인들은 경악했다. 오사카 만에 2주 동안 머문 후, 푸탸틴은 시모다로 출항했다.
1854년 12월 22일, 푸탸틴은 시모다에서 가와지 도시아키라와 쓰쓰이 마사노리를 만나 협상을 시작했다. 푸탸틴은 교역권을 대가로 에토로후 섬을 일본에 양도하겠다고 제안했고, 일본 측은 캄차카가 일본에 속하므로 쿠릴 열도 전체가 일본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1854년 12월 23일, 안세이 도카이 지진이 발생하여 시모다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손상된 다이아나는 헤다로 수리를 위해 항해하려다 곧 침몰했다. 러시아 대표단은 일본에 갇혔고, 외교관들이 재협상을 하는 동안 러시아 선원과 기술자들은 일본 목수들과 협력하여 대표단이 러시아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헤다에 새로운 선박을 건조했다.
1855년 2월 7일, 러일 우호 조약이 시모다의 초라쿠지 절에서 체결되었다.
4. 시모다 조약의 체결과 내용
1854년 12월 23일에 발생한 안세이 도카이 지진으로 푸탸틴의 함대 (디아나 호)가 큰 피해를 입었지만, 협상은 계속되었다. 1855년 2월 7일, 시모다 조약(러일 화친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은 네덜란드어, 러시아어, 일본어, 중국어로 작성되었다.
이 조약은 나가사키, 시모다, 하코다테를 러시아 선박의 보급과 수리를 위해 개방하고, 이들 항구 중 한 곳에 영사를 주재하도록 했으며, 최혜국 대우를 부여했다. 일본과 러시아의 공식적인 국경은 에토로후 섬과 우루프 섬 사이로 설정되었으며, 사할린의 지위는 미정으로 남겨졌다. 이는 불평등 조약으로, 일본 내 러시아인의 치외 법권도 규정했다. 3년 후인 1858년에 체결된 러일 수호 통상 조약에서 최혜국 대우 조항은 쌍무적인 것으로 개정되었다.
4.1. 조약의 주요 내용
러일 화친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조항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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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조 |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 간의 상호 평화, 양국 국민과 재산의 안전을 보장한다. |
| 제2조 | 쿠릴 열도에서 일본과 러시아의 국경을 에토로후 섬과 우루프 섬 사이로 확정했다. 사할린의 국경은 확정하지 않고, 기존 관습을 따르기로 했다. |
| 제3조 | 하코다테, 시모다, 나가사키를 러시아 선박에 개항했다. |
| 제4조 | 조난된 선원에 대한 지원을 제공한다. |
| 제5조 | 시모다와 하코다테에서 물물 교환을 허용한다. |
| 제6조 | 시모다 또는 하코다테에 러시아 영사 설치를 허용한다. |
| 제7조 | 일본에 관한 모든 질문이나 문제는 일본 정부가 결정한다. |
| 제8조 | 재판권은 쌍무적으로 규정했다. 즉, 양국 국민은 상대 국가에서 자국법의 적용을 받는다. |
| 제9조 | 러시아에 편무적 최혜국 대우를 부여했다. (일본은 러시아에 부여 X) |
| 제12조 | 조약은 서명 후 18개월 이내에 비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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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협상 초기에는 사할린의 국경을 확정하려 했으나, 양측의 주장이 달라 국경을 확정하지 못했다. 나가사키 협상에서 러시아는 아니바 만 주변을 일본 영토로, 나머지를 러시아 영토로 하자고 제안했고, 일본은 북위 50도 선을 주장했다. 시모다 협상 직전, 가와지는 일본의 회소가 아니바 만 주변뿐이고 탐험가 정도만 들어갔으므로 북위 50도로 나누자는 안을 제시했지만, 불모지인 사할린을 버려도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다.
시모다 협상 중 1854년 12월 23일 안세이 도카이 지진 쓰나미로 러시아 함선 디아나가 침몰하여 협상이 중단되었다. 재개 후, 사할린에 국경을 두지 않고 일본인과 에조 아이누 거주지는 일본령으로 하기로 합의했다. 가와지는 에조 아이누와 아이누를 구분할 수 있어 혼란이 없을 것이라 설명했다. 이후 러시아 측 제안으로 "지금까지와 같다"라고 본문에 명시하여 사할린 국경 문제는 1875년 사할린・지시마 열도 교환 조약으로 일단락되었다.
5. 조약 체결 이후
푸탸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후 백작 작위를 받았지만, 일본과의 상업 협정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후 1857년과 1858년에 다시 일본을 방문하여 새로운 조약을 협상했고, 이를 통해 러시아의 상업적 권리와 치외법권을 확대했다. 1855년 시모다 조약은 1858년 러일 수호 통상 조약으로 개정되어 최혜국 대우 조항이 양국 모두에게 적용되도록 변경되었다.
안세이 도카이 지진의 쓰나미로 인해 러시아 함선 디아나가 크게 파손되어 침몰하면서 협상은 일시 중단되었다. 러시아 대표단은 일본에 발이 묶였고, 외교관들이 재협상을 진행하는 동안 러시아 선원과 기술자들은 일본 목수들과 협력하여 대표단이 러시아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헤다에 새로운 선박을 건조했다. 1855년 4월 14일, 스쿠너 헤다가 진수되었고, 푸탸틴은 1855년 5월 8일에 러시아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일본 정부는 이후 헤다를 모델로 하여 6척의 배를 추가로 건조하도록 명령하여, 일본의 서구식 조선 기술 발전에 기여했다.
조약 협상 당시 사할린의 국경을 확정할 예정이었으나, 양국의 주장이 대립하여 국경은 확정되지 못했다. 이후 사할린 국경 문제는 게이오 3년(1867년)의 일러 사할린 섬 가규칙을 거쳐, 메이지 유신 이후 1875년(메이지 8년) 5월 7일의 사할린·쿠릴 교환 조약을 통해 일단락되었다.
6. 북방 영토 문제와 조약의 연관성
북방 영토 문제에서 쿠릴 열도의 범위는 쟁점 중 하나이다. 일본 정부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 쿠릴 열도를 포기했지만, 하보마이, 시코탄은 홋카이도의 일부로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후 쿠나시르, 이투루프에 대해서도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이는 1946년 2월 소련의 일방적인 병합 선언과 한국 전쟁 등 동서 진영 간 긴장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소련은 미국의 남서 제도·타이완·오가사와라 제도에 대한 유엔 신탁 통치 형태의 실효 지배를 비난하고, 일본이 포기한 구 영토(남 사할린 및 쿠릴)의 귀속을 의도적으로 제외한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영미 안을 비난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에서 요시다 시게루는 쿠나시르·이투루프의 소련에 의한 수용을 일방적이라고 비난하고, 하보마이·시코탄은 홋카이도(일본 본토)라고 설명했다. 그 근거로 러일 화친 조약 제2조의 평화적인 국경 확정을 제시했다.
6.1. 조약 원문의 해석 차이
러일 화친 조약 협상은 네덜란드어로 진행되었으며, 네덜란드어와 러시아어 조항은 일치하지만, 일본어 조항은 제2조의 쿠릴 열도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러시아어와 네덜란드어 조항에는 "나머지, 북쪽의, 쿠릴 열도"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일본어 조항에는 "그 북쪽의 쿠릴 열도"라고 되어 있어 "나머지"라는 단어가 빠져 있다. 이 때문에 일본어 조항만으로는 쿠릴 열도의 범위가 우루프 섬 이북으로 한정되는 것처럼 해석될 수 있다.
와다 하루키 등은 일본 정부가 러시아어와 네덜란드어 원문을 고려하지 않고 일본어 조문만을 근거로 이러한 해석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1992년, 일본 정부는 러시아어 팸플릿 '일본의 북방 영토'를 발행하여 러시아에 배포했다. 이 팸플릿에서 일본 정부는 북방 영토 문제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 포기한 쿠릴 열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러일 화친 조약 제2조의 일본어 조문을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실제 조약과는 다른 조문을 작성했다는 논란이 있다.